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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지 않으면 짐승 한 마리가 내 生살을 뚫고 나오거든”|신동아

“글 쓰지 않으면 짐승 한 마리가 내 生살을 뚫고 나오거든”

登壇 40年, 40番째 小說 準備하는 박범신

  • 이소리│ 是認·文學in 代表 lsr@naver.com

    入力 2012-02-22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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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前) 作家’ 될까 하는 두려움 커
    • 시골집에는 鬼神들이 두런거리는 것 같아
    • 故鄕 내려왔지만 뭘 써야 할지 只今도 모르겠어
    • SNS? 敵과 我軍만 있다는 激昂된 態度는 좋지 않아
    • 네 番 自殺 企圖는 너무 利己的인 選擇이었지
    • 文學은 人生의 防腐劑…다시 태어나면 木手 하고파
    “글 쓰지 않으면 짐승 한 마리가 내 생살을 뚫고 나오거든”
    지난해 39番째 長篇小說 ‘나의 손은 말굽으로 變하고’를 펴낸 뒤 故鄕(忠南 論山)으로 흘러들어간 作家 박범신(66). 지난해 11月 ‘50年 만의 歸鄕’에 對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8個月 동안 小說 한 줄을 쓰지 못했고 極甚한 無力感에 시달렸어요. 뭔가 내 안에 있고 그 信號를 强勁하게 받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내 마지막 時期가 始作되는 느낌입니다. 내려가 겨울을 보내면 무언가 餘名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그는 올해 나올 作品에 功을 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2012年은 그의 登壇 40年이 되는 해다. 40番째 作品은 그의 作品世界의 結晶體가 될 것이라는 周邊의 期待도 크다.

    作家 박범신의 文學活動은 크게 3期로 나눌 수 있다. 1期는 登壇한 1973年부터 1979年까지 階級葛藤을 中心으로 글을 쓰던 ‘靑年作家’ 時期다. 1979年부터 絶筆을 宣言한 1993年까지는 世態小說을 쓰던 ‘人氣作家’ 時期였고, 文壇 復歸 後 2000年代는 뿌리에 對한 欲望을 그린 ‘渴望의 時期’였다. 이제 박범신은 4期 時代를 열려고 한다.

    2月 6日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내 안에 늙지 않는 짐승이 하나 있어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짐승이 生살을 뚫고 나오기 때문에 안 쓸 수 없다”며 虛脫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둘레가 30㎞가 넘는 塔정호(湖)가 보이는 故鄕집(論山市 가야곡面 조정리)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어야 할 그가 서울 집(평창동 所在)으로 暫時 올라온 것은 强추위 때문이었다. 故鄕집에 보일러가 作動하지 않아 現在 집修理 中이란다.



    世俗 欲望 버리니 根源에 對한 欲望이 꿈틀

    ▼ 4期 時代를 여는데 추위가 발목을 잡았군요.

    “그렇군요(웃음). 돌이켜보면 靑年作家 時節은 참 가난했습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時節이었죠. 人氣作家 時期에는 讀者들 사랑도 많이 받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原稿請託度 많이 들어와 幸福했지만, 어쩌면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때이기도 했어요. 讚辭와 非難의 가파른 境界에 서 있었거든요. 絶筆 以後 渴望의 時期에는 나이가 자꾸 드니까 ‘時間을 이길 수 없구나’하는 생각에 좀 쓸쓸하던 때였어요. 스스로 깊어졌다는 느낌? 그때부터 根源的인 것에 對한 渴望과 永遠性에 對한 欲望이 生살을 뚫고 나오면서 神聖(神聖)에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그동안 世俗에 對한 欲望을 잘 이겨낸 것 같아요. 대견스러울 程度로(웃음). 그런 世俗的인 欲望을 버리니까 根源에 對한 欲望이 더욱 커지기 始作하더라고요. 그땐 쓰고 싶은 것만 썼기 때문에 自負心이 充滿했어요.”

    ▼ 最近에는요?

