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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植民地’, 노스캐롤라이나 露語노크 섬|新東亞

‘사라진 植民地’, 노스캐롤라이나 露語노크 섬

風雲兒 롤리가 불지핀 永遠한 話頭, ‘想像의 外地’

  • 신문수 서울大 敎授·美國文學 mshin@snu.ac.kr

    入力 2006-01-16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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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現代史에서 美國은 韓國과 密接한 關係를 맺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美國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美國은 如前히 가깝고도 먼 나라이며, 親熟한 듯하면서도 낯선 社會다. 그저 皮相的으로 理解하던 나라, 美國을 바로 알기 위해 美國 文化史의 里程標가 된 現場을 찾아 歷史의 裏面을 들춰보는 企劃을 마련했다. ‘公式 美國史’의 餘白을 發見하는 이 記錄은 讀者를 살아 숨쉬는 過去 旅行으로 案內할 것이다. 美國學 專門家인 서울대 新聞數 敎授가 가이드를 맡았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네덜란드 揷畵가 테오도르 드 브리가 1590年 존 화이트의 그림을 版畫로 옮긴 作品, ‘原住民 母女.’

    大部分의 美國史는 英國人이 新大陸에 建設한 定着地 세 곳에 對한 技術로 始作된다. 1607年 버지니아에 建設된 제임스타운, 1620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巡禮者 淸敎徒들이 세운 플리머스 植民地, 그리고 1630年 존 윈스롭(John Winthrop)을 따라 英國에서 移住해온 淸敎徒들이 보스턴에 開拓한 매사추세츠만(灣) 植民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新大陸에서 植民의 꿈을 펼쳐보려는 많은 努力이 있었다. 英國의 新大陸 建設은 先驅者들의 犧牲과 挫折, 그리고 이에 屈하지 않는 挑戰精神을 밑거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 黎明期 歷史에서 가장 注目받는 것은 엘리자베스 調整(朝廷)의 風雲兒 월터 롤리(Walter Raleigh)가 只今의 노스캐롤라이나 露語노크섬에 建設하고자 했던 植民地다.

    롤리는 1585年과 1587年 두 次例에 걸쳐 植民 遠征隊를 露語노크에 보냈다. 그러나 첫 遠征隊는 苛酷한 環境을 견디지 못하고 不過 10個月 만에 英國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두 番째 遠征隊는 後續 遠征隊가 當到했을 때 이미 蹤跡이 杳然한 狀態였다. 數次例의 搜索과 探問에도 不拘하고 그들의 行方을 끝내 알 수 없어 歷史의 미스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 時期에 英國은 바야흐로 스페인의 無敵艦隊를 擊破하고 大西洋의 制海權(制海權)을 掌握함으로써, 유럽의 뒤처진 섬나라에서 海洋帝國을 꿈꾸는 新興 强國으로 浮上하고 있었다. 英國이 大西洋의 새로운 强者로 떠오르는 데 新大陸 開拓을 向한 롤리의 꿈과 執念이 牽引車 구실을 했음은 勿論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女王을 기려 自身이 버지니아라고 명명한 땅에 ‘롤리視(The City of Raleigh)’를 建設, 自身의 이름도 함께 남기려 했던 롤리의 꿈은 이렇게 霧散되고 말았다.

    롤리의 植民 事業은 失敗했지만, 그의 꿈은 後世에 偉大한 遺産으로 남아 ‘멋진 新世界’를 建設하는 原動力이 됐다. 永遠한 帝國 建設을 向한 그의 비전은 ‘언덕 위의 都市’를 세우고자 한 존 윈스롭의 希願(希願)에, 다니엘 分의 西部 開拓 神話에, 조지프 스미스가 이끈 몰몬교徒들의 유타 長程에, 20世紀 宇宙 探險의 熱望에 어른거리고 있다. 그 遺産의 直接的 相續者인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은 롤리의 비전과 精神을 기려 1792年, 노스캐롤라이나의 中央 附近에 週(州)의 새로운 行政首都를 建設하고 그 이름을 ‘롤리’로 명명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始原으로

    롤리의 ‘사라진 植民地’ 神話를 찾아 露語노크섬의 롤리 要塞 史跡地(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를 돌아보려 노스캐롤라이나의 채펄힐을 떠난 것은 2002年 8月 下旬 무렵이었다. 隣近의 듀크대에서 1年間 硏究年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到着한 直後였다.

    이곳 사람들은 채펄힐, 더럼, 롤리를 잇는 三角形의 地域을 흔히 ‘硏究 三角紙’라 부른다. 채펄힐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더럼의 듀크大, 롤리의 또 다른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를 主軸으로 硏究所가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特히 醫學, 生命工學 分野 硏究가 活潑한 이 地域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와 더불어 美國에서 高級 硏究 人力의 密度가 가장 높은 곳이다. 自身의 이름을 딴 都市를 中心으로 한 地域이 美國 最高의 硏究 團地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면 엘리자베스 宮廷의 眞正한 르네상스人이던 롤리 또한 흐뭇해하리라.

