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國軍, 平時 迅速決定作戰 펼칠 機甲軍團 創設하라|신동아

韓國軍, 平時 迅速決定作戰 펼칠 機甲軍團 創設하라

特命 “北韓 急變 事態時 10時間 內 平壤 占領!”

  • 特別取材班

    入力 2007-08-09 11:23: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탱크’는 塹壕戰 打開 위한 英國의 新武器 開發事業 暗號名

    佛 드골이 提示하고 獨 구데吏案이 創始한 機甲部隊 電擊戰

    24時間 內 오스트리아 統一 達成限 히틀러의 大戰略

    機甲部隊에 空軍·海軍까지 動員한 效果中心作戰은 現代版 電擊戰

    韓半島는 外勢 介入 쉬운 곳…外勢 介入하면 抵抗力 强한 民兵隊 構成



    機動戰으로 勝敗 갈린 韓半島戰…機動戰 王子는 戰車

    五方陣의 祕密…韓國은 5角體制 機甲軍團 가져야

    韓國軍, 5個 技保師團, 1個 機動軍團 保有

    戰車部隊는 戰車部隊로 막아야

    韓民族에 依한 平時의 平和的 統一 支持 約束한 中國

    合參 主導의 平時 作戰으로 北韓 接受해야

    聯合司의 北韓急變 事態 介入은 ‘戰時’로 誤解 될 수도


    한국군, 평시 신속결정작전 펼칠 기갑군단 창설하라
    25年 前인 1982年, 陸軍은 ‘首都機械化步兵師團(略稱 數記事)’이라는 單 하나의 機動部隊를 갖고 있었다. 1950年 秒 只今의 首都防衛司令部와 類似한 機能을 맡은 部隊가 首都師團인데 이 部隊의 마크가 猛虎였다. 6·25戰爭 初期 서울을 빼앗긴 首都師團은 다른 師團과 똑같이 最前線에서 싸워야 했다. 따라서 戰爭이 끝난 後 이 部隊는 首都防衛라는 固有 任務로 돌아오지 못하고 一線을 지키는 精銳部隊가 되었다.

    1965年 朴正熙 政府는 베트남에 2個 陸軍 師團을 派兵하는데 이때 뽑힌 部隊가 猛虎와 白馬(9師團)였다. 越南이 敗亡하기 直前인 1972年 陸軍은 32步兵師團(白龍部隊)을 機械化步兵師團으로 再編했다. 陸軍 最初의 技保師團을 만든 것인데 6個月 後 猛虎가 越南에서 撤收하자 32技保師團 裝備를 猛虎部隊로 보내 首都機械化步兵師團을 만들고, 32師團은 다시 步兵師團으로 돌렸다. 이것이 1973年 3月22日인데 그 後 10年間 韓國은 單 하나의 機械化步兵師團만 保有했다.

    軍事專門雜誌人 ‘디펜스 타임스’ 5月號에는 陸軍의 戰車/裝甲車 勢力 變化에 對한 아주 詳細한 記事가 실렸다. 이 記事에 따르면 韓國이 保有한 두 番째 技保師團은 20師團(決戰部隊)이었다. 1981年 20步兵師團은 車輛火步兵師團이 됐다가 1983年 機械化步兵師團으로 再編됐다. 20技保師團은 司令部가 楊平에 있어 ‘量記事’로 약칭됐는데, 數記事와 量記事는 陸軍 唯一의 機動軍團인 7軍團에 所屬돼, 라이벌 意識을 갖고 機動戰術을 發展시켰다.

    韓國軍 5個 技保師團 保有

    2020 國防改革을 發表하는 過程에서 우리 軍의 部隊 數가 公開됐다. 이에 따르면 現在 陸軍은 열 個 軍團, 22個 常備師團으로 編成돼 있다. 열 個 軍團 가운데 9軍團(全北 完走)과 11軍團(慶南 昌寧)은 忠淸 全羅 慶尙 地域을 擔當하는 2軍 隸下에 있다. 2020 國防改革에 따르면 陸軍은 早期에 2軍司令部를 後方作戰司令部(侯爵社)로 改編하면서 이 群團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여덟 個 軍團이 남는데, 이 가운데 1·5·6·7·首都軍團이 京畿道를 擔當하는 3軍司令部에 屬하고, 2·3·8軍團은 江原道를 作戰地域으로 하는 1軍司令部에 配屬된다. 이러한 體制의 陸軍이 現在 다섯 個 技保師團을 갖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2個 常備師團의 4分의 1에 肉薄하는 數字가 技保師團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陸軍은 數記事와 量記事 外에 11祈報祀(花郞部隊), 26祈報祀(불무리部隊), 30祈報祀(必勝部隊)를 保有하고 있다. 그리고 2010年쯤 8師團(오뚝이部隊)을 技保師團으로 再編할 豫定이므로 早晩間 여섯 個의 技保師團을 갖는다. 다섯 個 技保師團 가운데 네 個는 3軍에 配屬되고 花郞部隊인 11祈報祀만 1軍에 配屬된다. 江原道는 機動戰을 펼칠 空間이 적어 한 개 技保師團만 配置하고, 들이 넓고 서울 等 大都市가 많은 3軍 地域엔 네 個의 技保師團을 配置한다.

    陸軍은 다섯 個의 技保師團으로 韓半島와 東北亞 安保 環境 變化에 充分히 對處할 수 있을 것인가. 正答부터 밝히면 ‘相當히 未洽하다’이다. 美 陸軍은 여섯 個의 機動事端을 갖고 世界를 制霸하고 있는데, 왜 韓國 陸軍은 다섯 個 技保師團으로 韓半島와 東北亞 安保 問題에 제대로 對應하지 못하는 것일까. 北韓 陸軍의 電力과 東西洋 戰死(戰史)를 통해 드러난 機動部隊의 重要性을 檢討한 後 韓半島 有事時 機動部隊 役割을 살펴보기로 하자.

    [第1部] 獨逸의 구데吏案이 創始한 機甲部隊의 電擊戰

    北韓 陸軍은 休戰線 最前方에 西쪽에서부터 步兵인 4軍團(黃海南道 海州)-2軍團(黃海北道 평산)-5軍團(江原道 平康)-1軍團(江原道 淮陽)을 配置했다. 그리고 그 뒤에 815機械化軍團(黃海北道 서흥)과 820戰車軍團(黃海北道 沙里院), 620砲兵軍團(黃海北道 新溪), 806機械化軍團(江原道 元山)을 配置했다.

    815機械化軍團과 820戰車軍團, 620砲兵軍團은 京畿道 北쪽 그러니까 韓國 3軍과 對敵하고, 806機械化軍團은 韓國 1軍을 相對한다. 南北韓 陸軍은 DMZ를 境界로 여덟 個 軍團을 配置해놓았다. 西部戰線에 다섯 個, 東部 戰線에 세 個 軍團을 配置한 것까지도 똑같다. 差異點은 韓國은 일곱 個 步兵軍團에 한 個 機動軍團(7軍團)인 데 反해, 北韓은 네 個 步兵群團에 두 個 機械化軍團, 한 개 戰車軍團, 한 개 砲兵軍團을 構成했다는 點이다.

    한국군, 평시 신속결정작전 펼칠 기갑군단 창설하라

    오스트리아를 迅速히 合倂한 히틀러와 電擊戰을 創始한 舊데리안, 舊데리안에게 影響을 끼친 드골, 機甲戰의 鬼才인 로멜(왼쪽부터).

    그러나 韓國 陸軍은 西部戰線에 있는 步兵軍團에 한 個씩 技保師團을 넣어놓았다. 卽 1群團에는 30祈報祀, 5群團에는 8祈報祀(8師團은 2010年을 目標로 祈報祀로 再編되고 있음), 6群團엔 26祈報祀를 두었고, 機動軍團인 7軍團은 數記事와 量記事로 編成돼 있다. 首都軍團을 除外한 西部戰線의 前 群團이 技保師團을 갖고(또는 ‘가질 豫定’에) 있다

    步兵部隊 支援하는 韓國軍 機甲部隊

    1軍(11祈報祀)과 1軍團(30祈報祀), 6軍團(26祈報祀), 5軍團(8祈報祀-2010年 以後)에 配屬돼 있는 技保師團을 모으면 陸軍은 7軍團과 같은 機動軍段을 두 個 더 만들 수 있으니, 機械化步兵 前歷이 北韓에 비해 未洽하다고 斷定할 수는 없다. 韓國 陸軍은 따로 砲兵軍團을 만들지 않고, 軍團에 砲兵旅團을, 師團에 砲兵聯隊를 配屬해놓았다. 그리고 獨立된 誘導彈司令部를 갖고 있어 砲兵軍團이 없다고 하여 北韓에 비해 砲兵 前歷이 閱歲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點에서 큰 差異가 있다. 北韓 陸軍은 戰車軍團을 갖고 있으나 韓國 陸軍은 없다는 點이다. 韓國 陸軍은 戰車部隊를 步兵部隊와 機械化步兵部隊 支援用으로만 使用하고 있다. 卽 步兵軍團을 돕기 爲해 機甲旅團을 倍速시키고, 步兵師團을 支援하기 위해 機甲大隊(3軍 隸下 師團)나 機甲中隊(1軍 隸下 師團)를 配屬시켜놓았다.

    步兵部隊 作戰 支援을 目標로 하는 戰車部隊는 戰車 固有의 長點을 살린 作戰을 하지 못한다. 電車가 갖고 있는 獨特한 長點을 살려 作戰하려면 機甲師團이나 機甲群團이 있어야 하는데, 韓國 陸軍은 電車가 不足해 이러한 部隊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反面 北韓 陸軍은 오래前부터 820戰車軍團을 維持해오고 있다.

    機甲軍團(師團)과 機械化軍團(師團)은 같은 機動部隊이지만 若干의 差異가 있다. 2臺의 1의 比率로 電車가 裝甲車보다 많으면 機甲群團이고, 1代의 2의 比率로 적으면 機械化軍團이다. 韓國軍은 裝甲車가 많은 機械化師團은 갖고 있지만, 電車가 많은 機甲群團은 갖고 있지 못하다.

    機甲軍團과 機械化軍團 같은 機動部隊는 步兵軍團보다 後方에 配置된다. 步兵軍團이나 步兵師團에 100㎞는 머나먼 길이지만, 時速 60㎞로 달리는 機動部隊엔 옆 마을 程度의 距離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機動部隊는 後方에 있다가 脆弱點이 發見된 쪽으로 벼락같이 치고 나가 100餘㎞를 突破해 一擧에 傳貰를 뒤집는다.

    機甲群團이나 機甲師團의 重要性은 第2次 世界大戰을 일으킨 獨逸 陸軍과 이에 對應한 美·英·佛·蘇 陸軍의 經驗을 통해 인정받게 되었다. 電車는 第1次 世界大戰 때인 1914年 英國軍 空甁 中領인 스윈턴에 依해 開發됐는데, 스윈턴 中領이 電車를 開發한 데는 理由가 있었다.

    第1次 世界大戰은 步兵 中心의 塹壕戰이었다. 步兵은 “突擊 앞으로”를 외치며 進擊한다. 이때 相對 步兵은 깊은 塹壕에 숨어 機關銃을 쏴대므로, 突擊한 兵士들은 高地에 이르지 못하고 大部分 고꾸라졌다. 相對가 突擊할 때도 같은 狀況이 反復되었다.

    이러한 塹壕戰을 打開하기 위해 獨逸軍은 毒가스까지 使用했으나 戰況을 打開하지 못했다. 兵士의 犧牲을 줄여보려던 스윈턴 中領은 無限軌道를 달고 있는 農業用 트랙터를 보고 塹壕를 건너뛰며 攻擊할 수 있는 ‘움직이는 토치카’ 開發에 着眼했다. 그리고 新武器의 正體를 가리기 위해, 이 武器를 食水를 받아놓는 ‘(물)탱크’로 불렀다.

