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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親北主義者가 아니다”|신동아

“나는 親北主義者가 아니다”

小說 ‘太白山脈’·‘아리랑’·‘韓江’으로 1000萬部 突破한 作家 조정래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入力 2004-09-07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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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家保安法은 廢止돼야 한다
    • 韓國軍은 越南戰에 傭兵으로 參戰
    • 이문열은 文學 外的인 關心 줄여라
    • 최인석 李承雨 방현석 은희경의 作品이 좋다
    • 왜 김근태만 處罰받아야 하는가
    • 印稅(印稅) 問題로 한길사와 訣別
    作家 조정래(趙廷來·59)氏가 ‘太白山脈’을 始作으로 ‘아리랑’을 거쳐 ‘韓江’에 이르는 20年 間의 글쓰기를 마치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作家가 壯年期의 거의 全部를 바쳐 쓴 세 篇의 大河小說은 200字 原稿紙 5萬1500張 分量으로, 쌓아놓은 原稿紙의 높이가 그의 키 세 倍를 넘는다.

    1983年에 執筆을 始作해 6年 만에 完結한 ‘太白山脈’은 理念의 禁忌地帶를 깊숙이 파고들면서 分斷文學의 最高峯을 이루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太白山脈’은 只今까지 550萬部가 팔리며 作家에게 讚辭와 함께 經濟的 安定을 가져다주었지만 解放 以後 금기시되던 빨치산들의 삶과 鬪爭을 作品化한 데 따른 有形無形의 苦痛도 겪게 했다.

    조氏는 ‘太白山脈’을 完刊한 後 約 1年 間 國內外 取材活動을 해 1990年 12月 ‘아리랑’의 執筆에 着手해 1995年 7月에 脫稿했다. ‘아리랑’은 日帝의 土地調査로 農土를 잃은 農民들이 하와이 滿洲 러시아로 흩어져 生存과 抗日의 精神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1997年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獨逸 等으로 取材旅行을 다녀와 다음해부터 ‘韓江’을 쓰기 始作해 2002年 完了했다. 마흔에 ‘太白山脈’을 始作해 ‘아리랑’ ‘韓江’을 쓰고 나니 그의 나이 예순이었고, 初等學校에 다니던 아들은 大學을 나와 軍隊를 마치고 結婚해 孫子를 안겨주었다.

    그는 酒色雜技와 담을 쌓고 산다. 臀部 腫氣, 神經性 胃潰瘍, 오른팔 痲痹 等 職業病이 생길 程度로 오로지 글쓰기에만 매달려 20年 동안 大河小說 세 篇을 完成했다. ‘韓江’을 끝내고 쓴 ‘20年 글 監獄에서의 出獄’에는 조氏의 作家 精神을 보여주는 內容이 들어있다.

    ‘眞正한 作家란 그 어느 時代, 그 어떤 政權下高度 不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權力이란 誤謬를 저지르게 돼있고 眞正한 作家는 그 誤謬들을 파헤치며 眞實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作家는 政治性과는 全혀 關係없이 進步的인 存在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進步性을 띤 政治勢力이 胚胎하는 誤謬까지도 直視하고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作家는 끝없는 不和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作家는 最近 京畿道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中央하이츠 빌리지로 移徙와 아내 김초혜(金初蕙·59) 詩人과 單 둘이 산다. 빌라 앞은 盆唐區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싶은 시골 마을이다. 바로 앞山에 덕양君(中宗 아들) 墓所가 있다. 아침 일찍 찾아갔을 때 김시인이 茶와 과일을 내왔다. 作家는 大學에 講演을 갔다가 膳物로 받았다는 철쭉 盆栽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며 “盆栽는 좁은 空間에 나무를 심어놓고 拷問을 하는 趣味”라고 말했다.

    新聞社 論說委員도 글을 써서 먹고 사는 職業이지만 社說은 길어봐야 200字 原稿紙 6張, 칼럼은 10張 程度다. 어쩌다 雜誌에 길게 써봐야 150張을 넘지 않는다. 조氏가 쓴 ‘太白山脈’(10卷)은 1萬6500張, ‘아리랑’(12卷)은 2萬張, ‘韓江’(10卷)李 1萬5000張이다. 專業作家가 20年 동안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長江(長江)과 같은 글의 길이에 숨이 막힌다.

    키보다 세 倍 더 높은 原稿量

    ―超人的인 것에 가까운 글쓰기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1959年 서울에 올라와 1960年代 後半까지 水道가 없는 城北洞 山洞네에서 살았습니다. 高等學校 1學年 때부터 大學 4年 卒業하고 軍隊 가기 前까지 7年 동안 물지게를 졌습니다. 嚴冬雪寒에 눈이 내린 날은 물 길러 가기가 正말 싫습니다. 추운 날 山洞네 비탈길을 물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일이 普通 지겹고 힘든 게 아니에요.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하다가 한 10分 지나버리면 30∼40名이 줄을 서요. 게으름을 떨치고 빨리 일어나면 가장 먼저 到着해서 今方 물을 담아 돌아올 수 있어요. 人生이 別것 아닙니다. 남들보다 5分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을 떨면 恒常 내가 앞에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지게質을 통해 얻었습니다.”

    ―이 時代에 태어난 作家의 所任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거의 病的일 만큼 실존적인 물음에 對한 責任意識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歷史는 이렇게 흘러왔을까? 作家는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내 氣質과도 關聯이 있을 겁니다. 이런 땅에 태어난 野俗함, 원망스러움, 어린 時節 6·25를 겪으면서 傷處 받고 逼迫 받은 것들이 複合的으로 얽혀있겠죠.

    우리가 文學을 始作할 때는 純粹文學만이 文學의 全部인 것처럼 認識하고 있었습니다. 參與文學은 存在하지 않았지요. 김동리 황순원 같은 분들이 全部 그런 式으로 몰고갈 때입니다. 參與와 歷史 같은 主題가 剛한 것에 對해 穿鑿을 하다보니 登壇하는 데도 不利했어요. 大學時節에 登壇을 못하고 겨우 軍隊를 마치고 와서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다면 作家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使命感에 긴 小說을 세 番씩이나 쓰게 됐습니다. 참 複雜한 問題입니다. 單純하게 說明이 안돼요.”

    1989年 右翼團體들이 ‘太白山脈’을 쓴 作家를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告發한 事件은 아직도 終結되지 않아 檢察의 最長期 未濟 事件으로 남아있다. 500萬卷 以上 팔려 全國民이 읽다시피한 小說을 有罪 意見으로 起訴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無嫌疑 處分을 내리면 右翼團體들이 또 告發을 할 테니 檢察은 그저 歲月에 맡겨놓기로 한 것 같다. 그동안 國家保安法이 改正 또는 廢止돼 自動 終結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1999年 右翼團體들은 ‘太白山脈’에 對해 500個 告發 事項이 담긴 告發狀을 檢察에 接受했다. 檢察은 이中 120個를 추려 作家에게 事實을 立證할 客觀的인 資料를 내놓으라고 要求했다.

    ―120個 審問 事項은 例를 들면 어떤 것이었나요. 120個 質問에 對해 一一이 證據資料를 갖추어 答辯하는 것이 普通일이 아니었을 텐데….

