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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新東亞

최불암

‘天上의 花園’은 眞情性 있는 드라마, 가슴 따뜻한 韓國의 아버지를 期待하세요

  • 한상진 記者│greenfish@donga.com

    入力 2011-11-23 1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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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는 큰집 같은 곳…“채널A 個國作 出演해 기뻐”
    • “담배 좀 줄여주세요”…‘수사반장’ 때 걸려온 陸英修 女史 電話
    • “하루 4時間 자고 일한다는 놈은 病者 아니면 詐欺꾼”
    • 中國에서 말 타고 나타난 아버지, 술집 主人이던 어머니
    • “마지막 作品? 記憶에 남을 ‘韓國의 아버지’ 만들고파”
    최불암




    최불암(70)은 가장 韓國的인 俳優라는 評價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아련한 아버지의 記憶을 더듬는다. 23年間 放映된 드라마 전원일기의 金 會長은 좋은 아버지의 基準으로 通한다. ‘파~’하는 그의 웃음을 보며 사람들은 幸福해한다.

    그러나 演技者 최불암의 魅力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때 視聽率 70%를 記錄했던 實話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 그가 입었던 ‘바바리’는 只今도 많은 사람의 腦裏에 刻印돼 있다. 完成度 높은 드라마로 꼽히는 ‘그대 그리고 나’의 캡틴 박을 追憶하는 사람도 많다. 그는 正말 ‘멋있는’ 사람이었다.

    최불암은 요즘 綜合編成채널 채널A의 個國 드라마 ‘天上의 花園’ 撮影으로 바쁜 時間을 보내고 있다. 곰배령 사람들의 家族成長期를 다룬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은 子息과 義絶하고 사는, 무뚝뚝하고 固執 세지만 決定的인 瞬間마다 家族들의 버팀木이 되어주는 아버지를 그려낸다. 落葉 소리가 좋던 11月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 ‘天上의 花園’에서 强한 아버지 役割을 맡으신 것 같은데….

    “무뚝뚝한 시골男子예요. 근데 韓國의 아버지들이 事實은 剛하지 않아요. 마음이 따뜻하지. 이 드라마는 아름다운 얘기를 그립니다. 父母子息 間의 아름다운 疏通을 얘기해요. ‘天上의 花園’은 一般的이지 않아서 좋아. 요즘은 무슨 막장, 刺戟的인 드라마가 臺歲데, 우리 드라마는 眞情性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되새기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해봅시다’ 하고 덤벼들었죠.”

    ▼ 하긴 요즘 드라마들이 죄다 막장으로만 가고 있어서….

    “자꾸 刺戟的인 것만 내놓는데, 이런 良質의 드라마도 必要합니다. 情緖的으로 安定되게 해주는 드라마. 作家도 演出家도 아주 잘 만났어요. 演出家(이종한 PD)는 田園日記에 들어와 살아도 되는 사람이에요. (製作社 代表인) 이장수, 이 兩班은 엉터리 드라마를 못 만드는 사람입니다. 트릭을 안 부리지.”

    ▼ 팀이 잘 꾸려졌네요. 期待가 됩니다.

    “잘 꾸렸죠. 서로 잘 맞아요. 그래도 너무 큰 期待는 하지 마시라고 해요. 그냥 조용히 表現하는 게 좋아.”(웃음)

    ▼ 東亞日報와는 因緣이 깊으시죠.

    “뭐, 옛날에 金相万 會長님 계실 때엔 저희 큰집 같았죠. 제가 또 인촌 金性洙 先生이 設立하신 中央中學校, 中央高等學校를 나왔어요. 東亞방송에도 나왔었고. 어떤 意味에선 先輩네 집 같은 곳입니다. 또 故(故) 김병관 동아일보 名譽會長님하고도 술 많이 먹었어요. 金 會長님은 술만 먹으면 절 불러냈어요. 浪漫이 있었지요.”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 先生님은 우리나라 放送 史上 가장 긴 歷史를 자랑하는 드라마 2篇에 모두 出演하셨어요. ‘전원일기’가 1980年부터 2002年까지, ‘수사반장’李 1971年부터 1989年까지 放送됐죠.

    “네, 그 記錄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 그 記錄은 깨지지 않을 겁니다.

