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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去來慧(歸去來兮) 者, 돌아가자|신동아

歸去來慧(歸去來兮) 者, 돌아가자

全州 韓屋마을

  • 정윤수│文化評論家 prague@naver.com

    入力 2014-08-21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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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戚들과 情談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冊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 農夫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주니, 앞으로는 西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 -陶淵明 ‘歸去來辭(歸去來辭)’ 中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全州는 옛것을 안은 아늑한 都市다.

    “都市는 젊어야 한다. 아니, 젊어져야 한다. 이것은 무슨 意味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年齡帶가 젊어져야 한다. 젊은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 都市 文化가 創造된다. 우리같이 늙어가는 사람만 있으면 都市가 죽어버린다.”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사람은 電柱, 그 風趣 있는 都市의 게스트하우스 ‘歸去來辭’의 主人 이병천(58) 氏다. 얼마 前까지 全州 문화방송의 能爛한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올봄에 停年을 맞아 새로운 삶, 새로운 空間, 새로운 꿈을 꾸기 始作했다.

    오랫동안 地域 放送局의 프로듀서였고 只今은 게스트하우스 ‘歸去來辭’의 主人張인 그의 本領은 그러나 小說이다. 只今보다 아주 젊었을 때는 詩人이었다. 吟風弄月로 趣味 삼아 매끄러운 詩語를 골라 쓰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1980年代 初盤, 그 뜨거웠던 時代의 뜨거운 詩人이었다. 그러다가 프로듀서로 밥벌이를 했고 그 틈에 時 代身 小說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니까 只今 그는 韓屋 體驗 宿泊業所의 主人이 아니라 當代의 마음을 日常的으로 觀察해야 하는, 小說家의 觀點에서 全州를 말하는 中이다.

    내가 물었다. 全州 하면 古代 文化에서 朝鮮 王朝, 그리고 韓屋마을이 금세 聯想되는데, 왜 이런 都市에 旅行者, 特히 젊은 女性 旅行者가 많은가. 이병천 氏는 卽刻的으로 말했다.

    “旅行의 트렌드가 바뀐다. 적어도 이곳 전주만 놓고 보면 그렇다. 過去에 旅行이라 하면 집안 家長이 行先地 定하고 運轉하고 가서 고기 구워 먹는 것이었다. 아니면 젊은 男女들이 海水浴場에서 눈이라도 맞춰보려 했는데, 요즘 많이 달라졌다. 전주만 해도 젊은 女性 天國이다. 곳곳이 젊은 女性이다. 三三五五 모여서 오고 혼자서도 오고. 全州國際映畫祭 期間에는 아예 여란(女亂)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젊은 女性으로 가득 찬다. 그다음이 家族이고 戀人인데 그래도 折半이 못 된다. 젊은 女性이 壓倒的으로 많은데, 왜 그런가, 이를 여러모로 생각하는 中이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鳥倦飛而知還

    그리하여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于先, 全州는 들어가는 風景부터 남다른 곳이다. 高速道路를 利用하든 汽車를 利用하든, 그 關門은 韓屋 形象이다. 勿論 시멘트로 構築한 톨게이트에 전주역이지만, 그 形象만큼은 基本的으로 韓屋이다. 朝鮮 時代 全羅監營이 있었던 傳統의 都市라는 全州의 正體性이 이로써 確認된다.

    百濟 時代에는 完山이었고 三國 統一 以後 景德王 때 純粹하고 穩全하다는 뜻의 ‘前(全)’이 붙어 全州가 됐다. 高麗 時代 大學者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全州를 두고 “人物이 繁昌하고 家屋이 櫛比하며 百姓의 性品이 質樸夏至 않고 선비는 行動이 신중하다”고 썼는데, 나는 無慮 1000年 前쯤의 이 記錄을 個人的 體驗을 통해 여러 番 確認한 적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 中에 목소리가 신중하되 유머가 있고 눈매가 잔잔하되 限없이 그윽하며 行動이 느린 듯하되 愚直하게 걷고 또 걷는 이들의 行路를 살펴보면, 結局 前週와 連結된다. 이를테면 동아일보 記者 出身으로, 解職된 以後 社會科學 專門 出版社 ‘아침’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民主言論運動을 한눈팔지 않고 해온 정동익 先生은 내 結婚式의 主禮를 맡았을 때도 特有의 溫和한 웃음과 氣品 있는 유머를 보여줬다. 서울市의 文化 政策을 十數 年째 硏究하는 서울硏究院의 라도삼 博士 또한 牛步千里(牛步千里)의 愚直함과 여유로운 웃음으로 印象 깊다.

