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疑問詞 眞相糾明委員會 調査官 고상만氏의 ‘人權 運動 그 뒷이야기’|여성동아

PEOPLE

젊은 人權運動家의 肖像

疑問詞 眞相糾明委員會 調査官 고상만氏의 ‘人權 運動 그 뒷이야기’

“焚身한 露店商, 抑鬱함을 呼訴하는 無期囚, 疑問詞 遺家族들의 가슴 속 恨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 글·이영래 記者 ■ 寫眞·정경택 記者

2003. 05. 14

大學 時節 한 先輩의 疑問詞 事件 以後 人權運動에 뛰어들게 돼 10餘年間 人權 現場을 누볐던 人權運動家 고상만氏가 最近 人權 現場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밝힌 冊을 내 話題가 되고 있다. 2003年 韓國 社會에서 人權이란 어떤 意味인가? 그에게 들어보았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고상만씨의 ‘인권 운동 그 뒷이야기’

人權運動家. 무슨무슨 運動家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疑問이 있었다. 果然 具體的으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事實 人權運動家란 表現은 얼마나 模糊한가? 人間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問題는 모두 人權問題다. 生存權을 保障해달라고 가두 籠城을 벌이는 露店商들의 問題일 수도 있고, 性戱弄이나 性暴行 被害者의 問題일 수도 있고, 連日 夜勤에 시달리는 勞動者의 苦悶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包括的이라 意味가 模糊해지는 어떤 表現이나 單語는 특정한 人物을 통해 바라볼 때 그 輪廓이 드러나기도 한다.
‘人權運動家 고상만’. 書店에서 冊을 고를 때 冊 題目보다 지은이의 이름을 먼저 보는 건 오랜 習慣이기도 했지만, 지은이 이름 위에 적힌 人權運動家란 表現이 記者의 視線을 끌었다. 人權運動家 고상만氏(33)와의 인터뷰는 한마디로 우리 時代의 人權이란, 또 人權運動이란 무엇인가에 對한 質問이고, 答이다.
“처음 出版社에선 ‘아름다운 사람 고상만‘이라고 하자고 했어요. 근데 제가 싫다고 했죠. 왜냐하면 제가 봐도 전 아름답지 않거든요(웃음). 代身 人權運動家라고 해달라고 했어요. 人權運動家는 제 꿈이었거든요. 眞짜예요, 전 人權運動家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70年生. 89學番. 60年代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條件에서 대충 386世代로 分類하는 게 容易할 그는 ‘人權運動家’란 表現을 自身의 이름 앞에 단 것만으로 더는 幸福할 수 없다는 表情을 지었다.
90年代初, 그는 江原道의 한 大學에서 學內 民主化 運動을 펼쳤다. 私學 非理와 腐敗를 淸算하자는 一群의 젊은이들. 그러나 그들은 學院 暴力輩의 辱說과 脅迫, 때론 監禁과 暴行에 시달렸다. 當時 學生會長에 出馬했던 한 先輩는 閑寂한 道路邊에서 疑問의 死體로 發見되기도 했다. 警察署, 官公署 等을 돌아다니며 歎願해봤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火를 이기지 못한 그의 親舊는 焚身을 決行하기도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맞았다고 警察署에 申告하면 다음날 깡牌들이 ‘니들이 申告했냐’고 또 와서 때렸어요. 아무도 믿을 수 없었죠. 正말 힘이 없으면 이렇게 當하는구나. 抑鬱하게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구나. 그때 決心했어요. 내가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힘 없고 疏外된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자. 人權運動家, 그때 제 마음속에 새겨놓은 꿈이었어요.”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힘과 돈이 없어 權力과 富의 橫暴 앞에 無防備로 露出된 사람들. 어딘가에 하소연하지도 못한 恨에 分身이나 自殺 等 極端的인 方法을 選擇하기도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中 그 누구보다 그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사람은 95年 焚身自殺한 露店商 최정환氏다.
최정환氏는 父母에게 버림받은 孤兒였다. 더군다나 뺑소니 交通事故로 脊椎를 다쳐 휠체어 身世를 지는 重症 障礙人이었다. 露店商으로 生計를 이어가던 그는 94年 12月, 區廳側이 動員한 用役깡牌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지는 重傷을 입은 뒤 區廳側을 暴力嫌疑 等으로 刑事 告訴하겠다고 抗議했다. 그러자 區廳側은 露店 强制 撤去도 中斷하고 장사도 默認해주겠다며 그를 懷柔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고상만씨의 ‘인권 운동 그 뒷이야기’

그가 記憶하는 가장 안타까운 事件은 孤兒 出身 障礙人 露店商 최정환氏의 焚身 自殺이었다. 그의 눈물 앞에 그는 盟誓했다. 當身의 이야기를 남기겠노라고.


