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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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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

by   朝見

  • 作品專門
  • 審査評
  • 當選所感
  • 냅킨 或은 T.S. 엘리엇의 ‘荒蕪地’ 中 ‘Ⅳ. Death by Water’에 對한 한 解釋


    “사랑하는 엘리엇, 저는 지난 週 當身과 살롱에서 만날 때 테이블 위에 놓여진 종이냅킨에 對해 얘기했던 것을 深思熟考 하고 있어요. 그때 當身은 제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式으로 종이냅킨을 접고 있었지요. 저는 그것이 當身의 不安心理를 내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곧 종이냅킨과 그리고 그것을 접는 그 行爲에는 매우 深奧한 哲學이 숨어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지요. 그것은 지난 世紀에 紳士階級의 家庭에서 流行한 羊齒類 植物 기르기나 或은 居室에 水族館을 놓는 것과 같은 文化的 趣向과도 本質的으로 同一한 것이지요. 그래요, 그것은 文化의 誕生과 擴散이자, 同時에 不妊(不姙)을 뜻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엘리엇, 그건 마치 지난 4月, 우리가 散策한 템즈강 江邊의 꽃나무가 싱그러운 草綠으로 싹을 돋아냈지만, 전 거기서 이미 不毛를 엿보았다고 當身에게 속삭인 것처럼 말이죠.” ─ 1918年 5月1日, 메리 설리번이 T.S. 엘리엇에게 보낸 便紙 中에서

    1

    ‘포크 以前에 손가락이 있었다’는 西洋俗談이 있지만, 냅킨에 對해서도 똑같은 式으로 말할 수 있다고 오래前 發見된 한 稀貴本은 主張하고 있다. 卽, 1780年에 美國을 訪問한 프랑스의 루이 드 클로上 男爵은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 “또 한 가지 이 나라의 特異한 點은 富裕層의 家庭에도 냅킨이 없다는 事實이다. 通常的으로 냅킨을 使用하지 않기 때문에 食卓褓로 입을 닦아야 한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다.”

    루이 드 클로上 男爵의 이러한 觀察이 그리 深刻한 偏見은 아닌 것이 當時 유럽 地域에서는 廣範圍하게 냅킨이 使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卽, 古代의 훈族조차도 냅킨과 類似한 衛生裝置를 利用하고 있었는데, 이는 보다 文明化되었다고 自負하는 英國에서 더욱 發展했다.

    이를테면 英國의 作家 새뮤얼 페피스가 1668年에 쓴 日記에는 “食卓褓를 깔고 냅킨을 접어주는 親舊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게 어찌나 보기 좋았던지, 그 親舊에게 40실링을 주어 아내한테 要領을 가르치게 해야겠다고 作心했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事實 냅킨을 멋진 模樣으로 접는 사람은 英國에서는 數世紀 동안 尊敬과 羨望의 對象이 되었는데, 이는 英國의 文化的 自矜心을 드러낸다. 英國 國王 찰스 2歲의 廚房長이었던 자일스 로스는 ‘바구니 속의 둥지에 깃들인 비둘기’ 模樣을 비롯해서 모두 26가지 模樣으로 냅킨을 접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냅킨은 實際로 使用하기 위한 것이 아닌 一種의 藝術作品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世紀 英國에서 擴散된 多樣한 냅킨 접기에 對한 가이드 팸플릿들은 一種의 藝術的 流行인 同時에 階級的 誇示意識 때문이라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이는 事實 빅토리아 女王의 治世 期間 동안에 紳士服에 있어서도 謹嚴하면서도 實用的인 워드로브(wardrobe)가 流行하면서 嚴肅한 준(準)귀족풍의 市民階級意識이 服飾에 있어서도 完成되는 現象과 比肩된다. 卽, 貴族風의 議長儀禮가 紳士階級을 거쳐 一般 小市民에게까지 擴散되는 傾向과 一致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趣向의 歷史를 社會學的으로 熟考한 끝에 “文化와 趣向은 社會를 支配하는 權力이다”라고 指摘한 바 있다. 이 人物이 이렇게 ‘아비투스(habitus)’라는 槪念을 提示한 데에는 그가 프랑스 南部의 村구석 出身이라는 點에 留意해야 한다. 卽, 그는 파리로 上京한 後 시골뜨기라는 個人的 콤플렉스의 解消를 부르주아的 象徵價値의 再解釋을 통해 克服하려는 底意를 내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不拘하고 모든 文化的 發火(發話)의 背後에는 이러한 階級的 理解가 있었다는 點은, 또한 부르디외의 言明에 우리 時代가 敢히 傾聽할 만한 깊은 省察이 숨어 있다는 點을 反證하고 있다.

