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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共和 黨內 政治로 들여다본 ‘2008 美 大選’|新東亞

民主·共和 黨內 政治로 들여다본 ‘2008 美 大選’

‘暴風’과 ‘異端者’의 맞對決…“黨을 넘어야 黨이 산다”

  • 김동석 뉴욕뉴저지韓人有權者센터 所長 dongsukkim58@hotmail.com

    入力 2008-10-07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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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國 大選이 兩黨 候補指名을 끝마치고 列傳 레이스에 突入했다. 美國 內 韓人들의 政治的 位相 强化를 위해 15年間 活動해온 김동석 뉴욕뉴저지韓人有權者센터 所長이 兩黨의 全黨大會를 비롯, 現場에서 지켜본 大選戰 分析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힐러리 클린턴 上院議員이 掌握하고 있던 민주당 黨內組織을 ‘外部에서의 突風’과 케네디 家門의 支持로 突破한 버락 오바마 候補, 社會 이슈에서 共和黨 邊方에 서 있다 네오콘 그룹의 支持로 候補指名을 거머쥔 존 매케인 上院議員. 이들은 果然 워싱턴 內部政治에서 어떤 位相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11月 大選에 어떤 結果를 낳을 것인지 들여다본다.
    暫時 옛이야기부터 해보자. 1992年 大選戰에서 조지 부시 當時 大統領의 再選을 疑心하는 專門家는 많지 않았다. 冷戰 解體의 主役이자 걸프戰을 勝利로 이끈 그는 分明 英雄이었다. 無名이나 다름없던 빌 클린턴 當時 아칸소 州知事가 挑戰狀을 던질 무렵만 해도 빌 클린턴의 도움 要請을 받은 컨설턴트들이 모두 고개를 저었을 程度로 판勢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夫人이자 政治的 同伴者인 힐러리 클린턴은 當時 選擧의 爭點이 外交 安保가 아니라 民生問題가 될 것임을 看破하고 男便의 勝算을 점쳤다. 클린턴의 政治컨설턴트인 제임스 카빌이 “멍청아, 問題는 經濟야!”라는 有名한 弘報文句를 내놓을 수 있었던 背景에는 이러한 힐러리 클린턴의 英敏한 判斷이 있었다.

    大統領에 當選된 빌 클린턴은 最高의 人氣를 謳歌했다. 冷戰 以後 國際社會에서 美國이 具現할 ‘새로운 리더십’이 그의 核心 主題語였다. 2000年 大選이 이 ‘새로운 리더십’을 話頭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兩黨의 候補인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가 모두 이 問題에 焦點을 맞췄고, 그 가운데서도 앨 고어는 環境에, 조지 W 부시는 道德的 價値에 重點을 두었다. 새로운 世紀를 위한 美國의 리더십을 强調하는 이때의 選擧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야말로 薄氷이었다.

    그리고 2000年代가 왔다. 9·11테러는 워싱턴 政治에 엄청난 影響을 미쳤다. 世界에서 가장 不安한 나라가 된 美國은 이제 리더십에서도 ‘힘의 論理’를 最優先으로 삼게 됐다. 超强勁 霸權論理가 支配한 ‘테러와의 戰爭’ 後暴風은 2004年 부시 大統領을 再選時켜주었지만, 거꾸로 엄청난 反對勢力을 量産했다. 형편없는 大統領 支持度가 그 가장 뚜렷한 指標다. 이렇게 해서 美國은 다시 한番 ‘美國의 리더십’을 苦悶할 수밖에 없게 됐고, 以前과는 다른 ‘새로운 政治’ 或은 ‘새로운 指導者’에 對한 熱望을 품게 됐다. 바로 그 熱望이 한창 速度를 내고 있는 2008年 美國 大選을 읽는 키워드다.

    美國 民主黨에 1960年代는 意味深長한 時期였다. 케네디 大統領과 當時 민주당이 黑人 民權運動을 支持하고 少數人種에게도 參政權을 附與하는 態度를 確固히 한 以來, 민주당의 黨權은 北東部 地域의 케네디界 或은 케네디 家門이 쥐게 됐다. 暫時 南部 出身의 지미 카터가 大統領이 되기는 했지만, 民主黨 內部의 가장 큰 系譜는 줄곧 케네디系였다.