    롤리를 벗어나니 어디를 보나 平坦한 草原과 숲이다. 屛風처럼 道路의 兩쪽을 에워싼 나무숲 너머로 하늘이 푸르다. 道路邊의 나무는 곧게 뻗은 北美의 美松이나 전나무 等 針葉樹가 主宗을 이룬다. 햇살은 如前히 여름의 熱氣가 배어 있다. 이렇게 3時間 넘게 달린 後 단조롭던 風景이 달라진다고 생각한 瞬間, 忽然 길이 트이면서 긴 다리가 幻想처럼 펼쳐진다. 野生動物 保護地帶로 有名한 앨리게이터 江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왼쪽 멀리 앨버멀만(灣) 쪽으로 하얀 波濤가 눈부시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이윽고 길은 크로아턴만(灣)을 가로지르는 엘리자베스 데어 다리를 지나 露語노크 섬에 들어서고, 곧바로 섬의 第一 큰 都市 만테오에 이른다. 만테오는 1584年 롤리의 遠征隊를 따라 英國으로 건너가 英語를 배우고 1585年의 植民者들의 通譯 兼 길잡이로 活躍한 크로아턴族 酋長의 아들로, 그의 이름을 딴 만테오 地域은 오늘날 大西洋 沿岸 有數 休養地의 하나로 탈바꿈했다.

    案內센터에 들러 案內 冊子와 地圖를 얻은 다음, 섬을 南北으로 가로지르는 버지니아가(街)로 들어섰다. 거리 兩 옆으로 食堂과 工藝品을 파는 가게들이 櫛比하다. 버지니아가를 따라 섬 北쪽으로 20分假量 달리자 오른쪽으로 이내 롤리 要塞 史跡地가 보인다. 案內센터로 들어가니 마침 16世紀 植民者들과 原住民의 삶 이모저모를 담은 짧은 映畫를 放映하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畵面을 凝視하면서 4世紀를 훌쩍 건너뛰어 팍스 아메리카나 文明의 시원(始原)으로, 아니 正服과 收奪로 얼룩진 歷史의 序章 속으로 빠져들었다.

    冒險辱과 野望

    월터 롤리가 버지니아 植民地 建設을 具體化한 것은 1584年 무렵이다. 當時 롤리는 엘리자베스 女王의 寵愛를 한몸에 받는, 宮廷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1581年 아일랜드 먼스터 地方의 植民地 叛亂 平定에 參加해 이름을 얻은 後 런던으로 돌아와 植民地 運營의 問題點과 解決策을 進言하면서 女王의 注目을 받기 始作한 롤리는 뛰어난 言辯과 騎士道的 行動으로 女王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女王이 巡行 中 진흙땅에 이르러 멈칫거리자 自身의 망토를 벗어서 땅에 깔아 女王이 젖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는 逸話는(사실 與否는 確實하지 않지만) 女王에게 바친 페트라르카(이탈리아 文藝 復興期의 詩人) 風(風)의 年始와 더불어, 女王에 對한 그의 獻身과 熱情의 程度를 斟酌케 한다. 엘리자베스 女王은 이 훤칠한 美男 銃身(寵臣)의 忠誠에 對한 報答으로 아직 30世도 채 안된 그에게 毛織物 獨占 輸出權과 全國의 主流 販賣貰를 徵收할 수 있는 莫大한 利權(利權)을 附與했다. 同時에 런던 近郊 템스江邊의 넓고 고풍스러운 더럼(Durham)街를 하사했다. 西部 大西洋 沿岸 데번州 出身의 시골뜨기 靑年이 하루아침에 런던 第一의 富者가 된 것이다.

    莫大한 財産을 거머쥐자 롤리의 타고난 冒險辱과 野望이 꿈틀거렸다. 그는 일찍이 뉴펀들랜드에 植民의 꿈을 펼치다 죽은 의붓兄 험프리 길버트의 新大陸 植民地 建設 特許權을 自身에게 내달라고 女王에게 懇請했다. 1584年 3月, 엘리자베스 女王은 롤리의 請대로 그에게 ‘基督敎 君主가 實質的으로 所有하고 있지 않은 모든 異敎徒의 땅을 植民하고 所有할 權利’를 附與했다. 이 勅許야말로 롤리의 앞날과 英國의 新大陸 進出을 결정짓는 重要한 契機가 됐다.

    周知하듯 英國의 新大陸 進出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 비해 한 世紀假量 더뎠다. 英國은 宗敎改革의 餘波로 인한 社會的 動搖와 政治的 不安定 때문에 海外에 關心을 돌릴 餘力이 없었기 때문이다. 英國의 新大陸 交涉史는 헨리 7世의 後援을 얻은 베니스 出身의 존 캐벗이 1497年 北美 海岸을 探險한 것에서 始作된다. 콜럼버스가 서인도制度에 발을 내디딘 지 不過 5年 뒤니 比較的 빨리 新大陸 遠征 隊列에 들어선 셈이다. 그렇지만 英國은 엘리자베스 女王 治世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호킨스, 리처드 호어와 같은 몇몇 冒險家의 散發的인 遠征 活動을 除外하고는 별다른 進出 試圖가 없었다.

