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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新東亞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

頂點에서 退場 宣言한 ‘라루사이즘’ 創始者

  • 하정민│東亞日報 經濟部 記者 dew@donga.com

    入力 2011-11-22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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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年 美國 프로野球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의 優勝팀은 通算 11番째 優勝을 達成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카디널스는 敗色이 짙었던 월드시리즈 6次戰에서 9回末 2아웃까지 相對팀 텍사스 레인저스에 뒤졌지만 劇的인 同點打와 延長 接戰 끝에 勝利를 거뒀다. 이 餘勢를 몰아 마지막 7次戰에서 勝利를 거두며 優勝 半指를 거머쥐었다. 이 脚本 없는 드라마를 쓴 主人公은 當代 最高의 名將으로 불리는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이다. 라루사 監督은 현대 野球에서 普遍化한 ‘先發-中間繼投-마무리’라는 投手 運營方式을 定立해 ‘라루사이즘’이라는 新造語를 만들어낸 人物이다. 1이닝 마무리를 筆頭로 한 불펜投手 分業化는 1920年 ‘몸에 맞는 볼’ 導入과 1960年代 마운드 높이 調整 以後 메이저리그의 革新을 斷行한 一大 事件으로 불린다. 그는 優勝 直後 隱退를 宣言해 世界 野球界를 또 한 番 깜짝 놀라게 했다.
    “法曹人이 되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마이너리그를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野球 監督이 된 理由입니다.”

    이 말과 함께 裁判廷 代身 더그아웃을 擇한 한 靑年은 40年 後 메이저리그 最高의 監督으로 變身한다. 바로 토니 라루사(67)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이다. 라루사 監督이 메이저리그 歷史에 남긴 발자취는 엄청나다. 그는 1979年 시카고 화이트삭스(1979~1986) 監督을 始作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1986~1995)를 거쳐 1996年부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을 맡아왔다. 그의 通算 승수는 無慮 2728勝이다. 메이저리그 歷史上 그보다 더 많은 勝數를 거둔 監督은 코니 脈(3731勝)과 존 맥그로(2763勝)에 不過하며 現役 監督 中에서는 壓倒的으로 1位다.

    라루사는 1989年 아메리칸 리그에 屬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첫 월드시리즈 優勝을 맛본 後 내셔널 리그에 屬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도 2006年과 올해 월드시리즈 頂上을 밟았다. 메이저리그 歷史上 兩大 리그에서 모두 월드시리즈 優勝을 맛본 監督은 스파키 앤더슨(신시내티, 디트로이트)과 라루사 單 2名뿐이다. 그는 네 次例나 ‘올해의 監督賞’을 受賞하기도 했다. 라 陋舍 監督의 戰略的인 팀 運營은 1990年代 初盤 그의 이름을 딴 野球 컴퓨터 게임의 素材가 되기도 했다. 2005年에는 라루사이즘으로 대표되는 그의 戰術이 ‘8月의 사흘 밤’이라는 冊으로 出刊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冊은 그 이듬해 映畫로도 製作됐다.

    特히 올해 라루사가 發揮한 指導力은 그가 왜 메이저리그 最高 名匠인지를 잘 보여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8月 末까지만 해도 월드시리즈 進出이 不可能해 보였다. 내셔널리그 1位는커녕 디비전 決勝에 進出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 1位 팀에도 無慮 10.5競技로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以後 31競技에서 23勝8敗라는 엄청난 勝率을 올려 正規시즌 마지막 날 劇的으로 포스트시즌에 進出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乘勝長驅를 이어갔다. 내셔널리그 디비전 決勝에서는 强力한 優勝候補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었다. 월드시리즈에서는 2勝 3敗로 몰린 狀況에서도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월드시리즈 6次戰에서 벼랑 끝에서 劇的인 逆轉 드라마를 쓰면서 優勝을 차지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 優勝을 이끈 라루사 監督은 2011年 11月1日 33年間의 메이저리그 監督 人生에 마침標를 찍었다. 이날 그는 報道資料를 통해 “카디널스의 變化를 위해 내가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며 監督 隱退를 宣言했다. 라루사 監督은 메이저리그 歷代 監督 中에서 監督 勝數 3位 外에도 포스트시즌 70勝(歷代 2位), 通算 5097競技(歷代 2位), 通算 最多牌(歷代 2位), 監督 33年(歷代 同率 2位), 2728勝(歷代 3位), 14番째 플레이오프 進出(歷代 3位), 3番째 월드시리즈 타이틀(歷代 同率 6位)이라는 前無後無한 記錄을 남겼다.

