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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讚美者 미켈란젤로, 神에 歸依하다|신동아

‘몸’의 讚美者 미켈란젤로, 神에 歸依하다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sky3203@donga.com

    入力 2004-09-07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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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間과 藝術을 삶의 帝王으로 삼아 敎會 批判에 앞장섰던 미켈란젤로. 예순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神에 歸依하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破格과 矛盾, 不均衡의 均衡으로 藝術의 한 頂點을 산 어느 天才의 肖像.
    張承業이 王에게 불려갔으나, 몇 番씩 宮闕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有名하다. 그 이야기를 中心으로 미켈란젤로처럼 멋진 反權力 藝術家上을 그려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빙 스톤의 小說 ‘미켈란젤로’나 이를 原作 삼아 만든 映畫 ‘苦惱와 恍惚’은 ‘吹花癬’과 全혀 달랐다. ‘苦惱와 恍惚’은 ‘天地創造’를 그리는 4年 동안 벌어진 敎皇과 미켈란젤로 間의 對決을 다루고 있다. 映畫 ‘클레오파트라’에서 시저로 나왔던 렉스 해리슨이 敎皇, ‘벤허’의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나온다. 모두 ‘强한’ 男子들이다.

    當時의 敎皇은 只今 우리가 보는 敎皇과는 매우 다른, 시저처럼 戰爭을 指揮하는 大將軍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버릇 삼아 命令하듯 묻는다. “언제 끝나느냐?” 畫家는 언제나 “내가 滿足할 때”라고만 答한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不可能한걸까? 張承業도 “꼴려야 그리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王에게 그렇게 答했다는 式의 얘기도 可能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까? 그러나 畫家를 아끼는 王이어서 賤民인 그를 부른 것이니 설마 죽이기야 했을까?

    ‘苦惱와 恍惚’은 男子만의 映畫는 아니다. 過勞로 쓰러진 畫家를 極盡히 看病하는 女人이 登場한다. 르네상스 最大 權力者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 티齒나. 當時 有夫女인 그女가 미켈란젤로의 愛人이었다는 證據는 없으니 픽션인 셈이다. 둘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時節 工夫한 로렌초의 彫刻學校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나, 病弱한 티齒나가 名門家로 시집가면서 미켈란젤로는 貴族에 對한 憎惡心을 갖게 되었다고 設定돼 있다. ‘吹花癬’에도 그런 女人이 張承業의 첫사랑으로 나오나, 그 失戀이 兩班에 對한 憎惡心으로 連結되지는 않는다.

    張承業의 境遇도 괜한 妓生들 얘기 말고 그런 사랑으로 꾸밀 수는 없었을까? 아니, 妓生 이야기를 할라치면 차라리 映畫에 자주 登場하는 春畫를, 張承業이 그들과의 사랑을 통해 完成한 作品이었다고 보면 어떨까. 낮에는 돈벌이를 위해 完璧한 形式美의 中國化를 그리고, 밤에는 妓生과의 情事를 素材 삼은 春畫를 그렸다면. 그리하고 나면 春畫에 對한 새로운 解釋도 可能하지 않을까? 그러나 映畫에서 春畫는 徹底히 罵倒되고 있다.

    映畫 雜誌들은 ‘吹花癬’에 對해 크게 떠들어대고 特히 張承業 役을 맡은 映畫俳優 최민식의 演技를 稱讚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畫家가 아니라 ‘組暴 같은’ 최민식만 남아있다. 勿論 키가 크고 筋肉質인 美男 헤스턴이 키가 平均 以下이고 비뚤어진 입과 코를 가진 醜男 미켈란젤로를 延期한 것 亦是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組暴 같은 장승업 演技도 마찬가지다.



    ‘苦惱와 恍惚’에서 미켈란젤로는 몇몇 女子들과 사랑 或은 不倫에 빠지고, 甚至於 娼女와의 關係로 性病에 걸리는 것으로 描寫돼 있다. 그러나 最近에는 그가 同性愛者였다는 見解가 힘을 얻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關聯해 唯一하게 根據가 남아있는 女性은 그가 60歲 때부터 10年間 親舊로 지낸 비토리아 콜로나뿐이다.

    ‘男子의 벗은 몸’李 말하는 것

    그러나 最近 飜譯된 獨逸 로로로판 評傳 等을 보면 同性愛는 根據 없는 誹謗으로 否定된다. 그런데 그 根據로 提示하는 것이 快樂의 化身으로 그려진 ‘레다’와 조각 ‘밤’과 ‘낮’,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 소네트 한 篇뿐이라는 點은 問題다. 率直히 그가 同性愛者였다면 또 어떤가? 로버트 알트만 監督이 만든 映畫에서 반 고흐로 분한 팀 로스가 그 비슷한 얼굴과 體軀의 미켈란젤로 役을 맡는다면 確實히 同性愛者로 그려질지도 모른다.