    엘리자베스 女王의 執權과 함께 王權이 安定되면서 英國은 비로소 海外로 關心을 돌리기 始作했다. 特히 1577年에서 1580年까지 3年에 걸친 드레이크의 世界 一周는 英國 社會에 新世界에 對한 關心을 高調시켰다.

    드레이크가 歸還한 1580年, 스페인 國王 펠리페 2世는 포르투갈을 倂合해 이베리아 半島,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地中海, 그리고 新大陸 全體를 아우르는 大帝國의 强力한 君主로서 立地를 굳혔다. 그는 이 厖大한 帝國 經營에 所要되는 莫大한 資金을 新大陸에서 收奪한 金은(金銀)으로 充當했다. 當時 20萬名을 넘어선 스페인의 海外 植民이 原住民을 收奪해 本國으로 보내온 莫大한 量의 金과 銀은 新大陸을 幻想的인 엘도라도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한便 스페인은 新大陸에서 蓄積한 富(富)를 財源으로 養成한 强力한 軍事力을 바탕으로 漸次 增大하는 新敎 勢力에 對抗해 가톨릭 敎會의 守護者를 自處했다. 反面 英國은 스페인 帝國 經營의 癌的 存在이던 네덜란드 內 프로테스탄트들을 支援하면서 新敎 勢力의 擁護者로 浮上했다. 여기엔 英國 政府에 反旗를 들도록 아일랜드의 가톨릭敎徒들을 끊임없이 煽動한 스페인에 對한 反感도 作用했다.

    英國이 스페인과 맞서기 위해서는 펠리페 2歲의 補給基地 구실을 하던 新大陸에서 스페인 勢力을 制御해야 했다. 스페인 貿易船에 對한 擄掠질은 이런 理由로 默認됐다. 드레이크를 비롯해 歷史에 이름을 남긴 大部分의 英國 항해가나 植民者가 實狀 海賊이었음에도 英國 王室이 이들에게 爵位를 주어가며 賞讚한 데는 이런 政治的·宗敎的 動機가 깔려 있다.

    英國의 國內 事情 또한 新大陸 進出의 必要性을 惹起했다. 1500年 무렵 200萬이던 人口가 1600年 初엔 375萬으로 急增했다. 게다가 養母 需要가 늘면서 農地를 牧草地로 轉換한 종획 運動의 餘波로 시골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小作農들이 都市로 몰려들었다. 런던의 人口는 이 時期에 세 倍 以上 增加했다. 거리에는 거지와 浮浪者들이 득실거렸다. 이들의 배고픔을 解決해주고 管理하는 일은 支配層의 큰 짐이었다. 그들은 大多數 人口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狀況이 長期化하면 結局 社會的 秩序와 紀綱이 무너지지 않을까 念慮했다. 懶怠함에 對한 境界가 이 時期 英國 文學을 貫流하는 重要한 모티프를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事情의 反映이다.

    마泥土워츠族의 歡待

    롤리를 尊敬하고 그의 아일랜드 遠征을 讚揚하는 詩를 쓴 에드먼드 스펜서는 “當身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恒常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라고 쓴 바 있다.

    이런 時代的 雰圍氣에 힘입어 롤리는 植民의 꿈을 具體化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植民할 땅을 物色할 偵察隊를 新大陸에 보내기로 했다. 엘리자베스 女王으로부터 特許를 받은 뒤 不過 한 달 만인 1584年 4月27日, 그는 自身이 이끌던 新大陸 硏究 모임의 會員인 필립 애마더스와 아서 發露를 大將으로 한 偵察隊를 新大陸에 보냈다.

    그들은 植民 候補地로 스페인의 植民基地인 플로리다의 세인트어거스틴에서 適當히 떨어져 있으면서도 카리브海에서 本國으로 回航하는 航路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念頭에 뒀다.

    이윽고 노스캐롤라이나의 아우터 뱅크스에 이르러 遠征隊는 이곳 地形에 注目한다. 이곳은 스페인 植民者들의 눈을 避할 수 있는 隱身處를 提供하면서 回航路에 近接해 있었기 때문. 遠征隊는 附近을 좀더 仔細히 踏査하기로 하고, 只今의 케이프 해터러스 附近의 좁은 海路를 통해 팸리코만으로 進入했다. 그들은 只今의 해터러스크섬에 上陸한다.

    一行은 鬱蒼한 숲에 토끼와 사슴이 뛰노는 豐饒로운 光景에 魅了됐다. 發露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꽃 냄새로 마치 꽃이 滿發한 奧妙한 政院에 와 있는 듯한” 氣分에 젖었다. 踏査 3日째, 이들은 인디언 原住民과 처음 遭遇한다. 그들은 윈氣나 酋長이 이끄는 마泥土워츠族이었다. 그들은 友好的이었다. 酋長의 동생 그란가니에모가 特히 親切해 一行을 自身의 집이 있는 北쪽의 露語노크 섬으로 案內하며 歡待했다.

    遠征隊는 附近을 踏査하고 結局 露語노크섬이 定着地를 建設하기에 最適地란 結論을 내렸다. 一行은 감자와 담배를 얻고 原住民을 데리고 오라는 롤리의 當付대로 두 名의 原住民, 만테오와 완體즈를 帶同해 9月 中旬 英國으로 돌아왔다. 發露의 報告를 들은 롤리가 洽足해한 것은 勿論이다.

