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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天職은 解說”|新東亞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天職은 解說”

野球인 허구연

  • 이영미 │스포츠專門記者 riveroflym22@naver.com

    入力 2014-09-19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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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麗大 法學科 合格韓 ‘野球部員’
    • NC·KT 創團 産婆 구실
    • “돈, 人士와 距離 두고 살아와”
    • “監督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MBC스포츠플러스 허구연(63) 解說委員은 野球 解說界에서 獨步的 存在다. 수많은 解說委員이 뜨고 졌지만, 1982年 프로野球 出帆과 함께 33年의 時間을 現場에서 보냈다. ‘虛構라’ ‘허프라’(허구연+인프라) 等 그를 가리키는 別名도 모두 野球와 關聯됐다. 野球에 그의 人生이 오롯이 담겼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9球團, 10球團 創團에 앞장섰고, 日本式 用語로 塗褙됐던 野球用語를 韓國에 맞는 用語로 整理했다. 메이저리그에서 硏修와 코치를 經驗했고, 韓國에선 프로팀 코치와 監督을 歷任했다. 中間에 指導者 生活을 하며 빈틈이 있었지만, 그는 오랜 時間 마이크 앞을 떠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經驗과 努力 面에선 그를 따라올 者가 없다. 許 委員과의 인터뷰를 Q&A로 풀어본다.

    Q 野球와 오랫동안 因緣을 맺었다. 始作이 궁금하다.

    故鄕이 慶南 晋州다. 晉州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때 釜山으로 移徙했다. 그때 살던 집이 대신동 구덕運動場 바로 뒤쪽이었다. 運動場 附近에 살다보니 初等學校 1學年 때부터 野球, 蹴球는 한 게임도 빼놓지 않고 구경하러 다녔다. 當時 백인천 監督이 야구하는 場面을 直接 目擊하기도 했다. 初等學校 5學年 때인 것으로 記憶하는데, 當時 釜山에서 釜山市長倍野球大會가 열렸다. 釜山의 모든 初等學校가 參加한 큰 大會였다. 그렇다보니 野球部 選手들만이 아닌 一般 學生들 中에서도 運動 能力이 빼어난 學生을 뽑아 野球팀에 합류시켰다. 그때 平素 내 運動 實力을 有心히 지켜봤던 擔任先生님이 野球部에 가서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勸誘하더라. 쪼르르 달려가서 테스트를 받는데 野球部 監督님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一般 學生의 野球 實力이 野球部 選手를 凌駕한다면서.

    Q 그래서 野球部에 들어간 건가.

    처음에는 釜山市長杯大會만 參加하기로 했는데, 一般 學生이 4番 打者로 出戰해 安打와 홈런을 쳐내며 優勝까지 거머쥐자 學校에서 亂離가 났다. 집에선 野球를 하지 말라고 反對하고, 學校에선 校長先生님까지 나서서 父母님을 說得하며 나를 正式 野球部員으로 만들고자 했다. 結局엔 初等學校 다닐 때까지만 野球를 하기로 했는데 中學校 進學해서도 學校에서 나를 가만두질 않았다.



    父母님은 野球를 繼續하려면 工夫를 더 잘해야 한다고 强調하셨다. 그래서 釜山中과 경남중 가운데 工夫하는 野球部로 알려진 慶南中을 選擇한 것이다. 경남중은 野球部員들이 모든 授業을 다 마친 後 訓鍊했다. 慶南中이 全國大會에서 優勝할 때 좋은 活躍을 펼쳤고, 工夫도 全校 10等 안팎을 놓치지 않았다. 경남중 入學은 내 人生 最高의 選擇이었다. 그때 工夫하지 않는 野球部에 入團했더라면 高麗大 法學科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Q 學歷을 보면서 들었던 疑問이다. 碩士 學位까지 받았더라. 大部分의 選手는 體育科를 希望하지 않나.

    어머니는 내가 競技고, 서울 法大에 進學하길 바라셨다. 그러나 野球를 하다보니 어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릴 수 없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高麗大 法學科에 入學한 後 野球를 하면서 司法考試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法學科 커트라인을 通過했을 때 고려대 法大가 발칵 뒤집혔다. 選手가 或是 커닝한 게 아니냐는 疑惑을 받을 程度였다. 考試 合格 後 野球에 더 專念할 計劃이었지만, 野球部 合宿이 잦았고, 代表팀에 뽑혀 國際大會에 出戰하다보니 到底히 工夫할 틈이 없었다. 野球와 工夫를 竝行한다는 건 不可能했다. 그래도 試驗 때가 되면 訓鍊 마치고 圖書館에서 살다시피 했다.

