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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33人의 파워우먼|여성동아

PEOPLE

여성동아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33人의 파워우먼

金明熙 記者 두경아 프리랜서 記者

2023. 10. 31

開化期 女性運動家부터 獨立運動家, 韓國 文化의 格을 높인 作家와 디자이너, 寒流를 이끈 大衆文化의 아이콘까지 ‘여성동아’가 90年間 만난 33人의 빛나는 女性. 

1. 에델 瓦鼓너 언더우드
(1888~1949) 1933年 2月號

女性 敎育과 貧民 救濟 活動을 펼친 美國人 敎育家. 1885年 朝鮮에 入國해 연세대의 前身 연희전문학교를 設立한 宣敎師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元杜尤)의 며느리이자 연희전문학교 總長을 지낸 怨恨頃의 夫人이다. 美國 미시간 出身인 그는 10歲 때 父母를 여의고 苦學으로 敎師 工夫를 마쳤다. 1912年 서울外國人學校 敎師로 招聘돼 韓國에 온 그는 怨恨頃과 結婚, 연희전문학교와 李花女子專門學校 等에서 英語와 心理學 等을 가르치는 한便 많은 奉仕活動을 펼쳤다. 그는 ‘新家庭’ 1933年 2月號 ‘내가 萬一 朝鮮 女子라면’이라는 寄稿에서 “내가 萬一 朝鮮 女子라면 朝鮮에서 자라는 가장 重大한 責任을 지닌 學生들을 위해 女學生 寄宿舍를 經營하겠다”고 밝혔다. “朝鮮에서 그 存在가 가장 貴하고 重한 女學生들을 위해 큰 寄宿舍를 지어 性敎育, 禮義, 生活 方法 等을 가르쳐 모든 方面으로 完全한 人格을 形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運動으로 健康을 다지고 判斷力을 키워 學校 卒業 後 거리낌 없이 社會에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內容을 보면 그가 韓國 女性의 敎育에 얼마나 愛情과 熱情이 컸는지 斟酌된다. 1942年 日帝에 依해 追放됐다가 1947年 다시 돌아와서도 奉仕活動을 이어가던 그는 1949年 共産主義 테러 리스트의 襲擊으로 死亡했다.

2. 나혜석
(1896~1948) 1933年 5月號

西洋畫家이자 作家 그리고 近代的 與圈論을 펼친 우리나라 最初의 페미니스트. 1927年 外交官이던 男便 김우영과 함께 世界 旅行을 하며 西歐 女性運動과 女性의 地位 等에 눈떴다. ‘某(母) 된 감상기’(1923)라는 글에서 “子息이란 母體의 살點을 떼어가는 惡魔”라고 表現하는가 하면 ‘離婚 告白場’(1934)을 통해서는 自身의 結婚과 離婚에 對해 率直히 털어놓으며 朝鮮 社會 家父長制의 矛盾을 批判했다. 羅蕙錫은 어머니의 날 特輯으로 꾸며진 ‘新家庭’ 1933年 5月號에 ‘파리의 어머니날’이라는 에세이를 寄稿했다. 파리에서 머물던 主人집의 風景을 傳하며 아침 食事 後 家族들이 各自 먹은 그릇을 내다 놓으며 “고마워요 어머니”라고 感謝를 殿下더란 대목에선 부러움이 묻어난다. 當時 羅蕙錫이 崔麟과의 파리 不倫 스캔들 以後 김우영과 離婚하고 서울에서 머물며 美術 作業에 沒頭할 때였다. 같은 號 ‘協戰(書畫協會展)·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出品한 女流 畫家 訪問記’에도 羅蕙錫이 登場한다. 記者가 直接 羅蕙錫의 作業室을 訪問해 近況 인터뷰를 한 것이다. “作業室이 조용하고 밝아 그림 그리기에 좋겠다”는 記者의 質問에 羅蕙錫은 “네. 그러기에 날마다 그림이나 그리지요. 이것도 只今 막 그리는 것인데 肖像畫이지요”라고 答한다. 記者는 自身의 그림을 쓰다듬는 羅蕙錫의 모습이 쓸쓸하고 맥없다고 表現한다. “유럽 旅行이 美術 作業에 도움이 되고 있냐”는 質問에는 “藝術을 鑑賞하는 눈이 훨씬 높아지고 理解力이 豐富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어려움에 處했을 때 마음을 돌리는 힘이 생겨요”라고 答한다. 그림에만 沒頭하는 그에게 孤獨하지 않은지 묻자 羅蕙錫은 “쓸쓸한 것도 一種의 즐거움”이라면서 “美術學校를 經營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나 世上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答한다. 羅蕙錫은 그해 서울 鍾路에 女子美術學士를 開設하고 直接 女學生들을 指導했으나 經營難으로 持續하지 못하고 門을 닫았다.

3. 現德臣
(1896~1963) 1935年 11月號

獨立運動家이자 醫師인 現德臣은 梨花學堂 卒業 後 日本 東京女子醫科大學에서 留學하고 돌아와 東大門婦人病院(이화여대病院)에서 勤務하며 女性 保健에 獻身했다. 日本 留學 時節이던 1919年 2·8獨立宣言 資金을 보탰으며, 日本 도쿄 朝鮮 YMCA會館에서 開催된 2·8獨立宣言에 參與해 逮捕되기도 했다. ‘新家庭’ 1935年 11月號에 寄稿한 ‘女醫師가 되기까지의 苦心機’에는 그가 醫師가 되기로 한 理由가 나온다. “어떻게 하면 朝鮮 社會, 朝鮮 女性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苦心 끝에 敎育界로 나갈 생각도 했으나, 病이 들어서 죽을지언정 男子 醫師에게 몸을 보이려 하지 않는 朝鮮 女性들을 위해 奉仕하고자 醫師가 되기로 決心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세브란스를 세운 에비슨 博士와 같이 朝鮮 女子들이 醫學을 배워 그들로 하여금 女性 醫學 敎育을 하도록 하고 싶다”는 뜻도 밝힌다. 寄稿에는 “解剖學 授業 後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이것이 果然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懷疑도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以後 그는 光州 현덕신병원을 開院하고 醫療 活動뿐 아니라 文盲退治, 公娼 廢止 運動, 保育 活動 等 多樣한 分野의 女性運動을 展開했다.