    “前奏가 쫌 그렇다. 大邱나 釜山 쪽하고는 宛然히 다르고, 같은 湖南이라고 하지만 光州하고도 다르다. 그렇다고 앞에서 웃고 돌아서서 뒤통수를 치느냐 하면, 그건 前週와 無關한 일이다. 견디고 버티고 끝내 마음먹은 일을 慇懃히 밀어붙인다 하면, 그게 前週와 가깝다.”

    完州 용진면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를 거쳐 全州文化放送에서 삶의 折半을 다 보낸 이병천 氏의 말은 信賴할 만하다. 어쩌다 全州에 들어와 몇 해 살아본 所感이 아니다. 이 都市와 地域에 對한 愛憎이 뒤엉킨 말이다.

    이렇다 할 産業施設도 적고 人材는 하나같이 湖南線 列車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버리는 20世紀 嗅葉의 歷史에서 全州는 釜山, 仁川, 光州, 大邱, 大田 같은 地域 據點 都市 中에서 이른바 發展과 開發이라는 點에서 相當히 뒤처져왔다. 그러다가 全州國際映畫祭 以後 사람들이 찾기 始作했고, 마침내 全州韓屋마을이 서울의 홍대 앞, 西村, 신사동 街路樹길 같은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면서 全國口로서의 名聲을 갖게 됐다.

    豐南門의 東쪽, 豊南洞. 元來부터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던 곳인데 日帝强占期에 豐南門 西쪽으로 日本人이 많이 살게 되고 商圈도 移動하자 豐南門 東쪽의 실핏줄 같은 골목으로 들어온 朝鮮人들이 韓屋을 지으며 形成된 곳이 韓屋마을이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全州를 찾는 旅行者의 多數는 女性이다.

    이를 한눈에 玩賞할 수 있는 곳이 작은 둔덕, 梧木臺다. 高麗 末, 倭寇의 主力 部隊가 慶尙道 尙州 地域을 完破하고 咸陽에 集結한 後 南原 땅으로 밀려들어올 때 삼도都巡察使(三道都巡察使) 李成桂가 雲峰 넘어 黃酸 西北에서 敵을 殲滅한 일이 있었으니, 黃山大捷이라 한다. 大捷을 이룬 李成桂가 全州에 와서 여러 宗親이며 臣下들과 勝戰鼓를 울리며 自祝한 곳이 梧木臺다. 이곳에 올라 北西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緩慢하게 펼쳐진 全州의 風景이 한눈에 보인다. 올해 3月, 停年退職한 이병천 氏가 韓屋 게스트하우스 ‘歸去來辭’를 마련한 곳은 오목대 바로 아래. 端雅한 2層 構造로 精誠껏 빚은 이 집에서 고개를 조금만 올려다보면 梧木臺를 包含해 全州의 秀麗한 風光을 엿볼 수 있다.

    “王朝 文化를 빼놓고 全州를 말하기는 어렵다. 全州 李氏, 李成桂, 慶基殿 같은 正統 王朝 文化에 宗宅 家屋인 學人黨이며 全州鄕校, 한벽루 같은 선비 文化가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나타나는 傳統的인 都市다. 그러나….”

    이병천 氏는 이 대목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나 王朝 文化만으로는 不足하다. 아니 正確히 말하자면 王朝 文化는 그 自體로 充分히 貴重한 文化遺産이지만 오늘의 感覺으로 再解釋할 必要가 있다. 요즘 文化콘텐츠다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말이 流行인데, 再解釋이란 그런 ‘商品化’를 넘어서는 作業이다. 單純히 옛것을 구경거리로 맵시 있게 再現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그 原形의 재현과 정신의 再創造가 必要하다. 이 點에서 全州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無限한 可能性을 가졌다.”

    아닌 게 아니라 朝鮮을 開創한 太祖 李成桂의 影幀을 奉安한 慶基殿을 據點으로 해 近代 文化遺産의 白眉로 꼽히는 전동성당, 옛것의 優雅함을 간직한 한벽루, 全州 정신의 外形的 象徵에 가까운 學人當, 그리고 嘉藍 李秉岐 같은 近世期 큰 人物의 斷定한 집들을 둘러보면 이병천 氏가 말하는 無限한 可能性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여봐란 듯이 남을 壓倒하는 그런 구경거리가 아니라 단단하면서도 優雅한, 고즈넉하면서도 氣品 있는 그런 문향이 全州의 골목마다 흐른다.

