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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洋洲·東南亞에 韓國學 씨앗 심는 ‘韓-扈 아시아硏究所’|新東亞

大洋洲·東南亞에 韓國學 씨앗 심는 ‘韓-扈 아시아硏究所’

一當百 끈氣로 櫓 젓고, 韓流 順風에 돛 달고

  • 윤필립 在胡酒 是認 philipsyd@naver.com

    入力 2005-09-08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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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사우스웨일스大 캠퍼스 안에 자리 잡은 ‘韓-扈 아시아硏究所’.‘韓國學은 韓國에서 硏究해야 한다’는 元祖 타령은 이제 舊時代的 發想이다. 東南亞에 韓國學의 씨앗을 뿌리고 學問 中興을 이끄는 前進基地는 濠洲에 자리잡고 있다.네 사람의 땀과 눈물로 誕生한 뉴사우스웨일스大 ‘韓-扈 아시아硏究所’는 5年 만에‘애한파’의 産室로 우뚝 섰다.
    대양주·동남아에 한국학 씨앗 심는 ‘한-호 아시아연구소’
    ‘地域이곧 世界다’라는 말이 있다. 韓國에 關한 모든 것을 網羅해 硏究하는 韓國學(Korean Studies)은 一種의 地域學이다. 同時에 世界學이다. 이런 用語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桶 크게’ 생각하면 ‘韓國이 곧 世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世紀는 地球村이라는 單語의 意味網이 더욱 擴大돼 地域과 世界가 바로 連結되는 글로벌 時代다. “韓國學의 本山이 韓國이니, 韓國學은 韓國에서 硏究해야 한다”는 元祖 타령은 舊時代的 事故일 뿐이다.

    미쳐야 미친다

    1990年代 中盤, 濠洲에서 韓國學 붐이 일었다. 2000年代에 들어서자 이番에는 東南亞에서 韓流(韓流) 消息이 들려왔다. 바로 이웃한 東南亞와 大洋洲에서 ‘韓國 바람’李 연이어 분 것이다.

    이런 地域的 狀況을 適切하게 活用하는 韓國學 硏究所가 濠洲에서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英語圈 國家인 濠洲에 韓國學 前進基地를 構築한 것. 시드니 所在 뉴사우스웨일스(NSW)代에 자리잡은 ‘韓-扈 아시아硏究所(Korea-Australasia Research Centre)’가 바로 그곳이다.



    濠洲의 大學은 嚴格한 學事管理와 優秀한 硏究實績으로 國際社會에서 높이 評價받는다. 뉴사우스웨일스大는 濠洲에서 先頭를 다투는 名門學校다. 그렇다면 왜 濠洲學徒 아닌 韓國學의 前進基地가 이 大學에 構築됐을까.

    몇 가지 理由가 있다. 그中에서도 20代 初盤부터 始作된 힘겨운 留學生活과 不斷한 硏究를 바탕으로 濠洲學界에 堅固한 立地를 構築한 몇몇 學者가 20年도 넘게 흘린 땀과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特히 한-扈 아시아硏究所를 盤石 위에 올려놓기 위해 밤낮 없이 애쓰는 ‘4人坊’의 지난 5年餘 삶을 追跡해보면 大體的인 輪廓이 드러난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硏究所에서 學者로서의 黃金 같은 中年을 다 보내면서, 合目的的인 韓國學의 世界化(globalization)와 現地化(localization)에 汨沒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韓國學이라는 宗敎에 忠直한 宣敎師 같다.

    한-扈 아시아硏究所 4人坊

    知的 産物의 集合體인 硏究所는 構成員의 力量에 따라 成敗가 갈린다. 또한 멤버들이 얼마나 愛情을 쏟아붓느냐에 따라 硏究所의 業績도 千差萬別이 된다. 그런 側面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出帆한 한-扈 아시아硏究所의 主要 멤버들은 늘 一當百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硏究所의 4人坊으로 불리는 서중석(48) 所長, 권승호(41) 副所長, 신기현(51) 諮問委員, 김현옥(41) 部長이 그 主人公이다. 서중석·권승호·신기현 敎授의 共通點은 20代 中盤에 濠洲에서 席·博士課程을 밟았다는 것. 그만큼 濠洲에 精通한 學者들이다.