4. 박자혜
(1895~1943) 1934年 1月號·1936年 5月號

獨立運動家이자 歷史學者인 丹齋 申采浩의 否認. 總督府議員 看護師였던 박자혜는 3·1運動 當時 負傷者들을 看護한 것을 契機로 看護師들의 獨立運動 團體인 間迂廻를 設立했다. ‘新家庭’은 1934年 1月號에 鍾路警察署 爆彈 投擲 後 自決로 生을 마감한 金相玉의 否認 정진주 女史와 獨立運動 中 逮捕돼 뤼순 監獄에 收監돼 있던 신채호 夫人 박자혜 女史를 찾아 獨立運動家 夫人들의 辛酸한 새해맞이를 傳한다. 産婆로 일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던 朴 女史는 “(男便이) 6年 前 收監됐는데, 어린 것이 보고 싶다 하여 한 番 찾아뵌 적이 있다. 3年 前 마지막 便紙를 받았는데 ‘잘 있소. 몸 健康하오’ 程度의 內容이 다였다”며 記者에게 되레 先生의 安否를 묻는다. “面會를 한番 가야지 않겠냐”는 質問에는 “貴社에서 記事 材料도 얻을 兼 派遣해주시면 材料는 틀림없이 가져다 드리겠다”고 弄談으로 應酬한다. ‘新家庭’은 1936年 2月 申采浩 先生 獄事 석 달 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慰勞하고자” 다시 한番 朴 女史를 訪問한다. 記者는 “부엌도 마루도 없는 아래채 單칸房. 너무나도 쓸쓸하게 지내는 女史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기 어려웠다”고 적고 있다. 朴 女史는 이날 인터뷰에서 “15年 前 宿命을 나와 總督府病院 産婆科에서 工夫하던 中 己未運動에 關聯되어 海外로 나가 무엇을 해본다는 것이 結局 그와 結婚하게 되었다. 겨우 3年 살다가 나만 어린 것들을 데리고 歸國해 10餘 年을 고단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先生의 생각을 알기에 남들처럼 재미있는 살림을 다시 하리라고는 믿지 않았고, 다만 끔찍한 消息이 없기만을 晝夜로 祈禱했다”고 吐露했다. “臨終하는 모습을 보셨느냐”는 質問에는 “電報를 받고 가보니 脈搏은 있으나 意識은 없었다. 監獄 規則 때문에 1時間 동안 面會하고 旅館에 있노라니 絶命하셨다는 消息이 왔다. 차디찬 바닥에서 돌아가신 것이 徹天之恨”이라고 答했다.

5. 윤복희
(1946~) 1968年 6月號

1960年代 미니스커트를 流行시킨 大衆文化의 아이콘. 6歲 때 뮤지컬 ‘크리스마스 膳物’을 통해 俳優로 데뷔했으며, 1967年 ‘웃는 얼굴 多情해도’라는 曲을 發表하면서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켰다. 女性의 짧은 치마를 禁忌視하던 當時 風潮에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單純한 衣服이 아닌 自由의 象徵이었다. ‘여성동아’는 1968年 6月號에 하와이, 뉴욕, 시카고, 라스베이거스 等 美國 투어를 마치고 1年 만에 돌아온 윤복희 記事를 揭載했는데, 텍사스에서는 재즈 歌手이자 트럼펫 演奏者인 루이 암스트롱과 TV쇼에 出演해 好評을 받았다고. 特히 ‘여성동아’는 當時 윤복희에 對해 “獨特한 바이브레이션과 보사노바 唱法이 魅力的이며, 얼굴 表情과 몸의 움직임이 크다. 德分에 듣는 音樂에서 보는 音樂으로 擴張시켰으며, 新世代의 呼應이 크다”고 分析했다. 윤복희는 인터뷰에서 “渾身의 힘을 다해 舞臺에 서기 때문에 公演이 끝나면 마라톤 競走를 한 것처럼 脫盡한다”고 밝혔다. 미니스커트에 對해선 “美國 女性들이 모두 입어서 따라 한 것일 뿐”이라고 시크하게 말했다.



6. 홍숙자
(1933~) 1969年 2月號

大韓民國 最初의 女性 外交官 홍숙자는 이화여대 大學院에서 政治學 碩士學位를 받았다. 美國에서 留學하던 1958年 外務部 長官 補佐官을 始作으로 뉴욕州 總領事館 副領事, UN 代表部 3等 書記官 等을 歷任했으며, 令夫人 陸英修 女史의 通譯을 맡기도 했다. 그는 ‘여성동아’ 1969年 2月號 ‘女子 外交官으로서의 10年’이라는 寄稿 글에서 “請託에 勇氣를 낸 理由는 女性들 進出이 없는 分野를 開拓, 試圖하고 모든 것을 忍耐하며 10年間 勤務해온 나의 발자취가 女性 先後輩들의 社會 進出에 刺戟劑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고 밝혔다. 外務部 就職 當時 이미 結婚해 子女가 있었던 그는 “女性과 旣婚이라는 二重 障壁 앞에 挫折하기도 했다”고 告白하는가 하면 “外國은 女性 먼저라는 認識이 剛하다”며 韓國에서의 女性의 地位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外國의 貴賓 夫人을 遂行하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은 人間으로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工夫해야겠다 생각했다”고도 言及했다. 홍숙자는 1987年 直選制 改憲 後 처음 實施된 第13代 大統領 選擧에 出馬, 大韓民國 憲政 史上 最初 女性 大統領 候補로 남았다.

7. 박완서
(1931~2011) 1970年 11月號

어두운 現代史를 따뜻한 文體로 어루만진 韓國을 代表하는 文人 박완서는 1970年 11月 ‘여성동아’ 女流 長篇小說 公募에서 ‘羅牧’으로 當選돼 登壇했다. 當時 應募作은 33篇이었으며, 賞金은 50萬 원이었다. 當選 所感에서 “글을 쓰는 時間이 無限히 幸福하다. 그래서 ‘羅牧’을 쓰는 동안의 즐거움이 賞을 받는 榮光보다 더 크다”고 말한 作家는 以後 ‘목마른 季節’ ‘휘청거리는 午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等 15篇의 長篇小說과 100篇이 넘는 短篇小說, 15篇의 散文集과 童話集 等을 펴내며 韓國 文壇의 巨木으로 자리매김했다. 先生 他界 後 ‘여성동아’ 長篇小說 公募展을 통해 作家로 登壇한 女性東亞 文友會員들은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라는 追慕집을 펴내 後輩 作家들에게 親庭 엄마처럼 푸근하게 베풀었던 故人을 기렸다. 한수경 作家는 “글쓰기에서만큼은 기대고 투정하고 드러내놓고 글 몸살을 앓아도 慰勞해줄 만큼 그 품이 크고 아늑하게 느껴졌다”고 적었다. 朴 作家의 맏딸인 好圓熟 作家는 先生 他界 10週期를 맞아 ‘여성동아’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다. 頭腦가 明晳한 분이었기 때문에 助言을 求하는 이웃들에게 도움도 많이 주셨고, 살면서 自身의 생각을 끊임없이 바꿔나가셨다. 어머니가 참 크게 느껴졌다”고 回顧했다.