    “‘太白山脈’에는 與·純叛亂 事件 때 美國 飛行機가 뜨고 美國 艦艇이 麗水 앞바다에 爆擊을 한 內容이 나옵니다. 右翼團體에서는 이런 虛僞 事實을 捏造한 조정래는 빨갱이라고 告發한 거지요. ‘白頭山 虎狼이’라고 불리는 討伐隊長 김종원이 國民學校 運動場에서 左翼嫌疑者들을 모아놓고 한 名씩 끌어내 日本道路 목을 치는 內容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거지요.

    客觀的 資料라는 것은 冊·新聞·報告書 等을 말합니다. 當時 事件을 겪은 사람들에게 取材했다고 해도 안 통합니다. 내가 直接 目擊하고 體驗한 거라고 해도 안됩니다. 例를 들면 美軍 飛行機가 爆擊을 해 不發彈이 바로 우리집 마당에 떨어졌는데도 그것은 客觀的 資料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美軍 LST가 麗水 앞바다에서 爆擊을 加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證人을 부를 必要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前에 이를 立證하는 美國 쪽 寫眞資料가 公開됐습니다.

    노근리 事件도 美國 記者가 써서 퓰리처賞을 받고 機密文書를 통해 立證이 되니까 믿어주는 거지요. 나같은 사람이 쓰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檢察 調査를 받느라 一週日間 ‘韓江’ 쓰기를 中斷하고 120個 項目에 對한 資料를 모두 찾아서 100% 提出했어요. 答辯書에 引用한 冊만 17卷에 이릅니다. 김종원이라는 討伐隊長 이야기는 國會 速記錄에도 나옵니다. 萬軍(滿軍) 出身으로 居昌 良民虐殺 事件에도 關聯됐고 李承晩 大統領으로부터 信任을 받아 乘勝長驅했습니다.”

    조氏는 太白山脈 때문에 1994年 治安本部(警察廳) 남영동 分室에서 調査를 받았다. 김영삼(金泳三) 政府 時節이라 拷問을 當하지는 않았지만 侮辱的인 言辭와 恐怖 雰圍氣는 如前했다.

    ―1980年代 初까지 分斷文學은 國家保安法이 許容하는 範圍 內에서만 썼지만 太白山脈은 實定法이 許容하는 限界를 뛰어넘었다는 評價가 있습니다. 右翼團體 쪽에서는 甚至於 親北(親北) 文學이라고 攻擊을 하는데요.

    “感情的인 反共主義者들의 攻擊입니다. 小說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小說을 誤讀하는 것도 讀者의 自由입니다. 그러나 相對方을 攻擊하기 위해서 억지 主張을 하는 것은 名譽毁損이고 無故입니다.

    分斷 狀況에서 反共主義者들은 相對方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여 百戰百勝했습니다. 이들에게 警察과 軍隊는 모두 옳고 聖域이며 絶對로 더럽혀서는 안 되는 組織이 됩니다. 共産主義者와 빨치산은 無條件 때려죽일 놈들이고 惡魔高 吸血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狀況이니 빨치산도 아픔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人間이며 배움과 人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容納을 못하는 겁니다. 이런 感情的인 反共主義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分斷의 問題를 이념적으로 解決할 수 없습니다.

    南쪽에서 旣得權을 行使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北쪽 政權을 維持하면서 旣得權을 行使하는 勢力도 있습니다. 조정래는 北쪽의 旣得權 勢力에게조차 批判의 對象입니다. 나는 1950年代의 狀況에서 共産主義者와 빨치산의 立場을 말하는 것이지 戰爭 以後에 社會主義 獨裁政權을 꾸려온 김일성 體制를 擁護하는 것이 絶對로 아닙니다. 感情的 反共主義者들이 太白山脈과 나를 親北으로 모는 것은 錯覺이고 誤謬입니다. 分明히 말하거니와 나는 親北主義者가 아닙니다.”

    ‘太白山脈’은 統一의 징검다리

    ―김대중(金大中) 政府는 大統領 選擧公約으로 國家保安法 改廢를 내걸었지만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反對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國家保安法에 對해서 個人的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當然히 廢止돼야 합니다. 國家保安法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日帝時代 獨立運動家들을 彈壓하던 治安維持法이 나옵니다. 國家保安法말고도 얼마든지 間諜을 잡을 수 있고 處罰할 수 있습니다. 朴正熙(朴正熙) 政權이 獨裁 强化의 方法으로 써먹은 法을 民主化時代에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것은 말이 안되죠. 6·15 共同宣言에서 南쪽의 大統領이 北쪽의 首腦와 만나 抱擁을 하고 民族 統一의 歷史를 열어가기로 合意했지 않습니까. 國家保安法 改正도 못하고 이 政權이 끝난다면 6·15 共同宣言의 精神을 스스로 否認한 것이 돼버립니다. 이런 論理의 矛盾은 國際的 亡身입니다. 一擧에 없애기 어렵다면 部分 改正이라도 해야 합니다.”

    ―太白山脈 때문에 노태우(盧泰愚) 政權 때 稅務調査를 받았다지요.

    “1983年 ‘현대문학’에 連載를 始作해 1986年에 第1部 3卷을 單行本으로 냈습니다. 文藝誌에 連載할 때는 別 關心이 없다가 單行本으로 나오니까 運動圈에서 暴發的으로 읽혔습니다. 그러자 搜査機關들이 注目하기 始作했습니다. 그 무렵 放送 프로그램에 나를 出演시킨 KBS 職員들이 閑職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未安했습니다.

    右翼團體가 司法當局에 陳情書를 냈지만 檢察이 1991年 問題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映畫로 만드니까 右翼團體들이 120페이지가 넘는 告發狀을 만들어서 告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太白山脈은 作家에게 榮光을 안겨줬지만 그에 못지않은 苦痛을 只今까지 주고 있습니다. 太白山脈을 出版한 한길사가 稅務調査를 받고 追徵을 當했습니다. 내가 脫稅를 했더라면 破廉恥犯으로 몰렸겠지요.”

    太白山脈을 映畫化했던 임권택(林權澤) 監督이 프랑스 칸 映畫祭에서 ‘吹花癬’으로 監督賞을 받았다. 林監督은 신동아 6月號 인터뷰에서 “原作 太白山脈은 左偏向的인 느낌이 드는 作品이지만 映畫는 이데올로기 志向性에서 다르다”는 말을 했다. 勿論 林監督이 文學作品에 對해 精密한 分析 能力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太白山脈에 國家保安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同意하지 않는 讀者들 中에는 이 冊이 解放空間 그리고 戰爭의 舞臺에서 左翼革命에 加擔했던 사람들에 對한 肯定 또는 同情의 視角을 담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價値는 相對的입니다. 價値 以前에 感情도 相對的이죠. 아까 말한 대로 共産主義者들은 無條件 惡의 表象이고, 資本主義와 南쪽 大韓民國의 軍人과 警察은 無條件 善의 象徵으로 設定한 二分法의 價値觀을 가진 사람들은 太白山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事實을 事實이라고 하거나 똥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도 안되는 거지요. 그것이 二分法 社會의 슬픔입니다.

    빨치산들이 가지고 있는 最小限의 眞實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며 한 時代를 살다갔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지 않고서는 그들을 理解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理解하지 않고서는 잘잘못을 밝힐 수도 없고 잘잘못을 밝히지 않고서는 和解와 協力의 길로 갈 수도 없고, 統一의 門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에 징검다리를 놓고 싶은 文學的 欲求 때문에 太白山脈을 쓴 것입니다.”