    “왜요? 우리 채널A에서 깨야죠. ‘天上의 花園’으로.”(웃음)

    ▼ 젊을 때부터 60~70代의 演技를 하셨어요.

    “그렇죠, 30代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 만나면 只今도 ‘어이, 金 會長. 只今 한 80살 되지 않으셨소?’ 그럽니다.”

    ▼ 搜査班長 얘기를 해보죠. 한때는 視聽率이 70%를 넘기도 했다는데….

    “처음엔 좀 어려웠어요. 자리 잡는 데 한 3~4個月 걸렸죠. 그땐 廣告部란 게 없었으니까, 演技者하고 治安本部 사람들이 같이 다니면서 스폰서를 찾았지. 演技者 앞세우고 治安本部에서 ‘빽’ 쓰고. 何如間 한창때는 視聽者가 많았어요. 택시도 잡을 수가 없었다니까. 그런데 그게 동아일보 社說 德도 많이 봤어요. 동아일보에서 ‘안房의 保安官’이라는 題目으로 글을 써줬거든. 維新政權이라 무서울 땐데, 나중에 들으니까 朴正熙 大統領도 한 篇도 안 빼고 봤다는 거예요.”

    ▼ 재밌는 逸話도 많았겠어요.

    “재밌는 일이 많았어요. 담배 때문에 陸英修 女史한테 電話를 다 받았으니까. 하루는 ‘附屬室에서 電話가 왔다’고 집사람이 그래. 靑瓦臺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속으로 ‘附屬? 附屬이 뭐지?’ 그러면서 電話를 받았어요. 日曜日, 수사반장 放映이 막 끝났을 땐데, 내가 받으니까 ‘令夫人 電話十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기다리는데 누가 웃으면서 ‘나, 육영수예요’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죠. 軍人 姿勢로 말이야.”

    ▼ 뭐라고 하시던가요?

    “드라마 잘 봤다고, 그때 무슨 가난犯罪를 다뤘을 거예요. 나는 속으로 ‘뭔가 큰 罪를 지었구나’ 했지. 근데 陸 女史께서 ‘제 個人的인 付託인데요. 담배를 좀 줄여주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내가 每 回 딱 네 대를 피웠거든요. 그게 다 設定이었죠.”

    ▼ 그런 設定도 합니까?

    “當然히 하지, 一旦 屍體를 보고 딱 돌아서면서 한 대 태웁니다. ‘너의 復讐를 해주마’ 하면서, 그리고 中間에 바쁠 때 한 대 피우고, 클라이맥스에 가서 한 대 피웁니다. 마지막은 犯人을 다 잡고 생각하면서 한 대를 피우죠. 담배가 一種의 喜怒哀樂의 象徵인 겁니다. 사랑도, 憤怒도, 즐거움도…. 何如間 내가 ‘네 대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陸 女史께서 ‘아유~ 그러면 한두 대로 줄이세요’ 그러는 거예요. ‘최불암氏가 담배를 네 대 태우시면 저 兩班(朴正熙 前 大統領)도 따라서 네 臺를 태워요. 그런데 國民이 다 따라 피우면, 健康에 좋을 理가 있겠어요?’ 그러시는 거예요.”

    ▼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그때는 잘 몰랐지. 속으로 ‘이젠 담배까지, 씨발~ 담배도 못 피우게 해?’ 뭐 이런 상스러운 생각만 했죠. 그런데 歲月이 갈수록 그 兩班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陸 女史께서는 이미 1970年代에 禁煙運動을 한 거예요.”

    ▼ 그만큼 드라마가 影響力이 있었다는 證據겠죠.

    “전원일기 때도 그랬어요. 우리가 (손을 들어 보이며) 수박을 한 通 탁 치면, 全國에서 수박 몇 萬 個가 날아간다고 그랬으니까.”

    얼어 죽은 아이

    ▼ 搜査班長 하면서 犯罪者도 많이 만나셨죠.

