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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金퀴즈’로 人氣 上終價 개그맨 최양락|新東亞

‘3金퀴즈’로 人氣 上終價 개그맨 최양락

“大韓民國요? 正말 ‘재미있는 地獄 ’이에요”

  • 김범석 <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vitamain365@yahoo.co.kr

    入力 2004-09-07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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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年 末부터 昨年까지 최양락은 가장 바쁘고 幸福한 나날을 보냈다. ‘알까기’以後 第2의 全盛期를 맞은 것이다. 그는 ‘알까기’가 人氣를 얻은 祕訣로 單純함을 들었다. 携帶電話나 리모컨 等에 複雜한 機能이 있지만 사람들이 使用하는 건 고작 몇 가지에 不過하다는 데에 着眼했다. 複雜한 것을 싫어하는 現代人의 單純 回歸心理를 應用한 것이다.
    최양락을 만난 날은 韓國이 월드컵에서 感激의 첫勝을 거둔 다음날이었다. 그는 約束 場所인 汝矣島의 한 카페에서 前날 벌어졌던 韓國 對 폴란드 競技를 다시 보고 있었다. 前半戰 26分 황선홍이 첫 골을 터뜨리자 그는 어제의 感激이 되살아난 듯 소리 높여 歡呼했다. 自然스레 인터뷰는 월드컵을 話題로 始作됐다.

    “제가 萬으로 41世인데 韓國 代表팀이 요즘처럼 蹴球 잘하는 건 처음 봐요. 월드컵 開幕하기 前 評價戰도 熱心히 봤는데 日就月將이 따로 없더라고요. 前에는 韓國 築構하면 精神力, 鬪志였잖아요. 그런데 只今은 蹴球를 즐기는 게 보여요.”

    新聞 政治面 보고 流行語 찾는다

    그는 特히 이番 大會를 끝으로 隱退하겠다고 宣言한 황선홍 選手의 마음이 얼마나 가볍겠냐며 마치 自己 일처럼 흐뭇해 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自身이 應援하는 對象이 달라졌다며 隔世之感이 든다고 했다. 예전에는 霸氣 만만한 新銳들을 主로 應援했는데 요즘은 노장이나 先輩들을 應援하고 있는 自身을 發見한다고. 例를 들면 바둑에서 이세돌과 조훈현 技士가 激突하면 예전에는 반드시 이세돌을 應援했지만 只今은 조훈현 技士 便이란다. LG 投手 김용수를 좋아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理由다. 20歲 以上 差異 나는 後輩들을 向해 힘차게 공을 던지는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단다.

    “하지만 政治에서는 예나 只今이나 한결같이 新人 便입니다. YS도 이제 나설 必要가 있을까 싶어요. 그런 거 보면 演藝人이나 運動選手는 隱退를 깔끔하게 잘하는 것 같습니다. 大衆으로부터 別 反應이 없으면 물러나야 하는 건 演藝人이나 政治人이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최양락은 요즘 하루 大部分을 汝矣島에서 보내고 있다. 이른바 섬 生活(?)을 하고 있는 것. 每日 아침 8時40分부터 9時까지 SBS 러브FM ‘최양락의 개그世上’과 午後 8時부터 한 時間 동안 MBC 라디오 ‘최양락의 재밌는 世上’을 進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放送까지 10時間이 넘게 비지만 그는 大部分의 約束을 汝矣島에서 잡으며 모처럼 餘裕를 맛보고 있다. 點心, 저녁食事는 거의 擔當 PD들과 함께 먹는다. 낮 時間 約束 없는 날은 단골 사우나에 들러 午睡를 즐기기도 한다고.

    그가 午前에 進行하는 SBS 러브FM ‘최양락의 개그世上’은 그날그날 핫이슈를 寸鐵殺人의 諷刺로 풀어내, 昨年에 큰 人氣를 모았던 ‘알까기’ 以後 다시 한番 話題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政治 諷刺라는 컨셉트 때문에 꽤 망설였어요. 그런 分野는 當然히 時事評論家 몫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프로그램 企劃意圖가 一般의 視角에서 보는 것이라고 하길래 勇氣를 냈습니다. 4月15日부터 始作했는데 豫想보다 反應이 좋아 多幸이에요.”

