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伍子胥와 闔閭의 쿠데타 드라마|新東亞

伍子胥와 闔閭의 쿠데타 드라마

復讐는 나의 것, 野望은 너의 것

  • 글: 박동운 言論人

    入力 2005-06-29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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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 많은 오(吳)와 月(越)의 抗爭은 ‘吳越春秋(吳越春秋)’로 잘 알려져 있다. 두 나라가 國際舞臺에 登場하기까지는 外國에서 亡命한 人材들의 寄與가 컸다. 特히 矛盾으로 가득 찬 楚나라에서 決死 脫出한 策士 伍子胥(伍子胥)와 吳나라의 不遇한 孔子 闔閭(闔閭)의 만남은 쿠데타의 決行으로 이어져 亂世의 國家 運命을 左右했다.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初(楚)나라가 오직 중원의 事態 進行에만 神經을 곤두세운 채 內室을 忽視(忽視)하고, 後考(後顧·뒷날의 근심)를 생각하지 않는 동안 長江 下流 東南方에선 異變의 要因들이 자라고 있었다. 곧 新興 强國인 吳(吳)나라와 月(越)나라의 急成長이다.

    本是 吳나라의 支配階層은 週(周) 王室의 分期(分岐)이고, 그 百姓은 北方의 중원에서 移住해왔다고 한다. 文化的으로 改名된 便이고, 오늘의 장쑤省(江蘇省) 南部와 저장省(浙江省) 北部의 肥沃한 平原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便 越나라는 저장省 중남부를 中心으로 發達한 나라인데, 支配階層은 亦是 中原에서 移住해왔고, 臣民은 한족과 原住民의 混合體였다. 吳와 月은 言語가 同一했으며 다 같이 改名한 便이었다.

    그러나 支配階層이 달랐고, 地理的으로도 兩立하기 어려웠다. 月이 中原을 엿보려면 앞을 가로막는 오를 없애야 했고, 한便 오가 後顧의 念慮를 덜려면 月을 쳐 없앨 必要가 있었다. 波瀾과 曲折이 많은 오·月 間의 相剋과 抗爭, 興亡과 盛衰는 ‘春秋(春秋)’와 ‘詐欺(史記)’에도 詳細하게 記述되었지만 따로 ‘吳越春秋(吳越春秋)’가 有名하다.

    오·月이 國際舞臺에 登場해 得勢한 데에는 內部的 要因 外에 外國에서 亡命해온 人材들의 作用이 자못 컸다고 한다. 于先 矛盾과 怨恨으로 가득 찬 楚나라를 結社 脫出해 吳나라로 빠져나온 伍子胥(伍子胥)와 吳나라의 不遇한 孔子 闔閭(闔閭)의 만남에서 이야기 展開가 本格化한다. 亂世엔 制度의 運營보다 人間의 만남이 더 크게 國家의 運命을 左右한다.



    하기야 浪漫的이거나 計算的인 人間關係 設定이 全혀 不可能한 民族이라면 일찌감치 絶望하는 便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中國人은 예부터 小心한 一面이 있는 反面에 때가 오면 人材들이 雄飛할 줄도 알았다.

    楚 平王의 過誤와 奸臣의 陰謀

    國家 衰亡의 原因은 ▲君主의 腐敗와 無能, 그리고 王室의 內紛 ▲奸臣의 跋扈 ▲忠臣의 原罪(寃罪), 卽 抑鬱하게 뒤집어쓴 罪라는 것이 春秋戰國을 보는 中國 社가(史家)들의 通說이다. 春秋時代의 初(楚)나라 평왕(平王) 때도 그러한 矛盾이 深刻했다.

    평왕은 狡猾한 性格을 지닌 利己主義者였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長男 件(建)을 太子로 세우자 그 家庭敎師 兼 顧問 格으로 太傅(太傅)에 五司(伍奢), 小部(少傅)에 비무기(費無忌)를 임명했다. 誤死는 忠臣이지만, 비무기는 惡毒한 阿附型 艱辛이다.