8. 김지미
(1940~) 1983年 6月號

1957年 17歲에 데뷔해 350篇이 넘는 映畫에 出演하며 1960~70年代 銀幕을 주름잡은 主人公. ‘여성동아’ 1983年 6月號에는 홍성기 監督, 俳優 최무룡, 歌手 나훈아와의 結婚 및 離婚으로 ‘韓國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리던 김지미의 深層 인터뷰가 실렸다. 나훈아와 離婚한 지 1年이 지난 時點으로, 그의 私生活에 對한 大衆의 關心이 最高潮에 達할 때였다. 인터뷰는 서울 정릉에 位置한 그女의 藥 660㎡(200坪) 大邸宅에서 進行됐다. 김지미는 인터뷰에서 “나 自身에게 忠實하게 살아왔지만 사람들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캔들 많은 女俳優로 보려 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쉽지 않다”고 告白했다. 俳優 데뷔의 契機에 對해선 “鳴動에서 ‘黃昏列車’ 女主人公을 物色하던 김기영 監督 눈에 띄어 映畫에 出演하게 됐다. 金 監督이 집에까지 찾아와 父母님을 說得했다”고 밝혔다. 길거리 캐스팅의 元祖였던 셈. 그는 “映畫를 찍는 게 참 좋았다. 사람들이 모이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하는 게 재밌었다”고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홍성기 監督과의 運命的인 만남, 破鏡 後 救援者처럼 나타난 俳優 최무룡과의 사랑, 姦通罪로 告訴當한 顚末, 아이를 낳던 날 새벽까지 비를 맞고 撮影한 後 아침 7時에 집에 들어와 9時에 出産한 事實, 아픈 아이를 病院에 두고 다시 映畫 作業을 나가야 했던 일 等 自身의 過去事를 淡淡하게 털어놓는다. 최무룡은 김지미와 訣別 當時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有名한 말을 남겼다. 김지미는 “홍성기 監督, 최무룡과는 愛情에 더해 같은 映畫人으로서의 友情이 있었다. 헤어진 以後에도 웃으며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年下의 歌手 나훈아와의 關係에 對해선 “始作부터 잘못됐다. 實際와 다른 誤解와 所聞, 나의 固執 때문에 進展도 退步도 없는 異常한 關係를 6年이나 持續했다”고 告白했다.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質問에는 “사랑은 純白의 캔버스 같은 것이다. 앞으로는 映畫가 내 사랑의 對象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미는 인터뷰 以後에도 俳優로 왕성히 活動했으며, 1986年에는 映畫社 지미필름을 設立하고 製作者로 나서기도 했다.

9. 박경리
(1926~2008) 2005年 1月號

인터뷰하지 않기로 有名한 作家 박경리가 ‘여성동아’ 2005年 1月號에 登場했다. 1969年 執筆을 始作해 1994年 完刊한 大河小說 ‘토지’가 SBS 드라마로 만들어져 放映된 直後였다. 그는 여러 次例 “내가 幸福했더라면 文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토지’ 執筆을 始作했던 때는) 個人의 不幸도 不幸이지만 우리나라 全體가 不幸했다. 6·25를 겪고 얼마 안 된 時期地 않나. 나는 戰爭未亡人이었다. 아이 데리고, 父母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다. 不幸에서 脫出하고 싶다는 所望이 있기 때문에 글을 썼다”고 敷衍 說明한다. “統營에서 魚市場에 들렀는데 장사하는 분들이 全部 握手를 請하더라. 내가 너무 神奇해 作家인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冊을 읽었다’고 하더라. 百貨店이나 休憩所 같은 데 가서도 人事를 받는다. 飮食店 구석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뭐 한 가지가 더 나온다”며 作家로서의 幸福을 言及하기도 했다. 生前 박경리 先生은 直接 옷 해 입고, 텃밭에 作物을 심어 食材料로 使用하고, 環境團體 共同代表를 맡을 程度로 生命運動에 積極的이었다. 그는 “生命과 生存이 첫째고 政治나 藝術은 둘째다. 生命과 生存 以上의 眞實은 없다. 그게 있음으로써 文學도 있는 거다. 生命이 主人이 되는 새로운 思潮가 나와야 한다”며 生命運動의 重要性을 披瀝했다.

10. 李美卿
(1958~) 2006年 11月號

고(故) 이맹희 CJ그룹 & 名譽會長의 長女 李美卿 CJ그룹 副會長은 CJ ENM을 世界的인 콘텐츠 企業으로 키운 ‘작은 巨人’으로 불린다. 그는 CJ그룹을 韓國 文化를 알리는 國際的 브랜드로 만든 功勞를 認定받아 2006年 世界女性賞을 受賞했다. 아시아人이 世界女性賞을 殊常한 건 이 副會長이 처음이었다. 그는 ‘여성동아’ 2006年 11月號에 실린 인터뷰에서 엔터테인먼트 分野의 일을 하게 된 契機에 對해 “어릴 때부터 映畫를 좋아했다. 보스턴에서 살았던 年 동안 一週日에 한두 番은 꼭 映畫를 보러 다녔다”면서 “그 過程에서 映畫 自體뿐 아니라 製作 시스템, 監督의 哲學 같은 좀 더 專門的인 分野에까지 關心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또 ‘여성동아’ 2014年 3月號(‘블룸버그 마케츠’ 인터뷰 認容)에서 그는 “할아버지에게 事業은 單 한 番도 便하게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産業을 일궈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國家에 寄與하는 것이 目的이었다”면서 “그런 가르침은 나와 동생의 DNA 속에 새겨져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경 副會長은 우리나라 映畫史上 처음으로 아카데미 作品賞과 칸映畫祭 黃金棕櫚賞을 受賞한 映畫 ‘寄生蟲’을 비롯해 칸映畫祭 監督賞 受賞作 ‘헤어질 決心’의 總括 프로듀서를 맡았다. 지난해에는 韓流의 글로벌 擴散과 文化産業 發展에 寄與한 功勞를 인정받아 國際 에미賞 功勞賞을 受賞했다.

11. 김은숙
(1973~) 2006年 12月號

김은숙은 ‘파리의 戀人’ ‘프라하의 戀人’ ‘시크릿 가든’ ‘紳士의 品格’ ‘相續者들’ ‘太陽의 後裔’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더 글로리’ 等 話題作을 잇달아 선보인 우리나라 代表 드라마 作家다. ‘여성동아’ 2006年 12月號에 실린 그와의 인터뷰는 그의 珠玉같은 드라마 사이 큰 反響을 일으키지 못했던 極少數의 作品 中 하나인 ‘연인’ 放映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當時 그는 結婚한 뒤 막 아이를 出産한 狀況이었다. 그는 “實際 내 모습이 女主人公 캐릭터와 비슷하다”면서 自身의 말套와 性格이 主人公에게 그대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게다가 正義롭고, 사내답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보이지만 가끔 툭툭 내뱉는 말로 相對를 사로잡는 男子主人公에는 男便의 모습이 投影됐다. 그는 “事實 男便이 그런 스타일”이라고 告白했다. ‘프라하의 戀人’ 男子主人公 최상현은 바로 金 作家 男便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臺詞를 맛깔나게 쓰는 祕訣에 對해 “드라마 話法을 正式으로 배우지 않아서일 것”이라면서 “그래서 오히려 常套的이지 않아 新鮮함을 주었던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12. 강수연
(1966~2022) 2007年 3月號

滿 4歲 때 演技者로 데뷔해 大部分의 삶을 카메라 앞에서 보낸 강수연은 映畫 ‘씨받이’로 1987年 베니스映畫祭 女優主演賞을 受賞한 大韓民國 最初의 ‘월드 스타’이기도 하다. 2007年 3月 MBC 週末드라마 ‘문희’로 안房劇場에 컴백하며 進行한 인터뷰에서 “演技 生活 40年 가까이 된 只今도 煙氣는 如前히 어렵고 힘들다”고 告白한다. 그럼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고 묻자 “그냥 갖고 산다. 演技는 그저 熱心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熱心히 延期하고, 熱心히 作品 만들고… 그 外에 다른 方法은 없다”고 答한다. 앞으로의 計劃에 對해서도 “演技 以外에 다른 計劃은 全혀 없다. 數에 弱해서 장사도 못하고, 게을러서 사람 管理도 못하니까 다른 일을 하면 亡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演技를 했지만, 앞으로도 40年은 더할 計劃이다. 그래서 正말로 예쁜 할머니 俳優가 되는 게 目標”라고 할 만큼 俳優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 그는 2015年 釜山國際映畫祭 共同 執行委員長으로 活動하는 等 映畫에 獻身했다. 그러나 끝끝내 自身의 바람처럼 할머니가 되지 못하고 2022年 享年 56歲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13. 우영미
(1959~) 2008年 1月號