    케네디系와 클린턴界

    그러나 美國 政治의 保守化가 深化돼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在任 12年 동안 공화당 保守勢力이 版圖를 主導하자, 民主黨 內部에서 白堊館 티켓을 위해서는 黨內 南部勢力이 候補가 돼야 한다는 共感帶가 形成되기 始作했다. 아칸소 州知事였던 빌 클린턴이 黨內 南部 出身들을 모아 中道的인 理念을 强調하는 ‘民主主義리더십會議(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結成했고, 이를 바탕으로 黨權에 挑戰했다. 그의 成功은 클린턴系가 민주당 內에서 케네디界에 맞서는 政治勢力을 形成하는 決定的인 契機가 됐다.

    民主黨 內部의 두 代表 政治勢力은 2000年과 2004年 大選에서 各各 候補를 냈다. 2000年 클린턴系의 앨 고어, 2004年 케네디系의 존 케리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大選에서 敗했고, 2008年 大選을 위한 민주당의 均衡錘는 일찌감치 힐러리 클린턴을 中心으로 하는 東部 中道派에 기울었다. 누가 봐도 클린턴系가 狀況을 리드하는 形局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行步는 以前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졌고 基金募金 行事는 늘 超滿員을 이뤘다. 뉴욕과 LA 一帶의 韓人社會에서도 힐러리 클린턴 基金募金 流行이 번졌다. 特히 2006年 中間選擧에서 민주당이 上下 兩院을 掌握한 것은 決定的인 事件이었다. 2007年 美 議會의 第110回期 開院을 記念하는 자리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上院 議員會館의 가장 高級스러운 會議場에 自身을 支持하는 뉴욕 州 黨員들을 招請했다. 支持者들은 함께 登場한 클린턴 夫婦를 向해 ‘힐러리 大統領’을 외치기도 했다. 바야흐로 클린턴系의 全盛期였다.

    한便 2004年 11月 일리노이에서 上院議員에 當選된 버락 오바마 議員은 그해 보스턴에서 열린 全黨大會 演說로 國民의 注目을 받기 始作했다. 當時부터 上院 選擧를 돕던 戰略家들과 함께 隱密히 次期 大權挑戰의 可能性을 점치고 있던 그는, 西部의 캘리포니아와 東部의 뉴욕이라는 問題에 逢着한다. 傳統的으로 민주당勢가 剛한 이들 두 地域의 민주당 組織은 이미 힐러리 클린턴의 手中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黨 밖에서 勢力을 만드는 方法을 擇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大學을 卒業한 뒤 시카고의 슬럼街에서 地域運動을 이끌었던 經驗이 한몫을 차지했다. 旣存 민주당組織 內部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市民運動을 일으키는 게 더 힘 있고 빠른 戰略일 수 있다는 判斷이었다. 그가 민주당 內 改革的인 政治新人들을 두루 接觸하고 特히 東部 뉴욕 一帶의 少數人種 候補들을 熱誠的으로 支援하기 始作한 것이 2005年 무렵의 일이다.

    그해 9月 뉴저지 州 에디슨 時 市長職에 出馬한 韓人 2歲 최준희氏를 支援 有勢한 것이 代表的인 케이스다. 그는 이 자리에서 黑人, 南美系, 아시안들이 政治的 指導力을 發揮할 때가 왔다고 力說했고, 3000餘 觀衆은 熱狂했다. 當時 그의 도움을 받은 少數人種 政治人 相當數가 當選된 後 오바마의 東部地域 核心 側近이 됐다. 지난 민주당 豫備競選 當時 누구보다도 일찍 오바마 支持를 宣言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들이다.

    中間選擧가 한창이던 2006年 8月쯤엔 筆者가 責任을 맡고 있는 뉴욕의 韓人有權者센터에도 오바마 캠프로부터 連絡이 왔다. 뉴저지 州 上院議員 選擧에 挑戰한 로버트 메넨데즈의 選擧運動을 支援하러 뉴저지를 訪問하는데 韓人들에 關해서 알고 싶으니 만나자는 提案이었다. 이는 市民運動 經驗이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提案이었고, 언제나 選擧資金冊을 통해 커뮤니티 團體를 接觸하는 힐러리 캠프와는 全혀 다른 行步였다.

    ‘黨 밖에서 黨을 接受한다’

    美國 大選의 黨內 競選은 傳統的으로 各 州의 오래된 黨 幹部들을 통해 代議員들을 接觸하는 方式으로 進行된다. 그러나 오바마는 무당嫡子, 政治無關心層, 政治 嫌惡層, 아직 有權者登錄을 하지 않은 市民權者 等을 타깃으로 삼고 이들을 통해 먼저 ‘오바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戰略을 驅使했다. 黨 밖에서 政治勢力을 만들어 黨으로 들어가 黨權을 쥔다는 것이다. 이는 2006年 中間選擧 直後에 오바마의 平生 同志인 데이비드 액슬로드와 그가 끌어들인 데이비드 플루프가 立案한 方式이었다(데이비드 플루프는 現在 오바마 캠프의 選擧對策委員長(campaign manager)이고, 데이비드 액슬로드는 首席戰略家를 맡고 있다).