그러나 區廳側은 約束을 지키지 않았다. 傷處가 아문 뒤, 다시 露店을 펼친 그는 露店 團束에 나선 區廳側에게 自身의 生命줄과도 같은 배터리를 押守당하고 말았다. 約束이 틀리지 않냐며 區廳에 찾아갔으나 아무도 그를 相對해주지 않았다. 휠체어에 실린 채 區廳 바깥으로 내쫓긴 그는 結局 自身의 몸에 불을 당기는 것으로 마지막 抗議를 代身했다.
“甚한 火傷으로 그분은 얼마 後에 숨을 거두셨는데, 돌아가시기 前 제가 그분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當身의 抑鬱함에 關心을 가지고 있다고. 그분은 기쁨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셨는데…. 事實 그런 일들은 묻혀 잊혀지게 마련이죠. 가난한 露店商의 焚身에 關心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그때 決心했죠. 언제가 이분의 이야기를 世上에 알려야겠다고. 그 생각은 제겐 어떤 負債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99年엔 택시運轉士 지용석氏 焚身事件이 있었다. 지용석氏는 택시 運轉中 다른 택시와 些少한 接觸事故를 일으켰다. 그때 現場에 나타난 警察官의 첫마디는 “짜식들, 좀 천천히 다니지. 왜 急하게 다녀서 事故를 내”였다. 그後 지용석氏는 一週日間 警察署 交通係로 出頭하게 되는데, 그 過程에서 온갖 핀잔과 無視, 侮辱을 當했다고 主張하며 焚身 自殺을 企圖했다.
‘아무도 나에게 尊待말을 하지 않았다. 生業에 바쁜 나를 불러놓고 自身들이 時間이 날 때까지 4時間이고 5時間이고 나를 앉혀놓고 無視했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無能力했던가!’
自己 侮蔑感에 시달리던 그는 ‘이 서운함이 가실 때까지 當分間 警察 서비스 憲章을 떼어달라 請해주십시오’라는 遺言을 남기고 警察署 正門 앞에서 焚身 自殺을 企圖했다.
96年 한총련 女大生 性醜行 事件도 深刻한 人權侵害事例라고 그는 말했다. 當時 秋美愛 現 민주당 議員이 被害 女學生들의 證言을 國會에서 濾過 없이 紹介, ‘國會의 品位를 떨어뜨린다’며 國會 鄭會 騷動까지 일어난 바 있다.
‘한 戰警은 옆에 있는 애한테 배고프지 않냐. 나가서 밥 사주겠다. 밥을 사준다고 그런 다음에 女子 애가 가만히 있었더니, 自己 혼자 그 애를 때리면서 웃더니 ‘내가 밥 사줄 테니까 내 것도 빨아줄래?’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애가 울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를 棍棒으로 때리고 그 옆에 있던 先輩 같은 사람이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고 소리쳤는데, 그 소리친 애를 헬멧 같은 것으로 찍고, 그런 式으로 辱說이 繼續되었습니다.(1996년 10月 9日, 當時 서울警察廳 國政監査, 內務 委員會 會議錄 中)’
人權侵害 事件들은 只今도 셀 수 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와 잠깐의 舌戰이 벌어졌다. ‘露店商 問題는 旣存 商家의 上卷을 侵害하는 行爲이지 않은가, 當時 한총련은 問題가 없었는가’ 等 該當 事案에 對해 여러가지 反論이나 疑問을 던져보았다. 그는 아주 明快하게 그 모든 質問에 答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고상만씨의 ‘인권 운동 그 뒷이야기’

高氏는 10餘 年의 人權運動 活動 中 느낀 것, 에피소드 等을 모아 最近 '니가 뭔데…'라는 冊을 냈다.