    “只今은 1年 程度 小說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前 2年 동안은 ‘은교’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變하고’ 3篇의 長篇小說을 썼어요. 只今 長篇小說을 못 쓰고 있는 것은 그런 탓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이제 한 時期가 끝나고 새로운 한 時期가 始作되는 때인 것 같아 쉽지 않네요.”

    ▼ 지난해 登壇 39年을 맞아 서른아홉 番째 小說 ‘나의 손은 말굽으로 變하고’를 펴냈어요. 登壇年度와 長篇小說집 卷數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登壇 39年에 長篇小說 39卷을 냈다는 것은 正말 쉬지 않고 熱心히 썼다는 거죠. 거기에 더 무게重心을 두고 싶어요. 저는 ‘前(前)’ 作家가 될까 두렵습니다. ‘永遠한 靑年作家’로 늙고 現役作家로 죽는 게 꿈이죠.”

    ▼ 올해 構想 中인 小說은 어떻습니까.

    “只今 많은 小說이 머릿속에 흘러가고 있어요.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故鄕으로 내려갔는데, 稀罕하게도 몸은 故鄕에 가 있고 마음은 平澤이나 天安쯤 와 있는 것 같아요. 事實, 故鄕으로 내려가 글을 쓰겠다는 그런 생각은 예전엔 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故鄕에 있으면서도 ‘作家로서 나는 왜 故鄕으로 왔을까?’하고 自問하고 있어요. 故鄕에서 그렇게 서너 달 지내다 보니까 어떤 날 밤에는 鬼神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살고 있는 집 앞에는 큰 湖水가 하나 있는데, 낮이면 景致가 참 아름답지만 밤이 되면 캄캄해져요. 그래서 그런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呪術的인 氣分도 들지요.”

    敗北의 歷史 간직한 故鄕 論山

    ▼ 故鄕 論山은 어떤 곳입니까?

    “論山은 錦江文化圈을 中心으로 數千 年 동안 그 歷史가 이어져왔지만 勝利의 歷史보다 敗北의 歷史가 더 많았습니다. 제가 사는 집 周邊이 황산벌이에요. 황산벌은 階伯將軍이 戰死하면서 백제가 亡한 곳이자 後百濟가 亡한 곳이잖아요? 高麗 太祖 王建이 만든 ‘훈요 10兆’ 가운데 勳요 8條에 이런 句節이 나와요. ‘차현(車峴·現在의 車嶺山脈) 以南, 公主强(公州江·現在의 錦江) 밖의 山形地勢가 모두 本註(本主)를 配役(背逆·錦江의 流域이 南에서 北으로 逆流함)해 人心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郡民이 朝廷에 參與해 王后(王侯), 國戚(國戚)과 婚姻을 맺고 政權을 잡으면 或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統合(後百濟의 合倂)의 怨恨을 품고 反逆을 敢行할 것이다.’ 高麗 光宗 때에는 豪族을 肅淸하는 過程에서 죽임을 當하는 者가 줄을 이었고, 壬辰倭亂 때에도 倭軍 侵掠으로 해를 많이 입은 곳이죠. 朝鮮 中期에는 畿湖學派 中心地로 회덕에는 송시열, 論山에는 김장생·輪症 等 士大夫들이 支配했죠. 東學 때도 우금치 戰鬪에 앞서 南北 接主들이 마지막 會議를 한 場所였고요. 故鄕 論山에는 그런 아픈 歷史가 새겨져 있어요.”

    ▼ ‘鬼神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기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故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겠어요. 가끔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或是 그분들이 저를 媒介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하는. 저는 그래도 살아 故鄕에 돌아왔잖습니까? ”

    “글 쓰지 않으면 짐승 한 마리가 내 생살을 뚫고 나오거든”

    作家 박범신은 “글을 안쓰면 손이 말굽으로 變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 아니, 올해 構想 中인….

    “아, 그렇죠. 故鄕얘기만 했네요. 事實, 只今도 뭘 쓸지는 모르겠어요. 作家로서 이런 아픈 歷史를 지닌 論山으로 歸鄕한 게 偶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뭘 써야 하나’하고 苦悶할 때마다 特히 어둠 속에서 異常한 말소리가 많이 들려요. 제가 새로운 글을 쓴다면 아마 그런 것들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歷史이야기만 쓸 생각은 없어요. 歷史는 名分에 따라 記錄되지만, 小說은 名分 너머 裏面에 있는 五慾七情(五慾七情)을 코드에 따라 쓰는 것이니까요.”