    ―或是 金剛山에는 가봤습니까.

    “안 갔습니다.”

    ―北韓의 現體制에 對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감스럽게도 가장 非人間的인 體制입니다. 封建主義가 무너진 理由는 非人間性 때문입니다. 封建主義의 非人間性은 權力의 世襲, 兩班 常놈 差別하는 階級主義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非人間性 때문에 人間들은 封建主義를 무너뜨리기 始作한 것 아닙니까? 거기에 對한 反動으로 民主主義와 社會主義가 나온 것인데 社會主義를 標榜한 北쪽이 權力世襲을 했으니 더 말하여 뭣하겠습니까. 다른 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빨치산들은 무엇을 위해 山으로 들어가 勝算이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 以上으로 그렸던 社會主義 國家가 只今 北韓의 모습일까요.

    “解放 當時에 全國民의 85%가 農民이었습니다. 農事를 지어서 生産物의 7∼8割을 뺏기고 보리粥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苦痛에서 벗어나고 싶은 大衆의 欲求가 巨大한 힘으로 存在했습니다. 빨치산의 多數가 農民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地球上의 모든 이데올로기는 結局 사람답게 사는 世上을 만들어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解放政局에서는 社會主義도 좋고 資本主義도 좋고 무엇이든지 제대로 살게만 해주면 좋다는 것이 大衆들의 欲求였죠. 그런데 北韓은 1946年에 土地를 無償沒收해서 無償分配 했습니다. 南韓은 1950年 6·25街 터지기 直前에 겨우 有償沒收 有償分配를 했습니다. 南쪽의 農民들 사이에 土地問題에 對한 不滿이 컸습니다. 土地所有 制度 때문에 社會主義를 편든 素朴한 農民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죽어갔어요.

    北韓에서는 食糧不足으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苦痛의 歲月이 5∼6年째 繼續되고 있습니다. 智異山에서 죽어간 빨치산들이 저世上에서 北韓을 바라보면 痛哭을 하겠지요.”

    위고 같은 作家 되고 싶었다

    ‘한국논단’式 史上 檢證이 아니다. 讀者들이 作家 조정래에 對해 품고 있는 궁금症을 물어 그의 育成을 통해 들어보는 것은 意味가 작지 않다. 무거운 質問들이 이어져 答辯하는 作家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雰圍氣를 푸는 뜻에서 作家 조정래를 노벨 文學賞 候補로 推薦하려는 움직임에 對해 質問을 던졌다.

    “몇몇 市民團體를 中心으로 그런 運動이 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그 분들은 作家가 介入할 일이 아니라며 決斷食道 가졌습니다. 노벨文學賞을 타려면 運動 갖고는 안되고 于先 作品을 英語 프랑스語로 飜譯부터 해야지요.

    노벨賞은 수많은 賞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賞金이 좀 많아서 世界的인 權威를 獲得한 側面이 있습니다. 最近에 열렸던 21世紀 世界文學 세미나에서 韓國 記者들이 노벨文學賞 受賞 作家인 소잉카에게 韓國文學은 언제쯤 노벨賞을 탈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愚問에 賢答이 나왔어요. 그는 좋은 作品은 그 스스로가 中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런 對答을 듣습니까. 自尊心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自然스럽게 노벨賞을 준다면 拒絶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文學 또는 우리 文學의 絶對價値처럼 이야기되는 것에 對해서는 侮辱을 느낍니다.”

    ―太白山脈 같은 大河小說은 飜譯作業이 만만치 않겠지요.

    “日本에서 太白山脈이 完譯 出版됐습니다. 10年 前 美國 하와이大 마셜 筆 敎授가 英語 飜譯을 準備하다가 心臟痲痹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리랑은 프랑스 아르마湯 出版社에서 7卷까지 나오고 今年 內로 完刊될 겁니다.”

    ―이문열(李文烈)氏는 右派를 代表하는 作家이고, 조정래氏는 左派를 代表하는 作家라고 規定한 文學 記事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評價에 同意합니까. 이문열氏와 그의 作品에 對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政治 이데올로기的인 側面에서 左派라고 한다면 나는 拒否하겠습니다. 그러나 改革 進步를 支持하는 立場의 左派라면 同意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當身은 무슨 主義者냐는 俗物的인 質問을 數없이 받았습니다. 나는 人間社會의 正義와 眞實을 文學으로 지키고자 끝없이 努力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進步主義者라고 말합니다. 우리 民族의 自尊心은 勿論 다른 民族의 尊嚴性도 絶對로 毁損하거나 侵害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民族主義者입니다. 文學 行爲도 어떠한 政治體制的人 制約이나 壓迫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信念을 갖고 있으니 自由主義者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겁니까.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藝術을 하다가 죽어갈 藝術家일 뿐이에요. 그것으로 充分합니다.

    이문열氏는 個性 있는 作品을 잘 씁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作品 外的인 것에 關心이 많아요. 그것을 털어버리면 더 큰 作品을 쓸 수 있을 거예요.”

    ―다른 作家들이 쓴 小說도 많이 읽는지요.

    “이것저것 읽다가 좋은 作品을 만나면 다시 또 읽습니다. 수많은 作品들이 複合돼 影響을 주면서 한 作家의 個性的인 世界를 만드니까 特定 作家에 影響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죠. 내가 훌륭한 作品을 쓴 辭表로 認定하는 사람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社會性과 政治性, 人間 眞實의 問題에 熾烈하게 接近하면서 藝術性을 함께 조화시킨 模範이라고 評價합니다. 위고 같은 作家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登壇 初期부터 했습니다.

    긴 作品을 쓰느라 20年 동안 남의 作品을 많이 못 읽었습니다. 中間中間 準備하는 過程에서 國內 젊은 作家의 作品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最近 漢江을 마치고 나서 몇몇 젊은 作家들의 作品을 읽었습니다. 남의 作品을 읽어야 내 作品의 缺陷을 發見할 수 있습니다. 또 남의 좋은 部分을 認定해야 나도 더 잘 써야 한다는 覺醒이 생길 수 있지요. 남의 作品 읽기를 게을리하는 態度는 作品을 잘 쓰고자 하는 努力을 抛棄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最近에 읽은 젊은 作家들 作品 中에 印象에 남은 作品을 들어보면….

    “최인석 李承雨 방현석 은희경 氏 等의 作品이 괜찮더군요.”

    筆者는 조氏의 大河小說 中에서 ‘太白山脈’만 읽었다. ‘아리랑’과 ‘韓江’은 인터뷰를 앞두고 벼락치기로 읽기에는 너무 厖大하다. 인터뷰 質問을 만들기는 아리랑과 漢江을 모두 읽은 집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漢江에서는 緣坐制로 苦痛을 겪는 人物을 다루었는데요. 緣坐制가 憲法으로 禁止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緣坐制로 不利益을 當했습니다. 或是 個人的으로 이런 苦痛을 겪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런 苦痛은 겪지 않았지만 周邊 親舊들이 社會進出에 制約을 받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ROTC 任官 1個月을 남겨놓고 마지막 身元照會에 걸려 將校가 못된 親舊도 있지요. 當代를 넘어서 다음 世代의 人權까지 制約을 하는 나라가 文明國家 中에 果然 있을까요. ‘韓江’에서만 쓴 게 아니고 ‘어떤 傳說’이라고 하는 小說에서도 緣坐制를 다루었습니다.