    Q 大學 卒業 後 實業팀 한일은행과 契約했다. 選手 生活을 오래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1976年 日本 올스타가 訪韓해 韓國 올스타와 親善競技를 했다. 1次戰, 2次戰 連續 홈런을 치며 猛活躍한 後 軍 入隊를 위한 身體檢査를 받고자 故鄕 晉州로 내려갔다. 3次戰은 大田에서 열렸고, 身體檢査를 받느라 一週日間 運動을 못한 狀態에서 競技에 뛰려다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7月 한여름이었다. 打席에 서 있기조차 힘든 무더위 속에서 競技를 强行해야만 했다. 當時 한일은행은 김응용 監督님이 맡았는데, 내 몸 狀態를 잘 아신 터라 올스타팀 監督을 찾아가 ‘허구연이 一週日 동안 訓鍊을 못했으니 可及的 많이 뛰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當付했다. 하지만 監督은 競技가 進行되는 狀況에서 나를 쉽게 빼주지 못했다. 及其也 내가 中間에 交替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監督은 한 打席만 더 들어간 다음에 빠지라고 指示했다.

    그런데 守備에 나섰다가 그만 事故가 났다. 2壘 커버 中 朱子의 强한 슬라이딩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뻑’ 소리와 함께 정강이뼈가 두 동강이 났다. 다리가 덜렁덜렁했을 만큼 深刻한 負傷이었다. 곧장 서울로 移送돼 네 次例에 걸친 手術을 받았다. 그 負傷이 選手로서의 내 人生을 整理해준 契機가 됐다. 手術 後 힘든 再活을 거쳐 다시 野球場에 나섰지만, 얼마 안 돼 접을 수밖에 없었다. 選手 허구연의 長點은 모두 사라졌고, 그저 그런 野球選手로 轉落한 내 모습이 견딜 수 없었다. 김응용 監督이 挽留했는데도 隱退를 決心했다. 病院에서 生活하면서 無聊한 時間을 달래고자 工夫를 始作한 것이 고려대 法大 大學院 入學으로 이어졌다. 50名의 應試者 中 10名을 뽑는 試驗에 合格했다. 碩士를 딴 德分에 卒業 後 京畿大 講壇에 서기도 했다.

    MBC에 專屬 契約 要求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Q 프로野球 出帆과 함께 MBC에서 野球 解說을 맡았다. 그 過程에도 事緣이 있다고 들었다.

    그前에도 가끔 아마野球 中繼를 한 적이 있다. MBC에서 그 모습을 보고 프로野球 解說을 맡기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난 大學 講義를 나가야 했다. 野球 解說과 講義를 竝行하기란 宏壯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내가 MBC에 提案한 것이 專屬이었다. 卽 大學 講義를 抛棄하는 代身 MBC 專屬 解說委員으로 契約을 맺자는 內容이었다. 當時 放送 出演料가 會堂 3萬5600원이었는데 내가 要求한 1年 年俸이 2200萬 원이었다. 프로野球 出帆 當時 박철순 等 特A級 選手가 2400萬 원, A級 選手가 2200萬 원 받던 때다. 2200萬 원이면 江南의 30坪臺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放送局이 亂離가 났다. 내가 要求한 金額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런 條件이 아니면 나도 안 하겠다고 버텼다. 結局 오랜 對話 끝에 年俸 1400萬 원에 契約을 맺었고, 不足한 部分은 海外出張과 資料 蒐集費 等으로 支援하겠다는 約束을 받아냈다. 德分에 外國에 자주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다. 서른한 살에 MBC와 맺은 因緣이 只今까지 이어진 것이다.

    Q 日本式 造語 투성이던 野球用語를 韓國 實情에 맞게 定立하는 일에 큰 役割을 했다. 初期에는 言語 醇化에 反對하는 이가 많았다고 들었다.