    ▼ 生活은 不便하지 않으세요?

    “論山文化院에서 論山 이야기를 담아 만든 아주 작은 冊인 ‘論山의 어제 이야기’를 읽고 있어요. 故鄕에 關한 冊도 여러 卷 보고 있고요. 지난해 11月 끝자락에 故鄕으로 내려갔지만 生活하기가 힘들어요. 普通 午前 10時에 일어나는데, 보일러가 作動되지 않아 몹시 춥고, 부엌에서 飮食 챙겨 먹는 것도 不便해요. 食事를 대충 챙겨 먹고는 車를 몰고 鷄龍山 等 論山 곳곳으로 떠돌아다니지요. 마치 故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저녁에는 主로 冊을 읽는데 冊이 잘 안 읽혀요. 캄캄한 어둠이 감싸고 있는 외딴집에 혼자 있자니 너무 寂寂하고, 글쓰기 또한 過渡期에 있으니까 마음이 散亂해요. 밤 10時 以後 혼자 술을 마셔요. 너무 외로우니까. 그리고 새벽 1, 2時에 술에 醉해서 잠을 盞답니다. 事實, 내 손은 글을 안 쓰면 손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 들면서 말굽으로 變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은 어쩔 수 없지요.”

    ▼ 論山으로 내려간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고 있죠?

    “네 .‘페이스북’에 ‘論山日記’라는, 一種의 斷想집을 올려요. 안 쓰면 病이 되니까. ‘페북 日記’는 서울에서도 쓰고 있어요. 몇 달 그렇게 쓰다 보니 出版社에서 冊을 내자고 그래요. 그래서 ‘論山日記’를 올해 한 卷 내고, 그걸 始作 삼아 해마다 한 卷씩 내려고 합니다.”

    ▼ 그렇군요. SNS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事實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하지 않아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連載한 ‘촐라體’가 처음 인터넷을 活用한 小說이었죠. 저는 SNS를 健康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作家는 自己 作品과 妥協할 수 없지만 讀者에게는 늘 열려 있어야 해요. SNS는 바로 그런 點에서 새로운 文明이지요. 우리나라 政治, 經濟, 社會, 敎育, 文化 等은 그동안 목소리 센 놈이 제 입맛대로 이끌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SNS는 그런 點에서 發言의 均衡을 맞출 수 있어요. 우리 社會도 이제 스스로 淨化하고, 스스로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程度로 成熟해 있다고 봅니다.”

    “목소리 센 놈이 제 입맛대로 이끌어왔다”

    ▼ SNS는 資本에서 比較的 자유로운데요, 資本主義가 우리 社會에 미치는 長短點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사람들은 政治를 辱하는데, 核心은 政治가 아니라고 봐요. 政治가 資本의 支配를 받는 時代니까요. 政治的 獨裁時節엔 싸워야 할 타깃이 分明히 步였잖아요? 그런데 資本의 獨裁는 너무 巧妙해서 電線조차 뚜렷하지 않아요. 資本이 모든 分野에서 反人間 反文化를 부추겨요. 우리 스스로 屈服당하고 奴隸가 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엉뚱한 헛발질만 하고 있어요. 資本의 巧妙한 獨裁를 알면서도, 資本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게 不可能하다는 건 딜레마입니다. 어쩌면 내 自身이 戰爭터라고 봐야지요.”

    ▼ 戰爭터라.