    案內所의 映寫室을 나오니 밖은 햇살이 눈부시다. 햇살은 400年 前에도 이처럼 時間이 停止한 듯한, 그래서 아득한 始原의 世界에 와 있는 듯한 幻想을 불러일으킬 만큼 燦爛했을까? 1年의 太半은 안개로 자욱하고 비가 내리는 축축한 英國 땅에서 온 발로 一行은 이 눈부신 南國의 햇살만으로 에덴동산에 와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500에이커가 넘는 롤리 要塞 史跡地는 얼른 봐서는 여느 公園과 다름없다. 案內센터를 中心으로 駐車場, 잔디밭, 잘 손질된 나무가 調和를 이루며 고즈넉한 風景을 演出한다. 그러나 한 文明의 起源地라고 여기기에 그것은 너무나 凡俗한 모습이다.

    民間 主導의 ‘自立型 植民地’

    몇 걸음 걷지 않아 ‘롤리의 버지니아’라는 큰 案內板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女王이 하사한 特許에 따라 롤리가 애머더스와 發露를 아메리카의 海岸으로 보냈고, 두 사람이 그곳의 인디언 만테오와 완體즈를 帶同하여 돌아왔다는 內容 等이 적혀 있다.

    롤리는 이 무렵 植民 事業이 豫想보다 훨씬 厖大하고 費用이 많이 든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는 女王에게 國家的 事業으로 植民地 建設을 後援할 것을 要請했다. 그러나 怜悧한 女王은 事業이 失敗할 境遇의 威信 損傷과 스페인과의 正面衝突을 憂慮해 롤리의 要請을 拒絶했다. 그 代身 그에게 記事 爵位를 내려 植民地 總督으로서의 位相을 높여주고, 女王 自身을 상기시키는 名稱으로 植民地를 부르도록 許諾하고, 自身 所有의 배 한 隻을 내주는 線에서 銃身을 달랬다.

    롤리는 하는 수 없이 植民 事業에서 남게 될 利益을 分配하는 條件으로 費用을 分擔할 投資者를 募集해 일을 推進해 나갔다. 民間 投資者들이 合資한 一種의 株式會社가 植民地 建設의 主體가 되는 이와 같은 方式은 以後 英國의 北아메리카 植民地 建設의 模型이 됐다. 제임스타운은 勿論 플리머스 植民地, 매사추세츠만 植民地도 모두 이런 方式으로 建設된 것이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월터 롤리는 英國 新大陸 建設의 先驅者다.

    民間이 主導하는 植民地 建設 方式은 北美의 英國 植民地를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植民地와 區別하는 큰 要因이 됐다. 植民者들은 投資 費用을 건지려고 植民 事業에 熱誠的으로 臨했다. 이는 本國에 依存하지 않는 自立型 植民地의 建設이 促進되는 結果를 낳았다. 特히 民間人만의 參與로 民主的 方式의 植民地 運營이 可能해져 後날 民主主義 政治 體制 定立의 礎石이 됐다.

    롤리의 1次 植民 遠征隊는 1585年 4月9日 플리머스를 떠나 歷史的인 航海길에 올랐다. 500名으로 構成된 遠征隊의 航海 責任者는 롤리의 조카인 리처드 그렌빌, 現地 責任者는 아일랜드 遠征 經驗이 있고 築城 專門家인 랄프 레인이었다. 이밖에 新大陸 硏究모임의 中心人物이요, 數學·天文學·鍊金術·測量·航海術의 權威者인 토머스 해리어트, 現地의 事情을 스케치할 火가 존 화이트, 踏査 責任者였던 애머더스와 발로, 그리고 그동안 해리어트에게 英語를 배운 原住民 만테오와 완체즈도 길잡이 兼 通譯으로 乘船했다. 指揮 體制의 二元化는 遠征隊의 二元的 性格을 反映한 것이다.

    遠征隊의 大多數는 給料를 받는 傭兵이고, 實際 新大陸 定着 豫定者는 全體의 4分의 1이 若干 넘는 108名이었다. 遠征隊의 1次 目的은 定着地 建設이었지만, 스페인과 葛藤이 深化돼 스페인 植民者들의 攻擊에 對備할 必要가 있었고, 또한 오가는 中에 스페인 貿易船을 掠奪하기 위함이었다. 卽 롤리가 建設하려던 植民地는 定着型 植民地에 스페인式의 征服者型 植民地를 加味한 것이었다.

    食糧難, 原住民과의 葛藤…

    그러나 植民 形式의 混線은 繼續 問題를 惹起했고 롤리의 植民 事業이 失敗한 窮極的 原因으로 作用했다. 植民 費用의 早期 回收와 一攫千金의 欲望은 植民地에서 金과 銀처럼 곧바로 돈이 될 수 있는 것만 찾게 했고, 이로 因해 定着을 위한 努力이 疏忽해져 結局 植民 事業 全體의 失敗로 이어졌다. 金銀의 收奪을 主目的으로 하는 스페인式 植民地가 아니라 農産品을 生産하는 自立型 植民地 建設이 新大陸 經營의 根本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後날 존 스미스에 依해 비로소 確固해진다.