    내가 國語學者는 아니지만, 野球에서만큼은 國籍 不明의 日本式 造語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로野球 出帆 때 用語를 올바르게 整理하지 못하면 잘못된 日本式 造語가 繼續 쓰일 거라는 생각에 MBC의 PD, 아나운서, 解說家를 모아놓고 우리式 野球 用語를 定立해나갔다. 當時 野球界에는 포볼(볼넷), 데드볼(몸에 맞는 공), 언더베이스(태그業), 사이드스루(사이드 癌), 라이너(라인드라이브) 等 日本式 用語가 蔓延했다. 野球의 本고장이 美國임을 勘案할 때 日本式 造語를 바로잡고 되도록 韓國에 맞는 用語로,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美國式 用語를 使用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國際大會 나가서 日本式 造語를 쓰면 알아듣지 못하는 外國人이 不知其數였다. 하지만 言論의 反對가 거셌다. 無理한 試圖를 한다면서 4次例나 社說을 통해 批判을 쏟아냈다. 그래도 난 흔들리지 않았다. 放送할 때마다 새로운 野球用語로 解說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視聽者들도 時間이 흐르면서 내가 使用하는 野球用語에 익숙해졌고, 反對만을 일삼던 言論도 어느 瞬間부터 내가 使用하는 野球用語로 記事를 썼다.

    Q 오래前 新聞記事를 찾아보면 KBS와 MBC에서 野球中繼를 할 때 野球팀 名稱을 달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例를 들면 三星 라이온즈를 KBS에선 大邱 라이온즈로 불렀고, MBC에서는 三星 라이온즈를 固執했다. 理由가 뭔가.

    아무래도 프로野球가 始作되는 時點이다보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放送局마다 제各各 팀명을 불렀다. KBS는 地域名을 따 ‘大邱 라이온즈’ ‘釜山 자이언츠’로 불렀지만, MBC에선 企業에 焦點을 맞춰 팀 이름에 企業을 앞세운 것이다. 企業이 팀을 만들고 運營하는 데 이름을 내걸지 않는다면 굳이 프로野球團을 維持할 必要性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KBS는 地域 이름도 뺀 채 ‘라이온즈’ ‘靑龍’ ‘타이거즈’ ‘베어스’라고 하다가 視聽者들로부터 ‘프로野球가 무슨 動物農莊이냐’는 抗議를 받고서 어쩔 수 없이 企業 이름을 내세우게 됐다.

    메이저리그를 接하다!

    Q 1984年 처음으로 美國 메이저리그를 訪問했다고 들었다. 박찬호의 養아버지로 알려진 LA 다저스 前 球團主 피터 오말리 氏로부터 招請狀을 받았다던데.

    내 人生에서 가장 커다란 쇼크를 받은 時間이었다. 오말리 氏와는 元來 因緣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다저스 球團主이고 메이저리그를 訪問하고 싶은 생각에 韓國에서 便紙를 써 美國으로 보낸 게 因緣이 됐다. 오말리 氏는 이름도 모르는 韓國 解說家에게 正말 아름다운 親切을 베풀어주셨다. 飛行機票만 自費로 마련했고, 現地 宿所와 食事는 다저스에서 모두 配慮했다. 當時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는 只今의 애리조나가 아닌 플로리다 베로비値 다저타운이었다.

    現地에 가보니 어마어마한 野球場 施設에 입이 딱 벌어질 程度로 衝擊을 받았다. 그들의 野球 施設에 비하면 韓國은 比較조차 할 수 없을 地境이었다. 選手들 訓鍊을 지켜보니 韓國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投手들이 投球를 마치면 어깨에 얼음으로 아이싱을 하는 게 印象的이었다. 韓國에선 아이싱과는 反對로 따뜻한 물에 팔을 담가 疲勞를 푸는 方法을 使用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韓國으로 돌아와 中繼 때마다 아이싱으로 어깨를 管理하는 方法을 力說했다. 그 瞬間 여기저기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난 野球의 本고장인 메이저리그, 그것도 스포츠 醫學이 가장 發達한 곳에서 하는 選手 管理法이 맞을 것이라는 確信이 있었다. 1985年 三星 라이온즈가 韓國 프로野球팀 中에선 처음으로 美國 베로비치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先進 野球를 보고 배우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그 經驗을 바탕으로 그해 三星은 統合 優勝을 차지했다.”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3月 19日 텍사스 레인저스 스프링캠프에서 추신수와 對話하는 허구연 MBC스포츠플러스 解說委員.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지난해 9月 8日 허구연 解說委員 招待로 목동야구장을 訪問한 아트앤하트 幼少年野球學校 選手들.

    Q 1985年 프로野球팀 監督을 맡아 새로운 挑戰에 나선다. 平生 野球 解說만 할 것 같던 사람이 指導者의 길로 접어든 理由가 무엇인가.

