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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査, 그리고 엄마 徐志賢의 ‘미투’ 以後|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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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査, 그리고 엄마 徐志賢의 ‘미투’ 以後

#미투1號 #2車被害呼訴 #名譽回復希望

EDITOR 김지영 記者

2018. 06. 28

지난 1月 現職 檢事의 性暴力 被害 告白은 우리 社會에서 ‘미투’ 運動이 始作되는 決定的 契機가 됐다. “性犯罪 被害者들에게 決코 當身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는 昌原地檢 統營支廳 徐志賢 檢事를 일곱 番째 파워우먼으로 만났다. 徐 檢事가 放送이 아닌 지면 인터뷰를 한 건 이番이 처음이다.

‘미투(Me Too, 나도 當했다는 뜻) 運動’은 지난해 10月 美國 女俳優가 할리우드 映畫 製作者의 性暴力을 소셜 미디어에 暴露하면서 全 世界로 擴散됐다. 韓國판 미투 運動의 始作은 昌原地檢 統營支廳 徐志賢(45) 檢事였다. 徐 檢査는 1月 29日 jtbc ‘뉴스룸’에 出演해 “8年 前인 2010年 10月 30日 葬禮式場에서 當時 法務部 政策企劃團長이던 安兌根 前 法務部 檢察局長에게 性醜行을 當했고, 以後 不當한 事務 監査를 根據로 2015年 8月 統營支廳으로 發令 措置하는 人事 報復을 當했다”고 暴露했다. 

以後 徐 檢事의 告白에 勇氣를 얻은 性暴力 被害者들이 各界 著名人士들의 過去를 暴露하면서 社會的으로 큰 反響을 일으키자, 文在寅 大統領은 2月 26日 “미투 運動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被害 事實을 暴露한 被害者들의 勇氣에 敬意를 표하고, 미투 運動을 積極 支持한다”며 “被害者들의 暴露가 있는 境遇 刑事 告訴 意思를 確認하고, 性暴力 犯罪에 對한 親告罪가 廢止된 2013年 6月 以後의 事件은 告訴 없이도 搜査할 것”이라는 後續 措置 方針을 밝혔다. 또 徐 檢事의 暴露 이틀 만이던 1月 31日 檢察 內部에는 ‘性醜行 事件 眞相糾明 및 被害回復 調査團(以下 調査團)’李 꾸려졌고, 安 前 局長은 自身이 性醜行한 徐 檢事에게 人事上 不利益 處分을 한 職權濫用權利行使妨害 嫌疑로 4月 25日 不拘束 起訴돼 裁判을 받고 있다. 

우리 社會에 意味 있는 變化를 이끌어낸 徐志賢 檢事를 5月 28日과 6月 7日 두 次例에 걸쳐 만났다. 이화여대 法學科를 卒業한 徐 檢事는 2001年 司法試驗에 合格한 後 司法硏修院을 33期로 修了했다. 2004年 大田地檢 洪城支廳에서 檢査 生活을 始作했으며 以後 仁川地檢, 서울북부지검, 水原地檢 驪州支廳을 거쳐 2015年 8月부터 昌原地檢 統營支廳에 勤務하고 있다.

우리 社會의 性暴力과 性差別 克服에 이바지한 功勞로 얼마 前 ‘들佛像’을 受賞하셨지요. 

들佛像은 들불 夜學을 設立해 運營하고 5·18 光州民主化運動을 前後로 民主主義 發展을 위해 奮鬪하다가 돌아가신 7人의 烈士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매우 뜻깊은 相이라고 들었습니다. 事實 너무나 過分한 賞이라 제가 받을 資格이 있는지 苦悶이 됐지만, (性暴力) 被害者로서 움츠러들고 두려워하는 모습보다는 堂堂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勇氣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큰 勇氣를 내어 받게 되었습니다. 

最近 ‘魔女의 法廷’ ‘祕密의 숲’ ‘劍法男女’처럼 檢事를 主人公으로 한 드라마가 많아졌는데, 왜 그럴까요. 