    假名이 本名이 된 ‘탱크’

    그가 생각한 ‘움직이는 토치카’는 無限軌道 위에 쏟아지는 機關銃彈을 막을 수 있도록 두꺼운 鐵板으로 防護를 하고 그 앞에 機關銃을 달아 攻擊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스윈턴은 이러한 槪念으로 開發한 武器에 ‘마크 1’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僞裝 名稱인 탱크도 使用되었다.

    그 後 英國 陸軍은 마크 2, 3, 4를 開發했으나, 이들을 通稱 탱크라 했다. 假名으로 出發한 탱크는 本名이 된 것이다. 이 탱크가 日本과 韓國에 들어와 古代戰鬪에서 말을 利用해 만들어졌던 ‘戰車(戰車)’로 飜譯되었다. 電車는 두꺼운 掌匣(甲)을 한 機動(機) 武器이므로 ‘機甲(機甲)’이란 이름도 얻었다.

    電車는 英國에서 開發됐지만 活用術은 獨逸에서 發展했다. 電車는 獨逸語로 ‘판저(Panzer)’인데, 獨逸은 第2次 世界大戰을 통해 ‘電擊戰(電擊戰)’이라는 뜻의 獨逸語 ‘Blitzkrieg(블리츠크리에그)’와 戰車를 뜻하는 獨逸語 ‘Panzer’를 世界的으로 流行시켰다. 3S로 불리는 surprise(奇襲) speed(速度) superiority(優勢)를 特徵으로 하는 電擊戰은 舊데리안(1888~1954)과 로멜(1891~1944)에 依해 發展했다.

    第2次 世界大戰 以前 유럽國家에서 陸軍의 主力은 步兵이었다. 舊데리안은 步兵이지만 機動의 重要性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처음 舊데리안은 車輛을 利用한 機動을 생각했는데 이 部隊는 我軍 地域에서는 빠르게 機動하나 적지(敵地)에서는 防護能力이 없어 제대로 起動하지 못했다.

    質的 優勢 무너뜨리는 量的 劣勢

    논두렁을 오르는 瞬間 戰車 砲身은 하늘을 向한다. 電車의 砲身은 地面과 나란한 水平角 以下로는 내려오지 못하므로, 이러한 電車는 前方에 있는 相對 電車를 쏠 수가 없다. 反面 相對 電車는 掌匣이 弱한 我軍 電車의 바닥을 向해 決定打를 날릴 수 있다. 戰車 砲身이 하늘을 向하는 狀況을 避하기 위해 무논에서 맴돌 수도 있다. 그러나 맴돌기는 相對에게 目標物이 돼주는 行爲가 된다.

    韓半島는 到處에 電車가 隱身하기 좋은 山과 언덕이 있다. 性能이 떨어지는 戰車일지라도 山과 언덕에 숨어 있다가 近距離 射擊을 하면 性能 좋은 敵 電車도 한瞬間에 깨질 수 있다. 韓半島의 自然條件은 性能 좋은 戰車라고 하여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保障하지 않는다.

    2006年 ‘國防白書’는 北韓軍이 保有한 電車는 3700餘 대이고 韓國軍이 保有한 電車는 2300餘 臺로, 北韓이 韓國보다 1400餘 대 많다고 밝히고 있다. 電車 臺數에서는 韓國이 38代 62의 比率로 劣勢다. 韓國軍 戰車의 性能이 아무리 優秀해도 38代 62라는 量的 劣勢를 가볍게 突破할 程度로 優秀하지는 않을 것이다.

    北韓은 6·25戰爭의 經驗 때문에 戰車 電力 育成에 努力해왔다. 北韓 經濟力이 무너졌다고 해도 北韓 電車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戰略家들은 韓國은 電車 臺數의 增强이 時急하다고 指摘한다. 99代 98로 끝난 籠球試合에서는 敗者(敗者)도 最善을 다했다는 拍手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戰爭은 異種 格鬪技와 같아서 若干의 優勢가 殲滅을, 若干의 劣勢가 全滅을 招來하는 境遇가 많다.

    韓國의 不足한 戰車 前歷을 메워준 것이 駐韓美軍과 韓美同盟이었다. 駐韓美 8軍은 相對 電車를 잡는 攻擊헬기로 武裝한 航空旅團을, 駐韓美 2師團은 機甲旅團과 航空旅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有事時 美國은 수많은 電車를 韓國에 보낸다는 作戰計劃 5027을 갖고 있었기에, 韓國은 不足한 戰車 前歷을 相殺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電車의 運用術이다. 戰鬪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生存이다. 내가 죽으면 相對를 攻擊할 수 없으므로 戰鬪는 그야말로 ‘芽生然後(我生然後)에 薩埵(殺他)’의 原則에 忠實해야 한다. 長期 試合은 아무리 많은 말이 살아남아도, ‘韓(漢)’이나 ‘初(楚)’ 같은 張이 떨어지면 敗北한다. 따라서 本格的인 攻擊을 하기 前, 腸을 保護하는 ‘宮’을 짜는 境遇가 많다.

    五方陣(五方陣)과 五角編制

    抛(咆)를 뒤로 빼내고 사(士)의 位置를 바꿔 腸을 保護할 宮을 짜는 것이 戰鬪에서는 陳(陣)을 짜는 것에 該當한다. 臟器는 ‘將棋板’이라고 하는 制限된 範圍 안에서만 싸우나, 戰鬪에는 이러한 制限이 없다. 將棋板의 長과 사는 宮 밖으로 나가지 못하나, 戰鬪司令部는 制限 없이 移動할 수 있다. 戰場에 나간 指揮官은 언제 어느 곳에서 相對가 奇襲해 오더라도 儒生力量을 保存할 수 있는 方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戰鬪는 芽生然後, 卽 防禦로부터 始作해야 한다. 一般的인 防禦는, 起動을 하지 않는 狀態에서 山이나 江 같은 地形地物을 利用해 實施한다. 地形地物은 場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進法은 地形地物이 없는 完全 平地를 想定해 防禦에 가장 유리한 形態가 무엇인지 찾는 것에서부터 發展했다.

    完全 平地에서 防禦하기 좋은 形態의 陣을 開發한 後, 이 原形을 그때그때 周邊狀況에 맞춰 變形하는 것으로 進法은 發展해온 것이다. 東西洋의 兵法家들은 오래 前부터 完全 平地에서 防禦하기 가장 좋은 陣으로 ‘五方陣(五方陣)’을 꼽아왔다. 여기서 房(方)은 四角形을 뜻하므로 五方陣이란 말은 나올 수 없다. 五方陣이란 用語가 생긴 것엔 까닭이 있다.

    五方陣은 四角形의 꼭짓點에 該當하는 곳에 部隊를 配置하고(四方陣), 四角形의 가운데에 또 하나의 部隊를 配置하는 것이다. 이러한 配置는 四方 어느 곳에서 敵이 쳐들어와도 2~4個 部隊로 對應할 수가 있다는 長點이 있다.

    敵이 꼭짓點으로 쳐들어오면 꼭짓點에 있던 部隊로 日次 對應하고, 左右 꼭짓點에 있던 部隊가 支援한다. 그래도 戰力이 달리면 가운데 있던 部隊가 出動해 支援한다. 敵이 量 꼭짓點 사이로 쳐들어오면 兩 꼭짓點에 있던 部隊가 막아서고, 이어 中央에 있던 部隊가 出動해 支援한다. 敵이 四方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네 꼭짓點에 있던 部隊가 모두 對應하고, 中央에 있던 部隊는 그中 弱한 곳을 돌아다니며 支援하는 機動防禦를 한다.

    五方陣을 擇하지 않고 6角진, 7角진 或은 원진(圓陣)을 採擇하면 보다 넓게 防禦網을 構築해, 四方에서 쳐들어오는 敵을 效果的으로 막을 수 있다는 長點이 있다. 그러나 벨기에 軸線을 選擇해 集中 攻擊한 獨逸軍처럼 어느 한쪽으로만 쳐들어오면, 五方陣보다는 적은 兵力으로 防禦에 나서야 한다는 負擔이 있다.

    三角形으로 陣을 짜고 中央에 機動 防禦部隊를 두는 3각진은, 我軍의 活動 空間이 狹小해진다는 弱點이 있다. 一字陣(一字陣)은 正面에서 오는 敵을 막는 데는 매우 유리하나 後方이나 側面에서 오는 적은 막기 어렵다는 短點이 있다.

    5個 旅團으로 構成된 機甲軍團

    五方陣은 防禦뿐만 아니라 攻擊에도 유리하다는 評價를 받는다. 我軍이 攻擊하면 敵軍은 我軍이 接近해올 것으로 豫想되는 通路에 一部 部隊를 埋伏시킨 後 我軍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리고 我軍을 正面에서 막아서 앞뒤에서 包圍 攻擊한다. 이러한 包圍展에 對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構造가 五方陣이다.

    電車는 自己를 지킬 수 있는 두꺼운 掌匣을 쓰고 相對를 攻擊할 수 있는 火力과 機動力을 갖췄으므로, 攻擊과 防禦를 一元化한 武器로 꼽힌다. 攻擊과 防禦를 一元化한 戰車와 攻擊과 防禦를 一元化한 五方陣이 만나 誕生한 것이 現代 陸軍의 5角體制다.

    5角體制, 또는 5各編制는 한 司令官이 5個 部隊를 指揮하는 構造다. 只今의 韓國 師團은 3個 連帶로 構成되고, 連帶는 3個 大隊, 大隊는 3個 中隊, 中隊는 3個(또는 4個) 小隊로 構成되는 典型的인 3各編制를 擇하고 있다. 3各編制는 2個 部隊를 앞으로 보내 싸우게 하고 1個 部隊는 弱한 쪽을 支援하는 豫備隊 任務를 맡기는 構造다. 이러한 編制는 前方 作戰에만 盡力하는 ‘두터운 一字陣(一字陣)’ 形態를 取한다.

    이러한 部隊는 後方과 側面 攻擊에 脆弱하므로 攻擊할 때는 一字陣을 維持하는 것이 매우 重要하다. 卽 相對가 一字陣을 뚫고 後方으로 浸透해 包圍 攻擊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機動部隊는 이러한 線을 만들지 않는다. 機動部隊는 오스트리아를 占領한 舊데리안 部隊, 파리로 進擊한 로멜의 機甲師團처럼 孤立을 自招하며 敵陣으로 뛰어들어간다. 따라서 散之四方으로부터의 攻擊에 對處할 수 있도록 5防塵 體制, 卽 5角體制를 갖추는 것이 좋다.

    5角體制의 師團은 5各連帶-5各大隊-5各重大-5各小隊로 構成되니 5×5×5×5=625個 小隊를 갖는다. 反面 3角 體制의 師團은 3×3×3×3=81個의 小隊를 保有하니, 5角體制의 師團은 3各편제의 師團보다 일곱 倍 以上 크다. 때문에 5各편제의 師團은 ‘軍團’으로 부르는 境遇가 많다. 5各편제의 連帶는 3各編制 師團보다 많은 5×5×5=125個의 小隊를 가지므로 ‘旅團’으로 부른다.

    5各編制 軍團라고 해서 모든 것을 5角으로 할 수는 없다. 大隊 以下는 3角으로 編制해서 一般 師團보다 若干 큰 3×3×3×5=135個의 小隊를 갖는 境遇가 많다. 機甲部隊는 群團으로 編制하는 것이 좋다. 北韓은 5個 旅團으로 編成된 820戰車 群團을 만들었다.

    그러나 韓國軍은 機甲群團을 갖고 있지 않다. 韓國 陸軍은 戰車部隊를 步兵部隊 支援用으로만 使用하고 있다. 韓國軍은 7軍團 等 5個 機械化步兵師團을 갖고 있으나 이 部隊는 機甲軍團 代用이 되지 못한다.