    件이 열다섯 살 때 좋은 婚處가 있어 陳(秦)나라의 貢女(公女)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貢女는 天下絶色의 美人이었다. 貢女가 到着해 東西南北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평왕은 재빨리 그女를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太子를 위해서는 따로 제나라 貢女를 迎入했다. 이때 奸臣 비무기의 進言과 阿附가 큰 구실을 했다.

    진나라에서 온 貢女가 아들을 낳았으니 곧 평왕의 次男인 陳(珍)이다. 이들 새 帽子에 對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太子 건 帽子에 對한 愛着은 식어갔다. 그 幾微를 알아차린 비무기는 凶計를 꾸몄다. 于先 太子 件과 그 태否認 誤死를 首都에서 隔離시켰다. 두 사람을 國境에 가까운 戰略的 要衝地 聲部로 보내면서 安保를 굳건히 다질 必要가 있다는 口實을 내걸었다. 任地로 가면서 太子 件과 太傅 誤死는 비무기의 陰凶한 謀略을 看破했고, 嫌惡를 禁치 못했다.

    한便 비무기는 太子 바꾸기와 誤死를 除去하기 위해 새 謀略을 꾸몄다. 이番에는 ‘叛亂 陰謀’ 疑惑이었다. 表面上 다른 口實로 誤死를 中央으로 불러들였다가 아예 없애버린다는 凶計였다.

    비무기는 평왕에게 “건 太子님은 聖父에서 强大한 兵力을 掌握하고 계신 데다 諸侯들과 自由롭게 交際하고 있는데, 最近 入手한 情報에 依하면 實로 어마어마한 計略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誤死님과 共謀하여 諸侯의 兵力을 빌려 우리 首都를 攻掠할 陰謀가 進行 中이라는 所聞이 돌고 있습니다”고 했다. 평왕은 이 말에 속아 넘어갔다.

    元來 人間은 自身을 基準으로 남의 意中을 推測하는 性向이 있다. 坪王都 협작·詐欺·陰謀를 즐겨온 사람이다. 평왕은 不安을 참지 못하자 誤死를 召喚하여 審問했다.

    五司 : “國王께서는 어찌하여 또다시 뱃속 검은 小人의 讒言에 넘어가 長男이신 太子마저 疑心하는 過誤를 거듭하시렵니까.”

    直說的 話法이었다. 평왕은 아픈 데를 찔린 데다 老妄이 들었던지 卽刻 誤死를 監獄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首都에 用務 連絡車 出張을 와 있던 聖父의 사마(司馬) 分讓(奮揚)을 불러들여 隱密히 命令을 내렸다.

    “太子가 不溫하니 卽刻 없애버려라.”

    分讓 : “삼가 御命에 따라 處置하겠습니다.”

    그러나 分讓은 良心上 太子 件을 죽일 순 없었다. 速히 도망가라고 件에게 알려줬다. 乾은 遑急히 宋나라로 亡命했다. 일을 그르치자 奸臣 비무기는 평왕에게 또 귀띔했다.

    “太子의 謀略 參謀이던 誤死는 投獄했으나, 誤士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모두 賢明하다는 評判이니, 그대로 두면 새 陰謀를 꾸밀 것이고 나라에 몹시 해롭겠습니다.”

    誤死를 미끼로 두 아들을 불러 處置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평왕은 誤死에게 使臣을 보내 아들을 首都로 불러오면 살려주겠다고 誘惑했다.

    五司 : “兄인 刺傷(子尙)은 너무 착하여 부르기만 하면 卽時 上京,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는 富者가 모두 처단당한다 해도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인 자서(子胥)는 性格이 强靭하고 앞일을 뚜렷이 내다보기 때문에 絶對 上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소용없는 일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평왕은 더욱 不安해져서 王命으로 그 兄弟를 불러보았다. 兄弟는 議論했다. 自序가 斷言했다.