劇 中 檢事가 犯罪 事件을 解決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인 듯합니다. 하지만 實際로는 드라마처럼 멋있게 生活하진 못해요. 業務量이 宏壯히 많아 거의 每日 夜勤을 하고, 또 上命下服 文化가 뿌리 깊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 境遇만 보더라도 初任 때는 한 달에 4百~5百 件을 處理했고, 最近까지도 搜査 指揮 等을 맡아 한 달에 4百 건 異常을 處理했습니다.



現職 判事가 執筆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 判事나 ‘無法辯護士’의 강연희(차정원) 檢事 헤어스타일이 徐 檢査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제가 모델로 言及된 것이 매우 憫惘합니다만, 檢査에 對한 硬直된 先入見을 깨는 데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웃음). 

올 初 ‘뉴스룸’ 出捐은 큰 勇氣가 必要했을 것 같아요. 

‘뉴스룸’ 出演을 決心했을 땐 어떤 結果가 따라올지 全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두려움이 컸던 것이 事實입니다. 그 後 많은 분들이 “Me Too”를 외쳐주셨을 때 저에게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위드 有(With You)”로 들렸고 德分에 큰 힘이 됐어요. 제 ‘Me Too’ 亦是 그분들에게 ‘With You’가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다른 분들에게도 深刻한 2次 加害가 이어져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調査團에 數回에 걸쳐 “2次 加害 때문에 被害者들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고, 입을 연 被害者들度 너무 큰 苦痛을 當하고 있다”고 呼訴했지만, 제대로 搜査가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웠어요. 

2010年으로 돌아가보죠. 葬禮式場에서 安兌根 當時 法務部 政策企劃團長의 옆자리에 어떻게 앉게 됐습니까. 

葬禮式에 參席한 檢事들 中 제가 낮은 期數였어요. 序列을 重視하는 檢察의 組織 文化賞 元來는 末席에 앉았어야 했는데, 누군가 저를 밀어 그 옆에 앉게 됐어요. 當時 안 團長 옆에 法務部 長官이 있었는데, 大體로 높은 분 옆자리에는 女性을 앉히는 一種의 慣例(?) 때문에 저를 그쪽으로 밀었던 것 같아요. 當時 그 테이블에 女檢事는 저 혼자였어요. 

被害를 當한 後 어떻게 對處했나요. 

當時 서울북부지검 特殊部에서 일했는데 事務室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고 쪽잠을 잘 程度로 業務가 바빴고, 性暴力 事件이 터지면 被害者에게 過度한 關心과 2次 加害가 쏟아지는 것을 봐왔기에 선뜻 告訴를 하거나 監察에 이야기하지 못하고 苦悶을 많이 했어요. 

同僚 임은정 檢事가 徐 檢査가 當한 일을 公論化하려고 했었다죠. 

그 일로 苦悶하는 渦中에 사내 메신저를 통해 임은정 檢事로부터 메시지가 왔었어요. ‘OOO 葬禮式場에 간 적이 있느냐? 어떤 女檢事가 안 團長으로부터 性醜行을 當했다고 하는데, 目擊한 事實이 있느냐?’는 內容이었어요. 그때 林 檢査와는 모르는 사이였어요. 그분이 監察 擔當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林 檢事에게는 “나는 잘 모르겠다”고 答하고 當時 제가 勤務하던 支廳의 部長檢事와 首席 女檢事를 찾아가 제가 겪은 일을 相議했더니 그분들이 檢事長을 通해 (加害者의) 謝過를 받아주기로 해서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 後 어떠한 沙果나 連絡도 없었습니다.

安 前 局長 側은 5月 18日 1次 公判에서 “徐 檢事의 勤務 評價 順位가 좋지 않았고 直前 事務 監査에서의 檢察總長 警告, 仁川· 驪州 等 首都圈 地域 連續 勤務, 檢査 人力 事情 等으로 統營支廳 發令이 不可避한 狀況이었다”고 主張했습니다. 하지만 徐 檢事가 統營 發令을 性醜行 以後 人事 報復으로 判斷한 理由가 있을 텐데요. 