    最近 전우익이 쓴 ‘사람이 뭔데’가 베스트셀러 目錄에 오르내리고 있다. 亦是 베스트셀러 作家인 詩人 신경림은 그를 두고 ‘깊은 山속의 藥草처럼 貴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전우익 自身은 ‘사람이 뭔데’라고 묻고 있으니 그리 부르는 것도 意味가 없다. 차라리 藥草라고 하면 모르되.

    ‘사람이 뭔데’의 廣告는 ‘소로우, 니어링, 그리고 오늘·여기의 전우익!’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소로우도 니어링度 ‘사람이 뭔데’라고 말한 적은 없다. 環境汚染이나 生態破壞는 人間이 저지른 짓이다. 아니, 戰爭을 비롯하여 모든 惡行은 人間이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고 人間을 否定할 것인가? 人間 淸掃를 할 것인가?

    소로우나 니어링의 冊이 널리 읽히는 것을 꼭 否定的으로 볼 必要는 없으리라. 그러나 市民不服從主義者로서 소로우나 니어링이 아니라 그들의 自然主義만을 强調하는 最近의 風潮는 내게는 疑問이다. 特히 니어링의 境遇, 그의 電氣가 홍상수의 ‘生活의 發見’에서 풍자되는 것 以上으로, 우리나라에서 過度하게 紹介되는 理由도 궁금하다. 그의 祖國인 美國은 勿論 世上 어느 나라에서 이렇듯 높은 人氣를 누리고 있을까. 나는 모른다. 老將의 道敎主義와 關聯이 있을까. 그것으로 오늘·여기의 모든 問題를 解決할 수 있을까?

    問題의 解決은 人間 否定, 人間 嫌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人間像과 世界의 追求에 있다. 미켈란젤로를 包含한 르네상스人이 그러했다. 그 새로운 人間像이 바로 ‘다비드’ ‘모세’이고, 그 새로운 世界가 바로 ‘天地創造’요 ‘最後의 審判’이다. 人間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 만큼 아름답게 創造한 르네상스人은 없다. 特히 男性의 벗은 몸을. 그래서 미켈란젤로를 同性愛者로 보는 見解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重要한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人은 神이 自身과 꼭 닮은 모습으로 人間을 만들었다고 믿었음을 미켈란젤로는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가 人間의 罪를 審判하기 위해서가 아닌, 神에 가까운 存在로 끌어올리기 위해 創造됐다고 믿었다.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創造한 人間 肉體의 아름다움은 神聖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宗敎的 偏見에 依해 性器 部分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後 500年이 지난 1994年 復舊 때 ‘걸레’들은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드러난 人間 肉體의 아름다움이란! 그리고 그 사이를 支配한 5世紀의 어둠이란! 그러나 如前히 예수와 마리아는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5世紀가 지나도! “예수와 마리아도 人間이기는 마찬가진데.” 하늘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最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꽤 紹介되고 있으나 내가 아는 限 지난 30餘 年 동안 우리 讀者들에게 가장 널리 紹介된 르네상스人은 미켈란젤로다. 나도 어린 時節부터 그의 電氣를 읽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로맹 롤랑의 電氣(1905), 어빙 스턴이 쓴 小說 스타일의 電氣(1961)도 찾아 읽었다. 우리말로 飜譯된 것 外에도 많은 外國語本 電氣 및 硏究物을 읽었는데 亦是 壓卷은 위의 두 冊이다.

    로맹 롤랑의 著作은 그가 쓴 베토벤·밀레·톨스토이·간디 等의 電氣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浪漫的이다. 미켈란젤로를 悲劇的 英雄으로 描寫하고 있는 것이다. 어빙 스턴의 小說을 根據로 製作된 映畫 또한 例外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의 참모습은 平凡하고 俗物的인 人間이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르네상스人이라 부를 수 있는 當代의 사람들이 大部分 그랬다. 나는 拙著 ‘내 親舊 빈센트’에서도 從來의 悲劇的 天才로서의 반 고흐를 解體하기 위해 努力한 바 있다. 스턴 等이 쓴 미친 天才로서의 반 고흐 賞을 解體하고자 한 것이다.

    스턴이 반 고흐와 미켈란젤로를 함께 쓴 것은 決코 偶然의 一致가 아니다. 天災나 英雄을 平凡한 人間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至極히 非大衆的人 일이어서 人氣가 없다. 大衆은 英雄이나 天才, 그것도 悲劇的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自身들과 같이 平凡하고 俗物的이라면 굳이 알아야 할 興味를 느끼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처럼 미켈란젤로度 겹눈의 人間이었다. 그는 조각·繪畫·建築은 勿論 始作에도 卓越했다. 미켈란젤로는 特히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民主主義者이자 共和主義者로서 政治에도 參與했다. 貴族이나 大地主가 아닌 市民의 아들로 태어나 共和國의 要職을 맡았고, 共和國을 象徵하는 ‘다비드’賞도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時代 狀況에 따라 敎皇의 命令으로 수많은 作品을 製作했으나, 至嚴한 가톨릭 本錢 壁과 天障을 온통 누드로채워 批判을 받기도 했다. 女人과 함께 男子를 사랑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藝術과 삶 사이의 모든 境界를 부서뜨렸다. 그는 緊張과 逆緊張, 그리고 그 綜合의 辨證法으로 살았다. 俗物과 解脫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財物을 탐하고 名聲을 救했으나, 그것에 끝없이 煩惱했으며, 마침내 그 모든 것을 抛棄했다.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特히 宗敎的 人間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神이란 곧 人間이었고, 人間의 몸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베드로聖堂까지 고스란히 人間의 몸을 닮아 있다. 抽象的인 比例가 아니라 人間 自體가 서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人間의 몸을 모르면 建築에 對해서도 알 수 없다고. 그 말은 建築뿐 아니라 藝術 全般에 該當된다.