    “속아서 上京하면 아버지와 우리는 一網打盡당할 것이 뻔하지요. 外國으로 脫出해 複數의 計略을 세웁시다.”

    刺傷 : “아들 된 道理上 같이 죽더라도 마지막 瞬間까지 最善을 다해봐야 한다. 안 가면 孝道에 어긋난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는 살아남아 아버님과 나의 怨讐를 갚아다오.”

    刺傷은 조용히 결박당해 上京했고, 富者는 慘殺됐다.

    九死一生의 脫出

    伍子胥는 피눈물로 復讐를 盟誓하며 逃走했다. 于先 太子 件이 있는 송(宋)나라로 갔다. 待遇는 좋았으나 宋나라에 內亂이 일어나 기댈 수 없게 됐다. 다음으로 鄭(鄭)나라를 찾았다. 好意를 보였으나 弱小國이라 도움을 期待할 수 없었다. 게다가 鄭나라는 元來 楚나라와 가까워 難處한 處地였다. 그래서 이番엔 楚나라와 對峙 中인 强大國 陳(晋)나라를 찾아갔다.

    秦나라 君主는 경공(傾公)으로 自己의 目的을 이루기 위해 太子 건 一行을 몹시 危險한 冒險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卽 亡命客들이 鄭나라로 다시 돌아가 조용히 內應(內應)을 準備하고 있다가 自身이 軍隊를 이끌고 鄭나라로 進擊할 터이니 그때 部下들을 시켜 城內에 放火하고 城門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現在 楚나라의 屬國처럼 되어 있는 鄭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領土를 고스란히 太子 件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그後 合勢하여 楚나라에 壓力을 加해 件을 王位에 오르게 할 수 있다고 誘惑했다.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蘇聯軍은 埋葬된 히틀러(寫眞)의 屍身을 毁損했다. 春秋전국時代의 中國에서 그와 같은 敵에 對한 復讐心은 時代의 變化를 이끌어내는 動力이 되기도 했다.

    謀略에 加擔하라는 危險千萬한 提議였다. 그러나 當時 太子 件은 定處 없이 떠도는 浮萍草 身世였고, 亡命과 流浪의 逆境에 놓여 있었다. 正常的인 環境이 아니다. 가장 허약한 處地에서 가장 强力한 誘惑에 直面한 셈이다. 게다가 그 提議를 拒絶하면 生命이 威脅당하는 狀況이었다.

    誤字서도 處地가 마찬가지였으나 結局은 逆境에 졌다. 太子 件과 伍子胥 一行은 適當한 口實을 마련해 鄭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鄭나라에서는 이들을 從前처럼 保護하고 믿어줬다.

    그러나 蹉跌이 생겨 鄭나라 司直當局이 다시 調査하는 過程에서 太子 件이 秦나라 君主에게서 받은 祕密 書信이 發見됐다. 乾은 逮捕되어 殺害당했다.

    한便 伍子胥는 件의 어린 아들 勝(勝)을 데리고 재빨리 脫出해 吳나라로 向했다. 官憲의 追跡은 執拗했다.

    脫出하는 길은 멀고 險難했다. 고갯길 關門에서는 逮捕當할 뻔하다가 官吏들의 欲心을 利用한 속임數를 써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茫茫한 江을 앞에 두고 江기슭의 갈대밭에서 없는 배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던지 한 隻의 쪽배가 나타났는데 늙은 漁夫가 櫓를 젓고 있었다. 事情하니 태워줘서 江을 건넜다. 내릴 때 伍子胥가 허리에 차고 있던 寶劍을 풀어 漁夫에게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伍子胥는 感動하여 漁夫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고 헤어졌다.