먼저, 아는 職員을 통해 “法務部에서 제 人士가 驪州 스테이(驪州支廳 留任)로 進行됐는데, 決裁 過程에서 安 局長이 저를 반드시 날려야 한다고 主張해 人事를 若干 딜레이해가면서 저를 날릴 곳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經歷檢事의 境遇 普通 7年 차 程度일 때 支廳에 보내서 어려운 事件도 處理하고 後輩들의 事件 處理나 苦衷에 助言도 하는 役割을 맡긴 後 願하는 任地로 發令 내주는 方式으로 經歷檢査 制度가 運營돼왔는데, 저는 驪州支廳 經歷檢事로 勤務한 直後 다시 統營支廳 經歷檢事로 發令이 났어요. 經歷檢査 制度가 생긴 以來 支廳 經歷檢事로 2番 勤務한 檢事는 제가 唯一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올해 15年 車 檢事인데 제 年次에도 全혀 맞지 않는 發令이었고, 統營은 經歷檢事 자리가 하나뿐이에요. 제가 發令받았을 때 이미 後輩 檢事가 經歷檢事로 勤務하고 있었어요. 統營에 經歷檢事가 2名 配置된 것도 前無後無한 일이죠. 이렇게 異例的인 發令을 낸 것은 檢察에서 나가라는 意味인데, 只今까지 제 발로 나가야 할 만큼 業務에 疏忽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勤務하는 支廳에서 每番 實績이 좋은 檢事로 인정받았어요(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서 檢事는 法務部 長官 表彰을 2回 받았고, 大檢 優秀 事例로 10餘 回 選定됐다. 統營支廳 發令 直前인 2014年 6月부터 1年間은 프랑스 파리1大學에서 硏修를 한 바 있다). 

그럼에도 徐 檢査를 統營支廳으로 發令 낸 根據가 뭐였나요. 

當時 그 根據가 된 것이 2014年 4月 제가 勤務하던 女主支廳에 對한 서울高檢의 事務 監査 結果라고 했어요. 그런데 追後 調査團이 發表한 바로는 事務 監査와는 큰 關聯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事務 監査 結果는 檢事로 勤務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不當하다고 느낄 程度로 틀린 部分이 많고, 매우 些少한 것을 苛酷하게 指摘했어요. 그 程度 知的으로 제게 ‘檢察總長 警告’를 준 것도 釋然치 않은 部分이에요. 當時 大檢 監察本部에 있던 檢事에게 “大檢에서는 (제게) 警察總長 警告를 하는 것이 知的 事項에 비해 苛酷하다고 했는데, 事務 監査를 直接 進行한 서울高檢에서 强力히 主張해 警告 措置를 했다”는 말을 傳해 들었습니다. 지난 1月 末 꾸려진 ‘調査團’의 團長이었던 조희진 (서울東部地檢) 檢事長은 2014年 當時 서울高檢 次長으로 在職하며 제 事務 監査를 決裁한 張本人이에요. 그때 事務 監査와 警告 措置를 한 經緯에 對해 調査를 받아야 할 사람이 마지막까지 調査團長職을 維持한 것은 只今도 理解가 되지 않습니다. 結局 調査團은 제 事務 監査에 아무런 問題가 없었다고 結論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檢事라면 大部分 제 主張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事務 監査 指摘 事項이 맞다고 하더라도 ‘事務 監査에 따른 總長 警告’ 程度로 저와 같은 懲戒性 人事가 이뤄진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安 前 局長은 女主支廳 勤務가 首都圈 勤務여서 地方 發令 對象이었다고 主張하지만, 檢察 內에서 驪州는 首都圈이 아닌 地方 勤務로 看做하는 곳이에요. 저는 驪州支廳 以後 首都圈 勤務가 可能한 對象이었던 거죠. 게다가 이番 調査 終了 後 第 林地가 統營으로 決定되기 前 10餘回 남짓 바뀐 걸 알게 됐습니다(조희진 檢事長은 지난 6月14日 辭表를 提出하고 檢察 內部 通信網에 “많은 反對와 異見에도 不拘하고 檢察 組織 內 性醜行 被害者에 對한 人事上 不利益 處分을 檢察 歷史上 처음으로 職權濫用으로 起訴하였다. 이는 매우 重要한 意味를 갖는 劃期的인 事件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8月 法務部 長官에게 被害 事實과 人事의 不當함을 메일로 알리고 面談을 要請했던 것으로 압니다. 當時 面談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나요. 