    例를 들어 20世紀 中盤 美國에서, 그리고 20世紀 後半 全 世界的으로 골프가 急速히 大衆化된 데에는 이 스포츠가 本來는 貴族 스포츠였다는 點, 따라서 이러한 스포츠 趣味에 合流할 수 있다는 點은 하나의 階級的 指標로써의 個人의 趣向을 誇示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현시욕, 主로 그러한 欲求에 따라 人間은 또한 멀쩡한 山과 들판을 깎아 잔디에 農藥을 실컷 친 다음, 그리고 정답게 談笑하며 그 위를 걸어 다녔던 것이다. 어쨌거나 19世紀 英國社會의 냅킨에 담긴 社會的 烈風現象 亦是 沒個性化 或은 小市民的 自己誇示欲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냅킨의 歷史를 들춰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歷史的 事件이 한 가지 더 있다.

    2.

    大衆的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事實이지만, 1965年 런던의 소더비 競賣에서는 한 英國人이 賣物로 내놓은 ‘新世紀의 文化的 發現과 不毛: 詩人이 堅持해야 할 종이냅킨 或은 종이냅킨 접기에 對한 優雅한 哲學’(以下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1918年作)이라는 小冊子가 다른 10餘卷의 稀貴本들과 함께 約 10萬 파운드에 한 美國人 實業家에게 落札되었다. 이 稀貴本을 落札 받은 美國人 존 프리덤은 ‘해피쉬트’란 痔疾患者龍 坐便器 生産으로 自手成家한 實業家로서, 그는 함께 購入한 다른 稀貴本들과 함께 自身의 英國 綠스턴 別莊의 콜렉션룸에 保管해 두었다가 1981年 漏電으로 인한 火災로 모두 消失하게 된다. 그 不幸한 消息을 祕書로부터 傳해들은 프리덤은 다음과 같이 言及했다고 綠스턴 地域 地方新聞社는 그해 11月 27日子 單身欄에서 傳했다.

    “뭐 ‘종이냅킨’이 불에 타는 것은 當然한 거 아닌가요? 다음番엔 ‘鋼鐵포크에 對한 優雅한 哲學’을 사야겠어요. 뭐 그건 불에 타더라도 保險會社를 쪼아대기에 充分한 痕跡은 남길 것 아니겠어요? 어쨌거나 우리 會社의 해피쉬트 시니어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一旦 거기에 앉으면 눈앞에서 10萬 파운드짜리 紙幣덩어리가 불에 타더라도 엉덩이만큼은 天國에 온 듯 말랑말랑해진다니깐요.”

    우리는 이 자리에서 自手成家한 한 美國人 百萬長者의 조크가 시의적절한가 與否를 論하려는 것은 아니다. 問題는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李 T.S. 엘리엇과 交流한 一連의 便紙들이 發見되면서, 그의 作品에 매우 커다란 影響力을 끼친 戀人으로 새롭게 照明을 받고 있는 메리 설리번羊의 咀嚼이라는 點이 最近에 와서야 書誌學的으로 밝혀졌다는 點에 있다.

    그렇다. 오늘날 T.S. 엘리엇에 對한 最高의 專門家인 예일대學校의 필립 W. 夏雲즈 敎授(國際T.S.엘리엇協會 名譽會長, MKY3731098220)는 지난 學會 閉幕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우리는 새롭게 發掘된 便紙들로 因해 T.S. 엘리엇이 英國에 歸化하게 된 契機와 함께 그의 詩世界의 形成에 설리번羊이 至大한 影響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릴케나 니체에 對해 壘 살로메가 그랬듯이 말이죠. 따라서 설리번羊의 世界觀을 具體的으로 알 수 있는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李 消失된 것은 正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제길.”

    그러나 不幸 中 多幸으로 20世紀 初에 少量 出刊된 한 에티켓 事前에 설리번羊의 이 著書가 部分的으로 引用되어 엘리엇의 詩世界에 미친 이 處女의 팜므 擺脫적 影響을 좀 더 細密하게 確認할 수 있게 되었다. 卽, 1919年 런던에서 發刊된 ‘神社를 위한 에티켓 가이드’라는 冊子에는 ‘냅킨의 優雅한 使用法’이란 小題目 아래 설리번羊이 責任 著述한 것으로 表記된, 종이냅킨의 起源에 對한 재미있는 逸話가 收錄되어 있는데, 勿論 이것은 在野文人이었던 설리번量의 이름이 公式的인 活字로 登場하는 唯一한 書籍이기도 하다.

