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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惡女’ 최지희|新東亞

‘아름다운 惡女’ 최지희

“구름 속에서 잠자는 女子, 그게 내 人生인지도 몰라요”

  • 글: 심영섭 映畫評論家 chinablue9@hanmail.net

    入力 2003-12-29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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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담배를 피우는 女子였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는 女子였다. 그는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愛人에게 性깔 있는 발길질을 할 수 있는 女子였다. 女俳優를 肉體와 사이즈로 裁斷하기 始作한 1950年代, 敢히 섹시하다는 말조차 수줍어 野性女라느니 大膽하다느니 하는 修飾語로 裝飾되던 그 女子 최지희는 韓國 映畫에서는 보기 드문 도회적 이미지와 官能美를 同時에 갖춘 俳優였다.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같은 時代의 글래머 스타 김혜정이 豐滿한 에로티시즘으로 스크린을 휘어잡았다면, 최지희는 挑發的이고 反抗的인 感受性으로 1960年代 靑春들의 欲望을 代辯하는 스타였다. 間或 엄앵란이나 최은희 같은 女俳優들이 潑剌한 女大生 或은 官能美 넘치는 惡女의 役割을 하다가도 금세 淸純 可憐型의 女人으로 돌아와 時代의 부름을 따랐지만 최지희만은 달랐다. 그는 끝끝내 能動性과 不良함이 混合되어 內在된 에너지를 억눌린 女性性과 맞바꾸지 않았고, 그 力動性 때문에 結局 액션과 코미디 같은 장르의 映畫로 俳優의 삶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의 電擊的인 隱退過程은 한 時代가 한 女性의 섹슈얼리티를 堪當하지 못했을 때 어떤 結果가 나타나는지를 그려낸 完璧한 脚本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지희가 사라진 1970年代 初盤 以後 韓國 映畫의 全盛期 또한 幕을 내렸다. 어찌 되었든 호스티스 映畫에 나오는 최지희를 想像할 수는 없지 않은가.

    映畫史的으로 볼 때 최지희의 登場은 엄앵란, 최은희, 조미령 等 東洋的 外貌와 古典的인 아름다움을 지닌 女俳優들의 代를 이어, 1970年代 本格的으로 登場할 유지인이나 윤정희 같은 西歐型의 知的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美人의 全盛時代를 알리는 信號彈이기도 했다. 그런 面에서 최지희는 무엇보다도 ‘모던 걸’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刻印시킨 女俳優다. 1964年 作 이형표 監督의 ‘戀愛 卒業班’에서 그는 當時의 女性들에게는 거의 不可能한 職業인 女子 飛行士로 나왔는가 하면, 以後 수많은 코미디物에서 女子 택시 運轉士, 말띠 女大生 같은 主體的이고 堂堂한 女性像을 演技해왔다.

    自身의 演技生活 中 가장 好演한 것으로 評價받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前近代的 結婚制度에 犧牲당한 셋째딸 慵懶으로 扮한 그는 그해 映畫賞을 모조리 휩쓴다. 머슴 愛人이 죽자 狂氣에 휩싸여 죽음으로 빠져드는 悲劇의 主人公 慵懶은, 그의 글래머러스韓 肉體와 挑發的인 精神에 깃든 時代와의 不和를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配役이기도 했다.

    以後 ‘西洋的 價値觀을 習得한 自由奔放하면서도 情熱的인 女人’이라는 최지희의 이미지는, 1970年代 映畫界 컴백 以後 액션 장르에 吸收되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드세고 불량스러운 陰地의 女性’으로 安着한다. 結局 1973年 疲弊해진 映畫판의 現實과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의 물결에 밀려 隱退하게 되지만, 최지희의 旅程은 以後로도 통큰 女丈夫 事業家로 繼續되었다.



    韓國의 브리지트 바르도, 韓國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로 불렸던 아름다운 惡女 최지희. 그의 登場은 1960年代 韓國 映畫의 全盛期에 무척이나 다양한 女性像이 스크린에서 消化되었으며, 當時 韓國 社會가 女性의 邪惡함을 公開的으로 아름답다고 禮讚하는 大膽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立證하는 짧고도 빛나는 證據다. 只今 와서 돌이켜보면 以後 徹底한 軍事文化의 壓力으로 호스티스, 버스 次長, 公園 같은 都市 周邊部 女性에게 犧牲을 强要하고 情緖的으로 搾取하는 映畫만이 충무로를 이끌던 時節, 平生 女俳優로 남겠다던 이빈화, 남미리, 김혜정, 전계현, 태현실, 최난경 等의 ‘탐스러운 美人’들은 스크린에서 죄다 사라졌다. 그러한 面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나 그레타 가르보가 그러했듯, 최지희 亦是 時代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時代를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오로지 가난 때문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제가 열다섯 살 때부터 社會生活을 해왔는데 3年 前쯤에 모든 것을 中斷하고 現場을 떠났어요. 요즘 하는 일은 앉아서 企劃하고 調律하는 일이에요. 錄音室度 하나 갖고 있고요. 예전에 비하면 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보니 亦是 現場에서 뛰는 게 좋구나, 일을 좇는 게 훨씬 幸福하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現役 時節 최지희氏는 野性的이고 反抗的인 女性 役割을 많이 했습니다. 첫 映畫 題目 또한 이와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惡女’여서 以後 이 말이 修飾語처럼 따라다녔는데요.

    “그렇죠. ‘아름다운 惡女’라는 映畫로 데뷔할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率直히 映畫俳優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生活苦 때문이었어요. 映畫를 하면 밥은 먹여주니까요. 事實 그때는 映畫가 뭔지도 잘 몰랐죠.”

    -어떻게 픽업되신 거예요? 다른 俳優들처럼 登校길에 만나셨나요, 아니면 所聞을 듣고 學校로 찾아왔던가요?

    “率直히 저는 學校工夫도 別로 못했고, 釜山女高는 들어갔다가 中途에 그만두었어요. 그때는 月謝金 안 갖다주면 學校 못 가던 時節이잖아요. 代身 돈 많은 富者집 딸인 親舊 德에 舞踊學校로 옮겼죠. 父母님이 藥局을 하는 親舊였는데 저보고 ‘내가 돈을 댈 테니 같이 舞踊을 배우자’고 하더라고요. 舞踊을 배우면 樂團에 舞踊手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죠.