人事 報復을 받은 以後 너무나 고통스러운 時間을 보냈습니다. 正義를 追求하는 檢査이면서 自身이 받은 被害에 對해서는 제대로 救濟하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다는 自愧感이 저를 괴롭혔어요. 제가 面談 要請을 하기 前 임은정 檢事가 總 3回에 걸쳐 檢察 內部 揭示板과 ‘한겨레신문’ 인터뷰 等을 통해 제가 當한 일을 言及한 터라 法務部에서도 그 內容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法務部에는 어떤 對策이 있는지 알고 싶었고, 어떻게든 檢察 內部에서 解決하려고 首長인 法務部 長官에게 被害 事實을 明確히 알리고 面談 要請을 했던 겁니다. 그 後 法務部 長官이 指定한 檢察課長과 面談하며 被害 事實 및 不合理한 人事 等 제가 不當하다고 생각하던 內容들, 거기에 安 前 局長이 關聯돼 있다고 判斷하게 된 根據들을 具體的으로 說明하고 對策을 問議했죠. 하지만 法務部에서는 어떤 對策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제게 願하는 것을 率直하게 말하라고 하기에 “人事 經緯 等에 對한 事實 確認을 願한다”고 여러 番 얘기했어요. 또 “우리 會社가 어디로 보내달라고 한다고 보내주는 곳도 아니고, 내가 이런 被害를 입었으니 補償 次元에서 어디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分明히 말했어요. 그럼에도 法務部에서는 제가 面談 當時 “眞實 糾明을 願하지 않고 人事 要求만 했다”고 發表했어요. 面談 當時 제가 錄音해둔 錄取 파일도 갖고 있는데, 法務部에서 事實과 다르게 저를 마치 ‘被害를 미끼로 人事를 要求한 檢事’처럼 만들어 너무도 마음이 아팠어요. 

面談 5個月 뒤인 지난 1月 29日, 檢察 內部 網에 直接 8年 前 日課 그間 느낀 點을 小說 形式으로 作成한 ‘나는 所望합니다’라는 題下의 글을 揭示했어요. 그 理由가 뭔가요. 

生放送 뉴스에 直接 出演한 걸 보고 제가 宏壯히 勇氣 있고 豁達한 性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平素 조용하고 좀 消極的인 性向이라, 萬一 法務部에서 “事實 確認을 해보았더니 抑鬱하게 發令받은 것은 맞지만, 安 局長이 이미 檢察에서 나갔고 告訴 期間이 지났기 때문에 달리 方法이 없다”고 저에게 說明만 했어도 그냥 參考 勤務했을 겁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어떠한 調査도, 措置도, 連絡도 없는 것을 보고 더는 참기 어려웠어요. 誠實히 勤務만 하면 名譽가 回復되고 抑鬱함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幻想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辭職書를 내려고 했어요. 그러나 檢察의 이런 狀態로는 檢察 改革이 이뤄질 수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眞正 달라져서 國民의 信賴와 사랑을 받는 檢察로 거듭났으면 하는 所望으로, 後輩들이 다시는 저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 글을 올리게 됐죠.