“人權은 是是非非를 떠나서 그럼에도 不拘하고 지켜져야 하는 最小限의 어떤 것입니다. 잘못이 있다고 人權을 侵害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배우지 못했다고 無視와 蔑視를 當하는 사람들이 우리 社會에는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自身이 이야기를 들어주길, 自身의 抑鬱함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바로 人權運動家의 役割이죠.”
‘抑鬱하다’고 하는 小市民들의 怨望은 이런 形態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미스테리韓 事件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疑問死日 수도 있고, 司法機關의 無誠意, 또 가난으로 제대로 된 辯護를 받지 못한 채 犯人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민원일 수도 있다.
그는 板門店 金訓 中尉 死亡事件 國防部 特別調査團 民間 諮問委員으로 參與한 바 있다. 98年 2月24日,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內 벙커에서 板門店 警備大隊 小隊長 金訓 中尉가 머리에 貫通傷을 입고 死亡한 채 發見됐다. 當時 이 事件은 陸士 出身의 靑年 將校가 拳銃으로 自殺했다는 點, 自殺場所가 共同警備區域 내였다는 點, 그리고 自殺이라고 判斷하기엔 풀리지 않는 疑問이 너무 많다는 點 때문에 言論의 集中的인 照明을 받았다. 事態가 複雜해지자 政府는 特別調査團을 만들어 事件 調査에 나섰다. 그러나 特別調査團은 金訓 中尉가 自殺했다는 旣存의 發表를 再確認하는 데 그쳤다.
“軍隊에서 죽는 사람들이 한해 平均 3百餘 名에 이릅니다. 모두 所重한 우리의 아들들입니다. 그 家族들 中 3分의 1은 아들의 죽음에 對해 疑問을 表示하고 抗議합니다. 이른바 軍 疑問詞 遺家族들입니다. 問題는 結論이 아닙니다. 家族들이 疑惑을 가지지 않고 納得할 만한 誠意 있는 事件 調査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自己 아들의 死亡 原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일 父母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抑鬱함을 함께 풀어주는 것도 人權運動의 한 形態인 거죠.”
그는 人權侵害 狀況이 가장 深刻한 곳은 司法機關이라고 했다. 警察이나 判檢事, 이들도 사람인 以上 失手할 可能性은 있다. 때문에 映畫 ‘쇼생크 脫出‘의 主人公처럼 抑鬱하게 獄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假令 92年에 있었던 金巡警 事件은 이러한 例를 明白하게 보여준다. 카페 從業員 李某孃과 旅館에 投宿했던 金巡警은 그 旅館에서 이模樣이 死體로 發見되면서 殺害犯으로 몰렸다. 그는 抑鬱하다고 主張했지만 情況證據上 다른 解釋의 餘地가 없어 보였다. 1審과 2審에서 懲役 12年을 宣告받았던 그는 偶然히 眞犯이 잡히면서 抑鬱한 獄살이를 마칠 수 있었다.
고상만氏는 이러한 일이 只今도 끊임없이 反復되고 있다고 主張한다. 알리바이가 立證되지 않았다는 理由로 尊屬殺人 嫌疑로 拘束된 한 無期囚의 歎願, 그리고 九老區 私債業所 女職員 被殺事件의 殺人犯으로 몰린 邦某氏 等의 事例를 羅列하며 그는 얼마나 많은 刑事事件이 疑問이 풀리지 않은 채 終結되고 判決이 내려졌는지를 따졌다.
“그런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怨恨은 바로 가난에 對한 것입니다. 돈만 있었더라도 辯護士를 사서 이 抑鬱함을 벗을 수 있을 텐데 하는…. 勿論 大韓民國은 法治主義 國家이며 民主主義를 志向합니다. 하지만 正말 모든 이들이 法은 萬人에게 平等하며 抑鬱한 일을 겪는 사람이 없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한 社會가 바르고 맑아지려면 그런 抑鬱함을 풀어주어야 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人權運動이란 게 두루뭉실 限界가 없죠. 抑鬱함을 呼訴하는 그 모든 일들에 關心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人權運動人 거죠.”
그는 自身의 冊 ‘니가 뭔데…‘를 딱 세 사람만은 반드시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세 사람은 바로 新任 警察廳長, 國防長官, 法務部 長官이다. 그러나 抑鬱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도, 抑鬱하게 監獄에 가는 사람도 없는 그런 世上, ‘社會的 弱者 優先의 原則’李 지켜지는 ‘아름다운 偏見’의 社會를 이룩하기 위해선 이들뿐 아니라 모두 關心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거듭 强調했다.

  • 推薦 0
  • 댓글 0
  • 目次
  • 共有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