    漢江은 두 가지 이야기가 큰 흐름을 이룹니다. 하나는 우리 經濟 發展이 어떤 過程을 거쳐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젊은 世代에게는 傳說이 돼버린 것을 總體的으로 알리고 싶은 欲求가 있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50年 넘게 繼續된 分斷 狀況이 民族에게 어떻게 傷處를 입히며 忘却돼 왔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緣坐制가 法으로 禁止된 것은 얼마 안됩니다. 이미 當事者들이 傷處 받고 人生이 망가져버린 다음에 뒷북친 式이죠. 이런 非人間的인 政治 橫暴가 어떻게 容恕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民族史에서 두고두고 이야기돼야 할 것입니다.”

    조정래는 但只 想像力만으로 小說을 쓰는 作家가 아니다. 우리 民族의 移民史를 다룬 아리랑은 滿洲를 中心으로 해서 東南亞 러시아 日本 하와이가 舞臺다. 漢江은 우리나라의 經濟發展을 다루다보니 舞臺가 世界로 펼쳐진다. 漢江을 쓰기 위해 베트남 獨逸 사우디아라비아 等地로 取材 旅行을 다녔다. 그는 異國땅에 눌러앉은 勤勞者 鑛夫 看護師 等을 만나 이들이 뿌린 피와 눈물의 體驗을 採錄했다. 조氏는 흩어진 寶石들을 주워 닦고 갈아서 小說로 엮고 맞춰내는 作業을 했다고 말한다.

    박현채 先生 證言 參考

    ―太白山脈에서 번 돈을 아리랑 取材에 相當 部分 投資했다지요.

    “想像力은 作家가 漠然하게 抽象的으로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想像은 恒常 刺戟받고 觸發되는 部分이 있어야 生命力을 얻습니다. 寫眞이나 記錄에는 바람 햇볕 땅의 냄새가 없고 사람들의 感覺도 죽어있습니다. 나는 現場을 보는 瞬間 이야기가 엮여져 나옵니다. 數十 가닥의 실타래가 自動으로 풀려나가듯이…. 取材를 갈 땐 뭔가를 얻어와야겠다고 緊張합니다. 一般的인 旅行의 浪漫이 아니에요.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일입니다.”

    그는 獨逸에서 韓國人 鑛夫와 看護師를 數十 名 만나서 取材를 했다. 때문에 獨逸의 看護師 出身 移民社會에서는 漢江이 베스트셀러를 記錄하고 있다. 太白山脈을 쓸 때는 한番 나가면 열흘씩 褓따리를 싸들고 取材 旅行을 다녔다.

    ―太白山脈의 現場은 主로 全南地方과 智異山 一帶지요. 이 一帶를 모두 踏査하고 小說을 쓰기 始作했습니까.

    “1次 舞臺는 寶城郡 벌교읍입니다. 2次가 順天 和順 光州 쪽이고요. 3次가 智異山입니다. 1次 舞臺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取材가 必要없었습니다. 2次 舞臺부터 取材를 했습니다. 和順 白庵山, 長興 誘致 等이 全部 빨치산 地球입니다. 智異山은 아흔아홉 골짜기라고 합니다. 平生 여기서 심마니를 한 사람도 골짜기를 다 모른다고 할 程度로 큰산이에요. 全南 慶南 전북도의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있는 山입니다. 全北道黨 慶南道黨 全南道當이 맡았던 골짜기가 모두 다릅니다.”

    그는 智異山에서 빨치산 鬪爭을 했던 生存者들을 證人으로 데리고 다녔다. 빨치산과 反對쪽에서 싸운 討伐隊의 證言도 蒐集했다. 太白山脈 3, 4部는 經濟學者 박현채氏(作故)의 記憶에 80%를 依存했다고 作家는 述懷한다.

    “太白山脈에 나오는 偉大한 戰士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 先生입니다. 빨치산 鬪爭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朴先生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저의 光州 書中學校 先輩입니다.”

    朴氏는 光州 書中學校(只今의 光州一考) 3學年 때 남로당 書中學校 總責이었다. 書中學校는 全南地方에서 工夫 잘하는 學生들이 들어가는 學校였다. 天才라는 소리를 듣던 朴氏는 早熟해 어린 나이에 社會主義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졌다.

    “朴先生은 從前 直前에 和順에 補給鬪爭을 하러 내려왔다가 逮捕됐습니다. 多幸히 學生이라서 懲役을 살지 않고 特別赦免 措置를 받았습니다. 記憶力이 非常해 智異山 빨치산 時節을 샅샅이 記憶했습니다. 正말 놀라워요. 大槪 빨치산 鬪爭을 한 사람들은 自己가 活動한 分野밖에 몰라요. 그러나 朴先生은 智異山 빨치산을 總體的으로 다 알아요. 戰鬪部보다 上位인 文化部 中隊長을 맡아 그렇습니다. 文化部는 作戰部라고 할 수 있습니다. 文化部 中隊長이 ‘안된다’고 하면 戰鬪 中隊長은 戰鬪를 못하게 돼있습니다. 朴先生이 文化部 中隊長을 17∼18歲 때에 했습니다. 똑똑하고 强靭한 體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太白山脈 쓰기 前에 或是 이태氏의 ‘남부군’을 읽어보았습니까.

    “太白山脈은 한꺼번에 나온 게 아니고 4年 동안 4部로 나뉘어 나왔습니다. 文學評論家 中에는 無識을 武器처럼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文學評論家들이 조정래의 太白山脈은 이태의 ‘남부군’에 빚진 바 크다고 마구 써버렸어요. 荒唐無稽한 거짓말이에요. 無識하고 無責任한 結論입니다.

    太白山脈을 3回分 程度 썼을 무렵에 同僚 小說家가 原稿紙로 된 ‘남부군’ 複寫本을 내게 보냈어요. 빨치산 小說을 쓰는 데 도움이 될 테니 參考해보라는 뜻이었지요. 이 原稿를 이미 읽어본 作家들 이름까지 적어보냈더군요. 생각이 깊은 분이지요. 내가 參照한 內容을 다른 作家가 쓸 수도 있으니 操心하라는 뜻이었지요.

    내가 取材한 部分과 겹치는 것도 있고 完全히 새로운 것도 있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읽으면서 重要한 部分은 메모를 해놨습니다. 太白山脈 1部 2部에는 빨치산이 안 나오잖아요. 3部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2部가 出刊되고 나서 ‘남부군’李 冊으로 出版돼 40萬部가 팔렸습니다. 唐慌했습니다. 相當히 쓸모가 있다고 判斷해 꼼꼼히 메모를 해놓았는데 冊이 나와버렸으니 큰일났지요. 이태氏의 ‘남부군’에서 도움 받으려고 했던 部分이 쓸모없게 돼버린 거예요. 難堪했습니다. 다시 取材하기로 하고 ‘남부군’ 메모를 찢어버렸습니다.”

    ―빨치산과 戰爭을 한 討伐隊 出身 사람도 만나봤습니까.