    舞踊學校에 다니는 동안 어느 劇團에 둘이 찾아가서 겨우겨우 入團을 했는데 그만 劇團이 亡해 旅館에 붙들린 거예요. 團長님이 돈 가지고 올 때까지 團員들이 全部 旅館에 그냥 머물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거기서 ‘山賊의 딸’이라는 映畫를 찍고 있던 윤애남 監督님의 女同生을 알게 됐어요. 그 女同生이 ‘山賊의 딸’ 主演이었거든요.

    그 俳優를 ‘언니 언니’ 하면서 恰似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 언니의 祕書가 돼 있었죠. 어느 날 그 언니를 따라 서울의 ‘銀河水’라는 다방-當時에는 그 茶房이 演藝界 人士들이 모이는 場所였거든요-구경을 갔다가 마침 俳優를 찾고 있던 企劃者를 만났어요. 그 映畫가 1956年에 김일해 監督님이 만든 ‘人傑 洪吉童’이라는 映畫였어요. 황해남氏랑 내가 스카우트되어 함께 出演하게 됐어요. 映畫는 한番보지도 못했는데 덜컥 데뷔하게 된 셈이죠.

    저를 픽업한 製作者 최남용氏가 저에게는 養아버지나 마찬가지예요. 그때는 監督보다 製作者가 더 힘이 있는 時節이었어요. 서울에 올라왔는데 갈 데가 없으니까 그분 집에서 起居했죠. 딸이 없어서 저를 딸같이 생각하셨어요. 이만큼 길러 두 갈래로 땋고 다니던 머리도 美粧院에 데려가 자르고는 난生 처음 파마도 시켜줬지요. 이름도 그분이 지어주셨고요.”

    -그래서 藝名의 性이 崔氏가 된 거군요.

    “그래서 최지희예요. 예전에 최지혜氏라는 女俳優가 계셨는데 내가 그분과 닮았대요. 그때 최지혜氏는 이미 美軍 公報官하고 結婚해서 美國에 간 뒤였거든요. 저를 스카우트한 그 製作者가 그분을 참 좋아했었나 봐요.

    그렇게 ‘人傑 洪吉童’을 찍는 途中에 ‘아름다운 惡女’에 픽업이 됐어요. 映畫界에 나오자마자 겹치기 撮影을 하게 된 거죠.”

    -이 映畫에서 맡은 役割이 畫家를 사랑하는 娼女 아니었던가요?

    “娼女는 아니고 소매치기였어요. 깡牌들이 戰爭孤兒 少女를 데려다가 소매치기 敎育을 시킨 거죠. 첫 場面이 화신百貨店에서 紙匣을 훔치는 場面인데, 그걸 이 畫家가 봐요. 그래서 파고다公園에 데리고 가서 ‘너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죠. 그러다 그 畫家가 사는 南山의 아파트에 같이 가는데, 이 少女가 ‘아, 알았다. 當身이 나를 집에까지 데려온 理由를 알겠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옷을 막 벗죠. 그때만 해도 映畫에서 그런 場面이 흔치 않은 時節이었거든요. 그 畫家와 청계천 覆蓋하기 前에 櫛比하던 선술집에 같이 가서는 술에 睡眠劑를 타서 먹이고 紙匣을 훔쳐 나오죠. 그런 캐릭터였어요.”

    ‘女子 제임스 딘’

    只今도 올드팬들은 ‘최지희’라는 이름 석자에서 곧바로 映畫 ‘아름다운 惡女’를 떠올릴 것이다. 金化가 쓴 ‘韓國映畫戰士’는 최지희에 對해 ‘그女처럼 데뷔作의 이미지가 剛한 俳優는 없을 것이다. 그女의 데뷔作은 시나리오 作家 박종호와 이강천 監督이 오로지 최지희를 위해 만든 映畫라는 소리를 들을 程度였고, 그女는 아름다운 惡女 그 自體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아름다운 惡女’처럼 6·25 直後 1950年代 初盤에서 1960年代 初盤까지 娼女, 洋公主 等 밑바닥 女性을 그린 映畫를 흔히 ‘아프레 걸’ 映畫라 한다. 趙正鎬 監督의 1957年作 ‘戰後派-아프레 걸’이란 映畫題目에서 따온 이 말은 以前의 儒敎的 이데올로기에 忠實한 女性과는 사뭇 다른 主人公을 그린 映畫들을 指稱한다. 快樂을 위해 或은 獨立할 수 있는 돈을 위해 自身의 肉體를 거리낌없이 利用하고, 當時 女性들에게 强要되던 獻身과 受容의 役割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캐릭터들. 一種의 팜므 擺脫을 그린 이들 映畫에 登場한 魅惑的인 ‘안티 히로인’으로는 신상옥 監督의 1958年作 ‘地獄畫’의 최은희, 趙肯夏 監督의 1964年作 ‘肉體의 告白’의 황정순 等이 있었다.

    그러나 그 中에서도 최지희의 ‘아름다운 惡女’는 사랑을 믿지 않으며 無心히 男子를 誘惑하고 鳴動의 거리를 彷徨하는 10代 아프레 걸의 이미지를 膳賜한다. 以前의 아프레 걸들과는 달리 보헤미안的이고 浪漫的인 이미지가 더해진 그는 孤兒로 旣成世代의 價値觀과 完全히 絶緣한 反抗兒의 이미지, 한마디로 ‘女子 제임스 딘’의 이미지가 重疊되어 當代 젊은 觀客들의 熱火와 같은 聲援을 얻었다.

    이러한 過剩 性愛의 아프레 걸들은, ‘오발탄’이나 ‘이 生命 다하도록’ 같은 그 時代 映畫에서 男性들이 大部分 性不具 或은 다리가 없는 去勢된 男性으로 描寫된 것과 妙한 相補關係를 갖는다. 過剩 性愛의 娼女와 性不具의 傷痍勇士. 이들은 6·25街 낳은 1950年代 戰後時代의 不安과 彷徨을 反映하는 어둠의 子息들이었던 것이다.