    라디오 特性上 6個月은 지나야 正確한 評價가 나오지만 內部에선 進行者 起用이 卓越했다는 評이 支配的이다. 午後에 放送하는 ‘최양락의 재밌는 世上’도 前職 大統領의 聲帶模寫를 利用한 ‘3金 퀴즈’가 人氣를 얻고 있다.

    “글쎄요, 政治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關心이 많은 건 事實입니다. 新聞 政治面을 有心히 보고 있노라면 正말 재미있거든요. 날마다 流行語가 터져나오잖아요. 지루할 틈을 안 줘요. 아침 프로의 境遇 普通 하루에 두 아이템 程度를 消化하는데 뉴스 거리가 넘쳐서 苦悶이에요. 흔히 戶主나 캐나다를 ‘재미없는 天國’이라 부르고 大韓民國을 ‘재미있는 地獄’이라고 하잖아요. 正말 딱 맞는 表現인 것 같아요.”

    하지만 韓國 政治가 蹴球보다 發展 速度가 더딘 것 같아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라디오에 흠뻑 빠져 있는 只今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1981年 MBC 라디오 主催 第1回 개그맨 競演大會에서 入選하며 演藝界에 데뷔한 그는 그間 TV에서 活動하느라 라디오에 疏忽했는데 이제 그 빚을 갚는 氣分이라는 것이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 進行을 하는 요즘, 生疏함과 神奇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두 坪 남짓한 空間에서 하는 말이 곧장 全羅道로, 濟州島로 간다는 게 그렇게 神奇할 수 없어요. 어찌나 神奇한지 魔術을 부리는 것 같다니까요.”

    事實 최양락의 政治 諷刺 挑戰棋는 노태우 大統領 執權 當時인 1987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BS 人氣 유머 프로였던 ‘쇼 비디오 자키’의 ‘네로 25時’라는 코너에서 無慮 3年間 活躍한 것이다. 當時 ‘大統領인 나를 코미디 素材로 삼아도 된다’는 盧大統領의 公開 發言이 있자마자 企劃 製作된 코너였다.

    “귀를 疑心케 한 말이었어요. 우리가 그런 좋은 機會를 놓칠 理 없잖아요. 뜻이 있던 同僚 개그맨 錢維城, 엄용수, 정명재, 김학래 等과 意氣 投合해서 프로를 만들었죠.”

    當時 演出을 맡았던 윤인섭 PD의 積極的인 支援도 이들에게 힘이 됐다. 元來 ‘네로 25時’는 ‘原作을 바꿉니다’라는 코너의 變形版이었다. 每週 原作을 코믹하게 뒤틀어 바꾸는 프로였는데 쿼바디스를 素材로 ‘原作을 바꿉니다’를 했다가 ‘이거다’ 싶어서 始作한 게 바로 ‘네로 25時’였다. 요즘 6個月만 命脈을 이어가도 長壽 프로라고 부르는데 當時 ‘네로 25時’는 無慮 3年이나 回를 거듭한 長壽 人氣 프로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全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當時 盧大統領의 中間評價를 다룬 적이 있었어요. ‘한다, 안한다’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放送에서 部下들에게 ‘中間評價 한다고 해’라고 말하는 臺詞가 있었어요. 다음날 靑瓦臺에서 ‘自制해달라’는 連絡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結局 盧大統領의 中間評價는 흐지부지 넘어갔죠.”

    그 外에도 各種 敏感한 루머를 素材로 放送할 때마다 自體 編輯되는 境遇도 不知其數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理由 모를 痛快함을 느꼈다고 回顧한다.

    大統領도 修能試驗으로 뽑자

    최양락은 요즘이야 코미디 素材와 禁忌가 거의 없어졌다지만 전두환 大統領 執權 當時만 해도 暗鬱했다고 털어놓았다. 臺本에 ‘우리 아버지 失業者 됐다’는 表現도 擔當 局長들이 달려와 빨간 사인펜으로 削除 處理했다고 한다.

    “벌써 햇數로 21年째 코미디를 합니다. 전두환 大統領 時節까지는 코미디도 자유롭지 못했어요. 어느 程度냐 하면 甚至於 ‘저런 거지 같은 놈’이라는 臺詞조차 말하지 못했어요. 局長이 ‘요즘 거지가 어디 있느냐’며 削除 指示를 내렸죠. 明白한 事前 檢閱이었죠. 當時 우리들끼리는 北韓 코미디 한다고 自嘲했죠.”