    “많이 만났죠. 최중락(前 總警)이란 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최중락氏하고는 兄이요, 아우요 하고 지냈죠. 집에도 가고. 그땐 다들 가난하게 살 땝니다. 최중락氏가 그때 南山에, 朴 大統領이 膳物로 준 7坪인지 14坪인지 하는 아파트에 살았어요, 應接室度 없고 房 하나만 있는. 한番은 正初에 搜査班長팀이 人事를 갔는데,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出監한 사람들, 도와준 사람들이 이 兩班 집에 繼續 찾아오는 거예요. 橘 2個 사오는 사람, 麥酒 한 甁 안고 오는 사람, 담배 한 匣을 包裝해서 가져오는 사람, 感動이 컸죠. 그런데 그 집에서 車라고 나오는 게 그냥 노리끼리한 보리물이에요. 그걸 한盞씩 얻어먹던 생각이 나요. 冷藏庫를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런 時節이었어요.”

    ▼ 훌륭한 분이네요.

    “그 兩班은 훌륭하죠. 只今은 中風으로 몸이 不便하세요.”

    ▼ 搜査班長 같이 했던 演技者, 刑事들과 모임을 오래 해오신 걸로 아는데….

    “최중락氏 쓰러진 뒤로는 잘 못 모이죠. 어른이 있어야지. 그분 代身 내가 해야 되는데, 내 말發은 잘 안 먹혀요.”(웃음)

    ▼ 잊지 못할 事件도 많았겠어요. 先生님의 冊을 보니 아파트 階段에서 얼어 죽은 아이의 얘기는 正말 마음이 아프던데요.

    최불암은 2007年 ‘人生은 演劇이고 人間은 배우라는 오래된 臺詞에 關하여’라는 題目의 冊을 냈다. 一種의 自敍傳이다. 이 冊의 相當部分은 只今의 그를 있게 해준 드라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에 割愛돼 있다. 冊에는 搜査班長을 만들며 보고 겪은 안타까운 事緣도 많이 紹介돼 있는데, 特히 추위에 떨다 얼어 죽은 아이의 얘기, 登錄金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强盜에게 暴行을 當한 女學生의 얘기 等이 가슴 아프게 그려져 있다.

    “내가 現場에 갔더니 죽은 아이를 얇은 비닐로 덮어 놨더라고요. 그 場面을 보고 최중락氏가 火가 났지. ‘어린애가 얼어 죽었는데, 毯요 한 張 덮어줄 사람도 없냐’고 악을 썼지. 사람이 죽으면 가마니라도 덮어주는 게 우리네 門化잖아.”

    ▼ 그렇죠.

    “나중에 비닐을 벗기고 보니까, (몸을 웅크린 시늉을 하며) 이렇~게 웅크렸는데, 손하고 코가 붙어 있더라고. 아유~, 正말 悽慘했지. 애가 우는 소리를 아파트 사람들이 듣긴 들었는데, 내 집 아이가 아니니까 無關心하게 버려놓은 거지. 그래서 이제 얼어 죽은 거지. 가난이란 게 그렇게 끔찍했어요.”

    그런 記憶 때문일까. 최불암은 現在 어린이財團 後援會長을 맡고 있다.

    ‘전원일기’와 정주영 會長

    ▼ 그런 게 搜査班長에 나가면 社會的인 反響이 컸겠네요.

    “亂離가 났죠. 反響이 크니까 문교부 長官이나 (放送局) 社長이 放送을 中斷시키고 그랬지. 두 番 中斷됐는데, ‘世上이 바뀌어서 社會正義가 반듯하게 섰으니 搜査도 必要없다’면서 中斷시킨 적도 있어요.”

    최불암
    ▼ 全斗煥 政權 때 얘기 같은데요.

    “그런 얘기는 내 입으로 못 하고….(웃음) 아마 社長이 大統領 脾胃 맞춘다고 그랬겠지.”

    ▼ 搜査班長은 人氣가 좋아서 惡役에도 志願者가 많았겠어요.

    “잘만 하면 今方 演技力을 인정받았죠. 惡役을 하다 成功한 사람도 많아요.”

    수사반장에서 惡役을 가장 많이 맡은 사람은 탤런트 이계인氏다. 그는 搜査班長에 惡役으로 出演하면서 死刑 20回, 無期懲役만 30餘 回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搜査班長 때 恒常 바바리를 입으셨는데….