    “討伐隊의 證言은 客觀性을 確保하기 위해 반드시 必要하지요. 그 분들은 놀랍게도 ‘그들은 宏壯히 勇敢했다’ ‘道德的이었다’고 證言했습니다.”

    ―메모를 찢어버렸더라도 智異山 빨치산을 理解하는 데 이태氏의 ‘남부군’으로부터 일정한 도움을 받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부군’ 메모를 모두 버리고 새롭게 取材를 했습니다. 智異山에서 이태氏가 만든 陣中新聞의 主筆을 만났습니다. 이 분이 ‘남부군’을 다 읽어보고 나서 너무 많은 것이 事實과 다르다고 證言했습니다. 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水原에 살았는데 작고했습니다.”

    그는 只今도 原稿紙에 글을 쓴다. 太白山脈과 아리랑을 쓸 때는 컴퓨터가 一般化되지 않았다. 出版社에서 컴퓨터를 膳物했지만 韓江의 取材를 다니느라 字板 練習을 할 時間이 없었다. 漢江도 손으로 썼다. 最近에는 아들이 最新機種의 컴퓨터를 膳物했지만 인터뷰와 脫腸 手術 等으로 쫓기느라 練習을 못하고 있다.

    “練習을 해서 日記나 雜文은 컴퓨터로 쓰더라도 小說은 繼續 손으로 쓰겠습니다.”

    ―컴퓨터를 익히면 글쓰기에 아주 便利합니다. 原稿紙에 써나가면 破紙가 많이 생기잖아요.

    “압니다. 그런데 그 便利함이 오히려 小說 쓰기에 妨害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破紙를 別로 안 냅니다.”

    그는 인터뷰를 하다말고 옆房에 保管하고 있는 아리랑 原稿를 보여주었다. 過去 新聞社에 原稿를 보내는 作家 中에는 專門 解毒社가 必要할 만큼 惡筆이 적지 않았다. 조氏의 原稿는 別로 고친 데가 없을 程度로 깔끔했다. 아리랑의 舞臺인 全北 金堤市에서 아리랑文學管을 세운다고 해 그곳에 보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스님이었던 아버지

    ―作家 조정래의 作品世界를 理解하는 데 도움이 되는 評論을 紹介해주겠습니까.

    “황광수氏가 ‘조정래의 小說世界-小說과 眞實’이라는 評論集에서 短篇 中篇에서부터 始作해 아리랑까지 總體的으로 조정래를 알 수 있도록 썼습니다. 서울대 권영민 敎授의 ‘太白山脈 다시 읽기’도 읽을 만합니다. 權敎授는 내가 告發당한 狀態에서 이 冊을 펴내 苦痛을 當했습니다. 나를 調査한 警察 班長이 權敎授한테 電話를 걸어 두 時間 以上 恐喝 脅迫을 했습니다. ‘當身 서울大 敎授 그만하고 싶으냐. 왜 까부느냐. 빨갱이 便을 드는 當身도 빨갱이지.’ 權 敎授가 나 때문에 苦生을 해 아주 未安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정래의 年譜는 ‘1943年 全南 昇州郡 仙巖寺에서 出生’으로 始作한다. 出生부터가 普通사람과 다르다. 어머니의 信心이 至極해서 절에서 태어난 것일까. 아니다.

    日帝는 韓日合邦의 豫備 工作으로 强力한 힘을 지닌 佛敎를 一絲不亂하게 統制하기 위해 32個 本山을 만들었다. 仙巖寺度 그中의 하나였다. 조氏의 父親(趙宗玄)은 24歲에 法師가 되었다. 日帝는 똑똑한 僧侶들을 골라 日本 僧侶들처럼 結婚을 하게 했다. 이른바 帶妻僧 制度다. 조氏의 父親은 仙巖寺 大雄殿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日帝 以前에는 韓國에 帶妻僧이 없었다.

    趙宗玄氏는 仙巖寺 敷地主로 寺畓(寺畓)을 小作人들에게 無償으로 分配해야 한다는 進步的인 意識을 갖고 있어, 절의 財産을 지키려는 住持와 다툼이 벌어졌다. 僧侶들이 兩쪽으로 갈려 싸우는 渦中에서 與·순 叛亂事件이 나자 주지 쪽에서 副住持를 빨갱이로 몰았다. 趙宗玄氏는 逮捕됐지만 光州高法에서 無罪 判決을 받고 풀려났다. 太白山脈에 나오는 ‘法일’의 모델이 바로 作家의 아버지다.

    趙宗玄氏는 以後 벌교상고·광주일고·서울 보성고에서 國語 敎師를 거쳐 우석고 校長을 지냈다. 時調詩人이었다. 作家는 아버지가 學校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 光州 書中과 보성고를 卒業했다.

    大河小說 세 篇이 1000萬部 넘게 팔린 人氣作家의 印稅 收入은 얼마나 될까. 大韓民國 小說家의 한달 平均 原稿料 收入이 10萬원이라고 한다. 太白山脈이 550萬部, 아리랑이 350萬部, 漢江이 只今까지 120萬部 팔렸다. 創作物로 1000萬部 突破는 韓國에서 처음이다. 印稅는 冊값의 10%다.

    “誤解가 있어요. 只今 政家 8000원의 10%로 計算을 하면 나는 80億원을 번 사람이 돼버려요. 바보 같은 計算이죠. ‘太白山脈’이 처음 나왔을 때 冊값이 3200원이었어요. 4000원 4500원 5000願하다가 8000원이 된 것은 今年 1月이에요.”

    ―그래도 어림잡아 50億원 以上은 벌었겠네요.

    “그 돈이 송두리째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20年 동안 다른 職業을 갖지 않은 專業作家였습니다. 基礎 生活費와 子息을 가르쳐야 하는 돈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새 作品을 쓰기 위해 地球를 세 바퀴 半 도는 距離를 取材 旅行을 다니며 再投資한 費用이 엄청나요. 案內者 通譯을 데리고 飛行機 타고 호텔 生活을 하다보면 再投資 費用이 想像을 超越할 程度로 많이 들어가요. 稅金도 무서워요. 原稿料는 年間 2000萬원까지는 免稅되지만 5000萬원을 넘기 始作하면 累進이 붙어요. 나처럼 所得이 높으면 43%를 내야 돼요.”

    ―1億원 벌 때마다 4300萬원을 냈으니 나라살림에 크게 寄與했군요.

    “12年 동안 每年 1億원씩 稅金으로 냈어요. 太白山脈과 아리랑이 겹쳤을 때는 한해에 거의 2億원을 냈어요. 그러니까 나는 誠實 高額納稅者입니다. 稅務調査를 當했어도 아무 일 없었으니까요. 參與連帶 같은 市民團體 또는 不遇 障礙人 團體 같은 데 조그만 誠意를 表示할 수 있는 程度의 餘裕밖에 없어요. 큰돈은 없습니다.”

    비디오가게에서는 冊도 貸與해준다. 圖書貸與店마다 太白山脈 아리랑 漢江은 반드시 備置하고 있다. 요즘은 專業主婦들이 小說을 많이 읽는다. 콩나물 값도 깎는 主婦들이 10卷짜리 大河小說을 8萬원 내고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貸與店에서는 卷當 3泊4日씩 빌려주고 800원을 받으니 열 番만 貸與하면 元金이 回收되는 셈이다. 집 近處에 있는 貸與店의 境遇 昨年 年末에 購入한 太白山脈이 컴퓨터 記錄에 40番을 빌려준 것으로 나와 있었다.

