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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韓何雲과 서울新聞 記者 오소백의 필화|新東亞

詩人 韓何雲과 서울新聞 記者 오소백의 필화

前後(戰後) 文壇·言論 짓누른 赤色 알레르기의 集團的 表出

  • 鄭鎭奭│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 presskr@empal.com│

    入力 2009-07-03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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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言論은 늘 現代史의 中心에 있었다. 言論學者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가 이番號부터 言論을 中心으로 한 現代史의 興味로운 뒷얘기를 紹介한다.
    • 첫 回는 ‘문둥이 詩人’ 韓何雲과 ‘올챙이 記者’ 오소백의 筆禍事件.
    • 1940年 總督府가 ‘東亞日報’와 ‘朝鮮日報’ 廢刊을 劃策하던 時節 惡名을 떨친 日帝 高等警察 사이가 暗殺 事件, 1892年 ‘조선신보’에 실린 보르도 葡萄酒 廣告, 6·25戰爭 期間 南北韓의 新聞戰爭 等이 이어진다. <편집자>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1953年 10月17日子 ‘서울新聞’에 실린 한하운 關聯 記事.

    문둥이 詩人’ 한하운(韓何雲·1920 ~1975)李 ‘文化界의 間諜’ 論難에 휘말린 事件이 있었다. 1953年 7月27日 停戰協定이 締結되었으나 戰爭의 傷痕이 채 아물지 않아 社會的으로 不安하고 緊張된 雰圍氣가 가라앉지 않았던 때다. 國民의 情緖와 나라 形便이 疲弊한 狀況이었다. 發端은 10月17日子 ‘서울新聞’에 실린 韓何雲의 時 ‘보리피리’와 함께 그의 近況을 알리는 記事였다.

    記事가 나간 後 ‘文化界에 間諜이 있다’는 主張이 떠돌고 國會에서 對策 促求 發言이 나올 程度로 疑惑이 擴散되자 詩人은 警察 調査를 받았고, ‘서울新聞’ 社會部長 오소백(吳蘇白)과 次長 問題안(文濟安)李 新聞社를 떠나야 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필화(筆禍) 次元을 넘어 1950年代 文段과 言論界를 짓누르고 있던 赤色 알레르기 雰圍氣를 가늠하게 하는 象徵的인 事件이었다.

    한하운 筆禍事件의 雷管에 불을 붙였으며 結局 被害者가 된 오소백은 新聞社를 떠나 1954年 2月부터 大衆雜誌 ‘신태양’에 ‘올챙이 記者 放浪記’를 連載하고, 이듬해 7月에는 같은 題目의 單行本으로도 出刊해 一般에도 널리 알려진 言論人이다. 오소백은 ‘올챙이 記者 放浪記’의 ‘라 詩人(癩 詩人) 事件’ 便에 韓何雲의 ‘全羅道 길’을 앞에 내세우고 自身이 겪은 事件의 經緯를 記錄했다. “이 事件을 빚어낸 謀略中傷과 眞相을 把握하기 위해 끝끝내 싸운 經緯는 文段, 知識人, 政治人, 搜査當局者 및 新聞인 여러분에게 많은 參考가 될 것으로 確信한다”고 밝히면서. ‘올챙이 記者 放浪記’ 記錄을 土臺로 事件의 顚末을 살펴보자.

    ‘레프라 王子’의 近況

    1953年 10月15日 午後 ‘서울新聞’ 編輯局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靑年이 나타났다. 오소백은 市廳 出入記者를 통해 그가 有名한 문둥이 詩人 한하운이란 것을 알고 椅子에 앉기를 勸했다. 社會部 次長 問題안에게 한하운에 關해 正確히 取材하도록 指示했다. 마침 얼마 前에 한 週刊新聞에서 한하운이 實存人物이 아닌 幽靈人物이라 하여, 話題를 모은 일이 있었던 터라 알리바이와 確證이 重要하다고 判斷했기 때문이다.



