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포 蹴球를' 아십니까?
히딩크가 指揮棒을 잡기 前까지는 월드컵에 나갈 때마다
韓國 蹴球는 世界의 壁을 體感하고 와야만 했죠.
그래도 多幸인 건 썩어빠진 蹴協에도
깨어있는 委員들이 있어
1990年부터 先進蹴球를 받아들이려는 努力이 있었는데
그 結果로 獨逸의 크라머 監督부터 비쇼베츠,
히딩크를 거쳐 클리스만까지
總 9名의 國代 監督이 다녀갔습니다.
個人的으로 제가 認定하는 外國人 監督은
딱 세名입니다.
히딩크, 벤투, 그리고..
'니포 蹴球'를 韓國에 남겨준 '발레리 니폼니시.'
세名 다 共通點이 있습니다.
韓國 蹴球에 眞心이었다는 것.
自身이 생각한 蹴球 哲學을 椄木시키기 위해
K리그 1,2部리그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自身의 커리어 뿐만 아니라
韓國 蹴球의 未來를 생각해 사람들을 키워놓고 갔죠.
그 中에 제 가슴에 찐하게 남아있는 監督이 니폼니시입니다.
主로 타겟型 蹴球를 追求하며
所謂 뻥蹴球가 亂舞하던 90年代에
K리그 유공 코끼리 監督으로 赴任해
미들 中心의 組織 蹴球가 뭔지
처음으로 4-4-2 포메이션을 들고 나와 신드롬을 일으켰던.
히딩크가 壓迫을 基本으로 하는
토털사커의 完成을 보여줬다면
니폼니시의 '니포 蹴球'는 패스 爲主의 組織力 蹴球의
始初였다는 點에서 國內리그에 新鮮함을 줬었죠.
그래서 찐 蹴球팬이라면 니폼니시 監督을 많이 그리워하죠.
그래서 富川SK의 競技에는 觀客들이 많았고
特히 當時에는 니포축구와 함께 4-4-2를 驅使했던
수원삼성과의 競技는 票값이 아깝지 않다는
讚辭들이 많았습니다.
생각보다는 96 아디다스컵 말고는 優勝이 없는데
이건 當時 SK의 蹴球團 支援이 眞짜 別로였고
小農民 같은 스프린터 스트라이커 한名만 있었어도
니포 蹴球의 完成이었는데 그걸 하나 안 求해줌;;
윤정환을 爲始한 富川 美들의 浸透패스를
正確히 받아먹을 수 있는 스트라이커 한名만 있었어도
K리그 歷史엔 富川의 王朝時代가 記錄됐을 겁니다.
SK 蹴球團長이 어떤 사람이었나면
全國의 SK注油所 看板이 몇갠데
그깟 蹴球團 弘報가 뭔 도움이 되겠냐고;;
니폼니시의 니포축구는 4年 間(1995~1998)
韓國 蹴球界에 新鮮한 衝擊을 주었고
그 結果, 國産 앵커맨인 윤정환이 登場했고,
'니포 蹴球'의 弟子들이 2023年 K1 리그 司令塔의
33%를 掌握하고 있죠.
그 中 요즘 軸팬들에게 좋은 評價를 받는
서울LG의 김기동 監督이 있고요.
最近 江原FC에 赴任한 윤정환 監督,
濟州유나이티드의 남기일 監督,
仁川유나이티드의 曺盛煥 監督,
淸州FC 최윤兼 監督 等
모두 니폼니시의 後裔들입니다.
只今은 아니지만 鋼鐵 前 火星FC 監督,
송선호 前 富川 監督도 있고요.
https://v.daum.net/v/20230616060557107
'니포 蹴球' 後裔들, 2023 K리그1 司令塔 33% 占領
劣惡한 球團 支援에도 組織力 蹴球로
늘 5强 컨덴더를 維持했던 니폼니시.
그 러시아 外國人 監督은 韓國 蹴球에 眞心이었고,
뻥蹴球였던 韓國 蹴球에 새로운 現代 蹴球를 심었고
한段階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結局 國代 유니폼을 입은 니포를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1988年에는 카메룬 代表팀을 맡아 90 이탈리아 月컵에
아프리카팀 8强의 業績을 이뤄냈지요.
니포가 國代를 한番쯤 맡아줬더라면 只今의 韓國 蹴球보다는
한段階 더 업그레이드 됐을텐데요.
클린스만을 겪고나서
니포가 유난히 더 생각이나 몇 字 적어봤습니다.
"蹴球 選手는 劇場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映畫를 좋아해야한다."
-발레리 니폼니시
[발레리 니폼니시(Valery Nepomnyashchy)]
-1943.8.7(80歲)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카메룬 代表팀 8强
-1995 富川SK(유공 코끼리)
-2000 선양下이시
-2001 산프레체 히로시마
-2004 상하이 선화
-2006 우즈베키스탄 代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