    처음에는 MBC 靑龍에서 監督職 提議를 받았다. 팀 成績이 좋지 않자, 當時 MBC 이웅희 社長이 監督職을 맡아줄 것을 要請했지만 固辭했다. 세 次例나 거듭 要請이 이어지자, 나로선 確實하게 拒絶할 名分을 찾아야 했다. 當時 靑龍 監督이 경남고 恩師이던 어우홍 氏였다. 그래서 MBC 側에 恩師를 몰아내고 監督職에 앉을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고 나서 청보 핀토스로부터 監督職 提議를 받았다. 亦是 拒絶했는데, 청보가 眞짜 執拗했다. 當時 난 每週 두 競技 以上의 生中繼, 每日 밤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出演, 多數 新聞社 칼럼 執筆 等으로 體力 枯渴 狀態였다. 그때 우리 큰兄이 이런 얘길 해줬다. ‘野球를 始作한 以來 負傷을 除外하곤 失敗 없이 乘勝長驅하며 살았다. 젊은 나이에 하는 挑戰은 充分히 해볼 만하다. 失敗하더라도 젊어서 失敗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다른 知人들도 監督職에 肯定的인 反應을 나타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機會를 잡았는데, 結局엔 成績 不振으로 한 시즌 만에 물러나야 했다. 解說委員으로 보는 野球와 現場에서 부딪치는 野球의 差異點이 엄청나다는 걸 實感했다.

    1987年 2月, 롯데 자이언츠에서 電話가 걸려왔다. 故鄕 팀이 어려우니까 도와달라면서 打擊코치를 맡아달라는 付託이었다. 그렇게 해서 3年間 打擊코치와 首席코치를 맡아 롯데에 머물렀다. 監督職 提案도 받았지만, 拒絶했다. 롯데를 떠나며 내가 球團에 한 말이 있다. ‘球團도 精神 똑바로 차려라. 그리고 監督 코치를 우습게 보지 마라’는 內容이었다. 떠날 몸이었기 때문에 뒷일 생각지 않고 쓴소리를 날린 것이다.”

    MLB에 선동열 推薦했지만…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롯데 자이언츠 코치 時節.

    Q 롯데 코치에서 물러난 後 바로 解說委員으로 復歸할 줄 알았는데, 美國으로 떠났다. 그런데 LA 다저스가 아닌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다저스 피터 오말리 球團主로부터 다시 와달라는 提案을 받았지만, 已往이면 새로운 팀에서 野球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블루제이스 球團主는 現場을 배울 수 있는 機會를 주겠다고 約束했다. 球團主의 도움 德分에 싱글A부터 트리플A까지 마이너리그 全體를 다 돌았다. 2年間 마이너리그에서 留級 코치 生活을 하며 美國 野球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가르친 選手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며 특별한 感謝를 傳한 일도 잊히지 않는다. 美國에 있는 동안 몇몇 球團 關係者로부터 韓國에서 뛰어난 實力을 가진 選手를 推薦해달라는 付託도 받았다. 그때 내가 擧論한 選手가 최동원, 선동열, 김재박이었다. 特히 선동열은 LA 다저스에서도 關心을 가졌다. 그런데 해태에서 선동열의 軍 問題를 들어 美國 進出을 許諾하지 않았다. 萬若 그때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進出했더라면 韓國의 野球 歷史가 모두 뒤바뀌었을 것이다.

    Q 故(故) 鄭周永 現代그룹 名譽會長이 현대 유니콘스 初代 監督으로 迎入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事實인가.

    돌아가신 鄭 會長은 野球團 創團에 깊은 關心을 가졌다. 그래서 나를 따로 만나 野球團 運營과 關聯해 여러 가지 質問을 건네곤 했다. 그런데 三星 롯데 獬豸 等 旣存 球團들이 현대가 프로野球團 세우는 걸 決死的으로 反對했다. 그래서 方法을 달리해 實業팀 현대피닉스를 引受했고, 그 팀이 현대 유니콘스가 된 것이다. 그 當時 鄭 會長이 初代 監督을 맡아달라고 特別 付託을 했다. 하지만 난 이미 監督으로 쓰라린 經驗과 挫折을 맛본 狀態였고, 監督이 아닌 다른 形態로 野球 發展에 獻身할 作定이었다. 監督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김재박 監督을 推薦했는데 현대가 워낙 스케일이 커 選手團 發展을 위해 통 큰 支援을 한 터라 金 監督이 乘勝長驅할 수 있는 背景이 됐다.

