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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 먹여살릴 돈 빌려달라” : 보다스튜디오

“國民 먹여살릴 돈 빌려달라”

登錄 2013.04.01.
“왜 쿠테타를 했느냐” 朴 大統領에게 묻자…



朴正熙 前大統領 通譯官 백영훈氏에게 듣는다

18代 大統領選擧에서 朴槿惠 大統領에게 몰票를 던진 50代 以上 有權者들은 朴正熙 前 大統領의 經濟開發 時代를 經驗했던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딸 朴槿惠 大統領을 通해 ‘아버지 世代’가 이룬 經濟 奇跡의 歷史라는 過去를 보는 同時에 새 大韓民國의 未來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런 한便에서는 最近 法院의 緊急措置 違憲 判決 等 獨裁 時代 民主化에 對한 再評價도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社會를 貫通해 왔던 相反된 價値와 觀點들이 한꺼번에 婚材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社會는 只今 左냐 右냐, 保守냐 進步냐 하는 理念 葛藤과 함께 成長이냐 福祉냐, 安保냐 經濟냐 하는 論難에 世代 間의 葛藤까지 있다. 많은 사람이 社會統合을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和合만이 ‘統一時代’라는 새로운 未來를 열 수 있다. 著名한 歷史學者 에드워드 카는 “歷史란 現在와 過去와의 對話”라는 말을 남겼다. 現在 時點에서 우리가 未來 歷史로 前進하려면 過去와의 對話가 必要하다. 그 出發點은 朴正熙 時代여야 할 것이다.

三星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자동차가 世界를 휩쓸고 文化 스포츠 한류가 世界를 强打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우리 內部에 있는 葛藤은 무엇이고, 우리의 不足한 點은 무엇인지 整理할 때가 됐다. 우리는 거기서 얻는 敎訓으로 未來로 가는 엔진의 힘을 再充電해야 한다.

戰爭 以後 잿더미라는 絶望과 挫折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始作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려면 初心(初心)에서부터 出發하는 것이 必要하다. 그 一環으로 동아일보는 創刊 93周年 企劃을 통해 이제 막 大統領이 되었던 ‘1964年 朴正熙’의 이야기를 싣기로 했다.

‘朴正熙 前 大統領의 처음’을 보았던 사람으로 1964年 末 西獨 國賓 訪問에 通譯官으로 따라간 백영훈 當時 中央大 敎授(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腸·寫眞)가 있다. 當時 朴 大統領을 가장 가까운 距離에서 지켜본 그는 가난한 祖國을 後代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執念으로 가득했던 ‘젊은 朴正熙’를 생생하게 記憶하고 있었다. 그리고 地下 1000m의 坑道에서 목숨 바쳐 일했던 派獨 鑛夫들과 東洋에서 온 天使라는 말을 들으며 獻身했던 派獨 看護師들이야말로 오늘의 大韓民國을 이룩한 礎石이라고 말한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企劃物로 理念의 잣대가 아닌 歷史의 主役 國民의 觀點으로 現代史를 整理할 것이다. ‘젊은 朴正熙’의 모습은 그 첫 回 格이다.

▼ 次官使節團 “돈 못빌리면 西獨서 죽겠다” ▼

‘50年前 經濟復興의 初心’에서 배운다 - 朴正熙 通譯官 백영훈氏 證言

1961年 5月 16日 軍隊를 앞세워 執權한 朴正熙는 ‘하면 된다’는 意志만 確固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經濟’는 意欲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執權하며 내걸었던 公約대로 絶望과 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民生苦를 解決하고자 하는 熱望은 剛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5·16軍事政變 直後인 1961年 11月 美國의 援助를 期待하고 존 F 케네디 大統領을 찾아간 그는 門前 박대당한다. 美國 側에서 보기에, 準備해 들고 간 事業計劃書들이 荒唐하기도 했지만 當時 케네디 政府는 5·16軍事政變 自體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韓國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認定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全體로 쿠데타가 波及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兆朕이 일고 있었다.

美國 金融機關들도 野薄하게 退字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無償 援助를 주고 있는 나라에 借款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韓國의 未來를 不信하고 있음이 歷歷했다. 美國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日本밖에 없었지만 ‘國交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朴正熙는 새로운 나라를 注目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江의 奇跡’으로 불리며 新興 强大國으로 浮上하고 있던 西獨이었다. 西獨 經濟는 1950年부터 每年 年平均 8%臺의 實質 成長率을 記錄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分斷國家의 아픔, 敗戰의 傷處를 딛고 堂堂하게 일어서는 西獨의 모습을 보며 朴正熙는 ‘우리도 戰爭의 잿더미에서 漢江의 奇跡을 이뤄 보자’라는 覺悟를 갖게 되었다.

朴正熙 軍事政府는 1961年 11月 末 정래혁 商工部 長官을 主軸으로 ‘次官 交涉 使節團’을 構成해 西獨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駐獨(駐獨) 大使館에도, 使節團에도 獨逸語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搜所聞 끝에 알아보니 李承晩 大統領 時節 國費 留學生으로 西獨(뉘른베르크 에를랑겐臺)에서 經濟學 博士 學位를 받고 歸國한 獨逸 博士 1號 백영훈 氏(83·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腸)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中央大 敎授로 在職하고 있었다.

百 院長은 使節團의 公式 通譯官으로 合流한다.

使節團은 西獨에 到着하긴 했지만 官僚들 中 누구도 韓國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當時 우리 處地는 只今으로 치면 아프리카 最貧國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次官 交涉 使節團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當時 西獨의 經濟長官은 2年 뒤 總理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百 院長은 窮理 끝에 에르하르트 長官과 같은 大學을 나온 自身의 大學 恩師를 찾아갔다.

