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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消化 안돼 한때 千臺…이젠 最高 健康食으로[현미밥] : 보다스튜디오

거칠고 消化 안돼 한때 千臺…이젠 最高 健康食으로[현미밥]

登錄 2013.02.04.
벼에서 껍질만 艱辛히 벗겨낸 쌀이 玄米다. 普通 玄米밥을 補藥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다이어트食品으로도 人氣가 높다. 흰쌀밥과 比較하면 食餌纖維가 豐富하고 動脈硬化와 糖尿病 豫防에도 좋다.

몸에 좋은 藥이 쓰다는 말처럼 玄米밥은 거칠고 消化하기 힘든 것이 短點이다. 이 때문에 얼마 前까지만 해도 가난의 象徵이었고 驅迫덩어리였다. 歷史的으로 玄米밥으로 인해 가장 逼迫을 받았던 人物이 儒敎에서 走者(朱子)로 받드는 南宋 때의 大學者 朱熹(朱熹)다.

走者가 有名해지니 四方에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찾아 왔는데 그中에 好굉이라는 者도 있었다. 走者는 自身을 찾는 사람에게 언제나 玄米밥을 待接했으니 好宏圖 例外가 아니었다. 그러자 好굉이 “아무리 山中이라고 하더라도 먼 데서 온 손님에게 어찌 한 마리 닭과 한盞 술이 없을 것이냐”며 不快한 氣色을 보이고는 이튿날 作別人事도 없이 떠났다.

以後에 監察御史가 된 好굉이 走者를 괴롭힌다. 世上을 惑世誣民에 빠뜨리고 잘못된 學問을 가르친다며 열 가지 罪目을 만들어 謀陷했다. 그리고 朱子의 목을 베어 그릇된 學問을 퍼뜨리는 者를 根絶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末年에 迫害를 當하자 平素 走者를 따르던 사람들도 走者의 집 앞을 지나면서 들르지 않았고 오히려 朱子의 弟子였다는 事實이 發覺될까 봐 變裝하고 다녔다니 世上의 險惡함이 이와 같다고 利益은 ‘星湖僿說(星湖僿說)’에서 恨歎했다. 好굉에게 甚한 逼迫을 받았던 走者는 結局 귀양을 가서 죽는다. ‘訟事(宋史)’ 호굉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현미밥을 待接받고는 無視當했다며 怨恨을 품은 好굉의 人物 됨됨이도 그렇지만 當時에 玄米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食事였는지 斟酌할 수 있다. 그런데 800年이 지난 只今은 玄米밥이 最高의 健康食으로 꼽히고 있으니 好굉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反應을 보일지 궁금하다.

宰相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먹기 싫어하는 玄米밥을 먹었던 人物도 있다. 한 武帝 때의 宰相 公孫弘(公孫弘)으로 大器晩成의 標本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公孫弘은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工夫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故鄕에서 監獄을 지키는 看守가 됐지만 一字無識이었기 때문에 失手를 저질러 그 자리에서 解任됐다. 工夫를 해야겠다고 決心한 公孫弘은 마흔 살에 工夫를 始作해 나이 六十에 博士가 되었고 以後 昇進을 거듭해 結局 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參考로 歷史冊에서 公孫弘에 對한 評價는 多少 엇갈린다. 예컨대 調整會議에서 어떤 問題가 爭點이 될 境遇 長點과 短點을 同時에 指摘하면서 皇帝가 스스로 決定을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皇帝의 뜻을 最大限 反映한 有能한 參謀라는 評價도 있지만 責任을 回避하는 參謀였다는 評價도 함께 받는다.