    消費者로서는 便利하지만 作家와 出版社에서 보면 冊이 덜 팔려 不利益을 當하는 게 된다. 하지만 放送局에서는 音盤을 틀 때마다 著作權料를 支拂하지 않는가.

    ―出版協會 같은 데서 貸與店 問題를 正式으로 提起한 적이 있습니까.

    “圖書貸與店 問題가 한 4∼5年 前 出版社들에 依해 提起됐습니다. 그런데 全面的으로 規制할 法이 없습니다. 貸與店들度 法을 만들면 印稅를 내겠다고 主張하지요. 例를 들면 800원 받고 빌려줄 때마다 80원씩 印稅로 내겠으니 國會에서 法을 만들어오라는 式이지요. 어느 貸與店에서 내 冊을 보니 비닐 껍질이 다 찢어져서 새로 커버를 했더군요. 大學 圖書館에 있는 冊들도 하드보드로 다시 表紙를 입혔어요.

    10卷 한 質을 모두 사려면 8萬원이니 冊값이 싼 便은 아니지요. 그 돈을 내고 10卷을 다 사 읽는 讀者들이 고맙습니다. 돈이 모자라면 빌려봐야지요. 主婦들로부터 子息에게 조先生님 冊을 읽히고 싶은데 冊값이 비싸니 出版社에 付託해서 싸게 살 方法이 없겠냐고 묻는 電話를 서너 次例 받았어요. 그 電話를 하기까지 그 엄마가 얼마나 망설였겠어요. 아버지들은 그런 電話를 絶對 안해요. 어머니의 사랑이 勇氣를 내게 하는 거예요.

    冊房에서 알면 抗議가 들어오니 소문내지 말라고 하면서 出版社를 紹介해줬지요. 그 母情이 얼마나 눈물겨워요. 그게 小說이죠. 小說이 別거예요? 그런 切切한 이야기가 小說이지….”

    ―얼마前 新聞에 김근태氏(民主黨 國會議員)의 良心宣言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칼럼을 썼더군요. 김의원後援會 會員이라지요.

    “내가 전두환(全斗煥) 政權 때 右翼의 脅迫을 받고 위태로운 狀態에서 太白山脈을 써나가고 있을 때, 두 사람이 精神的인 慰安을 주었습니다. 바로 문익환(文益煥) 牧師와 김근태 議員입니다. 太白山脈을 쓰다가 잡혀 들어가 受難을 當하게 되면 두 사람처럼 毅然하게 對處하리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근태氏가 政治를 始作하기에 率先해서 그를 돕기 始作했어요.

    國民의 代表로 뽑힌 사람이 國民 앞에 잘못을 告白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힘든 일입니까. 良心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커다란 勇氣입니다. 잘못을 是認하지 않는 것이 우리 社會의 傳統처럼 돼버려 歷史가 繼續 歪曲됐습니다. 왜 그만 處罰받아야 합니까. 그의 勇氣와 良心은 保護되어야 마땅합니다. 萬若에 다른 政治人들이 鐵桶 같은 沈默을 지켜 法 밖에서 安住하고, 김의원만 처벌당하는 事態가 오면 市民團體의 이름으로 政治人 全部를 告發할 作定이에요. 나는 參與連帶가 만들어진 時點부터 理事로 活動하고 있습니다.”

    동국대 國文科 하면 미당 서정주가 떠오른다. 조氏와 아내 金詩人은 모두 동국대 國文科를 卒業한 미당의 弟子들이다. 김시인은 미당의 推薦을 통해 登壇했다. 結婚할 때 미당이 主禮를 섰다.

    未堂과 조정래, 그리고 조영남

    ―미당은 ‘詩의 政府’라는 評을 들을 만큼 뛰어난 詩人이었지만 親日 및 獨裁政權과의 癒着 行跡으로 批判을 받고 있습니다. 스승에 對해 말하기가 조심스럽겠습니다만 미당에 對해 어떤 評價를 하고 있습니까.

    “실천문학 여름號에 모두 써놓았습니다. 그것으로 代身하죠.”

    그는 1985年 ‘한국문학’ 週間을 하면서 解放 40年 特輯으로 親日文人들의 問題를 特輯으로 다루려고 했다. 그는 미당을 찾아가 글의 마지막에 ‘잘못했다’는 한마디만 하면 先生님은 자유로워진다며 글쓰기를 勸誘했다. 미당은 顔色이 變하며 “뭐라고! 넌 大學生 때부터 反骨 氣質이 江하더니만…. 그래 들어봐라”며 두 時間 동안 여러 말을 했으나 글쓰기는 拒否했다. 兆主幹은 結局 親日 先輩文人들의 反省하는 글쓰기 代身에, 젊은 文人들이 反省 없는 先輩 親日 文人들을 批判하는 特輯으로 바꾸었다.

    ‘미당은 그야말로 미당人 채로 이 世上을 떠나갔다. 그리고 미당 批判을 놓고 文壇과 世上이 한바탕 시끌시끌해졌다. 미당이 마지막으로 잘못했다는 한마디를 남겼어도 그렇게 시끄러웠을 것인가. 미당은 그의 빼어난 詩들처럼 生涯도 깔끔하게 整理했어야 했다. 그 일을 끝내 하지 않음으로써 미당은 後進들이 서로 얼굴을 붉혀야 하는 業報를 남겨놓았다.’(실천문학 2002年 여름號 趙廷來 ‘容恕는 反省의 膳物’ 中에서)

    ―조금 漠然하고 조금 巨創한 質問 같기도 한데 文學이 志向해야 할 價値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人間의, 人間을 위한, 人間다운 世上을 만드는 데 寄與하는 文學을 해야 합니다. 窮極的으로 이것이 나의 文學하는 姿勢이고 價値觀입니다. 그러니까 文學이 이데올로기의 무엇이다 하는 것은 소용없는 소리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人間을 救濟하기 위해서 만든 制度거든요. 그러므로 矛盾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矛盾 속에서 死滅하거나 沈沒합니다. 社會主義가 바로 人間的인 것을 確保하지 못해 消滅하고 있습니다. 社會主義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 올 거예요. 오더라도 다른 方法으로 오겠죠. 文學은 人間을 위해 寄與해야 돼요.”

    그의 親舊 中에는 그와 全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다. 歌手 조영남(趙英男)氏가 그 가운데 한 名이다. 조영남氏는 탤런트 윤여정氏와 헤어질 무렵에 조정래氏의 집에 와서 避亂 生活을 했다.

    ―조영남氏의 바람氣는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드뭅니다. 史跡으로 그분의 女性觀이나 夫婦館에 關해 論議해본 적이 있습니까.

    “조영남은 音樂的 才能이 卓越한 사람입니다. 先驗的으로 광대끼를 갖추고 있는 좋은 演藝人이죠. 그런 만큼 自由主義的인 데가 많아요. 내가 만날 때마다 深刻하게 歷史 社會意識이 貧弱하다고 指摘하니까, 그는 ‘조先生님은 입만 열면 愛國愛族을 말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가 윤여정氏하고 離婚할 때 우리집에 와있으면서 尹氏와 電話로 財産에 關한 論議를 하길래, 내가 ‘當身은 또 벌 수 있으니 다 주라’고 助言했지요. 子息을 그쪽에서 키우니 아무 말 말고 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가 車도 줘야 하냐고 물어서 車는 너의 발이니까 車만 빼놓고 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때 以後로는 忠告한 적이 없습니다. 人生은 各自 알아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말로 하기보다 내가 집사람 하고 사이좋게 사는 것이 그에게 敎訓이 되기를 바랍니다.”