    무릇 中國人은 다양하다. 個中에는 도둑과 挾雜꾼도 적지 않다. 그러나 孔子나 부처 같은 사람도 반드시 發見하게 된다. 亦是 하늘이 낸 偉大한 民族이다.

    伍子胥는 途中에 앓기도 하고 求乞도 하면서 가까스로 오나라 서울(오늘의 장쑤省 쑤저우(蘇州) 附近)에 到着했다. 每日每時 죽음과 瞬間瞬間 直面해야 하던 險難한 脫出 旅程이 끝난 것이다. 伍子胥의 다음 課題는 處世術의 智慧를 最大限 發揮해 權力에 接近해 復讐 準備에 活用하는 일이었다.

    붙어서 크는 智慧

    中國의 俗談은 가르친다. “이름 없고 힘 없는 젊은이가 크려면 將來性 있는 有力者에게 依支하고 붙어야 한다”고. 이를 ‘故人髮瘕(퇜人發家)’라고 한다.

    中國의 成魚(成語)에 ‘細民오치(細民惡治)’란 말도 있다. 下層의 못사는 庶民은 治世(治世)를 싫어한다는 뜻이다(韓非子). 잘 다스려지고 평화로우며 秩序 있는 世上이라면, 좀처럼 身世를 고쳐 벼락富者가 되거나 감투를 쓰게 될 機會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結局 亂世라야 危險하지만 機會도 있다는 發想이다. 實際로 古代 中國은 그러했다. 예컨대 朱元璋(朱元璋)은 거지 스님으로 亂世를 헤엄치다 皇帝가 되어 名(明) 王朝를 創建했다.

    그것도 要領은 單 한 가지, 將來性 있는 有力者에게 붙어서 크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큰 人物을 만날 運이 있거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頂上級 人物이어서는 안 된다. 本是 旣得權者는 無力者에 對해선 興味도 없고 需要도 없다. ‘將來性’을 가려내는 眼目이 重要하다는 얘기다.

    그러면 只今으로부터 約 2500年 前인 春秋時代로 回歸해본다.

    伍子胥는 千辛萬苦 끝에 가까스로 오나라 首都에 當到했으나 亡命客 떠돌이 身世에 不過했다. 가진 것이라곤 復讐의 一念과 檢證받지 않은 政治的 手腕뿐이었다. 復讐를 위해서는 힘이 必要한데 王族 家門도 아니고 더구나 異邦人이란 不利한 條件을 어이할 수 없는 터였다. 結局 그는 吳나라 王族 中 ‘將來性 있는 有力者’를 찾고, 現在의 不遇한 野心家를 도와주면서 自己의 有用性을 十分 證明해 ‘붙어서 크는 길’을 摸索했다. 그 協力對象 人物이 바로 闔閭(闔閭·當時는 孔子 狂(公子 光))다.

    본디 伍子胥는 政治에 뜻을 둔 만큼 觀相으로 사람의 앞을 내다보는 商術(相術)의 基本을 攄得하고 있었다. 商術은 비록 運命의 細部는 알 수 없다 해도 性格의 大綱과 運命의 흐름은 斟酌케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闔閭를 보아하니 王族답게 뜻이 클 뿐 아니라 마음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野心을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爆發 直前의 不平不滿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表情이었다.

    무럭무럭 키워온 野心

    孔子 狂(後日의 闔閭 王)은 當時의 吳王 料(僚)와는 四寸 사이다. 그러나 內心 王位 繼承權의 正當性이 血統으로나 能力으로 보아 自己에게 있는데도 流動的 條件이 不利해 只今 自己가 抑鬱하게 臣下노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때가 와서 自身이 쿠데타를 斷行하거나 或은 料왕이 重大한 失政을 저지르는 等 狀況이 急變하면 躊躇할 것 없이 스스로 王位에 오른다는 抱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當時로선 料왕이 國政 全般을 다스리고, 孔子 광은 軍事 作戰을 맡아 보고 있었다.