    “맞아요. 근데 어떤 新聞에서 내가 콜롬보를 흉내 낸다고, 事大主義라고 쓴 일이 있어요. 콜롬보는 搜査班長보다 한참 뒤에 韓國에 紹介됐는데 말이지. 그래서 내가 그 新聞社로 抗議하러 가고 그랬다니까. 當時 바바리는 用途가 많았어요, 刑事들한테. 이불로도 쓰고, 깔고 자고 그랬으니까. 特히 潛伏勤務할 때 좋지.”

    ▼ 멋을 부리기 위한 用途가 아니군요.

    “多用途로 쓰는 거지.”

    ▼ 故(故) 鄭周永 現代그룹 名譽會長님과도 因緣이 깊으셨죠.

    “鄭 會長님은 田園日記에 出演도 할 뻔 했어요.”

    ▼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그때 80 몇 年인가 그래요. 한 20分 程度를 비워놨지. 鄭 會長님이 옛날에는 農事를 이렇게 지었다고 얘기해주는 場面이었어요, 農夫로 나와서. 本人이 하고 싶어했거든. 근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말렸다는 거야.”

    ▼ 좋은 場面이 됐을 텐데….

    “‘오야붕(우두머리)’李 어딜 나가서 주책을 떠느냐, 뭐 그랬겠지. 나중에 會長님도 ‘會議를 했는데 나더러 나가지 말라고 해서 못 나갔다’고 그러시더라고. 自己는 아버지 생각하면서 얘기하려고 했다는데, 그분이 農事에 對해 아주 該博하시거든요. 有名한 逸話도 있잖아요. 釜山인가, 大田인가? 大統領이 訪問하는데, 美 8軍司令官이 戰戰兢兢하더래요. 名色이 大統領이 왔는데, 걷는 길에 잔디라도 깔아야 하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잔디가 어디 있어? 그것도 2月에. 그런데 정주영氏가 그 얘길 듣고, ‘내가 하면 얼마 주겠냐’고 그러더래요. 그러곤 어떻게 했냐면, 이제 막 난 보리 싹을 시골에서 떠다가 잔디처럼 심은 거예요.”

    ▼ 아~ 비슷하니까.

    “잔디보다 더 近似하지. 그걸 3日 만에 해냈다는 거 아니야. 農事를 안 지어본 사람이라면 絶對 생각할 수 없는 거죠. 2月에 보리 싹이 난다는 걸 안다는 게. 배를 가져다 물을 막아서 牙山防潮堤 만든 것도 다 農事法을 活用한 거예요. 물길에다가 지푸라기를 던져놓으면 그것들이 異物質처럼 쌓여서 自然스레 물길을 막는 原理地.”

    ▼ 청운동 鄭 會長님 自宅에도 여러 番 가셨죠?

    “여러 番 갔죠. 드라마를 하면 그 팀을 다 불러서 밥을 먹이곤 하셨어요. 그런데 鄭 會長님도, 師母님(변중석)도 그렇게 疏脫하고 儉素해요. 처음엔 食母인 줄 알았으니까. 史劇을 좋아하셨는데, 드라마팀이 가면 복料理를 해서 待接을 하시곤 했어요, 複寫時美. 그리고 그 집에는 그림도 한 點 없어, 化粧室에는 타일이 다 떨어져 있고. 그런데도 鄭 會長님은 그게 좋다고 溫湯, 冷湯을 왔다 갔다 하셨어요. 소파는 손잡이 千이 다 떨어져 있는데, ‘그런 게 뭐 重要하냐’ 하셨으니까.”

    ▼ 대단한 분이네요.

    “그리고 아주 率直한 분이에요. 한番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大統領選擧 나오셨을 때, 新聞에 ‘잠을 4時間만 자면서 事業을 일궜다’고 나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침에 만나서 얘길 했죠. 그런 記事가 나왔다고. 그랬더니 ‘누가 그래요? 내가 4時間만 잤다고’ 그러시는 거야. 그래서 ‘新聞에 그렇게 났다’고 했죠. 그러니까 ‘이거 봐요, 나는 기운이 센 사람인데 하루에 7~8時間 안 자면 일을 못해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곤 事務室을 나가면서 나를 부르더니 귀에다 대고 ‘앞으로 잠 조금만 자고 일한다는 놈 있으면 그놈은 分明 病者 아니면 詐欺꾼이니까, 그런 놈하고는 장사하면 큰일 나’ 그러시는 겁니다. 근데 살아보니까 그분 말이 맞아요.”(웃음)

    ▼ 政治도 鄭 會長님 勸誘로 하셨잖아요?