    機械化步兵師團의 主力은 裝甲車다. 裝甲車는 步兵 輸送이 主目的이라 戰車만큼 裝甲이 두껍지 않다. 主砲도 戰車에 비해 顯著히 작은 便이다. 裝甲車는 相對 電車의 攻擊을 받으면 한瞬間에 찢어지지만, 裝甲車의 火力은 敵 戰車를 破壞할 수 없다.

    韓國軍의 電車 臺數가 北韓軍에 비해 38代 62의 比率로 劣勢인 것은 바로 5角 편제의 機甲群團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時急한 機甲軍團 創設

    勿論 韓國은 戰車 生産業體인 (週)로템으로 하여금 生産 設備를 擴充해 戰車 生産量을 늘리라고 하면, 短時間 內에 1400餘 臺를 生産할 수 있다. 그러나 그 後엔, 壽命이 다해 淘汰하는 電車를 代替하는 物量이 들어올 때까지 로템은 일감을 잡지 못한다는 問題가 發生한다.

    韓國 陸軍은 機甲群團은 且置하고 機甲師團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爲해서는 (週)로템이 適正한 水準으로 XK-2 等 優秀한 電車를 生産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機甲師團을 만들려면 步兵師團 解體를 決心해야 한다. 裝備가 많은 機甲師團은 步兵師團보다 資産 規模가 훨씬 크므로 機甲師團을 만들려면 陸軍은 두 個 以上의 步兵師團을 解體해야 할 것이다.

    韓國軍이 效果中心作戰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陸海空軍의 機動部隊를 育成할 必要性을 切感했다는 뜻이다. 陸軍의 機甲軍團, 海軍의 機動艦隊, 海兵隊의 公知(空地)機動部隊, 空軍의 遠征軍(遠征軍)은 各軍을 代表하는 機動部隊다. 이러한 部隊를 갖추면 韓國은 有事時에는 韓國을 防禦할 수 있고, 平和時에는 相對를 抑制하는 效果를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은 平和時에 왜 軍備를 增强하느냐고 묻는데 平和를 保障하는 抑制는, 軍備 增强을 통해 形成된다. 抑制를 통한 平和維持는 軍備 增强뿐만 아니라 同盟을 통해서도 强化될 수 있다. 가장 强力한 美國과의 同盟을 維持하는 것이 韓國에는 平和를 維持하는 지름길이다.

    韓國이 機甲師團이나 軍團을 갖는다면 北韓은 相當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海軍力과 空軍力에 이어 陸軍 戰力에서도 均衡이 무너지면, 北韓 實勢들 사이에서는 韓國과의 對決을 回避하려는 兆朕이 나타나고 一部는 心理的인 投降을 하는 矛盾이 일어난다. 이러한 矛盾이 커지는 瞬間이 바로 ‘北韓 急變(急變)’ 事態다. 어설픈 核과 미사일을 갖고 있지만 무너진 經濟力을 再建하지 못하면, 北韓의 矛盾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矛盾이 舊式이긴 하지만 엄청난 戰爭 物資를 備蓄한 北韓에서 暴動으로 擴大된다면 韓半島와 東北亞 全體는 深刻한 安保 危機를 맞을 수 있다.

    內亂에 參與한 勢力은 各自 입맛에 따라 周邊國에 도움을 請할 것이므로, 周邊國들은 北韓 推移는 勿論이고 다른 周邊國들이 어떠한 決定을 내리는지에 對해 神經을 곤두세울 것이다. 이 危機는 누군가가 北韓에 들어가 治安을 잡아야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介入은 侵略으로 理解돼 北韓 住民들로부터 거센 抗戰을 받을 수 있다. 좋은 事例가 아프간과 이라크다. 아프간은 蘇聯軍이 들어왔을 때는 勿論이고 美軍이 들어온 只今도 結社 抗戰을 거듭하고 있다.

    美軍은 軍事的으로는 50餘 日 만에 이라크를 接受했지만 이라크를 安定化하는 民政作戰에 失敗해 苦戰을 하고 있다. 北韓의 治安을 回復하려면 北韓 住民들이 抗戰 意識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이 重要하다. 北韓 內戰을 종식시킬 軍事力과 北韓 住民의 抗戰儀式을 拂拭시킬 魅力을 同時에 갖춘 나라는 어디일까.

    韓半島는 어느 한 外勢가 介入하면 다른 外勢도 介入하는 곳이다. 萬에 하나 韓國이 ‘同盟을 活用’하는 次元에서 美國과 함께 北韓 急變事態에 對處하겠다고 하면, 中國과 러시아는 美國이 介入했으니 자국도 해야 한다며 바로 介入할 수 있다. 때문에 韓半島 統一 問題에 穿鑿해온 戰略家들은 韓國은 單獨으로 北韓 問題에 介入할 能力을 갖춰야 한다고 主張한다.

    韓國이 美國을 이끌고 北韓 急變事態에 介入하는 것은 展示에만 稼動하는 韓美聯合司를 앞세우는 것이니 周邊國에게 ‘戰時’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韓國이 平時作戰權을 가진 合參 主導로 單獨 介入하면 ‘平時’로 理解될 可能性이 높아진다.

    韓國이 單獨으로 北韓 問題에 介入할 때 가장 念慮해야 하는 것은 中國의 對應이다. 戰略家들은 이 問題는 外交的으로 풀어야 한다고 指摘한다. 韓國과 中國은 1992年 8月24日, 修交 共同聲明에 署名하는 것으로 過去事 問題는 덮고 바로 外交關係를 맺었다.

    修交 共同聲明은 韓中 關係를 規律하는 基本이다. 이 聲明에는 ‘兩國은 相對의 主權을 尊重하고 相對의 領土를 認定하며, 相互 不可侵을 하고 相互間 內庭에는 介入하지 않는다’는 內容이 있다. 그리고 ‘大韓民國은 中華人民共和國을 唯一한 中國 政府이고, 臺灣은 中國의 一部라는 것을 認定한다’는 것과 더불어 ‘中華人民共和國은 韓半島가 早期에 平和的으로 統一되는 것과 韓半島가 韓民族에 依해 平和的으로 統一되는 것을 支持한다’는 內容이 있다.

    中國, 韓半島 平和的 統一 支持

    여기서 注目할 것이 ‘中國은 韓半島가 韓民族에 依해 平和的으로 統一되는 것을 支持한다’고 한 部分이다. 이 文句대로라면 韓國이 外勢를 動員하지 않고 戰爭이 아닌 方法으로 平時 狀態에서 北韓과 統一한다면 中國은 支持해야만 한다.

    2003年 韓國에서는 北韓 急變事態 때 韓美聯合軍이 介入하는 作戰計劃 5029街 밝혀져 論難에 휩싸였다. 이 作戰計劃은 김영상 大統領-김동진 合參議長 時節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計劃은 作成 段階에서부터 反對에 부딪혔다고 한다.

    첫째 理由는 한미연합사는 北韓軍이 攻擊을 한 展示에만 合法的으로 稼動할 수 있다는 分析에서 나왔다. 한미연합사는 韓美相互防衛條約을 根據로 誕生했는데, 韓美相互防衛條約은 韓國이 攻擊을 받았을 때에만 韓美 兩國이 軍事的으로 對應한다는 內容을 담고 있다.

    北韓 急變事態는 北韓이 戰爭을 挑發한 것이 아니므로 韓美 聯合司가 이를 上程해 作戰計劃을 세우는 것은 法的 妥當性이 없다는 指摘이 많았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韓美聯合司가 北韓 急變事態에 介入하면 中國은 韓美 兩國이 展示를 만들었다고 보고, 北韓 問題에 軍事的으로 介入할 수 있다는 指摘도 나왔다. 이러한 主張을 한 사람들은 北韓 急變事態는 合參 主導로 韓國軍이 單獨으로 介入하고 美國은 防牌막이가 되는 것이 좋다고 主張했다.

    東北亞에서 韓半島를 經營하는 政府의 比重은, 유럽 大陸에서 獨逸을 經營하는 政府의 比重만큼 무겁지 못하다. 韓國의 比重은 차라리 네덜란드에 가까운 便이다. 獨逸과 英國과 프랑스에 둘러싸인 네덜란드가 隣接한 小國인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統一을 이루려 한다면 세 强國은 어떤 態度를 取할 것인가. 세 强國은 네덜란드가 自力으로, 平和的인 方法으로 그리고 세 强國에 對해 敵對的이지 않다는 다짐을 하며 아주 빠른 時間에 統一을 해야 마지못해 그 統一을 認定할 것이다.

    1990年 獨逸은 外勢 介入 없이 統一을 이루었다. 當時의 콜 政府는 美-獨 共助를 重要視했지만 統一 過程에는 美國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美國을 끌餘들었다면 다 쓰러져가는 蘇聯은 어떤 形式으로든 獨逸 統一에 反旗를 들었을 것이다. 西獨은 美國을 西獨을 支援하는 重要한 後援勢力으로 둠으로써, 英國과 프랑스도 獨逸 統一에 介入하지 못하게 했다.

    獨逸 統一은 西獨軍이 아주 빠르게 東獨에 進駐해 短期間 內에 東獨軍의 武裝을 解除시켰기에 可能했다. 民主的인 節次로 이뤄지는 統一일지라도 武裝한 勢力이 反旗를 들면 複雜해지는데, 獨逸은 그러한 過程을 겪지 않았다.

    北核 問題를 論議하기 위해 마련한 6者會談이 韓半島 問題를 論議하는 쪽으로 範圍를 넓히려는 兆朕을 보이고 있다. 南北韓을 뺀 4個國이 韓半島 再統一을 論議하는 狀態에서, 北韓 急變狀態가 發生하면 4個國이 모두 介入해 韓國 主導의 統一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韓國은 6者會談은 北核 問題 解決에 局限시키고 全體 韓半島 問題는 南北韓이 主導한다는 것을 分明히 밝혀야 한다는 指摘이 있다.

    北核 問題를 놓고 6個國이 熾烈한 神經戰을 펼치는 渦中에 北韓에서 韓國과 合倂을 바라는 외침과 이를 除去하려는 움직임이 衝突하고, 이 衝突이 漸漸 커져 犧牲者가 續出하는 狀況을 假定해보자. 韓國軍은 平和維持 活動을 위한 北韓 晉州를 決定할 수 있다. 韓國 政府는 事前에 周邊國들에 北韓 治安 問題는 民族 內部의 일이니 韓國이 單獨으로 對處하겠다는 通報를 해 諒解를 얻고 行動을 開始한다.

    그리고 막 創設된 韓國軍 機甲群團에 地雷가 除去된 京義軸線을 따라 10時間 內에 200km 떨어진 平壤을 接受해 治安을 確保하라는 指示를 내린다. 同時에 公知(空地) 機動部隊人 海兵隊는 元山으로 上陸해 같은 任務를 遂行하라는 指示가 내려간다. 平壤을 接受한 機甲群團은 곧 北韓 首腦部를 통해 武裝解除를 하는 韓國軍에 協助하라는 指示를 내린다.

    그 瞬間 韓國軍 步兵師團이 DMZ를 넘어가 北韓軍을 武裝解除시킨다. 이 作業이 순조롭게 進行될 때쯤 韓國은 大規模 對北 援助를 斷行해 北韓의 飢餓(飢餓) 問題를 解決한다. 그리고 北韓 住民을 相對로 韓國과의 合倂 意思를 묻는 國民投票를 實施해 統一을 이룬다. 꿈같은 家庭이지만 이러한 일은 現實이 될 수도 있다.