    -첫 映畫다 보니 苦生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畫家 德分에 改過遷善해서 깡牌 世界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마지막에 죽지요. 그 映畫에 비 내리는 神이 참 많았는데 죽는 場面에서도 비가 와요. 相對俳優人 兆皇氏가 ‘隱微 隱微’하고 엉엉 울면서 죽은 저를 팔로 받쳐들고 가거든요. 그런데 비 오는 場面을 만드느라 淸溪川의 지저분한 물을 퍼부었어요. 11月이니 날은 엄청 추운데 냄새나는 물이 쏟아지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우성치고, 釣況氏도 發音이 새서 ‘엉미 엉미’가 되지, 나는 屍體 役割이었는데도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지….

    얼마나 추운지 이강천 監督님이 茶房에서 몸 녹이라고 위스키티라는 걸 시켜주더라고요. 그게 내 生涯 처음으로 먹어본 술이었어요. 죽는 場面에서 비틀거리는 部分이 있었는데 그건 演技가 아니었어요. 술을 먹여놓았으니 비틀거릴 수밖에요. 淸溪川에 高架道路가 생기고 나서 이강천 監督님이 ‘그 映畫 필름이 남아 있었으면 옛날 청계천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더라고요.”

    -없어진 거예요?

    “그 무렵의 映畫필름들은 모두 밀짚帽子 테두리 만드는 데 들어갔어요. 엿장수가 映畫社 近處에 오면 필름통째로 들고 가서 엿하고 바꾸어 먹은 걸요. 내가 그런 光景을 實際로 본 사람이에요. 너무너무 안타깝죠, 뭐. 스틸 寫眞도 只今은 한 張 한 張이 貴重한 資料지만, 그땐 바쁘니까 누구 하나 챙길 생각을 안 했어요.”

    -그게 그러니까 17歲 때 일인가요.

    “正確하게 計算하면 16歲 때죠. 내가 1940年生이고 그때가 1956年이니까.”

    -學校도 그때 그만두셨고요.

    “學校는 그前부터 그만뒀어요. 學校라는 건 想像도 하기 싫었죠. 只今도 別로 달라진 건 없어요. 學校가 全部가 아니라는 거예요. 요즘도 切感하지만 오히려 안 배운 사람은 잘 모르니까 밀고 나가는 部分에서는 힘이 있고, 배운 사람은 操心하다가 만날 놓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독한 煙氣는 不幸한 삶 때문

    -‘아름다운 惡女’를 찍고 나서 참 많은 役割을 맡으셨어요. 以後 映畫人生을 粥 돌이켜보면 저는 個人的으로 최지희氏가 ‘時代를 잘못 타고난 俳優’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제 運命이죠. 제가 워낙 술술 풀려나가는 人生은 아니거든요(웃음). 저는 日本 오사카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日帝時代 때 徵用에 끌려가 苦生을 엄청나게 하신 분인데, 첫 結婚에서 아들 딸 낳고 살던 中에 아내가 달아나버렸대요. 일하다가 놓친 거죠.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와 再婚해서 나를 낳았죠.

    解放이 돼서 家族만 먼저 歸國을 하고 아버지는 全 財産을 整理해 다른 배로 왔는데, 글쎄 그 배가 風浪을 만나 빈털터리가 된 거예요. 달랑 목숨만 건져서 빈손으로 故鄕으로 온들 무슨 수가 있었겠어요? 다시 돈을 벌어보겠다고 日本行 배에 密航했다가 붙잡혀서 刑務所 身世를 지셨죠. 온갖 苦楚를 겪은 아버지는 알코올 中毒者가 되셨고, 어머니는 혼자서 行商을 하며 힘겹게 子息들을 키웠죠. 只今도 눈에 선해요, 疲困해서 온통 입이 부르터 있던 어머니 모습이.

    그 뒤에도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어요. 歸國해서 처음 定着한 麗水에서는 麗順叛亂事件이 일어나 집안이 온통 뒤집어졌고, 이를 避해 故鄕으로 가니 이番에는 6·25街 덮쳤죠. 그러는 동안 저도 慘酷한 光景을 많이 봤어요. 한마디로 少女時節 내내 恐怖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아직 어려서 제대로 못 느꼈던 게 多幸이죠.

    제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겠다고 決心했던 것이나, 俳優生活 내내 남들과는 다른 이미지였던 건 그런 제 經驗 때문이었을 거예요. 撮影할 때 가장 自身 있는 表情이 憎惡에 가득 찬 表情이었거든요. 그런 걸 잘했어요. 내 生活이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女는 터질 듯이 아름다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當時 사람들은 최지희氏의 섹시함, 官能的이고 挑發的인 面에 熱狂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지희氏의 모습에 自身들을 投射한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스스로 섹시하다고 느낀 적은 한番도 없었어요. 但只 사람들이 섹시하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했죠. 데뷔 무렵에는 어렸으니까 가슴도 작고 말랐어요. 只今처럼 成形手術을 할 수 있는 時代도 아니었으니, 그저 속옷 속에 스펀지나 고무, 洋襪 같은 걸 넣고 撮影을 했죠. 監督들도 자꾸 ‘더 올려, 더 올려’ 하며 가슴을 크게 부풀려 섹시하게 만들라고 注文하곤 했어요. 그렇지만 그때 제 허리 사이즈가 22인치였어요.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 살찔 틈도 없었고. 어쨌든 그렇게 映畫를 신나게 찍었죠.”

    -그러니까 그 섹시한 이미지는 만들어진 거였다는 이야긴가요.

    “만들어졌다고 하기는 어렵고, 섹시하게 보이려고 努力했다는 거죠. 스펀지를 어떻게 넣으면 예쁠까, 어떤 表情을 지으면 예쁘게 보일까, 늘 苦悶했던 記憶이 나요.”

    - ‘아름다운 惡女’가 開封되고 나서 反應이 대단했죠.