    遠征隊의 航海는 순조롭지 못했다. 途中에 暴風을 만나 附屬腺 한 隻을 잃는 迂餘曲折을 겪으며 遠征隊가 露語노크섬에 到着한 것은 8月 初. 植民者들은 곧 랄프 레인의 指揮로 城砦를 쌓고 定着을 서둘렀다. 그렌빌은 8月 末 回航길에 올랐다. 섬에 남은 100餘 名의 植民者는 食糧難을 念慮하면서 낯선 環境에 適應하려고 努力했다. 遠征隊는 科學者 해리어트를 中心으로 隣近의 自然 環境과 氣候 및 地形을 仔細히 記錄하고 原住民의 生活相도 注意 깊게 살폈다.

    겨울이 닥치자 食糧難은 切迫한 現實 問題로 다가왔다. 굶주림을 못이긴 植民者들은 原住民 마을에 내려가 食糧을 掠奪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植民者들이 不知不識間에 傳染시킨 紅疫과 天然痘로 많은 原住民이 죽자 이들의 憤怒가 限껏 高調됐다. 마침내 原住民 酋長 윈氣나는 白人 植民者들을 除去하기로 決心하고 이웃 部族들과 聯合해 大規模 攻擊을 準備했다. 가까운 인디언의 提報로 이런 事實을 알게 된 植民者들은 酋長 윈氣나에게 會談을 提議하고 이에 應한 윈氣나를 만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奇襲 攻擊으로 그를 殺害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遠征隊는 가까스로 겨울을 났다. 그러나 기다리는 補給線은 감감無消息이었다. 英國으로 돌아온 그렌빌의 報告를 듣고 롤리는 서둘러 補給船을 보내려 했지만 스페인과의 戰爭 기운이 高調돼 事情이 如意치 않았다. 그러던 6月 初, 뜻밖에도 프란시스 드레이크의 배가 섬에 寄港했다. 드레이크는 카리브海의 스페인 勢力圈 깊숙이 들어가 산토도밍고를 攻掠하고 이어 플로리다의 스페인 植民地 세인트어거스틴을 侵攻한 뒤 北上하던 길이었다.

    植民大將 레인은 드레이크에게 배와 食糧의 支援을 要請했다. 그는 原住民들과의 關係도 惡化되고 水深이 얕아 海岸 接岸度 어려운 露語노크를 버리고 체서피크灣 쪽으로 植民地를 옮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暴風雨가 몰아쳐 드레이크가 提供한 배가 破損되고 말았다. 레인은 植民地 以前 計劃을 抛棄하고 英國으로 돌아가기로 作定한다. 레인 一行이 드레이크의 배에 乘船해 英國으로 떠난 3日 뒤, 롤리가 보낸 補給線이 露語노크에 到着했다.

    “新大陸 宣傳은 欺瞞”

    7月에는 다시 400餘 名의 植民者를 태운 그렌빌의 後續 補給線이 當到했다. 이들은 當然히 있을 것으로 여겼던 植民者들을 發見할 수 없어서 唐慌했다. 隣近을 搜索하다 만난 인디언을 통해 이들이 本國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렌빌은 定着村을 放置할 수 없어 15名의 軍人을 露語노크섬에 남겨놓고 回航한다. 롤리의 1次 植民 事業은 이렇게 成果 없이 끝났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롤리가 보낸 植民 遠征隊의 科學者요 記錄者인 토머스 해리어트. 오른쪽은 그가 쓴 冊 ‘새로 發見된 버지니아에 對한 事實的 報告書’의 表紙.



    英國으로 돌아온 植民大將 레인은 롤리에게 버지니아 現地 事情을 報告했다. 버지니아와 原住民에 對한 그의 視角은 그동안 完全히 바뀌었다. 인디언은 더는 高貴한 野蠻人이 아니라 奸巧하고 好戰的인 未開人日 뿐이고, 露語노크 또한 天惠의 地上 樂園이 아니라 살기 힘든 瘠薄한 땅일 뿐이었다. 레인은 마틴 프로詩버가 發見하고자 했던 아시아로 가는 西北航路를 찾든지 良質의 金鑛을 發見하지 못하는 限, 露語노크는 植民할 만한 地域이 아니라는 結論을 내렸다. 레인과 함께 돌아온 다른 植民者들 亦是 “新大陸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宣傳은 欺瞞에 不過했다”고 憤痛을 터뜨렸고, 植民地 建設의 熱氣는 急速히 식어갔다.