“韓國의 딱한 事情을 이야기하면서 長官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事情했지만 恩師 亦是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結局 每日 아침 6時 敎授 宅 앞으로 가서 師母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呼訴했다. ‘師母님, 저를 살려 주세요. 長官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一週日이 지나자 恩師에게서 連絡이 왔다. “次官과의 約束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年 12月 11日 韓國 使節團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次官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長官까지 만날 수 있었다. 韓國은 마침내 1億5000萬 마르크(當時 3000萬 달러)의 商業借款을 빌리는 데 成功한다. 使節團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最初의 商業借款이었다.

使節團은 歸國하고 百 院長은 뒷마무리를 위해 獨逸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問題가 생겼다. 銀行의 支給 保證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韓國의 재무부를 中心으로 海外 銀行들을 搜所聞했지만 國家 信認度가 없었던 韓國에 支給 保證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奇跡的으로 成功한 次官 協商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狀況이었다. 다시 百 院長의 말이다.

“못사는 나라 國民의 心情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當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每日 울면서 獨逸 親舊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支給保證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番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獨逸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消息을 들었는지 大學에서 같이 工夫했던 親舊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當時 西獨 政府에서 勞動部 課長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課長은 대뜸 百 院長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失業者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百 院長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課長은 다음 날 두꺼운 書類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只今 西獨은 炭鑛에서 일할 鑛員이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地下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勞動者들도 다 逃亡갔다. 或是 韓國에서 한 5000名 程度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看護助務士度 2000名假量 必要하다. 屍體 닦는 險한 일도 해야 하는데 獨逸人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萬若 鑛夫와 看護師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給與를 擔保로 돈을 빌릴 수 있다.”

百 院長은 卽時 신응균 駐獨 臺詞를 찾았다. 新 大使는 百 院長의 말을 듣더니 “5000名이 아니라 5萬 名도 可能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不足한 韓國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新 大使는 本國에 緊急 電文을 넣었고 韓國에서는 바로 募集 公告가 난다.

當時 西獨 鑛夫의 한 달 賃金은 國內 賃金의 7∼8倍에 達했다. 飛行機 自體를 타기도 어려운 時節이다 보니 高賃金을 받고 西獨 같은 先進國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韓國의 失業率은 40%에 肉薄했으며 1人當 國民所得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泰國(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韓國銀行 殘額이 2000萬 달러도 되지 못했던 時節이다.

1次 鑛夫 500名 募集에 2894名이 몰렸다. 6 對 1의 競爭率이었다. 選拔 資格을 2年 以上 經歷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都市에 사는 經驗 없는 大學 卒業者들度 無條件 申請했다. 炭鑛 坑道조차 구경 못한 ‘假짜 鑛夫’들이 書類를 假짜로 만들어 應募했다. 1963年 9月 13日子 경향신문은 이렇게 報道하고 있다.

‘身體檢査에서 失格된 1600名을 除外한 1300餘 名 中 折半이 鑛夫 經歷이 없는 高等失業者임이 밝혀졌다. 奴僮廳 關係者에 依하면 이들 鑛夫 募集에 應募한 假짜 鑛夫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假짜 鑛山就業證明書를 사서 提出했으며 이 證明書 中에서 幽靈 鑛山 20餘 個所가 發見되었다. 奴僮廳은 全國 鑛山地域에 監督官을 派遣해 幽靈 鑛山에 對한 調査를 할 計劃이다.’

實際로 1963年부터 1966年까지 獨逸에 入國한 鑛夫의 30%가 大學 卒業者였다. 西獨 루르 地方으로 派遣된 鑛夫들은 거의 大學 卒業者였다.

다들 關心이 높았던 事案이었던지라 勞動部는 1次 募集에 合格한 應試者들을 마치 考試合格者 發表하듯 各 新聞에 名單을 실을 程度였다.

드디어 1963年 12月 22日 午前 5時 獨逸 뒤셀도르프 空港에 鑛夫 1陣 123名이 到着했다. 이들은 北部 函보른 炭鑛과 뒤셀도르프 西쪽 아헨 地域에 있는 에슈바일러 炭鑛에 配定됐다. 派獨 鑛夫들은 地下 坑道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甚至於 목숨까지 잃는 境遇도 있었다. 이들은 年金 貯蓄 生活費를 除外한 月給을 고스란히 祖國에 있는 家族에게 送金했다. 1977年까지 獨逸로 건너간 鑛夫는 7932名, 看護師는 1萬226名이다.

이들의 收入은 韓國 經濟 成長의 種子돈 役割을 했다. 이들이 韓國으로 送金한 돈은 年間 5000萬 달러로 한때 韓國 國民總生産(GNP)의 2%에 達했다. 鑛夫와 看護師들의 派獨 契約 條件은 ‘3年間 韓國에 돌아갈 수 없고 積金과 함께 한 달 俸給의 一定額은 반드시 送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給與는 모두 獨逸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韓國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支給 保證을 서서 借款 導入이 이뤄진 것이다. 迂餘曲折 끝에 次官 미션을 成功的으로 完遂한 百 院長은 지친 몸을 이끌고 歸國한 뒤 다시 中央大 敎授로 復職한다.

3年이 흐른 1964年 말, 百 院長은 다시 한番 朴正熙 大統領의 急作스러운 呼出을 받는다. 朴 大統領은 그 前해인 1963年 10月 軍政(軍政)을 끝내고 民間人 資格으로 大統領選擧에 出馬해 15萬 票라는 僅少한 差로 尹潽善 候補를 누르고 第3共和國 大統領이 된 터였다.

朴 大統領은 百 院長을 玄關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番만 더 도와 달라”고 付託한다. 西獨 하인리히 뤼브케 大統領이 朴 大統領을 國賓 資格으로 招請했는데 通譯官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 라인江 奇跡 設計者 “高速道 깔고 車-製鐵-精油 育成” 助言 ▼

西獨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靑瓦臺 會議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深刻한 表情이었다. 西獨으로 갈 飛行機가 없다는 거였다.