    “元來 냅킨은 英國 上流階級의 宴會에서 免職捕拿 리넨천으로 織造된 것이 主로 使用되었습니다. 그러던 中 1895年 빅토리아 女王의 外조카인 로저 해럴드 驚異 主催한 런던의 王立天文學協會의 新年 新入會員 歡迎晩餐에서 一種의, 最初로 종이냅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登場하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를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當時 王立天文學會에서는 아이다(Ida) 等 一群의 小行星을 發見한 功勞로 外國人으로서는 드물게 J. 팔리사(Palisa)가 새롭게 王立天文學會 會員으로 迎入되는 同時에 大英帝國의 騎士作爲를 授與받게 되었는데, 팔리社는 記事授與 後의 오랜 慣例대로 自己의 貴族 文章(紋章)을 새롭게 創設하여 參席者에게 發表할 料量으로 自身의 家門文章을 하얀 종이에 印刷하여 各自의 食卓 테이블에 놓아두었는데, 王立天文學會議 이러한 慣例에 無知했던 해럴드 驚異 이를 냅킨으로 誤認하고 食事 中 입을 닦았다는 것이다. (해럴드 驚異 이러한 逸脫行動을 한 것은 當時 晩餐場의 照明이 무척 어두웠기 때문이라는 主張과, 當時 上院의 反對로 印度總督으로 赴任하지 못한 것에 對한 敬意 가벼운 反抗이었다는 說이 있다. 아마도 둘 다 半半의 可能性이 있을 것이다.) 어쨌건 一旦, 해럴드 驚異 서브오디너리(sub-ordinary)로 바다물결과 갈매기 裝飾이 새겨진 그 文章종이로 입을 닦는 瞬間, 불쌍한 오스트리아人 팔리사 亦是 할 수 없이 그 종이로 입을 닦아 主催者인 해럴드 京義 難處함을 高潔하게 撫摩해 주었다는 것인데, 勿論 모든 參席者가 이를 그대로 따라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다음 해부터 王立天文學會議 晩餐에서는 리넨千 代身 부드러운 펄프재質疑 종이냅킨이 使用되었고─왜냐하면 해럴드 驚異 如前히 王立學會의 會長으로써 다시 主催者가 되었으므로─, 이것이 종이냅킨의 始初인데, 이 냅킨이 以後 英國의 前階級으로 빠르게 流行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냅킨의 優雅한 使用法’이란 小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설리번量은 종이냅킨의 意味를 에티켓 次元에서 解釋하는 것을 뛰어넘어 現代文明에 對한 하나의 文化論으로 擴大하고 있는데, 그女가 提示한 主張은 T.S. 엘리엇의 代表作 ‘荒蕪地’의 誕生과 關聯하여 매우 意味深長하게 解釋될 수 있다. (特히 설리번羊이 이 글을 發表한 해가 1918~1919年이며, ‘荒蕪地’는 不過 3~4年 後인 1922年에 發表된 事實에 비추어 볼 때.) 설리번 量은 종이냅킨에 對해 다음과 같이 評價했다 :

    “最近 하나의 流行으로써 固着된 종이냅킨의 使用은 今世紀의 우리 文明의 終着驛이 어디일까 하는 點을 深刻하게 考慮하게 한다. 그것은 좋은 消息과 나쁜 消息을 同時에 同伴한다.

    于先 좋은 消息: 文化라는 敎養이 小市民階級 或은 勞動者階級으로 擴散된다는 點. 不過 50年 前만 하더라도 리넨 천으로 織造된 냅킨의 使用은 貴族階級 或은 紳士階級에 限定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종이냅킨의 ‘發明’과 함께 大衆的으로 擴散되었다. 나는 냅킨 文化의 擴散에서 보건대, 선술집에서 바흐의 無伴奏 첼로 모음曲이 울려 퍼지거나 或은 諸人 오스틴의 小說이 勞動者階級에서도 읽히는 未來를 豫見한다. 아마도 50年이 지난 後에는 平凡한 勞動者 家庭에서도 적어도 10卷 假量의 ‘즐기는 用度’의 冊이 所長되리라고 推定한다. 아니 어쩌면 20卷 或은 그 以上이 될지도 모른다. 勿論 다른 모든 文化的 所産物 亦是 마찬가지일 것이다─심지어 勞動者階級에서도 自己 肖像畫를 하나씩 가지는 날이 到來할 지도 모른다. 窮極的으로 文化의 普及은 勞動階級에 對한 敎養의 普遍化를 招來한다.