솔리드옴므와 우영미를 통해 韓國 패션의 可能性을 擴張해온 디자이너. 우영미는 2008年 1月 솔리드옴므 론칭 20周年, 파리 進出 6周年을 맞아 ‘여성동아’와 인터뷰했다. “6年 前 파리 컬렉션 데뷔를 했던 瞬間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鮮明하다. 처음 파리에 到着했을 때 나는 東洋에서 온 新人 디자이너에 不過했다. 텃勢가 甚한 곳이기 때문에 現地 디자이너보다 10倍는 더 熱心히 한 것 같다”고 回顧했다. 솔리드옴므의 디자인 哲學에 對해선 “나는 男性의 몸이 女性의 몸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男性의 몸에 어울리는 옷은 感覺的인 컬러와 심플한 디자인만으로도 充分하다. 앞으로도 簡潔한 線과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男性을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럽게 表現할 計劃”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以後 우영미는 乘勝長驅를 거듭, 2011年 國內 브랜드 最初로 ‘파리衣裳組合’ 正會員이 됐으며, 2020年에는 LVMH그룹이 所有하고 있는 파리 棒마르셰百貨店 男性觀 賣出 1位를 차지했다. 지난 9月 파리 名品가인 생토노레에 自身의 이름을 딴 브랜드 우영미 플래그십스토어를 연 그는 “全 世界 모든 럭셔리의 激戰地라고 할 수 있는 생토노레에서 잘 자리 잡아 韓國을 代表하는 하이패션 브랜드로 우뚝 서겠다”고 다짐했다.

14. 최진실
(1968~2008) 2008年 4月號

안타깝게 生을 마감한 지 15年이 지난 只今까지도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大衆文化의 아이콘. ‘嫉妬’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等 그의 出演作은 거의 모두 높은 視聽率을 記錄했다. 金口羅와 함께 進行을 맡았던 토크 프로그램 ‘최진실의 眞實과 球라’ 錄畫가 끝나고 한밤中에 進行된 ‘여성동아’ 2008年 4月號 인터뷰는 그가 世上을 떠나가 前 마지막으로 應한 인터뷰이기도 하다. 內容은 當時 7歲, 5歲이던 子女 歡喜와 준희에 對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건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四季節이 있고 自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어떻게 보면 아주 些少한 것들이다. 그런데 精神없이 살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灰色 아스팔트에 갇혀 父母 없이는 아무 데도 못 나가는 怯쟁이가 돼 있더라. 다들 學院 다니기에 바쁘다 보니 놀이터에는 親舊도 없고…. 나는 早期 英才敎育이니 注入式敎育이니 하는 것들을 選好하는 便이 아닌데 아이들에게 親舊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學院에 보내야겠더라. 已往 보낼 거면 내가 발품을 팔아 알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 一一이 어떤 곳인지 確認한 뒤 安全하고 좋은 곳으로 골라 學院 스케줄을 짜주었다”고 言及하는가 하면 “환희에게 直接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또박또박 글씨를 써주고 歡喜가 따라 쓰게끔 했는데 그래서인지 환희 글씨體가 내 글씨體와 비슷하다”고도 말했다. 인터뷰 當時 서울家庭法院에 아이들의 姓과 本을 自身의 姓과 本으로 바꿔달라고 申請한 事實이 알려져 注目받기도 했는데, 이에 對해 “나는 대단한 페미니스트度 아니고 社會를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巨創한 目標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엄마의 마음’에서 始作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처음 始作할 때는 알려지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已往 始作한 일이니 잘되어서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께 작으나마 希望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15. 이길여
(1932~) 2008年 12月號

이길여 街千길財團 會長은 1978年 女醫師로서 國內 最初로 醫療法人을 設立한 醫療人이다. 財團 傘下에 있는 嘉泉大學校에서 總長職을, 歌天文化財團·嘉泉大 길병원에서 名譽理事長職度 맡고 있다. ‘여성동아’는 2008年 12月號에 自敍傳 ‘懇切히 꿈꾸고 뜨겁게 度傳해라’를 出刊한 이길여 會長의 인터뷰를 실었다. 自敍傳에는 ‘깡촌 少女 이길여’의 成長期와 ‘젊은 産婦人科 醫師 이길여’의 挑戰棋, 醫療 惠澤 擴大를 위한 努力 等의 이야기가 담겼다. “醫療事業은 奉仕를 겸해야 한다”는 굳은 뜻을 갖게 된 契機에 對해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에게 德을 베풀면 後代에 받는다’고 하셨다”면서 “나는 子息이 없으니, 職員들의 子女가 나중에 다 福 받을 거 아니냐”고 말했다. 自身의 成功 祕訣로 “熱情”을 꼽는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서도 할 일을 計劃하고 떠올리면 意欲이 넘친다고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좋은 아이디어를 메모紙에 적어놓기도 한다는 그는 “좋은 아이디어는 瞬間 왔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젊음의 祕訣은 “每事에 좋게 생각하는 習慣”에 있다고 傳한다. 91歲인 이길여 會長은 올해 嘉泉大 祝祭에서 ‘江南스타일’ 댄스를 춘 映像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公開되면서 ‘最高齡 동안女’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6. 강수진
(1967~) 2008年 12月號

國立발레團 團長을 4連任 中인 강수진은 世界 5代 발레團 中 하나인 獨逸 슈투트가르트 발레團에 1986年 最年少 나이로 入團했으며, 2002年 슈투트가르트 발레團 終身會員이 됐다. 1999年에는 東洋人 最初로 발레界의 아카데미賞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受賞했다. 또한 獨逸 政府가 最高 丈人 藝術家에게 附與하는 ‘캄머탠저린(宮廷舞踊가)’, 獨逸 바덴뷔르템베르크 州政府의 功勞 勳章을 받았다. 49歲가 되던 해인 2016年 ‘오네긴’을 마지막으로 隱退했다. ‘여성동아’ 2008年 12月號에는 강수진 國立발레團 團長 就任 1年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團長으로서의 時間을 돌아보며 “團員들이 어떤 作品이든지 興味를 가지고, 自身이 發展하는 걸 느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第一 기쁘다”고 말했다. ‘강수진’ 하면 한때 話題가 됐던 굳은살이 박인 발 寫眞이 떠오른다. 그는 발레리나 時節을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練習밖에는 없었다”면서 “그렇게 하니까 結局은 되더라”는 말을 들려줬다. 努力 以外의 것들도 重要했다. 그는 “모나코 王立발레學校의 마리카 校長先生님은 韓國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때 저를 붙잡아주셨다”면서 “제게 타고난 것이 있다면서 그것은 練習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17. 지춘희
(1954~) 2009年 1月號