    이에 遠征隊의 科學者요 記錄者인 해리어트는 植民地의 實相을 正確히 알리는 글을 써 사람들의 關心을 되돌려놓겠다는 생각에, 만테오의 도움을 받아 新大陸에 關한 踏査記를 執筆했다. 그것이 有名한 ‘새로 發見된 버지니아에 對한 事實的 報告書(A Brief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다. 新大陸 風物에 對한 最初의 繪畫的 描寫라고 할 수 있는 존 화이트의 水彩畫가 곁들여진 이 冊은 네덜란드의 揷畵가 테오도르 드 브리가 1590年 화이트의 水彩畫를 自身의 版畫로 代替한 後 4個 國語로 飜譯 出版하면서 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冊의 序文에서 해리어트는 植民者 가운데 自身만이 알곤킨 인디언 言語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自身의 記錄이 가장 믿을 만한 것임을 强調했다. 그는 新大陸은 富를 챙길 수 있는 機會의 땅이며 그 潛在的 可能性을 看過하면 안 된다는 것, 인디언과의 交易은 雙方 모두에게 有益하다는 것을 力說했다.

    그렌빌이 露語노크 섬에 남겨놓은 15名의 植民者를 위해서도 後續 遠征隊를 迅速하게 보낼 必要가 있었지만, 植民事業의 危險과 費用 問題 때문에 롤리는 한동안 망설였다. 롤리에게 勇氣를 불어넣은 사람은 英國 海洋 帝國 建設의 牽引車였던 리처드 해클루트. 그는 체서피크灣 안쪽에 은광(銀鑛)이 있다는 旅行者들의 情報를 根據로 定着地를 그곳으로 옮긴다면 좋은 成果가 있을 것이라고 롤리를 激勵했다. 때마침 엘리자베스 女王으로부터 아일랜드 叛軍 平定의 공으로 領地를 새로 下賜받자 롤리는 곧 後續 遠征隊 構成에 着手했다.

    그러나 植民 事業의 危險性이 널리 알려져 植民者 募集은 쉽지 않았다. 롤리는 打開策의 하나로 植民者들에게 500에이커의 땅(當時 英國 大部分의 農場은 이보다 훨씬 작은 規模였다)을 提供할 것이라고 廣告했다. 그 結果 新大陸으로 移住할 뜻이 보다 確固한 사람이 多數 參與했다.

    마침내 1587年 5月8日, 110名의 2次 遠征隊가 세 隻의 배로 플리머스港을 떠났다. 이 中에는 女子 17名, 어린이 9名도 있었다. 大將은 以前에 스케치 畫家로 參與한 존 화이트가 맡았다. 만테오度 다시 遠征隊에 參加했는데, 롤리는 그를 露語노크 섬을 다스리는 領主로 임명했다. 이로써 만테오는 英國의 官職을 받은 北美 最初의 原住民이 됐다.

    航海는 1次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의 連續이었다. 中間에 食糧을 실은 附屬船을 잃어버리고 카리브海의 中間 寄港地에서 補給品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遠征隊가 露語노크 섬에 到着한 것은 7月22日이었다. 一行은 곧바로 그렌빌이 남겨 둔 15名의 植民者를 찾았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隣近을 搜索했으나 屍體 1具만을 發見했을 뿐이었다.

    화이트는 搜索을 抛棄하고 元來의 植民 豫定地인 체서피크灣으로 가고자 했으나 航海士가 이를 拒否했다. 이미 여름이 지나 北쪽으로 더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할 수 없이 露語노크 섬에 짐을 내리고 서둘러 城砦 整備와 宿所 마련에 들어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植民者들의 定着 努力은 인디언들과의 크고 작은 衝突을 불렀고, 兩側 關係는 急速度로 冷却됐다.

    데어, 植民地에서 出生한 첫 아이

    이런 渦中인 8月17日, 화이트의 딸 一理露語 데어가 딸을 順産했다. 植民地에서 出生한 첫 아이였다. 아이는 植民地의 名稱을 따 버지니아 데어로 불렸다. 오늘날 이 地域을 데어 카운티로 부르는 것은 植民地에서 태어난 첫 英國人, 버지니아 데어를 기리기 위함이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롤리 要塞 史跡地 內의 露天劇場.

    孫女의 出生으로 暗鬱하던 화이트의 마음은 多少 밝아졌으나, 食糧難은 漸漸 深刻해졌다. 植民者들은 大將인 화이트에게 英國으로 돌아가서 食糧을 마련해 오라고 要求했다. 다른 代案을 찾을 수 없었던 화이트는 結局 딸과 갓 태어난 孫女를 新大陸에 남겨두고 英國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英國의 國內 事情은 그의 卽刻的인 回航을 許容하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戰爭이 臨迫하면서 政府가 海外로 나가는 모든 船舶의 出入을 統制했기 때문이다.

    1588年 봄, 勞心焦思 끝에 화이트는 政府의 徵發을 謀免한 두 隻의 小型 船舶을 찾아내고 롤리의 도움으로 若干의 補給品을 싣고 英國을 出港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의 배는 마데이라 섬 近處에 이르러 프랑스 海賊船의 攻擊을 받아 貨物을 빼앗기고 人命 被害까지 發生해 本國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가 다시 버지니아로 出發한 것은 英國이 스페인 無敵艦隊를 擊破해 勝利를 거둔 後 1年 半이 지난 1590年 3月이었다.

    그러나 露語노크의 定着地에서 植民者의 모습은 全혀 찾아볼 수 없었다. 定着地는 廢墟로 變해 있었다. 隣近을 搜索하던 中 화이트는 海岸 近處의 나무에 새겨진 ‘CRO’라는 글字를 發見했다. 이어서 그는 定着地 入口에서 다시 ‘CROATOAN’이란 글字가 새겨진 기둥을 찾아냈다.