“當初 5萬 달러를 주고 20日 동안 美國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飛行機를 빌렸는데 美 議會가 쿠데타로 執權한 韓國 軍人이 美國 飛行機를 利用하면 다른 나라를 刺戟한다고 갑자기 取消해 버리고 만 거였다. 獨逸 訪問 열흘 前이었다.”

百 院長은 그 자리에서 大統領 特使로 任命됐다. 當場 西獨으로 날아가 西獨 政府에 飛行機를 提供해 달라고 付託하라는 것이었다. 百 院長은 窮理 끝에 日帝强占期 때 獨逸에서 留學했으며 第3共和國 初代 總理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前 동아일보 社長에게 付託하여 함께 西獨으로 날아갔다. 崔 前 社長은 獨逸에 두터운 人脈을 갖고 있었다.

百 院長 一行은 朴正熙 大統領의 訪獨(訪獨) 日程을 相議하겠다며 뤼브케 大統領의 祕書室長과 勞動部 次官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飛行機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勇氣를 내 運을 뗐다. “飛行機가 없다. 西獨이 잘사는 나라이니 飛行機 좀 提供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氣가 막힌다는 表情이었다.

“獨逸 官僚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一旦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前까지 連絡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直前 飛行機를 提供하겠다는 連絡이 왔다. 結局 1964年 12月 3日 홍콩을 經由해 西獨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旅客機(보잉 707)가 經路를 變更해 서울에 着陸했다. 朴 大統領이 그 飛行機를 타고 獨逸에 갔다.”

大統領 專用機가 아니라 一般 사람들이 타는 常用 路線에 就航 中이던 飛行機에 急히 타게 된 것이다. 朴 大統領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空港까지 無慮 28時間이나 걸려 獨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當時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海外 經驗이 없었는지는 飛行機에 同行했던 조선일보 政治部 이자헌 記者의 回顧(‘派獨 鑛夫 45年史’)에 잘 나와 있다.

“大統領과 長官들은 1等席에 타고 다른 一行은 이코노미席에 탔다. 化粧室에 가 보니 異常하게 생긴 物件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用途냐를 두고 論難이 일었다. 그때 女記者로 唯一하게 遂行記者로 包含됐던 韓國日報 정광모 記者가 ‘물비누’라고 說明해 줘 失笑를 禁치 못했다. 記者들도 國際的 村놈이었고 大統領 一行도 참 초라한 行次였다. 機內의 朴 大統領 表情도 밝지는 않았다.”

朴 大統領이 西獨에 國賓 資格으로 招請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그 傳해 末부터 派遣되기 始作한 西獨의 鑛夫들 때문이었다. 百 院長의 說明이다.

“連日 西獨 新聞과 放送에서 獻身的으로 일하는 韓國 鑛夫들에 對한 이야기가 실렸다. 地下 坑道 1000m에서도 時間外 勤務를 마다않고 일하는 鑛夫들의 모습이 TV에 放映되자 西獨人들이 크게 感銘을 받았다. 마침내 國會議員들이 國會에서 ‘韓國에 關心을 가져야 한다. 韓國의 大統領을 招請해 우리의 마음을 傳하자’는 決議案을 採擇하기에 이르렀다.”

28時間의 긴 飛行 끝에 到着한 朴 大統領 一行은 1964年 12月 5日 大統領과 總理의 따뜻한 歡迎을 받는다. 百 院長은 그날 에르하르트 總理가 열어 준 晩餐 자리에서 보여 준 朴 大統領의 모습을 平生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東洋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當時 마흔일곱이던 朴 大統領은 西獨 總理를 앞에 놓고 ‘우리 國民 折半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軍人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國民 全部가 失業者다. 라인 江의 奇跡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朴 大統領 말을 通譯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總理의 質問에 朴 大統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韓國도 西獨과 마찬가지로 共産國家들로부터 威脅을 받고 있다. 共産國家들을 이기려면 于先 잘살아야 한다. 내가 革命을 한 理由는 政權을 탐해서가 아니다. 政治가 어지럽고 經濟가 疲弊해져 이대로는 大韓民國이 蘇生할 수 없다는 危機意識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國家 再建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總理는 向後 韓國의 歷史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助言을 한다. 百 院長은 두 사람이 나눈 對話를 낱낱이 記錄했고, 外務部에 그 記錄을 넘겼다.

“朴 大統領의 말이 끝나자 總理가 大統領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朴 大統領의 熱情과 使命感에 感化된 듯 自身의 經驗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韓國을 위한 助言을 했다.”

에르하르트 總理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經濟長官 할 때 韓國에 두 番 다녀왔다. 韓國은 山이 많던데 山이 많으면 經濟發展이 어렵다. 高速道路를 깔아야 한다. 獨逸은 히틀러가 아우토반(高速道路)을 깔았다. 高速道路를 깔면 그 다음엔 自動車가 다녀야 한다. 國民車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朴 大統領을 바라보며 總理의 말이 이어졌다.

“自動車를 만들려면 철이 必要하니 製鐵工場을 만들어야 한다. 燃料도 必要하니 精油工場度 必要하다. 經濟가 安定되려면 中産層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中小企業을 育成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經濟顧問을 보내 주겠다.”

實際로 朴 大統領 歸國 以後 西獨은 다섯 名의 經濟顧問을 韓國으로 보낸다.

獨逸 招待 經濟部 長官(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總理는 이런 點에서 우리에겐 恩人과 같은 存在다. 當時 朴 大統領을 만났을 때 西獨 2代 總理(1963∼66年)로 在任하고 있던 그는 戰爭의 廢墟에서 허덕이던 獨逸人들에게 ‘모두를 爲한 繁榮’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獨逸 經濟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朴 大統領에게 “日本과도 손을 잡아라”는 破格的인 助言도 했다.