지춘희는 우리나라 頂上級 디자이너로, 1979年 미스地콜렉션을 오픈한 以來 只今까지 名聲을 이어오고 있다. 沈銀河, 고현정, 황신혜, 최지우 等 當代 最高 스타가 그의 옷을 입고, 패션쇼를 열면 언제나 名士들이 찾아와 客席을 가득 메운다. ‘여성동아’ 2009年 1月號에 紹介된 디자이너 지춘희 인터뷰는 그의 靈感의 源泉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지춘희는 “내게 디자인은 生活”이라면서 “‘뭘 하겠다’는 意圖가 많으면 科해진다. 어느 날 문득, 平素 사는 동안 내 안에 녹아 있던 모든 것들이 隻 나올 때, 그때 옷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靈感을 얻기 위해서 冊을 많이 읽는다. 一週日에 열 卷 程度다. 그는 “小說을 많이 읽고 旅行冊도 좋아한다”면서 “每日 아침 新聞도 다섯 種類를 읽는다”고 말했다. 디자이너의 重要한 資質로 ‘테크닉’보다 ‘變化를 좋아하는 氣質’을 꼽는 그가 唯一하게 固守하는 原則은 ‘女子다움’이었다. 지춘희는 “女子다움이란 부드러움, 따뜻함, 感受性 같은 것일 것”이라면서 “일을 할 때 熾烈하게 매달리는 便이지만, 女子로서 갖고 있는 感性만은 잃지 않으려고 努力한다”고 밝혔다.
지춘희는 如前히 最頂上 디자이너로 사랑받고 있다. 그는 2020年 서울패션위크 名譽 디자이너로 選定된 後 2021 S/S 서울패션위크 오프닝을 裝飾했다.

18. 尹汝貞
(1947~) 2009年 2月號

尹汝貞은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俳優다. 1966年 TBC 3期 公採 탤런트로 데뷔해 1971年 드라마 ‘張禧嬪’으로 人氣를 누렸고, 같은 해 김기영 監督의 映畫 ‘化女’로 注目받았다. 以後 結婚과 離婚 等 個人事로 空白期를 가졌다 復歸해 ‘사랑이 뭐길래’ ‘沐浴湯집 男子들’ ‘넝쿨째 굴러온 當身’ 等 다양한 드라마에 出演하는 한便, 映畫 ‘下女’ ‘돈의 맛’ ‘季春할망’ ‘미나리’ 等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平素 인터뷰 안 하기로 有名했던 그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世上’ 終映 後 ‘여성동아’ 2009年 2月號 인터뷰에서 率直하고 愉快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自身을 “일부러 좋은 사람으로 包裝하지는 말아달라”는 말로 始作한 인터뷰는 그間의 演技 人生과 아들 이야기까지 다양한 主題로 이어졌다. 그는 롱런할 수 있는 祕訣에 對해 “재주는 젊었을 때 잠깐 눈에 띄는 거 같다. 正말 나를 維持해주는 건 努力일 것”이라고 말하며 演技者에게 必要한 資質에 對해 “暗記力, 集中力, 觀察力, 賃金協商力”이라는 明快한 答을 들려줬다. 그는 또한 “내가 危機를 겪으면서 느낀 건, 아무 말도 慰勞가 안 됐다”면서 只今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견뎌라. 견디면 時間이 가더라”는 慰勞의 말을 傳했다. 尹汝貞은 2021年 映畫 ‘미나리’의 荀子 逆으로 美國俳優組合賞 映畫 部門 最優秀 女優助演賞, 英國아카데미映畫賞(BAFA) 女優助演賞, 第93回 아카데미 女優助演賞을 受賞하며 世界的인 俳優 班列에 올랐다.

19. 조수미
(1962~) 2011年 10月號

조수미는 우리나라를 代表하는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聲樂家다. 1986年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劇場에서 公演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女主人公 질다 役으로 데뷔했다. 以後 이탈리아 밀라노라스칼라, 英國 코벤트가든, 뉴욕 메트로폴리탄, 프랑스 바스티유 等 世界 頂上級 오페라劇場 公演에 主役으로 出演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데뷔 25周年 맞아 自身의 音樂 旅程을 整理하며 ‘리베라’라는 音盤을 냈을 때 이루어졌고, 이 內容은 ‘여성동아’ 2011年 10月號에 실렸다. 조수미는 自身에 對해 “나처럼 徹底하게 舞臺 안팎의 모습이 다른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라면서 “舞臺에서는 音樂的으로나 視覺的으로 剛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지만, 일을 떠나서는 平凡한 普通 女子”라고 紹介했다. 그는 大韓赤十字社 親善 大使로 活動하며 慈善 公演을 열고, 低所得層 어린아이들을 위해 公演料를 寄附하는 等 社會 貢獻 活動에도 熱心이다. 이에 對해 “音樂을 하는 사람들은 練習에만 빠져 살다 보면 世上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면서 “音樂과 音樂 外的인 部分들, 이쪽저쪽을 보면서 더 넓은 길을 가게 됐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傳했다. 2021年 國際 舞臺 데뷔 35周年을 맞은 조수미는 韓國人으로서는 最初로 ‘아시아 名譽의 殿堂’에 選定됐다. 조수미는 如前히 바쁜 聲樂家다. 그는 올해 ‘조수미X베를린 필하모닉 12첼리스트’와 ‘조수미 콘서트 In Love’로 全國 舞臺를 마련했다.

20. 朴槿惠
(1952~) 2012年 10月號

朴槿惠는 2013年 2月 就任한 大韓民國 唯一의 女性 大統領이다. 1952年 朴正熙 前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1974年 어머니가 狙擊당한 뒤 퍼스트레이디 役割을 맡았다. 1979年에는 아버지인 朴正熙 大統領마저 銃擊으로 잃었다. 1998年 한나라당 候補로 大邱 達成 地域 補闕選擧에 出馬해 當選된 以後 내리 다섯 番 國會議員이 됐고, 두 番째 大權 挑戰 끝에 大統領이 됐다. ‘여성동아’ 2012年 10月號에는 두 番째 大權 挑戰에 나선 朴槿惠 前 大統領을 만나 나눈 인터뷰가 紹介됐다. 그는 쉴 틈 없는 스케줄을 消化해내면서 “政治는 愛國心으로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體力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꾸준히 運動하며 體力을 管理해온 自己 管理 祕法을 털어놓았다. 그는 ‘劣等感’에 對한 質問을 받자 “平凡하고 團欒하게 家庭을 꾸리고 사시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면서 “다시 태어나면 政治人 말고 平凡한 女性으로 살고 싶다”는 所望을 드러냈다.
2017年 彈劾된 朴槿惠 前 大統領은 2021年 1月 大法院에서 懲役 20年, 罰金 180億 원을 確定받고 服役하다가, 2021年 12月 特別 赦免됐다. 現在 그는 自身의 政治的 基盤인 大邱 達城郡에 머무르고 있다.

21. 황지해
(1976~) 2012年 12月號

황지해는 우리나라 庭園의 아름다움을 傳하는 가든 디자이너이자 環境 美術家다. 그는 韓國 庭園의 哲學과 아름다움을 담은 庭園 作品을 선보여왔는데, 全 世界 가든 디자이너의 꿈의 舞臺인 英國 ‘첼시플라워쇼’에서 韓國人 最初로 3回 金賞과 最高賞을 受賞했다. 2011年 처음으로 첼시플라워쇼에 參加한 그는 ‘解憂所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이라는 作品으로 韓國人 最初 아티잔 가든 部門 金賞을 받았다. 2012年에는 ‘Quiet Time: DMZ Forbidden Garden’으로 參加해 쇼 가든 部門 金賞과 全 分野 最高商人 會長賞을 受賞했다.