    “엄청났어요. 瞬息間에 最高俳優 待接을 받게 됐으니까요. 그 映畫가 1957年 1月1日에 開封했는데 舞臺 人事를 하러 釜山에 갔더니 ‘慶南이 낳은 英雄’이라는 거예요. 아버지 故鄕인 晉州를 제 故鄕이라고 했거든요. 元來는 河東에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이 河東을 잘 모르니까 眞珠라고 하고 다닌 거죠.”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① 최지희의 데뷔作 ‘아름다운 惡女’ 포스터.<br>② 1980年代 事業에 沒頭한 當時의 모습.<br>③ 1964年 최은희(왼쪽)와 함께 出演한 映畫 ‘海女’

    -신성일氏 手記를 읽어보면 ‘아름다운 惡女’의 최지희氏를 두고 ‘그女는 터질 듯이 아름다웠다’고 表現했어요. 餘談인데요, 지난달에 신성일氏 인터뷰記事 中에 當時에 최지희氏가 엄앵란氏와 함께 신성일氏를 두고 “네가 請婚 안 하면 내가 請婚하겠다”고 弄談삼아 神經戰을 벌였다고 하던데 事實인가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신성일氏 別로 안 좋아했어요. 신성일氏와는 ‘姊妹의 花園’에서 처음 같이 公演을 했는데 키스마크 찍어 갖고 撮影場에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놀리곤 했죠. 신성일氏는 演出部 時節부터 알고 지냈어요. 내가 先輩죠. 스태프 時節의 印象이 남아 있으니 좋아할 理가 없죠.

    나는요, 俳優나 演藝界 있는 사람하고 結婚하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 生活을 잘 아니까. 내가 이 世上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가난인데 當時 演藝人들은 다 가난했단 말이에요.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 내가 싫다고 하니 自殺하려고 藥을 먹은 監督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거든요. 그 程度였으니 俳優와 結婚한다는 생각은 한番도 안 해봤죠.”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惡女’가 大成功을 거둔 後 相當히 많은 作品에 한꺼번에 出演하게 됩니다.

    “두 番째로 찍은 映畫가 ‘애모’라는 作品이었어요. 황정순氏, 移民者氏, 제가 나오는 세 姊妹 얘기죠. 저는 막내役을 맡았어요. 妓生인 언니가 돈을 벌어 女大生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스토리였는데, 그 映畫도 꽤 成功했어요. 그 다음 찍은 映畫가 구봉서氏 愛人으로 나온 ‘오부자’고. 워낙 作品을 一瀉千里로 찍던 時節이라 出演한 作品數도 많고, 어떻게 찍었는지 記憶도 잘 안 나요.”

    運命의 男子, P

    -1961年에 美國에 留學 가셨더군요. 워싱턴에서 語學硏修를 하고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에서 工夫를 해 오필리아 役을 맡았다고 돼 있던데요.

    “美國을 어떻게 가게 됐는지 이야기하려면 男子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웃음). 누구라고 하면 今方 알 만한 사람이니까 그냥 P氏라고만 해두죠. 그 사람을 1958年 김지미氏 結婚式場에 갔다 오다가 鳴動에서 만났어요. 當時에 그 사람은 조지타운대 留學生으로 學生會長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만남이 契機가 됐죠.”

    -쉽게 말해 사랑을 좇아 美國까지 따라가신 거네요.

    “正確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날 더 좋아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사람만 美國 學校로 돌아가고 나는 韓國에 있었어요. 年앤지 뭔지도 몰랐죠. 그 사람은 富者집 아들이고 나는 하찮은 俳優였으니, 그 사람이 나를 가르쳐야겠다 싶으니까 先生님도 보내주고 英語工夫도 시켜주고 그랬어요. 나를 키워서 自己 夫人으로 삼으려고 했던 거죠. 一種의 新婦受業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너무 干涉을 해서 지겹더라고요. 파티를 가도 사람을 꼭 하나 딸려서 보내는 거예요. ‘都大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훌쩍 날아갈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고.

    그렇게 한 2年 便紙도 쓰고 목소리도 錄音해서 보내주고 왔다갔다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걸로는 性이 안 차니까 結局 留學을 가게 된 거예요. P氏가 招請狀도 만들어주고 奬學金도 周旋해주고 그랬거든요. 워싱턴에 건너가서는 한동안 公務員 하는 家庭집에서 下宿하며 英語를 배웠는데, 처음 갔을 때는 신났죠. 그때가 5·16 直後였는데 大使館에서 여는 파티에 가서 호스트 노릇을 하기도 했어요. 朴正熙 大統領도 그때 처음 만났고요.

    한 달쯤 지내고 나니 ‘내가 演技를 배우러 왔지 英語 배우러 왔나’ 싶더라고요. 固執을 피워서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로 옮겼죠. 갑갑한 워싱턴에 있다가 뉴욕에 가니까 숨이 탁 트이는 게 살 것 같았어요. 거기서 모던 발레부터 始作해 다 배웠어요.”

    -幸福한 時節이었나 봅니다. 그때 얘기를 하니 눈이 빛나네요.

    “그렇게 마냥 잘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집에서 便紙가 왔는데 詐欺를 當했다는 거예요. 美國에 건너올 때 믿고 돈을 맡겼던 사람이 사라져버린 거죠. 마음이 急했죠. 내가 少女家長이었으니 家族들은 쫄쫄 굶을 판이고. 봄放學이 가까워올 무렵에 P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네 問題는 너 스스로 解決해라’ 그러는 거예요. 너는 너 나는 나, 한마디로 美國式이죠. 氣가 차잖아요. 이런 男子를 믿고 어떻게 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 男子가 飛行場에 나와서 우는 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와버렸어요.”

    -그렇게 헤어졌군요.

    “아니에요. 그 뒤로도 連絡하며 잘 지냈어요, 親舊 兼 愛人 兼 해서. 헤어진 것은 1966年 내가 結婚하면서예요. 只今 생각하면 그게 무슨 關係였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갖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고 할까요. 그 사람은 只今까지도 結婚 안 했어요.”

    -美國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말띠 女大生’ ‘성난 능금’ 等의 장르 映畫에 主로 出演했습니다.