    趙廷來 김초혜 夫婦는 文壇에서 소문난 잉꼬夫婦다.

    ―딱딱한 인터뷰를 너무 오래 끌면 讀者들이 지루할 것 같아서 조영남氏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웃음).

    “좋아요. 이런 거 좋아요. 조영남氏도 이番 新東亞 인터뷰 읽어봐야 돼요. 그에게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조영남氏는 作家 조정래氏가 自己의 잔치를 망쳐놓은 적이 있다고 썼더군요. 招待한 손님 中에 籠球選手 박신자氏의 美國人 男便이 있었는데 그이는 CIA 韓國 副支部長이었어요. 조先生께서 美國을 批判하며 朴氏의 男便과 甚하게 言爭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作品에서도 美國을 批判하는 內容이 더러 發見됩니다. 6·25와 美國, 世界 秩序를 主導하는 只今의 美國에 對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지 W. 부시 政權이 들어선 以後 橫暴도 많지만 弱小國家로서 美國이 世界 秩序를 主導하는 現實을 否認할 수만도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韓美關係야말로 愛憎이 얽혀있는 關係 아니겠습니까? 6·25 때도 도움을 받았지만 韓國이 經濟發展을 이룬 데는 美國 市場의 德을 크게 보았음을 否認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도 歷史와 傳統이 있고 獨立性과 主體性이 있어요. 强大國의 橫暴를 언제까지고 받아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對等한 國家 對 國家의 關係가 定立돼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態度를 分明히 하고 美國이 알아듣도록 說明해야 합니다. 美國도 韓國이 變했다는 것을 認識하지 않으면 두 나라 關係는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1人當 GNP 80달러에서 經濟建設을 始作해 只今은 1萬달러에 이르렀습니다. 文盲率이 世界에서 가장 낮은 나라가 韓國입니다. 美國이 이러한 나라를 過去 援助物資 주던 80달러 水準의 國家로 다루어서는 곤란합니다.

    부시 大統領이 ‘惡의 軸’ 發言을 하고 訪韓하니, 무슨 事態가 벌어졌습니까. 市民團體들이 聯合해 反美示威를 벌였습니다. 韓國은 1990年代 以後 10年 동안에 2萬個의 市民團體가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美國이 韓國사람에 對한 尊嚴性을 認定하지 않는다면 韓美關係는 繼續 惡化될 것입니다. 21世紀에 사이좋은 同伴者로 가려면 美國은 좀더 謙遜해질 必要가 있고, 韓國은 더욱 堂堂하게 美國을 向해 우리의 立場을 確實히 해줄 必要가 있습니다.”

    ―太白山脈이 처음에는 한길사(代表 김언호)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해냄으로 出版社를 옮겼죠. 어떤 緣由로 헤어졌습니까.

    “말하고 싶지 않아요. 印稅 인지 問題였습니다. 마땅치 않은 狀態에서 契約期間이 滿了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越南戰 돈 벌려고 參戰

    ―‘韓江’에 越南 派兵도 다루었던데 越南 派兵에 對해서도 論難이 있었지요. 枯葉劑 後遺症으로 苦痛 받는 분들도 있고, 傭兵論을 펴는 學者들도 있습니다. 越南 參戰 勇士들은 傭兵論으로 우리를 侮辱하지 말라고 興奮합니다. 越南 派兵에 對해서 總體的으로 어떻게 判斷합니까.

    “漢江에서 베트남에 간 軍人과 勤勞者의 問題를 모두 다루었습니다. 베트남 戰爭 小說이 서너 篇 나와있지만 勤勞者 問題는 全혀 言及을 안했어요. 라이 따이한이라고 하는 튀기는 全部 勤勞者들이 뿌려놓고 온 氏거든요. 勤勞者들이 同居生活을 한 結果입니다. 軍人들은 戰爭하느라고 바빴고 어쩌다가 賣春女들을 相對했지요. 그런데 라이 따이한을 軍人들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잘못 알고 있어요.

    血盟인 美國과 함께 共産主義 侵略을 막는다는 名分으로 베트남 戰爭에 參與했다고 말하지만 當時 支援 軍人들은 ‘越南에 돈 벌러 간다’고 했습니다. 重要한 건 그 대목이에요. 越南 參戰 勇士들은 自尊心이 傷하겠지만 名分은 名分이고 內容은 돈벌이였다고 認定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都大體 우리가 베트남에 뭐 하러 왔는가. 돈 많은 나라 美國이 퍼붓는 달러는 먼저 먹는 게 임자다. 日本 놈이 第一 많이 먹는다. 필리핀 臺灣도 와 있는데 우리도 많이 먹는 수밖에 없다.’ 小說에 나오는 PX病이 그런 말을 합니다. 當時 兵士들이 月 40달러를 받았습니다. 요즘 돈으로 치면 거의 1000달러는 되는 價値입니다. 勤勞者들은 그것보다도 7∼8倍를 더 벌었습니다. 傭兵이라는 말이 自尊心을 傷하게 하더라도 內容을 否認할 수 없습니다.”

    ―美國에서는 越南戰 參戰에 對해 잘못이었다는 反省이 폭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잘못된 戰爭이었지요.”

    ―漢江에서는 朴泰俊(朴泰俊) 前 浦項製鐵 會長을 높게 評價했지요.

    “두 가지 側面에서 그 분을 높게 評價했습니다. 첫째 企業人으로서 가장 良心的이고 模範的으로 一貫했습니다. 둘째 포항제철로 우리 經濟의 體質을 바꿔놓았습니다. 抛撤이 생기면서 重化學工業으로 우리 經濟의 方向이 바뀌었습니다. 1972年까지 每해 1億달러 가까이 鐵鋼을 輸入했습니다. 그런데 抛撤이 3高爐 4고로를 稼動하면서 國産 鐵鋼으로 自給自足할 수 있게 됐습니다. 價格은 輸入鐵鋼에 비해 3分의 1이나 쌌습니다. 朴正熙 大統領이 죽었을 때 1人當 GNP가 1000달러이던 것이 1萬 달러까지 왔잖아요. 그렇게 된 데는 重化學工業의 힘이 絶對的이었습니다. 그 분의 남다른 獻身性과 愛國心이 이룩한 結果라고 생각합니다.”

    ―歷史를 背景으로 해서 小說을 쓰다보면 新聞을 많이 參照하게 되지 않습니까.

    “小說을 쓰기 前에 關聯 書籍을 最大限 求해서 읽습니다. 동국大學 圖書館에서 3∼4個月 동안 1959年 以後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뒤져 노트에 메모했습니다. 老人네가 몇 달씩 圖書館에서 新聞을 뒤지니까 所聞이 났지요. 小說쓰기가 그렇게 遠視 勞動입니다. 남이 代身 해줄 수가 없습니다.”