강아지를 안고 친언니와 정겹게 어깨동무를 한 중2 때의 서 검사(오른쪽), 이화여대 법학과에 입학하던 날, 대전지검 홍성지청의 초보 검사 시절(왼쪽부터).

강아지를 안고 親언니와 정겹게 어깨동무를 한 中2 때의 徐 檢事(오른쪽), 이화여대 法學科에 入學하던 날, 大田地檢 洪城支廳의 初步 檢事 時節(왼쪽부터).

그리고 그날 바로 ‘뉴스룸’에 出演했어요. 事前에 計劃했던 일인가요. 

제 글이 檢察 揭示板에 올라간 後 知人을 통해 jtbc와의 인터뷰 要請이 들어왔어요. 當時에는 그 글만 올리고 辭職書를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두렵기도 해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몇 時間 後 法務部에서 ‘徐 檢査 人事에 아무런 問題가 없었다’고 發表했다는 消息을 接했어요. 제 主張을 虛僞로 置簿하고 그대로 덮어버리려 했기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 出演을 決心하게 됐죠. 事實 저희 집은 空中波 채널만 나와 그때까지 ‘뉴스룸’을 본 적이 없어요. 孫石熙 앵커와도 인터뷰 始作 몇 秒 前에 처음 대면했고요. 그때 저는 單 한 사람의 被害者라도 “當身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제 말을 듣고 慰安을 얻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 일을 當한 後 約 7年 동안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면서 괴로운 時間을 보냈는데, 지난해 末 心理 相談을 해주시는 분에게서 처음으로 “當身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慰勞와 勇氣를 줬는지 몰라요. 

安兌根 前 局長은 1次 公判에서 “漫醉 狀態여서 記憶이 없으나, 어리석은 行動에 對해 眞心으로 後悔하고 反省하고 있다”고 했는데, 徐 檢事에게 直接 謝過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安 前 局長 側은 또한 ‘法務部에서 檢査 人事 實務를 맡은 李某·沈某 檢事에게 “徐 檢査를 반드시 날려야 한다”고 陳述했다’는 公訴事實을 否認했습니다. “두 檢事는 被告人의 특별한 指示 事項이 없었다고 反復해서 陳述하고 있고, 實務에 關與한 朴某 搜査官 等도 被告人의 不當한 指示가 없었다고 陳述했다”는 겁니다. 이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제가 巨大 權力인 檢察을 相對로 싸우는 形象이 됐는데, 제 唯一한 힘은 眞實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檢査 揭示板에 글을 올리고 放送에까지 나간 건 分明히 제가 傳해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檢察이 搜査 意志와 能力이 있었다면 充分히 關聯者들의 陳述을 이끌어내고 眞實을 밝힐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매우 안타깝습니다. 眞實은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檢察이 搜査 意志와 能力이 있었다면 밝힐 수 있었다, 이런 意味인가요. 

大檢은 第 暴露 以後 性暴力 專擔 餘檢査들로 構成된 調査團을 發足했는데, 제 性醜行 事件은 告訴 期間이 이미 지났어요. 게다가 被害者가 被害 事實을 陳述하고, 加害者가 “술에 醉해 기억나지 않지만 事實이라면 謝過하겠다“고 認定한 狀態라 더 以上의 眞相 糾明이나 搜査를 해야 할 重要 事項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後 이뤄진 人士 報復 等에 對한 眞相 糾明이 重要 事項이죠. 그 搜査를 위해서는 特殊 搜査 經驗이 있는 檢事들로 搜査團을 構成해 迅速하게 골든타임 內에 搜査를 進行했어야 합니다. 安 前 局長은 우병우 前 靑瓦臺 民政首席의 最側近으로 所謂 ‘우병우 師團’을 構成한 사람이고, 아직도 檢察 內部에서는 두려움의 對象이기도 합니다. 關聯者들이 眞實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搜査 意志와 能力이 切實한데 搜査 意志도, 能力도 없는 搜査團度 아닌 調査團을 꾸려 搜査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 그와 같은 虛僞 陳述을 하게 만든 原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檢察 全體의 改革을 위해 그들이 只今이라도 眞實을 말하기를 懇切히 바랍니다. 