    라루사 監督이 名將인 理由는 但只 成跡만이 아니다. 라루사는 현대 野球의 패러다임을 바꾼 開拓者이자 革命家였다. ‘라루사이즘’으로 불린 그의 불펜 運用은 以後 다른 球團들이 뒤를 따르면서, 현대 野球의 標準으로 굳어졌다. 라루사로부터 始作된 1이닝 마무리와 左打者 專用 投手, 卽 左腕 원포인트 릴리프는 ‘쓸모없는 投手’들의 生命을 延長시켰고, 불펜 投手들의 處遇를 改善했다. 또한 野球를 더욱 複雜하고 熾烈한 頭腦싸움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때문에 野球界 人士들은 라루사의 退場을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며 稱頌하고 있다.

    토니 라루사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血統을 지닌 라루사 監督은 1944年 美國 플로리다 州 탬파에서 태어났다. ‘La Russa’라는 그의 姓은 이탈리아語로 ‘러시아 사람(The Russian)’을 뜻한다. 라루사는 스페인語를 流暢하게 驅使하는 監督으로도 有名하다. 스페인語에 對한 才能은 메이저리그 野球 監督이라는 그의 커리어에 크게 貢獻했다. 메이저리그의 많은 選手가 中南美 出身이기 때문이다. 中南美 選手들과 自由로운 對話가 可能할수록 監督이 펼칠 수 있는 作戰과 運用 方案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野球에 頭角을 나타낸 라루사는 1963年 5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前身인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遊擊手로 메이저리그에 入城했다. 하지만 選手 라루사의 人生은 초라했다. 至毒하게 따라다녔던 各種 負傷 때문이었다. 結局 그는 서른이 되기도 前에 메이저리거의 삶을 접는다. 選手로서 通算 132競技에 出場한 그는 1割9푼9里의 打率에 15安打 2壘打 5個, 3壘打 2個가 前婦人 成跡을 記錄했다. 홈런은 單 하나도 없었고, 打點도 7個에 不過했다. 초라하다는 말을 하기도 憫惘한 成績이었다.

    失望에 빠진 그는 隱退 後 野球와 完全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플로리다 州立大學校 法學 大學院을 卒業한 라루사는 1980年 7月 플로리다 州 辯護士 試驗에 合格했다. 하지만 그는 딱딱한 法廷보다는 野球를 더 사랑했다. 法大 敎授는 그의 決定을 懇曲하게 말렸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라루사는 다시 野球人이 되기로 決心했다.

    라루사는 1978年 시카고 화이트삭스 더블A 監督을 맡아 野球界에 復歸했다. 1979年 시즌 中途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監督을 맡으며 메이저리그 監督이 됐다. 라루사는 1983年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地區 優勝으로 이끌며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監督으로 選定됐다. 하지만 榮光도 暫時였다. 1984年과 1985年 連이어 不振한 成跡을 올린 그는 1986年 시즌 途中 26勝 38敗를 끝으로 화이트삭스에서 解雇 通報를 받았다.

    라루사이즘의 定立

    하지만 라루사는 不過 3週 만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監督으로 赴任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그는 自身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라루사이즘(Rarussaism)’, 卽 投手 運營의 分業化를 定立한다. 當時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는 ‘빅 脈’ 마크 맥과이어, 호세 칸세코 等 强打者들이 櫛比했다. 겉으로 보면 完全한 打擊의 팀이었지만, 仔細히 들여다보면 投手力을 바탕으로 하는 짜임새 있는 野球를 追求했다. 바로 라루사 德分이었다.

