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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아카이브] ‘신동아’로 본 故 전옥주의 一生|新東亞

[신동아 아카이브] ‘신동아’로 본 故 전옥주의 一生

1980年 ‘5?18 街頭放送’…1996年 6月號 最初 育成 告白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1-02-19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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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歲 一期로 2月 17日 別世

    • “市民 여러분, 卽時 道廳 앞으로 모여 戒嚴軍에 對抗해 싸웁시다!”

    • “그해 5月 光州에서 내가 얻은 건 슬픔과 恐怖만은 아니었다”

    2월 17일 향년 72세로 타계한 고 전옥주 씨. 
[뉴시스]

    2月 17日 享年 72歲로 他界한 故 전옥주 氏. [뉴시스]

    2月 17日, 1980年 5?18 民主化運動 當時 市民들의 參與를 呼訴하는 街頭放送의 主人公 전옥주(本名 전춘심?72) 氏의 別世 消息이 傳해졌다. ‘5?18의 꽃’으로 불렸던 全 氏가 모진 歲月을 뒤로한 채 自宅 隣近에서 숨진 채 發見됐다는 消息에 많은 이들이 哀悼했다. 李洛淵 더불어民主黨 代表는 “女史의 放送은 5月 光州의 絶叫였고, 抵抗의 旗발이었다”고 했고, 丁世均 國務總理는 “우리 民主主義는 當身께 큰 빚을 졌다”고 했다. 

    2007年 開封한 映畫 ‘華麗한 休暇’에서 俳優 이요원이 맡은 ‘信愛’ 驛이 바로 전옥주 氏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一般人들은 전옥주를 記憶하지 못한다. 그는 누구이며, 1980年 5月 끓어오르는 光州 금남로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그로 인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웁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 전옥주 씨가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한 상황에서 가두방송을 하고 있다. 1980년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알리고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5·18民主化運動 當時 고 전옥주 氏가 戒嚴軍과 市民들이 對峙한 狀況에서 街頭放送을 하고 있다. 1980年 5月 19日부터 21日까지 車輛에 搭乘해 擴聲器로 放送을 하며 戒嚴軍의 殘酷한 鎭壓을 알리고 獻血과 抗爭 同參을 促求했다. [5·18民主化運動記錄管 提供]

    “市民 여러분, 저 殘惡한 空輸部隊員들을 몰아낼 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웁시다.” 

    “當身들도 우리 便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催淚彈을 쏘지 마십시오.” 

    “市民 여러분, 물러나선 안 됩니다. 最後의 한 사람까지 힘을 모아 우리 손으로 光州를 지켜냅시다.”



    1980年 5月 19日 밤 民主化 熱氣로 달아오른 光州 금남로에서 성난 市民들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는 서른한 살의 全 氏였다. 1949年 12月 全南 寶城警察署 舍宅에서 태어난 全 氏는 6歲부터 舞踊을 始作해 圓光大 體育學科에서 當時 古典舞踊이라고 부르던 韓國舞踊을 專攻한 뒤 舞踊 講師로 일하고 있었다. 

    運命의 그날,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밤 9時쯤 송정리驛에 到着했을 때 光州 入口 檢問所 周邊에는 “光州市 全體가 쑥밭이 되었고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는 所聞이 쫙 퍼져 있었다. 그럼에도 全 氏는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市內로 들어갔고, 집 밖을 나서지 말라는 家族들의 挽留를 뒤로 한 채 금남로로 向했다. 

    밤 11時가 다 된 時間임에도 戒嚴軍과 對峙 中인 示威隊를 만났고, 도와달라는 學生들의 要請에 全 氏는 洞事務所의 스피커와 앰프를 실어 나르는 過程에서 自然스럽게 街頭放送團에 合流했다. 어릴 적 窓(唱)과 雄辯을 배워 남달리 우렁차고 朗朗한 목소리를 가진 그가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은 것이 以後 人生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全 氏는 裝甲車를 앞세운 戒嚴軍과 맨몸으로 맞서며 一進一退를 거듭하던 市民들 사이로 핸드마이크를 附與 쥔 채 示威를 主導했다.


    “心琴을 울리는 목소리, 그 女子를 狙擊하라”

    當時 光州에 投入된 11空輸旅團 所屬 나모 氏가 쓴 手記 ‘내가 보낸 華麗한 休暇’에는 前 氏의 목소리에 對한 言及이 있다. 