    韓何雲은 運動選手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詩人은 記者의 물음에 答한 後 앉은자리에서 한 篇의 詩를 썼다. ‘보리피리’였다. 오소백을 비롯한 社會部 記者들은 한하운이 돌아간 뒤 詩를 보고 매우 놀랐다. ‘보리피리’를 朗讀하며 모두 좋은 詩라고 稱讚했다. 그러나 記者들이 한하운이 만진 펜에 레프라(leprae·나병)균이 붙었다고 騷亂을 피운 통에 오소백은 原稿紙로 펜을 똘똘 말아 休紙桶에 내던졌다. 그리고 10月17日子 新聞에 “夏雲(何雲) 서울에 오다, ‘레프라 王子’ 患者收容을 指揮”라는 3段 題目으로 한하운에 關한 記事와 그가 쓴 詩 ‘보리피리’를 실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면

    봄언덕

    故鄕 그리워

    筆-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꽃靑山

    어린때 그리워

    筆-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人寰(人?)의 거리

    人間事 그리워

    筆-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放浪의 幾山河

    눈물의 언덕과 눈물의 언덕을

    筆- 닐리리

    (1953年 10月14日)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오소백 記者의 冊 ‘올챙이 記者 放浪記’ 表紙.

    오소백은 이 詩를 한하운이 編輯局에 와서 쓴 것이라고 했으나, 當時 ‘서울新聞’은 그가 14日에 써서 “最新作의 詩 한篇을 보내준 것”으로 報道했다. 些少한 時差는 있으나 이 詩가 韓何雲의 心情을 노래한 最新作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서울新聞’은 문둥이 詩人이라는 特異한 人物에 對해 떠돌던 所聞을 解消하는 同時에 그의 近況을 紹介하면서 天刑(天刑)으로 여겨지던 문둥病에 걸린 不遇한 人間이 보리피리 불며 山과 들을 放浪하는 모습을 노래한 詩를 特種으로 내보낸 것이다.

    初版과 裁判의 差異

    記事와 詩가 新聞에 실린 後 疑惑 提起가 本格化했다. 韓何雲은 虛構의 人物이며 共産黨의 煽動詩人이라는 非難이 일었다. 新聞에 실린 ‘보리피리’ 自體가 異常하다는 主張도 나왔다. “어째서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詩를 쓴 것인가?”

    韓何雲은 文藝誌에 推薦되거나 新春文藝를 거쳐 登壇한 文人이 아니다. ‘서울新聞’李 發行하는 綜合雜誌 ‘新天地’ 1949年 4月號에 ‘라(癩) 詩人 韓何雲 始初(詩抄)’가 실린 뒤 世上에 이름이 알려졌다. ‘新天地’는 光復 後 6·25戰爭 以前의 解放空間을 代表한 綜合雜誌다. 詩人 이병철이 韓何雲의 詩 머리에 ‘韓何雲의 始初를 엮으면서’를 통해 한하운이 癩病患者라는 事實을 알리면서 文壇 登壇 節次를 밟은 셈이다. 李秉喆은 한하운이 癩病으로 손가락이 떨어졌고, 지난 겨울 추위에 視力마저 잃어버렸다고 그의 身上을 公開했다. ‘新天地’에는 ‘全羅道 길’ ‘벌’ ‘목숨’ 等 13篇이 실렸는데, 한 달 後인 5月 정음사에서 ‘韓何雲 始初’를 出刊해 그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韓何雲 始初’는 70쪽의 얇은 分量이었으나 當時 劣惡한 出版 事情으로는 異例的으로 模造 100g의 高級 用紙를 使用했고, ‘新天地’에 發表했던 13篇에 12篇을 追加해 25篇의 詩가 收錄됐다. 冊 末尾에 編者 이병철이 ‘新天地’에 실었던 글을 跋文 形態로 收錄했다.