    當時 전두환 大統領의 外貌와 恰似하다는 理由만으로 朴아무개 탤런트가 放送 活動을 停止당했을 程度다. 百潭寺 時節 이순자 女史가 某 女性 雜誌를 보다가 朴아무개 탤런트를 보고 男便인 전두환 前大統領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當身하고 닮긴 많이 닮았다’며. 未安한 마음에 前大統領은 나중에 그를 연희동 自宅으로 불러 食事를 같이했다고 傳해진다.

    “요즘에는 政治보다 宗敎가 더 敏感해요. 職業도 듣도 보도 못한 協會, 利益團體가 어찌나 많은지 몰라요.”

    최양락은 ‘네로 25時’ 以後 SBS ‘코미디 模擬國會’에서 與黨代表로 나온 이봉원에 맞서는 野黨代表로 出演, 政治 諷刺를 繼續했다. 그는 이 같은 一連의 行步에 對해 政治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只今까지 안 해봤던 領域에 對한 挑戰意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제가 政治 諷刺 프로에만 出演한 건 아니거든요. ‘孤獨한 사냥꾼’에선 제비族도 延期했고 시골 배추장수로도 나왔죠. 政治 諷刺도 다양한 配役을 해보고 싶은 제 欲心의 一環이었을 뿐이에요.”

    그는 韓國 政治에 가장 失望할 때가 바로 總選이나 大選 開票할 때라고 말한다. 韓半島에서 嶺南과 湖南이 뚜렷한 地域 色으로 엇갈릴 때마다 幻滅을 느낀다는 것. 그는 “어떻게 10年 前이나 只今이나 똑같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李 候補가 좋아서 찍는 게 아니라 저 候補가 無酌定 싫어서 투표하는 境遇가 많아요. 市民團體에서 主導하는 落選 캠페인도 首都圈에서만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올해 大選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1∼2年 지나면 좀 나아질까요?”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웃지 못할 提案을 했다. 大統領 選擧를 資格試驗 式으로 치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問題 出題와 採點은 市民 몫으로 하는 一種의 大統領 修學能力試驗인 셈이다. 例를 들어 ‘親姻戚 管理는 어떻게 할 것인지’ 主觀式 問項으로 만들고 各 候補者들이 答案을 作成하는 式이다.

    “우스갯소리지만 正말 하루빨리 劃期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改革的인 政治 性向을 가진 20代들이 投票에 積極的으로 參加해야 돼요. 辭表가 많이 생기면 當選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當選될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20代들이 積極的으로 투표해야 돼요.”

    只今 支持하는 特定 候補를 밝힐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한때 DJ의 熱烈한 選擧 運動員이었다. 當時 정광태, 엄용수, 이봉원 等이 그와 뜻을 같이해 DJ 캠프에 발을 담갔다.

    “그때는 오로지 政權交替에 對한 希望과 所信 때문이었어요. 民主化를 위해서 뭔가 一助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분을 도왔죠. 相對便 演藝人 運動員들은 報酬도 제대로 받았지만 저흰 도시락 먹으면서도 10원 한 張 안 받았어요. 萬一 落選했더라면 어떤 式으로든 不利益이 있었을지 모르죠.”

    최양락과 DJ의 因緣은 大選 1年 前 DJ가 국민회의 總裁로 있었을 當時로 올라간다. 이봉원 夫婦와 함께 서울 汝矣島 63빌딩에서 처음 만나 食事한 게 因緣이 됐다. DJ의 사람 됨됨이에 비해 잘못 評價된 部分이 있었다고 確信한 그는 DJ를 만날수록 人間的인 魅力에 魅了되기 始作했다. 밤 새워 그의 著書를 읽으며 歪曲 評價된 部分에 對해 憤慨했던 것도 그 當時다.

    그는 放送에서 가장 어려운 點이 均衡感覺이라고 꼽았다.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면 諷刺의 妙味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候補의 ‘깽판’ 發言과 이회창 候補의 ‘빠순이’ 發言을 同時에 問題 삼는 式으로 放送 아이템을 選定한다. 두 候補에 對해선 極度로 말을 아꼈다. 最近 문성근이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에서 途中下車한 것을 의식한 行動이다. 최양락은 大統領 候補로서 가장 重要한 德目으로 淸廉을 들었다.