    그러나 한便으로 煩雜한 都市로 急變하는 것도 事實이다. 1977年 韓屋마을保存地區로 指定된 後 傳統韓屋地區, 傳統文化地域, 傳統文化區域, 傳統文化特區 等의 名稱으로 여러 番 바뀌었다가 2002年 10月 全州韓屋마을이라는 名稱으로 決定된 곳이다. 교동(校洞), 豊南洞(豊南洞) 一帶 約 25萬1856㎡(7萬6320坪)에 700채假量의 傳統 家屋이 몰려 있어 決定된 이름이다.

    소나무와 菊花는 아직도 毅然하다 松菊猶存

    이곳을 年間 500萬 名 以上이 찾는다. 어떤 點에서 보면, 2010年 슬로시티로 指定된 곳이지만, 자칫하다가는 매우 빠르고 躁急한 패스트시티로 變質될 可能性 또한 없지 않다. 2014年 8月 現在, 韓屋마을 區域 內의 商業施設이 無慮 366곳을 넘어섰을 程度다. 한 집 걸러 하나씩 카페, 飮食店, 茶집, 工藝品店, 膳物가게 等이 들어서는 中이다. 그나마 전주시가 建築物 높이와 層數를 下向 調整하고 담, 大門 看板 等에 關한 基準 規格을 마련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서울의 홍대 앞이나 신사동 街路樹길 같은 ‘全州商業마을’李 되기 十常인 곳이다.

    “그런 點이 있다. 벌써부터 韓屋마을 복판 땅값이 坪當 數千萬 원이다, 이런 風聞이 집主人과 貰入者의 神經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다. 傳統이니 韓屋이니 文化니 하는 얘기는 뒷전이고 一旦 가게를 얻어 젊은이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粗雜한 액세서리 내다 팔고 뜨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 바람에 집主人들은 貰를 올려 받는 中이고. 그렇기는 해도….”

    이 대목에서 이병천 氏는 다시 한 番 숨을 골랐다.

    “근데, 文化가 어디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精神이라는 게, 아무리 商業 施設이 들어선다 해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사람 발걸음 소리가 줄어들 것이다. 茂盛하던 나뭇잎이 시들어도 나무의 가지와 줄기는 四季節을 버티는 法이니, 只今 한바탕 紅疫을 치르는 것뿐이다. 全州의 文化와 精神, 그 줄기가 어디 딴 데로 가기야 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王朝 文化? 왜 21世紀 待命 天地에 王朝 文化를 그토록 稱頌하는가. 基本的으로 이 韓半島에 남은 모든 有無形의 文化遺産은 어떤 意味로든 價値가 있고 意味가 있기에 保存하고 硏究하고 再解釋해야 한다. 전곡리의 舊石器 文化에서 서울 景福宮의 王朝 文化, 慶北 榮州의 선비 文化, 傘下 到處의 建築 文化, 光州廣域市 市民抗爭 文化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所重하다. 그런 觀點에서 보면 全州는 慶基殿이나 오목대 같은 朝鮮 時代의 王朝 文化만이 아니라 近代 文化遺産도 豐富하다. 이에 對한 再解釋 或은 特히 近代 文化遺産의 民衆的 要素를 더욱이 强調해야 할 곳이 前週 아닌가, 그런 물음이었다. 이병천 氏는 기다렸다는 듯이 對答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作品’으로 變한 全州의 한 建物 壁面.

    “바로 그렇다. 全州가 그런 곳이다. 全州城 또한 그런 곳 아닌가. 全州城 하면 于先 綠豆將軍 全琫準이다. 100餘 年 前에 湖南 一帶에서 東學運動이 크게 일어나서 곳곳마다 그 遺跡과 痕跡이 많다. 이미 全州의 많은 文化藝術人이 이를 演劇으로도 올리고 祝祭도 벌인다.”

    全州 隣近의 扶安郡 백산면은 東學軍이 흰옷의 義兵服을 갖춰 입고 竹槍을 들고 集結한 곳이다. 가까운 정읍시의 고부면은 東學軍이 蜂起를 일으킨 곳이다. 또 태인에서 고부로 이어지는 交通의 要地에 황토현이라고 있다. 黃土가 덮인 언덕이라고 하지만 海拔 高度는 35.5m로 야트막하다. 이를 通해 태인, 扶安, 興德, 高敞, 將星은 勿論 저 멀리 榮光, 羅州, 咸平 等에서 官軍을 무찌르고 三南地方을 휩쓴 東學軍이 結局 어디로 몰려들었는가. 全州城이다. 東學軍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선 全琫準은 廢井 改革案을 提示하는 等 ‘全州和約’을 성공시키게 된다. 이 며칠 동안 全州는 ‘除暴救民’ ‘輔國安民’의 自由 都市였다.