    李秉喆은 韓何雲의 詩가 “참을 길 없는 그의 울음이 九泉에 사무치도록 悽絶한 生命의 노래”라며 “歷史的 現實 앞에서 健康한 人間으로서 自己를 否定한 그것을 다시 否定해버린 다음의 높은 境地의 리얼리티를 살린 데서 높이 評價되어야 할 것”이라고 評價했다. 詩集에는 張差 問題가 되는 時 ‘데모’도 실려 있었다.

    冊이 出刊되고 6·25戰爭 勃發 때까지 1年餘 동안 한하운 詩에 對한 論難의 痕跡은 없다. 그런데 休戰이 成立되기 直前인 1953年 6月30日 裁判(再版)이 나오면서 問題가 불거졌다. 裁判은 初版에 비해 分量과 內容 面에서 注目할 만한 變化가 있었다. 初版에 없던 詩 8篇이 追加돼 全體 篇數가 늘어났다. 解說과 跋文에 該當하는 글 또한 初版 끝에 실었던 李秉喆의 ‘韓何雲 始初를 엮으면서’가 裁判에서는 빠지고 조영암(‘夏雲의 生涯와 詩’), 박거영(‘夏雲의 人間像’), 최영해(‘刊行者의 말’)의 글로 代替됐다. 그래서 總 100쪽 分量이 됐다. 張差 問題가 되는 時 ‘데모’는 ‘行列(行列)’로 題目이 바뀌고, ‘물具備 第一 앞서 피빛 氣빨이 간다’로 始作되는 年(聯) 全體와 그 다음 鳶의 둘째 行이 削除됐다. 정현웅이 그린 初版의 表紙長程은 裁判에도 그대로 쓰였는데, 다만 初版에 標示됐던 정현웅의 이름이 빠졌다.

    ‘데모’ (裁判 題目은 ‘行列’)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江물속으로/ 물具備 波濤소리와 함께/ 萬歲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具備 第一앞서 피빛 氣빨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朝鮮사람들이 간다.//(*연 全體 削除)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自由를 달라!는 (*한 行 削除) /아우聲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싶어라 죽고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裁判이 發行된 後 ‘太陽新聞’은 경남경찰국에서 ‘韓何雲 始初(詩抄)’를 押收했다고 報道했다. 이 詩集은 政府 樹立 以前에 이미 左翼煽動 書籍이란 烙印이 찍혔던 것으로, 裁判 刊行을 契機로 治安局이 警察에 指示, 8月初부터 內査를 거듭해오다 押收했다는 內容의 記事였다.(‘태양신문’ 1953年 8月24日, ‘韓何雲 始初 押收, 問題의 左翼 煽動詩集에 斷’)

    그러나 ‘韓何雲 始初’를 政府 樹立 以前에 左翼書籍으로 낙인찍었다는 ‘太陽新聞’ 記事는 誤報였다. 앞에서 言及했듯 이 詩集은 政府 樹立 後인 1949年 5月에 정음사에서 發行됐다. ‘太陽新聞’李 8月24日子 記事에서 世間에 커다란 物議를 빚고 非難을 자아내면서 全國 各 書店에서 한하운 始初價 販賣되고 있다고 報道한 것을 보면, ‘서울新聞’의 10月17日子 記事는 이미 한하운 詩에 對한 論難이 일고, 그의 所在를 把握할 수 없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을 때다. ‘韓何雲 始初’를 發刊한 정음사 社長 최영해는 ‘刊行者의 말’에서 ‘그(韓何雲)의 生死를 우리는 모른다. 바람에 들리는 말로 仁川 어디서 살아 있다고도 한다. 아 ―不幸의 延長이여, 우리는 여기서 그를 追窮치 말자’고 했다. 오소백이 韓何雲의 詩와 함께 그의 存在를 比重 있게 記事化한 目的은 한하운이 思想을 疑心받을 必要가 없는 詩人이며, 살아 있는 實存人物임을 世上에 널리 알리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戰爭 前에 初版이 發行된 詩集의 裁判이 나오자 ‘左翼煽動’으로 지목당한 것은 戰爭 後 文化界를 包含한 社會的 雰圍氣가 戰爭 前과 完全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政府 機關紙였던 ‘서울新聞’李 發行하는 ‘新天地’에 詩가 처음 실리고, 정음사가 詩集 初版을 내기까지는 別問題가 없었다. 그러나 戰後 裁判을 發行하면서 出版社 스스로 問題가 될 수 있다고 判斷한 部分을 削除했음에도 筆禍事件으로 飛火했다.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公開的인 疑惑 提起