    Q 現代그룹 會長의 提案을 拒絶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監督職 提案은 三星, LG에서도 왔었다. 워낙 고집스럽게 拒絶하니 그 後론 내가 監督에 全혀 뜻이 없다는 걸 다 알게 됐다. 난 다른 方面에서 野球界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 山積한 野球 懸案에 對해 助言하고 9球團, 10球團 創團에 積極 나설 計劃이었다. 팀을 맡아 優勝한다 한들 韓國 野球 全體를 레벨 業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解說하면서 오랫동안 野球 인프라를 强調한 까닭도 韓國 野球 發展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別名이 ‘허프라’가 됐지만 말이다.

    政治權 ‘러브콜’ 많았다

    Q 政治權에서 손을 내민 적도 있을 것 같은데, 實際로 어떠했나.

    野球人은 政治的으로 中立을 지켜야 큰일을 할 수 있다. 與黨, 野黨에 屬하다보면 정작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政治權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政治的 理念이나 利害關係에 따라 움직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움츠러들고 制約을 받는다. 여러 次例 政治權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鄭重히 拒絶했고, 野球界에 남았다. 유영구 前 KBO 總裁가 野球界를 이끌 때 野球發展實行委員腸을 맡은 것이 只今까지 이어졌다. 年俸을 주겠다는 걸 내가 拒絶했다. 奉仕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MBC 解說과 野球發展實行委員腸을 맡아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게 나에게 맞는 ‘옷’이었다.

    Q NC 다이노스 創團 뒷얘기를 듣고 싶다.

    當時 유영구 總裁와 자주 獨對했다. 나에 對한 信任이 두터워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柳 總裁에게 KBO 總裁라면 프로野球의 發展에 關心을 가져야 하고, 가장 重要한 건 球團을 만드는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렸다. 더욱이 當時에 히어로즈가 資金難으로 選手들을 파는 바람에 球團이 正常的으로 運營되지 않았다. 히어로즈가 選手를 팔아 球團 資金을 모으는 것을 默認해선 안 된다고 强調했다. 그러면서 9球團 創團을 力說했다. 野球選手들의 就業과 韓國 프로野球의 파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說明했더니 柳 總裁가 ‘그렇다면 자네가 한番 나서보라’고 하시더라. 極祕裡에 9球團 創團 作業에 뛰어든 것이다. 當時 9球團 創團에 가장 적합한 都市가 馬山·昌原·鎭海가 합쳐진 昌原이었다. 昌原市場을 만나 說得에 나섰다. 이때 4군데 企業이 候補로 나섰는데, 最終的으로 NC소프트가 球團 運營을 맡았다.

    Q 9球團 創團으로 프로球團이 홀數팀이 되면서 競技 日程이 跛行的으로 運營됐고, 旣存 球團의 反對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건 充分히 豫想했던 問題다. 나와 유영구 總裁는 10球團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9球團 設立을 强行한 것이다. 히어로즈가 9球團 創團과 함께 運營 方針이 달라진 걸 記憶하나. 더 以上 選手를 팔지 않고, LG에서 이택근을 FA로 迎入하고, 메이저리그의 김병현도 데려오며 攻擊的인 마케팅에 나섰다. 9球團 創團은 다른 팀보다 히어로즈에 큰 刺戟을 줬다. 三星이 앞장서 反對한 탓에 9球團 創團이 霧散될 危機에 處하기도 했지만, 結局엔 成事됐다. 난 아홉 番째 球團이 만들어지면 10球團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創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홀數팀으로는 프로野球 運營이 어렵다는 걸 切感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不便할 수밖에 없는 狀況에서 KBO 理事會도 跛行的으로 運營되는 9球團 體制를 固執할 수만은 없다고 봤다.

    꿈만 같은 9·10球團 創團

    Q 그래서 10球團 KT 위즈가 誕生한 것인가.

    처음 接觸한 都市가 前奏였다. 2009年 송하진 全州市長(現 全北道知事)을 만났는데 송 市場은 나랑 親舊 사이라 對話가 쉽게 풀렸다. 그 後 KT 이석채 前 會長을 만나 野球團 創團 意思를 물었다. 예전에 KT가 野球團에 뛰어들려고 하다가 情報가 새는 바람에 접은 적이 있기에 이 會長을 說得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會長은 緣故地로 全州보다는 水原이 좋다고 했고, KT는 水原을 등에 업고 競爭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富榮建設이 全州市長과 손을 잡았다. 結局엔 KT가 10球團으로 選定됐지만, 水原과 全州가 地域의 自尊心을 걸고 對決을 벌인 터라 어떤 結果가 나올지 相當히 焦燥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只今도 9球團, 10球團 創團 過程을 돌이켜보면 正말 꿈만 같다. 只今 다시 그 作業을 하라고 한다면 絶對 못할 것 같다. 힘들었던 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 있었다. 유영구 前 總裁가 不美스러운 일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兪 前 總裁는 韓國 프로野球 發展에 크게 寄與하고 떠났다.