    “그 女子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市民들에게는 슬픔과 鬱憤, 憤怒 等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기에 充分했다. 목소리 또한 얼마나 고운지 처음에는 불에 탄 文化放送局의 아나운서가 火가 나서 宣撫放送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心琴을 울리는 宣撫放送이었다. 그래서 우리 要員들도, 指揮官들도 그 女子를 狙擊해 殺傷하려고 執拗하게 追跡했으나 示威隊에 둘러싸여서 示威隊를 解散시키기 前에는 狙擊할 수가 없었다.” 

    앞장 서 示威 群衆들을 이끌던 全 氏는 5月 27日 忽然 사라졌다. 그로부터 열흘 間 想像도 할 수 없는 拷問과 恐怖가 이어졌다. 全 氏는 間諜으로 몰려 戒嚴軍에 모진 拷問을 當했고, 戒嚴 布告令 違反과 內亂陰謀 等 罪目으로 懲役 15年 刑을 宣告받고 광주교도소에서 獄살이를 하다 1981年 4月 3日 特別赦免으로 풀려났다.


    間諜 陋名도 抑鬱한데…

    赦免됐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要視察’ 人物이었다. 1986年까지 居住地에서 4km만 벗어나도 管轄署에 申告해야 했고, 電話는 24時間 盜聽됐으며, 한 달에 한 番씩 自述書를 써야 했다. 移徙를 가면 擔當警察이 와서 調書를 받아가 周圍 사람들은 그를 詐欺 치고 逃亡 와 숨어사는 人物로 알고 回避하고 손가락질했다. 그사이 어머니는 외동딸의 消息에 衝擊을 받고 쓰러졌고 腦腫瘍을 앓다 1986年 結局 世上을 떠났다. 

    拷問 後遺症으로 생긴 心身의 傷處는 平生 그를 따라다녔다. 神經衰弱과 失語症에 걸려 한동안 精神病院에 入院하기도 했다. 電鐵을 타면 閉鎖恐怖症으로 極度의 壓迫感에 시달렸고, 結婚 後에도 잠자리에만 들면 그날의 惡夢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온 房을 네 발로 헤집으며 울부짖는 나날이 이어졌다.
     
    間諜 陋名만으로도 抑鬱한데 出獄 後 同志였던 이들로부터 ‘政權의 프락치’ ‘전옥주는 假짜’라는 疑惑을 받으며 또 다른 苦痛을 겪었다. 그나마 周圍 사람들이 ‘5?18의 꽃’ 전옥주를 認定하게 된 契機는 1988年 11月 18日 國會 聽聞會 光州民主化運動眞相調査特別委員會에 出席해 證言을 한 뒤부터였다. 全 氏는 그날 證言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洞네 아주머니들이 막걸리와 떡을 장만해 주며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으면서 왜 감추고 살았느냐”고 自身을 붙들고 울었다고 傳한다.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

    전옥주 씨 수기가 실린 신동아 1996년 9월호 표지.
[박해윤 기자]

    전옥주 氏 手記가 실린 新東亞 1996年 9月號 表紙. [박해윤 記者]

    新東亞 1996年 9月號에 전옥주 氏가 直接 口述한 ‘光州抗爭 街頭放送의 女人, 전옥주의 衝擊 告白 手記’가 실렸다. 1980年 5月 光州에서 街頭放送團은 무슨 일을 했는지, 鎭壓軍에게 逮捕된 後 열흘 동안 어떤 拷問을 當했는지, 1988年 光州聽聞會 以後 어떤 變化가 있었는지 全 氏가 直接 털어놓은 最初의 育成 告白인 까닭에 그의 삶을 紹介할 때마다 자주 이 글이 引用된다. 

    신동아는 1998年 5月號에서 다시 한 番 ‘光州 民主化運動 街頭放送 두 女人 전옥주?차명숙’을 世上 밖으로 끌어냈다. 前 氏와 함께 街頭放送을 했던 차명숙 氏는 80年 以後 世上과 連絡을 끊고 지냈다. 1996年 9月 신동아에 실린 全 氏의 手記를 보고 茶 氏가 編輯室로 連絡을 했고 以後 2年의 沈默 끝에 茶 氏가 입을 연 것이다. 當時 茶 氏는 “누구든 그때 光州에 있었다면 나섰을 것”이라며 “言論이 입 다물고 있던 狀況에서 光州를 살리기 위해선 누군가가 慘酷한 그 狀況들을 市民들에게 알려야 했다”고 했다. 하지만 光州民主化運動이 벌어진 지 18年이 지난 1998年 5月까지도 두 사람은 멀리서 消息만 들을 뿐 차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過去의 아픔이 너무 컸던 탓일까. 

    다음은 新東亞 1996年 9月號에 실린 全 氏의 手記에서 當時 狀況과 心境을 생생하게 證言한 部分을 拔萃한 것이다.