“獨逸은 프랑스와 16番을 싸웠다. 獨逸 사람들은 只今도 프랑스에 恨이 맺혀 있다. 하지만 2次 世界大戰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總理가 프랑스 드골 大統領을 찾아가 握手했다. 韓國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共産主義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百 院長은 “朴 大統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表情으로 ‘우리는 日本과 싸운 일이 없다. 每日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總理는 ‘指導者는 未來를 봐야 한다’고 答했다”고 傳했다. 에르하르트 總理의 말은 結局 이듬해인 1965年 韓日協定 締結로 結實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對話는 韓國 歷史에서 매우 重要한 契機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總理는 朴 大統領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會談 後 擔保가 必要 없는 2億5000萬 마르크를 韓國 政府에 提供하겠다는 破格的인 提案을 한다.

다음 날은 朴 大統領이 獨逸의 한 工科大에서 講演을 했다. 그런데 豫想外의 일이 벌어졌다.

“獨逸 사람은 敎授가 講義하러 들어오면 拍手 代身 주먹으로 冊床을 數次例 가볍게 두드리는데 事前에 이 이야기를 미처 大統領께 傳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朴 大統領이 壇上에 올라가자 學生들이 너도나도 冊床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大統領은 이 모습을 보고 揶揄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通譯官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說明할 수도 없고…. 이 兩班 얼굴이 빨개졌다. 唐慌했는지 미리 準備해 간 原稿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學生들이 또 주먹으로 冊床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朴 大統領이 ‘아. 無視가 아니라 傾聽의 意味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安心하고 原稿를 제대로 읽기 始作했다(웃음). 演說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朴 大統領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文化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弄談調로 핀잔을 주기도 했다.”

朴 大統領은 가는 곳마다 “韓國을 도와 달라”고 呼訴했다. 그날 學生들에게 했던 演說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江의 奇跡처럼 漢江의 奇跡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朴 大統領은 뤼브케 大統領의 案內를 받아 韓國의 鑛夫들이 일하는 루르 炭鑛을 訪問하기도 했다. 韓國에서 온 大統領을 기다리며 선 鑛員들의 얼굴엔 온통 石炭이 묻어 있었고 作業服 亦是 흙투성이였다.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가 壇上에 올랐다. 現地 鑛夫들로 構成된 밴드가 愛國歌를 연주하기 始作했다. 그런데 아무도 愛國歌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餘 名의 鑛夫 等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演奏가 끝나자 朴 大統領이 손手巾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演壇으로 걸어 나갔다.

“萬里他鄕에서 이렇게 相逢하게 되니 感慨無量합니다….”

大統領의 準備된 演說은 여기서 몇 句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痛哭으로 變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朴 大統領은 아예 原稿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鑛夫 여러분, 家族이나 故鄕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生前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後孫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熱心히 합시다. 나도 熱心히….”

結局 大統領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西獨 大統領도 눈시울을 적셨다. 鑛夫들은 大統領이 탄 車 窓門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痛哭했다.

西獨에서 머문 一週日(7∼14日) 동안 朴 大統領은 自動車 專用道路 아우토반을 달렸고 製鐵所를 見學했다. 가장 關心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政權下에서 總延長 1萬4000km를 目標로 建設하기 始作해 2次 世界大戰으로 中斷될 때까지 3860km를 完成시켰던 ‘아우토반’은 朴 大統領이 防毒할 무렵 ‘世界에서 自動車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道路’로 有名했다. 當時 朴 大統領은 西獨 側 關係者에게 아우토반의 建設과 管理 方法, 所要 費用과 建設 期間, 建設 裝備 等을 仔細히 물었다. 結局 3年 뒤인 1967年 11月 7日 靑瓦臺 會議에서 建設部 長官에게 京釜高速道路 建設을 指示하며 直接 陣頭指揮까지 하기에 이른다.

百 院長은 “‘大韓民國 建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朴正熙’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經驗이 나의 平生 삶을 이끌어 준 羅針盤이다”라고 말한다.

“當時 朴 大統領을 보며 그가 나라와 國民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强한 印象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朴 大統領이 中間쯤 自動車를 全部 세우더니 車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陸 女史도 西獨 訪問 내내 눈물을 훔쳤다. 男便 때문에 울고 鑛夫와 看護師 때문에 울고.”

百 院長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只今의 大韓民國을 만든 것은 朴 大統領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故鄕을 떠나 言語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鑛夫와 看護師들의 獻身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經濟 發展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大韓民國을 만든 韓國人들이 正말 자랑스럽다.”



:: 백영훈 院長 프로필 ::

△고려대 相對 卒業, 서울대 經濟學 碩士, 獨逸 에를랑겐臺 博士 △중앙대 商大 敎授, 商工部 長官·大統領經濟顧問, 韓國防衛産業學會 會長, 國家科學技術諮問委員會 委員 歷任, 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 院長 △은탑産業勳章, 大統領 有功記念碑 受賞, 國民勳章 모란장, 獨逸聯合共和國 大十字勳章



허문명 오피니언팀長 angelhuh@donga.com

“왜 쿠테타를 했느냐” 朴 大統領에게 묻자…



朴正熙 前大統領 通譯官 백영훈氏에게 듣는다

18代 大統領選擧에서 朴槿惠 大統領에게 몰票를 던진 50代 以上 有權者들은 朴正熙 前 大統領의 經濟開發 時代를 經驗했던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딸 朴槿惠 大統領을 通해 ‘아버지 世代’가 이룬 經濟 奇跡의 歷史라는 過去를 보는 同時에 새 大韓民國의 未來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런 한便에서는 最近 法院의 緊急措置 違憲 判決 等 獨裁 時代 民主化에 對한 再評價도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社會를 貫通해 왔던 相反된 價値와 觀點들이 한꺼번에 婚材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社會는 只今 左냐 右냐, 保守냐 進步냐 하는 理念 葛藤과 함께 成長이냐 福祉냐, 安保냐 經濟냐 하는 論難에 世代 間의 葛藤까지 있다. 많은 사람이 社會統合을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和合만이 ‘統一時代’라는 새로운 未來를 열 수 있다. 著名한 歷史學者 에드워드 카는 “歷史란 現在와 過去와의 對話”라는 말을 남겼다. 現在 時點에서 우리가 未來 歷史로 前進하려면 過去와의 對話가 必要하다. 그 出發點은 朴正熙 時代여야 할 것이다.