黃 作家는 ‘여성동아’ 2012年 12月號에 실린 인터뷰에서 “‘解憂所’가 가진 意味는 單純한 化粧室이 아니다”라며 “自身과 대면할 수 있는 時間, 버림의 美學, 結局에는 土壤을 肥沃하게 하고 植物을 살찌울 수 있는, 解憂所가 가진 意味가 世界人들에게도 통한 셈”이라고 說明했다. 그는 韓國의 庭園에 對해 “게으른 庭園, 卽 정형화되지 않은 原始 그대로의 定員”이라면서 “앞으로 이런 韓國의 庭園에 形態와 장르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中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自身의 意見을 밝혔다.

황지해 作家는 올해 11年 만에 英國 런던에서 열린 첼시플라워쇼 쇼 가든 部門에서 ‘百萬 年 前으로부터 온 便紙’로 金賞을 受賞했다. 特히 올해는 韓國 庭園의 哲學과 아름다움을 담은 作品을 선보여 英國 찰스 國王으로부터 讚辭를 받기도 했다.

22. 장미란
(1983~) 2013年 2月號

‘力道 女帝’라는 別名으로 더 익숙한 장미란은 2002年 釜山 아시안게임 銀메달을 始作으로 2004年 아테네 올림픽 銀메달, 2005·2006·2007·2009年 世界選手權大會 4連霸, 2008年 베이징 올림픽 金메달, 2010年 광저우 아시안게임 金메달 等 女子 力道 崔重量級에서 世界 頂上을 지켰다. ‘여성동아’ 2013年 2月號에는 장미란의 隱退 當時 心境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未來에 對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나갈지 整理하고 決定을 내리자 아쉬움이 사라졌다”며 “3個月을 苦悶했지만 이런 마음이 든 지는 열흘도 채 안 된다”고 시원섭섭한 心境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이제 끝인가 싶었지만, 한便으론 人生의 새로운 2幕을 여는 希望을 品字 걱정되고 두렵기만 했던 未來가 큰 期待感으로 채워지기 始作했다”고 말했다. 그는 30代 女性으로 돌아와서 第一 먼저 하고 싶은 것으로 學校生活을 꼽았다. “꿈에 挑戰하고자 準備하는 時期가 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選手 生活을 하느라 누려보지 못한 學校生活에 忠實하려고 한다”는 計劃을 밝혔다. 장미란은 2015年 龍仁大에서 博士學位를 取得한 後 이듬해 體育學科 敎授로 任用되었다. 以後 2017年 美國 오하이오州 켄트주립대로 다시 留學을 떠나 스포츠行政學 碩士를 取得하고 復職했다. 올해 6月 文化體育觀光部 제2차관으로 任命돼 只今은 公務員으로 ‘烈日’ 中이다.

23. 장영주
(1980~) 2013年 3月號

장영주(사라 張)는 신동 音樂家 中 한 名으로, 9歲에 主賓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協演 舞臺로 데뷔했다. 뉴욕 필하모닉 데뷔와 같은 해에 리카르도 무티 亦是 自身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公演에 그를 데뷔시켰다. 장영주는 쿠르트 마주어, 사이먼 래틀, 발레리 게르기예프 等 有數의 指揮者들과 10代 時節부터 함께 舞臺에 올랐다. 30代 初盤까지 낸 앨범이 無慮 18張을 넘길 程度로 旺盛하게 活動했다.

‘天才 音樂家’로 刻印돼 있던 그는 ‘여성동아’ 2013年 3月號에 또래 女性들과 다름없는 日常을 公開해 親近感을 더했다. “料理를 꼭 배우고 싶다”는 所望을 품어온 그는 “料理冊의 指示를 따르기보다는 느낌에 따라 材料를 넣고 빼는 타입”이라며 망친 料理에 對해 스스로 自評하기도 했다. 樂器 演奏 다음으로 잘하는 것은 “쇼핑”이라면서 “公演하러 다니면서도 餘裕가 생긴다 싶으면 쇼핑하러 나간다”는 率直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바이올린 演奏가 아니면 뭘 했을 것 같은지를 묻자 “파티 호스트라면 잘할 거 같다” “파티를 主催할 때 宏壯히 즐겁다”고 答했다. 그는 아이를 音樂家로 키우고 싶어 하는 어머니들에게 助言을 付託하자 “누군가 音樂 世上에는 音樂만이 아니라 비즈니스도 있다는 걸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며 自身의 지난 時間을 돌아보기도 했다. 音樂界에는 어린 나이에 天才性으로 매스컴과 大衆의 注目을 받다가 成長 過程에서 슬럼프에 빠지는 신동들이 많다. 그러나 사라 張은 꾸준한 技倆으로 30年 넘게 오랜 演奏 活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데뷔 32周年을 맞아 바로크音樂으로 꾸민 ‘사라 腸 & 비르투奧地’ 全國 투어를 가졌다.

24. 전지현
(1981~) 2014年 1月號

‘獵奇的인 그女’를 통해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登極한 전지현은 CF 퀸 그리고 演技力을 갖춘 俳優로 자리 잡았다. 2012年 최준혁 알파資産運用 代表와 結婚, 膝下에 아들 둘을 두고 있는 그는 2014年 1月 ‘별에서 온 그대’로 最高의 株價를 올리던 時期에 ‘여성동아’와 인터뷰를 進行했다. 그는 “서른 살이 넘었고, 結婚도 했기 때문에 變化를 體感하고 있다. 좀 더 成熟해지고 餘裕가 있어지고, 어른이 돼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런 狀況 變化가 延期에 影響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作品을 고를 때도 男便의 外助가 든든하게 한몫한다. 이番 드라마처럼 좋은 作品이 들어오면 知人이나 家族과 當然히 議論한다. 그들의 應援이 없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以前까지 전지현은 神祕主義 콘셉트를 固守해 大衆과 그리 가까운 俳優는 아니었다. 하지만 結婚을 통해 俳優로서의 삶에 確信을 얻고 大衆 앞에 나설 勇氣를 얻은 것은 分明해 보인다. “어릴 때부터 이 일을 해오면서 ‘繼續 俳優를 해야 하나’ ‘하기 싫다’ 等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神祕主義 콘셉트를 意圖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俳優 生活에 壁이 됐던 것은 事實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大衆에게 拒否感 없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 恒常 苦悶하고 渴望해왔다. 只今까지 俳優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運命이다. 熱心히 演技하는 게 가장 最善의 答일 것 같다”며 오랫동안 大衆과 함께하는 俳優가 되고 싶다는 所望을 傳했다.