    硏究所의 船長 格인 서중석 所長은 大學을 卒業하던 해인 1979年 12月에 家族과 함께 濠洲로 移民왔다. 그는 移民 初期 숱한 苦生을 했다. 鎔接工, 택시運轉士, 公務員, 淸掃員 等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 뉴사우스웨일스大에서 韓國人 最初로 經濟學 博士學位를 取得했고, 같은 學校의 商科大學에서 韓國人 第1號 敎授(經濟學)가 됐다. 그때 몇 가지를 決心했다. 그中 하나가 祖國을 위해서 어떤 形態로든지 寄與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20年 동안 뉴사우스웨일스大에서 經濟學科 國際經營學을 가르치며 東南亞의 人材들을 키우는 貴重한 經驗을 했다. 그들이 卒業 後 自己 나라로 돌아가 學界와 鄭·財界에 뿌리내리면서 그 네트워크를 基盤으로 2000年 한-扈 아시아硏究所를 設立했다.

    1990年代 後半은, 濠洲에서 韓國學 熱氣가 식은 狀態였고 韓國 學者들도 지쳐 있는 狀況이었다. 또한 濠洲 政府의 關心度 식어가고 있어 한-扈 아시아硏究所의 胎動을 無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學者도 많았다.

    그러나 徐 敎授의 判斷은 옳았다. 한-扈 아시아硏究所의 出帆이 萎縮돼가던 濠洲 內 韓國 硏究에 活力素가 됐고, 大洋洲 內 韓國 硏究의 새로운 軸을 만들었다는 評價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 所長에겐 自身의 꿈을 나누며 같이 實現할 戰略家와 戰略대로 밀고나가는 뚝심 있는 同伴者가 必要했다. 바로 거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學者가 권승호 副所長이었다. 그도 뉴사우스웨일스大에서 經營學 碩·博士學位 過程을 마쳤고, 亦是 韓國人 最初로 經營學 博士學位를 取得했다. 그는 大洋洲 아시아學會長이 주는 1998年 最高 博士論文賞을 받기도 했다.

    海公(海公) 신익희(1894~1956) 先生의 孫子인 신기현 敎授는 할아버지 못지않게 志士的인 面貌를 지닌 學者다. 그는 1984年부터 外國語로서의 韓國語 敎育에 從事해온 自他가 公認하는 濠洲 韓國語 敎育의 嚆矢.

    2000年 한-扈 아시아硏究所 設立 當時 캔버라의 濠洲國立大에 在職하던 그는 누구보다 重要한 役割을 맡았다. 硏究所의 所長과 副所長이 모두 上京系統 學者여서 생기는 쏠림현상을 韓國語學者人 그가 補完한 것.

    그는 2004年 7月, 12年間의 濠洲國立大 敎授 生活을 마무리하고 뉴사우스웨일스大 韓國學科 主任敎授로 일하면서 한-扈 아시아硏究所 諮問委員을 겸하고 있다. 申 敎授는 現在 大洋洲 韓國學會長을 맡아 濠洲의 韓國學 發展에 크게 寄與하고 있다.

    硏究所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김현옥 部長은 硏究所에서 ‘눈썹 같은 存在’다. 4人放의 세 리더가 밖으로 나가서 마음껏 活動할 수 있도록 內部業務를 도맡다시피 하는 김현옥 部長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움직이지만, 그가 없으면 硏究所의 業務가 痲痹될 程度다. 눈썹 없는 얼굴을 어찌 想像이나 하겠는가.