    打者들의 體格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技術 發達로 野球공의 反撥力과 野球 배트의 性能이 좋아진데다, 野球 分析 技術이 發達함에 따라 過去와 달리 한 投手가 9이닝이라는 한 京畿 全體를 책임지는 일은 想像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많은 메이저리그 野球團은 불펜 投手들을 마구잡이式으로 運用했다. 불펜 投手는 野球 競技에서 처음 登場하는 選拔 投手를 除外한 모든 投手를 일컫는 말로 救援 投手(릴리프)라고도 한다. 불펜陣은 先發投手가 물러난 뒤 1~2이닝을 던지는 숏 릴리프, 3~4이닝을 던지는 롱 릴리프, 팀이 競技에서 이기고 있을 때 마지막 9回 1이닝을 책임지는 마무리, 中間 繼投와 마무리를 잇는 셋업맨, 左打者만 相對하는 左腕 스페셜리스트 等이 있다.

    라루사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世界 野球의 새로운 轉機를 만들었다. 當時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選拔 投手였던 데니스 에커瑟里를 1이닝 마무리로 活用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마무리 投手는 팀이 이기고 있는 8回나 9回에 勝利를 지키기 위해 잠깐 登板하는 投手를 말한다. 하지만 라루사 以前에는 最高 球威를 가진 投手가 마무리로 活動하는 例가 드물었다. 훌륭한 投手일수록 每 競技 5~6이닝씩을 擔當하는 先發 投手로 活動해야지, 不過 1이닝만 책임진다는 것은 浪費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루사의 이 決定은 엄청난 成功을 거뒀다. 最高 球威를 가진 投手가 ‘뒷門’을 든든히 지킴에 따라 逆轉敗의 可能性이 顯著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先發 投手로는 그리 頭角을 나타내지 못했던 에커瑟里는 1988年 메이저리그 歷史上 最初로 50세이브를 達成한 投手가 됐다. 當時 에커瑟里가 37歲로 投手로는 還甲이라 해도 無妨한 나이였음을 勘案할 때 더욱 대단한 成跡이다. 이 成功을 바탕으로 그는 마무리 投手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名譽의 殿堂에 入城했다. 에커瑟里가 隱退한 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球團은 그의 등番號 43番을 永久 缺番으로 指定했다.

    2011年 韓國 프로野球의 優勝을 차지한 三星라이온스 亦是 오승환이라는 當代 最高의 마무리 投手를 바탕으로 5年 만에 優勝을 차지한 바 있다. 라루사이즘이 世界 野球界에 얼마나 큰 影響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强한 投手力과 火力을 兼備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88年부터 1990年까지 3年 連續 월드시리즈에 進出했다. 라루사는 1989年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優勝 半指를 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의 成果는 그를 메이저리그의 最高 名匠 班列에 올려놓은 決定的 契機였다. 1992年 그는 西部地區 優勝과 더불어 올해의 監督賞을 3番째로 受賞했다. 하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末年 時節 그의 成績은 좋지 않았다. 라루사 式의 불펜陣 運營에 對한 非難이 쏟아지는 가운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球團主導 바뀌었다. 結局 그는 1996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監督으로 移籍한다.

    드라마 같은 優勝, 드라마 같은 退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美國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 다음으로 많은 優勝을 차지한 팀이다. 100年이 넘는 메이저리그 歷史 동안 두 자릿 數 以上의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한 팀은 양키스와 카디널스뿐이다. 하지만 1987年 以後 카디널스는 오랫동안 優勝에 목말라 있었다. 하지만 名匠의 손길은 남달랐다. 라루사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赴任 첫해인 1996年 이 팀을 地區 優勝팀으로 만들었다.