어쨌든 業務에 對한 評價를 떠나서 公孫弘은 청렴하고 儉素한 宰相으로 이름이 높았다. 많은 祿俸을 받았음에도 언제나 베옷을 걸치고 지냈으며 玄米밥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上에는 고기가 한 접시 以上 오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俸給은 모두 손님을 待接하는 데 支出했는데 個人的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待接할 境遇에는 나랏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漢書)’ 公孫弘列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윤덕노 飮食文化評論家]

벼에서 껍질만 艱辛히 벗겨낸 쌀이 玄米다. 普通 玄米밥을 補藥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다이어트食品으로도 人氣가 높다. 흰쌀밥과 比較하면 食餌纖維가 豐富하고 動脈硬化와 糖尿病 豫防에도 좋다.

몸에 좋은 藥이 쓰다는 말처럼 玄米밥은 거칠고 消化하기 힘든 것이 短點이다. 이 때문에 얼마 前까지만 해도 가난의 象徵이었고 驅迫덩어리였다. 歷史的으로 玄米밥으로 인해 가장 逼迫을 받았던 人物이 儒敎에서 走者(朱子)로 받드는 南宋 때의 大學者 朱熹(朱熹)다.

走者가 有名해지니 四方에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찾아 왔는데 그中에 好굉이라는 者도 있었다. 走者는 自身을 찾는 사람에게 언제나 玄米밥을 待接했으니 好宏圖 例外가 아니었다. 그러자 好굉이 “아무리 山中이라고 하더라도 먼 데서 온 손님에게 어찌 한 마리 닭과 한盞 술이 없을 것이냐”며 不快한 氣色을 보이고는 이튿날 作別人事도 없이 떠났다.

以後에 監察御史가 된 好굉이 走者를 괴롭힌다. 世上을 惑世誣民에 빠뜨리고 잘못된 學問을 가르친다며 열 가지 罪目을 만들어 謀陷했다. 그리고 朱子의 목을 베어 그릇된 學問을 퍼뜨리는 者를 根絶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末年에 迫害를 當하자 平素 走者를 따르던 사람들도 走者의 집 앞을 지나면서 들르지 않았고 오히려 朱子의 弟子였다는 事實이 發覺될까 봐 變裝하고 다녔다니 世上의 險惡함이 이와 같다고 利益은 ‘星湖僿說(星湖僿說)’에서 恨歎했다. 好굉에게 甚한 逼迫을 받았던 走者는 結局 귀양을 가서 죽는다. ‘訟事(宋史)’ 호굉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현미밥을 待接받고는 無視當했다며 怨恨을 품은 好굉의 人物 됨됨이도 그렇지만 當時에 玄米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食事였는지 斟酌할 수 있다. 그런데 800年이 지난 只今은 玄米밥이 最高의 健康食으로 꼽히고 있으니 好굉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反應을 보일지 궁금하다.

宰相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먹기 싫어하는 玄米밥을 먹었던 人物도 있다. 한 武帝 때의 宰相 公孫弘(公孫弘)으로 大器晩成의 標本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公孫弘은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工夫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故鄕에서 監獄을 지키는 看守가 됐지만 一字無識이었기 때문에 失手를 저질러 그 자리에서 解任됐다. 工夫를 해야겠다고 決心한 公孫弘은 마흔 살에 工夫를 始作해 나이 六十에 博士가 되었고 以後 昇進을 거듭해 結局 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參考로 歷史冊에서 公孫弘에 對한 評價는 多少 엇갈린다. 예컨대 調整會議에서 어떤 問題가 爭點이 될 境遇 長點과 短點을 同時에 指摘하면서 皇帝가 스스로 決定을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皇帝의 뜻을 最大限 反映한 有能한 參謀라는 評價도 있지만 責任을 回避하는 參謀였다는 評價도 함께 받는다.

어쨌든 業務에 對한 評價를 떠나서 公孫弘은 청렴하고 儉素한 宰相으로 이름이 높았다. 많은 祿俸을 받았음에도 언제나 베옷을 걸치고 지냈으며 玄米밥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上에는 고기가 한 접시 以上 오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俸給은 모두 손님을 待接하는 데 支出했는데 個人的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待接할 境遇에는 나랏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漢書)’ 公孫弘列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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