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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新東亞

무라카미 하루키

죽기 살기로, 優雅하게 쓰고 달린다

  • 전원경│週刊東亞 客員記者 winniejeon@hotmail.com│

    入力 2009-07-02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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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을 넘어 世界的인 名聲을 얻은 作家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小說이 담고 있는 異國的인 雰圍氣와 더불어 ‘쿨’韓 男子의 이미지를 지녔다. 그러나 그의 實際 삶은 完璧하게 짜인 計劃과 例外 없는 原則으로 鍛鍊되어 있다. ‘機械에 다져지는 쇠고기 같은 삶’을 豪華롭게 유럽 旅行하듯 살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毒種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br>● 1949年 日本 교토 出生<br>● 1968年 와세다大 演劇部 入學<br>● 1974年 도쿄 교쿠분지에 재즈바 ‘피터 캣’ 開業<br>● 1975年 와세다大 卒業<br>● 1979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新人文學賞 <br>● 1982年 첫 長篇‘羊을 둘러싼 冒險’으로 노마文藝新人賞 <br>● 1987年 ‘노르웨이의 숲’ 出刊<br>● 1988年 ‘댄스 댄스 댄스’ 出刊<br>● 1992年 ‘國境의 南쪽, 太陽의 西쪽’ 出刊<br>● 1999年 ‘스푸트니크의 戀人’ 出刊<br>● 2000年 ‘神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出刊<br>● 2002年 ‘海邊의 카프카’ 出刊<br>● 2005年 ‘어둠의 저便’ 出刊<br>● 2006年 프란츠 카프카上 受賞<br>● 2009年 예루살렘上 受賞

    우리나라에서 노벨文學賞에 가장 近接해 있는 作家가 고은이라면, 日本 作家 中에서 노벨文學賞 受賞이 가장 有力視되는 作家는 무라카미 하루키(60)다. 하루키는 2006年 노벨文學賞 受賞者들이 으레 거쳐 가는 프란츠 카프카賞을 受賞함으로써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에 이은 세 番째 노벨文學賞 受賞’에 對한 日本人의 期待感을 限껏 높였다. 實際로 2006年 11月 “하루키가 노벨文學賞 受賞者로 選定됐다”는 誤報가 흘러나와 暫時나마 日本을 들뜨게 한 적도 있다. 노벨賞이 가진 政治的 含意를 考慮해볼 때, 1994年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文學賞 受賞에 이어 다시금 日本 作家의 首相이 成事될지 不透明하긴 하지만, 하루키가 世界的인 聲價를 올리고 있는 作家라는 點에 對해서는 疑問의 餘地가 없다.

    世界的 作家 班列

    우리나라에서 하루키의 人氣가 絶頂에 達했던 때는 1990年代 初盤이다. 그의 代表作 ‘노르웨이의 숲’이 ‘喪失의 時代’라는 題目으로 飜譯 出刊된 以來, 1990年을 전후해 ‘하루키 신드롬’이라 할 만큼 많은 作品이 앞 다퉈 出刊됐다. 아마도 1980年代 後半부터 1990年代 中盤까지 大學을 다닌 世代는 大部分 하루키의 小說 한두 卷쯤은 읽었을 것이다. 하루키의 人氣는 日本과 韓國에만 局限하지 않는다. 그의 小說들이 이미 英語 프랑스語 러시아語 中國語 等 40個國 言語로 飜譯됐고, 長篇 ‘海邊의 카프카’는 2005年 ‘뉴욕타임스’가 選定한 ‘올해의 小說 10線’에 들었다. 2007年 美國에서 飜譯 出刊된 ‘어둠의 저便’ 亦是‘올해의 注目할 만한 冊’에 選定됐다. 個人的으로는 2004年 獨逸 프랑크푸르트 國際圖書博覽會에 갔다가 博覽會 中央 부스에 하루키 코너가 別途로 크게 設置된 것을 보고 놀란 記憶이 있다. 나딘 고디머, 샐먼 루시디 等과 나란히 設置된 하루키 코너를 보며 그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世界的인 作家 班列에 올랐음을 새삼 實感했다.