    2006年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물리치고 16年 만에 월드시리즈 優勝을 이끌었다. 포스트시즌 始作 前만 해도 카디널스 불펜은 虛弱 그 自體였다. 이에 라루사는 新銳 애덤 웨인라이트를 마무리로 配置하는 決斷을 내렸고, 웨인라이트의 커브는 수많은 强打者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무리의 安定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다른 불펜 投手들까지 덩달아 힘을 내기 始作했다. 當時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포스트시즌에 턱걸이로 겨우 進出했기에 여러 專門家는 세인트루이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豫想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뉴욕 메츠를 7次戰 勝負 끝에 꺾었다. 디트로이트와 만난 월드시리즈에서도 豫想을 깨고 5次戰에서 끝내, 歷代 正規시즌 最小 勝數 월드시리즈 優勝 팀이 됐다.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當時 세인트루이스 球團은 라루사 監督에게 選手 管理에 對해 全權을 委任했다. 그래서 選手들이 조금이라도 突出 行動을 보여 라루사 監督 눈 밖에 나면, 그 選手는 거의 大部分 트레이드 對象이 됐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못지않은 그의 全盛期가 다시 到來한 셈이다. 自身의 두 番째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한 直後 라루사 監督은 세인트루이스의 10番째 월드시리즈 優勝을 自身보다 먼저 兩大 리그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優勝한 고(故) 스파키 앤더슨 監督에게 獻呈한다고 밝혔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세 番째로 월드시리즈에서 優勝한 올해 亦是 2006年의 行步와 비슷한 點이 많다. 시즌 初만 해도 野球 專門家들은 세인트루이스를 弱體 팀으로 評價했다. 크리스 카펜터와 함께 팀의 主軸을 맡았던 에이스 投手 애덤 웨인라이트가 팔꿈치에 토미존 서저리 手術을 받고 戰力에서 離脫한데다, 다른 팀과 달리 戰力 補强도 거의 없었다. 시즌 開幕 直前 스포츠專門 케이블 放送 ESPN이 專門家들을 對象으로 實施한 投票에서 세인트루이스의 優勝을 점친 專門家는 거의 없었다. 實際 8月 前까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成跡은 리그 中下位圈에 머물렀다.

    하지만 여름 以後 事情이 달라졌다. 7月 末 세인트루이스는 그동안 팀 內 最高 有望株였지만 라루사 監督 및 마크 맥과이어 打擊코치와 줄곧 不和를 빚은 外野手 콜비 라스무스를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보내버렸다. 代身 에드윈 잭슨, 옥타비오 度텔, 마크 렙親스키를 받는 트레이드를 斷行했다. 팀 내 不和 要因이 사라지자 選手團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雰圍氣가 피어났다.

    시즌 初 不振을 면치 못하던 强打者 알버트 푸홀스度 불방망이를 휘두르기 始作했다. 9月 初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對決에서 세인트루이스의 베테랑 投手 크리스 카펜터는 밀워키의 中堅手 나이젤 모건과 神經戰을 벌였다. 모건의 지나친 세리머니에 對해 不滿을 가지고 있던 카펜터는 모건을 三振으로 잡은 後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모건에게 한마디를 했다. 이에 모건이 발끈했고, 알버트 푸홀스가 카펜터 代身 나서 모건과 衝突했다. 競技가 끝난 後 모건은 自身의 트위터에 푸홀스를 女子 이름(알베르타)으로 부르며 세인트루이스를 ‘포스트시즌에도 나가지 못하는 팀’이라고 嘲弄했다. 이는 세인트루이스 選手들의 승부욕에 불을 붙였다. 세인트루이스는 이어진 애틀랜타와의 3連戰을 싹쓸이하는 것을 始作으로 12勝2敗를 疾走했다. 結局 正規시즌 마지막 날 劇的으로 와일드카드를 따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가 가을 野球에서 훌륭한 成跡을 거둘 거라고 보는 專門家는 거의 없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만난 팀이 最强 先發陣을 保有하고 있으며 메이저리그 最多勝(102勝)을 거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필라델피아를 順順히 꺾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밀워키 브루어스度 이겼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팀은 2年 連續 월드시리즈 進出에 成功한 텍사스 레인저스였다. 월드시리즈가 始作되기 前 25名의 ESPN 專門家 中 세인트루이스의 優勝을 점친 사람은 單 4名뿐이었다. 그만큼 텍사스의 前歷은 탄탄했다. 結局 세인트루이스는 텍사스에 2勝3敗로 밀리기 始作했다. 背水의 陣을 치고 맞이한 6次戰에서 세인트루이스는 競技 直前까지 7-4로 지고 있었다. 월드시리즈 優勝컵은 完全히 텍사스의 손으로 넘어간 듯 보였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월드시리즈 敗北에 單 하나의 아웃을 남겨둔 狀況에서 2番이나 同點을 만들어내면서 6次戰을 이겼다. 그 餘勢를 몰아 7次戰도 勝利하며 월드시리즈 歷史에 남을 大逆轉勝을 만들어냈다. 戰力이 弱해 優勝이 어렵다는 專門家들의 豫想을 깼다는 點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이番 優勝은 2006年과 대단히 恰似하다.