三星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자동차가 世界를 휩쓸고 文化 스포츠 한류가 世界를 强打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우리 內部에 있는 葛藤은 무엇이고, 우리의 不足한 點은 무엇인지 整理할 때가 됐다. 우리는 거기서 얻는 敎訓으로 未來로 가는 엔진의 힘을 再充電해야 한다.

戰爭 以後 잿더미라는 絶望과 挫折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始作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려면 初心(初心)에서부터 出發하는 것이 必要하다. 그 一環으로 동아일보는 創刊 93周年 企劃을 통해 이제 막 大統領이 되었던 ‘1964年 朴正熙’의 이야기를 싣기로 했다.

‘朴正熙 前 大統領의 처음’을 보았던 사람으로 1964年 末 西獨 國賓 訪問에 通譯官으로 따라간 백영훈 當時 中央大 敎授(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腸·寫眞)가 있다. 當時 朴 大統領을 가장 가까운 距離에서 지켜본 그는 가난한 祖國을 後代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執念으로 가득했던 ‘젊은 朴正熙’를 생생하게 記憶하고 있었다. 그리고 地下 1000m의 坑道에서 목숨 바쳐 일했던 派獨 鑛夫들과 東洋에서 온 天使라는 말을 들으며 獻身했던 派獨 看護師들이야말로 오늘의 大韓民國을 이룩한 礎石이라고 말한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企劃物로 理念의 잣대가 아닌 歷史의 主役 國民의 觀點으로 現代史를 整理할 것이다. ‘젊은 朴正熙’의 모습은 그 첫 回 格이다.

▼ 次官使節團 “돈 못빌리면 西獨서 죽겠다” ▼

‘50年前 經濟復興의 初心’에서 배운다 - 朴正熙 通譯官 백영훈氏 證言

1961年 5月 16日 軍隊를 앞세워 執權한 朴正熙는 ‘하면 된다’는 意志만 確固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經濟’는 意欲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執權하며 내걸었던 公約대로 絶望과 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民生苦를 解決하고자 하는 熱望은 剛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5·16軍事政變 直後인 1961年 11月 美國의 援助를 期待하고 존 F 케네디 大統領을 찾아간 그는 門前 박대당한다. 美國 側에서 보기에, 準備해 들고 간 事業計劃書들이 荒唐하기도 했지만 當時 케네디 政府는 5·16軍事政變 自體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韓國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認定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全體로 쿠데타가 波及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兆朕이 일고 있었다.

美國 金融機關들도 野薄하게 退字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無償 援助를 주고 있는 나라에 借款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韓國의 未來를 不信하고 있음이 歷歷했다. 美國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日本밖에 없었지만 ‘國交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朴正熙는 새로운 나라를 注目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江의 奇跡’으로 불리며 新興 强大國으로 浮上하고 있던 西獨이었다. 西獨 經濟는 1950年부터 每年 年平均 8%臺의 實質 成長率을 記錄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分斷國家의 아픔, 敗戰의 傷處를 딛고 堂堂하게 일어서는 西獨의 모습을 보며 朴正熙는 ‘우리도 戰爭의 잿더미에서 漢江의 奇跡을 이뤄 보자’라는 覺悟를 갖게 되었다.

朴正熙 軍事政府는 1961年 11月 末 정래혁 商工部 長官을 主軸으로 ‘次官 交涉 使節團’을 構成해 西獨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駐獨(駐獨) 大使館에도, 使節團에도 獨逸語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搜所聞 끝에 알아보니 李承晩 大統領 時節 國費 留學生으로 西獨(뉘른베르크 에를랑겐臺)에서 經濟學 博士 學位를 받고 歸國한 獨逸 博士 1號 백영훈 氏(83·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腸)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中央大 敎授로 在職하고 있었다.

百 院長은 使節團의 公式 通譯官으로 合流한다.

使節團은 西獨에 到着하긴 했지만 官僚들 中 누구도 韓國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當時 우리 處地는 只今으로 치면 아프리카 最貧國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次官 交涉 使節團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當時 西獨의 經濟長官은 2年 뒤 總理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百 院長은 窮理 끝에 에르하르트 長官과 같은 大學을 나온 自身의 大學 恩師를 찾아갔다.

“韓國의 딱한 事情을 이야기하면서 長官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事情했지만 恩師 亦是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結局 每日 아침 6時 敎授 宅 앞으로 가서 師母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呼訴했다. ‘師母님, 저를 살려 주세요. 長官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一週日이 지나자 恩師에게서 連絡이 왔다. “次官과의 約束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年 12月 11日 韓國 使節團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次官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長官까지 만날 수 있었다. 韓國은 마침내 1億5000萬 마르크(當時 3000萬 달러)의 商業借款을 빌리는 데 成功한다. 使節團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最初의 商業借款이었다.

使節團은 歸國하고 百 院長은 뒷마무리를 위해 獨逸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問題가 생겼다. 銀行의 支給 保證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韓國의 재무부를 中心으로 海外 銀行들을 搜所聞했지만 國家 信認度가 없었던 韓國에 支給 保證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奇跡的으로 成功한 次官 協商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狀況이었다. 다시 百 院長의 말이다.

“못사는 나라 國民의 心情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當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每日 울면서 獨逸 親舊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支給保證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番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獨逸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消息을 들었는지 大學에서 같이 工夫했던 親舊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當時 西獨 政府에서 勞動部 課長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課長은 대뜸 百 院長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失業者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百 院長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課長은 다음 날 두꺼운 書類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只今 西獨은 炭鑛에서 일할 鑛員이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地下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勞動者들도 다 逃亡갔다. 或是 韓國에서 한 5000名 程度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看護助務士度 2000名假量 必要하다. 屍體 닦는 險한 일도 해야 하는데 獨逸人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萬若 鑛夫와 看護師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給與를 擔保로 돈을 빌릴 수 있다.”