    한番은 伍子胥가 楚나라 王孫을 모시는 亡命 知識人의 身分으로 料王을 訪問한 적이 있었는데, 平凡한 料王은 伍子胥를 接見했을 뿐이지 登用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孔子 광은 伍子胥를 親近하게 對하고 親分을 敦篤히 하면서 그의 生活을 여러 모로 보살펴주었다.

    勿論 伍子胥는 孔子 광의 飛上한 判斷力을 높이 評價했다. 나아가 쿠데타를 통한 執權 可能性까지 豫測했다. 伍子胥는 광과 親交와 信賴關係를 敦篤히 하면서도 自身은 一旦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農事를 짓는 量 隱居生活을 하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讀書와 思索으로 智略과 쓸모 있는 人材를 찾기 爲한 努力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散策을 나갔다가 젊은이들의 싸움판에서 보기 드문 사나이를 發見했다. 勇敢하고도 沈着하며, 슬기롭게 참을 줄 아는 의젓한 사나이였다. 한마디로 장사였다. 伍子胥가 뒤쫓아가 通姓名을 하니 前提(專諸)라고 했다. 그도 所聞을 통해 伍子胥를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禮儀를 지켜 깊이 交際했다. 그런 뒤 孔子 狂에게도 紹介했는데 極盡한 優待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史記, 剌客列傳). 大丈夫는 誠心껏 厚待하여 義理를 되씹게 하면, 一朝有事時에 목숨을 내던지며 報答한다.

    伍子胥는 또 料理(要離)라는 人物을 發見하여 깊이 交際했다. 料理는 勇敢하고 沈着했으며 슬기로웠다. 智慧가 뛰어난 反面 體格은 貧弱했으나 그것은 用途에 따라 求愛할 바 아니었다. 所聞을 듣고 伍子胥 스스로 禮物을 들고 料理를 찾아가 交際를 請했다(吳越春秋).

    겉으로는 亂世에 보기 드문 勇氣와 意志를 兼備한 人材를 찾아 交際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는 名分을 내세웠지만 孔子 광의 쿠데타를 돕는 代行 準備였던 셈이다. 人間은 孤獨할 때 自己를 알아주고 誠意껏 도와준 恩誼를 잊지 못하는 法이다. 優秀한 人材일수록 그렇다. 智慧는 資本이지만 情緖는 推進力이다. 理性과 感情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 참 人材다.

    吳王 闔閭의 登場

    伍子胥가 亡命한 지 5年 後 楚나라에서는 怨讐인 坪왕이 죽고 새로운 太子 陳(珍)李 卽位하여 소왕(昭王)이라 稱했다.

    그러나 伍子胥의 複數엔 問題될 것이 없었다. 소왕을 없애고 평왕의 屍體를 冒瀆하면 그만이라는 式이었다. 더욱이 소왕은 太子 交替의 不美한 經緯 때문에 國民의 信望을 얻지 못했다. 反面 吳나라에서는 楚나라의 그러한 內部 混亂을 틈타 進擊을 開始하자는 輿論이 들끓었다.

    그러나 伍子胥에겐 孔子 光을 吳나라 王으로 登極시키는 쿠데타가 急先務였다. 擧事에 妨害가 되는 人物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계찰(季札)인데, 料王과 孔子 광의 叔父인 데다 그에 對한 國民의 尊敬이 事實上 國王을 凌駕했다. 또 한 사람은 料王의 長男 京畿(慶忌)인데 勇敢하고 賢明했다. 伍子胥는 이들을 除去하는 代身 國外로 나가 있도록 計略을 꾸몄다.