    이番 優勝은 또한 라루사의 絶妙한 投手 運用이 다시 한 番 빛난 競技이기도 했다. 그는 勝負處에서 늘 빠른 投手交替를 斷行했고 이는 大部分 絶妙하게 맞아떨어졌다. 라루사 監督은 相對 打者가 느끼는 負擔感, 責任感의 크기를 徹底하게 計算한 불펜 運營을 했다. 그는 2011年 월드시리즈 7次戰 동안 無慮 31名의 불펜 投手를 投入했다. 競技當 平均 5名의 불펜 投手를 投入한 셈이다. 그의 存在를 世界 野球界에 다시 한 番 刻印시킨 라루사는 월드시리즈 優勝 사흘 後인 11月1日 電擊的으로 隱退를 發表했다.

    라루사 監督이 주는 敎訓

    1)助力者를 잘 活用할 줄 알아야 眞正한 리더다

    라루사 監督의 成功의 折半은 現在 메이저리그 最高 投手코치 中 한 名으로 評價받는 데이브 던컨으로부터 나온다. 라루사와 던컨은 1983年부터 28年間 呼吸을 맞추며 라루사이즘을 定立했다. 라루사 監督이 거둔 通算 2235勝 中 던컨 코치와 함께 이룬 것이 無慮 1997勝이다. 卽 라루사이즘을 考案한 사람은 라루사지만 이를 實際로 選手들에게 椄木한 사람은 바로 던컨 投手코치다.

    라루사와 던컨은 1960年代 初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마이너리그 팀에서 만났다. 遊擊手였던 라루사와 砲手였던 던컨은 둘 다 選手로는 별다른 成果를 내지 못했다. 無名의 설움을 알았기에 둘은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메이저리거가 되는 꿈을 꾸며 親하게 지냈다.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라루사보다 먼저 指導者의 길을 걸었던 던컨은 投手코치로도 別 頭角을 나타내지 못했다. 1982年 시애틀 매리너스의 投手코치로 在職했던 던컨은 年俸 引上 要求를 拒絶當하자 當時 시카고 화이트삭스 監督이던 라루사를 찾아가 自身을 써달라고 付託했다. 다음 날 라루사는 當時 시애틀 매리너스의 르네 래치맨 監督에게 諒解를 求했다. 시즌 中 다른 팀의 監督이나 코치를 迎入하려면 반드시 紳士協定을 거쳐 相對 팀의 同意를 求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달 後 던컨은 시애틀 매리너스를 떠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投手코치로 變身했다. 그 後 29年間 이 둘은 野球 시즌이면 單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라루사와 던컨 코치는 別 볼일 없는 投手를 데려다 훌륭한 불펜 投手로 改造해 뛰어난 成果를 거뒀다. 앞서 言及한 데니스 에커瑟里가 代表的이다. 또한 라루사-던컨 듀오는 라마르 호이트부터 크리스 카펜터까지 4名의 사이영賞 受賞者를 輩出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各各 4次例나 리그에서 가장 낮은 팀 平均自責點을 合作하며 마운드 運用 能力을 뽐낸 바 있다. 라루사는 세 番의 월드시리즈 優勝 直後 恒常 그 功을 던컨에게 돌렸다. 그는 “던컨은 무엇인가를 理解하고 攄得하는 데 恒常 다른 사람보다 앞서갔다. 그것이 野球든 人生이든 마찬가지였다. 우리 投手陣에 對한 모든 稱頌은 100% 던컨의 功이다”라고 稱讚했다. 던컨 또한 監督 라루사에 對한 尊敬이 대단하다. 그는 “最終 決定은 恒常 監督이 내려야 한다. 그는 한두 名의 選手가 아니라 팀員 全體가 뭉쳐야 勝利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 選手團 全體의 能力을 이끌어내는 데 그 以上의 監督은 없다”고 强調한다. 甚至於 던컨 投手코치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等 여러 메이저리그 球團에서 監督職을 提議했음에도 不拘하고 이를 拒絶했다. 라루사 밑에서 코치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는 理由에서다.