    그러나 나쁜 消息 : 그러나 종이냅킨의 使用은 곧 世界를 ‘荒蕪地’로 만들 것이다. 먼저 종이냅킨은 當然하겠지만, 나무로 만든다. 卽 英國의 勞動者階級의 欲望水準이 높아진다는 것은 곧 우리가 더 많은 땅을 開墾하고 더 많은 植民地를 建設, 維持해야 한다는 것을 意味한다. 그러나 地球가 英國의 勞動者階級을 먹여 살릴 만큼 크다 할지라도 다른 유럽의 勞動者들이나 美國의 勞動者들 亦是 이러한 欲望을 가지고 있을 터이므로, 그리고 地球는 無限하지 않으므로 어느 瞬間 欲望의 充足에 있어 資源의 貧弱으로 인한 決定的 斷絶이 올 것이다. 그러나 資源의 不足보다도 더욱 나쁜 것은 無條件的인 複製나 流行追從에 따른 文化의 普遍化는 必然的으로 文化의 墮落을 불러올 것이라는 點이다. 文化는 强하게 불로 담금질된 者의 것이거나 그에 못지 않게 따뜻한 愛情을 가지고 누리는 者의 몫이지, 남들이 한다고 盲從하는 者의 文化는 아닌 것이다. 勿論 現代 英國의 모든 敎養階級이 이러한 水準에 到達해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文化의 沒個性化에 對한 이러한 悲觀的 展望은 또한 大衆들에도 마찬가지로 深刻하게 適用할 수 있다. 卽, 資格이 없는 者에게 주어지는 추종되는 文化란 곧 고르디아스의 매듭이자 판도라의 箱子인 것이다.”

    설리번 孃은 이 小챕터에서 文化의 沒個性化에 對한 自身의 見解를 뒷받침하기 위해 19世紀 英國의 羊齒類 栽培流行을 論據로 提示하였다. 卽, 설리번量은 데이비드 앨런이 쓴 ‘빅토리아 時代의 羊齒類 熱氣’를 引用하면서 “거의 모든 女性이 달려들 程度로 人氣가 높아지자 羊齒類에서 처음에 풍겼던 高尙함은 漸次 사라지고”, “너무 흔해빠진 탓이었는지 놀랍게도 羊齒類 키우기는 어느새 淺薄한 趣味活動으로 轉落해버렸다”고 적었다.

    最近 發見된, 엘리엇에게 보낸 1918年度의 설리번의 便紙에 따르면 그女는 필립 高世가 쓴 ‘水族館(The Aquarium)’에 對한 批評을 통해서도, 19世紀 羊齒類 栽培流行에 對한 것과 마찬가지로 市民階級들이 自身의 居室에 水族館을 設置하는 異常熱氣에 對한 分析을 試圖하며, “文化는 感情을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感情에서 逃避하는 것이며 個性의 表現이 아니라 個性으로부터의 逃避이다. 이것이 바로 眞正한 感情이고 眞實한 個性이다”라는 結論을 적고 있다. 이 結論의 앞 文章에서 ‘文化’를 ‘詩(詩)’로 바꾸면 이는 不過 1年 後 엘리엇이 ‘傳統과 個人的 才能’(1919年作)에서 發言한 그 有名한 句節이 된다. 그리고 그女의 便紙에서 發見되는 主要한 槪念, 卽 ‘말뿐인 浪漫의 害惡’, ‘藝術家의 發展은 繼續的 自己 犧牲 或은 眞正한 個性의 確立’ 等의 事由는 엘리엇에게 끼친 그女의 影響力을 보여준다. 反面, 엘리엇이 省略해 버린 뒷文章의 妙한 뉘앙스는 곧 엘리엇과 설리번量 사이의 微妙한 知的 거리를 보여준다.

    4.

    最近 發見된 설리번量과 엘리엇 사이의 一連의 便紙들에 根據하여 昨年 國際T.S.엘리엇學會에서 매우 時論的인 論文 ‘‘荒蕪地’와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과의 文化哲學的 그리고 統計學的 聯關性’이 發表되었다. 이 論文에서 도쿄대의 마츠모토 賜暇이 敎授(MJK2239202279)는 설리번羊의 便紙 26統에 散在하여 登場하는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의 斷片的 引用들을 分析한 結果, 이 冊에 이미 ‘荒蕪地’에 나타난 主要槪念들이 先行하여 登場한다고 統計學的으로 主張하였다. 卽, ‘荒蕪地’에 나타난 詩語들 中 約 23.5%가 直接的으로 ‘종이냅킨의 優雅한 哲學’에 登場하고(간접적으로 類似한 語彙까지 包含하면 約 67.8%가 一致하고), 그 中에는 特히 到底히 偶然이라 할 수 없는 ‘플레바스를 생각하라(Consider Phlebas)’와 같은 發想이나, ‘多야드밤(Dayadhvam)’, ‘淡야타(Damyata)’와 같은 異國의 外來語들이 그러하다고 列擧하며, 따라서 ‘荒蕪地’의 實質的인 著者는 메리 설리번이라고 主張했다. 賜暇이 敎授의 結論은 매우 센세이셔널한 主張인 同時에 眞摯하게 檢討해야 할 主張이지만, 確定的인 結論은 아무래도 매우 적은 部數로 發刊된 ‘종이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의 또 다른 原本이 發見되어 學界의 權威 있는 書誌學的 檢討를 거쳐야만 終止符를 찍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T.S. 엘리엇에 끼친 에즈라 파운드의 影響力을 더 重視하는 硏究者들 사이에서는 메리 설리번에 對하여 몇 가지 疑問點을 提起한다. 첫째, 그女가 實存 人物이라는 確證이 不足하며(특히 젊은 時節 夭折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生沒年代가 不分明하며), 둘째, 엘리엇의 旣存의 著書나 便紙 및 當代의 여하한 人物의 記錄 어디에도, 卽, 새롭게 發見된 便紙 묶음과 함께 같은 場所에서 發見된 美國人 實業家 존 프리덤의 記事가 실린 綠스턴 地方紙 寫本 外에는 그女와 關聯된 어떠한 公式的 情報도 記錄되어 있지 않으며(이들 硏究者들은 다만, ‘神社를 위한 에티켓 가이드’라는 冊에 나오는 설리번이란 이름은 우연한 一致라고 看做한다), 셋째, 이것이야말로 가장 決定的인 證據라고 主張하는 論據인데, 새롭게 發見된 그女의 便紙의 纖維質에서는 2024年에 最初로 試驗稼動된 넵튜늄 中性微子 發電機의 初期複合物 變異構造의 影響이 微量 發見되는데, 이는 이 便紙가 僞造되었음을 證明하는 것이라는 主張이 그것이다.