    이러한 差異는 두 陣營의 競選運動 方式 差異로 이어졌다. 힐러리는 늘 洞네를 찾아다니며 ‘타운홀 미팅’ 方式으로 有權者를 만났지만, 오바마는 各 都市의 가장 큰 運動場에서 大規模 群衆大會를 開催하는 方式으로 貰를 몰아갔다. 오바마의 戰略은 的中했고, 바람은 暴風이 됐다. 全國에서 온라인을 통해 自願奉仕者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特히 20,30代 有權者들이 熱狂했다. 2007年 9月 힐러리의 안房인 뉴욕시 맨해튼 한복판의 그리니치빌리지 워싱턴스퀘어파크에 나타난 오바마는 “이것은 選擧運動이 아니라 社會運動이다. 캠페인이 아니라 무브먼트다”라고 宣言했다. 이番 大選에 臨하는 ‘오바마 政治’의 基本戰略을 보여주는 演說이었다.

    2008年에 들어서자 힐러리와 오바마의 對決은 黨內의 黨權과 非黨權, 主流와 非主流의 對決이 됐다. 2008年 豫備競選이 始作되기도 前에 全國的으로 有權者登錄 運動이 일어났으며 민주당 豫備競選에 參加하려고 黨籍을 바꾸는 現象마저 일어났다. 2008年 1月3日 始作된 아이오와 코커스는 筆者가 보기에는 힐러리의 留級 職員과 오바마의 無給 自願奉仕者들의 對決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바마는 多數의 豫測을 뒤엎고 勝利를 거머쥐었다.

    以後 빌 클린턴 前 大統領의 積極的인 介入과 傳統的인 支持層의 結集으로 힐러리가 뉴햄프셔에서 辛勝하는 等 몇 番의 엎치락뒤치락이 있었지만, 오바마의 새로운 政治 戰略은 最小限 黨內競選에서는 成功作으로 자리매김했다. 特히 오바마에 注目해 떼를 지어 民主黨에 登錄한 旣存의 무당嫡子들이 그 核心이었다. 빌 클린턴 前 大統領이 “소름이 끼치는 選擧”라고 表現한 것이 바로 이 部分이었다.

    26歲의 까까머리

    政治 嫌惡者들을 끌어들이는 오바마의 演說 戰略 뒤에는 그의 演說文 擔當 補佐官인 존 파브라우가 있다. 2004年 오바마는 보스턴 民主黨 全黨大會를 準備하는 過程에서 존 케리 陣營으로부터 캠프의 演說文 作成 自願奉仕者 大學生을 紹介 받았다. 그가 中央政治 舞臺에 華麗하게 데뷔하는 契機가 된 보스턴 全黨大會의 演說 亦是 이 까까머리 白人靑年의 도움으로 誕生했다.

    ‘變化, 希望, 비전(Change, Hope, Vision)’이라는 가장 平凡한 세 單語를 갖고 只今 巨大한 變革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補佐官이 바로 이 26歲의 존 파브라우다. 그의 强力한 演說文 德澤에, 黨內 組織을 못 본 체하고 黨 밖의 支持勢力을 민주黨員으로 만드는 오바마의 이른바 ‘풀뿌리(grass root)’ 競選戰略은 投票가 무엇인지도, 어떻게 投票를 하는지도 모르고 投票를 해본 적도 없는 市民들을 政治의 場으로 끌어들이는 데 成功했다.

    ‘새로운 政治’ 或은 ‘새로운 리더십’에 對한 오바마 參謀들의 感覺은 政治資金 部分에서도 힘을 發揮했다. 인터넷을 통해 選擧資金을 調達하는 ‘奇跡’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 募金과 풀뿌리 組織의 結合이 오바마 바람의 原動力이었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이는 마크 펜, 톰 빌삭, 매기 윌리엄스 等 몸값이 엄청난 민주당 系列의 最高 選擧 專門家들을 迎入하고 黨內 클린턴界를 總動員해 基金을 造成하는 힐러리 캠프와는 全的으로 달랐다.

    민주당의 政治資金은 크게 뉴욕의 월街와 할리우드에서 나온다. 傳統的으로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勢力은 事實上 유대系가 唯一했다. 힐러리 側은 예전 選擧에서처럼 이 유대系 資金줄을 찾아 나서는 方式을 擇했다. 反面 오바마 側에서는 뉴욕 金融街와 할리우드의 안房에서 直接 바람을 일으켜 힐러리에게 몰릴 資金줄을 遮斷한다는 戰略을 세웠다. 힐러리의 牙城인 뉴욕의 맨해튼과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大規模 群衆遊說를 强行한 데에는 이런 背景이 깔려 있었다.