    베드로聖堂은 이름 自體가 人間이다. 4世紀, 예수의 首弟子인 베드로가 殉敎한 곳에 세워진 聖堂이다. 베드로란 이름에는 돌이라는 뜻도 있어(따라서 우리 式으로는 ‘돌쇠’가 될까) 聖堂의 礎石으로 여겨졌고, 그는 最初의 敎皇으로 推仰됐다. 敎皇이란 ‘가르치는 皇帝’라는 뜻인데, 여기엔 아마 예수를 잇는다는 뜻도 숨어있으리라.

    베드로聖堂 옆 바티칸 美術館 1層 구석 시스티나禮拜堂에는 미켈란젤로의 ‘最後의 審判’과 天障畫 ‘天地創造’가 있다. 2層에는 라파엘의 ‘아테네 學堂’과 ‘聖體의 論議’, 이어 프라 안젤리코의 禮拜堂이 이어진다. 그中 壓卷은 亦是 ‘最後의 審判’과 ‘天地創造’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같은 ‘작은 世界’를 보다 ‘最後의 審判’이나 ‘天地創造’를 보면, 그 規模도 놀랍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壯大한 몸집의 人間들이 그득한 世上에 더욱 놀라게 된다. 그러나 仔細히 보면 미켈란젤로의 巨人은 미스터 유니버스類의 筋肉質이 아니다. 그는 모든 人間을 一定한 몸집을 갖는 解剖學的 對象의 裸體로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마른 사람이 없고, 모두 보기 좋을 程度로 살이 붙어있다. 따라서 先人이든 惡人이든, 聖者든 속人이든 모두 비슷한 몸집의 살아있는 人間들로 表現했다.

    라파엘에서 미켈란젤로로

    人間의 몸을 한 집인 聖堂 속에 있는 ‘人間들의 世界’. 그리고 그가 만든 無數한 人間의 彫刻像들. 미켈란젤로는 바로 人間의 藝術家다. 그에게는 오직 人間만이 問題였다. 當然히 그들의 精神과 삶, 그러니까 宗敎와 社會가 問題視된다. 이 點이 그가 比較的 非宗敎的, 非社會的이었던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 다른 點이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산 時代가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그것과는 달리 危機의 時代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는 바로 마키아벨리의 時代였다. 마키아벨리가 그 危機를 政治的으로 克服하려 했음에 비해 미켈란젤로는 宗敎를 통해 克服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苦惱는 에라스무스, 그리고 모어의 유토피아로 이어진다.

    어빙 스턴 作 ‘미켈란젤로’의 우리말 譯者는 藝術創造에 徹底했던 미켈란젤로의 生涯가 “物質萬能의, 갈 바 모르는 現代人들에게 예나 只今이나 변함없는 삶의 價値를 다시 일깨워주며, 人間이 追求해야 할 倫理觀과 職業觀을 새롭게 提示한다”고 했다. 이는 現代人이 自己 職業에만 忠實하면 萬事가 解決되고 갈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인가? 이렇게 스턴의 冊마저 시오노 나나미 類의 處世術로 誤解되는 우리의 淺薄한 知的 風土는 凄凉하기 짝이 없다. 스턴이 그런 內容의 冊을 쓰지 않았음은 두 말할 必要도 없다.

    한便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를 햄릿처럼 描寫했다. 이에 對해 로로로는 自身의 評傳에서, 롤랑이 미켈란젤로가 남긴 便紙 한 通을 잘못 읽은 탓이라며 一考의 價値도 없는 描寫라 貶下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便紙가 約 500統에 이르니 한 通 程度 잘못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 하나 잘못 읽어서 人間性을 全面 誤解했다는 것은 理解하기 어렵다. 事實 미켈란젤로는 많은 作品을 未完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그의 優柔不斷함을 證據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是非가 프랑스人과 獨逸人의 意識 差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롤랑 式의 이야기는 프랑스 浪漫主義 時代 以來 自己 作品에 絶對 滿足 못하는 멜랑콜리한 藝術家上을 理想으로 삼고 있으며 그 典型으로 미켈란젤로를 자주 言及했다는 點은 事實이다. 예컨대 들라크루아는 미켈란젤로를 直接 作品의 素材로 삼기도 했다.