    海外에서 硏究하는 韓國學

    한겨울의 쿠지비치를 뒤로하고, 뉴사우스웨일스大 6番 게이트를 거쳐서 한-호 아시아硏究所가 자리잡은 렉탱클 빌딩으로 들어가다 보니, 길목에 濠洲의 國花인 ‘위틀(아카시아의 一種)’李 한가롭게 피어 있었다.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午前 한때 風景이다. 하지만 웬걸, 硏究所에 들어서니 雰圍氣가 딴판이다. 一當百의 任務를 맡은 사람들답게 분주한 모습이 歷歷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일하시니 참 좋겠습니다” 하고 말門을 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승호 副所長이 “이 近處에 바다만 있나요? 半徑 3km 內에 시드니의 有名한 골프場이 8個나 있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떼더니 이내 웃으면서 “學問을 硏究하기에 참 劣惡한 條件이지요” 하고 맞받았다. 다음은 그들과의 一問一答이다.

    -韓國學의 本産이자 硏究對象 自體인 韓國을 떠나 海外에서 韓國學을 硏究한다는 것은 어떤 意味가 있나.

    서중석 : “韓國에서 말하는 韓國學은 ‘무엇이 韓國的인가’를 硏究하는 學問이다. 그런 意味에서 韓國에서 政治를 硏究하는 사람은 政治學者이지 韓國學者가 아니다. 그러나 韓國 밖으로 나가면 事情이 달라진다. 韓國 政治를 硏究하는 것도 韓國學으로 看做된다. 이렇듯 外國 사람이 말하는 韓國學은 韓國에 關한 모든 分野가 網羅된다. 外國人이 韓國을 工夫하는 주된 目的은 韓國을 더 깊이 硏究해 自國의 利益 追求에 利用하려는 것이다. 勿論 一部 學者는 例外겠지만 큰 틀에서는 經濟的인 利益과 政治外交的인 關係에 歸着되는 게 儼然한 現實이다.”

    신기현 : “韓國 學者가 硏究하는 學問을 韓國學이라 한다면, 濠洲에서는 學問 分野에 關係없이 韓國語로 된 資料에 依據, 韓國을 硏究하고 敎育하는 사람을 韓國學者라고 하는 데 別無理가 없다.

    또한 韓國學 過程을 開設한 大學의 狀況에 따라 내려지는 現實的인 定義도 無視할 수 없다. 濠洲는 地域學에서 言語 敎育을 强調하는 傾向이 있어, 韓國語 過程이 없는 韓國學 過程은 없으나 韓國語 課程만으로 構成된 韓國學 過程은 있다. 나는 濠洲 3個 都市에 있는 3個 大學에서 韓國語를 가르쳤는데, 첫 職場인 멜버른 所在 스윈번代에서는 韓國語와 비즈니스를 連結하려는 學生이 主를 이뤘다. 反面 濠洲國立大 學生들은 大槪 韓國語를 배워 韓國의 歷史, 文化 및 北韓 問題를 다루는 專門家가 되고 싶어 했다. 只今 勤務하는 뉴사우스웨일스大에는 外國語로서 韓國語 敎授法에 關心을 갖는 學生이 多數다.”

    권승호 : “韓國에서 世界로 나가는 것을 일컬어 世界化라고 하고 現地에서 뿌리내리는 過程을 現地化라고 말한다. 그런 觀點에서, 우리 硏究所가 志向하는 바는 世界化와 現地化가 調和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을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세계화+현지화)’이라 일컫는다.

    東南아시아와 大洋洲가 서로 交流 協力하면서 韓國學의 本山인 韓國과 連結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대양주·동남아에 한국학 씨앗 심는 ‘한-호 아시아연구소’

    뉴사우스웨일스大 캠퍼스에서 만난 서중석 所長, 김현옥 部長, 신기현 敎授, 권승호 副所長(왼쪽부터).