    特히 오바마 側은 뉴욕을 움직이는 하버드 人脈을 組織해 ‘힐러리의 예일界 vs 오바마의 하버드界’라는 戰線을 形成하는 데 注力했다. 이때 오바마를 위해 하버드界를 動員하는 데 決定的인 役割을 한 人物이 오바마의 하버드 同窓인 中國系 테렌스 量 辯護士다. 테렌스 量은 韓人 1.5世代 活動家인 라이언 김을 오바마 側에 紹介해 그가 韓國 問題와 韓人들에게 關心을 갖도록 하는 데 決定的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에서는 일찌감치 오바마의 손을 들어준 오프라 윈프리가 役割을 忠實히 했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資金調達 方式 構築에 힐러리 側의 傳統的인 資金調達 方式을 遮斷하는 戰略이 結合되면서, 그의 選擧運動은 爆發力을 發揮했다. 萬一 힐러리 側의 資金 調達이 원활했다면 민주당 競選 戰勢는 逆轉됐을 可能性이 充分하다. 資金에 쪼들린 클린턴 前 大統領이 個人 주머니에서 500萬달러를 내놓고 個人財産을 擔保로 銀行에서 融資를 받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숨어 있는 雷管

    오바마 暴風은 結局 民主黨 내 主導權 競爭에도 影響을 미쳤다. 中南部 地域의 클린턴系가 數年間 大選戰 主導權을 잡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北東部 地域의 케네디界는 오바마에 注目하지 않을 수 없었다. 特히 오바마가 黑人이라는 事實 때문에 大選을 앞둔 민주당 안팎에서 人種問題는 매우 敏感한 이슈로 자리잡기 始作했다. 앞서 얘기했듯 1960年代의 케네디系가 人種問題를 契機로 黨內 主流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을 勘案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月26日 사우스캐롤라이나 競選을 앞두고 빌 클린턴 前 大統領의 ‘發言 事件’이 터진 것은 이러한 背景 때문이었다. 린든 존슨 大統領의 民權法 通過와 존 F 케네디의 民權運動을 比較하며 케네디 大統領과 제시 잭슨 牧師의 功績을 낮추는 듯한 뉘앙스의 發言을 한 일이었다. 케네디系의 座長인 에드워드 케네디 上院議員은 발끈했고, 그가 오바마 支持로 돌아서면서 모든 케네디系가 뒤를 따랐다. 이는 오바마가 케네디系의 ‘祝福’을 받게 된 決定的인 事件이었고, 오바마의 競選 勝利가 눈에 들어오게 된 契機였다.

    그러나 外部의 視角과 달리 人種問題는 민주당 黨內競選을 規定하는 核心이슈는 아니었다. 豫備競選만 해도, 人種問題가 이슈化하면 민주당은 망가지고 만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黨 指導部가 그러한 狀況을 크게 憂慮했기 때문에 힐러리와 오바마 兩側이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흐르는 것을 徹底히 막아섰다. 競選이 人種問題 爲主로 흘러가면 힐러리나 오바마나 똑같이 致命的인 傷處를 입는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本選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歷史的으로 最初의 黑白 對決이기 때문에 選擧戰이 本格化하면 人種關聯 戰略이 危險水位에 다다를 公算이 크다. 長期的으로는 效果가 否定的이지만, 네거티브 戰略은 恒常 敏感한데다 一擊에 판勢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進行될지 모를 일이다.

    美國의 大統領選擧戰에서 人種問題가 늘 불거진 것은 偶然이 아니다. 더욱이 이番에는 有色人種 候補가 支持率에서 앞서는 狀況이므로 그 敏感性은 完全히 次元이 다르다. 이제까지 오바마는 이 問題를 겨우겨우 넘겨왔지만, 앞으로도 繼續 ‘果然 黑人이 大統領이 되겠나’라는 質問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特히 가장 큰 危險은 白人으로부터 當하는 攻擊이 아니라 黑人 過激 活動家들로부터 나온다. 豫備競選에서도 보았듯 白人들로부터의 네거티브 攻勢는 오히려 오바마에게 同情票를 誘發할 수 있지만, 그가 過激 黑人그룹과 가깝다는 式의 네거티브는 破壞力이 클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이슬람敎徒라거나, 코란 앞에 宣誓를 했다거나, 인도네시아에서 美國에 對한 憎惡心을 품은 채 成長했다는 式의 네거티브다.