    “어떤 이는 나를 가리켜 ‘5.?18의 꽃’이라고 한다. ‘光州民主抗爭의 喇叭手’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實際로 16年 前(1980年) 五月, 우리 現代史를 뒤흔든 뜨거웠던 光州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波濤처럼 성난 群衆들을 指揮하며 激勵하고 統制한 市民部隊의 求心, 街頭放送의 主役이었다. 自由, 民主化, 暴壓과 鬪爭이 무언지 알 수 없었던 平凡한 서른둘 處女에게 五月 光州의 그 며칠間은 實로 堪當키 버거운 體驗이었다.” 

    “街頭放送 車輛에서 내 옆에 탔던 靑年이 琉璃를 뚫고 날아온 銃彈에 맞아 그대로 피를 흘리며 숨져갈 때의 恐怖欄…. 如此하면 나도 저 銃알 한 房에 그대로 죽을 수 있다는 極甚한 두려움은 오히려 마음을 大汎하게 만들어주었다.…시민들의 被害 狀況을 생생히 알리고 道廳 앞 蹶起를 외쳐야 한다는 目標만이 腦裏를 맴돌았다.” 

    “열흘 동안의 光州抗爭 期間 中 絶頂을 이룬 20日 밤의 示威에서 성난 群衆들의 隊伍를 指揮하며 내 머릿속에 꽉 찬 한 가지 생각은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는 것, 내 목숨 亦是 몇 時間 前 내 손으로 리어카에 담아 옮긴 저 慘酷한 몇 具의 屍身들처럼 이미 아무렇지 않게 죽은 목숨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暴力과 慘狀, 巨大한 不義에 對한 猛烈한 敵愾心과 憤怒가 솟구쳐 나를 어떤 地點으로 끝없이 휘몰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實狀 當時 내 목소리는 목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가슴 속으로부터 吐해져 나오고 있었다. 외치다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到處에 潛伏해 있는 武裝戒嚴軍 때문에 나는 車에서 내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입고 있는 靑바지에 그대로 小便을 봐가며 東이 틀 때까지 放送을 했다.”


    南派 間諜이라는 陋名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全玉珠의 충격고백수기’라는 제목의 신동아 지면. 전옥주 씨의 구술을 정리한 글이다. 
[박해윤 기자]

    ‘光州抗爭 街頭放送의 女人, 全玉珠의 衝擊告白手記’라는 題目의 新東亞 紙面. 전옥주 氏의 口述을 整理한 글이다. [박해윤 記者]

    “搜査官은 내 옷을 다 벗긴 뒤 銃 개머리板과 나무字로 陰部를 마구잡이로 후비고 짓찧으면서 ‘그 나이 먹도록 네가 正말 處女냐’ ‘몇 名이랑 자봤느냐’는 等 차마 입에 담기조차 憫惘한 暴言과 蠻行을 저질렀다. 사흘째부터 甚한 痛症과 함께 下血이 始作됐지만 그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天人共怒할 性拷問을 멈추지 않았다.” 

    “惡夢 같은 拷問과 脅迫, 暴言을 통해 그들이 듣고 싶어 한 것은 어이없게도 내가 間諜이라는 自白이었다. 以北 牡丹峯에서 2年間 敎育을 받고 南派된 間諜. 이것이 그들이 내게 덧씌우기 위해 準備한 시나리오였다. 잠 안 재우기, 羞恥스러운 性拷問, 苛酷한 몽둥이찜질과 毆打를 통해 그들은 내가 北에서 密封敎育을 받고 南韓社會를 攪亂할 目的으로 南派된 間諜이라는 事實을 認定할 것을 强要했다.” 

    “쇠파이프로 맞아 脊椎 뼈 두 個가 내려앉은 허리, 부러진 자국이 남은 오른팔, 송곳에 찔려 滿身瘡痍가 된 무릎을 비롯해 一 年이면 몇 달을 깁스로 艱辛히 支撐하는 다리, 궂은 날이면 마디마디 쑤시고 뒤틀리는 손과 발, 銃 개머리板에 하도 맞아서인지 惡夢처럼 따라다니는 뒷골의 痛症, 골病으로 찌든 伸張과 臟器들….”