    “歸國해서 사흘 만에 새 映畫를 契約했어요. 얼른 出演해서 먹고 사는 게 急했으니 映畫 엄청나게 찍었죠. 어찌나 바빴는지 그 有名한 ‘김지미·최무룡 事件’ 때, 내가 옆에 있었는데 눈치도 못 챘다는 거 아닙니까. 只今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커플 俳優들이 많이 나와서 내가 좀 不利해졌어요. 分明 나한테 맞는 驛인데 엄앵란氏나 김지미氏 같은 커플 女俳優들이 맡기도 하고. 그래서 왜 내 役割을 빼앗아가냐고 대든 적도 있어요(웃음). 美國에서 거의 1年을 있었으니 본 게 많잖아요. 그걸 그대로 映畫에서 써먹었죠. 靑春物이라는 靑春物에는 다 나갔어요.”

    ‘말띠 女大生’과 ‘말띠 新婦’는 이형표 監督과 김기덕 監督이 1964年과 1966年에 만든 一連의 코미디物이다. 말띠 舍監과 말띠 女大生의 昇降이, 그리고 이윽고 말띠 新婦가 된 이들의 에피소드를 담은 一種의 시리즈物. 이들 시리즈는 ‘말띠 女子는 八字가 세고 억척스럽다’는 社會的 偏見을 踏襲하는 世態와 偏見을 깨는 過程을 모두 보여주는 二重的인 構造를 갖고 있다. 그 中에서도 말띠 해에 女子를 낳지 않으려고 禁慾과 거짓 妊娠으로 男便들을 調整하는 말띠 女子들의 모습은 이러한 社會的 偏見을 反復하는 矛盾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映畫의 後半部에 이르러 이들은 結局 産婦人科 醫師의 說得에 따라 말띠 딸을 流産하지 않고 낳기로 決定한다. 이 一連의 에피소드에서, 1960年代 女性의 몸이란 産兒制限을 勸誘하는 國家 權力과 個人의 性慾, 社會의 價値觀 等이 싸우고 協商하는 一種의 時代的인 테이블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餘談이지만 筆者는 바로 이 映畫가 開封되던 1966年 백말띠 해에 태어났다.

    -그러다가 1963年 최지희氏의 代表作이라 할 수 있는, 가장 많은 賞을 안겨준 映畫 ‘김약국의 딸들’에 出演합니다. 撮影하는 동안에도 이 作品이 그렇듯 훌륭한 成果를 거둘 거라고 豫想하셨나요?

    “그때는 제가 워낙 作品을 많이 찍고 있을 때였어요. 처음에 映畫社에서 시나리오를 받고 나니 박경리 先生님이 저희 집으로 오셔서 付託하시던 게 記憶나네요. ‘이 作品에서 가장 重要한 役割이니까 잘해달라’는 當付였죠. 몹시 추운 겨울에 撮影했는데, 저 나름대로 무척 熱心히 했어요. 한마디로 悲劇의 主人公 役이었어요. 집안에서는 머슴하고 戀愛했다고 쫓아내 阿片쟁이 性不具者에게 媤집을 보내고, 結局은 이 男便이 어머니까지 죽이고….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女子였죠.”

    -그때 各種 映畫祭에서 助演賞을 휩쓸었어요.

    “事實 그 役割이 主演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챙기느라고 助演賞을 많이 탔어요. 한마디로 ‘빽’이 없어서 그랬던 거죠 뭐. 當時 主演賞을 받은 사람은 아마 崔恩喜氏였을 거예요. 映畫祭 主催側에서도 賞을 주기는 줘야겠다 싶어 나를 골랐던 模樣인데, 왜 主演에게 助演賞을 주는지 當時에는 理解가 안 가더라고요. 받으러 가지 말까 하다가 結局 받아놓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갔죠.”

    -그때 사투리 演技는 어떻게 하셨어요. 더빙이었나요.

    “아니요, 내가 直接 했어요. 목소리 演技까지 直接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게 웃는 거였어요. 알고 보면 웃음에는 참 여러 種類가 있는데 狀況에 맞는 웃음소리를 表現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그때 목을 甚하게 다쳐서 只今까지도 別로 안 좋아요.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繼續 밤을 새워가며 錄音을 했으니까요.”

    本能의 白癡美, 原始的 女性

    유현목 監督의 1963年作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로 有名한 박경리의 同名小說을 原作으로 한 文藝映畫다. 大部分 原作 小說을 基盤으로 만든 文藝映畫는 1960年代 韓國映畫에서 批評的으로 或은 藝術的으로 가장 待接받은 장르 中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軍事 쿠데타 以後 映畫가 現實에 對한 積極的인 發言을 하지 못하던 狀況에서 軍部와 妥協한 産物이기도 했다. 當代의 文藝映畫 巨匠으로는 유현목과 김수용 等을 들 수 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李範宣 原作의 ‘오발탄’(1961), 황순원 原作의 ‘카인의 後裔’(1968) 等과 함께 유현목 監督의 名實相符한 代表作이다.

    이 作品의 舞臺는 日帝 開港 時期 慶南 統營. 20年間 한藥局을 經營해온 아버지에게는 네 딸이 있고, 그 네 딸은 各各 性格이 判異해 統營에서는 ‘김약국집 딸들’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程度로 입방아가 藉藉하다. 男便을 잃고 寡婦가 된 첫째딸(移民者), 新女性이 된 둘째딸(엄앵란), 머슴과 사랑에 빠진 말괄량이 셋째딸(최지희), 基督敎 信者인 넷째딸. 한창 잘나갔던 김약국은 時代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딸들의 結婚과 事業의 失敗로 차츰 수렁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이 作品의 큰 줄거리다.

    최지희가 맡은 慵懶은 엄앵란이 맡은 용빈과 많은 面에서 對照的인 女性이다. 서울에 留學한 용빈은 時代의 抑壓을 뚫고 自由戀愛를 爭取하여 故鄕에 남지만, 階級에 相關없이 自己집 머슴을 肉體的으로 사랑한 慵懶은 結局 阿片쟁이와 政略結婚을 해 狂氣와 죽음의 那落으로 빠져든다. 卽 용빈이 靈魂의 純潔性과 人間 啓蒙의 樂觀性을 보여준 近代的 女性이라면, 慵懶은 肉體 하나만으로 世上을 살아가는 完璧한 本能의 白癡美를 보여주는 原始的인 女性을 代辯한다.

    유현목 監督 特有의 리얼리즘的 演出力이 돋보인 이 映畫는, 統營의 바다와 바람을 背景으로 三代에 걸친 宿命的인 業報와 前近代의 暴壓的인 制度가 어떻게 한 집안 女性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지를 보여주는 1960年代 韓國映畫의 傑作이자 최지희의 代表作이기도 하다.