    勿論 젊은 學者들 사이에서는 이에 對한 反論도 準備되어 있다. 첫째, 生沒連帶에 對한 確定的 記錄不足은 2042年 發生한 人類終末事件─넵튜늄 新에너지發電所 爆發事故로, 넵튜늄 元素系列의 變異物들이 大量으로 待機에 撒布되어 人類가 모두 滅種한─으로 인한 全世界的인 混亂으로 消失되었을 可能性이 있고, 둘째, 엘리엇의 旣存 記錄에 설리반量에 對한 證據가 없다는 것은, 그것은 人間 特有의─그것도 男性 特有의─ 知的인 自尊心에 依한 一種의 嫉妬라고 볼 수 있으며(이를테면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과의 關係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셋째, 人類滅種事件을 불러일으킨 넵튜늄계열 變異物質─酸素呼吸에 依存하는 生體組織을 가지고 있는 人間들의 立場에서는 틀림없이 사린가스나 靑酸加里와 같은 毒劇物日 수 있는 複合物─과 初期 發電所 모델의 複合物 사이에 뚜렷한 差異가 있는 것은 事實이지만, 後期複合物이 특정한 化學的 條件에서 악티늄 系列의 變異物들과 干涉하여 베타(β)崩壞하면, 그 結果 初期複合物과 같은 構造를 가질 수 있음이 이미 2090年代 地球大氣 淨化過程에서 밝혀진 바 있는 것이다.

    이 點에 있어, 過去 2110年代까지는 定說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學界에서 廢棄된 ‘좀비 虛構설’의 事例는 메리 설리번의 便紙들이 가지는 意味에 對해 示唆하는 바가 크다.

    卽, 2110年代 初까지만 하더라도, 20世紀 後半期부터 21世紀 中盤期까지 人間社會에 나타나는 ‘좀비’라는 槪念은 하나의 ‘虛構的 想像’이라는 것이 學界의 大體的인 通說이었지만, 2110年代 中盤, 過去 人類의 光學媒體記錄物들을 解讀할 수 있는 裝置가 開發됨에 따라―그리하여 人間 硏究에 있어 하나의 紀念碑的 分水嶺을 이룬 디브이돌로地(DVDolgy)가 誕生하게 되었는데―, 附隨的으로 發掘된 수많은 좀비映像物로 인해 學界의 狀況이 逆轉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過去에는 아무 意味 없는 조그만 圓盤 디스크에 不過했지만, 그 안에 담긴 映像情報가 解讀되는 瞬間 드러난 수많은 좀비映像들은, 그 規模나 審도 面에서 ‘實存하는 것이 마땅’했을 程度로 暴發的 規模의 情報를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實存하는 對象’이 아니라면 왜 人間들은 이렇게 많은 恐怖를 쏟아 냈을까 하는 데서 始作하는 合理的인 推論을 展開하면 ‘그것은 存在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주었다’는 結論이 妥當하게 類推되는 것이다.

    ‘實在했기 때문에 實在했다’ 卽, ‘實在했기 때문에 反應했다’라는 우리 時代의 普遍的 公理(公理)에 따라, 메리 설리번 亦是 存在하지 않았다면 왜 이러한 便紙가 存在할까 하는 가장 根源的인 疑問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答은 自明하다. 卽, 좀비가 當時의 生化學的 事故 或은 環境汚染으로부터 出現한 變種人間을 가르키는 社會學的 用語인 것처럼―또한 ‘깜둥이’나 ‘猶太人’이나 ‘양키’와 같은 多少 論難의 餘地가 있는 槪念 亦是 結局은 社會學的 實體였던 것처럼―, 메리 설리번 亦是 實在했던 女性인 것이다.