百 院長은 卽時 신응균 駐獨 臺詞를 찾았다. 新 大使는 百 院長의 말을 듣더니 “5000名이 아니라 5萬 名도 可能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不足한 韓國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新 大使는 本國에 緊急 電文을 넣었고 韓國에서는 바로 募集 公告가 난다.

當時 西獨 鑛夫의 한 달 賃金은 國內 賃金의 7∼8倍에 達했다. 飛行機 自體를 타기도 어려운 時節이다 보니 高賃金을 받고 西獨 같은 先進國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韓國의 失業率은 40%에 肉薄했으며 1人當 國民所得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泰國(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韓國銀行 殘額이 2000萬 달러도 되지 못했던 時節이다.

1次 鑛夫 500名 募集에 2894名이 몰렸다. 6 對 1의 競爭率이었다. 選拔 資格을 2年 以上 經歷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都市에 사는 經驗 없는 大學 卒業者들度 無條件 申請했다. 炭鑛 坑道조차 구경 못한 ‘假짜 鑛夫’들이 書類를 假짜로 만들어 應募했다. 1963年 9月 13日子 경향신문은 이렇게 報道하고 있다.

‘身體檢査에서 失格된 1600名을 除外한 1300餘 名 中 折半이 鑛夫 經歷이 없는 高等失業者임이 밝혀졌다. 奴僮廳 關係者에 依하면 이들 鑛夫 募集에 應募한 假짜 鑛夫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假짜 鑛山就業證明書를 사서 提出했으며 이 證明書 中에서 幽靈 鑛山 20餘 個所가 發見되었다. 奴僮廳은 全國 鑛山地域에 監督官을 派遣해 幽靈 鑛山에 對한 調査를 할 計劃이다.’

實際로 1963年부터 1966年까지 獨逸에 入國한 鑛夫의 30%가 大學 卒業者였다. 西獨 루르 地方으로 派遣된 鑛夫들은 거의 大學 卒業者였다.

다들 關心이 높았던 事案이었던지라 勞動部는 1次 募集에 合格한 應試者들을 마치 考試合格者 發表하듯 各 新聞에 名單을 실을 程度였다.

드디어 1963年 12月 22日 午前 5時 獨逸 뒤셀도르프 空港에 鑛夫 1陣 123名이 到着했다. 이들은 北部 函보른 炭鑛과 뒤셀도르프 西쪽 아헨 地域에 있는 에슈바일러 炭鑛에 配定됐다. 派獨 鑛夫들은 地下 坑道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甚至於 목숨까지 잃는 境遇도 있었다. 이들은 年金 貯蓄 生活費를 除外한 月給을 고스란히 祖國에 있는 家族에게 送金했다. 1977年까지 獨逸로 건너간 鑛夫는 7932名, 看護師는 1萬226名이다.

이들의 收入은 韓國 經濟 成長의 種子돈 役割을 했다. 이들이 韓國으로 送金한 돈은 年間 5000萬 달러로 한때 韓國 國民總生産(GNP)의 2%에 達했다. 鑛夫와 看護師들의 派獨 契約 條件은 ‘3年間 韓國에 돌아갈 수 없고 積金과 함께 한 달 俸給의 一定額은 반드시 送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給與는 모두 獨逸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韓國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支給 保證을 서서 借款 導入이 이뤄진 것이다. 迂餘曲折 끝에 次官 미션을 成功的으로 完遂한 百 院長은 지친 몸을 이끌고 歸國한 뒤 다시 中央大 敎授로 復職한다.

3年이 흐른 1964年 말, 百 院長은 다시 한番 朴正熙 大統領의 急作스러운 呼出을 받는다. 朴 大統領은 그 前해인 1963年 10月 軍政(軍政)을 끝내고 民間人 資格으로 大統領選擧에 出馬해 15萬 票라는 僅少한 差로 尹潽善 候補를 누르고 第3共和國 大統領이 된 터였다.

朴 大統領은 百 院長을 玄關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番만 더 도와 달라”고 付託한다. 西獨 하인리히 뤼브케 大統領이 朴 大統領을 國賓 資格으로 招請했는데 通譯官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 라인江 奇跡 設計者 “高速道 깔고 車-製鐵-精油 育成” 助言 ▼

西獨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靑瓦臺 會議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深刻한 表情이었다. 西獨으로 갈 飛行機가 없다는 거였다.

“當初 5萬 달러를 주고 20日 동안 美國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飛行機를 빌렸는데 美 議會가 쿠데타로 執權한 韓國 軍人이 美國 飛行機를 利用하면 다른 나라를 刺戟한다고 갑자기 取消해 버리고 만 거였다. 獨逸 訪問 열흘 前이었다.”

百 院長은 그 자리에서 大統領 特使로 任命됐다. 當場 西獨으로 날아가 西獨 政府에 飛行機를 提供해 달라고 付託하라는 것이었다. 百 院長은 窮理 끝에 日帝强占期 때 獨逸에서 留學했으며 第3共和國 初代 總理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前 동아일보 社長에게 付託하여 함께 西獨으로 날아갔다. 崔 前 社長은 獨逸에 두터운 人脈을 갖고 있었다.

百 院長 一行은 朴正熙 大統領의 訪獨(訪獨) 日程을 相議하겠다며 뤼브케 大統領의 祕書室長과 勞動部 次官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飛行機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勇氣를 내 運을 뗐다. “飛行機가 없다. 西獨이 잘사는 나라이니 飛行機 좀 提供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氣가 막힌다는 表情이었다.

“獨逸 官僚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一旦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前까지 連絡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直前 飛行機를 提供하겠다는 連絡이 왔다. 結局 1964年 12月 3日 홍콩을 經由해 西獨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旅客機(보잉 707)가 經路를 變更해 서울에 着陸했다. 朴 大統領이 그 飛行機를 타고 獨逸에 갔다.”