    未來는 準備하는 者들의 것이다. 韓國은 自己 防禦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機甲群團을 가져야 한다. 果然 韓國은 10時間 內에 平壤을 占領할 機甲群團을 短期間 內에 創設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電車를 앞세워 突進할 수 있는 掌匣 機能을 갖춘 機動 部隊의 創設을 主張했다. 舊데리안은 步兵 將軍들의 미움을 사 閑職으로 左遷되기도 했으나 繼續 機甲部隊 育成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祕密警察인 ‘게슈타포’는 그가 叛亂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注目했다.

    게슈타포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가 어느 날 舊데리안을 불렀다. 舊데리안은 히틀러에게 “只今 獨逸은 東쪽으로는 蘇聯, 西쪽으로는 프랑스에 둘러싸인 形局이다. 이러한 包圍를 뚫고 獨逸의 國力을 極大化하려면 빠른 機動部隊, 그中에서도 戰車部隊가 있어야 한다”고 主張했다. 히틀러는 蘇聯과 프랑스를 밀어내고 獨逸을 유럽의 中心國家로 만들 생각이 있었으므로 機甲部隊를 이끌 軍司令官에 舊데리안을 임명했다.

    이 무렵 獨逸에서는 같은 게르만 民族으로 構成된 오스트리아와 合倂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오스트리아에도 나치당이 있었기에 오스트리아 內에서도 獨逸과 合倂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機動部隊가 平時에 이룬 毒-오 統一

    過去 오스트리아는 獨逸語를 使用하는 國家 가운데 가장 强力했다. 그러나 獨逸의 前身인 프로이센과의 戰爭에서 敗한 데 이어, 第1次 世界大戰을 치른 後에는 헝가리 等 거느리고 있던 많은 나라를 독립시켜, 自身은 작은 國家로 轉落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强國으로 浮上하는 獨逸과 合倂해 옛 榮光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沈默하는 多數’는 獨逸과의 合倂을 두려워했다.

    獨逸이 안팎에서 오스트리아와 合倂하자는 輿論을 일으키자 周邊國인 프랑스와 蘇聯이 緊張했다. 이들은 獨逸이 오스트리아와 合倂해 勢力을 키우는 것이 달가울 理 없었다. 萬一 獨逸이 오랜 時間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合倂한다면, 이들은 合倂을 妨害하는 次元에서 軍事的인 介入을 할 可能性이 있었다.

    프랑스와 蘇聯이 介入하면 오스트리아의 合倂 反對派들은 軍事的인 蜂起를 일으킬 蓋然性이 多分했다. 이러한 衝突을 避하는 方法은 周邊國과 오스트리아의 反對勢力에 反對할 틈을 주지 않도록 ‘눈 깜짝할 사이’에 合倂하는 것뿐이다. 舊데리안은 히틀러가 이러한 作戰을 計劃하고 있으리라고 斟酌하고 機甲部隊를 育成했다.

    獨逸 南東部 바이에른 注意 파사우(passau) 市는 오스트리아와 接한 國境都市인데, 여기서부터 오스트리아의 首都인 빈까지의 距離는 200㎞가 되지 않는다. 1938年 히틀러는 舊데리안 司令官에게 “72時間 內에 오스트리아의 首都 빈을 占領하라”는 作戰命令을 내렸다. 舊데리안은 그 卽時 “獨逸軍이 進擊하면 오스트리아軍이 抵抗할 수 있으니, 平和를 지키기 위해 出動한 것으로 僞裝하기 위해 綠色 旗발을 달고 가겠다”고 報告해, 承認을 받고 바로 出動 命令을 내렸다.

    그러자 隸下 部隊長들이 “200㎞를 달릴 기름이 確保돼 있지 않다” “交戰에 對備한 彈藥이 不足하다”는 等 갖가지 ‘아니오’를 常住했다. 이에 對해 舊데리안은 “一旦 燃料탱크만 채우고 出發하고 道路에서 注油所를 만나면 獨逸 政府의 이름을 걸고 외상으로 넣어라. 彈藥은 只今 갖고 있는 것만 싣고 出發해라. 進擊 途中에 오스트리아軍이 射擊을 해오면 交戰하지 말고 迂廻하라. 우리에게 必要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迅速한 進擊이다”라고 指示했다.

    구데吏案의 電車들이 全速力으로 파사우 詩를 通過할 때, 파사우 건너便에 있던 오스트리아軍은 獨逸軍 電車의 威容과 電車에 내걸린 綠色 旗발 때문에 交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獨逸 部隊는 電車를 앞세워 줄줄이 빈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道路에 들어섰다. 獨逸軍이 오스트리아를 侵攻한 것은 3月12日인데 워낙 進擊 速度가 빨라 다음날 獨逸은 오스트리아와 合倂을 宣言할 수 있었다.

    재빠른 國民投票

    그리고 한 달이 못 된 4月10日, 오스트리아 國民을 相對로 國民投票를 實施해 合倂 贊成 99.7%라는 높은 支持率을 받아내는 데 成功했다. 周邊國들은 오스트리아 住民이 國民投票를 통해 獨逸과의 合倂에 贊成했다고 하니 介入할 名分이 없었다. 機動部隊 德分에 獨逸은 展示가 아닌 ‘平時’에, 오스트리아와 民主的인 合倂을 이뤄낸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對象으로 한 ‘게르만 國家 統一’을 達成한 히틀러는 機甲部隊의 重要性을 確實히 認定하게 되었다. 그리고 機動部隊 育成에 全力을 기울여 1939年 폴란드를 侵攻할 때도 類似한 方法을 使用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게르만족으로 構成된 國家가 아니기에, 오스트리아에서처럼 同調勢力을 얻을 수 없었다. 同調 勢力을 얻기 힘들면 게르만 族을 두려워하며 게르만 族이 願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服屬 勢力’을 얻어야 한다. 獨逸軍의 威勢가 剛해지면 服屬 勢力이 增加하고 反對로 弱해지면 ‘抵抗 勢力’李 急膨脹한다.

    防禦戰을 할 때 가장 重要한 것은 ‘防禦線(線)’을 잘 維持하는 것이다. 防禦線의 어느 한 곳이 뚫려 敵軍이 쏟아져 들어오면, 뚫리지 않은 곳에 配置돼 있던 兵力을 敵軍을 막아 세울 수 있는 곳으로 빼내, 第2 防禦線을 形成해야 한다.

    구데吏案의 機甲部隊는 폴란드 侵攻에서도 最先鋒을 달렸다. 舊데리안君의 進擊 速度가 워낙 빨랐기에 폴란드軍은 第2 防禦線을 形成할 수 없었다. 폴란드를 侵攻하면서 獨逸은 空軍力과 ‘5列’이라고 하는 情報部隊度 有効適切하게 活用했다. 事前에 폴란드에 浸透해 있던 5列 要員들은 後退하는 폴란드軍 司令部의 正確한 位置를 알려주었고 獨逸 空軍機들이 精密 爆擊함으로써 폴란드軍 指揮部는 完全 痲痹돼버렸다.

    히틀러는 대단한 謀略가다. 그는 폴란드를 獨逸이 獨食하면 周邊國인 蘇聯이 두려움을 느껴 參戰할 수 있다고 보고, 事前에 蘇聯과 폴란드 分割을 約束했다. 獨逸軍은 1939年 9月1日 새벽 4時부터 폴란드를 攻擊해 7日엔 바르샤바 南西쪽 36마일까지 進擊했다. 그러자 폴란드는 루블린으로 首都를 옮기고 總體的인 抵抗을 準備하는데, 17日 東쪽에서 蘇聯軍이 攻擊해 들어왔다.

    한국군, 평시 신속결정작전 펼칠 기갑군단 창설하라

    世界 最高라는 讚辭를 받고 있는 차기 戰車 XK-2(왼쪽)와 次期 裝甲車 K-21.

    獨逸과 蘇聯은 元來 8月23日 蘇聯이 먼저 폴란드를 攻擊하기로 約束했었다. 그런데 疑心 많은 스탈린은 獨逸이 攻擊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獨逸의 勝利가 確實해지자 거져 줍는 次元에서 폴란드를 攻擊했다. 獨逸과 蘇聯은 各自가 占領한 만큼의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눠 먹게 되었다. 이때의 폴란드 處地가 日本과 中國 러시아에 둘러싸인 只今의 韓國과 아주 비슷하다.

    히틀러는 같은 民族으로 構成돼 있어 內部 同調者가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合倂할 때는 周邊國이 介入할 틈을 주지 않고 超스피드로 進擊했고, 內部 同調勢力이 적은 폴란드를 倂合할 때는 事前에 周邊國에서 먹잇감의 一部를 던져줌으로써 周邊國의 介入을 막는 基地를 보였다.

    슐리펜 計劃, 萬슈타인 計劃

    여기서 히틀러가 멈춰 섰다면 獨逸은 ‘第1次 世界大戰을 挑發했다 敗北한 國家’라는 汚名을 씻고, 러시아·프랑스·英國과 더불어 유럽 政治를 左右하는 强力한 國家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4强 體制에 滿足하지 않고 유럽 霸權國家를 願했다. 이를 爲해서는 國境을 맞대고 있는 永遠한 라이벌 프랑스를 굴복시켜야만 한다.

    나폴레옹 때의 프랑스는 獨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유럽의 霸權을 掌握했다. 反面 비스마르크 總理 時節의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빌헬름 1世는 파리에서 獨逸 皇帝에 就任하였다. 1勝1敗를 주고받은 兩國은 第1次 世界大戰 때 다시 맞붙었다.

    第1次 世界大戰은 獨逸軍의 攻擊으로 始作됐는데 프랑스는 英國과 美國의 支援을 받아 이를 막아냈다. 이때 프랑스를 이끈 總理가 클레망소(1841~1929)인데, 强力한 카리스마를 가진 클레망소 總理는 有能한 軍人인 포슈(1851~1929)를 聯合軍 總司令官에 오르게 한 狀態에서 獨逸軍의 降伏을 받아냈다. 後날 프랑스는 第1次 世界大戰 勝利를 記念하기 위해 새로 建造하는 航空母艦에 클레망소와 포슈의 이름을 붙였다.

    第1次 世界大戰에서 勝利하긴 했지만 프랑스는 獨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오래前부터 獨逸의 挑發을 抑制하기 위해 러시아(蘇聯) 카드를 活用해 왔다. 獨逸이 强盛해지면 러시아와 同盟을 맺어 兩쪽에서 牽制하는 外交術을 驅使해온 것. 이것이 獨逸에는 스트레스였다. 獨逸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同時에 잡아야만 유럽 霸權을 確保할 수 있다.

    이 祕策을 提示한 이가 獨逸 陸軍의 參謀總長인 슐리펜(1833~1913)이다. 슐리펜은 러시아의 ‘鈍重함’에서 祕法을 찾고자 했다. 러시아가 國家 總動員令을 내려 兵力을 動員하는 데 6~8週日이 걸릴 것으로 判斷한 그는 먼저 프랑스를 占領하고 이어 獨逸軍 主力을 東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를 친다는 假說을 세웠다.

    이 假說을 實現하려면 프랑스 戰線에 投入된 兵力과 物資를 短期間에 러시아 戰線으로 옮기는 方案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鐵道를 ‘內線(內線)’用 機動路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主張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獨逸은 鐵道를 積極的으로 發展시켰다.

    獨逸 內部의 鐵道 輸送網이 完成되자 ‘슐리펜 計劃’은 實行 段階로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슐리펜은 어느 쪽으로 프랑스를 쳐들어갈 것인지 苦悶하게 되었다.

    슐리펜은 프랑스를 攻擊하기 가장 좋은 通路로 獨逸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는 벨기에 軸線을 꼽았다. 벨기에는 低地帶인지라 大部隊가 機動하는 데 좋기 때문이다. 獨逸과 프랑스 國境엔 숲과 山岳地帶가 많아 大部隊가 機動하는 데 不利했다.