    최불암은 1992年 치러진 14代 總選에서 當時 정주영 會長이 이끌던 國民黨의 比例代表로 國會議員이 됐다. 4年 後인 1996年 서울 영등포구에서 신한국당 所屬으로 地域區 國會議員에 出馬했지만 30代 新銳 政治人이었던 金民錫 前 民主黨 議員에게 敗北했다.

    “勸誘가 아니라 그 兩班이 自己를 도와달라고 했지. 가서 좀 도와드리고 있는데 新聞에 확 나버렸지. ‘가서 앉아만 있어라’ 그래서 갔는데, 司會者가 갑자기 ‘최불암氏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舞臺 위로 끌어올리는 거예요. 拍手를 치는데 또 안 올라갈 수가 있나? 올라가서 한마디 하니까, 아유~. 新聞에 ‘최불암 政治 始作한다’고 났지, 뭐.”

    ▼ 政治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元來 있으셨어요?

    “全혀 없었지.”

    ▼ 1996年에는 地域區에 나가서 떨어지셨어요.

    “當然히 떨어지는 걸로 覺悟하고 있었어요, 民心이 그렇더라고. 그 親舊(김민석 前 議員)가 ‘최불암은 舞臺로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拍手를 치고 그러더라고, 自己는 國會로 가고.”(웃음)

    ▼ 先生님을 일부러 안 찍은 사람들도 있었겠어요. 舞臺에서 보려고.

    “누구는 그러더라고. 난 當身 안 찍었다고.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그랬지.”

    ▼ 政治 그만둔 건 後悔 안 하세요?

    “나는 어른이 시키면 말을 잘 들어요, 남의 말을. (1996年 總選을 앞두고도) 내가 政治를 그만한다고 했더니, 김영삼 大統領이 나를 說得하는 거예요. ‘國民들이 當身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면 그것도 反逆이라고. 그 말 듣고는 또 그런 줄 알고 나갔다 떨어졌지. 元來 演藝界 사람들이 말을 잘 들어요.”(웃음)

    ▼ 드라마 ‘英雄時代’에선 鄭 會長님 役割을 맡으셨는데, 말套나 行動이 비슷해서 話題가 됐어요.

    ‘英雄時代’는 2004年 7月5日부터 2005年 3月1日까지 放送된, 大韓民國의 經濟史를 그렸던 MBC의 月火 드라마다. 최불암은 이 드라마에서 정주영 會長(劇中 天台山) 役을 맡아 演技했다.

    “일부러 비슷하게 했어요. (鄭 會長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러니까 이거 봐요’, 이렇게. 女子 목소리로, ‘잠 4時間 잔다는 사람하곤 장사도 하지 말아요. 病者 아니면 全部 詐欺꾼이야’, 이렇게.”

    술집 主人이던 어머니

    ▼ 살아오신 얘기를 좀 해보죠. 父親께서 아주 대단한 분이셨다고….

    “아버지에 對한 記憶은 많지 않아요. 여섯 살 땐가 만나서 한 1~2年 있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소리도 한두 番밖에 못 해봤고. 아버지 影幀 들었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어머니는 獨立心이 强하고 人情이 많고 또 멋스러운 분이었어요. 술도 한盞 하실 줄 아는 女子였고….”

    ▼ 女丈夫 스타일이셨나 봐요.

    “藝術家들을 理解하고 또 오랫동안 交遊하고 그랬죠. 判斷力이 좋은 분이었어요. 내가 搜査班長 하는데 그걸 보시더니 ‘야, 너 사람들 손에 쇠고랑 채우지 마라’‘권총 들지 말고 선글라스 쓰지 마라. 그게 다 權威의 象徵이다’ 그러셨어요. 내가 그래서 只今도 선글라스를 못 써요. 이미지가 나쁘다 이거지. 病院에서는 老眼 때문에 쓰는 게 좋다고 하는데….”

    최불암

    場所 : 63빌딩 ‘워킹 온더 클라우드’

    ▼ 어머니께서 明洞에서 술집을 運營하신 걸로 압니다.