    ―大河小說 세 篇에 登場하는 人物이 1200名이 넘는다지요. 作名所를 차려도 되겠어요. 같은 이름을 쓰는 失手를 한 적은 없습니까.

    “이름에도 有識한 사람과 無識한 사람의 雰圍氣가 다릅니다. 우스운 이름도 있고 우습지 않은 이름도 있어요. 못사는 사람일수록 千金 萬金 式으로 이름을 지어요. 얼마나 촌스러워요. 父母의 念願이 거기에 담겨있는 거예요. 兩班들은 行列을 따집니다. 이름이 絶對로 겹치면 안되지요.

    太白山脈을 쓸 때는 그나마 便했어요. 아리랑에는 太白山脈에 나온 이름은 쓸 수 없게 됐지요. 太白山脈에서 讀者들에게 明確하게 人相이 찍혀버린 姓氏, 하대치 염상진 等은 이름뿐만 아니라 聖徒 못 쓰게 돼요.

    有心히 보면 太白山脈에서 主人公으로 登場한 사람들의 姓은 아리랑에 안나옵니다. 아리랑에 나온 主人公 姓은 韓江에 안 나오고…. 또 弔歌는 안 씁니다. 쓰더라도 잠깐 지나가는 것으로 쓰지요. 왜냐하면 내가 兆哥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쓰자니 氣分이 나쁘고, 좋은 사람으로 쓰자니 흉볼 것 같아서요. 小說을 쓰기 前에 이름을 미리 準備하지요. 無識한 이름, 知性的인 이름,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 分類를 해놓고 하나하나 使用합니다.

    小說 세 篇에 登場人物이 1200名 程度 되지만 겹치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고 壯談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女性 讀者가 ‘허진’이라는 이름이 아리랑에도 나오고 漢江에도 나오는 것을 찾아냈어요.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또 한 사람씩 指摘했습니다. 세 사람이 겹칩니다. 勿論 잠깐 스쳐 지나가는 人物이지만. 無意識이라는 게 무서워요.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 始作하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는가 봐요. 그래서 이 사람들한테 謝過하는 意味로 冊에다가 사인을 해서 한 卷씩 보내줄까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 세 番씩 맨손體操

    ―글쓰기 外에 어떤 趣味를 가지고 있습니까.

    “趣味라는 게 없습니다. 酒色雜技를 안하는 것이 제 삶의 姿勢입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술을 一切 안 마십니다. 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것이 에피소드인 作家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리랑을 한국일보에 4年 連載했고, 漢江을 한겨레신문에 3年 連載했는데 原稿 때문에 新聞社 擔當記者가 저한테 電話限 일이 한番도 없습니다. 미리미리 보내니까요. 自尊心 때문에 내가 맡은 일은 最善을 다해 책임지려고 합니다. 酒色雜技는 하지 않지만 運動은 健康을 위해서 熱心히 합니다. 맨손體操를 하루에 세 番 합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散策하고 日曜日에는 꼭 登山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하루도 안 빼고 해서 20年 동안 健康을 維持할 수 있었습니다. 맨손體操 效果는 대단히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어요.”

    ―登山은 어디로 다닙니까.

    “내가 분당으로 移徙온 理由가 두 가지입니다. 空氣가 좋고 아무데서나 올라가면 바로 山입니다. 登山路를 따라가면 남한산성에 다다릅니다.”

    同甲인 아내 김초혜 詩人과는 동국대 國文科에서 만나 戀愛하다 結婚해 35年째 함께 살고 있다. 김초혜 詩人이 英文科에서 國文科로 옮기자 國文科 先輩들 사이에 拘礙 競爭이 벌어졌다. 文學서클 合評會를 할 때 조氏가 김시인의 萬年筆을 빌려 돌려주지 않았다. 김시인이 萬年筆을 돌려받으러 찾아왔을 때 “空짜로는 줄 수 없고 빵을 사달라”고 한 것을 契機로 가까워졌다. 1960年代에 戀愛 걸던 手法이다.

    夫婦는 結婚할 때 서로의 作品 世界에 對해서 尊重하고 一切 干涉하지 않는다는 原則을 세웠다. 김시인은 조氏가 쓰는 作品의 첫 讀者이고 校正者다. 原稿 狀態에서 읽고 誤謬를 發見해 고쳐주는 일을 끊임없이 繼續하고 있다. 조氏는 아리랑에 붙인 作家의 말에서 作品의 折半은 아내가 써준 것이라고 공을 나누었다.

    “世上이 얼어붙었던 全斗煥 政權 初期에 小說 太白山脈을 쓰려고 할 때 다가올 威脅이 두려웠어요. 집사람에게 이런 苦悶을 털어놓았죠. 分明히 小說로 인해 不利益을 當하고 被害를 보게 될 터인데 그때 견딜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아내가 ‘當然히 作家가 써야 할 것은 써야지, 政治的 社會的으로 壓迫을 받는다고 해서 避해버린다면 말이 되느냐’고 激勵를 해줬어요. 그리고 20年 글쓰기를 繼續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김초혜 詩人은 詩集을 9卷이나 냈다. 이中 ‘사랑굿’은 詩集으로서는 前無後無하게 100萬部 以上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寫眞記者가 왔을 때 같이 寫眞을 찍으라고 勸誘하자 조氏는 “저 사람은 平生 매스컴에 얼굴을 안 내밀어요. 그게 저 사람이 살아가는 方法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초혜 詩人의 詩 中에서 가장 좋아하는 作品을 하나 紹介해주시죠.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前文은 이렇다.



    ―出版社도 經營했다지요.

    “敎師 生活을 그만두고 原稿料 가지고는 못 사니까 글만 專門的으로 쓰기 위해서는 經濟力 確保가 必要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1978年부터 出版社를 제가 直接 經營하다가 1980年에 그만뒀어요. 세끼 밥만 먹고 한 20年 먹고 살 돈을 그때 벌었어요. 내놓는 것마다 1萬 部 以上 3萬∼4萬部씩 팔렸어요. 집사람 1年 後輩인 放送作家 김수현氏 小說도 냈고…. 出版社를 하기 前에는 小說文藝라는 포켓북 雜誌를 해봤는데 잘 안돼서 1年 만에 經營權을 넘겨버렸죠.”

    조氏에게는 외아들(조도현)이 있다. 子息을 많이 두면 글장이 해서 먹여 살리기 힘들 것 같아 딱 하나만 두었다고 했다.

    “只今처럼 成功한 作家가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서넛 둘 걸 그랬어요”

    아들이 大學生이 됐을 때 太白山脈 專門(全文)을 原稿紙에 베끼라는 宿題를 내줬다. 3年 前 시집온 며느리(이민경)한테도 같은 宿題를 내 太白山脈을 6卷 째 原稿紙에 淨書하고 있다.

    “小說을 通讀하고 나서 한 文章 한 文章 옮겨 베끼면 歷史 人物 世上에 對한 理解, 文章 工夫 等 얻어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며느리도 子息입니다. 애비가 쓴 作品이 어떤 苦痛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1000分의 1이라도 알려면 한番은 베껴봐야 합니다. 著作權은 作家의 死後에도 50年 동안 保障됩니다. 값진 勞動의 代價를 한 푼이 됐든 두 푼이 됐든 間에 받으려면 애비가 바친 純粹한 苦痛의 質感을 느껴봐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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