25. 플뢰르 펠르랭
(1973~) 2014年 10月號

플뢰르 펠르랭은 韓國系 프랑스人 政治人으로, 入養兒라는 烙印을 ‘多樣性’이라는 勳章으로 승화시킨 立志傳的 人物이다. 2012年 아시아系 最初로 프랑스 長官이 되면서 注目받았고, 2012年 프랑수아 올랑드 政權 出帆 當時 中小企業 디지털經濟部 長官에 拔擢된 그는 通常觀光 國務長官을 거쳐 2016年까지 文化部 長官을 지냈다. 그의 旅券에는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에 對해 인터뷰에서 “‘김종숙’이라는 이름을 빼지 않는 理由는 나의 正體性 中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養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에 韓國에서 韓服을 사다 주기도 했다. 펠르랭은 “아버지가 1970年代에 韓國을 訪問해 ‘從叔’이라는 이름은 ‘完璧한 女子’라는 뜻이라 듣고 와서 내게 말씀해주셨다”고 回顧했다. 그는 또한 “내 삶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重要한 原則은 未來에 對한 두려움 앞에서 絶對로 勇氣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經濟危機 속 힘겨워하는 靑年들에게 激勵의 말을 傳했다. 펠르랭 前 長官은 2016年 프랑스 長官 退任 後 코렐리亞캐피탈을 세워 스타트업 投資者로 變身해 새 삶을 사는 中이다. 事業家로서 2022年 國內에서 에세이 ‘이기거나 或은 즐기거나’를 펴냈다.

26. 김수현
(1943~) 2016年 3月號

김수현은 50年間 活動해온 드라마 作家다. ‘드라마의 代母’ ‘言語의 魔術師’ 等으로 불리며, 大家族極부터 通俗劇까지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왔다. 特히 사람다움에 價値를 둔 ‘家族 드라마의 丈人’으로 有名하다. 그는 ‘사랑이 뭐길래’를 비롯해 ‘靑春의 덫’ ‘사랑과 野望’ ‘沐浴湯집 男子들’ ‘父母님 前上書’ ‘엄마가 뿔났다’ 等 드라마 歷史에 劃을 그을 만한 作品을 發表해왔다. ‘여성동아’ 2016年 3月號는 김수현 作家의 新作 SBS 週末드라마 ‘그래, 그런거야’ 첫 放送을 앞두고 그와의 인터뷰를 公開했다. 그는 大家族 드라마를 一貫되게 써온 理由에 對해 “우리의 뿌리는 家族”이라고 答했다. 그러면서 “家族 드라마를 쓰면 (出演者들) 다 主人公이 된다”면서 各自의 이야기를 進行하는 過程에 “서로 힘을 보태고 보듬으면서 家族의 所重함을 깨닫게 된다”고 밝혔다. 作家는 인터뷰에서 “이제 일을 그만둬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듯, ‘그래, 그런거야’ 以後 作品 活動을 中斷한 狀態다. 2020年 그의 故鄕인 忠北 淸州市는 作家의 作品 世界를 선보이는 展示 空間이자 文化空間인 김수현드라마아트홀을 開館했다.

27. 金憓秀
(1970~) 2020年 11月號

김혜수는 1986年 映畫 ‘깜보’로 데뷔 後 映畫界뿐 아니라 드라마, 쇼 프로그램 等에서 活動해온 多才多能한 才能을 가진 獨步的 배우다. 그는 40年 가까운 時間 동안 여러 作品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演技하며 觀客과 呼吸해왔으나 일의 本質에 對해 苦悶하는 時間도 있었다. 映畫 ‘내가 죽던 날’ 開封을 앞두고 이뤄진 ‘여성동아’ 2020年 11月號 인터뷰에서 “어느 瞬間 잠자리에 누웠는데 ‘왜 이 일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複雜해지기도 했다”면서 “앞으로 創意的이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고 告白했다. 그렇게 30代를 보내고 마음속으로 ‘滿 40歲가 되면 그만두리라’는 생각도 했단다. 그러나 “映畫 일을 하면서 趣向이라는 게 생기고, 나라는 사람이 形成됐고, 거기에 意味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慰安을 받는 걸까. 그는 “사람, 音樂, 詩, 글, 아이들, 自然”에서 人生의 즐거움을 찾는다며 “그런 些少하고 日常的인 것에서 充電이 되니까 사는 것 같다”고 傳했다. 김혜수는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少年審判’과 史劇 ‘슈룹’에 出演해 好評받았고, 올여름 開封한 映畫 ‘密輸’에 出演했다. ‘密輸’는 올해 ‘犯罪都市 3’ 以外에 唯一하게 觀客 500萬 名을 넘긴 興行作이다.

오은영
(1966~) 2019年 2月號·2020年 11月號

오은영 博士는 精神健康醫學科 專門醫이자 放送人이다.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이어 2020年부터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에 出演, 수많은 金쪽이 父母들의 全幅的인 支持를 얻고 있다. 그는 ‘여성동아’와 두 次例에 걸쳐 인터뷰를 나눴고, 2019年 2月號와 2020年 11月號에 揭載됐다. 그는 짧은 映像만 보고 아이의 狀態, 父母와의 關係까지 把握하는 祕法에 對해 “아이들은 父母나 어른에게 그게 말이든 눈빛이든 信號를 보낸다”면서 “平素에 아이가 어떤 信號를 보내는지 잘 觀察하고, 그것이 反復될 때 眞正한 意味가 무엇인지 理解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父母들이 아이의 信號를 把握해 스스로 解決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能力을 조금씩 培養해주는 게 내 目標”라는 信念도 밝혔다. 그는 自身의 어린 時節을 돌아보며 “父母님께서 子息을 男女 差別 없이 사랑하셨고, 自信感을 잃지 않게 督勵해주신 德에 내가 只今 하나의 사람으로 자랐다”고 털어놨다. 또한 그는 “世上에 子息을 키우는 것보다 價値 있는 일은 없다. 그걸 모두 잊지 말았으면 한다”는 助言을 남겼다.

29. 李榮愛
(1971~) 2020年 1月號

이영애는 1990年 CF 모델로 데뷔해 CF 스타 兼 演技者로 活動해온 俳優다. 2003年 드라마 ‘大長今’으로 世界的인 韓流스타가 됐고, 2005年 박찬욱 監督의 映畫 ‘親切한 金字氏’로 演技 變身에 成功해 最高의 女俳優로 자리매김했다. 2009年 事業家 鄭鎬瑛 氏와 結婚해 雙둥이를 낳은 後 10年間 空白期를 가지다가 2019年 映畫 ‘나를 찾아줘’로 復歸했다. 映畫 開封을 앞두고 이영애와 나눈 인터뷰가 ‘여성동아’ 2020年 1月號에 公開됐다. 그는 데뷔 30年이 넘은 只今까지 ‘酸素 같은 女子’라는 修飾語가 아깝지 않은 外貌와 優雅하고 氣品 있는 애티튜드로 사랑받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2歲 되던 해부터 初等學校 入學 前까지 京畿 楊平 문호리에서 살았는데, 그 時間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텃밭에서 有機農 菜蔬를 가꿔 먹고 産을 헤치고 다니며 溪谷물 흐르는 소리, 山새 소리 들으며 혼자 思索도 했다”면서 “그렇게 보낸 7~8年이 俳優로서의 感性을 豐富하게 하는 것은 勿論 精神的, 身體的으로도 큰 資産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또 그는 “演藝人이라는 職業은 風船 같다”면서 “自己도 모르게 하늘로 올라가지 않기 爲해선 心志의 기둥을 確實히 세우는 게 重要하다. 그래서 自身을 點檢하고 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時間이 必要한 것”이라고 所信을 밝혔다. 이영애는 2021年 JTBC 드라마 ‘구경이’에서 ‘刑事 出身의 히키코謀利’라는 配役을 安定的인 演技로 消化하며 好評을 이끌어낸 바 있다. 올 年末 tvN 드라마 ‘마에스트라’의 車세음 役割로 컴백할 豫定이다.