    또 벨기에는 中立國인지라 프랑스는 벨기에와 接한 國境線에 많은 兵力을 配置하지 않은 것도 理由로 擧論되었다.

    그러나 슐리펜 計劃은 意外의 伏兵을 만나 失敗했다. 첫째 伏兵은 벨기에의 抵抗이 대단했던 것이고, 둘째 伏兵은 英國軍의 參戰이었다. 獨逸은 英國이 프랑스를 도와 參戰할 것이라고는 全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프랑스보다 센 英國이 參戰했으니 事態가 꼬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侵攻이 如意치 않자 러시아를 向한 東部戰線 攻擊도 遲遲不進해졌다. 그 結果 獨逸은 지루한 塹壕戰을 거듭하다 國力이 消盡되면서 敗北하고 말았다.

    第1次 世界大戰에서 프랑스는 獨逸의 攻擊을 막아냈지만 獨逸의 재침에 對備해야 한다는 敎訓을 얻었다. 獨逸 攻擊에 對備하려면 毒-佛 國境에 强力한 防禦線을 建設해야 한다. 프랑스의 陸軍長官人 마지노(1877~1932)는 獨逸軍의 재침을 막기 위해 벨기에에서 스위스 사이의 毒-佛 國境線에 地形地物을 利用한 防禦陣地를 構築했는데, 이것이 그 有名한 ‘마지노線(線)’다.

    프랑스는 獨逸軍이 侵攻해온다면 第1次 世界大戰 때처럼 벨기에 軸線을 利用할 것으로 보았다. 獨逸軍의 프랑스 侵攻이 臨迫했을 때 프랑스는 큰 援軍을 얻었다. 英國이 大軍을 派兵한 것이다. 英國과 프랑스는 韓國과 日本 以上으로 ‘아옹다옹’하는 사이인데 왜 英國은 連거푸 프랑스를 도와준 것일까. 여기엔 英國만 아는 남모르는 事緣이 있다.

    네덜란드 건드리면 自動 參戰하는 英國

    獨逸이 벨기에를 占領한다는 것은 벨기에 北東쪽에 있는 네덜란드도 支配한다는 뜻이다. 只今도 네덜란드에는 로테르담 等 世界的인 港口가 있는데, 過去에도 네덜란드에는 港口가 많았다. 海洋文化가 發達한 네덜란드 地域에서는 아주 쉽게 英國으로 배를 띄울 수 있다. 이러한 네덜란드 地域을, 英國을 制壓하겠다는 意志를 가진 큰 政府가 掌握하면 英國은 深刻한 安保 威脅을 받는다.

    第2次 世界大戰 以前의 네덜란드는 中立國家였으므로 英國은 네덜란드부터 威脅을 느낄 必要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 制霸를 꿈꾸는 獨逸이 占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덜란드를 占領한 獨逸이 海軍力을 動員해 英國을 攻擊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88年 英國은 世界를 制霸하고 있던 스페인의 無敵艦隊를 相對로 國運을 건 一戰을 벌였는데, 이때 네덜란드와 벨기에 地域을 掌握한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다(스페인령 네덜란드). 이때 英國艦隊를 이끌고 스페인의 無敵艦隊를 潰滅시킨 人物이 海賊 出身인 드레이크다. 드레이크의 勝利로 英國은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은 勿論이고 世界를 制霸하는 霸權國家로 떠올랐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이끌던 1803年 英國은 또 한 次例 類似한 危機를 맞았다. 네덜란드 地域을 차지한 나폴레옹이 海軍을 動員해 英國 征伐을 準備한 것이다. 이에 英國에서는 넬슨 提督 指揮로 應戰했는데, 넬슨은 스페인의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프랑스 艦隊를 擊破했다. 이러한 經驗이 있어 英國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中立을 無視하고 占領하려는 나라가 있으면 바로 宣戰布告를 하고 日前에 들어간다.

    프랑스軍 後退보다 빨랐던 로멜의 突擊

    英佛聯合軍은 히틀러가 第1次 世界大戰 때처럼 벨기에 쪽으로 獨逸軍을 보낼 것으로 判斷하고 그곳으로 部隊를 이동시켰다. 벨기에의 東쪽엔 자그마한 內陸國家人 룩셈부르크가 있는데, 룩셈부르크와 國境을 接한 프랑스의 아르덴 週(州)는 우거진 숲이 있는 海拔 350~500m의 高原地帶다. 그때까지 絶對 多數의 戰略家는 機動部隊는 아르덴 숲을 通過할 수 없다는 固定觀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獨逸 陸軍의 萬슈타인만은 “아르덴 숲으로 機動部隊를 통과시킬 수 있다”고 主張했다. 히틀러는 卽刻 “萬슈타인 主張대로 作戰計劃을 바꾸라”고 指示했다. 이로써 獨逸은 벨기에 軸線으로 突擊한 過去의 슐리펜 計劃을 버리고 룩셈부르크-아르덴 地域을 突破하는 萬슈타인 計劃을 採擇했다. 그러나 英佛聯合軍은 아르덴 숲으로는 機動部隊가 들어올 수 없다고 믿고, 벨기에의 ‘브레다’란 都市로 集結했다.

    固定觀念만큼 危險한 적은 없다. 世界的인 勝利는 大槪 固定觀念을 깨는 形態로 이뤄졌는데, 固定觀念을 깨는 同人(動因)이 바로 機動이다. 아프리카 北部(只今의 리비아)에 있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紀元前 218年 이베리아 半島로 上陸한 다음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다(地中海)만 바라보고 있던 로마는 뒤에서 나타난 한니발의 코끼리 部隊 奇襲에 놀라 16年을 쩔쩔매다, 스키피오가 자마大戰(大戰)에서 코끼리 部隊를 擊滅함으로써 艱辛히 危機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폴레옹도 豫想치 못한 通路로 部隊를 機動시킨 指揮官이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 駐屯한 오스트리아軍을 攻擊하기 위해 部隊를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산맥을 通過할 때, “내 事前에 不可能이란 單語는 없다”며 兵士들을 督勵한 것은 有名한 逸話다. 알프스 山脈을 넘은 나폴레옹軍은 이탈리아에 駐屯하고 있던 오스트리아軍을 擊破하고 내친김에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쳐들어가 神聖로마帝國을 멸망시키고(1797년), 유럽 霸權을 掌握했다.

    豫想치 못한 곳으로 機動部隊를 投入한다는 敎訓을 1940年의 나폴레옹 後裔들은 完全히 忘却했다. 나폴레옹의 敎訓을 되살린 것은 神聖로마帝國(獨逸은 神聖로마帝國의 後裔다)의 後孫인 萬슈타인이었다. 1940年 구데吏案이 이끄는 獨逸軍 機甲部隊는 숲으로 둘러싸인 아르덴 高原을 隱密히 突破했다.

    그리고 브레다에 集結해 正面에서 다가오는 獨逸軍과 一戰을 벌이는 英佛聯合軍을 뒤에서 攻擊해 一擧에 混亂에 빠뜨렸다. 獨逸軍이 挾攻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英佛聯合軍은 海岸으로 逃走했다. 大西洋 沿岸의 프랑스 都市인 덩커크에서 英國이 보낸 艦艇이 이들을 救出할 豫定이었기 때문이다. 덩커크 撤收는 第2次 世界大戰 初期 聯合軍이 當한 最大의 敗戰이었다.

    덩커크 撤收는 6月5日 끝났는데, 이로써 獨逸은 5月10日 始作한 벨기에 作戰을 勝利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덩커크 撤收가 이뤄지는 동안 毒-佛 國境線의 프랑스軍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獨逸軍이 적은 兵力을 動員해 속임數 攻擊을 繼續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向한 攻擊도 구데吏案의 機甲部隊가 主導했는데 이때 最先鋒에 섰던 部隊가 로멜이 이끄는 7機甲師團이었다. 로멜 部隊는 벨기에 戰鬪에서 敗北해 退却하는 프랑스軍보다 떠 빨리 進擊했다. 進擊 途中 프랑스軍과 遭遇해도 그는 이들의 武裝을 빼앗거나 降伏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그냥 파리로 내달렸다. 로멜의 突擊 德分에 獨逸軍은 벨기에 出發 9日 後 파리에 無血 入城했다.

    르클레르의 活躍

    世界 最强의 陸軍을 가진 것으로 評價되던 프랑스가 열흘도 못 돼 獨逸軍에 首都를 빼앗기자 電擊戰과 獨逸 판저(戰車) 部隊에 對한 關心이 폭증했다. 電擊戰과 獨逸 電車部隊에 對한 神話가 만들어지기 始作한 것이다. 電車는 英國에서 開發됐지만, 電車를 利用한 電擊戰은 獨逸에서 꽃피웠으니 英國은 自尊心에 큰 傷處를 받았다.

    그리하여 機動電力 育成에 全力을 기울여 英國式 機動戰의 代價인 몽고메리를 낳았다. 몽고메리는 1942年 北部 아프리카에서 獨逸 機甲群團을 이끈 로멜을 相對하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防禦戰을 거듭하다, 英國軍 戰力이 獨逸軍을 凌駕하게 되자 비로소 엘 알라메인에서 獨逸 機甲群團을 攻擊해 勝利를 이끌었다. ‘沙漠의 여우(로멜)’를 잡은 蒙古메리에게는 ‘沙漠의 생쥐’란 別名이 붙었다.

    한국군, 평시 신속결정작전 펼칠 기갑군단 창설하라

    軍部隊를 視察하는 金正日. 김정일의 유고는 豫想치 못한 北韓 急變事態를 몰고올 수 있다.

    美國 陸軍에서는 ‘핏불(사냥개의 一種)’이라는 別名을 가진 機甲戰의 代價 패튼이 誕生했다. 패튼은 北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시칠리아 戰鬪에서 몽고메리와 熾烈한 競爭을 벌였다. 그러나 괄괄한 性味 때문에 進級에서는 損害를 봐 同期生인 브래들리를 上級者로 모시는 處地가 되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패튼은 노르망디 上陸作戰 以後 超高速 眞空을 거듭해 獨逸의 降伏을 誘導하는 一等 功臣이 되었다.

    덩커크 敗戰과 파리 陷落으로 프랑스의 自尊心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第2次 世界大戰 以前의 프랑스 陸軍에서도 機甲部隊를 育成해 速度戰을 펼치자고 主張한 將校가 있었다. 드골 大領이 그 主人公인데, 中領 時節 그는 ‘未來의 軍隊’라는 題目의 著書에서 “마지노線을 設置하는 데 國力을 浪費하지 말고 10萬 兵力의 機械化된 機甲部隊를 만들자”고 主張했다. 프랑스 陸軍 首腦部는 드골의 主張을 無視했지만 獨逸의 구데吏案과 英國의 戰略家 리델 하트는 드골의 冊을 精讀했다고 한다.

    드골은 벨기에-네덜란드 軸線 戰鬪에 4機甲師團張으로 參戰해 局地的인 勝利를 이끌어냈으나 力不足으로 後退했다. 그後 英國으로 건너가 大領 階級章을 떼어내고 스스로 別 둘을 붙이며 ‘自由 프랑스’라는 이름의 亡命政府를 만들었다.

    1944年 6月6日 노르망디 上陸作戰에 成功한 聯合軍은 프랑스를 貫通해 獨逸을 攻擊하는 大攻勢에 나섰다. 이때 드골은 自由 프랑스軍을 이끌고 參戰해 英國과 美國軍을 제치고 第一 먼저 파리에 入城했다. 最近 韓國에서 開發된 XK-2 黑表 戰車와 比較되는 世界 最高의 電車가 프랑스의 ‘르클레르 戰車’인데, 르클레르는 가장 먼저 파리에 入城한 自由 프랑스軍 第1機甲師團醬의 이름이다.