大統領 專用機가 아니라 一般 사람들이 타는 常用 路線에 就航 中이던 飛行機에 急히 타게 된 것이다. 朴 大統領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空港까지 無慮 28時間이나 걸려 獨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當時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海外 經驗이 없었는지는 飛行機에 同行했던 조선일보 政治部 이자헌 記者의 回顧(‘派獨 鑛夫 45年史’)에 잘 나와 있다.

“大統領과 長官들은 1等席에 타고 다른 一行은 이코노미席에 탔다. 化粧室에 가 보니 異常하게 생긴 物件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用途냐를 두고 論難이 일었다. 그때 女記者로 唯一하게 遂行記者로 包含됐던 韓國日報 정광모 記者가 ‘물비누’라고 說明해 줘 失笑를 禁치 못했다. 記者들도 國際的 村놈이었고 大統領 一行도 참 초라한 行次였다. 機內의 朴 大統領 表情도 밝지는 않았다.”

朴 大統領이 西獨에 國賓 資格으로 招請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그 傳해 末부터 派遣되기 始作한 西獨의 鑛夫들 때문이었다. 百 院長의 說明이다.

“連日 西獨 新聞과 放送에서 獻身的으로 일하는 韓國 鑛夫들에 對한 이야기가 실렸다. 地下 坑道 1000m에서도 時間外 勤務를 마다않고 일하는 鑛夫들의 모습이 TV에 放映되자 西獨人들이 크게 感銘을 받았다. 마침내 國會議員들이 國會에서 ‘韓國에 關心을 가져야 한다. 韓國의 大統領을 招請해 우리의 마음을 傳하자’는 決議案을 採擇하기에 이르렀다.”

28時間의 긴 飛行 끝에 到着한 朴 大統領 一行은 1964年 12月 5日 大統領과 總理의 따뜻한 歡迎을 받는다. 百 院長은 그날 에르하르트 總理가 열어 준 晩餐 자리에서 보여 준 朴 大統領의 모습을 平生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東洋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當時 마흔일곱이던 朴 大統領은 西獨 總理를 앞에 놓고 ‘우리 國民 折半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軍人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國民 全部가 失業者다. 라인 江의 奇跡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朴 大統領 말을 通譯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總理의 質問에 朴 大統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韓國도 西獨과 마찬가지로 共産國家들로부터 威脅을 받고 있다. 共産國家들을 이기려면 于先 잘살아야 한다. 내가 革命을 한 理由는 政權을 탐해서가 아니다. 政治가 어지럽고 經濟가 疲弊해져 이대로는 大韓民國이 蘇生할 수 없다는 危機意識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國家 再建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總理는 向後 韓國의 歷史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助言을 한다. 百 院長은 두 사람이 나눈 對話를 낱낱이 記錄했고, 外務部에 그 記錄을 넘겼다.

“朴 大統領의 말이 끝나자 總理가 大統領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朴 大統領의 熱情과 使命感에 感化된 듯 自身의 經驗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韓國을 위한 助言을 했다.”

에르하르트 總理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經濟長官 할 때 韓國에 두 番 다녀왔다. 韓國은 山이 많던데 山이 많으면 經濟發展이 어렵다. 高速道路를 깔아야 한다. 獨逸은 히틀러가 아우토반(高速道路)을 깔았다. 高速道路를 깔면 그 다음엔 自動車가 다녀야 한다. 國民車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朴 大統領을 바라보며 總理의 말이 이어졌다.

“自動車를 만들려면 철이 必要하니 製鐵工場을 만들어야 한다. 燃料도 必要하니 精油工場度 必要하다. 經濟가 安定되려면 中産層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中小企業을 育成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經濟顧問을 보내 주겠다.”

實際로 朴 大統領 歸國 以後 西獨은 다섯 名의 經濟顧問을 韓國으로 보낸다.

獨逸 招待 經濟部 長官(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總理는 이런 點에서 우리에겐 恩人과 같은 存在다. 當時 朴 大統領을 만났을 때 西獨 2代 總理(1963∼66年)로 在任하고 있던 그는 戰爭의 廢墟에서 허덕이던 獨逸人들에게 ‘모두를 爲한 繁榮’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獨逸 經濟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朴 大統領에게 “日本과도 손을 잡아라”는 破格的인 助言도 했다.

“獨逸은 프랑스와 16番을 싸웠다. 獨逸 사람들은 只今도 프랑스에 恨이 맺혀 있다. 하지만 2次 世界大戰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總理가 프랑스 드골 大統領을 찾아가 握手했다. 韓國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共産主義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百 院長은 “朴 大統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表情으로 ‘우리는 日本과 싸운 일이 없다. 每日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總理는 ‘指導者는 未來를 봐야 한다’고 答했다”고 傳했다. 에르하르트 總理의 말은 結局 이듬해인 1965年 韓日協定 締結로 結實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對話는 韓國 歷史에서 매우 重要한 契機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總理는 朴 大統領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會談 後 擔保가 必要 없는 2億5000萬 마르크를 韓國 政府에 提供하겠다는 破格的인 提案을 한다.

다음 날은 朴 大統領이 獨逸의 한 工科大에서 講演을 했다. 그런데 豫想外의 일이 벌어졌다.

“獨逸 사람은 敎授가 講義하러 들어오면 拍手 代身 주먹으로 冊床을 數次例 가볍게 두드리는데 事前에 이 이야기를 미처 大統領께 傳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朴 大統領이 壇上에 올라가자 學生들이 너도나도 冊床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大統領은 이 모습을 보고 揶揄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通譯官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說明할 수도 없고…. 이 兩班 얼굴이 빨개졌다. 唐慌했는지 미리 準備해 간 原稿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學生들이 또 주먹으로 冊床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朴 大統領이 ‘아. 無視가 아니라 傾聽의 意味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安心하고 原稿를 제대로 읽기 始作했다(웃음). 演說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朴 大統領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文化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弄談調로 핀잔을 주기도 했다.”