    浪漫主義者들이 새로운 藝術假想으로 미켈란젤로를 崇尙한 것은 基本的으로 그의 藝術에 對한 共感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탕달은 미켈란젤로의 時代가 다시 올 것이라고 豫言했고, 제리코는 ‘最後의 審判’을 模倣해 ‘메두사의 뗏木’(1819)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러한 傾向이 登場한 것은 19世紀 中盤 무렵이다.

    浪漫主義의 ‘主敵’인 아카데미즘을 뒤집은 先驅者로 미켈란젤로를 再評價하려는 움직임은 18世紀 末葉, 프랑스보다 英國에서 먼저 나타났다. 블레이크나 레이놀즈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17~18世紀 바로크·로코코 아카데미즘의 時代에 미켈란젤로는 잊혀졌거나 無視되었다. 代身 라파엘이 ‘創造의 快適한 아름다움’의 典型으로 推仰됐다. 反面 미켈란젤로는 均衡과 調和가 缺如된, 단조롭고 지나치게 解剖學的인 誇張에 치우친 ‘低俗한 放任主義’로 罵倒됐다.

    古典主義 美學者인 빙켈만은 미켈란젤로가 趣向의 退化를 招來했다고 主張했다. 미켈란젤로에 對한 唯一한 ‘辯護’는 괴테가 ‘이탈리아 旅行’에서 그를 禮讚한 것 程度다. 그러나 괴테 亦是 晩年에는 라파엘을 더 좋아하게 됐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미켈란젤로는 살아 生前 이미 ‘神話’였다. 바자리는 그의 ‘르네상스 藝術家 評傳’(1550)에서 當時 生存者로는 唯一하게 미켈란젤로를 다루었고, 그런 類의 評價는 當時 이미 一般的인 것이었다. 게다가 以後 登場한 카라바지오, 카라치,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푸생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는 늘 뛰어난 藝術家들에게 靈感을 주는 源泉이 됐다.

    19世紀, 미켈란젤로는 復活했으나 道德的 非難은 如前히 남아있었다. 러스킨은 古代 그리스인이나 베니스의 르네상스 畫家들이 ‘성실하고 謙虛하며 自然스럽게’ 人間의 몸을 그린 데 反해, 미켈란젤로는 ‘醜雜하고 不遜하며 人爲的으로’ 그렸다고 評했다. 나는 러스킨을 좋아하지만 이런 類의 빅토리아朝 謹嚴主義는 窒塞이다.

    스턴의 冊은 어디까지나 小說이다. 그는 13歲의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그림을 배우러 가는 것으로 小說을 始作한다. 스승에게 그를 紹介한 親舊가 미켈란젤로는 壁畫를 그렸다고 말하나, 이는 傳說에 不過하다. 또한 그림을 배우기 始作한 것도 13歲가 아닌 14歲부터다.

    小說에서 미켈란젤로는 스승에게 돈을 내기는커녕 돈을 달라고 한다. 勿論 이 點도 虛構다. 돈을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가 그림 授業을 反對했기 때문이다. 當時 畫家란 賤한 職業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法學徒로 만들기 爲해 7歲 때 라틴語學校에 보낸다. 그럼에도 그림에 關心을 갖는 아들을 아버지는 매질한다. 小說에는 13歲의 미켈란젤로가 藝術의 길을 가겠다며 아버지와의 言爭에서 이기는 場面을 길게 敍述하고 있다. 스턴은 어린 미켈란젤로가 女性의 裸體畫 等을 그렸다고 하나, 實際로 남아있는 것은 몇 張의 模寫 펜화뿐이다.

    이듬해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家가 세운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다. 小說에서는 이를 ‘定員’이라 表現하고 있으나 터무니없다. 그곳은 아테네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아카데미와는 全혀 無關한, 至極히 자유로운 學問과 藝術의 殿堂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自己만의 力動的인 彫刻技法을 硏磨한다. 그러나 當時에 만든 조각들은 只今 거의 남아있지 않다.

    1494年, 프랑스軍이 이탈리아에 侵入하자 피렌체에서는 民衆 蜂起가 터진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 그 뒤를 이은 無能한 아들이 追放되면서 新婦 사보나롤라의 謹嚴한 共和政이 始作된다. 사보나롤라는 物質的 快樂과 豪華生活에 젖은 當時 敎皇과 로마 敎皇廳을 非難하고 그 墮落에 對한 神의 刑罰로 인해 이탈리아는 滅亡할 것이라 豫言했다. 그는 프랑스 軍隊를 노아의 洪水에 比喩하면서 그들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릴 것이니 피렌체 市民은 이제라도 빨리 새로운 敎會를 세워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1498年, 敎皇에 依해 火刑당하고 만다.