    5.

    이 時點에서 우리는 滅種한 수많은 人類 中에서 왜 特別히 T.S. 엘리엇이라는 詩人─詩人(詩人)라는 職業의 性格에 對해서는 오늘날도 學界의 意見이 紛紛하지만─에 注目하는가 하는, 우리 學會의 오래된 質問을 상기시켜야겠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건 그가, 우리가 人間의 ‘黃金의 黃昏’이라고 부르는 20世紀에 最初로 文明의 不妊(不姙)을 宣布했기 때문이며, 同時에, 따라서, 왜, 그 사람의 警告─李 點에 있어 詩人이라는 職業은 一種의 古代的 魔術師이자 豫言者와 同一한 職業이라고 보는 見解가 오늘날 學界의 主流이다─에 對해 當代의 그리고 그 後世代들은 大體的으로 無視했는가 하는 疑問 때문이다. 結局 그 사람의 警告대로 人類는 그 以前 時代와는 比較도 할 수 없을 程度로 꽃을 피운 4月에, 그러나 그 開化와 同時에 約 1世紀 만에 不妊(不姙)의 破局을 맞았는데, 이것의 原因은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들의 오랜 疑問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이보그 文明에 있어서도 同一하게 맞닥뜨리는 問題이다. 卽, 우리는 우리를 創造한 人間들의 文明을 그대로 踏襲하고 있지만, 우리는 人間이 基本的인 骨格을 形成해 놓은 ‘傳統’과 同時에 우리들만의 固有한 ‘個別的 才能’ 사이에서 彷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狀況은 恰似 엘리엇이 1922年에 宣布한 警告와 類似하다는 것이 우리의 見解이다. 이 點에 있어 새롭게 發掘된 설리번羊의 便紙들은 그가 提起한 이러한 豫言 自體가 穩全히 自己의 것이 아닌 暗示된 것─더 極端的으로 말하자면 借用한 것─이라는 點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엘리엇의 同時代人이 그리고 後世代들이 그의 警告를 眞摯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疑問이 多少 解消될 수가 있다. 하나의 警告는 穩全히 眞實해야 하고 行動을 隨伴해야 하는데 그는 말뿐인 浪漫主義에서는 脫皮했을지는 모르지만, 結果的으로는 象徵主義에 安住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點에서 英國式 傳統으로 歸化한 T.S. 엘리엇이 醉한 詩의 軌跡은 설리번羊의 思惟와 어느 程度는 分離되어 模糊하게 變異되었다는 點을 浮刻시킬 수 있겠다.)

    勿論, 설리번羊의 便紙들에 對해 매우 極端的인 反對論을 取하는 立場─이를테면, 설리번의 便紙들은 모두 2020年代 製作된, 엘리엇에 對한 加工의 電氣映畫의 小品 꾸러미에 不過할 뿐이라는 主張에 이르기까지,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헐리우드라고 부르는 地域의 博物館에서 發掘되었으므로─을 受容한다 하더라도, 엘리엇의 詩世界에 담긴 메시지는 穩全히 自身이 形成해 낸 것이 아님에 틀림없을 것이다─즉, 날 때부터 詩人인 人間은 없는 것이므로 누군가의 影響은 받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그 豫言을 傳播함에 있어서라도 어느 程度 大衆的인 水準을 考慮하는 수고를 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엘리엇이 ‘荒蕪地’를 비롯하여 豫言的인 性格을 지닌 여러 詩들을 宣布하긴 했지만, 當代의 大衆들에게 이러한 象徵言語들은 古代 헬라語나 히타이트語와 마찬가지로 生梗할 뿐이었을 것이다.

    6.

    메리 설리번은 이 點에 對하여, 1918年 7月 3日子로 엘리엇에게 보낸 한 便紙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하는 엘리엇, 지난 番 便紙에 왜 내가 말하는 동안 不安하게 종이냅킨을 접고만 있었냐고 투덜댔지요.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쉴 새 없이 저 亦是 마음의 종이냅킨을 접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뭐든지 象徵이나 隱喩로만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적어도 한 番 程度는 當身이 보여주는 愛情의 行動이 그리웠어요. 이를테면 第 코트를 고쳐주거나 제게 머플러를 둘러준다거나 하는. 그러므로 저는 이 瞬間 사랑이란,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行動하는 사랑이라고 이 便紙에 적고 싶어요. 어쩌면 우리 時代의 文化가 그토록 豐饒 속의 貧困을 謳歌한다는 것은─그리고 틀림없이 이러한 傾向은 앞으로 1世紀 동안 漸漸 더 加重(加重)되겠지만, 우리가 恒常 銘心해야 할 것은, 이를테면 사랑의 本質에는 아름다운 詩語(詩語)와 함께 아늑한 입김도 必要하다는 것을요.