    올해 初 하루키는 東洋人으로는 最初로 ‘예루살렘賞’을 受賞했다. 社會와 人間 問題에 對해 뛰어난 視角을 보여주는 作家에게 주어지는 賞이다. 그는 2月 이스라엘에서 열린 施賞式에서 “모든 人間은 所重한 靈魂을 가진 存在들이다. (國家) 시스템이 이 靈魂을 破壞할 權利는 없다”며 이스라엘의 하마스 爆擊을 非難했다. 매스컴의 注目을 꺼리는 그로서는 異例的인 일이었다.

    獨特한 生活方式



    小說 못지않게 많이 飜譯된 그의 에세이들을 보면, 이 作家의 生活方式이 좀 特異하다는 印象을 받는다. 于先 그는 아이가 없다. 그런 까닭에 서른 살에 作家가 된 以來 30年 동안 育兒나 敎育 問題에 치이지 않고 오로지 作品에만 集中할 수 있었다. 또한 作品을 쓰기 爲해 海外에 滯留하는 境遇가 많다.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썼고, ‘胎葉 감는 새’와 ‘國境의 南쪽, 太陽의 西쪽’은 4年間 美國 보스턴에 살면서 썼다. 要컨대 重要한 作品은 늘 外國에 나가서 쓴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日本은 韓國 못지않게 對人關係 그물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社會이고, 더구나 하루키 程度의 有名稅라면 찾는 이도 많을 게 뻔하다. 아마도 作家는 複雜하게 얽힌 人間關係의 고리에서 벗어나 作品에만 集中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잦은 海外滯留 經驗 德에 하루키의 作品에는 어딘지 모르게 異國的인, 그리고 若干은 憂鬱한 그림자가 宿命처럼 드리워져 있다.

    海外에 나가면 하루키의 生活은 極度로 單純해진다. 每日 午前 5時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낮에는 재즈를 들으며 글을 쓰거나 飜譯을 하고, 저녁에는 麥酒를 마시거나 펍(Pub·술집)에 가고, 밤 10時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그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習慣을 徹底히 固守한다. 이 때문에 좋아하는 재즈나 클래식 콘서트를 놓치는 일이 許多하다고 한다. 이러한 生活習慣 德分에 한 篇의 長篇을 脫稿하면 長篇을 쓸 當時의 海外滯留 經驗을 담은 에세이集이 附錄처럼 出刊돼 나온다. 그의 에세이나 旅行記들은 하루키 特有의 ‘쿨’韓 文體로 小說 못지않은 人氣를 누린다.

    海外에 오래 머물면 言語 問題로 힘들지 않을까? 하루키는 海外에 나갈 때마다 그 나라 말을 조금씩 배운다고 한다. 그리스로 떠나기 前 大學 附設 語學院에서 두 달間 그리스어를 배우는 式이다. 또한 英語로 講演할 程度의 英語實力을 가지고 있어 어느 나라에 가든 그럭저럭 意思疏通이 된다. 아무튼 小說 쓰는 것도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고, 海外에서 지내는 것도 즐기는 듯한 하루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福 받은 人生이 또 있을까 싶다.

    하루키는 機會가 될 때마다 自身의 ‘쿨’함을 慇懃히 誇示하곤 한다. 言論이나 大衆 앞에 드러나기를 썩 즐기지 않는 그가 自身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들려주는 것은 大部分 그의 에세이集을 통해서다. 글로 表現되는 海外生活은 하나같이 近似하기 짝이 없다. 例를 들면 이런 式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는 小說뿐만 아니라 에세이로도 큰 人氣를 누리고 있다.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 滯在하고 있는 동안은 傳혀라고 해도 無妨하리만큼 新聞을 읽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海邊으로 나가 日光浴을 하고 市街地를 散策하거나 아니면 베란다에 앉아서 하루 終日 冊을 읽었다. ‘감정교육’이나 ‘薔薇의 이름’ 等 가지고 온 冊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런 生活을 하고 있으면 新聞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 世界는 世界 제멋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두면 되지 싶은 氣分에 젖는 것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旅行 에세이 ‘먼 북소리’ 中