    이병천 氏는 全州 地域 藝術人들과 오랫동안 이 事件을 注目하며 다양한 作品을 만들어왔는데, 올여름에도 作品 하나를 올릴 豫定이다.

    “總體劇이다. 題目은 ‘가보세 甲午年, 全州城’인데, 總監督을 맡았다. 東學農民革命의 價値와 意味를 오늘날 생생한 울림으로 되살리려 準備한 作品이다. 東學軍이 전주성에 入城한 날로 始作해 綠豆將軍, 農民軍들이 저마다의 武勇談과 애끓는 事緣을 풀어놓는 이야기다. 8月 中旬까지 韓屋마을 工藝品展示館 駐車場 特設舞臺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낼 게 아니다. 公演도 重要하지만 아무래도 一回的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과 圖謀하는 일이 있다. 全州에 東學의 이미지 造形物을 제대로 具現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위引上, 記念碑賞 이런 거 巨創하게 만들려는 計劃은 아니다. 로댕의 ‘칼레의 市民들’ 같은 作品을 構想 中이다. 漢陽으로 押送되는 全琫準 將軍을 實物 크기 程度로, 누구나 걸어가다 마주칠 수 있는 程度로,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事件처럼 그렇게 만들어볼 計劃이다. 市를 비롯한 機關과 地域의 뜻있는 분들을 두루 만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變해가야 하는가.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1914年 竣工된 전동성당.

    “젊어져야 한다. 全州는 젊은 都市가 돼야 한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간밤에 보았던 深夜의 全州 風景을 되새겨 보았다. 休暇철이라 사람이 半이요 自動車가 半이었다. 몇 해 前에는, 週末에도 閑寂하던 全州였는데 이제는 平日 밤에도 불빛과 騷音이 壓倒的이다. 20~30代 女性이 많이 찾는다는 點도 눈에 띄었다. 요즘의 旅行, 特히 都市 旅行의 風景이다.

    그들은 競技前 바로 앞 商街에서 ‘지팡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다. 任實치즈가 들어간 아이스크림, 任實치즈와 다크초코를 버무린 다임 아이스크림 等을 먹는다. ‘길거리野 바게트’도 먹는다. 바게트 속에 토마토소스와 菜蔬, 고기를 다져 넣었다. 떡갈비 완자꼬치도 流行이다. 구운 文語에 소스를 바른 ‘門꼬치’도 門前成市高 手製 秋러스 ‘츄남’도 流行이고 全東胡떡도 人氣 暴發이다.

    이런 風景은, 男子 或은 家長인 아버지가 主導하는 旅行과는 다른 雰圍氣를 풍긴다. 男子 또는 아버지가 主導하는 旅行은 巨創한 歷史的 敍事와 壓倒的인 自然 風光을 中心으로 展開된다. 巨大한 랜드마크를 쉼 없이 뒤쫓아 가는 旅行이다.

    反面 女性끼리 떠나는 旅行은 사뭇 다르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고 들꽃의 香氣를 맡는다. 빨리빨리 움직이기보다는 가만 가만히 걷는데, 그렇게 하다가 그냥 앉아 있기도 한다. 巨大 歷史에 밀려난 日常의 작은 것에 注目한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본다. 家族이어도 좋고 男子親舊여도 좋은데, 大體로는 女子親舊다. 그렇게 마주 보고 對話를 나눈다. 그 對話를 정겹게 하려고 ‘길거리野 바게트’를 먹고 ‘門꼬치’도 먹는다. 아메리카노 한 盞은 必須 아이템!

    男性들이 보면, 또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떤다고 할 텐데, 아니다. 그게 아니다. 時間을 暫時 멈춰 세우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旅行을 떠나온 것이다. 全州韓屋마을의 風景은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다.



    맑은 시냇가에서 詩를 짓는다 臨淸流而賦詩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깊은 밤을 電柱에서 보낸 이들이 하나둘씩 짐을 싸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떠난다. 이병천 氏는 가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챙겨준다. 아침밥을 나누고, 人事를 나누고 또 韓屋의 처마와 담牆의 流麗한 線을 背景으로 삼아 寫眞도 함께 찍는다.