    프락치, 背信者라는 손가락질

    “5年 前 어렵게 서울 生活을 整理하고 돌아간 廣州에서 나는 뜻하지 않은 차가운 冷待와 嫉視를 받아야 했다. 勇氣를 내어 만든 ‘5?18女性同志會’는 政治的 野心으로 罵倒당했다. 민화위(民主和合汎國民推進委員會, 1988年 1月 11日 노태우 大統領 當選者가 發足한 器具) 證言 當時 參席者들에게 支給된 20萬 원의 交通費도 ‘盧泰愚 돈은 받을 수 없다’며 뿌리친 나를 두고 ‘盧 政權으로부터 3億 원을 받았다’느니, 프락치라느니, 背信者라느니 하는 당찮은 얘기까지 나돌았다. 甚至於 ‘전옥주는 假짜’라는 얘기까지 퍼졌다. 잡혀간 사람들 사이에 어영부영 끼여 있다가 얼렁뚱땅 主役으로 浮上했다는 것이었다.” 

    “5?18女性同志會를 만들게 된 건 光州를 빛나게 한 5月의 꽃이 女性이라는 平素의 믿음 때문이었다. 무서워서 누구도 쉽사리 그 거리에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戒嚴軍 아저씨들은 어느 나라 軍隊냐’며 물러가라는 口號를 외치던 斷髮머리 女學生에서부터 獻血 行列에 줄을 지어 모여 들던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 光州의 女性들은 正말로 純粹하고 勇敢했다. 銃알이 빗발치는 渦中에 김밥과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우리에게 주먹밥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아주머니들. 負傷者를 돌보고 主人 없는 屍身을 收拾하는 이들도 모두 婦女子들이었다. 發砲가 始作된 뒤 사흘 내내 盜聽 周圍를 헤집고 다니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屍身들을 收拾해 玉洋木을 떠다가 壽衣를 해 입히고, 香을 사 피워주던 술집 아가씨들. 어떻게 번 돈인데 그렇게 쓰기가 쉽겠는가.” 

    “過去로 因해 疲弊해지는 現實은 肉身의 苦痛보다 견디기가 몇 十 倍나 힘들었다. 프락치 是非는 그中에서도 가장 내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生命의 威脅을 느낄 狀況에서 왜 戒嚴軍 쪽으로 몸을 避했는가, 或是 政府 사람이 아닌가’ 하는 一部 言論의 報道와 그것에 便乘한 옛 同志들의 黑色宣傳과 誹謗. 그것은 지긋지긋한 間諜 協議에 이미 골病이 들대로 든 내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또 하나의 苦痛을 안겨주었다.”

    내가 萬若 街頭放送을 안 했더라면…

    “光州 市民들께 말하고 싶다. 5?18 當時의 나의 行動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自發的으로 뛰어든 내 選擇이었다. 그 決斷 속에서 내 모든 것을 잃었지만 結果가 어떠하든 그것으로 充分하다. 내 記憶 속의 5?18은 아픈 傷處가 아니다. 정작 참을 수 없는 건 아물어가는 그 傷處를 덧나게 하고 고통스런 생채기를 보태는 現實이다.” 

    “해마다 5月이 오면 極甚한 拷問의 記憶과 소용돌이치는 絶叫와 喊聲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잠을 이루지 못한다. 街頭放送을 안 했더라면 市民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만큼 犧牲도 적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激昂된 感情으로 無辜한 人命을 犧牲의 隊列로 이끈 건 아닌가 하는 反省과 悔悟도 나를 隨時로 괴롭힌다. ‘放送을 듣고는 거리로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到底히 便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게 大門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慘酷한 죽음을 當했을까를 생각하면 온몸에 戰慄이 돋는다.” 

    “五月 光州를 내 안에서부터 克服하는 일, 그것을 통해서만이 굴곡진 내 삶 또한 復元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은 生의 幸福 有無도 아마 거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過去의 슬픔과 갈무리해 내기 위한 안간힘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理由도 거기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新東亞 1996年 9月號에 手記가 紹介되고 두 달 뒤 女性東亞 11月號에 전옥주 氏 인터뷰가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全 氏는 惡夢과 病魔에 시달리는 삶 속에서도 그 傷處를 보듬고 治癒해준 男便에 對한 고마움과 家族의 所重함을 言及했다. 그리고 “그해 5月 光州에서 내가 얻은 건 슬픔과 恐怖만은 아니었다”고 述懷했다. 

    “온 몸과 마음으로 그날의 傷處를 부여안은 채 가파른 삶을 이어가고 있을지라도 그 삶이 그래도 意味 있다고 느끼는 건 아직도 망월동에 묻혀 있는 數百 具의 屍身과 그보다 더 많은, 채 發見되지 못한 죽음들에 비해 살아 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證明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으로 모든 것을 證明하려 했던 전옥주 氏의 鬪爭은 2021年 2月 16日로 멈췄다. 故人은 家族葬 以後 光州廣域市 北區 운정동에 位置한 國立 5·18 民主墓地에 安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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