    -特別히 東南亞 國家를 中心으로 韓國學을 效率的으로 傳播할 方法이 있는가.

    서중석 : “長期的인 眼目에선 東南亞 國家의 次世代 中에서도 韓國에 愛情을 갖는 이들을 中心으로 韓國을 工夫하게 만들어야 한다. 韓國에 對해 關心이 많은 學生을 가르치는 것도 重要하지만, 더욱 重要한 것은 各 分野에서 資質이 優秀한 學生을 찾아내 그들이 韓國에 對한 關心과 愛情을 갖도록 誘導하는 것이다. 韓國學은 有能한 現地人에 依해 現地化됨으로써 結局 國際化될 수 있다.”

    권승호 : “東南亞 國家들 中에서 韓國學에 關心을 갖는 나라들을 有心히 觀察해보면, 經濟的·政治的으로 韓國과 紐帶關係가 깊다. 現在 韓國學科 卒業生의 就業率이 80% 以上을 記錄한다는 것도 東南亞 學生들이 韓國에 關心을 갖는 重要한 要因이다. 이는 韓國學을 海外에 傳播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韓國이 各別히 關心을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長期的인 支援과 同時에 韓國學을 工夫한 사람들이 未來에 對한 展望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親韓派 養成所

    1990年代 初盤 以後 濠洲는 東南亞 國家들의 遊學據點으로 자리매김했다. 于先 濠洲는 地理的으로 東南亞 國家들과 가깝다. 또한 英語圈 國家인 美國, 英國, 캐나다, 濠洲, 뉴질랜드 中에서 東南亞와 大洋洲를 學問的 次元에서 이어줄 수 있는 諸般與件을 갖췄다.

    濠洲 大學이 實施하는 敎育의 質은 매우 優秀한 便이다. 戶主에는 41個의 國立大 或은 州立大가 있고, 본드臺(골드코스트 位置)라는 唯一한 私立大가 있다. 이렇듯 總 50個도 안 되는 大學 中 無慮 10個 大學이 英國로열學會가 選定한 世界 100代 優秀大學에 包含될 程度로 높은 評價를 받고 있다.

    그中 先頭 그룹에 屬하는 뉴사우스웨일스大는 留學生 比率이 아주 높다. 大學 定員 4萬名 中 約 9000名이 留學生이다. 商經大의 境遇 7000餘 名의 在學生 가운데 約 2000名이 留學生이다. 勿論 留學生 大部分이 아시아系다. 바로 그 안에 한-扈 아시아硏究所가 달걀의 노른자처럼 자리잡고 있다. 東南아시아와 大洋洲를 잇는 濠洲의 代表的인 大學에서 韓國學을 가르치고 硏究하고 普及하면서 親韓派(親韓派) 또는 애寒波(愛韓派)를 養成하는 것이다.

    아무리 濠洲가 1973年에 惡名 높던 白濠主義를 公式的으로 廢止했다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可能했을까. 그 실마리를 서중석 敎授의 에피소드에서 찾아보자.

    “濠洲에서 工夫하고 돌아간 東南亞 學生 가운데 韓國人 敎授 밑에서 工夫했다는 理由만으로 韓國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 學生 보비 組리스는 大學院 過程에서 나한테 經濟學을 배웠다. 그가 歸國할 때 그의 손에는 내가 써준 推薦書가 들려 있었다. 몇 年 後 자카르타 出張 中에 보비를 만나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先生님이 주신 推薦書 德澤에 자카르타 駐在 한일은행에 就職했습니다. 韓國人 敎授에게서 배웠냐고 반가워하며 當場 決定을 내리더군요. 勿論 제 成跡이나 다른 것도 參考했겠지만 아, 이것이 韓國人의 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일은행에서 韓國의 企業文化를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業務 마치고 술자리에도 同席할 수 있게 됐고, 나중엔 韓國에도 다녀왔습니다.