    植民者들이 한때 友好的이던 크로아턴族 마을로 移住했다고 確信한 화이트는 크로아턴族 마을이 있는 섬으로 배를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不運이 그를 좌절시켰다. 하늘에 먹구름이 일며 暴風이 몰아친 것. 本格的인 暴風철을 念慮한 航海士는 카리브海로 回航할 것을 固執했다. 크로아턴섬에 들어가자는 화이트의 懇請에도 不拘하고 그는 搖之不動이었다. 카리브海에 이르러 또다시 暴風을 만나 배가 毁損되자 船員들도 英國으로 돌아가길 希望했다. 그는 英國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의 不運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英國 政府는 無敵艦隊를 擊破한 後 스페인의 追加 攻擊을 憂慮해 自國 船舶의 海外 出港을 禁止했다. 게다가 그의 後援者인 롤리는 젊은 에섹스 伯爵의 登場으로 엘리자베스 女王의 寵愛를 잃고 말았다. 버지니아에 遠征隊를 더 보낼 수 없다고 判斷한 화이트는 結局 失意 속에 런던을 떠났다.

    화이트는 크리스토퍼 뉴포트가 이끄는 제임스타운 植民地 建設 第 1陣이 체서피크灣을 向해 出港한 1606年, 아일랜드 코크 地方의 한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自身의 딸과 孫女를 包含한 버지니아 植民者들이 新大陸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城砦? 冶金 實驗室?

    ‘롤리의 버지니아’ 案內板을 지나 트레일을 繼續 따라가니 옛 모습대로 復元한 롤리 要塞가 보인다. 그런데 失望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는 안쪽에서 재면 20餘m도 채 되지 않는 초라한 規模의 土城이었기 때문이다. 스펜서가 ‘大洋의 牧者(Shepherd of the Ocean)’라고 부른 엘리자베스 調整 勢力家의 野心찬 꿈이 서린 곳이 이렇게 矮小할 수 있단 말인가. 100餘 名의 植民者가 自體 防衛를 위해 築成한 城砦라고는 到底히 믿기지 않는다.

    1941年 要塞地가 國立公園管理所로 移管된 뒤, 옛 城터 자리에서 發掘된 16世紀 植民者들의 것으로 推定되는 遺物들을 根據로 이곳이 要塞 터임을 確認했다. 以後 1950年에 남아 있던 垓子(垓字)를 파내고 그 흙으로 垓子를 따라 안쪽으로 城壁을 쌓아나간 結果, 만들어진 것이 現在의 要塞라고 案內書는 說明한다. 나중에 確認해보니 美國의 考古學者들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그後 몇 次例 더 發掘 作業을 한 것으로 돼 있다.

    1993年 英國 出身의 考古學者 노엘 흄이 그間의 發掘 成果를 綜合한 새로운 解釋을 提示해 注目을 끌었다. 흄에 따르면 이곳은 랄프 레인이 指揮한 1585年의 植民者들이나 1587年 존 화이트가 이끈 ‘사라진 植民地’의 主人公들이 防禦用으로 祝聖한 城砦가 아니라, 레인의 遠征隊와 함께 온 冶金(冶金) 專門家 組아킴 갠스가 해리어트와 더불어 隣近에서 모아온 鑛石 샘플을 檢査한 冶金 實驗室이라는 것이다.

    흄은 이곳에서 發掘된 石製 플라스크와 周鉢의 形象이 1537年 한스 홀바인이 獨逸人 鍊金術師를 諷刺해 그린 木版畫 속 琉璃그릇이나 周鉢과 恰似한 點을 그 證據로 提示했다. 흄은 이 城砦가 아마 植民者들이 本채와 떨어진 곳에 設置된 이 冶金 實驗室을 保護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거나, 16世紀 移住者들과는 無關하게 18世紀에 勃發한 크고 작은 戰爭 때 露語노크 섬을 防禦하기 위해 築造된 것일지 모른다고 推測했다.

    어쨌든 16世紀의 植民者들이 祝聖했다는 要塞 터를 찾는 일도, 要塞 터의 實體 糾明도, ‘사라진 植民地’의 行方도 모두 미스터리다. 其實 歷史의 祈願이란 이렇게 不可解한 미스터리로 휩싸여 있어야 제格일지 모른다.

    흄의 假說은 事實 與否와 相關없이, 草創期 植民者들이 엘도라도의 幻想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새삼 일깨운다. 롤리度 新世界의 開拓은 “金과 讚辭와 榮光을” 얻고자 함이라고 쓴 바 있다. 엘리자베스 女王의 信任을 잃은 後 롤리에게 그것은 또한 “欲望을 試驗하고 絶緣된 사랑을 試驗하는 것”이기도 했다. 1595年 롤리의 기아나 遠征은 全的으로 엘리자베스 女王의 寵愛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의 所産이었다. 그러나 그의 遠征은 쓸모없는 金덩이 圓光(原鑛) 몇 조각을 얻어온 程度의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1597年 롤리는 그렇게 願하던 女王의 信任을 다시 얻어 宮廷으로 돌아왔다. 그는 1599年 사라진 植民者들의 行方을 찾도록 遠征隊를 세 次例에 걸쳐 露語노크에 보냈다. 그러나 遠征隊는 暴風 때문에 모두 海岸에 上陸道 못해보고 돌아왔다. 1602年에 보낸 遠征臺도 체서피크灣에서 原住民의 攻擊을 받고 아무 所得 없이 復歸했다.