    ‘午後 4時쯤에는 目的地에 到着해서 宿所에 들고 싶다. 샤워를 하고 忽然히 近處에 있는 펍으로 들어선다. 食事 前에 먼저 黑麥酒 1파인트를 마실 必要가 있다. …맛있는 麥酒를 마시고 暫時 쉰 다음, 하릴없이 洞네를 散策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괜찮은 레스토랑을 物色한다. 슬슬 배도 고파온다. 旅行에서 가장 즐거운 한때다. 6時 半쯤 되면 그럴듯한 食堂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받아들고는 자, 그럼 무얼 먹지, 하고 檢討에 들어간다.’ - 스코틀랜드·아일랜드 旅行記 ‘위스키 聖地旅行’ 中

    小說家로 데뷔할 때부터 그는 運이 좋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1978年 4月1日 午後 1時 半 전후해서 小說家가 되기로 決心했다고 한다. 혼자 野球場에서 競技를 구경하고 있다가 갑자기 ‘小說을 써야지’하고 決心했다는 것이다. 當時 하루키는 와세다大 時節(하루키는 이 大學 演劇科에 入學했다가 學院事態로 除籍, 復學을 거쳐 7年 만에 卒業했다) 만난 요코와 일찍 結婚해 재즈바 ‘피터 캣’을 經營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글이라고는 ‘稅金申告 書類와 簡單한 便紙 程度를 쓴 것이 全部’였던 그는 그 길로 原稿紙 한 뭉치와 萬年筆을 사들고 와 가을까지 原稿紙 400枚 程度의 中篇을 썼다. 그의 첫 小說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하루키는 이 作品으로 군조新人文學賞을 受賞하며 作家로 첫발을 내디뎠다.

    無心코, 運命的으로

    野球 競技를 구경하다 小說家가 되기로 決心하고, 첫 小說로 新人賞을 탔다는 그의 回顧는 “學校 工夫만 熱心히 하고 學院은 안 다녔어요”하는 名門大 首席合格者들의 所感처럼 어이없게 들린다. 아마도 그는 “나는 努力하거나 奮鬪夏至 않고 運命의 힘에 이끌려 小說家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키의 父母는 日本文學을 가르치는 敎師였고, 그는 成長하면서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美國文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바쁜 日常을 살았다 해도 “稅金申告 書類 外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건 誇張이 아닐까 싶다. 要컨대 ‘小說을 쓰고 싶다’는 欲望이 그의 無意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 瞬間 툭 하고 意識 表面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아무튼 첫 小說을 쓸 當時만 해도 하루키는 自身이 作家로 살아갈 運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싶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新人賞 公募에 投稿할 當時 原稿紙에 萬年筆로 쓴 小說의 複寫本조차 만들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떨어지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自信滿滿함, 或은 무심함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新人賞 受賞作으로 決定되고, 이듬해 여름 單行本으로 出刊됐다.

    ‘1973年의 핀볼’ ‘羊을 쫓는 冒險’두 篇의 小說을 더 脫稿한 뒤에, 하루키는 7年間 運營하던 ‘피터 캣’을 닫고 專業 作家가 됐다. 午前 5時에 일어나 밤 10時면 잠자리에 드는 規則的인 生活도 이때부터 始作됐다. 專業 作家가 된 뒤로 1年에 한 卷꼴로 誠實하게 小說을 써나갔다. 그리고 1987年, 비틀스의 노래에서 題目을 딴 長篇 ‘노르웨이의 숲’으로 1年 만에 430萬部의 販賣高를 올리며 一躍 日本을 代表하는 作家로 떠올랐다. 그 後 펼쳐진 하루키의 삶은 앞서 言及한 대로다. 그리스 미코노스, 이탈리아 로마, 英國 런던, 美國 보스턴과 프린스턴 等 이름조차 멋진 海外 都市들에 번갈아 滯留하며 作品을 쓴다. 2003年 出刊된 長篇 ‘海邊의 카프카’는 그의 名聲을 한層 더 끌어올렸다. 이 小說의 出刊을 전후해 하루키는 有力한 노벨文學賞 候補로 擧論되기 始作했다.