    當時 大部分의 사람들처럼 미켈란젤로度 그의 思想에 心醉해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 中心의 敎會改革運動에 參與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에 依해 故鄕마을이 불타는 瞬間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왜? 그 理由에 對해서는 여러 解釋이 있다. 于先 사보나롤라는 藝術마저 不正한 人物이었다는 解釋, 또는 미켈란젤로가 怯쟁이였다는 主張, 한便으로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異敎的 知識과 基督敎 사이에서 煩悶했다는 說 等이다. 나는 그 모두를 首肯한다. 그런데 더욱 重要한 것은 그가 아직 10代 少年이었다는 事實이다.

    “난 奇跡을 믿지 않아”

    19歲의 미켈란젤로는 베니스,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갔다. 로마 性베드로 聖堂의 ‘피에타’가 그에게 最初의 名聲을 안겨주었다. 1499年, 그의 나이 不過 24歲의 作品이나, 그야말로 傑作 中의 傑作으로 評價되고 있다. 어쩌면 돌을 흙처럼 주물러 自由自在로 빚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피에타’는 異常한 點이 너무 많다. 어린 少女의 모습을 한 聖母가 죽은 靑年 예수를 안고 있다. 聖母의 實際 나이는 50歲가 넘었으련만 얼굴은 10代, 아니 그 밑으로 봐도 無妨할 만큼 앳되기 그지 없다. 이는 사보나롤라를 비롯한 當時 基督敎人들이 聖母는 無原罪의 永遠한 純潔 處女라 말한 것을 따른 結果다.

    어린 모습에도 聖母의 얼굴은 至嚴하기 짝이 없다. 十字架에 못 박혀 죽은 아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눈물은커녕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피에타’를 자애로운 聖母像이라 禮讚하는 境遇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나는 도무지 그런 見解에 贊成할 수 없다.

    1501年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4年間 ‘다비드’ 等 수많은 傑作을 生産한다. 當時 이미 共和主義的 自由를 象徵하는 作品으로 崇尙된 ‘다비드’ 像에 對해 最近에는 權力의 誇示를 表現한 것 아니냐는 疑問도 提起되고 있으나, 적어도 當時 피렌체人에게 이 作品은 危機를 맞은 共和國이 志向하는 自由를 象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다비드’上 또한 異常하다면 異常한 구석이 적지 않다. 언뜻 보기에도 身體가 不均衡하다. 손은 너무 크고 발은 너무 작아 발보다 손이 더 커 보인다. 팔뚝은 少年인데 가슴은 靑年의 그것처럼 떡 벌어져 있다. 눈은 敵을 凝視하고 있으나, 兩팔은 完全히 緊張을 푼 것처럼 매우 부드럽다. 코도 너무 커다란데 當時 피렌체의 支配者가 이를 指摘하자 코 위에 돌가루를 뿌리며 이제 됐냐고 反問했다는 이야기는 有名하다.

    미켈란젤로는 왜 이런 賞을 만들었을까? 彫刻家인 그가 身體의 不均衡을 몰랐을 理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 以前에 만들어진 도나텔로의 同名 作品이 골리앗을 물리친 柔弱한 少年인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健壯한 靑年임에 留意해야 한다. 舊約聖書에는 15歲 假量의 어린 少年이 奇跡을 일으킨 것으로 나오니 이를 額面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도나텔로가 옳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처럼 健壯한 筋肉質이어야만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골리앗을 이긴 것은 奇跡이 아닌 充分히 있을 수 있는 當然한 結果다.

    그렇다. 미켈란젤로는 奇跡을 否定한다. 그에게 奇跡은 아무 意味가 없다. 設使 神의 奇跡이 있다 해도 이는 精神的인 것에 不過하다. 도리어 超人的인 意志와 智慧, 그리고 體力을 갖춘 ‘人間 다비드’야말로 眞實이다. 그러므로 다비드는 가장 强靭한 體力의 所有者로 表現되어야 한다. 아마도 ‘다비드의 强靭함’이란 ‘不均衡의 均衡’으로 表現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리라.

    ‘다비드’가 廣場에 세워지자 사람들은 밤마다 여기에 돌을 던졌다. 理由는 不均衡이 아니라, 性器가 聖人의 그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當時까지 女性像은 性器 表現 없이, 男性像은 少年의 模樣새로 만드는 것이 慣例였다. 大衆이나 敎會의 水準이란 고작 그 程度였다. 敎會는 以後 ‘最後의 審判’의 性器를 모두 가리도록 命令하는 것으로 그 水準을 다시 한番 ‘誇示’했다.

    1508年, 미켈란젤로는 ‘天地創造’를 그린다. 建築家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에게 失敗를 안기려고, 敎皇을 부추겨 彫刻家인 그에게 畫家의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全혀 根據 없다. 한便 小說家 스턴은 미켈란젤로가 그 理由를 레오나르도의 嫉妬 탓으로 여기는 場面을 描寫하고 있으나 이 亦是 根據가 없다. 미켈란젤로가 天障畫 作業을 願치 않은 것은 事實이다. 그래서 그는 自己 代身 라파엘을 推薦했다. 그러나 스턴의 冊에는 그에 對한 言及이 全혀 없다. 어쨌거나 무엇이 事實이든 상관없으니 그림이나 보자.