    1998年 자카르타에 暴動이 일었을 때 中國系 市民과 原住民界 市民 사이에 葛藤이 暴發해 暴力이 亂舞했습니다. 退勤도 하지 못하고 걱정하는 支店長님과 任員들을 빨리 求해야 한다는 생각에 右往左往하는 무리를 헤치고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中國人으로 보이는 富者’를 숨겨주는 것은 相當히 危險한 일이었지만, 그날 그분들을 安全하게 避身시켜 드린 것을 생각하면 只今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나는 只今도 東南亞 出張을 가면, 하루 저녁은 옛 弟子들을 불러내어 저녁을 함께 먹는다. 泰國 俗談에 ‘한番 아잔 (Ajarn·先生님)이면 永遠한 아잔’이란 말이 있다. 東南亞 親舊들과 내가 나누는 信賴와 사랑이 해를 거듭해도 흐려지지 않듯이, 스승의 나라인 韓國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 亦是 變치 않을 것임을 안다.”

    이렇듯 徐 敎授의 東南亞 사랑은 弟子사랑으로 始作됐다. 처음에는 東南亞에 있는 弟子들과 함께 硏究 프로젝트를 進行했고, 東南亞 問題 專門家로서 韓國을 硏究하는 學者들을 만나게 됐으며, 그들에게 韓國學 支援이 切實하다는 것을 認知하여 한-호 아시아硏究所를 設立하게 된 것이다.

    東南亞 4個國과 共同 프로젝트

    精誠이 至極하면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硏究所가 出帆할 즈음에 아무도 豫想하지 못했던 寒流(韓流) 烈風이 東南亞에 불기 始作했다. 비록 大衆文化에 局限된 社會現象이지만 韓國의 드라마와 大衆歌謠를 좋아하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한-扈 아시아硏究所는 順風을 만난 배처럼 順航했다.

    年度를 짚어보니 硏究所 活動이 始作될 즈음에 베트남 韓流가 始作됐다. 正確하게 東南亞의 韓流는 1998年 베트남에서 放映된 韓國 드라마로부터 始作됐다. 베트남에 本格的인 烈風이 분 것은 2000年이고, 다른 東南亞 國家들은 그 後에 始作됐다.

    그런데 東南亞에서 뜬금 없이 韓流 烈風이 불기 始作한 것도, 그 徵兆를 가장 먼저 感知한 곳이 戶主라는 것도 뜻밖이다. 이렇듯 濠洲에서 寒流를 빨리 感知할 수 있었던 것은 東南亞 出身 留學生들 때문이다. 濠洲에서 韓國語 또는 韓國學을 工夫하고 本國으로 돌아간 東南亞 出身 留學生들은 自國에 불어온 韓流 烈風을 擴大再生産하는 韓國學의 役軍이 됐다.

    硏究所의 지난 5年間 活動內容을 살펴보니 濠洲와 東南亞 地域의 韓國學 敎育 프로그램을 支援한 것이 먼저 눈에 띈다. 濠洲-東南亞-韓國을 連結하는 다양한 硏究 프로젝트를 遂行한 것. 特히 東南亞의 韓流 現象에 아무도 關心을 두지 않을 때부터 앞날을 내다보고 本格 硏究하기 始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東南亞 4個國 現地人 學者들로 構成된 硏究팀과 共同硏究 프로젝트를 遂行하며 모든 硏究의 인프라, 네트워크 作業을 完成했다. 이렇듯 韓國 內에서 韓流 硏究에 對한 關心이 일기 以前에 基礎硏究를 마친 狀態여서 다른 어느 硏究所보다도 높은 競爭力을 갖추게 됐다. 硏究所는 泰國 촐라롱콘臺, 말레이시아 말라야臺, 인도네시아臺, 베트남 호치민 人文社會科學代의 東南亞 4個 有數 大學과 連繫하여 英文 韓國學 學術誌를 發刊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5年 동안 大洋洲, 東南亞 地域의 여러 大學과 韓國學 學者들을 連繫하여 심포지엄, 學術會議, 워크숍, 포럼을 꾸준히 開催해왔다. 特히 심포지엄에는 濠洲 聯邦政府 알렉산더 다우너 外交部 長官이 두 次例나 參席해 基調演說을 할 만큼 濠洲 政府와 學界에서도 그 權威와 影響力을 인정받았으며, 濠洲의 政策 樹立에도 적잖이 寄與했다.