    初版에 실린 ‘데모’는 ‘물具備 第一앞서 피빛 氣빨이 간다’는 句節을 包含해 戰爭을 겪은 當時 情緖로는 問題가 될 만한 內容을 담고 있었다. 붉은 色깔을 北韓이나 共産主義와 同一視하던 時節이었다. ‘피빛 氣빨’은 ‘붉은 基, 適期(赤旗)’를 象徵한다. 共産主義, 또는 北韓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素地가 있었다. 出版社도 이 點을 念頭에 두고 自體的으로 그 部分을 削除한 것이다.

    韓何雲을 世上에 처음 알리고 詩集을 엮은 李秉喆과의 關係도 疑惑을 살 수 있었다. 李秉喆은 戰爭이 일어난 後 越北했다. 1943年 12月號 ‘趙匡’에 ‘故鄕消息’을 發表해 詩人으로 登壇했으나 光復 後에 本格的으로 活動했다. 合同詩集 ‘前衛詩人집’(老農事, 1946, 12)에 들어 있는 다섯 同人의 한 사람이었다. ‘前衛詩人집’에 실린 李秉喆의 時 ‘氣(旗)幅’에는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었다.

    韓人들이 봄의 우름보다도 두려워하는/ 敵機가(赤旗歌) 불으며 한氣빨 밑으로 모이자/ 옳은 路線으로 나라 이끄는 信號機(信號旗)/ 가슴마다 간직하고 先輩들은 죽어갔느니라

    戰爭이 일어나자 李秉喆은 北韓의 從軍作家로 參戰했다가 前後에는 北에서 詩人으로 活動했다.

    한하운이 癩病患者의 全國組織을 管掌하는 委員長이고 ‘國立富平성혜원’의 自治委員長이며, 癩病患者의 子女를 기르는 신명保育院(新明保育院) 院長으로 活動하고 있다는 ‘서울新聞’ 特種은 言論界와 文壇에 相當한 衝擊을 주는 同時에 論難에 불을 붙였다. 公開的으로 强力한 疑惑을 提起한 사람은 李貞善이었다. 그는 ‘평화신문’에 11月5日부터 ‘民族的인 미움을 주자/ 敵機가(赤旗歌) 한하운 始初와 그 背後者’라는 題目으로 4回에 걸쳐 한하운이라는 人物과 時, ‘서울新聞’의 報道態度를 問題 삼았다. ‘서울新聞’이 “當局의 措置에 對해 反抗하듯” 韓何雲의 存在를 浮刻시키면서 그의 寫眞과 새로운 詩를 揭載했다는 것이다.

    이정선은 ‘서울新聞’ 技士가 韓何雲을 癩病患者의 全國的인 指導者로 紹介한 美談이 아니라 또 다른 底意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主張했다. 韓何雲은 唯物辨證法的 創作方法을 天賦的으로 體得한 共産主義 地下運動者의 天分(天分)을 지닌 奸邪한 人物로 볼 수 있다고 斷定했다. “간밤에 얼어서 손꼬락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우에 떨어진다”는 句節은 文化當局과 搜査當局에 對해 ‘문둥이’와 ‘빨갱이’를 判別 못하도록 하려는 弄奸이라고 했다. 남로당 詩人 이병철이 韓何雲의 詩를 ‘自己를 否定한 그것을 다시 否定해본 다음의 높은 境地의 리얼리티’로 紹介한 詩集 初版 跋文을 보더라도 韓何雲은 惡辣한 共産主義 프로派間디스트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北에 對한 極端的 警戒心