    그는 1998年 末 家族과 함께 훌쩍 濠洲로 떠났다. 슬럼프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는 當時 한 放送社로부터 理解 못할 不利益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SBS 日曜 프로 ‘좋은 親舊들’을 5年 동안 進行했는데 어느 날 젊은 MC로 바꾼다는 거예요. 제가 하고 있을 때도 視聽率 下落은 없었거든요. 그냥 雰圍氣 刷新 次元이라는 말에 情이 확 떨어지더라고요.”

    當時 그는 KBS에서도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터라 아내 팽현숙氏는 꾹 참고 KBS에만 邁進하라고 助言했다. 하지만 최양락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移徙짐을 쌌다. 한마디로 自尊心이 傷한 것이다. 마침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欲求와 充電에 對한 必要性도 極에 達한 時點이었다. 하지만 飛行機가 赤道를 넘어설 무렵 불현듯 不安해지기 始作했다고 말한다. 언제 돌아올지 아무런 期約 없이 떠나는 旅行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涉外가 안 들어오면 어떡하나, 이러다 그냥 밀려나 隱退하는 건 아닌지, 마음이 複雜했죠. 모 아니면 道라고 생각했어요.”

    네 食口가 濠洲 留學길에 오르자 世間의 誤解도 받았다. 稅務 當局에선 脫稅 調査까지 벌였다. 그는 그런 誤解를 받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當時 結婚生活 11年째였는데 아내가 熱心히 副業을 했고 그 돈이 留學 資金이었다고 說明했다.

    濠洲 生活은 힘들고 외로웠다. 3個月 語學 코스에 들어간 최양락은 英語 敎師의 호된 叱責에 엉엉 울며 日記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大韓民國에선 스타였는데’라는 自尊心 程度는 問題도 아니었다. 얼굴色도 다르고 出身도 다른 새파란 異國 學生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猖披를 當할 때는 慘澹한 挫折感까지 맛봐야 했다. 아내도 그런 男便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함께 울었다. 結局 1年餘 만에 歸國 飛行機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長安의 話題가 된 ‘알까기’로 멋지게 再起했다.

    ‘알까기’로 第2 全盛期 맞아

    2000年 末부터 昨年까지 그는 人生 에서 가장 바쁘고 幸福한 나날을 보냈다. 이주일의 ‘못생겨서 罪悚합니다’, 김미화의 ‘巡惡質 女史’ 이창훈의 ‘맹구’ 等 개그맨이 限平生 한 가지 人氣 아이템으로 어필하기도 어려운데 최양락은 第2의 全盛期를 맞은 것이다. 그는 ‘알까기’의 人氣 祕訣로 單純함을 들었다. 携帶電話나 리모컨 等에 複雜한 機能이 있지만 사람들이 使用하는 건 고작 몇 가지에 不過하다는 데에 着眼했다. 複雜한 것을 싫어하는 現代人의 單純 回歸 審理를 應用한 것이다.

    “‘알까기’의 人氣를 어느 程度 豫感했지만 그 程度일 줄은 몰랐어요. 파일럿(大衆의 反應을 알아보는 一種의 試驗 放送) 錄畫하는데 카메라맨부터 뒤집어지는 거예요. 普通 어지간한 개그 아니면 그 兩班들은 鍛鍊이 돼서 잘 안 웃거든요. 속으로 ‘이건 無條件 大舶’이라고 確信했죠.”

    ‘알까기’는 小說家 李外秀까지 出演, 長安의 신드롬을 形成했다. 李外秀를 涉外하기 위해 그와 親分이 있는 전유성을 動員해 春川까지 삼고초려하는 애를 썼다. 結局 더 以上의 出演陣 涉外가 어려워지자 7個月 만에 幕을 내렸다. 하지만 최양락은 ‘알까기’로 다시 한番 全國區 스타가 됐다.

    德分에 그는 아마 7級 水準으로 國內 最初 바둑프로 MC를 보는 榮光을 누리기도 했다. 케이블 채널인 ‘바둑TV’ 에서 ‘최양락의 바둑 첫걸음’ 社會를 본 것. 그가 聲帶模寫韓 윤기현 국수는 그에게 ‘바둑 普及에 앞장서 주어서 고맙다’는 뜻을 알려오기도 했다.