    사랑하는 엘리엇, 前 그날 템즈江가와 살롱에서 제가 當身께 읽어드린 ‘월든’의 맨 마지막 챕터의 몇 句節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려 합니다 :

    ‘우리는 好奇心 많은 船客처럼 우리가 탄 배의 欄干 너머로 자주 밖을 내다보아야 할 것이며, 뱃밥만을 만들고 있는 愚鈍한 船員처럼 航海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當身 內部에 있는 江과 大洋을 探索하는 멍高 파크, 루이스와 클라크, 또는 플로비셔─사랑하는 엘리엇, 그때 제가 플로비셔란 이름을 發音할 때 當身은 이 이름이 偉大한 古典에 登場하는 플레바스와 비슷하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대는 앞으로 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 恒常 저와 함께 이 이름에 對해 얘기한 게 떠오를 거라고 하셨지요?─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當身 內部에 있는, 보다 緯度가 높은 地域을 探險하도록 하라, 精神의 世界에도 大陸들과 바다들이 있으며, 各 個人들은 여기에 連結된 地峽이자 작은 만이지만 아직 自身에 依해 探索되지 않고 있다는 事實, 只今 當場 먼 西쪽 길을 向해 떠나라…….’

    그러니 사랑하는 엘리엇, 플레바스를 생각하세요─그리고 그가 不屈의 勇氣를 가지고 끝없는 大洋의 目的地를 바라보았던 것을 잊지 마세요. 그대 또한 플레바스처럼 精神의 世界에서는 멋진 美男이고 키가 컸다는 事實도 잊지 마세요. 그러니 正말로 當身이 잊어야 할 것은 象徵이 가지는 價格(價格)이에요. 그러니깐 世上을 浪漫的으로만 보는 曖昧한 소근거림은 버리세요. 그리고 恒常 플레바스를 생각하세요. 굳세게 키를 잡고, 지쳤다 일어서며 몇 番씩이고 生을 輪廻하고, 行動으로 運命을 抵抗하며 그 바람이 불어오는 文明의 끝을 바라보는 그를 말이죠…….”

    그리고 메리 설리번은 이어서, 오늘 개會社에 特히 强調하고 싶은 이런 句節을 便紙에 남겼다. 아마도 이 句節은, 當場은 穩全한 理解가 어렵겠지만, 우리가 그토록 追求하는 人間理解의 領域―人間이 왜 人間으로서 發興했는지, 그리고 人間이 왜 人間으로서 滅絶했는지―을 더 넓혀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前 只今, 제가 쓰고 있는 冊에 方今 이런 文章을 적었지요 : 종이냅킨을 優雅하게 접는 것만큼이나 相對에게 머플러를 細心하게 둘러 주는 것이 必要하다. 卽 하나의 象徵은 하나의 行動으로 連結될 때 優雅하게 빛난다. 마치 그것은 우리가 런던 뒷골목에서 三 일을 굶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 惻隱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 아이와 함께 검게 굳은 빵을 갈라 半 조각씩 나누어 먹는 것과는 天國과 煉獄처럼 距離가 먼 것처럼 말이다. 내가 템즈江가에서 허리를 숙여 한 컵의 물을 뜨고 그리고 그 물이 새카맣게 죽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곧 이 한 컵의 물에 依해 世上의 모든 물이 죽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뜬 한 컵의 물이 生의 躍動으로 펄떡인다면, 온 宇宙의 물 또한 그러하리라. 多야드밤(Dayadhvam, 共感하라), 우리의 文明은 象徵보다는 恒常 再生(再生)하는 行動에 依해 終末을 猶豫(猶豫)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종이냅킨 或은 종이냅킨접기에 對한 優雅한 哲學’이라고 부른다.”

    -‘以上 發表者’ 人間命 애쉴리 조안나, 製造番號 NAL1434802433, 2133年 國際T.S.엘리엇學會 年例總會 開會辭 中에서

    <主席>
    위 글에서 引用된 出處는 虛構와 實在가 混合되어 있습니다. 모두 事實인 部分은 大略 다음과 같습니다.
    1)루이 드 클로上 男爵, 英國의 作家 새뮤얼 페피스, 英國 國王 찰스 2歲의 廚房長 자일스 로스, 프랑스 社會學者 부르디외와 關聯된 部分
    2)데이비드 앨런이 쓴 ‘빅토리아 時代의 羊齒類 熱氣’, 필립 高世가 쓴 ‘水族館(The Aquarium)’이란 冊의 存在
    3)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월든’이란 冊의 存在. 그리고 설리번 羊이 便紙에 적은 이 冊의 마지막 챕터 引用 部分.
    4)T.S. 엘리엇의 主要槪念들, 特히 ‘傳統과 個人的 才能’의 認容.

