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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建國 70周年 앞두고 革命 聖地 踏査 烈風|週刊東亞

國際

中國 建國 70周年 앞두고 革命 聖地 踏査 烈風

  • 하종대 동아일보 記者

    orionha@donga.com

    入力 2019-09-27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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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옌안혁명기념관에는 건국 70주년을 맞아 홍색관광 열풍이 불고 있다. [하종대]

    中國 옌안革命記念館에는 建國 70周年을 맞아 紅色觀光 烈風이 불고 있다. [하종대]

    9月 17日 午前 中國 산시(陝西)省 옌안(延安)市 옌촨(延川)縣 原案이(文安驛)진 兩者虛(梁家河)村. 시진핑 中國 共産黨 總書記이자 國家主席이 文化大革命 時節 中學校를 마치자마자 시골로 下方돼 同僚 知識靑年 14名과 함께 7年間 고된 農村生活을 直接 體驗한 곳이다. 

    洞네에서 4.5km나 떨어진 곳에 案內서비스센터(接對服務中心)가 設置돼 있다. 지난해 새로 擴張했다는 案內서비스센터 앞面은 黃土高原의 典型的 住居地인 野오둥(窯洞·토굴) 樣式이다. 이른 아침부터 中國 各地에서 紅色觀光(中國말 紅色여유·紅色旅遊)을 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紅色觀光이란 中國 共産黨의 革命 史跡地를 돌아보는 것을 뜻한다. 말이 觀光이지 事實上 하나의 團體學習 過程이다. 40名이 團體로 왔다는 산둥(山東)省 성리(勝利)會社 職員들은 모두 抗日鬪爭 當時 中國 紅軍 服裝으로 統一했다. 上衣에 黨員 배지까지 單 사람도 있었다. 올해는 建國 70周年이라 다른 때보다 이런 紅色觀光客이 부쩍 늘었다. 

    兩者虛村은 黃土高原에 자리 잡은 山間 奧地다. 산시省의 聖徒 시안(西安)에서 6車線 高速道路를 타고 300km假量 달리면 옌안이 나오고 옌안에서 다시 4車線 高速道路를 70km 가까이 달린 뒤 地方道를 지나야 洞네가 나온다. 高速道路는 모두 最近에 開設했거나 擴張했다. 兩者虛 溪谷 兩쪽은 모두 높은 山이다. 荒墟(黃河)처럼 地名에 下(河)字가 붙어 있으나 實際로는 幅이 10m도 채 안 되는 개川이다.

    시 主席 奧地 下方돼 土窟 生活

    시 主席이 1969年 1月 23日 下方돼 처음 살았다는 土窟은 素朴하기 그지없다. 20㎡ 남짓한 空間에 높이 1m假量의 溫突 寢牀과 아궁이 1個, 缸아리 3~4個, 호롱불 촛臺와 寢牀의 卓子, 그리고 남포燈과 라디오 하나가 全部였다. 當時 知識靑年들은 洞네 밖 消息을 궁금해했고, 라디오로 이를 解決했다. 寢牀 머리맡엔 ‘류류펀(六六粉)’이라고 적힌 牌말이 놓여 있다. 衛生이 좋지 않았던 當時 몸에 寄生하는 이와 서캐, 벼룩을 撲滅하는 代表的인 藥品이었다고 解說員은 說明했다. 

    靑年 시진핑은 이곳에서 同僚 5名과 宿食을 함께 했다. 寢牀에는 當時 使用했다는 이불이 반듯하게 개켜 있었다. 解說員은 門 入口에서 다섯 番째가 시진핑의 잠자리였다고 說明했다. 이 地域에서는 普通 굴 3個가 한 집이었지만 當時 시골로 내려간 즈稱(知靑·知識靑年의 준말로 當時 中國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은 여러 名이 1個 土窟을 썼다. 



    靑年 시진핑은 1969年부터 칭화(淸華)大에 合格해 1975年 10月 베이징으로 다시 올라오기까지 3個의 서로 다른 土窟에서 居住했다. 처음엔 6名이 한곳을 썼지만 두 番째는 4名이, 마지막에는 2名이 함께 썼다. 