    神話로 남은 歷史

    1603年 엘리자베스 女王의 死亡과 함께 롤리의 政治的 運命은 急轉直下의 내리막길이었다. 제임스 1世가 登極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國家反逆罪로 死刑宣告를 받았다. 그는 死刑 執行이 猶豫된 狀態로 13年을 런던탑에서 보냈다. 1617年 제임스 1世가 財政的인 어려움에 處해 있을 때 롤리는 다시금 기아나 遠征 카드를 꺼내 國王을 說得했다. 王은 스페인 軍隊를 攻擊하지 않는 條件으로 遠征을 許諾했다. 마지막 機會라고 생각한 롤리는 全 財産을 털어서 遠征隊를 準備해 1617年 3月 기아나로 떠났다.

    그러나 이 遠征 또한 慘澹한 失敗로 끝났다. 그의 遠征隊는 오리노코江 깊숙이 內陸을 거슬러 올라가긴 했으나, 金鑛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작은 江줄기의 入口에서 스페인軍의 熾烈한 攻擊을 받고 王命을 어기고 反擊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戰鬪에서 롤리는 외아들 와트를 잃었다. 無數한 人命被害가 發生했다. 遠征을 繼續할 수 없게 된 롤리는 悽絶한 心情으로 죽음이 기다리는 英國에 돌아왔다. 스페인의 要求에 따라 제임스 1世는 그를 斬首刑에 處했다. 삶을 ‘熱情의 遊戱’라고 定義했던 이 英國의 風雲兒는 끝내 이루지 못한 自身의 꿈이 서린 西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最後를 맞았다. 1618年 10月29日, 그의 나이 66歲였다.

    美國人에게 ‘사라진 植民地’는 이제 歷史라기보다는 하나의 神話다. 植民者들의 行方과 運命에 關한 無數한 說明과 推測으로 이 神話는 엮여 있다. 補給船을 기다리다 지쳐 남아 있던 작은 배를 타고 回航길에 올랐다가 모두 溺死했다는 설, 原住民의 攻擊을 받아 몰살당했다는 설, 傳染病이 돌아 모두 死亡했다는 설, 暴風이 갑자기 불어닥쳐 避하지 못하고 모두 휩쓸려 죽었다는 說, 체서피크灣으로 移住해 살다가 그곳 포우下턴 酋長에게 몰살당했다는 설, 或은 크로아턴族에 依託해 그곳 社會에 同化하여 살았다는 說 等이 그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最近에 또 하나의 假說이 提起돼 關心을 끈다. 1998年 윌리엄앤드메리臺 및 아칸소 주립대의 氣象學者들은 나무의 나이테를 調査해 그 무렵이 지난 800年 동안 가장 酷甚한 가뭄이 持續된 時期임을 밝혀내고, 그들이 가뭄으로 인해 結局 굶어죽었을 것이란 推定을 내놓았다.

    想像力을 刺戟하는 꿈

    史跡地의 바닷가 쪽에 세워진 露天劇場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사라진 植民地’라는 題目의 演劇을 上演한다. 1937年 露語노크 植民地 建設 350周年을 記念하기 위해, 퓰리처賞 受賞作家 폴 그린에게 委囑해 쓴 戱曲을 舞臺에 올린 것이다. 演劇은 第2次 世界大戰 期間 몇 年을 除外하고는 每年 거르지 않고 이 海邊劇場에서 上演됐다.

    ‘사라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 섬
    申文秀
    ● 1952年 出生
    ● 서울對 英語敎育과 卒業·桐 大學院 碩士, 美國 캘리포니아대(버클리) 碩士(英文學)·하와이대 博士(英文學)
    ● 現 서울대 英語敎育科 敎授·美國學硏究所長, 韓國英語英文學會 副會長
    ● 著書: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現代영미小說의 理解’(共著), ‘自然’(曆書), ‘美國의 奴隸制度 & 美國의 自由’(共譯) 等


    그 始原의 이야기 主人公이 美國땅을 한 番도 밟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패러독스다. 그러나 이 不在와 喪失은 美國人에게 理想鄕을 追求하는 永遠한 꿈의 象徵이 됐다. 어딘가 먼 ‘想像의 外地(a world elsewhere)’로 떠나 새로운 삶을 찾는 試圖가 美國 文學의 核心的 모티프를 이루고 있음은 決코 偶然이 아니다. 롤리의 사라진 植民地는 이처럼 ‘언덕 위의 都市’ 建設이 決코 完了될 수 없는 永遠한 未完의 事業임을 不斷히 일깨우면서 오늘날에도 美國人의 想像力을 刺戟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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