아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統營支廳 發令 以後 育兒에 어려움이 있었을 듯합니다. 

事實 育兒에 對한 苦衷이 가장 컸어요. 親庭 父母님이 다 돌아가시고, 媤父母님도 健康이 좋지 않으셔서 育兒 도움을 받을 곳이 全혀 없어요. 恒常 入住 아주머니들 도움으로 아이를 키웠는데, 正말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담배 煙氣 자욱한 不法 賭博場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석 달 내내 맨밥만 먹이기도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아이가 알레르기 反應을 보이는 藥을 服用하게 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아이를 入住 아주머니에게 맡긴 채 統營에 가서 勤務하는 것이 心理的으로 몹시 힘들었어요. 아이 때문에 週末마다 서울에 올라왔는데, 統營에 가는 大衆交通이 버스밖에 없고 버스로 約 5時間 程度가 걸리기 때문에 肉體的으로도 매우 힘들었죠. 元來 허리 디스크가 있어 長時間 버스에 앉아 있는 그 自體가 제게는 宏壯히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다 목 디스크에 恐慌障礙까지 發病해 治療 中에 있습니다(서 檢査는 統營 發令 後 男便과 週末 夫婦로 지냈다. 現在는 疾病休職 中이다). 

왜 檢事가 됐습니까. 

처음에는 漠然히 正義를 實現하는 法曹人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司法硏修院生 時節 檢事 時報로 勤務해보니 檢査 生活이 너무 高돼 보여 망설여지기도 했죠. “너처럼 여리고 女性스러운 性格으로 무슨 檢査를 하냐”고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時報 때 指導檢事님의 “檢事는 被害者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큰 感銘을 받았고, “犯罪者도 辯護해야 하는 辯護士보다, 積極的으로 定義를 좇아 일하는 檢事가 훨씬 보람 있다”는 父親의 助言을 듣고 檢事가 됐어요. 

檢事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꿈꾸던 檢査는 잘나가는 檢査가 아니라, 누구보다 따뜻하고 他人의 아픔을 共感할 수 있는 檢事였어요. 바쁘고 힘든 日常 속에서도 不足하지만 그런 檢査가 되고자 努力을 아끼지 않았어요. 檢事 일은 人間에 對한 無限한 사랑을 必要로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檢査는 慘酷한 犯罪를 저지르고도 이를 否認하는 被疑者, 苦痛에 괴로워하는 被害者, 各自의 말을 하는 參考人 사이에서 當事者들을 最大限 說得하고 證據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最大限 眞心으로 當事者들을 對하려고 努力했고, 그들에게 제 眞心이 닿아 眞實이 밝혀지고 被害가 回復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죠. 當事者들로부터 感謝 便紙도 많이 받았어요. 

徐 檢事의 勇氣가 미투 運動을 觸發했지만 미투를 否定的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告發이라는 것 自體에 過激한 面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方式을 擇할 수밖에 없는 理由와, 女性들이 日常에서 느끼는 恐怖와 苦痛에 對한 共感과 理解가 있었으면 합니다. 女性에게 參政權이 附與된 時期가 英國은 1918年, 美國은 1920年, 스위스는 1971年이에요. 그 事實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곧 이런 미투가 必要한 時代였다는 것이 깜짝 놀랄 一日 程度로 미투가 必要 없는 世上이 되면 좋겠어요. 

內部告發者에 對한 2次 加害 中 被害者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同僚들의 外面이라고 합니다. 徐 檢事의 境遇는 어떤가요. 