    “資本이 이끄는 欲望으로 가고 싶은 나와 그 欲望을 否定하는 나 사이에 電線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資本이 주는 安樂함을 누리고 싶은 것도 事實이고, 그것을 否定하는 것도 우리 自身이니까 戰線이 따로 없다고 봐야죠. 奧地旅行을 하다보면 한창 잘나가던 中에 모든 旣得權을 버리고 背囊 하나 메고 떠나온 美國人을 많이 만나요. 資本主義 宗主國이라 할 수 있는 美國 사람들까지 大體 왜 그러겠습니까? 資本의 奴隸가 되기를 拒否하고 生命價値 中心의 삶을 實踐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그렇고, ‘조화로운 삶’의 著者인 스콧 니어링 亦是 美國人들이 20世紀에 가장 尊敬하는 사람의 하나예요. 資本主義 欲望의 奴隸로 살면 根源的으로 자유로운 삶, 意味 있는 人生이 不可能하기 때문이죠. 보다 根源的인 것, 예컨대 사랑, 神聖, 充滿, 永遠性 같은, 資本보다 높은 欲望에 이끌리는 거지요. 資本이 支配하는 文明人의 삶은 富者가 되든, 出世를 하든, 어쨌든 不安해요. 資本主義가 주는 安樂함을 一部 犧牲해서라도 마음의 充滿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삶을 찾아나서는 거라고 봐요, 希望을요. 우리가 歷史에 對해, 未來에 對해 그나마 가질 수 있는 希望이 여기 있어요. 사람이죠.”

    ▼ 요즈음 作家들은 SNS를 利用해 짧은 위트나 諷刺 글을 자주 올립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많지만 뭐, 저는 그들 삶의 方式을 따라갈 생각은 없습니다. 내 方式대로 發言하고 싶고, 나의 世界觀을 나이에 걸맞게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죠. 목소리 큰 사람이 있으면 가만가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作家로서 發言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窓을 치켜들고 廣場으로 나서서 戰士처럼 외칠 생각은 없어요. 왜냐? 우리의 討論文化는 中間地帶가 없다는 게 問題예요. 風俗과 制度가 衝突할 때, 風速이 墮落했으니 더 嚴히 다스리자 하면 保守이고, 風俗이 變했으니 制度를 바꾸자 하면 進步예요. 100% 保守, 100% 進步가 있다면 盲目的인 政派主義者이거나 狂信徒겠지요. 狂信徒에게 神이 머물겠습니까? 그런데도 保守的인 進步, 進步的인 保守, 或은 境界인, 灰色人, 中間子의 發言은 無視되거나 억압당해요. 그런 사람이 많지만 大部分 沈默하고 있는 게 우리 社會 問題라고 봐요. 文學은 境界에 놓인 것이니 作家 亦是 境界에 서 있는 者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 자리에서 作品을 쓰려고 해요. 作品으로 發言하겠다, 뭐 그런 態度라 할 수 있죠. 日常에서 나이의 權威를 내세울 생각은 없지만요, 作品에서만은 作家다운 品格을 維持하고 싶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作家였고, 如前히 作家이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여겨요. 平生 뭐랄까요, 소셜미디어는 充分히 意味 있는 새로운 方式의 疏通이지만, 敵과 我軍만 있다는 式의 激昂된 態度는 좋은 結果를 내기 어렵죠.”

    “文學으로 修身齊家? 우스운 소리”

    ▼ 作家 金訓은 ‘나는 文學이 人間을 救援하고, 文學이 人間의 靈魂을 引導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文學은 맨 下位에 있는 거라고 했는데요.

    “좀 거칠지만 그 말이 含意하는 속뜻을 생각하면, 이런 點이 있어요. 文學으로 ‘修身齊家(修身齊家)’한다는 건 우스운 소리지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二重的이고 權威主義的인 분들을 念頭에 두고 한 말 같아요. 저 또한 文學은 모든 藝術장르의 最下層에 位置해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文學은 쌀農事 같은 거예요. 쌀이 生産돼야 떡도 빚고 술도 담그죠. 그렇다고 해도 文學이 最終的으로 人間에 對해 말한다는 事實은 否定할 수 없어요. 人間을 救援하는 것까지야 너무 앞서나간 거지만, 文學은 人間의 五慾七情을 昭詳히 記錄함으로써 삶의 根源的인 意味를 생각하게 만들고 마침내 ‘내 삶이 이래도 좋은가’ 하는 反省을 불러일으킨다고 봐요. 勿論 어떤 快樂的 感動이 目標가 되는 수도 있고요. 結局은 같은 말이 되겠지만요. 그런 點에서 文學이, 社會 안에서, 讀者에게 일정한 役割을 한다는 것은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이지요.”