    周知하다시피 美國 內 黑人組織은 크게 兩分돼 있다. 1960年代 民權運動 時期 穩健派였던 마틴 루터 킹 牧師系와 分離主義를 主張했던 말콤 엑스系가 如前히 兩大 勢力을 이룬다. 오바마 候補는 大統領候補 出馬를 宣言하기 前까지 이 두 그룹과 좋은 關係를 維持했다. 그러나 政治權과 市民社會, 特히 白人 主流社會는 킹 牧師界를 主流로 認定하고 말콤 엑스界는 지나치게 過激하다고 評價한다.

    傳統的으로 킹 牧師系가 基督敎를 基盤으로 한다면 말콤 엑스界는 이슬람敎를 基盤으로 한다. 現在 말콤 엑스界를 이끌고 있는 爬羅칸 亦是 이슬람敎徒다. 오바마 候補와 이슬람敎에 關한 所聞이 끊이지 않는 것은, 美國과 이슬람 國家들 사이의 不便한 關係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黑人 勢力 內部의 構圖와 關係가 깊다. 爬羅칸을 中心으로 하는 黑人그룹이 얼마 前 오바마 支持를 宣言하며 움직이기 始作한 것은 가장 不利한 徵候다. 萬一 이들이 白人에 對한 憎惡心을 바탕으로 選擧戰에 本格 介入한다면 오바마에게는 致命的일 수밖에 없다. 그의 大選街道에 놓인 가장 危險한 伏兵이다.

    다시 네오콘이 움직이다

    ‘새로운 政治’라는 키워드로 보자면 共和黨의 競選過程이나 大選 캠페인은 相對的으로 눈이 덜 간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존 매케인 候補 側도 이 部分에 相當한 功을 들이고 있음을 確認할 수 있다. 旣存 워싱턴 秩序의 非主流임을 强調하거나, 中央政治舞臺에서 新人이나 다름없는 새라 페일린 副統領候補를 指名하는 等의 움직임이 모두 이를 反映한다.

    傳統的으로 美國의 選出職 選擧에서는 늘 現職이 優先權을 가졌다. 現職의 連任 出馬가 아니라면 副統領이 거의 自動的으로 候補가 되곤 했다. 그러나 2004年 조지 W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다시 副統領이 된 딕 체니는 일찌감치 次期 挑戰을 抛棄한다고 宣言했다. 共和黨의 人物難이 드러났다. 2000年 大選候補로 나와 初盤에 바람을 일으켰으나 조지 부시의 戰略家 칼 로브에게 脈을 못 추고 敗한 ‘공화당의 異端者’ 존 매케인이 거의 唯一했다. 間間이 擧論되는 唯一한 對抗馬는 9·11의 英雄인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市長 程度였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열린 공화당 全黨大會 마지막 날인 9月4日, 候補指名을 公式受諾韓 존 매케인 上院議員이 行事에 參席한 自身의 老母 로버타 매케인(96) 女史를 抱擁하고 있다.

    2006年 中間選擧에서 줄리아니는 健康上의 理由로 上院 出馬를 抛棄하고 차분하게 2008年 大權 挑戰을 準備했다. 그리고 그 裏面에는 共和黨 內 새로운 主流로 자리매김한 네오콘의 役割이 있었다. 이라크戰爭의 失敗로 共和黨은 中間選擧에서 慘敗했고, 責任을 면치 못한 네오콘들은 부시 行政府에서 徐徐히 밀려나기 始作했다. 레이건 行政府 時期에 登場해 클린턴 連任 期間 野人(野人)의 歲月을 보낸 그들에게 2008年 大選 權力의 向背는 到底히 自身들에게 유리할 수 없는 構圖였다.

    이 무렵 네오콘 主要 人士들은 自身들의 最初 根據地인 뉴욕으로 다시 모여들었고, 이탈리아 出身답게 화끈하고 거칠 것 없는 마초 스타일의 줄리아니와 接觸하게 된다. 낌새를 눈치 챈 政治 컨설턴트들이 줄리아니 캠프에 合流했고, 2007年 初盤에 들어서자 줄리아니의 이름이 公公然히 共和黨 次期走者로 擧論됐다.