30. 臨歲아
(1980~) 2020年 1月號

臨歲아는 名品 브랜드 디올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패턴 디자이너다. 第77回 골든 글로브 施賞式에서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애니스톤, 다코타 패닝 等 世界的인 女俳優 3名이 그의 손길이 머문 드레스를 選擇하며 話題가 됐다. ‘패턴 디자이너’란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實際 옷으로 具現하는 職種이라고 한다. 臨歲아는 佛文學을 專攻했지만, 大學 時節부터 춤에 빠져 女性 댄스 팀 ‘스위치’ 멤버로 活動했다. DJ DOC ‘Run To You’와 싸이 ‘챔피언’ 活動 當時 백댄서로 參與했지만, 발목 負傷을 當하며 댄서 生活을 그만해야 했다. 그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苦心하다가 떠올린 게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大學을 卒業할 나이였고, 패션 디자인을 專攻한 것도 아니라 어려움이 있었다. 多幸히 패턴 디자이너 養成 學校인 AICP에 入學 許可를 받으며 패턴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섰다. 2008年 디올의 어시스턴트 모델리스트로 社會에 첫발을 내디뎠고, 2010年에 셀린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2年 파코라반이 오트쿠튀르를 再론칭할 때 패턴室 室長으로 스카우트됐다. 以後에는 패션 브랜드 QELA에 몸담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브랜드에서 다양한 經驗을 쌓다 보니 다시 마음의 故鄕과도 같은 디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패턴 디자이너가 決코 쉬운 職業은 아니다”라면서 “하지만 그 어떤 職業보다 魅力的인 것도 事實이다. 패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끈氣를 가지고 挑戰하라고 말하고 싶다”는 助言을 남겼다.

31. 박세리
(1977~) 2020年 7月號

박세리는 ‘韓國 女子 골프 傳說’이라 불리는 前職 골프選手다. 그는 1998年부터 LPGA 투어를 制霸하고, 2007年 LPGA 名譽의 殿堂에 헌액되는 等 立地全的 成跡을 남겼다. 特히 US女子오픈 延長戰에서 맨발로 蓮못에 들어가 惡戰苦鬪 끝에 優勝했던 모습은 아직도 膾炙되고 있는 名場面이다. 그는 2016年 隱退 後 올림픽 女子 골프 國家代表 팀 監督을 맡았고, MBC ‘나 혼자 산다’ 等 多樣한 藝能 프로그램에 出演하기도 한다. ‘여성동아’ 2020年 7月號는 ‘國民 언니’로 第2의 全盛期를 누리고 있는 박세리 選手 이야기를 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放送 德分에 大衆에게 負擔 없이 다가갈 수 있는 洞네 언니가 된 것 같다”면서 “이제 남은 삶은 다른 많은 걸 배우고 適應하면서 새롭게 始作해야겠다. 勿論 그 삶에도 如前히 골프는 함께할 것 같다”는 抱負를 밝혔다. 그는 30年間의 選手 時節을 돌아보며 “選手 生活의 밑거름이 됐던 건 挑戰 精神과 自信感”이라면서 “새로운 것에 對한 挑戰에 물러서거나 怯이 없었고, 나에 對한 自信感이 컸다”고 回顧했다. 選手 時節에는 肯定的인 性格이 크게 도움이 됐다. “選手 生活하면서 成績이 처지거나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이 또한 자연스럽게 겪는 過程이라 생각하고 크게 戀戀하지 않았다”며 “代身 한 番 더 배우고 成熟해지려 애썼다”고 마인드컨트롤 祕法을 傳했다.

박소희
(1996~) 2021年 2月號

패션 브랜드 미스소희를 運營하며 런던에서 活動하는 디자이너 박소희는 韓國的 아름다움을 담은 素材인 소나무, 사슴, 波濤, 山 等을 活用한 패션 作品을 선보여 海外 有名 스타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디자이너로 有名해진 건 SNS를 통해서였다. 卒業 작품전에 出品할 衣裳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여러 次例 共有되면서 패션 매거진과 世界的인 팝 스타까지 協贊·協業을 依賴해온 것. 그間 카디 비, 벨라 하디드, 마일리 사이러스, 아리아나 그란데, 카일리 제너, 리타 오라, 젬마 찬, 나오미 캠벨 等의 할리우드 스타가 그의 옷을 입었다. 그는 ‘여성동아’ 2021年 1月號에 실린 인터뷰에서 “꽃에서 靈感을 많이 얻는다”며 “以前에 누구도 하지 않은 나만의 方式으로 꽃을 再解釋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1920年代부터 1960年代까지의 衣裳들을 보면 剛한 魅力을 느낀다”면서 “클래식하면서 글래머러스韓 過去의 이미지로부터 얻은 靈感을 最大限 모던하게 풀어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셀러브리티들의 미스소희 사랑은 ‘여성동아’ 인터뷰 以後에도 繼續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最年少 빅토리아시크릿 專屬모델 테일러 힐이 美國 慈善 行事 ‘멧 갈라’ 레드카펫에서 그의 드레스를 입었고, 中國의 톱스타 판빙빙과 메간 폭스 亦是 제95회 아카데미 施賞式을 앞두고 열린 오스카 파티에 그의 衣裳을 입고 參席했다.

33. 김은희
(1972~) 2021年 9月號

김은희는 ‘장르物의 代價’로 불리는 劇作家다. 2006年 이병헌, 水涯 主演의 ‘그해 여름’을 통해 劇本家로 데뷔한 뒤, 男便 장항준 監督과 함께 2010年 tvN 드라마 ‘危機一髮 豐年빌라’를 執筆했다. 以後 2011年 SBS 드라마 ‘싸인’, 2012年 SBS 드라마 ‘幽靈’, 2016年 tvN 드라마 ‘시그널’ 等 장르物로 마니아層을 形成했다. 2019年에는 넷플릿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시리즈로 世界的인 사랑을 받는 作家로 자리매김했다. 김은희 作家는 ‘여성동아’ 2021年 9月號를 통해 自身의 創作 方式을 公開했다. 그는 “내 안에 內在된 생각, 好奇心을 키우고 키우다가 作品의 素材로 쓰는 便”이라면서 “歷史를 좋아해 冊이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보는 便이었고, 좀비物度 워낙 좋아해 즐겨 봤다. 史劇과 좀비物이 만나 ‘킹덤’이 誕生하는 式이다”라고 說明했다. 그의 作品에서는 平凡한 人間 群像의 삶과 勸善懲惡의 메시지가 잘 그려진다. 그는 “臺本을 쓸 때 ‘이 캐릭터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지?’ ‘이 이야기는 무엇을 向해 가지?’ 그런 方向性에 對해 늘 생각한다”면서 “作品을 만들다가 힘든 瞬間에 그걸 떠올리면서 ‘내가 企劃意圖를 또 놓쳤구나’ 깨닫기도 한다. 앞으로도 作品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놓치지 않으면서 가려고 한다”는 信念을 밝혔다.

#90周年아카이브 #파워우먼 #여성동아

寫眞 박해윤 記者 東亞DB 
寫眞提供 國家報勳部 延世大學校 記錄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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