    韓何雲은 그 後로 改過遷善한 적이 없으며, 그 强烈한 適期의 信念과 思想에서 轉向했다는 證據도 없기 때문에 ‘서울新聞’에 실린 그의 詩를 보면서 毛骨이 悚然해지고 우리의 生存을 威脅하는 것에 對한 憤怒를 抑制할 수 없다고 했다.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詩를 지은 것도 異常하다면서 共産黨의 指令을 받은 者가 그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 癩患者의 이름을 빌렸거나, 그를 買收해 赤色煽動을 操心스럽게 操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剛한 疑惑을 提起했다. 이정선은 大邱 出生으로 憧憬文化學院 文學部를 卒業하고, 映畫評論家로도 活動하면서 ‘國道新聞’ 記者, ‘太陽新聞’ 文化部長, ‘少年太陽’ 編輯局長을 지냈다. 言論界를 떠난 後에는 新東亞映畫株式會社 製作部長을 맡았다.

    ‘韓何雲 始初’ 裁判이 發行된 後 ‘서울新聞’에 그에 關한 記事가 실리기 前인 6月부터 疑惑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6·25戰爭 以前의 文段과 言論界는 共産黨과 北韓에 對해 極端的인 敵對感을 드러내지는 않은 雰圍氣였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戰爭을 겪은 後에는 共産主義나 北韓에 對한 敵對感과 警戒心이 極에 達했다. 정음사에서 ‘韓何雲 始初’의 裁判을 發行할 當時엔 南北 兩側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熾烈한 戰鬪를 벌이고 있었다. 裁判이 나오자 이정선을 包含한 몇몇 文人과 言論人은 ‘韓何雲 始初’를 文化 빨치산의 南侵信號로 볼 수밖에 없다고 斷定했다.

    더욱이 問題되는 句節을 削除하고, 越北한 元來의 編者 李秉喆 代身에 民族陣營 詩人 조영암을 巧妙히 策動海 後記를 쓰도록 하고, 詩集 自體를 民族的인 書籍으로 僞裝해 全國 書店에 配布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北韓이 劃策하는 새로운 角度의 對南 工作으로 看做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또한 그것이 詩文學의 樣式을 빌려서 나온 것이므로 文段 全體는 그런 빨치산 式의 出版行爲를 遲滯 없이 告發하고 制壓해야 한다고 結論지었다. 萬若 서울이나 釜山에 빨치산이 出現해 行悖를 부린다면 當局이나 市民이 坐視하지 않을 것이라는 論理였다.

    이들의 論理대로라면, ‘韓何雲 서울에 오다’라는 ‘서울新聞’의 宣言은 共産黨을 不法化한 大韓民國의 法과 秩序에 對한 大膽無雙한 挑戰이며 奇襲蠻行에 該當한다. ‘서울新聞’ 報道는 6·25戰爭 때 北韓軍이 蘇聯製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占領했던 것과도 비길 수 있는 氣勢다. 그러므로 詩集 發行과 關聯한 모든 疑惑과 背後를 밝혀야 한다고 이정선은 斷乎한 語調로 主張했다.

    한하운 問題는 國會가 國務總理를 相對로 質疑하는 事態로까지 發展했다. 10月19日 午前 10時에 열린 第17回 臨時國會에서 최원호 議員이 韓何雲의 詩集 出版을 共産主義者들의 宣戰戰爭으로 規定하고 나섰다. 崔 議員은 “共産主義 戰爭과 民主主義 戰爭의 差異點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된다”고 前提한 뒤 “民主國家의 戰爭은 一定한 軍隊와 裝備, 일정한 期間 그리고 다른 나라의 敵兵과 싸우는 것이다. 民主國家는 일정한 地域에서 敵兵과 마주해 銃을 겨누는 戰爭을 遂行하는 反面에 共産主義 戰爭은 어느 때 어느 場所에서나 銃을 쏘고 放火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宣傳과 謀略으로 侵略한다”고 說明했다. 休戰協定이 締結된 뒤 우리의 國軍은 銃을 내려놓고 있지만 共産國家는 休戰期間에도 如前히 戰爭을 繼續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韓何雲은 共産主義者 아니다”