    그러나 남의 말을 안 듣기로 有名한 줄리아니의 競選 戰略은 지나치게 輕率했다. 아이오와와 뉴햄프셔를 건너뛰고, 代議員 數가 가장 많은 플로리다를 席卷한 다음 뉴욕과 캘리포니아가 걸려 있는 2月5日 ‘슈퍼 火曜日’에서 競選을 끝장내겠다는 그의 選擧 戰略은 結局 失敗로 돌아갔고, 줄리아니의 戰略을 맡고 있던 네오콘들은 그를 抛棄하기에 이른다. 미트 롬니 前 매사추세츠 州知事, 마이크 허커비 牧師, 프레드 톰슨 上院議員 等 候補가 亂立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뉴햄프셔의 追憶

    反面 初盤 존 매케인의 成跡은 초라했다. 1月3日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매케인은 3位에 머물렀다. 傳統的인 宗敎的 保守主義者들이 이끌고 있는 아이오와 共和黨은 黨內 非主流로 낙인찍힌 매케인에게 絶對 好意的이지 않았다. 幹部들만 參加하는 코커스의 性格 自體가 自身에게 유리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看破한 매케인은 最初의 豫備競選이라 할 수 있는 뉴햄프셔를 첫 目標로 삼았다. 뉴햄프셔는 2000年 大選 挑戰 當時 그를 1等으로 밀어준 地域이었다.

    조지 W 부시와 존 매케인이 맞붙은 共和黨의 2000年 뉴햄프셔 豫備競選은 여러모로 事緣이 많은 經驗이었다. 當時 조지 부시의 戰略家였던 칼 로브는 매케인에게 史上 最惡의 네거티브 攻勢를 퍼부었고, 매케인의 오른팔이었던 마크 샐터는 거의 全面戰 水準으로 이를 받아쳤다. 이때의 經驗은 매케인의 政治的 同伴者이자 ‘大統領祕書室長 1順位’로 擧論되는 샐터에게 끔찍한 經驗으로 남아 있다(1996년 大選 當時 밥 돌 候補의 支援遊說로 히트를 한 매케인의 當時 演說이 바로 샐터의 作品이었고, 이 일로 政治 컨설턴트 業界의 스타가 된 샐터는 매케인과 自敍傳을 共同으로 執筆할 만큼 側近 中의 側近이다).

    最近 들어 로브가 매케인의 러닝메이트 指名에 關한 미디어 戰略 樹立에 寄與하면서 로브와 샐터도 徐徐히 關係를 回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화당 選擧 戰略家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2000年 豫備競選 當時 칼 로브는 매케인의 弱點을 지나치게 들춰냈고, 이 弱點은 8年이 지난 只今도 고스란히 매케인의 발목을 잡고 있다. 11月 本選擧戰을 앞두고 오바마의 戰略家인 데이비드 엑셀로드는 “우리는 네거티브를 拒否한다. 그러나 그렇게 攻擊이 오면 迅速하게 맞받아칠 것이다. 相對의 네거티브는 얼마든지 確保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욱이 2000年 豫備競選 當時 부시 陣營은 “結果가 있어야 改革이다(Reform with Result)”라는 口號로 매케인이 改革의 適任者가 아니라고 攻擊한 바 있다. 오바마와 매케인 候補가 모두 變化와 워싱턴의 改革을 외치고 있는 것이 現在 狀況이고 보면, 매케인은 이러한 게임에서 이미 敗北恨 經驗을 갖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周知하다시피 매케인은 貧弱하기 짝이 없는 選擧資金을 들고도 뉴햄프셔에서 勝利했고, 미시간 네바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1月29日 플로리다 競選에서 決定的인 勝機를 잡았다. 2月5日 슈퍼 火曜日에 確定된 그의 勝利는, 그러나 搖亂스럽게 進行된 민주당 競選에 比해 相對的으로 言論의 注目을 많이 받지 못했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공화당 副統領候補로 指名된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州知事가 8月30日 펜실베이니아 州 워싱턴에서 演說을 하고 있다.

    記憶해둘 것은, 이 무렵 競選을 抛棄한 줄리아니와 롬니를 接觸해 매케인 支持를 宣言하도록 督勵한 것이 바로 네오콘 陣營이었다는 事實이다. 이러한 過程을 통해 네오콘은 自然스럽게 매케인 陣營의 外交安保 專門家로 자리 잡게 되었다.

    異端者와 英雄

    1990年代 以來 美國의 政治權, 特히 共和·民主 兩黨은 社會的 價値에 關한 이슈에서 이념적으로 深刻한 兩極化 現象을 보이고 있다. 同姓結婚, 落胎, 銃器規制, 遺傳子 硏究, 社會福祉, 移民法案 等에서 漸漸 더 共通分母를 찾기 어려워진다. 조지 W 부시 大統領을 당선시키기 위해 南部地域의 宗敎的 保守勢力과 外交安保 分野의 네오콘들이 結合했던 2000年 大選은 그 頂點이었다. 以後 8年 동안 社會的 價値 이슈를 둘러싸고 美國 社會가 보여준 兩極化는 實로 엄청났다.