    讀者 中 몇몇은 “人生 참 近似하구나!”하며 긴 한숨을 내뱉을지 모른다. 그 또래의 男子 大部分의 삶은 여기에 비할 바 없이 고달프고 빡빡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出勤 準備를 하고, 滿員 電鐵에 시달리며 가까스로 職場에 닿으면, 別般 重要하지도 않은 會議와 上司의 얼토당토않은 業務 指示, 部下職員의 어깃장이 기다리고 있다. 調味料로 범벅된 點心食事로 위를 채우고, 午後 業務時間을 버텨내면 내키지 않는 술자리가 이어진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사는 게 왜 이리 고달픈가 하는 恨歎이 절로 새어나온다. 이게 普通 中年 男子 大部分이 겪는 日常이다. 그러니 조깅하고 글 쓰고 音樂 듣고 外國 旅行하는 하루키의 삶은 天國, 아니 天國 그 以上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專業小說家 된 뒤 마라톤으로 體力을 鍛鍊해온 하루키.

    果然 그럴까? 하루키는 아무 어려움 없이, 그저 ‘쿨’하게 人生을 즐기는 것일까? 勿論 그럴 理 없다. 結論부터 말하자면 하루키는 다만 ‘쿨’韓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人生은 새벽에 일어나 滿員 地下鐵에 시달리며 고달픈 出勤을 하고 밤늦게까지 술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普通 男子의 日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가는 方式 自體는 다르지만, 고달픔의 强度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아 보인다.

    하루키는 自身의 職業, 卽 글쓰기에 相當히 嚴格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午前 中에는 小說을 쓰며 到底히 小說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에세이를 쓰거나 飜譯을 한다. 마감을 徹底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언제나 마감 이틀 前에 모든 原稿를 끝마쳐야 直星이 풀린다고 한다.

    하루키가 글을 쓰기 前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 하루키는 每日 새벽 10km를 달린다. 日本에서나 外國에서나 마찬가지다. 그가 뛰는 理由는 簡單하다. 長篇小說을 쓸 때 體力이 枯渴되는 걸 막기 爲해서다. 그의 말에 따르면 長篇은 한두 달 이 아니라 1年 以上 꾸준히 글을 써야 하는 作業이고, 그 作業의 强度는 窮極的으로 肉體勞動에 가깝다. 그가 처음 뛰기 始作한 것은 재즈 바를 접고 專業小說家의 길로 들어선 서른세 살 때다. 갑자기 小說쓰기에 매달리니 살이 急激하게 찌고, 吸煙마저 늘어 運動을 始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狀況에서 本質的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이기고 지는 데 크게 戀戀하지 않는” 그의 性格에 달리기가 適格이었다.

    至毒한 原則主義者

    하루키는 달리기를 하게 된 理由에 對해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은 人間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을 통해서만, 그리고 손에 닿는 材料를 통해야만 事物을 明確하게 認識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謙遜하게 말한다. 달리기 實力에 對해서는 그저 一般的인 러너(runner) 水準이라는 式으로 대수롭잖게 말한다.