朴 大統領은 가는 곳마다 “韓國을 도와 달라”고 呼訴했다. 그날 學生들에게 했던 演說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江의 奇跡처럼 漢江의 奇跡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朴 大統領은 뤼브케 大統領의 案內를 받아 韓國의 鑛夫들이 일하는 루르 炭鑛을 訪問하기도 했다. 韓國에서 온 大統領을 기다리며 선 鑛員들의 얼굴엔 온통 石炭이 묻어 있었고 作業服 亦是 흙투성이였다.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가 壇上에 올랐다. 現地 鑛夫들로 構成된 밴드가 愛國歌를 연주하기 始作했다. 그런데 아무도 愛國歌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餘 名의 鑛夫 等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演奏가 끝나자 朴 大統領이 손手巾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演壇으로 걸어 나갔다.

“萬里他鄕에서 이렇게 相逢하게 되니 感慨無量합니다….”

大統領의 準備된 演說은 여기서 몇 句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痛哭으로 變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朴 大統領은 아예 原稿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鑛夫 여러분, 家族이나 故鄕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生前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後孫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熱心히 합시다. 나도 熱心히….”

結局 大統領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西獨 大統領도 눈시울을 적셨다. 鑛夫들은 大統領이 탄 車 窓門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痛哭했다.

西獨에서 머문 一週日(7∼14日) 동안 朴 大統領은 自動車 專用道路 아우토반을 달렸고 製鐵所를 見學했다. 가장 關心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政權下에서 總延長 1萬4000km를 目標로 建設하기 始作해 2次 世界大戰으로 中斷될 때까지 3860km를 完成시켰던 ‘아우토반’은 朴 大統領이 防毒할 무렵 ‘世界에서 自動車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道路’로 有名했다. 當時 朴 大統領은 西獨 側 關係者에게 아우토반의 建設과 管理 方法, 所要 費用과 建設 期間, 建設 裝備 等을 仔細히 물었다. 結局 3年 뒤인 1967年 11月 7日 靑瓦臺 會議에서 建設部 長官에게 京釜高速道路 建設을 指示하며 直接 陣頭指揮까지 하기에 이른다.

百 院長은 “‘大韓民國 建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朴正熙’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經驗이 나의 平生 삶을 이끌어 준 羅針盤이다”라고 말한다.

“當時 朴 大統領을 보며 그가 나라와 國民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强한 印象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朴 大統領이 中間쯤 自動車를 全部 세우더니 車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陸 女史도 西獨 訪問 내내 눈물을 훔쳤다. 男便 때문에 울고 鑛夫와 看護師 때문에 울고.”

百 院長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只今의 大韓民國을 만든 것은 朴 大統領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故鄕을 떠나 言語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鑛夫와 看護師들의 獻身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經濟 發展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大韓民國을 만든 韓國人들이 正말 자랑스럽다.”



:: 백영훈 院長 프로필 ::

△고려대 相對 卒業, 서울대 經濟學 碩士, 獨逸 에를랑겐臺 博士 △중앙대 商大 敎授, 商工部 長官·大統領經濟顧問, 韓國防衛産業學會 會長, 國家科學技術諮問委員會 委員 歷任, 現 한국산업개발연구원 院長 △은탑産業勳章, 大統領 有功記念碑 受賞, 國民勳章 모란장, 獨逸聯合共和國 大十字勳章



허문명 오피니언팀長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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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날 어머니로 생각하겠다고?” 정재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 선언하는 김혜선?! | KBS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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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女와 純情남 “날 어머니로 생각하겠다고?” 정재순에게 忠誠을 다하겠다 宣言하는 김혜선?! | KBS 240427 放送
  3. "회사 그만둬 주세요" 백현우 차갑게 밀어내는 도도퀸 홍해인 (feat. 근데 좀 귀여운) | tvN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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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女王 "會社 그만둬 주세요" 백현우 차갑게 밀어내는 도도퀸 홍해인 (feat. 근데 좀 귀여운) | tvN 240427 放送
  4.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멈추는 법을 배우고 싶은 금쪽이의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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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育兒 금쪽같은 내새끼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멈추는 法을 배우고 싶은 金쪽이의 속마음
  5. [아형하이라이트] (에이핑크 레전드 라이브) 전용 핸드 마이크로 고음 쭉쭉 뽑아내는 2.5세대 걸그룹 에이핑크 | JTBC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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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兄님 [亞型하이라이트] (에이핑크 레전드 라이브) 專用 핸드 마이크로 高音 쭉쭉 뽑아내는 2.5世代 걸그룹 에이핑크 | JTBC 240427 放送
  6. 웰컴파티 카메라 감독 박서진 & 임주리의 투 샷! 눈물의 재하 | KBS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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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하는 男子들 웰컴파티 카메라 監督 박서진 & 임주리의 투 샷! 눈물의 在荷 | KBS 240427 放送
  7. 강한나×주종혁, 헐렁하게 선보이는 원곡 훼손 챌린지! (ft. 카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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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닝맨 강한나×주종혁, 헐렁하게 선보이는 원곡 毁損 챌린지! (ft. 카피캣)
  8. 윤은성, 홍해인을 가족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치밀한 밑작업 ㄷㄷ | tvN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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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女王 윤은성, 홍해인을 家族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緻密한 밑作業 ㄷㄷ | tvN 240427 放送
  9. 홍해인, 출소한 백현우 일거수 일투족 밀착 스토킹 중?! (TMI 메모메모...) | tvN 2404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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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女王 홍해인, 出所한 백현우 一擧手 一投足 密着 스토킹 中?! (TMI 메모메모...) | tvN 240427 放送
  10. [선공개] 김희철 긴장하게 만든 전체 인구 약 3%의 특별한 동물 관상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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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운 우리 새끼 [先公開] 金熙喆 緊張하게 만든 全體 人口 約 3%의 특별한 動物 觀相 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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