    Q 그즈음 許 委員에 對한 所聞도 茂盛했다. NC 或은 KT 野球團 社長으로 간다는 所聞도 있었다. KBO 總裁 자리를 노린다는 얘기도 들렸다.

    내가 野球界에 몸담고 있으면서 人事, 돈 問題와 關聯해선 距離를 뒀다. 野球發展實行委員腸을 맡아 無報酬로 일하는 것도 같은 脈絡이다. 워낙 말도 많고 頉도 많은 野球界라 幸여 좋지 않은 所聞이 나올라치면 아예 近處에도 가지 않는 게 맞았다. 그래서 창단팀이 만들어진 後 코칭스태프 人選과 關聯해서 一切 내 意見을 내지 않았다. 다른 問題에 助言은 해줬지만, 人事와 關聯해선 발을 뺐다. 나에 對한 所聞은 所聞일 뿐이다. 萬若 내가 그런 ‘자리’에 欲心을 냈더라면 굳이 新生팀이 아니고도 다른 팀에 갈 수도 있다. 野球 發展을 위해 犧牲하겠다는 것이 나의 信念이다. 特定 球團의 監督이나 社長으로 가지 않은 건 그런 目標가 있기 때문이다.

    Q 只今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點인데, 野球團 社長이나 KBO 總裁보다 解說하는 일에 더 큰 意味를 두고 있는 것 같다.

    “正確히 봤다. 解說에 執着하지 않았더라면 예전에 또다시 監督을 맡았을 것이다. 解說은 내 天職이다. 그 天職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Q 野球界에선 許 委員이 後繼者를 키우지 않는다는 非難의 소리가 있다. 解說에 對한 剛한 欲心으로 인해 後輩들이 제대로 存立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도 내 後繼者를 키우고 싶다. 여러 解說委員을 지켜보고 있는데, 後繼者를 찾는 게 쉽진 않더라. 解說하는 後輩들에게 當付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單純히 選手 生活을 했다고 해서 마이크 앞에 앉았다간 큰코다치기 十常이다. 準備를 正말 많이 해야 한다. 運動選手 出身은 工夫를 많이 못했다. 그런 部分이 解說에 드러나면 안 된다. 努力하는 後輩가 많으면 좋겠다.”

    Q 後輩 中 許 委員과 가장 닮은꼴을 찾는다면 누굴까.

    이용철, 李曉峯 解說委員이 近接한다고 본다. 李曉峯은 論理的인 解說이 印象的이고, 이용철은 視聽者에게 便安하게 다가간다. 이순철은 톡톡 쏘는 맛이 있고.”

    Q 사투리 發音 때문에 指摘을 많이 받았다. 只今까지 고쳐지지 않는데.

    “現代를 핸대로, 김현수를 基멘水路 發音하는데, 發音에 神經 쓰면 中繼가 안 되더라. 자꾸 脈을 놓치고 어버버 하다가 競技가 흘러간 적이 한두 番이 아니다. 그래서 한番은 PD한테 내 發音이 問題가 되면 그냥 나를 자르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國民이 내가 하는 發音을 다 알아들으니까 問題 될 게 없다고 하더라. 처음에 解說을 始作할 때 矯正했어야 하는데 時間이 지나서 하려니까 不可能했다

    許 委員은 30年 넘게 野球 解說을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일을 일찌감치 抛棄했다고 한다. 親戚 및 知人 慶弔事에 參席하는 건 시즌 中에는 不可能하다. 골프도 그의 關心 리스트에 存在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野球만 생각한다. 中繼가 없는 날에도 事務室에서 4個의 畵面을 번갈아 보며 景氣를 꼼꼼히 챙긴다. 저녁 食事 자리에서도 携帶電話를 통해 競技 內容과 結果를 確認한다. 現場에서 監督, 選手와 가장 많은 對話를 나누는 이도 許 委員이다. 許 委員 程度면 굳이 選手까지 챙기지 않더라도 充分히 많은 情報를 蒐集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는 모든 걸 直接 해야 直星이 풀린다. 그걸 게을리하는 瞬間 解說者로서의 生命도 끝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野球 解說家로서 허구연은 如前히 現役으로 뛰는 ‘레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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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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