    이어서 ‘韓何雲 始初’初版에 收錄된 ‘데모’에 나오는 ‘붉은 氣빨’과 그의 詩를 編纂한 ‘共産黨 先鋒 文學家 李秉喆’, 6月에 發行한 裁判이 全國에 販賣되고 있으며 어떤 地方에서는 兒童 靑少年에게도 그의 詩를 가르치는 現象, ‘서울新聞’李 센세이셔널하게 報道한 事實 等을 列擧하면서 그 背景에 숨은 疑惑을 解明하라고 國務總理에게 要求했다. 當時 國務總理 백두진은 質問 內容에 關해 아직 아는 바 없기 때문에 돌아가서 眞相을 把握해 具體的인 方案을 講究하겠다고 對答했다. 共産黨에 對한 憎惡가 깊었기에 ‘文化빨치산’ 論難으로 規定, 여러 新聞이 大韓民國 文化戰線에 異常이 있다고 報道했다.

    本格的으로 搜査에 着手한 治安局의 첫 番째 搜査 對象은 韓何雲이었다. 警察은 富平으로 刑事를 派遣해 韓何雲의 뒷調査를 進行했다. 이 무렵 어떤 新聞은 오소백이 出版業者로부터 數十萬圜의 賂物을 받고 이런 虛僞報道를 했다고 떠들었다.(오소백, ‘올챙이 記者 放浪記’) 韓何雲의 實存人物 與否에 對한 論難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한하운이라는 架空人物과 實存人物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報道했다. 實存 韓何雲은 詩를 쓰는 사람이지만 越北 詩人 李秉喆과는 만난 일이 없으며, 左翼 色彩가 濃厚한 정음사 刊行 한하운 詩集 初版과는 아무런 關係가 없는 사람이다. 詩集을 出刊한 韓何雲은 越北한 人物일 可能性이 있다는 推測記事를 내보내면서 아직 確實한 證據가 없기 때문에 事實 與否의 歸趨가 注目된다고 報道했다.(‘경향신문’, 1953年 11月23日, ‘韓何雲은 두 사람인가, 問題의 詩集과 無關한 韓氏 出現’) 그러나 뒤에서 說明하는 대로 이 記事는 그날 바로 엉뚱한 誤報였음이 드러난다.

    關心이 쏠린 가운데 始作된 搜査는 簡單히 끝났다. 事實 어렵고 複雜할 게 없었다. 11月21日 治安局長 이성주는 記者들에게 韓何雲은 實存人物이고 共産主義者가 아니며 詩集 內容도 左翼을 同情하는 것으로 認定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음사 社長 崔瑩해도 調査해보았으나 思想이 溫乾한 사람이며 共産主義者가 아니라고 確言했다.(‘조선일보’, 11月23日, ‘한하운氏는 左翼 아니다, 이 治安局長 言及’, ‘東亞日報’, 11月23日, ‘問題의 한하운氏 共産主義者 아니다, 이 治安局長 言明’)