    -演技人生의 絶頂을 달리던 1966年에 結婚을 하셨어요. 딸도 낳으셨죠?

    “네. 아이는 딸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結婚할 나이가 돼서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仲媒가 들어오자 하루아침에 結婚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애를 낳고 싶어서 結婚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映畫俳優로 絶頂에 올랐는데 只今 結婚 안 하면 平生 面紗布도 못 써볼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그래서 ‘結婚을 위한 結婚이라도 해보자’고 決斷을 내린 거예요. 消息을 들은 P가 電話하더니 ‘너 미쳤니?’ 그러더라고요. ‘決定된 거니까 두 番 얘기할 생각 마라’ 하고 媤집을 가버렸죠.”

    -新郞이 別로 마음에 안 드셨던가 봐요.

    “사람은 얌전하고 純粹해서 좋았는데 뭐랄까, 無氣力하다고 할까…. 제 딴에는 男便과 함께 成功하려고 많이 努力했는데 그게 다 빗나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結婚 3年 만에 危機를 맞았어요. 그 동안 映畫해서 번 돈이며 집이며 다 날아가버리고 빈털터리가 됐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가난을 못 견디는 女子인데, 男便만 바라보고 살기에는 生活苦가 甚한 거예요. 그래서 各自 다른 길을 찾아가기로 했죠. 前 男便은 日本에 살아요. 只今도 韓國에 오면 가끔 만나죠. 좋은 사람인데, 生活苦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생각해보면 女俳優들이 다 結婚을 잘 못해요. 아마 바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理由겠지요. 只今도 그럴 거예요. 男子들은 흔히 自己들이 願하는 時間에 나와서 願하는 만큼 時間을 보낼 수 있는 女子를 좋아하잖아요. 저도 그 무렵 線을 많이 봤지만 大部分 ‘結婚하면 映畫俳優 그만둬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反對로 女俳優들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男子, 自身을 기다려주는 사람을 찾아요. 그러다 보면 無能力하고 뚜렷한 職業도 없는 사람과 結婚하는 境遇가 많죠. 그러니 結果的으로는 失敗하는 거고.

    그렇게 離婚을 하고 나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다시 映畫판으로 돌아왔죠. 그 무렵 찍은 映畫가 ‘南大門 出身 용팔이’ 같은 作品들이었어요. 그때 作品을 50個쯤 했는데 大部分이 액션물 아니면 코미디物이었어요. ‘國際間諜’ ‘女子가 더 좋아’ ‘八道가시나’ ‘餘韻戰士’ 같은 映畫들. 오히려 그 무렵에 主演은 더 많이 했어요.”

    1960年代까지 靑春物의 히로인이었던 최지희는 1970年代 들어와서 ‘거친 女性’의 役割을 主로 맡는다. 그가 組暴의 딸이나 有力人士의 政府(情婦) 같은 周邊部 人物로 登場하는 이런 映畫들은 大槪 1970年代 액션 코미디 映畫의 流行을 타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가운데 설태호 監督의 ‘용팔이 시리즈’는 1970年代 初盤 박노식을 主演으로 내세운 一種의 B級 컬트映畫였다.

    ‘南大門 出身 용팔이’ ‘運轉手 용팔이’ ‘危機一髮 용팔이’ 시리즈에서 최지희는 용팔을 陷穽에 빠뜨리지만 結局 그를 위해 犧牲하는 戀人으로 登場해 박노식과 單짝을 이룬다. 맨주먹 하나로 暗黑街를 헤쳐나가는 박노식의 모습은, 비록 戀人에게는 무뚝뚝하고 배운 것은 없으나 不義를 보면 憤怒하고 목숨 걸어서라도 義理를 지켜내는 當代의 액션 英雄이 되기에 不足함이 없었다. 비록 그 當時 批評家들로부터는 忽待를 받았지만 용팔이 시리즈는 임권택 監督이나 이두용 監督의 액션물과 함께 男性 觀客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映畫들 가운데 가장 記憶에 남는 作品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제 境遇에는 ‘怨恨의 距離에 눈이 내린다’ 같은 映畫가 記憶에 남습니다. 박노식氏를 두고 최지희氏와 문희氏가 戀敵으로 나온 映畫인데, 박노식氏가 문희氏를 求하기 爲해 작두로 自己 팔을 싹둑 자르는 場面이 있어요. 어릴 때 본 映畫인데도 그 場面만큼은 똑똑히 記憶이 나네요.

    “저는 임권택 監督하고 作業했던 時代物이 記憶에 남아요. 苦生을 많이 했거든요. 主로 비원에서 撮影을 했는데, 時代物은 머리채 扮裝을 해야 하잖아요. 무거운 걸 이고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거예요. 달랑 세 커트 남았는데 林 監督님이 안 찍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젊은 監督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興奮하면 말을 막 더듬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치치치치치’ 하고 韻을 떼는 걸 내가 ‘치고 뭐고 빨리빨리 해요’ 이러면서 덤볐으니 얼마나 미웠겠어요(웃음). 林 監督의 첫 作品 ‘豆滿江아 잘 있거라’에 제가 出演했지요.”

    거꾸로 걸린 看板

    -이 時期에는 本格的으로 眞짜 惡役, 或은 어떻게 보면 아주 드센 氣質을 가진 女子를 演技하셨지요.

    “오히려 ‘眞짜배기 惡役’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結局은 다 理解가 되는, 或은 귀여운 惡役이죠. 例를 들어 ‘九月山’ 같은 映畫에서 맡은 人民軍 將校 役은 처음에는 나쁜 驛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國軍을 도와주는 人物이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人物로 나온 적이 거의 없어요.”

    -當時 우리나라 風潮가 좀 덜 벗는 俳優들, 例를 들어 문희氏나 윤정희氏, 엄앵란氏 같은 俳優들의 이미지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適當히 감춰야 魅力 있다고 하던 時節이니까요. 그런데 최지희氏는 그런 것에 別로 拘礙받지 않으셨죠.