    *이 外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는 事實이 아닙니다. J. 팔리師처럼 實存한 人物도 있지만, 聯關된 에피소드들은 모두 許久입니다.

    조현

    朝見

    1969年 全南 潭陽 出生

    崇實大 行政學科 卒業

    國民大 綜合藝術大學원 卒業

    現在 國民對 藝術隊 敎職員

  • 정과리(文學評論家) 성석제(小說家)
    (豫審 하성란 박성원 손정수 윤성희)


    本心에 오른 作品들의 水準이 期待値를 넘은 德分에 눈은 즐거웠고 머리는 아팠다. 네 篇이 最終 審議對象이 되었다.

    박홍의 ‘나는 存在한다’는 反復되는 日常에 盡力 난 人物의 怪物化 過程을 時間的 推移를 따라 꼼꼼히 描寫한 게 돋보였는데, 素材와 展開가 새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新禧의 ‘두 女子親舊’는 파트너의 죽음에 强迫된 同性愛者의 執拗한 記憶, 社會的 偏見에 짓눌린 意識의 自發的 抑壓과 欲望의 항존이라는 마음의 屈曲을 뜨개질과 고양이를 통해 感覺化하면서 浮彫한 作品이었다. 다만 重要人物人 男便의 役割이 어정쩡하게 處理되었다는 弱點이 있었다. 이지영의 ‘춘자’는 異性에 안달복달하는 人物을 통해 人間關係의 低劣함과 欲望의 鄙陋함을 헤집은 作品으로, 널뛰듯 춤추는 생각과 動作의 천연스러움과 速度가 글쓴이의 才能을 斟酌케 하였다. 하지만 거칠고 투박한 데도 많았다.

    人類 滅種 後 사이보그에 依한 考古學的 人類 探索의 過程을 斷面化한 兆 玄의 ‘종이 냅킨에 對한 優雅한 哲學’은 現代人의 精神的 不毛性을 諷刺하기 위해 냅킨을 등장시키고 ‘荒蕪地’의 詩人 T.S.엘리엇을 끌어오는 等 奇拔한 發想과, 衝擊的 便紙로 始作해 마지막 反轉도 便紙로 끝내는 再起있는 構成으로 斷然 돋보인 作品이었다, 假想世界에 비춘 現實에 對한 銳角的 省察이라는 摸索 속에 ‘잘 빚어진 缸아리’라는 古典的 以上까지 充足시켰으니 當選作으로 뽑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 조현

    朝見

    1969年 全南 潭陽 出生

    崇實大 行政學科 卒業

    國民大 綜合藝術大學원 卒業

    現在 國民對 藝術隊 敎職員

    지난 여름밤 京畿 마석 모란공원墓地의 수풀에 누워 지나간 꿈을 찾았었지요. 김현승 詩人과 全泰壹 兄님의 무덤 사이에 누워 검은 하늘을 올려봤었지요. 그리고 낮게 울었습니다―우리를 지키는 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飛上하는 한 마리 優雅한 白鳥자리는 잊었던 제 故鄕 클라투行星 外界文明接觸委員會 地球駐在特派員으로서의 제 役割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藝術의 길을 일러주신 조성기 敎授님과 박재화 詩人님, 김수용 監督님, 信仰의 다채로운 빛깔을 보여주신 김재준 한경직 김진홍 牧師님, 創作의 길을 다듬어주신 한승옥 송하춘 敎授님이 떠오릅니다. 一一이 姓銜은 적지 못했지만 많은 恩師님들께도 靈魂의 人事를 올립니다. 이분들의 眞實한 가르침에도 不拘하고 제 글이 거칠고 事故가 미욱한 것은 全的으로 제 잘못입니다.

    강형철 敎授님과 多形文學會 先後輩님, 온라인의 여러 同好會 여러분께도 感謝드립니다. 不足한 저를 눈여겨 봐 주신 審査委員 先生님들께도 熱心히 努力해 報答하겠다고 感謝의 말씀 올립니다. 월드비전을 통해 後援의 因緣을 맺은 모잠비크의 少女 아타나시오, 너에게는 賞金의 折半을 주마. 기쁜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어려운 病을 꿋꿋하게 이겨內申 어머니와 家族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이웃에게 하나님의 恩寵이 함께 하시기를 祈禱드리며 저는 決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宇宙에서 태어나 宇宙에서 죽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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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審査評
  • 當選所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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