    權 副所長은 銳利한 學者이기 以前에 삶의 멋을 아는 휴머니스트다. “結局에는 일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딱딱해지게 마련인 硏究所를 맛과 멋이 넘치는 場所로 만든 主役이다. 權 副所長이 베트남에 뿌리내린 韓國學의 어제와 오늘을 이렇게 整理했다.

    金東仁의 ‘감자’가 階級鬪爭 그렸다?

    “베트남에서 韓國學 硏究는 1992年 한-베트남 修交 以後 始作됐다. 韓國 政府가 積極的인 交流政策을 펼치면서 政府間 政策 및 人的 交流가 始作됐다. 그 結果 2000年에는 約 250個의 韓國企業이 베트남에 投資했으며, 韓國企業은 總 7萬餘 名의 現地人을 雇用했다. 베트남 標準 家族囚人 1家庭當 5人을 代入해 推算하면 當時 35萬餘 名이 韓國經濟와 直·間接的으로 關聯됐다.

    韓國 關聯 人的資源의 需要가 急增하면서, 韓國의 對內外 韓國學 支援機關과 現地 大學機關度 韓國學에 關心을 가졌다. 國立 하노이 人文社會科學臺(1992)를 筆頭로 國立 호치민 人文社會科學臺(1994), 國立 하노이 외국어대(1997), 호치민 外國語 情報隊(1998) 等에 韓國學 關聯學科가 設立됐다.

    그래서 우리는 큰 期待를 걸고 2000年 6月 베트남에서 韓國 硏究에 對한 現地 實態調査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東南亞 國家들에 比較해 베트남에서 進行되고 있는 韓國關聯 硏究 活動은 深刻한 問題點을 안고 있었다. 當時 韓國語 敎育 關聯學科에서 敎育課程 開發과 講義를 主導한 그룹은 베트남에서 韓國通 1世代라 일컫는, 北韓 大學 出身의 留學派였다. 1960~70年代 北韓과 第3世界 國家間 國際交流 擴大 프로젝트의 一環으로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 留學을 다녀온 北韓 出身 留學派 人物들이 1992年 修交 以後 急速하게 擴大된 한-베트남 關係의 中間고리 役割을 했다.

    그런데 이들 北韓 留學派 出身에 依한 韓國語 敎育 및 硏究 活動은 南韓에서 생각하는 海外 韓國學 硏究의 發展 모델과는 相當한 乖離가 있었다. 社會主義 理論에 傾倒된 것이 가장 큰 問題였다. 一例로 近代 韓國 小說의 거성으로 推仰받는 김동인(1900~51)의 自然主義的 色彩를 띤 短篇小說 ‘감자’를 紹介하면서 資本主義에 對한 階級鬪爭의 內容으로 再解釋해 韓國語 敎材로 使用하고 있었다.

    이러한 現實에 直面해 한-호 아시아硏究所는 泰國,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의 主要 國立大와 함께 韓國學 敎育을 위한 戰略的 交流關係를 만들었다. 베트남의 國立 호치민 人文社會科學代와 協議해 現地의 韓國學 硏究發展 모델을 開發했다. 特히 호치민 人文社會科學臺 위엔 半 타이 副總長의 役割이 至大했다.