    “그런 部分에는 神經 쓰지 않았어요. 作品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벗을 수 있죠. 甚至於 ‘숲속의 女人’ 같은 映畫에서는 발가벗고 水泳도 해봤는데요 뭐. 開封 前에 그 水泳場 寫眞 한 커트가 新聞에 실렸어요. ‘발가벗은 최지희’, 그런 題目이었죠. 그 일 때문에 審議에 걸려서 정작 映畫는 世上에 나오지도 못했어요. 그게 1972年일 거예요.

    如何튼 그 즈음부터 제가 動的인 役割을 많이 하게 됐어요. 每日 비슷한 映畫만 찍다 보니 失望도 했고, 私生活에서는 아픔도 겪고 해서 結局 映畫界를 떠나게 되죠.”

    -1970年代에는 많은 作品을 하셨던 反面 1980年代 들어서는 거의 出演을 안 하셨어요.

    “代身 社會生活은 繼續 했어요. 事實 映畫 以外의 일은 그前부터도 많이 한 便이죠. 日本에도 자주 드나들었고요. 1971年에는 무교동에 ‘지희네집’이라는 카페를 열어서 장사도 했어요. 일부러 看板을 거꾸로 달아 붙였죠. 그 무렵은 男便과 離婚하고 10萬원짜리 社글貰집에 혼자 살던 時節이에요. 結婚할 때 갖고 있던 집 네 채는 훌훌 날아가버리고.

    땅은 조금 있었는데 資本金이 없잖아요. 내가 그때 얼마나 唐突했는지 當時 有名한 麥酒會社 會長님을 無酌定 찾아가서 그랬어요. ‘최지희가 會長님 會社 麥酒 많이 팔아드릴 테니 貸付를 해주십시오.’ 재미있는 게 그분이 돈 200萬원을 선뜻 빌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始作한 게 武橋洞 가게예요.

    하루는 俳優協會 委員長이 찾아왔어요. ‘體統이 있지 이런 장사를 해서 되겠느냐’는 거죠. 俳優協會에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장사 좀 하겠다는 데 뭐가 問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배우는 俳優의 길을 가야 한다’ 云云하시는 그 兩班한테 내가 대 놓고 그랬어요. ‘들어오실 때 거꾸로 달린 看板 보셨죠? 그건 최지희가 거꾸로 섰다는 뜻입니다. 독하게 맘먹고 始作한 일이니까 參見 그만하세요.’

    장사 잘됐죠. 서울 市內에서 잘나간다는 사람은 모두 드나들었다고 해도 좋을 程度로. 열 달쯤 하고 나니 집 한 칸 장만할 돈이 모이더군요. 그랬는데 하루는 손님들이 억지로 술을 먹이는 거예요. 내가 元來 술을 못하거든요. 자꾸 勸하니까 氣分 맞춰주려고 내키지 않은 술을 한盞 먹었죠.

    그날 저녁에 撮影이 있었어요. 엑스트라가 한 50名 와 있는데 내가 얼굴이 빨개서 撮影을 못하는 거예요. 아차 싶더라고요. ‘잘못하다가는 周圍 사람들에게 弊만 끼치는 人間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가게를 팔아버렸어요.”

    -日本에서도 事業을 크게 하셨던 記憶이 나는데요.

    “日本에 잠깐 다니러 갔다가 우리 媤어머니가-정확하게는 前 媤어머니죠-도와주셔서 ‘지희타운’이라는 가게를 만들었어요. 서울에서 ‘지희네집’ 運營하는 동안 배운 노하우를 發揮해 日本에 韓國타운을 만들겠다는 計劃이었죠.

    그게 1973年이었는데 日本에서는 그런 가게를 ‘서퍼클럽’이라고 불렀어요. 밥도 팔고 술도 팔고 노래도 할 수 있고 音樂도 나오는, 한마디로 호스티스만 없는 요즘 團欒酒店 스타일이에요. 장사가 꽤 잘됐어요. 그렇게 10年 가까이 日本에서 지내고 온 뒤에는 韓國에서 事業을 했죠. P氏가 運營하던 某 체인店을 引受해서 運營해 話題가 된 적도 있었고요.

    그래도 가장 記憶에 남는 건 88올림픽이에요. 저랑 자니윤氏가 함께 ‘프리올림픽쇼’를 열었거든요. 딸 留學問題로 美國에 건너갔다가 偶然히 자니윤氏를 만났어요. 그 사람하고는 예전부터 親한 사이예요. 그 사람에게서 ‘프리올림픽쇼’ 얘기를 들어보니 ‘이거다!’ 싶은 거예요. 다른 計劃은 모두 접고 매달렸죠. 結局 KBS에서 200萬달러에 프로젝트를 받았어요. 成功的으로 行事를 치르고 나니까 짜릿했죠.

    日本에서도 演藝界 關聯 일을 熱心히 했어요. 韓國映畫를 NHK에 처음 紹介한 것도 저고, 조용필氏가 NHK홀에서 公演할 수 있도록 推薦한 것도 저예요. 대단한 時節이었죠.”

    얼굴이 밉게 나오더라도

    -1970年代 한 週刊誌와 했던 인터뷰 記事를 보니까 本人의 演技를 ‘스피디 플레이’라고 評하셨더군요. 元來 性格이 急한 便인가요?

    “性格이 急하다기보다는 撮影에 들어가서 엉뚱한 演技를 잘했어요. 리허설 할 때는 안 하다가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기 始作하면 卽興演技가 튀어나와요. 欲心이 많으니까 남들 흉내내는 게 싫어서 저 나름대로 表現하는 演技가 많았어요. 例를 들어 ‘김약국의 딸들’에서 속옷이 다 들여다보일 程度로 치마를 걷어올리는 場面은 내가 設定한 거예요. 監督이 시킨 게 아니죠. 그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監督님 이렇게 해도 되죠?’하고 許諾 받고는 앵글 한番 맞추고 그냥 가는 式이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人物들이 더 살았던 것 같아요. ‘김약국의 딸들’만 해도 動的인 役割이잖아요. 그러면 더 動的으로 가는 거예요. 俳優로서 演技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최지희 本人의 느낌을 살린 境遇가 더 많았어요. ‘正말 그런 狀況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할까’ 想像하다 보니 抑揚이나 行動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計算된 演技는 語塞하잖아요. 언제나 自然스럽게, 비록 얼굴이 좀 밉게 나오는 限이 있어도 可能한 限 自然스럽게, 그게 참 演技가 아닐까 생각해요.”