    이 治安局長은 “우리는 現在 그 사람의 思想이 어떠한가를 檢討해야지 過去 共産主義者였다는 것을 끄집어낼 必要는 없다”고 一般的인 思想問題에 關해 悠然한 態度를 取했다. 그는 “이병철이 詩의 內容을 加筆했는가”라는 記者의 質問에 “加筆하였다고 限이 말하고 있다”고 間接話法으로 對答했다. 原稿料에 對해서는 한하운이 明洞에서 이병철을 만났는데 詩集을 出版하지 않겠느냐면서 1萬5000원을 주기에 받았다고 했다.(‘서울신문’, 11月23日, ‘韓何雲은 實在 人物, 治安局長이 言明’) 治安局長은 韓何雲의 時에 問題의 句節이 있다 하더라도 現在 共産主義 活動을 하지 않고 있으며, 過去에 쓴 詩에 對한 責任을 回避하는지 與否를 問題 삼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한하운度 ‘평화신문’과 ‘中央日報’(現在의 ‘中央日報’와는 關係없는 新聞林)에 나타나 自身의 立場과 詩集 出版 經緯를 밝혔다. 1949年 어느 봄날 韓何雲은 鳴動 뒷골목 청탑다방 出入口에서 偶然히 이병철과 알게 돼 詩를 주었는데, ‘新天地’ 6月號에 실린 詩를 보니 ‘피빛 氣빨이 간다’는 句節이 揷入되어 있었다, 며칠 後 李秉喆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그렇게 되었네”라고 對答하면서 原稿料 1萬5000원을 주기에 辭讓했으나 會社에서 주는 돈이라고 해서 받았다고 解明했다. 그 後로도 이병철을 몇 番 만났지만 이에 對한 言及은 彼此에 없었고, 6·25戰爭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言論人의 判斷

    事件의 後遺症이 있었다. 오소백은 앞서 살펴본 대로 한하운 實存 與否를 둘러싼 疑惑과 그의 思想에 關한 論難이 일자 바로 補强 取材에 들어갔다. 治安局長이 搜査結果를 밝히자 오소백은 編輯 幹部에게 記事를 크게 다뤄줄 것을 要請했다. 모두 共感했다. 結局 한하운 技士에 4段 題目을 달았다. 그런데 大將을 본 社長 朴鍾和가 題目을 1段으로 줄이라는 指示를 내려 보냈다. 오소백은 4段으로 編輯한 記事를 1段으로 줄이는 問題로 社長室에 모인 重役들을 向해 辛辣한 攻駁을 하고 물러났다. 이날 午後 오소백은 “混亂을 일으켰다”는 理由로 파면당했다. 이튿날 社會部 次長 問題安堵 파면당했다. 그렇지만 ‘서울新聞’은 다른 新聞에 비해 治安局長이 言及한 內容을 가장 詳細하게 다루었다.

    新聞社에서 물러난 오소백은 自身을 ‘올챙이 記者’로 指稱하면서 記者生活을 하며 겪은 일들을 大衆雜誌 ‘신태양’에 連載했다. 12月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밤에 ‘올챙이 記者 放浪記’ 첫 回를 썼다. ‘올챙이 記者 放浪記’는 ‘신태양’ 1954年 2月號부터 11月號까지 連載됐다. 이 가운데 ‘라 詩人(癩 詩人) 事件’이 들어있다. ‘서울新聞’ 社長 朴鍾和는 失明을 밝히지 않고 ‘P 社長’이라고 이니셜로 指稱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充分히 알 수 있었다. 朴鍾和는 1949年 6月15日에 就任해 戰爭 期間 社長을 맡고 있다가 한하운 事件이 있은 이듬해인 1954年 4月15日에 退任했다. 오소백이 ‘올챙이 記者 放浪記’를 連載하고 있던 때였다.

    歷史的 事件은 當時의 時代狀況을 勘案해 考察하고 評價해야 한다. 筆禍事件度 마찬가지다. 慘酷한 戰爭을 겪고 난 뒤로 共産主義는 包容의 對象이 아니었다. 한하운이 戰爭 後에 ‘데모’와 같은 詩를 發表했다면 當場 큰 處罰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政權統治 次元이 아니라 全體 社會에 確固히 자리 잡은 共産主義를 向한 憎惡心 次元이었다. 李貞善의 問題提起는 亦是 이 같은 認識에서 出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데모’에 對한 釋然찮은 解明