    그러나 事實은 그렇지 않다. 하루키는 마라톤 풀코스를 25番 完走했다. 每日 10km씩 뛰면 한 달에 300km는 足히 뛴다는 計算이 나온다. 바쁘다거나 아프다는 핑계로 뛰지 않은 날이 없다. “바쁘다는 理由만으로 달리는 練習을 中止한다면 틀림없이 平生 동안 달릴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頑固하게 每日 아침 달리기에 나선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 終日 100km를 뛰는 울트라마라톤에 挑戰해 完走한 記錄도 있다. 最近에는 水營-사이클-마라톤으로 이어지는 트라이애슬론 競技에 每年 出戰하고 있다. 이 程度라면 單純히 趣味랄 수 없다. 末路는 “뛰는 것이 손쉽기 때문에 뛰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달리기에 對한 그의 熱意는 單純한 愛情을 뛰어넘은 執念의 水準이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參加한 經驗을 들려준다. 1996年 6月23日, 日本 홋카이도에서 열린 이 競技는 廣大한 四로마 湖水 周圍를 한 바퀴 도는 코스였다. 이 競技에 參加하기 前까지 하루키는 마라톤 풀코스(42.195km)보다 먼 距離를 달려본 經驗이 없었다. 그런데 그 보다 두 倍 以上 긴 코스를 뛰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루키의 나이 마흔일곱 살 때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55km 支店에서 中間休息韓 以後 다리가 痲痹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55km 休息支店에서 75km까지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느슨하게 돌아가는 肉類 다지는 機械 속을 通過하는 쇠고기와 같은 氣分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意識은 있지만, 몸 全體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苦痛의 터널을 지난 셈이다.

    그럼에도 棄權하지 않았다. 아니, 걷지도 않았다. 그는 苦痛을 느끼지 못하는 機械라고 自身을 세뇌시키며 機械的으로 뛰었다. “무리해서 繼續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程度 걷는 쪽이 賢明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走者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番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參加한 게 아니다. 달리기 위해 參加한 것이다. 아무리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規則이다. 萬若 自身이 定한 規則을 한 番이라도 깨뜨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規則을 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完走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至毒한 頑固함, 絶對 自己 自身을 속이지 않는 眞實性. 하루키에게는 그런 固執이 있다. 그리고 그 固執으로 痲痹된 몸을 움직여 11時間을 뛰었다.

    脫稿할 때까지 죽을 수 없다

    그는 結局 出發한 지 11時間42分 만에 100km를 完走한다. 80km를 넘어서면서부터는 疲勞와 苦痛은 勿論이고, 完走해야 한다는 意識마저 사라졌다. “肉體的인 苦痛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只今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異常한 氣分이었지만, 나는 그 異常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狀態였다.”

    아마도 하루키가 스스로에게 要求하는 嚴格함, 러너로서의 固執은 作家로서의 嚴格함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루키는 小說 쓰는 것이 어렵다거나, 뼈를 깎는 勞動이라거나 하는 表現을 쓰지 않는다. 그는 自身의 小說 쓰기에 對해 “풀숲 속의 토끼를 쫓듯 나의 本能을 쫓아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디어가 퐁 튀어나온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꽉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小說을 쓰는 祕訣이 아닐까 싶다”라고 ‘쿨’하게 말한다. 그러나 實狀 그의 作業은 決코 ‘쿨’하거나 나이브하지 않을 것이다. 苦痛을 견디는 段階를 넘어 窮極的으로 苦痛을 느끼지 못하는 瞬間까지 抛棄하지 않고 쓰는 것, 그것이 하루키가 決코 自身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 創作의 祕訣임이 분명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와세다大 時節 만난 요코(寫眞 왼쪽)와 일찍 結婚했다.

    20餘 年 전 ‘먼 북소리’를 쓸 當時 그는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 主로 滯留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섬사람들은 멀고 먼 東洋의 섬나라에서 온 作家를 神奇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그를 붙잡고 自己 집에 가서 羽調(그리스山 독한 葡萄酒)를 마시고 가라고 勸하는가 하면, 바다에서 잡은 生鮮을 굽기 좋게 손수 다듬어주기도 한다. 하루키는 조깅을 하던 中 큰 개에게 쫓기기도 하고, 갑자기 쏟아진 暴雨에 집안이 물바다가 되어버리는 等 갖가지 웃지 못할 經驗도 한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奇奇妙妙한 生活을 즐기기 위해 外國에 머문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그는 繼續 作品을 쓰고 있었다. 事實上 하루키의 生活리듬은 小說을 쓰는 데 맞춰져 있었다. 그는 마음속 本能이 長篇을 쓰고 싶다는 衝動으로 가득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以上 참을 수 없는 地境이 됐을 때 戰鬪에 나서는 劍鬪士처럼 決然히 小說에 달려들었다. 30代 後半인 하루키의 목소리는 只今보다 한層 더 切迫하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이 小說이 다 끝나기 前에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悲壯하게 말한다.