    아, 寫眞으로 이 作品을 鑑賞하는 讀者들에게 이 말만은 해야겠다. ‘最後의 審判’은 밑바닥에서 17m 높이의 그림을 올려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鑑賞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건 藥果다. ‘天地創造’는 목을 뒤로 完全히 젖혀야만 겨우 눈에 들어온다. 바라보기가 고통스러울 程度다. 그렇다고 神聖한 聖堂에서 누워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몇 年間 허리를 完全히 젖힌 狀態로 그 그림을 그렸을 미켈란젤로를 생각하면 몇 分의 苦生쯤은 괜찮다.

    ‘天地創造’는 新約聖書가 아닌 舊約聖書를 素材 삼고 있다. 왜 예수의 一生을 그린 新約이 아닌 舊約을 擇했을까? 많은 學者들은 舊約의 內容이 ‘더 人間的’이라는 點을 꼽는다. 미켈란젤로처럼 正말 人間다운, 그토록 矛盾된 性格을 생각한다면 特히 그러하다. 勿論 여기에는 사보나롤라의 影響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特히 人間의 祖上인 아담이 知性을 얻음으로 因해 樂園에서 追放된다는 悲劇的 設定에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人間이 人間이고자 努力하는 것에 對한 神의 峻嚴한 審判에서 미켈란젤로는 神의 殘酷함을 느낀 것일까. 그 悲劇을 바라보는 聖徒들의 모습이 모두 沈鬱하고 슬픔에 잠겨있거나 激昂된 模樣새로 그려진 것 또한 그 殘酷함에 對한 자연스러운 反應이라 봐야 하리라.

    基督敎에서 말하는 天地創造 이야기는 大部分 알고 있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創造하나 뱀의 誘惑으로 因해 樂園에서 추방당하고 그 子孫이 잇따라 罪를 지어 大洪水로 審判받는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미켈란젤로 以前이나 以後에나 性器가 가려진 채 그려진 것이 普通이나 미켈란젤로는 이를 露出시켰다. 特記할 만한 點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그림들보다 ‘노아의 洪水’에 特히 關心이 간다. 그림 中央 위쪽에 箱子처럼 생긴 노아의 배가 있다. 그 오른쪽에 텐트가 쳐진 좁은 바위가 있다. 그림 왼쪽 밑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고 있는 巨大한 大陸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 셋의 中間에 暴徒들이 탄 보트 한 隻이 있다.

    從來 노아의 배는 가톨릭 敎會, 텐트는 유대 敎會, 大陸은 異敎를 뜻하는 것으로 解釋했다. 卽 가톨릭 敎會를 빼고는 모두 滅亡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敎會를 攻擊하는 者들은 當時 敎皇을 攻擊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軍隊로 解釋했다.

    그러나 텐트 속 사람들은 勿論 大陸의 사람들이나 보트의 사람들조차 모두 邪惡하다기보다는 人間的 사랑과 物質을 渴求하는 悽然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當然히 죽어야 할 人間’이 아닌, 肉體와 靈魂 사이에 存在하는 人間의 自由意志야말로 運命의 決定權者라는 르네상스 時代 신플라톤주의的 人間觀을 보여주는 것으로 解釋할 수 있다.

    實際로 미켈란젤로는 ‘人間의 尊嚴에 對해서’란 冊을 쓴 신플라톤주의 哲學者 비코 델라 미란돌라의 弟子였다. 그는 ‘人間은 世界의 中央에 있다’, 卽 人間은 神과 物質의 中間子라 宣言하고 物質, 卽 肉體에의 執念을 버림으로써 神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苦惱의 人間은 그런 執念의 르네상스 人間들인 것이다.

    筋肉質의 ‘모세’上에 담긴 뜻

    한便으로 텐트가 유대敎를 象徵한다는 解釋에 對해서는 몇 가지 疑問이 남는다. 왜냐하면 텐트에는 가톨릭 미사의 象徵인 葡萄酒 술盞, 高貴한 黃色 옷을 입은 新婦, 가톨릭 敎會의 勝利를 象徵하는 올리브 나무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新婦를 敎皇이라 하면 그 텐트야말로 로마 敎皇廳을 象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事實 미켈란젤로는 로마 敎皇廳을 否定했다. 1496~98年을 로마에서 보내면서도 몇 次例나 피렌체로 돌아와 사보나롤라의 새 敎會運動에 參加했다. 그리고 그 20年 뒤, 루터가 나타났다. 卽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中央의 노아의 배는 敎皇廳이 아니라 ‘새로운 敎會’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便이 맞을 것이다. 勿論 미켈란젤로가 루터式 宗敎改革에 贊成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天地創造’를 그리고 난 뒤 미켈란젤로는 心身이 完全히 녹초가 됐다. 목은 뒤로 젖혀져 便紙 한 張을 읽으려 해도 머리 위에 두고 봐야 할 程度였다. 앞을 볼 수 없어 恒常 어딘가에 부딪혔다. 한가지 多幸한 點이라면 그림을 完成한 直後 敎皇이 死亡하면서 그야말로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어 미켈란젤로는 죽은 敎皇과 約束한 墓의 彫刻을 始作한다. 그中 ‘모세’는 完璧한 조각으로 評價된다.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에게 모세가 紅海를 가른 汽笛 따위는 關心事 밖이다. 모세는 그저 超人的 意志力과 智慧, 體力의 所有者로 描寫된다. 또한 모세는 다비드 以上으로 民族解放의 實現者다. 바자리는 이 ‘모세’賞을 보고 많은 猶太人들이 가톨릭에 歸依했다고 傳했다.