    多幸인 것은 警察이 戰爭 前에 發刊된 詩集에 對해 悠然하게 解釋하면서 韓何雲을 處罰하려 하지 않았다는 事實이다. 오소백은 言論人으로서 勇氣를 갖고 所信 있게 싸웠다. 戰爭 直後 極端的인 反共 이데올로기가 社會를 支配하던 때에 言論과 文化界에 한가닥의 可能性을 보여준 事例였다. 그러나 警察 發表에 對한 編輯을 둘러싼 ‘서울新聞’ 內部 論爭에서 오소백의 主張이 반드시 옳았는가 하는 點은 생각해볼 餘地가 있다. 當時엔 新聞이 하루 2페이지 發行됐다. 社長 朴鍾和와 編輯局長 고제경은 오소백이 한하운 事件을 4段으로 크게 다루면서까지 센세이셔널하게 몰고 가는 것은 지나치다고 判斷해 이를 牽制했을 수 있다.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 기자 오소백의 필화
    鄭鎭奭

    1939年 慶南 居昌 出生

    中央大 英語英文學科 卒業, 서울대 大學院 碩士(新文學), 英國 런던代 政治經濟大學 博士 (言論學)

    한국기자협회 編輯室長, 寬勳클럽 事務局長, 言論仲裁委員會 委員, 放送委員會 委員, 한국외국어대 社會科學大學長 兼 政策科學大學 院長

    現 한국외국어대 言論情報學部 名譽敎授

    著書: ‘大韓每日申報와 排泄’ ‘韓國言論社’ 外 多數韓何雲의 詩가 發表된 時期와 內容 新天地(1949.4.25) 한하운 始初(1949.5.30) 한하운 始初(1953.6.30) 比 고


    ‘데모’에 나오는 文句를 이병철이 任意로 揷入했다는 韓何雲의 辨明은 믿기 어렵다. 萬一 그랬다면 ‘新天地’에 發表하던 때에 들어 있던 問題의 句節을 初版 詩集을 낼 때 왜 削除하지 않았는지 納得할 만한 對答이 있어야 한다. 戰爭 前에 左翼의 主張에 同調하는 心情으로 詩를 썼더라도 韓何雲은 共産主義 文化게릴라는 아니었다. 筆禍事件이 일어났을 때는 共産主義 思想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한하운(本名 泰永)의 詩는 많은 사람의 心琴을 울렸다. 필화가 있은 後에도 詩 創作을 繼續해 여러 卷의 詩集과 自敍傳 ‘나의 슬픈 半生氣’ 等을 出刊했다. 그 後 鳴動에서 無瑕文化史(無何文化社)라는 出版社를 運營할 때는 完治된 狀態였고, 1962年 7月 美國公報院이 우리나라 最初의 球라(救癩) 弘報映畫 ‘黃土길’을 製作해 全國 映畫館에서 上映할 當時 다시 한番 世人의 注目을 받았다. 그는 1975年 2月28日, 1950年 以後 主로 머물렀던 仁川 北區 십정동 山 39番地에서 한 많은 生을 마쳤다.

    韓何雲의 詩가 發表된 時期와 內容

    新天地(1949.4.25) 한하운 始初(1949.5.30) 한하운 始初(1949.5.30) 備考
    1 全羅道 길 全羅道 길 全羅道 길
    2 손꼬락 한마디 손가락 한마디 손가락 한마디
    3
    4 목숨 목숨 목숨
    5 데모 데모 行列 題目을 ‘行列’로 바꿈
    6 열리지 않는 門 개구리 열리지 않는 門
    7 파랑새 열리지 않는 門 파랑새
    8 파랑새
    9 막다른 길 막다른 길
    10 어머니 막다른 길 어머니
    11 개고리 어머니 明洞거리
    12 明洞거리 明洞거리 비오는 길
    13 비오는 길 비오는 길 自畵像
    14 揭示板 初版 목차에

    題目만 있고 詩는 없음
    15 自畵像 개구리
    16 꼬오·스톱 꼬오·스톱
    17 愁愁夜曲 洋女
    18 洋女 자벌레의 밤
    19 자벌레의 밤 業果
    20 業果 秋雨日記
    21 秋雨日記 秋夜怨恨
    22 秋夜怨恨
    23
    24 女人
    25 女人 愁愁夜曲
    26 河雲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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