    ▼ 讀者 스스로 反省한다? 結局은 人間中心主義군요.

    “그런가요? 人間 中心 하니까 北韓 얘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저는 햇볕政策 支持者입니다. 政派主義的 發言은 아니고요, 文學은 根源的으로 缺乏된 者의 便에 설 수밖에 없어요. 北韓 政權과 相關없이, 北韓 住民들은 現 段階 韓半島에서 가장 疏外된 사람들이자 우리 民族입니다. 우리 이웃, 우리 民族이 苦痛 받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幸福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만 잘 먹고 잘산다고 幸福해집니까.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일부터 果敢히 해야 된다고 봐요. 사랑과 憤怒가 없으면 作家라 할 수 없겠지요. 언뜻 제가 ‘左派的’으로 보일 수 있을 거예요. 疏外된 者, 가난하고 傷處 받은 者 便에만 서도 左派라고 하는 異常한 世上이니까요. 저는 어떤 政派主義나 集團主義를 싫어합니다. 거기에 所屬될 생각도 없어요. 作家는 結局 ‘獨孤다이’죠. 作家는 單獨者로서, 가난하고 疏外된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저는 文學이 韓國式의 偏狹한 左右를 넘어선 곳에 存在한다고 여겨요. 左右 너머에 人間 中心主義가 있다고 믿고요.”

    德治하는 사람이 政治 이끌어야

    ▼ 政派注意를 싫어하는 國民으로서 올해 總選과 大選에도 關心이 없나요?

    “그건 아니고요. 우리 時代는 애써 이룩한 先進化와 民主化, 잘 먹고 잘살게 된 富의 價値와 惠澤을 알뜰히 分配해야 할 時期예요. 民主化, 經濟 先進化를 우리가 成就했는데, 少數 一部 資本家에게 그 밥床을 다 바친 꼴이 됐어요. 農事는 함께 지었는데 一部가 그 過失을 獨占한다면 되겠습니까. ‘普遍的 福祉’라는 말도 웃겨요. 恥事하고요. 누가 누구에게 은혜롭게 베풀라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요. 복지는 施惠가 아니잖아요? 福祉는 함께 일한 만큼 그 過失을 公平하게 分配하고, 最小限의 人間的인 삶의 環境을 만들어가자는 거지 施惠가 아닙니다. 이番 總選과 大選에서는 그런 것들을 合理的으로 打破할 수 있는 이들을 뽑아낼지 率直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밥만 먹는다고 이 競爭社會가 주는 不安이 다 解消되겠어요? 이제 ‘덕성’이 있는 政治, 곧 ‘德治(德治)’를 하는 분들이 우리 政治를 이끌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센 싸움닭들만 뽑은 거 같아요. ‘德(德)’은 不動心이고, 그러니 어떤 面에선 타고나는 것입니다. (政治)‘꾼들’은 저희들끼리 딴 데 가서 놀라고, 좀 내보냅시다. 安哲秀(서울대 融合科學技術大學院腸)가 水面으로 불쑥 떠오른 것도, 싸움닭들이 판치는 狀況에서 그 닭쌈 같은 情坡州의, 또는 獨食主義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政治的인 論理로만 풀고자 하면 곤란해요. 安哲秀 現象은 文化的으로 봐야 해요.”