    그러나 ‘모세’賞에는 어딘가 어두운 面이 存在한다. 모세 앞에 놓인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모세의 이스라엘로 象徵되는 피렌체의 運命에 對한 描寫로 볼 수 있다. 이는 ‘奴隸’賞을 捕虜가 된 유대人, 또는 外勢에 侵略당한 이탈리아, 또는 메디치 獨裁下의 피렌체 民衆을 表現한 것으로 보는 見解와 連結된다. 아무려나, 人間의 絶對性을 믿은 미켈란젤로 自身의 原初的 不安과 疑惑을 表現한 것으로 보는 건 어떨까.

    미켈란젤로가 가난하고 不幸한 民衆을 同情한 것은 分明하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동정’ 水準이었고 그들이 暴徒로 變할까봐 恐怖에 떨었다. 그렇다고 君主主義나 貴族主義에 빠진 것도 아니어서 도리어 그들을 輕蔑했다. 그는 피렌체를 사랑했으나, 後半生에는 그곳에 돌아갈 수 없었다.

    1529年 미켈란젤로는 共和國 築城 責任者로 일했다. 그러나 이듬해 共和國은 滅亡한다. 大藝術家란 理由로 侵略者로부터 赦免받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墓所를 위한 彫刻에 매달렸다. 各各 男女인 ‘저녁’과 ‘아침’, ‘낮’과 ‘밤’이다. ‘아침’은 젊은 女人의 裸身像이다. 미켈란젤로는 女性像보다 男性像에 더 뛰어났던 것으로 評價되나, 적어도 이것만은 例外다. 그 모습은 歡喜가 아니라 苦痛의 始作이다. 이어 努力과 忍耐를 象徵한다는 두 男子 ‘낮’과 ‘저녁’, 그리고 마침내 시든 몸으로 잠든 老女(老女)로 表現한 ‘밤’이 登場한다. 잠자는 그女의 얼굴 또한 아픔과 苦惱로부터 自由롭지 못하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있는 로렌초의 銅像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原形이라 할 程度로 苦惱에 차있다. 메티値가 사람들이 實際 모습과 全혀 닮지 않았다고 不平하자 미켈란젤로는 “10年만 지나면 누가 알아보겠느냐”고 對答하곤 絶望의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最後의 審判’을 그린다.

    ‘最後의 審判’은 禮拜堂 祭壇 正面을 가득 채운 大型 壁畫다. 높이 17m, 幅 13.3m다. 그 그림 앞에 처음 서면 먼저 엄청난 恐怖가 掩襲한다. 全體的으로 푸른 背景에 色이 바래 검은 빛으로 變한 고통스런 모습의 수많은 人體들이 悽絶하게 뒤엉켜 있다. 最近 元來의 밝은 色調로 補修했음에도 느낌에는 큰 變化가 없다.

    約 500年 前에 그려진 그림은 世上이 混亂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예수 出現의 約束을 苦待하는 者들의 苦痛을 생생히 描寫하고 있다. 事實 宗敎의 有無를 떠나, 언제 어느 나라 사람이건 自身이 사는 世上이 어지럽고 바르게 살기 어렵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恐怖心은 時間의 흐름과 함께 徐徐히 사라진다. 처음의 衝擊 뒤 다시 그림을 보면 至極히 調和로운 人體의 配列에 妙한 便安함을 느끼게 된다. 내 自身이 그中 하나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두세 番 다시 찾다보면 어느새 차분한 마음으로 구석구석을 充分히 鑑賞할 수 있게 된다.