    시진핑은 처음엔 이곳 生活에 잘 適應하지 못했다. 시중쉰(習仲勳) 國務院 副總理의 아들로 태어나 中國 高位 幹部들이 集團 居住하는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자란 시진핑에게는 條와 옥수수 爲主의 食事, 不潔한 居住環境, 고된 勞動 等 山間奧地의 生活은 견디기 힘든 苦役이었다. 한때 몰래 베이징으로 脫出하기도 했던 그는 “돌아가라. 大衆에 依支하지 않으면 來日은 없다”는 外叔의 助言을 듣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以後 原案이 人民公社 兩者虛 大隊(大隊)에서 말 그대로 現地 農民들과 한 몸처럼 融和했다. 或是나 이가 옮을까 두려워 農民 가까이에 가는 것조차 꺼려하던 過去의 그에서 完全히 變身한 것이다. 每日 農民들의 어려움을 듣고 함께 解決策을 摸索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곳 農民들이 좀 더 잘살 수 있을까 窮理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1973年 그는 먼저 農民들을 推動해 마을 入口에 깊은 우물을 팠다. 洞네 住民들이 河川 가까이에 얕게 우물을 파 쓰는 바람에 暴雨가 내리기만 하면 우물이 망가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팠던 그 우물은 ‘즈稱징’(知靑井·知識靑年이 판 우물)으로 命名, 保存돼 있다. 

    시진핑은 熱心히 일했지만 父親 시중쉰이 마오쩌둥(毛澤東)에게 反革命分子로 몰려 있는 文化大革命 時期라 여러 次例 入黨이 拒絶됐다. 하지만 文化大革命 末期 中央黨이 “父母에게 問題가 있지만 子女에 影響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決定을 내리자 옌촨현 黨委員會는 그의 平素 行實과 業績을 考慮해 討論 끝에 1974年 1月 드디어 入黨을 許可했다.

    길 넓히고, 우물 波高, 貯水池 만들고, 메탄가스 發展까지

    국방대 학생들이 홍군사령부가 위치한 왕자핑(王家坪) 팔로군총사령부 유적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종대]

    國防大 學生들이 洪軍司令部가 位置한 王子핑(王家坪) 팔로軍摠司令部 遺跡地에서 案內員의 說明을 듣고 있다. [하종대]

    入黨과 同時에 그해 1月 10日 시진핑은 兩者虛村 當支部 寸書基로 選出됐다. 以後 그의 業績은 작지 않다. 먼저 그해 8月 村의 燃料 問題를 解決하고자 메탄가스 發展 탱크를 산시省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後日 ‘런民(人民)一步’ 記事를 보고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回顧했다. 또 마을에 대장間을 設置하고 農器具를 스스로 製作해 썼으며, 나아가 마을 商店을 열고, 방앗間도 따로 만들었다. 1974年 始作해 이듬해까지 5個의 貯水池를 追加로 建設해 作物 栽培 面積을 넓혔다. 1975年 6月에는 마을 住民들과 함께 마을에서 원안이진까지 車가 다닐 수 있도록 新作路를 建設했다. 칭화대에 合格해 베이징으로 올라오기 前까지 黨支部 寸書基로 在職한 期間이 2年도 채 안 됐지만 그의 政治的 業績은 놀랄 만큼 컸다. 그는 이런 業績을 널리 인정받아 優秀 ‘先進 일꾼’에 選拔되기도 했다. 

    시진핑의 業績은 村 歷史觀에 그대로 記錄돼 있다. 寸 歷史觀의 主要 歷史 34個 가운데 그와 關聯된 內容이 13個나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兩者虛를 떠난 뒤에도 兩者許에 깊은 關心을 표했다. 푸젠(福建)省 푸저우(福州)市 黨書記이던 1993年과 國家主席이던 2015年 두 次例에 걸쳐 兩者虛를 訪問해 當時 農民들과 懷抱를 풀었다. 農民들이 어려움을 吐露할 때마다 便紙를 보내 慰勞하고 關心을 표했으며, 支援도 아끼지 않았다. 村에 小學校가 設置된 것도 그가 보낸 出捐金 德分이었다. 2013年에는 100年 만의 大洪水로 相當數 野오둥 家屋이 무너지자 隣近에 아예 아파트를 지어 144家口가 移住할 수 있도록 配慮했다. 

    이 때문에 當時 養子許에서 시진핑과 함께 生活했던 農民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렵게 찾아낸 1951年生 商店 管理人은 “그때 나는 軍隊에 있어 시진핑을 보지 못했다. 農民들로부터 얘기만 들었다”고 말했다. 兩者虛村을 取材하는 동안 或是나 否定的인 內容이 나올까 싶어 줄줄 따라다니던 公安 警察官은 “2000年 주룽지(朱鎔基) 總理의 퇴경환림(退耕還林) 政策으로 農耕地가 大部分 林野로 바뀌어 當時 시진핑과 함께 農事를 짓던 農民은 現在 兩者許에 거의 없다”고 說明했다. 兩者虛 農民들은 “只今은 果樹 農事를 짓거나 都市로 나가 勞務 일을 하고 있다”고 그는 傳했다. 