    어느 날 밤, 하루키는 새벽 3時50分에 미코노스의 서머 하우스에서 잠이 깬다. 避暑철이 지난 미코노스는 썰렁하기 그지없고 서머 하우스는 여름에만 쓰는 집답게 暖房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異國의 風景을 내다보면서 ‘라스트 타이쿤’을 쓰다가 쓰러져 죽은 스콧 피츠제럴드를 생각한다.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消滅이다. 아무도 그것을 復元할 수 없다.” 그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가 願하는 것은 永遠한 生이 아니며 不滅의 傑作도 아니다. 내가 願하는 것은 이 現在의 일이다. 이 小說을 다 쓸 때까지만 어떻게든 살아 있게 해달라는, 但只 그것뿐이다.” 이토록 힘들게 써내려간 小說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다. 이 小說은 2002年까지 日本에서 通算 780餘萬部가 팔리며, 歷代 日本 小說 販賣量 2位 記錄을 세웠다.

    ‘作家 그리고 러너’

    프랑스의 印象派 畫家 클로드 모네는 自身을 紹介할 때 ‘畫家 兼 庭園師’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네는 畫家로서 인정받은 後 파리 近郊 지베르니에 집을 샀고, 이 집에 딸린 庭園을 가꾸는 데 心血을 기울였다. 모네의 後期 作品 大多數는 지베르니의 庭園과 蓮못을 그린 繪畫다. 모네가 他界한 只今 지베르니의 집은 모네記念館이 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庭園을 보기 위해 이 집을 찾는 觀光客이 적지 않다. 畫家에게 庭園 가꾸기와 그림 그리기는 窮極的으로 하나의 길이었던 셈이다.

    하루키는 自身의 墓碑銘에 ‘作家 그리고 러너’라고 쓰고 싶다고 말한다. 畫家이자 庭園師였던 모네처럼, 달리기는 그에게 ‘小說 쓰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50臺를 넘어서면서 마라톤 記錄이 漸次 떨어지자 하루키는 種目을 바꾸어 트라이애슬론에 挑戰했다. 그는 60歲가 된 現在도 여름에는 트라이애슬론을, 겨울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自身만의 룰을 지켜가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規則이라기보다 하나의 意識으로 보인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달리기가) 50代 後半을 맞이한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뭔가를 의미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別로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를 깊은 意味가 內包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只今은 뭐가 어찌 됐든, 그저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그 意味에 對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마치 作家의 30年 小說 쓰기에 對한 迂廻的 告白처럼 들린다.

    처음 뛰기 始作한 서른세 살에 20~30分도 繼續해서 뛸 수 없었던 男子가 15年 뒤 100km를 쉬지 않고 뛰게 된 것처럼, 作家 하루키는 그런 嚴格함과 眞摯함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다. “作家가 되기 위해 才能은 當然히 必要한 前提條件이다. 그 다음으로 作家가 되기 위해 必要한 事項은 集中力과 持續力이다. 그 集中力과 持續力을 나는 달리기를 통해 배웠다.” 때로는 러닝슈즈를 신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까지 그는 어떤 레이스도 中間에 抛棄하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앞으로도 기죽지 않고 熱心히 마라톤 풀코스를 繼續 달릴 것”이라고 다짐한다.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을 쓴 지 15年 만에 다시 ‘海邊의 카프카’라는 빅 히트作을 내놓은 事實에 注目할 必要가 있다. 大部分의 作家나 藝術家에게는 ‘全盛期’라는 게 있다. 뛰어난 作品을 샘솟듯 創作해내는 時期가 한番 지나가면, 그 創作의 샘은 枯渴되게 마련이다. 더 以上 令監은 솟아오르지 않고, 文章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悲劇的인 事實은 이 作家의 全盛期가 大槪 젊은 時節에 온다는 것이다. 젊음의 衰落과 함께 全盛期가 끝나면 ‘强速球 投手의 球速이 漸漸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理致로’ 作品은 徐徐히 그 鮮明度와 光輝를 잃어간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作家가 한때 自身의 손에서 誕生한 傑作의 後光에 기대어, 더는 그만한 作品을 쓸 수 없다는 現實을 괴롭게 堪耐하며 남은 生을 살아간다. 버지니아 울프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괴로움을 넘어서지 못하고 自殺로 生을 마감했다.