    이러한 共和黨 內 宗敎的 社會的 理念構圖로 볼 때 존 매케인은 邊方에 서 있는 人物이다. 그래서 레이건을 追從하는 共和黨內 正統 保守勢力은 그를 ‘공화당의 異端者’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外交安保 分野에서는 强勁한 매派에 屬하지만 社會價値 이슈에서는 거의 민주당에 近接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4年 공화당員들의 反撥에도 不拘하고 企業이 黨에 無制限의 政治資金을 寄附하는 소프트머니 禁止 法案을 민주당의 파인 골드스타인 議員과 共同으로 上程해 통과시켰다. 不法滯留者에게 永住權을 附與하자는 不法滯留赦免法案 亦是 공화당員들의 極烈한 反對를 무릅쓰고 民主黨의 에드워드 케네디 議員과 共同 發議, 上程하기도 했다. 존 매케인이 黨論에 執着하기보다는 自身의 政治哲學과 信念에 따라 議政生活을 해온 背景에는 앞서 登場했던 그의 政治的 同伴者 마크 샐터가 있는 것으로 傳해진다.

    그럼에도 네오콘 그룹이 매케인 候補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가 對外政策에서 이라크戰爭을 가장 强力하게 支持한 政治人이라는 事實이 한몫을 차지했다. 北核 問題에 對한 態度 亦是 斷乎하고 强勁하다. 筆者는 6月2日부터 3泊4日 동안 워싱턴에서 열린 유대人 로비團體 AIPAC의 政策會議에 參加해 外交政策에 關한 그의 見解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人權을 中心에 놓고 北韓 問題를 보고 있었다. 그는 2003年 北韓 人權法이 議會에서 通過될 때 샘 브라운백 議員과 함께 가장 積極的으로 나섰던 經歷도 갖고 있다.

    이러한 態度는 잘 알려져 있듯이 베트남戰爭의 英雄이라는 그의 背景과 無關하지 않은 듯하다. 베트콩의 釋放 提議를 拒否하고 6年間 收容所 生活을 견뎌낸 그가 美國으로 돌아올 當時 닉슨 大統領이 直接 迎接한 것은 有名한 逸話다. 9月1日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열린 공화당 全黨大會는 그의 이러한 이미지를 最大限 活用하는 것이었다. 參席한 모든 在鄕軍人, 愛國心에 불타는 保守性向의 白人 男性들은 그의 英雄的인 記錄이 映像物로 上映되자 말을 잊은 채 感動의 눈물을 흘렸다.

    매케인 캠프의 이러한 雰圍氣는 앞으로 進行될 選擧에서도 네오콘 그룹이 적잖은 影響力을 行使할 것임을 斟酌케 한다. 이미 매케인 캠프의 外交安保 分野는 거의 네오콘 人士들이 차지하고 있다. 네오콘의 皇太子로 불리는 윌리엄 크리스톨과 제임스 울시, 로버트 케이건 等이 그들이다.

    윌리엄 크리스톨은 헤리티지財團과 함께 兩大 保守 싱크탱크로 불리는 美企業硏究所(AEI)의 機關紙 ‘위클리스탠더드(Weekly Standard)’의 發行人이다. 興味롭게도 크리스톨은 2000年 競選에서 매케인을 支持했고, 이 때문에 한동안 부시 大統領과는 疏遠한 사이였다. 그러나 부시 大統領이 連任에 成功하고 네오콘이 그 中心에 서자 크리스톨과 매케인 參謀들의 關係도 疏遠해졌다가, 이番 選擧戰을 契機로 關係가 復元되고 있다.

    제임스 울시는 클린턴 行政府에서 ‘超黨的 人事를 情報核心에 起用한다’는 趣旨로 CIA局長에 任命됐다가 클린턴 行政府의 政策基調에 同意하지 못해 뛰쳐나온 人物이다. ‘樂園과 權力에 對해’라는 著書로 이름이 알려진 로버트 케이건은 9·11 直後 부시 大統領에게 사담 후세인 除去를 力說하는 公開書翰을 보내며 有名稅를 탔다.