    옌안이 位置한 산시 北部地域(中國말 山베이·?陝北)은 生存 危機에 몰린 中國 洪君(紅軍)을 살린 革命 聖地(聖地)다. 中國人은 革命 라五趣(老區)라고 부른다. 海拔 1000~2000m 山이 줄줄이 이어지는 奧地라 過去에는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只今은 高速道路가 모두 뚫려 試案에서 兩者虛까지 4時間이면 올 수 있지만, 過去에는 山길을 걸어야 했다. 1934年 10月 中國 紅軍은 國民黨 君의 討伐作戰에 몰려 이듬해 10月까지 370日間 380餘 次例 戰鬪를 거치며 14個 性에 있는 18個의 높은 山과 24個의 큰 江을 건너 옌안에 到着했다. 

    산시省엔 시중쉰의 故鄕 푸핑(富平)縣이 있다. 푸핑은 普通 富貴平安(富貴平安)을 意味한다. 富貴는 經濟的으로 富裕하고 政治的으로 地位가 높으며 몸이 健康하고 마음이 便安한 狀態를 뜻한다. 하지만 푸핑현의 푸핑(富平)은 또 다른 뜻으로 使用된다. 不서태평(富庶太平)이라는 意味로, 個人的으로 富裕한 狀態가 아니라 모든 人民이 함께 富裕해지고 나라가 安定돼 모두가 便安하게 살 수 있는 狀態를 말한다. 

    一般 農家에서 태어난 시중쉰은 故鄕 이름처럼 部署太平의 뜻을 품고 일찍이 革命에 눈을 떴다. 21歲 나이에 山間(陝甘·산시省과 간쑤省의 略稱) 邊境地域 소비에트 註釋에 올라 ‘와와(娃娃·어린아이)주석’으로 불렸다. 그는 中國 革命 元老 가운데 群衆路線을 가장 模範的으로 追求한 革命家로 推仰받는다. 1959年 國務院 副總理까지 올랐으나 文化大革命 直前 마오에 依해 反革命分子로 몰려 16年間 監獄에 갇혔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復活과 함께 復權돼 광둥(廣東)省 書記로 在職하면서 特區 設置를 처음 主唱해 成功으로 이끄는 等 中國 改革·開放 및 市場經濟의 先驅者이기도 하다.

    시중쉰 生家??·??墓所 每日 300~400名씩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 시중쉰의 생가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하종대]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의 父親 시중쉰의 生家를 觀覽客들이 살펴보고 있다. [하종대]

    故鄕에서 人氣가 높은 시중쉰의 生家와 墓所는 푸핑현에 그대로 保存돼 있다. 生家는 이 地域 傳統 樣式으로 여름 더위를 避하기 위해 北向(北向)인 點이 特徵이다. 재밌는 事實은 야오둥이 집 지을 돈이 없는 貧窮한 사람들의 집이 아니라는 點이다. 시중쉰의 父親은 平地에 집을 지었지만 바로 왼쪽에 5m 깊이로 土窟을 만들었다. 降水量이 적은 이곳에서는 土窟이 여름 더위를 避하고, 깊은 우물을 파기 쉬우며, 黃土高原에서 날아오는 모래바람을 避하기에도 좋아 平地라도 土窟집을 만들어 산다. 

    每日 1000~2000名씩 몰리는 洋字허와는 差異가 있지만 시중쉰의 生家와 妙所에도 하루 300~400名의 觀覽客이 온다고 管理人은 傳했다. 特히 建國 70周年인 올해는 觀覽客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參觀을 마친 다음 날 午前 TV를 켜니 中國 CCTV 아침 뉴스 ‘자오원톈샤(朝聞天下)’에 시 主席의 하루 活動 內容이 나온다. 30分間의 뉴스 가운데 23分이 시 主席 얘기다. 過去 후진타오(胡錦濤) 主席 時節 後 主席의 뉴스는 6~8分에 不過했다. 最近 2~3年 사이에 일어난 變化라고 中國 駐在 韓國人 知人이 傳했다. 하지만 한 中國人 農民은 “그래요? 잘 안 봐 몰라요”라며 無關心을 表示했다. 

    시 主席 執權 10年째가 되는 2022年 누가 黨 總書記로 選出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 中國人 知識人들은 한결같이 시 主席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음 世代로 넘어갈 後繼 構圖 亦是 全혀 形成되지 않은 狀態다. 官營媒體에 나오는 시 註釋에 對한 評價는 덩샤오핑을 넘어 마오쩌둥에 比肩된다. 中國夢(中國夢)과 剛한 中國(中國말·强起來)을 旗幟로 14億 中國人을 督勵하는 시 主席이 退任 以後 이런 評價를 이어갈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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