    高度의 分業化가 이뤄진 현대 野球에서 有能한 助力者가 없는 監督은 決코 成功할 수 없다. 野球團이라는 厖大한 組織을 이끌려면 한 사람의 監督만 有能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組織도 마찬가지다. 業務의 專門化, 分業化가 加速化된 現代 企業에서 훌륭한 리더는 助力者를 잘 活用할 줄 알아야 한다. 有能한 參謀를 알아보고, 그의 能力을 100% 活用하는 일이야말로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한 첫 番째 條件이다.

    2)리더는 常識 破壞者다

    라루사 監督은 데이터를 基盤으로 戰略과 戰術 運用에서 卓越한 재주를 보인 監督이다. 特히 投手와 打者 間의 相對 記錄에 따라 選手를 달리 起用해 ‘메이저리그판 김성근’으로 불리기도 한다. 잦은 投手 交替와 韓國式 벌떼野球 導入으로 큰 成果를 낸 金聲根 前 SK監督과 비슷한 點이 많기 때문이다. 金聲根 前 監督과 라루사는 놀랄 만큼 닮은 點이 많다.

    하지만 라루사는 決코 데이터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데이터를 重視하지만 그는 자주 常識을 破壞했다. 그는 “勝利하는 가장 좋은 方法은 무엇이든 바꾸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戰力을 極大化하기 위해서라면 旣存의 틀을 깨기를 躊躇하지 않고, 甚至於 自身이 創始한 라루사이즘의 基礎도 無視했다.

    2011年 시즌 初盤 마무리 投手 라이언 프랭클린이 무너지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뒷門 不安으로 苦戰했다. 確實하게 마무리를 맡을 選手가 없는 狀況에서 라루사가 꺼내 든 카드는 ‘集團 마무리’였다. 올 시즌 24세이브의 新銳 페르난도 살라스를 비롯해 제이슨 모트, 에두아르도 산체스, 미첼 보그스 等이 競技 狀況에 따라 번갈아가며 9回를 책임졌다. 이들은 때로는 8回부터 나와 種種 2이닝을 막기도 했다. 라루사는 ‘마무리 投手는 한 名이어야 한다’ ‘마무리 投手는 9回에 나온다’는 自身이 만든 固定觀念을 果敢하게 破壞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正規리그에서 마무리를 맡았던 페르난도 살라스와 ‘셋업맨’ 제이슨 모트의 補職을 맞바꾸는 變則 作戰으로 鐵壁 繼投陣을 完成하면서 5年 만의 頂上 奪還에 成功했다. 常識과 固定觀念에 얽매이지 않는 리더 라루사의 成果였다. 時時刻刻 바뀌는 21世紀 ‘超競爭’ 環境에서 企業이 살아남을 唯一한 方法은 變化다. 過去의 成功을 固執하면 亡할 때가 많다. 필름 分野에서 獨步的인 世界 1位를 固守하던 코닥이 變化된 디지털 環境을 無視하고 필름에 執着하다 밀려났지만, 萬年 2位이던 후지는 필름에서 이미지와 表面處理로 事業 領域을 轉換해 살아남았다. 卽 現代 企業이 亡하는 理由는 該當 企業의 弱點 때문이 아니라 强點 때문일 때가 많다. 바로 ‘成功의 덫(success trap)’이다. 훌륭한 리더는 自身의 組織이 지닌 强點이 變化된 環境에서 有效한지 아닌지 끊임없이 疑問을 提起할 줄 알아야 한다. 變化된 環境을 無視하고 旣存의 强點만을 固守하면 ‘成功의 덫’에 빠지기 쉽다. 리더가 常識 破壞者가 되어야 하는 理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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