    會心의 카드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이처럼 ‘테러와의 戰爭’에 앞장섰던 네오콘 人士들의 캠프 合流로 인해, 이番 大選에서 이라크戰爭은 決코 빠질 수 없는 이슈가 됐다. 2003年 3月 美軍이 이라크를 侵攻한 뒤 美國에서 實施된 各種 選擧 때마다 이라크戰爭은 단골 메뉴였다. 2004年 大選 當時에는 이라크의 戰況이 相對的으로 良好했기 때문에 부시 大統領의 再選이 可能했지만, 2年 뒤인 2006年 中間選擧에서는 戰況이 수렁으로 빠져든 까닭에 민주당이 12年 만에 上下 兩院에서 모두 多數黨을 차지할 수 있었다.

    덧붙여 經濟는 어느 大選에서나 가장 威力的인 主題다. 11月 大選을 두 달餘 앞두고 實施되는 各種 輿論調査 結果 美國人들은 가장 關心을 끄는 이슈로 經濟問題를 꼽고 있다. 長期的인 高油價와 서브프라임 모기지(非優良住宅 擔保 貸出) 事態, 그로 인한 信用梗塞 等이 겹치면서 景氣沈滯에 對한 國民의 不安感이 增幅되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有權者의 70% 가까이가 ‘經濟不安이 이라크戰爭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는 事實이다. 이라크戰爭과 經濟問題라는 두 이슈가 11月 大選에서 한몸으로 엮여 있는 셈이다.

    이러한 構圖 때문에 오바마 側에서 準備하고 있는 本選 戰略의 核心에는 ‘존 매케인이 執權하면 부시가 또 한 番 執權하는 格’이라는 口號가 자리 잡고 있다. ‘부시 3期’가 되면 美國은 거의 亡하게 될 것이라고 剛하게 攻擊하는 戰略이다. 오바마 바람이 暴風이 되고 아직까지 그 熱氣가 식지 않은 것은 旣存 政治權에 對한 美國人들의 不信과 炎症이 反映된 結果라는 게 한결같은 分析이다. 오바마가 외치는 ‘變化’와 ‘希望’이라는 口號가 繼續 有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兩側 모두 景氣 活性化에 對한 뾰족한 代案이나 政策이 없다. 景氣沈滯의 原因을 따지고 責任을 묻는 水準에 不過한 것이다. 그렇다면 差別性은 ‘國民의 現實的인 어려움에 共感하는 能力을 누가 더 갖추고 있는가’로 모아진다. 워싱턴에서 잔뼈가 굵은 旣存 政治人들로서는 當然히 이런 差別性을 갖기 어렵다. 自身의 弱點을 잘 알고 있는 매케인 候補가 43歲의 젊은 女性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삼은 것 亦是 이러한 構圖를 反映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매케인과 共和黨은 그間 오바마와 힐러리에게만 集中돼 있던 미디어의 視線을 끄는 데 一旦 成功했다.

    일린과 오바마가 對比된다면

    힐러리의 敗北로 全國의 中産層 女性 有權者들의 虛脫感이 높다는 輿論調査가 있다. 매케인 側에서는 當分間 가장 數字가 많은 中産層 女性 有權者를 겨냥해 ‘最初의 女性副統領이 먼저인가 最初의 黑人 大統領이 먼저인가’를 强調해서 물을 것이다. 여기에 ‘다운症候群이 있다는 걸 알고도 아이를 出産한 페일린의 透徹한 落胎反對論者’이미지는 社會價値 이슈에서 黨內 少數派에 該當하는 매케인의 立地를 補强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過程을 통해 페일린과 오바마가 對比되는 構圖가 그려진다면 매케인은 자연스럽게 그보다 上位의 位置를 占할 수 있게 된다. 이는 筆者가 공화당 全黨大會 둘째 날에 캠페인 戰略 브리핑에서 直接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김동석

    1958年 江原道 華川 出生

    춘천고 卒業, 成均館大 入學

    1985年 渡美, 뉴욕市立大 數學(政治學)

    現 뉴욕뉴저지韓人有權者센터 所長


    共和黨이 꺼내든 會心의 카드는 이러한 意味에서 그럴듯했고, 페일린이 副統領候補 討論會에서 老將 존 바이든을 相對로 無難한 對決을 펼칠 수 있을지가 關鍵으로 作用할 것이다. 여기에 TV 討論에서 오바마 候補가 매케인 候補에게 지난 8年間 부시 行政府의 ‘失敗’를 어떻게 따지고 몰아갈지, 매케인은 이를 어떻게 防禦해낼지가 두 달餘 남은 2008年 美 大選의 分水嶺이 된다. 大選候補들의 TV 討論은 9月26日 미시시피臺, 10月7日 테네시 州 벨몬트臺, 10月15日 뉴욕 호프스트라臺에서 열리고, 副統領候補 討論會는 10月2日 미주리州 세인트루이스臺에서 開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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