法務部, 調査團 等에서 저에 對한 虛僞 發表를 거듭하고 記者들에게 저를 陰害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檢察 幹部들이 저와 親하게 지내던 檢事들에게 비꼬는 套로 말을 하고, 저처럼 檢察을 해하는 行動을 해선 안 된다고 교육시킨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調査團에서 저와 親했던 檢事들은 重要 事項이 아닌데도 全部 召喚해서 힘들게 하고, 幹部級人 直接 目擊者 等은 부르지도 않고 서면 調査만 했대요. 檢察 內部에서 ‘徐 檢事에게 한마디라도 하면 불려가서 調査받는다’고 所聞이 나서 누구도 저에게 連絡하길 꺼린다고 해요. 檢警 搜査權 調整도 저 때문에 不利해졌다고 非難하는 목소리도 들었어요. 豫想했던 일이지만 저를 背信者 取扱하는 檢察이 野俗하고, 親했던 檢事들이 苦痛 받는 것이 몹시 괴로웠어요. 正말로 檢察을 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國民들이 搜査權을 調整하라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되묻고 싶어요. 제 自身을 위해 가장 幸福한 方法을 찾으려 했다면 그냥 辭表 내고 조용히 살고 있겠죠. 하지만 檢察이 제대로 바뀌기를 바라고, 眞心으로 檢察을 사랑하기에 입을 열 勇氣를 낸 겁니다. 

徐 檢事가 政治를 하려고 미투를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檢察 內部에서는 제가 “人事를 잘 받으려고 꾸민 일이다” “政治人이 되기 위해 有名해지려고 미투를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일에 最善을 다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 小小한 幸福을 느끼며 사는 삶을 가장 重要하게 생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父母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돈도, 社會的 地位도 한瞬間의 꿈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루하루 最大限 사랑하고 感謝하며 살아가자’고 決心했거든요. 

萬若 2010年 그 現場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 

그 생각을 數도 없이 해봤어요. 마음 같아서는 當場 强力하게 抗議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한들 以後의 狀況이 果然 달라졌을까 하는 疑問이 드는 것도 事實이에요. 當時 社會 雰圍氣와 消極的인 제 性格上, 時間을 되돌려도 그때와 똑같이 그냥 避하려고 애쓰는 것 外에는 다른 行動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요. 

徐 檢事가 미투를 외친 窮極的인 理由는 무엇인가요. 

過去의 被害者가 安全하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오고 다시는 저와 같은 일로 苦痛 받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世上은 只今과는 달라진 모습이기를 바라는 懇切한 마음에서였습니다. 强者도, 弱者도, 女性도, 男性도 모두 함께 幸福한 世上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社會의 性暴力 被害者, 甲질 被害者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먼저 加害者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當身이 當身 人生의 主人公이듯, 世上 모든 사람은 各自 自己 人生의 主人公이다. 돈, 權力, 性別 等 그 어떤 것과 關係없이 모두의 삶은 所重하고 尊重받아야 한다. 더는 略字라고 함부로 對하고, 侮辱과 恐怖로 被害者의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被害者들에게는 ‘決코 當身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各自 至極히 所重한 存在’라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힘내라’는 말보다는 2次 加害에 對한 嚴重한 處罰 等 對策을 마련해 더는 被害者들이 괴롭힘을 當할까 겁먹거나 躊躇하지 않아도 되는 制度的 與件이 造成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의 計劃은요. 

眞實이 제대로 밝혀지고, 健康과 名譽가 回復돼 다시 檢査로서 正常的으로 勤務했으면 합니다. 제가 제대로 日常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많은 被害者들이 勇氣를 잃을 것이라는 많은 분들의 걱정을 共感하기에 힘들더라도 잘 이겨내기로 마음먹었어요. 抛棄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겁니다. 제 모습을 보며 單 한 名이라도 勇氣를 얻을 수 있다면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가 예전과 같이 正常的으로 勤務할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엄청난 苦痛이 따를 것을 覺悟하고 있어요. 하루빨리, 被害者들이 正말 아무렇지 않게 日常으로 돌아갈 수 있는 社會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寫眞 조영철 記者 디자인 김영화 헤어 微笑(김청경헤어페이스) 메이크업 박새롬(김청경헤어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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