    集中力과 持續力의 힘

    그러나 하루키는 첫 小說을 出刊한 지 23年 만인 2002年, ‘海邊의 카프카’로 ‘노르웨이의 숲’을 넘어서는 成功을 거둔다.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豫言에 쫓기는 열다섯 살 少年과 그를 지켜보는 老人의 엇갈린 視線을 다룬 포스트모던한 이 作品에 對해 日本의 評論家들은 “마침내 日本文學이 世界的인 水準에 到達했다”(평론가 가토 노리히로)고 感激했으며, 英國 日刊紙 ‘가디언’은 “하루키는 全 世界的으로 가장 뛰어난 生存 作家 中 한 사람”이라는 讚辭를 퍼부었다. 이 冊을 2005年 ‘올해의 小說 10線’ 中 하나로 選定한 ‘뉴욕타임스’ 亦是 “作家의 힘찬 筆致가 느껴지는 優雅하고도 理智的인 作品”이라고 極讚했다.

    이것이 바로 ‘集中力과 持續力’의 힘 아닐까.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이끌며 달리고, 온몸이 아우성치며 呼訴하는 苦痛을 참아내며, 마침내 달려야 한다는 意識조차 없이 달린 것처럼, 하루키는 自身의 平凡한(그 自身의 表現대로라면) 才能을 끈질긴 集中力과 持續力으로 支撐하며 作家로서의 삶을 견뎌온 것이다. 아니, 다만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발자국씩 能力을 硏磨해오다 壯年을 넘어서서 비로소 自身의 깊숙한 어딘가에 묻혀 있던 참된 才能의 鑛脈을 만난 것이다. ‘海邊의 카프카’는 作家의 頑固한 근면함이 이루어낸 빛나는 成果다. ‘海邊의 카프카’를 썼을 當時 하루키의 나이는 52歲였고 달리기를 始作한 지는 19年째였다.

    結局 이 男子의 ‘쿨’함은 眞正한 ‘쿨’함이 아니다. 그는 그저 ‘쿨’韓 척하고 있을 뿐이다. 탄탄한 몸과 感情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가진 이 男子는 事實 專心專力으로, 自身의 모든 靈魂과 肉體를 動員해 小說 쓰기에 邁進하는 것이다. 그는 이 過程이 힘들거나 苦痛스럽다고 엄살 부리지 않는다. 그는 다만 “本質的인 것에 對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素朴하고 雅淡한 空白 속을, 정겨운 沈默 속을 그저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달리는 것이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다시 한 番 ‘쿨’韓 척한다.

    그의 冊을 읽는 讀者는 안다. 그에게 삶은 끝없이 繼續되는 電力疾走만큼 힘들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마라톤의 意義, 卽 “하나하나의 決勝點을 내 다리로 確實하게 完走해나가는 것, 渾身의 힘을 다했다고 나 나름대로 納得하는 것”李 실은 小說을 對하는 하루키의 姿勢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는 이 程度로 眞摯하게, 이 程度로 戰力을 다해 살아본 적이 있는가” 하는 괴로운 質問이 읽는 이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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