    계찰을 文化使節로 내보내 諸侯國들을 自由롭게 親善 訪問케 했다. 또 競技는 위(衛)나라에 特別 大使로 나가 있게 했다. 그리고 宗廟에서 열린 御殿會議에서는 衆論에 따라 楚나라를 侵攻하기로 議決했다. 다만 總司令官 格인 孔子 광은 갑작스러운 身柄을 理由로 本隊의 出發을 늦췄다. 애當初 料왕이 軍事(軍事)를 全的으로 광에게 委任하고, 親衛隊만 掌握한 것은 致命的인 失策이었다. 先發隊는 料王의 親同生인 다른 두 公子가 引率하고 出發했다. 그러나 先發隊는 樵軍에 依해 退路를 遮斷當해 돌아올 수 없고 連絡이 杜絶된다. 料王은 完全 孤立됐다.

    다음으로 伍子胥는 極祕裡에 쿠데타 때에 刺客으로 쓸 專制를 데리고 와서 孔子 광에게 맡겼다. 광은 말했다.

    “正統性 있는 내가 吳王이 되어 祖國을 부흥시킬 날이 到來하고 있다. 자네만 믿는다. 料王을 除去해주게.”

    專制 : “그동안의 보살핌을 義理로 갚겠습니다. 다만 저에겐 老母와 어린 子息이 있습니다.”

    狂 : “걱정 말게. 내가 全的으로 奉養과 養育을 責任지겠다. 며칠 後 料왕이 우리집에 올 텐데 그때 斷行해주게.”

    그 直後 孔子 광은 急性 病이 治癒됐다고 널리 알렸으며, 料王을 만나 速히 出征해 두 公子를 救援하겠다고 盟誓했다.

    이어 料王에게 完快와 出廷을 自祝하며 詐欺를 鼓舞할 必要가 있으니, 自宅에서 盛大한 宴會를 열고 싶은데, 그날 料왕이 잠깐 參席해주면 모두 甘粉(感奮)할 것이라고 懇切한 希望을 밝혔다. 料王은 出席에 同意했다.

    宴會가 始作되어 술盞이 돌기 始作하자 광은 잠깐 자리를 떴고, 때마침 前提가 커다란 料理班(盤)을 두 손으로 받들고 공손히 料王 앞에 놓았다. 前提는 먼저 方向을 가다듬는 솜씨를 보이다가 커다란 生鮮料理 뱃속으로 손이 가더니, 短刀를 꺼내들고 瞬息間에 食卓을 넘어뛰어 料王의 가슴 깊이 박았다. 깜짝 놀란 料王은 도망가려 했으나 前提는 놓아주지 않았다. 一瞬 宴會場은 阿修羅場이 되었다. 近衛兵들이 달려들어 칼을 들고 專制를 찌르고 치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便 자리를 떴던 광의 信號에 따라 地下室에 숨어 있던 伏兵들이 一齊히 뛰어나와 抵抗者들을 모조리 慘殺하거나 꿇어앉혔다.

    드디어 孔子 光이 儀仗兵을 갖추고 王宮에 들어가서 卽位했는데, 以後 그를 吳王 闔閭(闔閭)라고 불렀다.

    反抗은 極少數의 一時的 騷動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날의 騷動을 王位 繼承權 問題를 에워싼 王室의 內紛이라고 諦念했으며, 闔閭 王의 權威와 知名度가 높아 默認해줬다. 그 根本은 軍事力 掌握에 있었다.

    王室의 큰어른 格인 계찰이 外遊 中 쿠데타 消息을 듣고 急遽 歸國했다. 闔閭가 姿勢를 낮추며 찾아가 事情을 說明하고 王位를 삼가 繼父 앞에 바치겠노라고 했다. 계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國家 維持를 위해 騷亂을 잠재우기로 決心했다. 闔閭의 王位 繼承權 主張에 一理가 있으며, 特히 軍事力을 完全히 掌握한 點을 勘案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올 것이 왔다’는 式의 情勢 判斷인데, 그러한 事後 追認은 앞으로도 類似한 模倣 事例 出現에 길을 터놓는 꼴이 되게 마련이다.