    그분이 2002年 한 워크숍에서 꺼낸 이야기 中 ‘韓國學이 韓國을 떠나면 더는 韓國人의 所有가 아니다’라는 말을 잊을 수 없다. 이 말은 곧 海外에서 韓國學 敎育과 硏究 活性化를 苦悶하는 現地 政策 擔當者의 確固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는 只今껏 海外에 居住하는 韓國人의 觀點에서 韓國學 硏究를 進行해온 우리 硏究所의 姿勢와 接近法을 더욱 가다듬게 만들었다.

    ‘韓國學이 韓國을 떠난다는 것과 더는 韓國人의 所有가 아니다’는 말은 여러 意味로 解釋될 수 있고 어떤 面에서는 그 意味가 相衝한다. 하나는 韓國에 머물던 韓國學의 敎育과 硏究가 世界化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世界化는 韓國의 自國 利己主義를 包含한다. 또 하나는 韓國學이 振興되기 위해 그것을 受容하는 現地의 現實과 利益이 包含되는 積極的인 現地化를 의미한다. 위엔 半 타이 副總長의 말은 電子와 後者의 意味가 適切히 調和를 이루어야만 海外 韓國學의 敎育과 硏究가 發展될 수 있다는 뜻이다.”

    韓國語 工夫로 人生이 바뀐 사람들

    韓國語를 韓國學의 키워드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韓國學을 硏究하기 위한 道具로 看做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韓國語를 工夫하는 것이 제대로 된 韓國學 硏究에 必須 要件이라는 데는 異議가 없다. 濠洲에서 20年 以上 韓國語를 가르쳐온 신기현 敎授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멜버른의 스윈번臺에서 가르친 學生 가운데 駐韓 濠洲大使館에 勤務하면서 韓國語 驅使能力이 뛰어나고 金髮의 美貌를 갖춰 韓國의 TV 프로그램에 심심찮게 出演한 女學生이 있다. 또한 濠洲國立大에서 가르친 學生 中에는 韓國語뿐만 아니라 全科目 成績이 월등해서 首席으로 卒業한 學生도 두 名이나 된다. 두 사람 모두 外交部에 勤務한다.

    이런 秀才型 學生들과는 좀 다른 角度에서 特別히 생각나는 學生이 둘 있다. 앵글로-캘틱 血統의 男學生 W君과 女學生 J量이다. 이들은 外國語 工夫가 原語民과의 對話手段을 習得한다는 次元을 넘어 人生 航路까지 바꿀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W君은 1學年 때 多分히 挑戰的인 말套로 ‘韓國語를 工夫하는 것이 내게 어떤 利點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說明해달라’고 要求했다. 1年間 韓國語를 배우더니 ‘韓國에 가야겠으니 機會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1年間 더 熱心히 工夫하면 그러마 했고, 1年 後 W君은 交換學生으로 韓國의 某 大學에서 1年間 工夫했다.

    W君이 濠洲로 돌아온 뒤 함께 술을 마실 機會가 있었다. 盞을 채워줬더니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술을 마셨다. 마치 韓國의 大學生들이 敎授 앞에서 하듯 말이다. 3年 前에는 想像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이러한 行動이 單純한 ‘演技’에 不過하더라도 1學年 때의 W軍을 떠올리면 놀라운 일이다.

    W君은 韓國에서 만난 韓國人 女子親舊와 結婚을 앞두고 있다. 그가 自己 人生에 가장 큰 影響을 미친 사람으로 캔버라에서 만난 韓國人 敎授를 든다는 것도 그의 父母를 통해 들었다. 두 사람이 結婚할 때 演說을 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W君은 아마 나를 主禮 候補 1號로 꼽고 있는 模樣이다.

    J孃 또한 典型的인 濠洲 女學生으로, 日本語를 조금 工夫하다가 韓國語로 專攻을 바꿨다. 그는 W君과 함께 交換學生으로 韓國에 갔다. 濠洲로 돌아온 後 어느 날 그는 男子親舊라며 韓國人 男子 大學生을 紹介했다. 女學生으로서 드문 事例다. J孃은 卒業 後 韓國으로 돌아가서 그 韓國人 男子親舊와 夫婦가 되어 幸福한 結婚生活을 하고 있다고 한다.