    “鳴動에 있는 은성이라는 酒店이었어요. 卞榮魯 先生 같은 詩人도 많이 오시던 곳이고 記者들도 많았고. 아주 記者들 판이었지, 뭐.”

    酒店 ‘殷盛’은 1950~60年代를 代表한 明洞의 酒店이다. 최불암의 母親인 이명숙氏가 運營했다. 김수영,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千祥炳 같은 文化藝術人들이 이곳에서 막걸리 盞을 기울였다. 只今도 鳴動에는 ‘은성晝점터’라는 標識石이 있다.

    ▼ 家族 中에 獨立運動家가 많은 걸로 아는데요.

    “네, 아버님 兄弟들이 다 했죠. 아버지는 上海에서 돈을 버셨어요. 작은아버지가 獨立軍이었고. 解放이 되고 나서 아버지는 말을 타고 滿洲에서부터 오셨어요.”

    ▼ 滿洲에서 말을 타고?

    “네, 말을 타고. 말鞍裝에다 金品을 넣어가지고. 그 돈으로 新聞社(인천일보)를 차리고 映畫社(建設映畫社)를 만들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女子도 하나 데리고 오시고….”

    ▼ 女子요?

    “中國 女子인데, 아주 예쁘더라고, 내가 只今 생각해도.”

    ▼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나죠. 어디서 저런 女子를 데려왔나 그랬으니까. 그런데 2~3日 있다가 다시 中國으로 보내더라고, 우리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거든. 그러니까 아버지가 놀래서 女子를 다시 中國으로 보냈어요.”

    ▼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나요?

    “女子를 보냈다고 所聞을 내고는 搜所聞해서 어머니를 찾아 오셨죠. 그리고 한 2年인가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製作하신 映畫 開封을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셨죠.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가 6·25街 터졌는데, 人民軍이 우리 집을 들어와서는 ‘최희철’(최불암氏의 父親) 어디 갔냐고 찾고 그랬어요. 우리 큰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는 다 잡혀 들어갔고요, 동생 때문에.”

    ▼ 何如間 힘든 時節을 보내셨네요.

    “어릴 땐 말이죠. 어머니가 나를 두고 일을 가셔야 하는데, 나를 맡길 곳이 없으니까, 나가시면서 房門을 딱 걸어 잠그고 나가셨어요. 그건 참 엄청난 記憶이지.”

    ▼ 하루 終日 혼자 房 안에서 뭐하셨어요?

    “그게 韓屋房이었어요, 미닫이가 있고 窓戶紙를 바른. 난 어머니가 가시면 窓살 밑에 구멍을 뚫고 바깥世上을 봐요. 밖에 있는 애들이 나에게로 와서 窓門을 사이에 두고 놀아줘요. 子息을 그렇게 가둬두고 나가야 하는 어머니 마음은 또 어땠겠어요. 아버지가 돌아오기 前까지 어머니가 무슨 出版社에서 ‘시다바리(補助)’를 하셨어요. 淸掃하고 白紙 고르고 그런 거. 그런데 무서운 건 空襲警報野. 웽~ 하면서 燈火管制가 될 때, 正말 무서웠지. 어머니는 房 안에다 요강 갖다놓고, 뭐 먹을 거 다 만들어놓고 그러고 나가셨어요. 그럼 나는 혼자서 노는 거야. 어머니 役割도 하고 아버지 役割도 하고, 그런 記憶 때문에 내가 演技者가 된 것 같아요.”

    ▼ 그게 몇 살 때인가요?

    “대여섯 살쯤 됐을 거예요.”

    ▼ 그때 일이 다 記憶이 나세요?

    “아~ 그럼. 지루했던 記憶, 무서웠던 記憶, 하루 終日 親舊들이 나를 찾아왔던 記憶 같은 게….”

    房에 갇힌 어린 時節

    최불암은 徐羅伐藝術大學과 한양대學校 演劇映畫科를 卒業했다. 演出을 專攻할 생각이었고 演技者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최불암은 “해본 적이 없어서 演技를 못했고 演出을 工夫하는 나를 써주는 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老人 役을 맡은 것도 演技를 하던 親舊들이 서로 안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 抑鬱하지 않아요? 남들처럼 멋진 役割을 못해서.

    “抑鬱할 건 없는데, 사랑 얘기하는 드라마는 하고 싶었지. 예쁜 女子하고.”