    ▼ 自殺 祈禱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박범신은 高等學生 때 2回, 大學生 때 1回, 作家 活動 當時 1回 等 모두 네 番의 自殺 試圖를 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自殺 詩도 그거, 너무 利己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막내이자 외아들이었는데, 世上과의 不和가 너무 많아 제대로 成熟하지 않았던 때 그런 일을 저질렀어요. 世上은 미쳐 있는데 나는 正常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미쳤는데 世上은 正常이라거나, 그런 생각에 둘러싸여 지냈어요. 藝術家的 感受性에 다치고 있었던 거죠. ‘自己 죽음’李 唯一한 ‘自由意志’라는 式의 섣부른 말에 치우쳐서요. 1980年 마지막 自殺 祈禱를 할 때는 그 時代狀況이 저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어요. 이를테면 光州民主化運動이 일어났을 때에도, ‘作家로서 나는 겨우 連載小說 써서 밥 먹고 사는구나’하는, 그런 自愧感이 날 너무 괴롭혔어요. 그때는 人氣作家로 불리며 살 때였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그 짓을 벌였어요. 京畿 안양시에 살 때였는데, 더러운 안양천邊에서 팔 動脈을 긋고 누웠는데 낌새를 느꼈던지 아내가 아파트 警備員을 總動員해서 피 흘리면서 失神해 있는 나를 찾아내 病院으로 옮겼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只今은 後悔하고 있어요. 高等學生 때 한 自殺 企圖 이야기는 自傳小說 ‘더러운 冊床’에 仔細히 나와 있어요. 子息들에게는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머지 自殺 企圖 이야기는 早晩間 續篇으로 쓸 생각입니다.”

    ▼ 作家 박범신에게 큰 影響을 준 冊이 있나요?

    “생텍쥐페리가 쓴 ‘人間의 大地’가 가장 記憶에 남아요. 제가 쓴 ‘촐라體’도 가만히 생각하면 생텍쥐페리 作品을 反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大學에 들어갈 무렵 習作期에는 정음사에서 펴낸 ‘世界文學全集’과 민중서관에서 펴낸 ‘한국문학전집’, 東亞出版工事에서 펴낸 ‘世界文學全集’ 等을 熱心히 읽었어요. 特히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10卷짜리 ‘世界前後文學全集’은 나를 作家로 만드는 데 決定的인 影響을 주었어요. 그때는 다들 클래식한 古典文學作品을 통해 文學工夫를 했지요. 좋아하는 作家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스탕달, 최인훈, 김승옥 等입니다.”

    五慾七情 敎授法

    ▼ 명지대에서 學生들을 가르칠 때 作家 50餘 名을 輩出했는데요. 弟子들에게도 朴 作家의 文學世界를 傳授했습니까(그는 1992年부터 지난해 9月까지 명지대 文藝創作科 敎授로 在職했다)?

    “正말 뜨겁게 가르쳤어요. 제가 처음 명지대에 갔을 땐 그 學校 出身 作家가 한 名도 없었어요. 저는 ‘五慾七情 敎授法’으로 學生들을 가르쳤어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게 제가 말하는 ‘五慾七情의 敎授法’입니다. 저는 함께 술 마셔주는 敎授였죠(웃음). 文學은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그게 아주 좋은 方式이라고 믿고 있어요. 젊은이는 展望 不在로 늘 외로운 存在니까요. 젊지만 속은 캄캄한 게 젊음이잖아요?”

    ▼ 小說家 이기호, 백가흠과 가까이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명지대 弟子들이죠. 동아일보에 그렇게 報道돼 그런 質問을 하는 거죠? 하지만 여러 弟子가 있는데 그 親舊들만 뭐 특별하겠어요? 내가 외로울 때 툭하면 놀아달라고 電話하기 便한 親舊들이죠. 小說家 이기호는 只今 光州에 있고, 백가흠은 (京畿 고양시) 一山에 있는데요, 論山에 移徙한 첫날에 凄凉한 氣分이 들어 電話했더니 두 時間 만에 光州, 一山에서 달려왔더라고요. 이만하면 ‘우기호 座街欠’이라고 할 만한가.”

    동아일보는 지난해 11月 27日 그가 서울 평창동을 떠나 論山 시골집으로 移徙하는 모습을 同行 取材했다. 밤늦게 弟子들에게 電話를 했는데 이기호, 백가흠 氏가 곧장 달려와 午前 4時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고 報道했다.

    ▼ 人間的인 사람이 人氣作家가 되는가보군요.