    르클레르(1902~1947)는 ‘필립 마리 드 오트클로크’가 本名이다. 그는 夫人과 4男2女가 獨逸이 占領한 프랑스에 남아 있어 르클레르라는 假名을 使用했다. 르클레르는 北部 아프리카에서 英國의 몽고메리군과 함께 싸웠고, 파리를 收復한 다음에는 獨逸의 바이에른 州까지 쳐들어감으로써, 드골 다음 가는 프랑스의 英雄이 되었다. 르클레르를 戰車 이름으로 使用한 프랑스는 後날 클레망소 級을 代替하는 最新 核 航空母艦을 드골함으로 명명했다.

    새로운 電擊戰 ‘效果中心作戰’

    구데吏案과 로멜, 드골과 르클레르, 패튼과 몽고메리가 선보인 電擊戰의 核心은 機甲部隊다. 敵 防禦線을 뚫은 機甲部隊가 敗退하는 敵軍을 追越해 突擊하면 敵軍은 衝擊과 恐怖에 휩싸인다. 相對 戰車部隊가 깊숙이 浸透했다는 所聞이 퍼지면, 相對를 구경하지도 못한 部隊들까지 動搖해 後退함으로써 戰線은 一擧에 무너진다. 塹壕戰은 수많은 兵士를 희생시키고도 戰況을 打開하지 못하나, 電擊戰은 犧牲者를 적게 내고도 一擧에 戰況을 바꿔버리는 效果가 있다.

    第2次 世界大戰의 主要 戰鬪는 電車를 앞세운 機動戰, 電擊戰으로 勝敗가 갈렸으므로 以後 보다 빠른 機動戰을 펼치기 위한 硏究가 거듭되었다. 第2次 世界大戰 以後 世界 霸權을 掌握한 美軍은 獨逸式 電擊戰을 土臺로 高速機動戰, 立體高速機動戰을 開發하고 最近에는 ‘效果中心作戰(EBO·Effects-Based Operations)’과 ‘迅速決定作戰(RDO·Rapid Decisive Operations)’이라는 새로운 電擊戰 戰術을 開發했다.

    美國은 2003年 이라크戰에서 效果中心作戰을 適用해 큰 成果를 보았으므로 韓國軍도 이를 導入하게 되었다. 韓國軍에 對한 作戰統制는 平時에는 合參이, 展示에는 聯合司가 行使하므로, 合參과 聯合司는 韓國軍을 指揮하는 兩大 組織이다. 이러한 두 組織이 作戰參謀部에 ‘效果中心作戰處’를 만들어놓았다. 韓國軍도 電擊戰에 對한 硏究에 邁進하게 된 것인데 이에 對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獨逸의 電擊戰은 蘇聯軍에도 相當한 影響을 끼쳤다. 蘇聯은 폴란드를 分轄할 때까지는 獨逸과 한 배를 탈 수 있으나 永遠히 같이 갈 수는 없는 處地였다. 첫째 理由로는 蘇聯은 스탈린이 이끄는 共産國家이고 히틀러의 獨逸은 鮮明하게 反共(反共)을 내건 國家다. 나치 獨逸은 獨逸 內部의 社會主義 運動을 彈壓했을 뿐만 아니라 國外의 共産主義者도 制壓했다.

    히틀러가 獨逸을 이끌고 있을 때 스페인은 社會主義者들인 人民戰線 政府가 掌握하고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의 人民戰線 政府에 對해 프랑코 將軍을 中心으로 한 스페인 軍部가 反旗를 들자(스페인 內戰, 1936~1939), 히틀러는 積極的으로 프랑코軍을 支援해 人民戰線 政府를 顚覆하도록 했다.

    海洋化와 産業化가 늦었던 만큼 獨逸은 英國이나 프랑스처럼 資源이 많은 海外 植民地를 確保하지 못했다. 獨逸은 프랑스가 막고 있는 西유럽보다는 이렇다 할 强國이 없는 東유럽 쪽으로 影響力을 行使했다. 東유럽, 特히 南東유럽人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地域은 穀倉 地帶일 뿐만 아니라 石油 等 天然資源이 豐富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은 蘇聯의 影響力이 미치고 있어 獨逸은 이곳을 놓고 蘇聯과 한판을 벌일 必要가 있었다.

    히틀러의 過慾, 蘇聯 侵攻

    하지만 프랑스와 蘇聯을 相對로 同時에 싸울 수는 없으므로, 폴란드 攻擊을 試圖하기 前 蘇聯과 戰爭을 하지 말자는 ‘不可侵條約’을 맺었다. 그리고 폴란드에 이어 프랑스를 占領해 餘裕가 생기자 이 條約을 破棄할 準備에 들어갔다. 機動部隊를 動員한 電擊戰으로 蘇聯을 攻擊하는 ‘바르바로사(Barbarossa) 作戰計劃’을 準備하기 始作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攻擊하기 위해 니멘(Niemen) 江을 건넌 것은 1812年 6月22日이다. 그로부터 129年 뒤인 1941年 6月22日 새벽 3時, 獨逸軍이 蘇聯을 攻擊하기 外海 리투아니아 等 발틱 3國으로 쳐들어갔다(이날은 獨逸이 프랑스로부터 正式으로 降伏을 받은 지 꼭 1年째 되는 날이었다). 이때는 蘇聯도 獨逸의 움직임을 注目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對抗에 나섰다.

    北유럽은 廣闊한 丘陵이 이어져 戰車戰을 펼칠 수 있는 最適地다. 開戰 初期 蘇聯은 獨逸의 電擊戰에 휘말려 敗退를 거듭했으니 프랑스보다 훨씬 더 깊은 ‘國土 從心(縱深)’과 ‘冬將軍(冬將軍)’이라고 하는 酷毒한 겨울, 그리고 解氷期와 雨期에 正體를 드러내는 ‘진흙 將軍(General Mud)’ 德分에 獨逸의 進擊을 막을 수 있었다. 이 3代 障壁은 나폴레옹도 突破하지 못했는데, 히틀러의 獨逸軍 亦是 뚫지 못한 것이다.

    獨逸軍이 3代 障壁에 막혀 ‘버벅’거리는 사이 蘇聯은 大祖國(大祖國)戰爭(러시아는 第2次 世界大戰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勝利하기 위한 戰略과 武器를 내놓았다. 이 時期 투하체프스키(1893~1937)가 내놓은 戰略思想이 ‘大量群(大量軍)主義的 機械化’ 理論이다. 이 理論은 機動部隊를 大量으로 投入해 빠른 時間 안에 勝機를 잡는다는 것인데, 이 戰術을 驅使하려면 性能 좋은 電車를 大量으로 製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戰略을 세운 蘇聯은 T-34라는 當代 最高의 電車를 設計해 月 1000餘 臺를 生産했다. 그리고 이 電車를 모아 1943年 7月5日 시골 마을인 쿠르스크에서 ‘타이거’와 ‘판터’ 電車路 武裝한 獨逸軍과 歷史的인 決戰을 벌였다. 7月13日까지 繼續된 이 戰鬪에서 獨逸은 700餘 臺, 蘇聯軍은 850餘 臺의 戰車를 投入했다. 毒素 兩國은 單一 地上戰鬪로는 가장 많은 物量이 投入된 機動戰을 펼치게 된 것이다.

    獨逸의 타이거 電車는 火力이 剛하고 蘇聯의 T-34는 機動力이 좋았다. 그러나 火力이 强한 타이거는 발이 빠른 T-34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反面 T-34는 재빠르게 移動하며 ‘주먹만 큰’ 타이거를 效果的으로 料理했다. 激烈한 機甲戰이 거듭되는 사이 兩側은 各各 300代 以上의 電車가 破壞되는 被害를 보았다.

    蘇聯의 大量軍主義的 機械化 戰略

    時間이 흘러 蘇聯軍의 優勢가 나타나자 히틀러는 萬슈타인의 反對를 꺾고 後退를 命令했다. 가장 激烈했던 戰鬪에서 독일군이 後退하자, 지쳐 있던 蘇聯軍의 事機는 하늘을 찔렀다. 反對로 獨逸軍은 決戰에서 敗했다는 壓迫 때문에 士氣가 땅에 떨어졌다. 그 後 蘇聯 陸軍이 거듭해서 獨逸 陸軍을 밀어붙이자, 美英不群도 노르망디 上陸作戰을 敢行해 앞뒤에서 獨逸을 壓迫해 敗亡시키게 되었다.

    쿠르스크 戰鬪는 機甲部隊를 制壓하기 위해서는 機甲部隊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敎訓을 남겼다. 機甲部隊는 單숨에 戰況을 결정짓는 電擊戰을 펼치는 무서운 部隊인데, 이 部隊를 制壓하려면 똑 같은 機甲部隊를 動員해야 한다. 機甲은 戰況을 突破하는 決戰部隊이자, 電擊戰을 펼치는 相對를 막아설 수 있는 거의 唯一한 決戰部隊다.

    이와 함께 記憶해두어야 할 것이 弱小國의 運命이다. 英國은 네덜란드에 英國을 敵對視하지 않는 弱한 政府가 있기를 願한다. 이곳에 英國을 敵對視하는 剛한 政府가 들어서면 英國은 바로 參戰하는데 이러한 現象은 强大國에서는 자주 發見되는 現象이다.

    過慾 때문에 失敗로 끝났지만 프랑스와 蘇聯이라는 强國에 둘러싸인 히틀러의 獨逸이 强國으로 일어선 過程도 注目해야 한다. 히틀러의 獨逸은 社會主義 運動을 彈壓해 부르주아가 이끄는 獨逸의 産業을 부흥시키고, 오스트리아를 相對로 電擊的인 統一을 이뤄내면서 一擧에 强大國으로 떠올랐다. 히틀러는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폴란드의 失敗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프랑스와 蘇聯에 包圍된 獨逸은 單숨에 두 나라와 견줄 수 있는 强國이 되었지만, 獨逸과 蘇聯에 둘러싸인 폴란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두 나라의 ‘밥’으로 轉落했다. 폴란드는 內部 經濟力이 弱하고 人口도 적었기 때문에 墜落한 것이다. 韓國은 絶對로 폴란드의 前轍을 밟아서는 안된다.

    [第2部] 北韓 急變事態와 韓國軍의 電擊戰 驅使 能力

    蘇聯式 電擊戰人 大量群主義的 機械化 理論은 北韓軍으로 傳播되었다. 1950年 北韓軍은 韓半島를 舞臺로 이 戰術을 適用해 韓國과 世界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950年 北韓 陸軍은 열 個 師團, 韓國 陸軍은 여덟 個 師團이었다. 防禦網을 뚫으려면 孔子(攻者)는 房子(防者)보다 세 倍 以上 前歷이 剛해야 한다는 것이 定說이다. 따라서 열 個 師團의 北韓軍 戰力으로는 韓國軍 防禦線을 뚫기 어려운데, 北韓軍은 單숨에 서울을 占領했다.

    北韓軍은 北韓式 ‘大量群主義的 機械化 戰略’을 ‘先制打擊戰略’으로 불렀다. 6·25戰爭 勃發 前 韓國軍은 네 個 師團은 38線에 配置했으나 네 個 師團은 빨치산을 討伐하기 위해 漢江 以南에 配置했다. 北韓도 前方에 다섯 個 師團, 後方에 다섯 個 師團을 配置했다. 그러나 開戰 한 달 前쯤 後方에 있던 다섯 個 師團을 隱密히 38線으로 집결시켜 大量君을 編成하고, 6月25日 새벽 戰車部隊를 앞세워 進擊했다.

    先制打擊戰略의 先鋒에 선 北韓軍의 機甲部隊가 105戰車旅團이다. 105戰車餘團은 38線에서 敗退하는 韓國軍보다 먼저 서울에 當到하는 速度를 자랑했다.