    緻密한 뒤處理

    쿠데타의 事後 收拾, 卽 擧事 後의 國政 安定을 위해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떨떠름한 걱정거리는 죽인 料王의 長男 京畿(慶忌)가 位(衛)나라에 健在하다는 事實이었다. 勇氣와 智慧를 높이 評價받는 그가 復讐와 脫權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念慮를 그대로 두고는 闔閭 王의 楚나라 征伐은 不可能했다. 위나라에 競技의 新兵 引渡를 要求해봤자 거부당할 것이 뻔한 狀況에서 解決의 길은 暗殺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伍子胥는 미리 包攝해둔 料理(要離)를 데려왔다. 闔閭 왕이 대면해보니 작은 키에 風采도 神通치 않았다. 그러나 伍子胥가 極口 讚揚해 마지않는 장사란다. 義理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犧牲할 大丈夫라고 했다.

    伍子胥와 料理가 共同으로 作成한 計略은 緻密하고도 殘忍했다. “料理가 弑害된 料王을 위해 復讐하고자 闔閭 王 暗殺을 企圖한다. 逮捕令이 내려지고 外國으로 亡命하는데, 그의 妻子가 逮捕되어 反逆者의 家族이라 해서 公開 處刑된다. 料理가 海外를 流浪하며 闔閭 王의 罪惡을 宣傳한다. 그런 다음 위나라로 景氣를 訪問한다. 競技는 料理를 同志로 믿고 登用한다. 復讐를 위한 支援軍이 組織되면 함께 祖國 吳나라로 向하는데, 行軍 途中 料理가 景氣를 暗殺한다”는 꾸밈새였다.

    그後의 事態는 計略臺로 展開됐다. 競技는 목숨을 거두면서 部下들에게 捕縛된 料理를 가리키며, “나름대로 義理를 지킨 勇士다. 죽이지 말고 吳나라로 돌려보내 그의 吳王에 對한 忠誠을 天下에 알리도록 하라”고 했다.

    그의 指示는 履行됐다. 料理는 하늘을 우러러 自己의 人生을 整理하며 慨歎했다.

    “나는 無辜한 妻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個人的 義理를 지킨다고 大義名分 없이 闔閭를 爲해 일했다. 이는 倫理上 不當하다. 고작해야 새 임금을 위해 옛 임금의 太子를 죽였을 뿐이니 仁義(仁義)가 아니다. 그러고도 富貴한 身分이 된다면 天下의 선비들 앞에 面目이 서지 않는다.”

    그러고는 自殺의 길을 擇했다. 料理는 勇敢하고 義理를 헤아릴 뿐만 아니라 착하고 슬기로운 大丈夫였다. 다만 그의 價値觀은 時代的 制約性을 면치 못했다. 同時에 그의 心理的 葛藤은 良心的인 人間이 苦悶할 수 있는 永遠한 矛盾을 생각케 한다.

    한便 새로 卽位한 吳王 闔閭는 쿠데타의 最大 功勞者인 伍子胥를 行人(行人)에 임명했다. 古代 冠名으로, 拷問 兼 特使 職銜이다. 外國 出身에게 附與하는 最大의 新任이었다. 伍子胥는 後日 相國(相國)에 올랐는데, 最高 顧問인 셈이다. 이제 伍子胥는 楚나라에 對한 復讐戰 開始의 든든한 基盤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複數 또는 報復의 倫理的 價値를 어떻게 評價할 것인가. 傳統的으로는 ‘正義의 實踐’이고, ‘民族正氣의 表現’이라 알려져 있다. 예컨대 蘇聯軍은 베를린을 占領하자 敵國의 樹齡 히틀러의 埋葬된 屍體를 다시 파내서는 軍靴발로 짓밟고 거듭 불태워 그 재를 下水溝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라틴(Latin)의 哲人은 觀照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復讐는 最大의 快感이라고 말한다”고. 이 問題에 對해선 다시 言及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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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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