    그제야 다시 보니, 이곳의 이름이 뜻깊다. ‘歸去來辭’, 元來 陶淵明의 漢字로 한다면 마지막 漢字는 ‘辭’가 돼야 하는데, 그 마지막 漢字를 집을 뜻하는 ‘舍’로 바꾸어 屋號로 삼았다. 陶淵明은 그의 나이 41歲가 되던 405年 마지막 官職인 烹擇의 縣監을 끝으로 落鄕한다. 故鄕 마을로 돌아가면서 겪은 錯雜하면서도 결氣 있는 心境을 읊은 詩가 ‘歸去來辭(歸去來辭)’다.

    누이同生의 죽음 탓에 官職을 버렸다는 說도 있으나 中央에서 내려온 監督官에게 自尊心을 굽히고 儀典을 해야 하는 慣例를 참을 수 없어 餘地없이 辭職했다는 說도 있다. 아마도 두 설 모두 根據가 있을 것인 바, 오늘날의 ‘官僚 儀典 文化’를 생각하면 선비다운 氣槪가 如實히 드러나는 後者의 說이 더 氣品 있다. 歸去來辭는 朝鮮 時代의 선비들이 선비 精神의 한 表象으로 稱頌한 作品이다.

    내 어릴 적 記憶에도 생생히 남아 있다. 高校 1學年 때, 젊은 漢文 先生님이 漆板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學生들을 바라보면서 팔을 거의 뒤로 꺾다시피 해 歸去來辭 專門을 그야말로 一筆揮之로 漆板 가득히 쓰고는, 한 句節씩 읽고 解釋해주던 記憶, 생생하다. 特히 그 先生님이 첫 句節을 쓰고는, 한숨 한 番 쉬고, “자, 돌아가자~” 하고 읊던 첫 대목을 나는 잊지 못한다.



    者, 돌아가자.

    故鄕 全員이 荒廢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只今까지는 高貴한 精神을 肉身의 奴隸로 만들어버렸다.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人生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事實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歸去來慧(歸去來兮)에서 兮(慧)는 感歎詞 役割을 하는 語調社다.

    이병천 氏는 오래前에 詩人이었다. 1980年代 初 그 뜨거웠던 時節에 뜨거운 詩人들이 뜨거운 是認 集團을 形成해 一躍 文段을 들끓게 했다. 金正煥 박노해 김사인 같은 詩人이 ‘詩와 經濟’를 主導했고, 김진경 박몽구 곽재구 等이 ‘五月詩’로 五月과 그 以後의 슬픔을 노래했으며, 高雲起 安度眩 정일근 等이 ‘詩힘’ 同人으로 詩의 힘을 길러냈는데, 그때 ‘視運動’이 있었다. 하재봉 안재찬 박덕규 남진우 이문재 等이 그로테스크한 想像力으로 超越의 地平을 열고, 장정일 황인숙 畸形도 等이 加擔하는, 1980年代의 가장 ‘핫’韓 아방가르드 同人誌였다. 이병천 氏는 草創期에 加擔해 熱烈히 活動했다. 그러다가 小說을 썼고 放送局 프로듀서를 했으며 只今은 隱退해 ‘歸去來辭’의 主人丈이 됐다.

    陶淵明의 詩에 보면 “南쪽 窓가에 기대어 마냥 意氣揚揚해하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便한가(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句節이 있는데, 勿論 이 게스트하우스는 무릎 하나 들일 만한 크기보다는 훨씬 크지만, 하늘 아래의 全州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壓倒的인 威容으로 찾는 이를 윽박지르는 形象은 아니다. 마당은 따스하고 房들은 格調 있다. 이철수 安度眩 같은 道伴이 집터를 잡고 形態를 빚고 마무리 丹粧을 하는 過程을 함께하면서 意味 있는 ‘參見(參見)’을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을 만한 人生의 로망을 이병천 氏는 어느 程度 일궈낸 셈이다.

    萬若 當身이 그러한 아름다운 欲望을 품고 있다면, 全州에 한番 가볼 일이다. 陶淵明의 詩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風景을 眞實로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말이다.



    돌아왔노라.

    世上과 사귀지 않고 俗世와 斷絶된 生活을 하겠다.

    世上과 나는 서로 因緣을 끊었으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求할 것이 있겠는가.

    親戚들과 情談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冊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夫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주니,

    앞으로는 西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이병천 氏가 全州의 文化遺産을 說明한다.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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