    -같이 일한 監督 中에서 가장 印象 깊은 분을 한 사람 꼽는다면요.

    “아무래도 저를 데뷔시켜준 이강천 監督님이죠. 이형표 監督님도 함께한 記憶이 많아요. 演技를 가장 많이 시켜준 분이니까. ‘서울의 지붕밑’ ‘말띠 女大生’ ‘戀愛 卒業班’ 等等 作品이 많았어요.”

    이강천 監督은 忠南 舒川에서 태어나 1954年 ‘아리랑’으로 데뷔해 1971年 ‘他人이 된 當身’에 이르기까지 17年間 28篇의 作品을 演出한 監督이다. 1948年 映畫 ‘끊어진 航路’의 美術을 擔當하며 처음 映畫界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以後 劇場을 運營하는 親舊의 勸誘로 映畫 演出을 始作했다 한다. ‘白癡 아다다’ ‘사랑’ 等의 멜로드라마와 ‘아리랑’ ‘피아골’ ‘두고 온 傘下’ 等의 戰爭映畫, ‘팔劍客’ ‘公山城의 血鬪’ 같은 時代劇을 主로 만들었다.

    李 監督은 이 時期 韓國 映畫를 이끌어간 俳優들을 發掘해 데뷔시켰다. ‘아리랑’의 허장강, ‘피아골’의 김진규, ‘아름다운 惡女’의 최지희, ‘終末 없는 悲劇’의 전영선 等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映畫판에 뛰어들었다.

    바르도와 카르디날레

    -최지희氏 本人은 스스로 어떤 俳優라고 보세요?

    “多樣한 俳優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무슨 役割이든 消化할 수 있다, 그런 自信感이 있었어요. 甚至於 映畫 以外의 장르, 演技를 벗어난 領域에서도 自身 있었거든요. 내가 映畫를 하면서 뮤지컬도 한 俳優 1號예요. 드라마센터에서 公演한 ‘抛棄와 베스’에서 베스 役割을 했었죠. 비록 노래를 할 줄 몰라서 뒤에서 代身 불러주기는 했지만(웃음). 그때가 美國에서 演技工夫하고 막 들어온 때였을 거예요. 아마 드라마센터에서 뮤지컬을 公演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걸요.

    日本에서는 證券事業까지 해봤고 서울이나 美國에서 한 事業도 成功的이었고…. 1995年에는 TV 連續劇에도 出演했어요. KBS에서 찍은 ‘人間의 땅’이라는 드라마였어요. 한마디로 뭐든 하면 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어요. 只今이라도 누가 나오라고만 하면 잘할 自信 있지만…. 글쎄요, 요새는 우리 世代 映畫가 없잖아요. 모두 젊은이들 趣向뿐이지.”

    인터뷰를 準備하는 동안 읽은 資料 가운데 1962年에 女性誌 ‘여원’에 金領袖가 쓴 최지희 人物評이 特히 筆者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女는 映畫 ‘가방을 든 女子’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몹시도 닮았다…대담하고 情熱的이고 野心滿滿하고 野性的인 體臭를 發散하는 女俳優, 도회적인 感覺과 原始林에서 半裸體로 뛰어나온 듯한 恍惚함을 갖춘 女俳優다….” 이 人物評을 本人에게 들려주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亦是 女俳優는 女俳優다.

    “맞아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비슷하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보다는 브리지트 바르도 닮았다는 이야기를 더 자주 들었지만.”

    구름을 베고 누운 女人

    -제가 최지희라는 俳優에게서 發見하는 社會的인 意義는, 社會가 그 女子가 갖고 있는 어떤 肉體性, 섹슈얼리티를 堪當 못하던 그 時節에 최지희氏가 勇敢하게 個性있는 女俳優 役割을 맡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말씀하신 대로 生活苦 때문이었든 演技에 對한 불타는 情熱 때문이었든 間에, 우리 社會 全體가 착한 女子, 조신한 女子, 或은 自己 自身을 속이는 女俳優들을 만들어내던 時節에 최지희氏는 反抗的이고 本性에 忠實한 女俳優가 되었다는 點이죠.

    “그렇지만 個人的으로 좋지만은 않았어요. 마이너스가 된 點도 많죠. 옆에서 보기에는 出世도 했지만, 나는 언제나 時代的인 흐름, 時代가 要求하는 것과 相關없이 獨自的으로 내 길을 갔어요. 나이 六十이 넘었지만 只今도 피가 끓는 걸 느껴요. 나는 내 그림자하고 싸우는 사람이거든.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醜해져서 되겠느냐, 늘 그런 觀念에 시달리는 거죠.

    혼자 있을 때 내 自身이 悽慘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番이 아니에요. 그건 아마 人間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感情일 거예요. 但只 나는 신데렐라가 되지 않았을 뿐이죠. 가끔 궁금해져요. 나에게도 分明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機會가 있었는데, 나는 왜 그 機會를 잡지 않았을까. 結論은 늘 하나예요. 自信이 없었던 거죠.”

    -自身이 없었다? 宏壯히 意外이면서도 率直한 이야긴데요.

    “眞짜예요. 내가 P氏하고 結婚했으면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自身이 없었어요. 禮義나 格式에 얽매여 사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只今 내가 이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것도 그런 理由 때문이죠.

    그렇게 보면 나는 꼭 구름을 잡으려 애쓰며 살아온 것 같아요. 손아귀에 꽉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펴보면 없는 거야. 밖에서 보는 成功, 名聲보다 훨씬 붙잡기 어려운 것을 좇아다닌 셈이죠.



    우리집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어요. 日本에 있을 때 大學敎授 한 분이 膳物로 준 건데 韓國에 올 때 큰돈을 들여 굳이 갖고 왔어요. 짙은 灰色 구름으로 된 階段 위에 한 女子가 裸體로 낮잠을 자죠. 題目도 ‘午後의 낮잠’이에요.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딱 나 같아, 구름 속에서 잠자는 女子. 그게 人生인지도 모르죠.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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