    韓國語를 工夫하지 않았다면, 典型的인 濠洲 젊은이인 이들에게 韓國은 그저 먼 나라, 或은 현대나 三星, LG와 關聯된 나라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韓國語를 工夫했기에 韓國에서 1年이라는 짧지 않은 時間을 보냈고 結局 人生의 臺詞에 韓國을 끼워넣었으니, 韓國語는 이들에게 ‘對話手段’을 넘어 ‘人生의 轉換點’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쯤에서 率直하게 털어놓자면, 筆者는 20年 가까이 시드니에 살면서도 한-扈 아시아硏究所에 對한 별다른 消息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 取材 過程에서 서중석 敎授의 紹介로 뉴사우스웨일스大에 다니는 留學生들을 인터뷰하다 硏究所의 實體를 알게 됐다.

    向後 3~5年이 關鍵

    特히 한-扈 아시아硏究所의 案內冊子를 보고 깜짝 놀랐다. 筆者의 豫想을 뛰어넘는 훨씬 堅固한 組織으로 알찬 硏究實績을 保有하고 있을뿐 아니라 다양한 硏究活動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한-扈 아시아硏究所와 連繫되어 活動하는 濠洲 學者는 64名이고, 東南亞에서도 20餘 名의 學者가 硏究所 活動에 參與하고 있다. 84名의 大洋洲 所屬 硏究委員 中 29名은 뉴사우스웨일스大 所屬 學者이고, 35名은 大洋洲 他 大學 所屬, 20名이 東南亞 出身 學者였다.

    이렇듯 活潑하게 돌아가는 한-扈 아시아硏究所가 지난 5年 동안 마치 머리카락 보일세라 조용하게 움직인 理由에 對해 서중석 所長은 “一旦 5年 程度 確實한 實績을 내고 世上에 實體를 드러내고 싶었다. 硏究所의 性格上 자칫 허황된 얘기로 들릴 可能性이 있어서 더욱 조심스러운 行步를 堅持했다”고 說明했다.

    “자갈밭을 갈아 씨를 뿌렸는데 이제 싹이 나고 자라기 始作했다. 寒流 바람이 부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그동안 닦아놓은 基礎 위에 成熟한 韓國學 硏究成果를 올려놓음으로써 다음 世代 일꾼을 찾아 키우는 일을 本格化해야 한다.”

    特히 그는 “韓國은 日本과 달라야 한다”고 强辯했다. 東南亞에서 日本이 莫强한 經濟力을 行使해왔지만 日本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別로 없기 때문에 日本의 熱氣가 갑작스럽게 식었다는 것.

    “‘一流(日流)’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只今 日本의 影響力은 漸漸 줄어들고, 中國의 큰 힘은 아직 東南亞를 덮지 않았다. 앞으로 3~5年이 東南亞에서 韓國學을 現地化할 絶好의 機會다. 이 地域의 人材를 發掘하고 우리의 親舊로 招待하는 일을 같이할 機關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東南亞의 寒流 바람을 地域 內의 學界·企業·政府를 잇는 네트워크로 連結해 長期的인 關心과 交流의 基盤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濠洲의 住宅은 앞마당보다 뒷마당이 훨씬 넓다. 한-扈 아시아硏究所는 濠洲의 住宅形態를 닮았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大學에나 있을 법한 硏究所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꾸 넓어지는 마당이 열린다.

    이렇듯 ‘속이 꽉 찬’ 硏究所를 이끌어가는 ‘韓國學 傳道師들’李 向後 3~5年 동안 成就할 結果가 벌써부터 期待된다. 그들이 그만한 底力과 凝集力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江이 먼 바다에 이른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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