    初等學校 3學年 때부터 將來希望이 개그맨이었다는 최양락은 萬若 개그맨이 되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故鄕 溫陽에서 스탠드바 三流 MC가 돼있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개그 哲學은 ‘最小 하루 한 時間은 硏究하자’다. 出演料를 받는 프로페셔널 개그맨이라면 적어도 大衆에게 끌려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間或 인터넷에서 개그 素材를 빌려오는 後輩들이 있는데 최양락에게 發覺되면 눈물 쏙 빠지게 叱責을 듣는다. 그는 想像力을 키우기 위해 讀書는 勿論 映畫 觀覽, 旅行 等 닥치는 대로 體驗하는 것을 重要視한다. 太陽 아래 새로운 게 없다지만 그는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전유성 先輩 影響을 많이 받았어요. 데뷔 當時 전유성 先輩가 달걀로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나 되냐고 묻더라고요. 깨뜨리고 삶아먹고 프라이해 먹고 팩도 하고 네댓 가지 된다고 했더니 寒心하게 쳐다보더라고요. 先輩는 數千 가지라는 거예요. 달걀을 소나무에 던질 수도 있고, 蓮못에 빠뜨릴 수도 있고, 미운 사람 얼굴에 맞출 수도 있고, 손에 들고 327番 버스를 탈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때 번쩍 하는 뭔가를 느꼈어요.”

    그는 누군가와의 對決 構圖에서 많은 靈感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例를 들어 박찬호가 투 스트라이크 狀態에서 갑자기 隱退를 宣言한다든가, 拳鬪 選手가 競技 途中 나란히 抱擁을 한다든가, 常識 밖의 말과 行動에서 개그 힌트를 主로 얻는다. 事實 濠洲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準備해왔지만 狀況에 안 맞아 大部分 버렸다. 그만큼 웃음은 狀況, 타이밍이 어느 要素보다 重要하다.

    요즘 개그맨보다 웃기는 탤런트와 一般人들이 登場하고 있는데 그의 處地에선 愉快하지 않다. 昨年 한 프로에서 만났던 ‘나도 몰라’ 아저씨의 境遇도 그랬다. 한 携帶電話 CF 出演으로 一躍 스타가 된 과일장수 아저씨는 그에게 개그맨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다.

    “大使, 拍子 모두 안 맞는데 觀客들은 그 아저씨가 한 마디하면 準備했다가 그냥 웃더라고요. 率直히 虛脫했어요. 우리 같은 개그맨들은 이제 職業的으로 相當히 不利해지는 거예요. 웃겨야 本錢이니까.”

    그는 長髮을 固守하는 몇 안되는 演藝人 中 한 名이다. 그냥 便해서다. 健康管理는 어떻게 할까? 特別히 땀 흘리는 運動 하나 못하고 있다. 골프를 즐길 法도 하지만 골프 反對論者다. “都大體 興味가 안 생겨요. 공이 들로 山으로 도망가 버리거든요. 잘 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내기 골프를 즐기는데 저는 내기 反對主義者예요. 고스톱도 못쳐요.”

    그는 蹴球도 하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前 개그맨 後輩들이 蹴球 유니폼을 團體로 맞춰서 가져왔는데 그의 등 番號는 11番. 瞬間 어깨가 으쓱했지만 그날 競技에서 前後半 90分 동안 공 한番 차지 못하고 競技를 끝내야 했다고 實吐했다.

    酒量은 燒酒 2甁 程度. 요즘 함께 프로그램 하는 PD, 作家들이 술동무다. 後輩 개그우먼에서 아내가 된 팽현숙氏는 男便에게 없는 事業 能力이 있어 家庭經濟를 책임지고 있다. 男便 輸入 官吏부터 양수리에 門을 연 카페 ‘꽃피는 山골’ 管理까지.

    앞으로의 計劃을 물었다. 演劇을 하고 싶다는 意外의 答이 돌아왔다.

    “제가 서울예대 演劇과 出身인데 敎授님한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저 보시면서 그럴 거 아니에요. ‘저 놈은 演劇 가르쳐놓았더니 웃기기만 하네’라고요. 그래서 더 늦기 前에 演劇에 出演할 생각이에요. 요즘 具體的인 말이 오가는데 빠르면 가을쯤 實現될 것 같아요.”

    그는 政治 諷刺 演劇이 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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