    船艦이란 무엇인가

    그림은 全體的으로 가로 3段으로 나뉘어져 있다. 上段은 예수와 마리아, 中斷은 天使가 中心이고, 下端에는 地上의 人間들이 있다. 全體 構圖는 예수를 中心으로 한 原形이다. 그림 왼쪽은 地上에서의 昇天, 오른쪽은 地上으로의 落下라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世上이 滅亡할 때 예수가 復活해 人類를 救援한다는 基督敎的 믿음의 核心을 雄辯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素材라도 時代에 따라 그 表現方式은 많은 差異를 보인다. 예컨대 12世紀까지의 中世 西유럽이나 9~15世紀 비잔틴제국처럼 安定된 時代에는 예수가 裁判官으로 中央에 謹嚴한 얼굴로 앉아있고, 그 左右로 祝福받은 靈魂(선인)과 處罰된 靈魂(惡人)李 二分法的인 構圖로 그려져 있다. 聖母와 성요한이 兩쪽의 辯護逆으로 그려지는 것 또한 一種의 公式이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決코 무섭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13~14世紀 西유럽에서는 天國으로 가는 先人에 비해 地獄으로 떨어지는 惡人의 모습을 誇張되게 그렸다. 特히 地獄은 殘忍한 拷問과 虐殺이 亂舞하는 곳으로 무섭기 짝이 없다. 1305年頃 지오토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禮拜堂에 그린 地獄은 그 前의 그림에 비해 매우 殘忍하고 예수의 모습도 嚴格함을 알 수 있다.

    12世紀까지의 예수는 兩팔을 같은 높이로 들고있어 救援과 處罰, 慈悲와 定義는 公平하다는 暗示를 준다. 그러나 13~14世紀에 들어서면 船人을 祝福하는 오른팔은 높이 쳐들려 있고 惡人을 處罰하는 왼팔은 낮추어 祝福과 刑罰을 明白하게 區分하는 態度를 보여준다. 또한 지오토의 그림처럼 손을 손바닥 또는 손등으로 그려 惡人은 손등으로 누르고 先人은 손바닥을 펴 祝福하는 모습으로 描寫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最後의 審判’에는 그러한 善惡의 區別이 분명하지 않다. 善人과 惡人, 聖者와 사도, 上流인과 下流인, 天使와 惡魔 等이 全혀 區別 없이 그려져, 最後의 審判을 하는 法定다운 秩序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人物은 모두 裸體다. 예수도 마리아도 本來는 裸體였다.

    예수 모습도 特異하다. 于先 祝福과 審判의 팔이 뒤바뀌어 있다. 왼손은 쳐들고 오른손은 내린 모습이다. 이는 그림 全體의 構圖와 連結된다. 卽 그림 왼쪽은 昇天의 祝福, 오른쪽은 墜落의 處罰을 뜻한다. 한便으로 祝福을 辯護해야 할 聖母 마리아는 그저 昇天을 바라보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救援의 聖母라기보다는 審判에 떨면서도 그에 抗議하는 閭閻집 아낙처럼 보인다. 더以上 ‘피에타’의 無表情한 聖母가 아니다.

    이러한 表現들은 예수의 審判 意志를 더욱 强調하는 效果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예수의 얼굴이 무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墮落하는 人間들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敎會를 象徵하는 베드로의 모습도 恐怖에 젖어있다. 이는 ‘天地創造’에서처럼 미켈란젤로가 當時 敎會를 批判했음을 象徵한다.

    懺悔하는 者에게 祝福 있으라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그린 1541年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間의 싸움이 極에 達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以上 사보나롤라의 어린 使徒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宗敎戰爭에 抵抗하며 敎會의 結節이 아닌 統合과 和解를 摸索하는 모임에 參與한다. 그 모임은 가톨릭의 內部 改革을 圖謀하는 것으로, 젊어서부터 敎皇廳에 反撥해온 미켈란젤로는 이를 通해 ‘새로운 敎會’, 나아가 ‘새로운 世界’를 追求한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사보나롤라를 克服했음을 暗示한다.

    이 그림은 1536年에 始作해 5年 뒤인 1541年에야 끝이 났다. 火가 나이 61歲에서 66歲까지의 作品이다. 當時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그가 한 말이다.

    “나는 이제 藝術을 나의 偶像, 나의 王으로 삼았던 고약한 想像들이 얼마나 甚하게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前에는 덧없지만 달콤했던 사랑의 근심들은 내가 二重의 죽음으로 다가가는 이때 무슨 意味가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懺悔錄을 聯想한다. 톨스토이가 自身의 作品을 모두 否定하고 神에 歸依했듯 미켈란젤로 亦是 藝術에 바친 삶을 否定하고 神에 歸依한다. 여기서 神이란 特定 宗敎가 아니다. 미켈란젤로 그림의 宗敎的 志向에 對해 흔히 絶對信仰의 프로테스탄티즘인가, 本來的 價値追求의 가톨릭인가를 두고 論議하지만 그림 속에서 우린 더 以上 그런 宗敎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相關이 없는 거다. 佛敎 信者든, 回敎 信者든, 無神論者든,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相關없다. 人間은 누구나 懺悔하며 살게 마련 아닌가? 어떻게 完璧한 船人으로만 살 수 있겠나? 마찬가지로 極惡한 者라도 懺悔는 한다. 그게 人間이다. 르네상스人 미켈란젤로. 그는 마침내 和解와 寬容의 마음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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