    北韓은 早期에 서울을 占領했으나 以後 重大한 判斷 錯誤를 犯했다. 當時 韓國의 大統領 任期는 4年이고, 國會議員의 任期는 2年인데, 大統領은 國會議員들만 參與하는 間接選擧로 選出됐다. 6·25戰爭은 마침 韓國 國民이 2代 國會議員을 뽑고 난 直後에 일어났다.

    開戰 3日 만에 서울을 占領한 北韓軍은 獨逸이 오스트리아를 合倂한 것과 類似한 政治 이벤트를 準備했다. 새로 뽑은 2代 國會議員들을 모아 國會를 열어, 李承晩 大統領의 下野와 大韓民國을 北韓에 合倂한다는 決意를 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韓國은 國民投票를 통해 獨逸과의 合倂에 同意한 오스트리아와 같은 處地가 된다.

    서울을 占領한 北韓軍은 2代 議員들을 찾아 나섰으나 이들이 몸을 숨기는 바람에 國會 開院에 必要한 定足數를 채우지 못했다. 2代 國會議員을 찾느라 北韓軍은 3日을 虛費했다. 그리고 定足數 未達로 開院이 不可能하다는 判斷이 들자 漢江 以南 地域으로 進擊을 再開했다.

    그 사이 가장 强力한 周邊國인 美國이 日本에 駐屯하고 있던 24師團을 韓半島로 派兵했다. 美 24師團은 大田 北쪽에 있는 錦江을 利用해 第2防禦線을 만들었으나 士氣가 衝天한 北韓軍은 105旅團과 5列(諜者部隊)을 앞세워 이를 가볍게 突破했다. 以後 美軍은 1起兵師團으로 하여금 小白山脈에 防禦線을 쳤으나 亦是 突破당하고 洛東江에서 비로소 北韓軍의 進擊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美軍 防禦線까지 연이어 突破한 北韓의 105戰車餘團은 쿠르스크 戰鬪에서 名聲을 날린 T-34電車路 武裝하고 있었다. 6·25戰爭이 일어났을 때 韓國은 陸本 直轄의 機甲連帶를 갖고 있었으나, 말만 機甲連帶이지 實際로는 機甲大隊에 不過했다. 이 連帶에서 M-8 戰車 等으로 武裝한 ‘眞짜’ 機甲大隊는 한 個뿐이고, 나머지는 起兵(騎兵)大隊와 徒步(徒步)搜索大隊였다.

    제 機能 못한 남로당과 ‘釜山 赤旗論’

    서울을 占領한 北韓軍은 왜 2代 國會 召集에 失敗했을까. 그 理由는 남로당의 沒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1945年 分斷 直後 韓國에서는 朝鮮共産黨이 結成되고 北韓에서는 北朝鮮共産黨이 생겨났다. 그 後 두 政黨은 統合해 조선노동당이 됐는데, 南쪽에 있는 勞動黨은 ‘남로당’, 北쪽에 있는 勞動黨은 ‘북로당’으로 불렸다.

    남로당은 結成 直後부터 韓國을 소비에트化하기 위한 民衆蜂起를 主導해 美 軍政으로부터 持續的인 團束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로당은 그치지 않고 濟州島 4·3 事件과 旅順叛亂事件 等을 일으켰으므로, 韓國 國民은 남로당에 對해 角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48年 出帆한 大韓民國 政府도 意志를 갖고 남로당을 剔抉할 수 있었다.

    1945年부터 1950年 사이 남로당이 韓國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1950年 北韓은 서울을 占領하는 瞬間 남로당의 도움으로 2代 國會를 召集해 南北韓을 合倂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事態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로당의 失敗를 看過하고 戰爭을 일으킨 것은 北韓이 犯한 가장 큰 失手다.

    두 番째로 北韓은 周邊國인 美國의 參戰 可能性을 過小評價하는 失手를 犯했다. 獨逸은 프랑스를 치기 위해 네덜란드를 건드리면 英國이 自動 參戰한다는 것을 看過한 채 第1次 世界大戰을 일으켰다 敗亡했는데, 北韓은 그와 類似한 失手를 저지른 것이다.

    英國이 네덜란드를 占領하는 國家와 一戰을 벌이듯, 開港 以後의 日本에서는 釜山을 占領한 勢力에 對해서는 ‘豫防的 防衛’ 次元에서 싸우겠다는 雰圍氣가 形成되었다. 開港 以後 日本은 一貫되게 反共(反共) 路線을 維持했다. 따라서 日本은 그들이 敵으로 보는 보는 共産勢力이 韓半島 南部에 붉은 氣를 날리는 狀況을 매우 두려워한다.

    韓半島 南部에 붉은 氣가 날리는 것을 日本 識者層은 ‘釜山 適期론(赤旗論)’이란 말로 壓縮 表現한다. 1950年의 美軍 參戰은 釜山 適期論과 櫃를 같이한다. 副腎 適期論은 1980年代 初盤 되살아난 적이 있다. 1979年과 1980年 사이 韓國은 朴正熙 政府가 崩壞되는 10·26事件과 ‘5月의 봄’ 그리고 光州事態를 連續해서 겪었다. ‘5月의 봄’과 光州事態는 民主化運動으로 再評價받았지만 當時는 큰 危機로 認識되었다.

    이 危機를 鎭壓하고 登場한 것이 전두환 政府다. 朴正熙 政府 時節 韓國은 重化學工業에 過度한 投資를 해 資金이 달리는 經濟 危機를 맞았다. 政權을 잡은 전두환 政府는 나카소네(中曾根) 總理가 이끄는 日本을 두들겨 60億달러의 借款을 받아냄으로써 이 危機를 넘겼다. 當時 日本에서는 “韓國 經濟가 무너지면 左傾化돼, 釜山에 붉은 旗발이 휘날린다”는 釜山 適期論이 횡횡했기에 强力한 反共 勢力인 전두환 政府를 支援하게 된 것이다.

    民衆抗爭 불러오는 周邊國 介入

    6·25 當時 美軍의 거듭된 增派로 洛東江에 堅固한 防禦線이 構築돼 北韓軍이 武力으로 韓國을 合倂하는 것은 不可能해졌다. 그로 인해 北韓軍의 電擊戰에 놀라 나타났던 服屬勢力인 ‘附逆者(附逆者)’는 顯著히 줄어들고, 北韓軍에 맞서 싸우겠다는 抵抗勢力이 急增했다. 北韓은 美國과 유엔이라는 外勢와 더불어 前 韓國人의 抵抗에 直面한 것이다.

    6·25戰爭에 對해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固定觀念 가운데 하나는 이 戰爭이 塹壕戰으로 展開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觀念은 韓半島는 山岳이 많아 電車를 앞세운 機動戰이 不可能할 것이라는 認識에서 나왔다. 그러나 6·25戰爭은 1951年 6月21日 유엔 駐在 蘇聯代表人 말리크가 休戰을 暗示하는 聲明을 發表하고 美國이 呼應할 때까지, 매우 빠른 機動戰 形態로 展開됐다.

    6·25 開戰 初期 北韓軍이 洛東江까지 韓美聯合軍을 몰아붙인 것이 첫 番째 機動戰이다. 이에 對해 美軍은 海軍과 海兵隊를 利用해 仁川으로 上陸했는데, 이는 “바다로는 地上軍(海兵隊)李 起動하지 못 한다”는 固定觀念을 깬 새로운 槪念의 ‘海陸(海陸) 機動戰’이었다.

    仁川上陸作戰이 成功하자 洛東江 防禦線에 몰려 있던 韓美聯合軍이 反擊을 試圖하는데 이들의 進擊速度는 敗退하는 北韓軍보다 훨씬 빨랐다. 이때의 北韓軍은 仁川上陸作戰으로 退路가 끊겼다는 所聞 때문에 제2방어선을 形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一部는 後退를 抛棄하고 智異山 等으로 들어가 빨치산部隊가 되었다.

    38線 以南을 回復한 1950年 10月1日(公式的으로는 10月7日)부터 韓美聯合軍은 38線 以北으로 北進하는데 이것도 대단한 機動戰이었다. 이때까지도 北韓軍은 洛東江에 몰렸던 前歷을 제대로 빼내지 못해 瞬息間에 압록-豆滿江으로 쫓겨갔다. 北韓軍 首腦部는 鴨綠江 中流에 있는 慈江道 만포군 別오리(只今은 長江郡 香하리)에서 險峻한 山岳을 利用해 艱辛히 防禦線을 形成했다.

    洛東江 戰線이 韓國에 가장 危殆로운 狀況이었다면 別오리 防禦線은 北韓軍에 가장 힘들었던 瞬間이었다. 때문에 北韓에서는 危機에 逢着할 때마다 ‘別오리 精神’으로 克服하자는 口號가 터져 나오게 되었다. 남로당의 失敗로 韓國軍을 洛東江 防禦線까지 몰아붙인 北韓이 同調勢力을 얻지 못했듯, 別오리까지 北韓軍을 몰아붙인 韓美聯合軍度 北韓 住民의 同調를 끌어내는 데 失敗했다.

    洛東江 戰線과 別오리 危機

    洛東江에 몰렸던 韓國이 “戰友의 屍體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를 불렀듯이 別오리에 몰린 北韓軍 首腦部도 決死抗戰을 다짐했다. 1950年 12月21日 北韓 勞動黨은 別오리에서 中央위 第2期 3次 定期會議를 열고 敗戰 原因을 分析하는데, 그 後 北韓에서 퍼진 用語가 ‘全國土의 要塞化’와 ‘全人民의 武裝化’다.

    ‘全人民의 武裝化’는 軍人뿐만 아니라 民間人도 韓美聯合軍에 맞서 싸우라는 指示다. 壬辰倭亂으로 風前燈火의 危機에 몰렸을 때 朝鮮의 선비들은 到處에서 義兵을 일으켰다. 이러한 經驗 때문에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仁祖는 全國에 義兵 蜂起를 促求했었다. 北韓軍 首腦部는 이와 類似한 指示를 내린 것이다.

    나폴레옹軍이 스페인을 占領하자 이에 抗拒하는 스페인 國民이 일으킨 民兵隊가 ‘게릴라’였다. 獨逸軍이 프랑스를 占領했을 때 後退에 失敗한 프랑스 軍人들과 國民들은 ‘레지스탕스’를 만들어 싸웠다. 共産國家에서 게릴라나 레지스탕스와 비슷한 意味로 쓰인 單語가 ‘파르티잔(partizan)’이다.

    파르티잔은 黨員이나 同志를 뜻하는 프랑스語 ‘파르티(parti)’에서 나왔다. 프랑스를 占領한 獨逸軍은 1941年 유고를 侵攻하는데 이때 유고의 共産主義者들이 파르티잔이라는 民兵隊를 만들어 對抗하면서, ‘파르티잔’은 前 共産國家에 퍼져나갔다. 파르티잔이 北韓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別오리 經驗 以後 北韓은 到處에 地下坑道를 파 全國土를 要塞化했다. 이러한 經驗의 延長線에서 지난해 10月 北韓은 地下坑道를 파 正體가 不分明한 核實驗을 했다. 地下坑道를 파 儒生力量을 保存하는 北韓軍 戰術은 베트남에 傳播돼, 베트콩들은 사이공(只今의 호치민시) 隣近에 有名한 ‘구치땅窟’을 築造했다.

    釜山에 敵機가 나부낄 것 같으면 日本으로 대표되는 海洋勢力이 介入하듯이 압록-豆滿江이 海洋勢力의 影響圈에 들어가면 中國으로 대표되는 大陸勢力이 介入한다. 6·25戰爭 1年 前인 1949年 마오쩌둥(毛澤東)은 國民黨軍을 쫓아내고 中國大陸을 統一했다. 어느 나라든 統一 直後의 氣勢는 대단하다. 그러한 나라의 指導者는 自國의 統一을 威脅하는 勢力이 登場하면 銳敏하게 反應할 수밖에 없다.