    ▼ 못해보셨나요?

    “한두 番 했나? 못했나? 映畫에서는 한 番 했고. 只今은 다 잊어버렸어.”

    ▼ 그래도 美貌의 女俳優와 結婚하셨잖아요.

    최불암의 夫人은 탤런트 金民資氏다. 1963年 KBS 3期 公採 탤런트 出身인 金氏는 ‘野望의 歲月’‘보고 또 보고’ 같은 드라마에 出演했고 放送大賞 TV 演技賞, 백상藝術大賞 最優秀演技賞 等을 受賞했다. 최불암은 結婚 前 金民資氏와 가까워질 생각으로 金民資氏가 所屬돼 있던 KBS로 移籍했을 程度로 功을 들인 끝에 結婚에 成功했다고 한다.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中央情報部가 製作하던 ‘實話劇場’이란 프로에 내가 짬짬이 出演할 땐데, 親舊하고 앉아서는 만날 ‘장가를 가야겠는데, 나이가 30이 다 됐는데, 女子가 없으니까 죽겠다’ 그러고 있었지. 親舊가 나더러 ‘야, 어떤 女子를 求하냐?’ 그래. 그래서 ‘눈도 크고 키도 크고 그런 女子가 나는 좋다’ 그랬더니 ‘貞洞마님’이라는 드라마가 있다는 거야. 거기에 나오는 俳優가 딱 그렇다고. 내가 그 말을 듣고 빵집에 가서 보니까 眞짜 눈이 부리부리한 게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거예요. 그래서 그 女子를 찍었지. 근데 내가 장가를 가는데 다섯 가지 缺格事由가 있더라고. 홀어머니에 어머니가 술장사 하지, 외아들인데다 職業은 演劇俳優地. 또…何如튼 다섯 가지야. 最高로 條件이 나쁜 놈이지. 그러니까 妻家에서는 깜짝 놀랐지. 아니,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딸을 줄 수가 있겠냔 말이에요, 率直히.”

    ▼ 反對가 甚했겠어요.

    “그렇지. 아~ 財産도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眞짜 아무것도 없는, 불알 두 쪽 찬 놈인데. 結婚해서 只今까지 사는 거 보면 두 사람 다 神通한 거야.”

    ▼ 金民資 先生님이 대단하시네요.

    “내가 늘 고마워하지.”

    ▼ 그때는 先生님보다 金民資 先生님이 훨씬 有名하던 때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熱心히 했겠습니까?”

    ▼ 뭘 熱心히 하셨어요.

    “글쎄, 그건 女子한테 물어봐야 될 걸. 내가 뭐 알겠습니까?”(웃음)

    ▼ 拉致라도 하신 건가요?

    “何如間 부지런했지. 열 番 찍어서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고. 그리고 집사람이 同情心이 剛했지, 우리 집사람이. 사람들은 아주 차다고 그러는데, 나에게는 第一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 불쌍한 모습을 많이 보이셨나 봐요.

    “自己가 나를 버리면 내가 어떻게 될까. 나를 많이 걱정했다고 해요.”

    ▼ 마지막으로, 先生님은 人生 마지막 作品에 對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天上의 花園’ 이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어요.”(웃음)

    ▼ 오래도록 視聽者 곁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배우는 自古로 훌륭한 人間商, 韓國印象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一種의 使命感이죠. 그런 게 뚜렷하게 表現됐으면 좋겠어요. 田園日記를 하면서 ‘우리 아버지 같아요’‘우리 오빠 같아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役割이 제가 생각하는 俳優의 賞과 第一 가까운 類型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能力보다도 하나의 偶像이 되어주고 큰 나무가 되어 家族들을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人間商 말이죠. 이番 作品에서 맡은 役割도, 自己는 한 番도 잘한 일이 없지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죠. 이런 臺詞가 나옵디다. ‘말을 해라, 그러니까 表現을 해라. 난 表現 못하고 산 게 恨이다’ 이런 臺詞가. 子息한테 惹端을 치고 싶어도 그냥 마음에 두고 사는 거지. 또 ‘나 같은 아버지 되지 마라’ 그런 臺詞가 나오는데, 내 마음에 딱 와 닿더라고. 저도 期待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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