    “제 小說은 요즈음 몇 萬 部 나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文學 讀者는 2萬 名 程度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 萬 讀者가 몇 十萬, 몇 百萬 讀者보다 더 所重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人氣作家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人氣作家로 불릴 때보다 只今이 훨씬 幸福하니까요. 1993年, 絶筆을 通해 市長에 旣得權을 스스로 返納했잖아요? 小說이 特別히 잘 팔리면 社會學的 理由를 考察해볼 必要가 있어요.”

    ▼ 論山에 혼자 있으면 食事가 걱정일 텐데요. 좋아하는 飮食은 뭔가요?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해요. 그 다음이 나물과 국, 밥이 나오는 가정식 白飯인데, 맨날 그런 飮食만 먹으니까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싫어하는 飮食은 튀김 等 기름진 것과 무거운 飮食이에요. 저는 飮食 欲心은 없어요. 일부러 消息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많이 먹지도 못해요. 저는 食道樂家들이 몇 時間씩 車를 타고 기름값 들여가며 飮食店을 찾아가는 걸 理解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혼자 있어도 대충….”

    ▼ 그렇군요.

    “내 안에는 늙지 않는 짐승 한 마리가 사는 것 같아요. 創造的 自我라고 해도 좋을 그 짐승은 나이도 없고, 時間도 가리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글을 쓰지 않으면 生살을 뚫고 나와요. (글을) 안 쓸 수가 없죠. 저는 살려고 글을 써요. 스스로 그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爲해서. 文學이라고 하는 것은 제게 絶對的인 價値입니다. 오죽했으면 新春文藝 當選所感에 ‘文學,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썼겠어요? 요즘 트렌드로 보면 이런 文藝班 學生 같은 態度는 매우 촌스러운데요, 스스로 좀 憫惘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요즘 世上에 絶對的 價値가 어디 있겠어요? 니체는 ‘絶對性은 病이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뭐랄까, 平生 一貫되게 내 삶을 떠받쳐온 것이 있다면 하나는 人間中心主義 價値이고, 또 하나는 一種의 文學純情主義, 文學第一主義 價値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純血主義的인 態度를 버리고 슬슬 弄談하듯이, 文學을 즐겁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 그래서 ‘永遠한 靑年作家’라고 불리잖아요?

    “어쨌든 저는 文學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熱烈히 志向해요. 나이는 상관없어요. 나이 들었어도 括弧 안에 묶이는 作家는 되고 싶지 않아요. 如前히 사람들이 나를 未完成作家로 생각해주길 바라고요. 그렇게 살 생각이에요. 靑年의 感性으로, 죽을 때까지 아주 不溫하고 危險한 現役作家로 살고 싶어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39卷의 長篇小說을 썼는데, ‘文學’이라는 單 한 名과 짧은 戀愛를 한 것처럼 時間이 今方 지나간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習慣에 따라 글을 쓴 적은 한 番도 없어요. 文學은 제 人生의 防腐劑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精神이 懶怠해지거나 썩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文學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文學과 戀愛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境界에 서 있지 않아도 되는, 內出血이 좀 적은, 그냥 柔順하게 내 感受性을 따라가도 되는 그런 職業을 갖고 싶습니다. 木手 같은 거요.”

    作家 박범신은 1946年 忠南 論山에서 태어나 全州敎大, 圓光大 國文科와 고려대 敎育大學院을 다녔다. 1973年 中央日報 新春文藝에 短篇小說 ‘여름의 殘骸’가 當選되면서 作品 活動을 始作했다. 1979年에는 長篇小說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等이 잇따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70~80年代 人氣作家로 떠올랐다. 絶頂의 人氣를 누리던 中 1993年에 갑자기 絶筆宣言을 한 뒤 3年餘 동안 競技 용인시의 외딴집에서 隱居하며 世上과 삶, 文學, 스스로를 되짚는 苦痛스러운 省察의 時間을 가졌다. 1996年 오랜 苦行을 끝내고 中篇小說 ‘흰소가 끄는 수레’를 發表하고 다시 作品活動을 始作했다. ‘大韓民國文學賞’(1981), ‘김동리文學賞’(2001), ‘萬海文學賞’(2003), ‘대산文學賞’(2009) ‘最優秀藝術假想’(2010) 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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