    6·25戰爭 直後의 美國만큼은 아니지만 中國은 韓半島 戰爭 推移에 機敏하게 對應했다. 韓國軍이 3師團(白骨)과 首都師團(猛虎)을 筆頭로 38線 以北으로 進擊하기 始作한 1950年 10月3日, 저우언라이(周恩來) 中國 外交部長은 “美國이 38線 以北으로 北進하면 中國이 參戰할 것”이라는 警告를 보냈다.

    맥아더의 放心

    北進을 始作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10月26日 最先鋒을 달리던 韓國軍 6師團(淸聲)李 鴨綠江이 있는 醋酸에 到達했는데, 이것은 6·25個戰 直後 北韓軍이 洛東江에 到達한 것보다 빠른 速度戰이었다. 11月21日에는 美 7師團도 鴨綠江에 면해 있는 혜산진에 到着했다.

    그러는 사이 中國은 느리지만 꾸준히 兵力을 한-중 國境線으로 보내 6·25戰爭에 介入할 準備를 마쳤다. 그리고 夜陰을 利用해 山岳으로 步兵部隊를 投入했다. 獨逸軍이 벨기에로 몰려오는 英佛聯合國을 包圍하려고 아르덴 숲으로 機動部隊를 보냈다면, 이렇다 할 機動部隊가 없는 中國軍은 步兵部隊를 韓美聯合軍의 後方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中國이 參戰할 수 없을 것’이라는 漠然한 固定觀念을 갖고 있었다. 이런 判斷下에 맥아더는 戰爭을 끝내기 위해 一名 ‘크리스마스 大攻勢’라는 마지막 進擊 命令을 내렸다. 이때 팽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中國의 人民支援軍이 나타나 韓美聯合軍을 攻擊했다. 唐慌한 韓美聯合軍이 後退를 試圖하자 後方에서도 埋伏해 있던 中國軍이 나타나 이들을 包圍했다.

    이로써 韓美聯合軍은 덩커크 撤收 危機에 몰린 英佛聯合軍처럼 無條件 退却해야 하는 處地로 몰렸다. 美軍은 美 海兵隊 1師團과 韓國軍 首都師團, 3師團처럼 咸鏡道 地域으로 進出한 韓美聯合軍은 興南으로 모이게 한 後 배로 撤收시키고, 平安道로 올라가던 聯合軍은 徒步로 후퇴시켰다. 이 後退는 6·25 開戰 初期만큼 多急했기에 韓美聯合軍은 다시 서울을 내주고, 장호원 선(線)에 겨우 제2방어선을 構築했다(1·4후퇴).

    別오리로 내몰렸던 北韓軍이 敗戰 原因을 深刻히 分析했듯, 1·4後退 直後의 美國도 徹底하게 그 原因을 따졌다. 그 結果 맥아더가 中國軍의 參戰 可能性을 無視했다는 것, 進擊할 때는 相對의 臺包圍 戰術에 걸리지 않도록 操心해야 하는데 勝利感에 들떠서 이를 無視했다는 것, 相對의 浸透를 막으려면 進擊하는 部隊들이 線을 維持해야 하는데 맥아더는 이를 無視하고 먼저 北進하도록 部隊를 競爭시켰다는 것 等이 擧論되었다.

    美國은 유엔軍司令官을 맥아더에서 리지웨이로 交替했다. 리지웨이 大將은 周邊을 살펴보지 않고 無條件 깊이 들어가는 機動戰을 自制하고, 前後左右를 살피면서 조금씩 前進하는 機動戰을 驅使했다. 리지웨이의 操心스러운 機動戰은 장호원까지 내려와 있던 戰船을 只今의 休戰線附近까지 걷어 올렸다. 이로써 1·4後退를 겪긴 했지만, 韓美聯合軍의 戰力이 朝中聯合軍(北韓과 中國聯合軍)보다 强하다는 것이 證明되었다.

    1951年 6月21日 蘇聯은 隱密하게 休戰을 提議했다. 그러자 ‘東洋의 작은 戰爭’으로 알고 介入했다가 中國軍의 介入으로 一進一退를 거듭하며 魂이 난 美國이 呼應했다. 화끈한 機動戰 形態이던 6·25戰爭이 길고 지루한 塹壕戰·告知前으로 變貌한 것은 이때부터다. 塹壕戰으로 이어진 第1次 世界大戰이 많은 兵士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듯 이때부터의 6·25戰爭은 戰況 打開 없이 人命의 犧牲을 要求했다.

    韓半島 戰爭, 機動戰으로 勝負가 갈려

    돌이켜보면 韓半島에서 일어난 戰爭은 擧皆가 速度戰·機動戰이다. 倭國이 挑發한 壬辰倭亂은 비록 朝鮮이 敗하는 形態이긴 했지만 速度戰으로 이어졌다. 壬辰倭亂은 明나라가 參戰해 倭國과 정전을 論議하면서부터 速度가 느려졌다.

    朝鮮의 敗北로 끝난 丙子胡亂도 엄청난 速度戰이었다. 朝鮮을 치기 위해 淸나라 軍隊가 鴨綠江을 건넌 것은 1636年 12月2日인데 淸나라軍 선봉은 보름 만인 12月16日 漢陽에 當到했고 1月30日 人造로부터 降伏을 받아냈다.

    韓半島의 命運을 가른 戰爭은 全部 機動戰이다. 이 機動戰은 그때그때의 東北亞 政治狀況에 따라 두 部類로 나뉜다. 6·25戰爭과 壬辰倭亂처럼 周邊國이 參戰한 戰爭과 丙子胡亂처럼 周邊國이 參戰하지 않은 戰爭으로.

    周邊國이 參戰한 戰爭은 지루한 停戰協定이 이어지다 無勝負로 끝나거나, 侵略한 쪽이 侵略을 抛棄하는 形態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周邊國이 參戰하지 않은 戰爭은 侵略限 쪽이 目標를 達成하는 境遇가 많았다.

    韓半島는 화끈한 機動戰을 펼칠 수 있는 곳이고 또 周邊國이 쉽게 介入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周邊國이 介入하지 못하면 電擊戰을 敢行한 勢力은 쉽게 韓半島를 接受하는 特徵이 發見된다. 韓半島의 再統一을 準備하려면 이러한 現實을 突破할 方案을 찾아야 한다.

    프로이센의 戰略家인 클라우제비츠는 ‘戰爭은 政治의 一部’라고 定義했다. 클라우제비츠는 敵國이 쳐들어왔을 때 맞서 싸우는 것만이 戰爭이 아니라, 國益을 이루겠다는 政治的인 判斷으로 武力을 投射하는 것도 戰爭으로 본다. 韓半島 周邊에 있는 4强은 國益을 이루거나 지키기 위한 政治的인 決斷으로 戰爭을 일으켜본 나라들이다.

    戰爭을 일으켜본 나라는 ‘漠然한 平和’를 主張하지 않는다. 이들은 自國을 威脅하는 勢力이 없어야 平和가 維持된다며, 자국을 威脅하는 勢力이 있으면 豫防的 防衛 次元에서 事前에 除去하는 戰爭을 圖謀한다. 이러한 나라는 共通的으로 地域 霸權을 追求하는 傾向이 있는데, 이러한 나라에서는 大槪 ‘우리 國民이 누리는 自由는 空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認識이 普遍化되어 있다.

    只今 韓半島의 主役은 누가 뭐래도 休戰線 以南에 布陣한 大韓民國이다. 大韓民國의 領土는 考慮보다 작지만, 高句麗 以後 가장 强力한 나라를 만들었다. 大韓民國은 GDP 順位뿐만 아니라 國防費 順位에서도 世界 11位圈에 올라 있다. 反面 北韓은 正體가 不分明한 核武器를 開發했지만, 國力 順位는 형편없다. 따라서 韓半島가 再統一된다면 그 主體는 大韓民國이어야 한다.

    韓國軍 電車는 優秀 그러나…

    統一 問題와 關聯해 大韓民國은 두 가지 問題를 深刻하게 苦悶해야 한다. 첫째는 北韓이 戰爭을 일으키는 것을 抑制하는 것이고, 둘째는 韓半島 再統一 問題에 周邊國의 介入을 許容할 것인가란 問題다. 먼저 北韓이 戰爭을 일으키는 것을 어떻게 抑制할 것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韓半島의 命運(命運)을 가른 戰爭이 機動戰 形態로 펼쳐졌다면 韓國은 機動戰에 對備한 戰力을 갖고 있어야 한다. 現代 機動戰의 主力은 戰車인데 電車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武器도 戰車다. 最近에는 空軍의 A-10 攻擊機와 陸軍의 AH-64 攻擊헬기 等 電車를 攻擊할 수 있는 空中電力이 急成長했다. 하지만 이 武器는 電車의 또 다른 長點인 進擊 效果는 發揮할 수 없다.

    戰車 戰力의 向上은 첫째 個個 戰車의 性能을 向上시키는 것, 둘째 電車 臺數를 늘리는 것, 셋째 戰車 運用力을 極大化하는 것이다. 먼저 戰車 性能의 向上 問題다. 쿠르스크 戰鬪에서 蘇聯이 獨逸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蘇聯製 T-34 戰車의 性能이 獨逸製 타이거 電車보다 優秀했기 때문이므로 韓國은 優秀한 戰車 確保에 努力해야 한다.

    現在 北韓 陸軍의 主力 電車는 T-72와 T-62 系列로 推定되는데, T-72의 主砲는 125mm이고, T-62의 主砲는 115mm라고 한다(북한은 T-62 系列을 國産化한 ‘天馬’ 電車를 만들고 있다). 反面 韓國 陸軍의 主力 電車는 105mm 主砲를 搭載한 K-1과 120mm 主砲를 올린 K-1A1 戰車이다.

    電車는 主砲의 直徑이 클수록 貫通力이 센 砲彈을 發射할 수 있으므로 멀리서 目標物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主砲 直徑을 키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直徑을 키우면 길이도 함께 길어지는데 이러한 砲를 搭載하려면 電車의 全體 크기와 무게가 增加한다. 덩치 큰 電車는 相對의 目標가 되기 쉽다.

    따라서 主砲 크기 競爭은 適切한 線에서 멈추고, 戰車 砲彈의 性能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電車의 前面은 大槪 30㎝ 以上의 두꺼운 掌匣으로 돼 있는데 이것을 찢어버릴 수 있는 戰車砲彈을 만든다면 機械的, 戰術的으로 負擔이 큰 巨砲(巨砲) 競爭에 매달릴 理由가 없다.

    戰車의 性能은 砲塔의 回轉 能力에 따라 決定되기도 한다. 敵陣에 들어간 電車는 四方에서 敵을 만나므로 砲塔의 回轉 速度가 빨라야 敵 電車를 攻擊하는 데 유리하다. 電車의 能力을 높이려면 盆唐 射擊 回數도 높여야 한다.

    個個 電車를 놓고 比較할 境遇 韓國의 K 시리즈 電車는 北韓의 T 系列 電車보다 優秀한 것으로 評價받는다. 더구나 韓國은 K-1 시리즈보다 越等히 優勢한 世界 最高의 XK-2 ‘黑表’ 電車를 開發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北韓을 크게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質的 優勢는 多種多樣한 環境이 주어지는 實際 戰場(戰場)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電車는 主로 平地에서 機動하는데, 韓半島에서 戰車戰을 벌일 수 있는 平原은 大部分 논이다. 논은 水深 10㎝ 程度의 물속에 뻘이 있는데 뻘은 1t當 1㎝씩 沈降한다. 40t 무게의 電車가 무논에 들어서면 40㎝ 程度 가라앉는다. 反面 논두렁은 물 위로 20~30㎝ 솟아 있다. 따라서 논을 달리는 電車는 標高 次 60㎝의 ‘작지만 매우 가파른’ 언덕을 자주 타 넘어야 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