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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신동아

버리고 떠나기

  • 入力 2004-07-30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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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로 始作하는 노래가 있다. 헛된 바람들과,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茂盛한 가시나무숲 같은 나. 그 속엔 누구도 쉴 자리가 없다. 이 여름에는 나를 비우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스쳐가는 것들을 붙잡지 않으리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으리라. ‘執着’을 主題로 5人의 作家가 털어놓는 人生 告白. 텅 빈 空間 속에 홀로 선 ‘나’를 돌아본다.
    ◆ 저기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 ◆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늘 그 때가 좋았다가 아니라 늘 只今이 좋다고. 只今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버릴 수도, 當場 고칠 수도, 그렇다고 비켜가거나 뛰어넘어갈 수가 없다.

    ◇ 김용택 詩人 yt1948@hanmail.net

    며칠 前 授業中에 갑자기 한 아이가 “야, 매미다. 매미!” 하고 외치자 工夫하던 아이들이 一齊히 하던 짓을 멈추고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그 날 매미 소리를 처음 들었다. 每年 처음 듣는 매미 소리, 처음 듣는 소쩍새 소리는 神奇하다. 아이들과 나는 매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學校 뒤뜰이다.

    學校 뒤뜰 살구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學校 뒤에는 작은 뜰이 있고, 그 뜰에는 살구나무 몇 그루와 밤나무, 木瓜나무 그리고 고욤나무가 無秩序하게 자라고 있다. 살구나무 밑에는 只今 개망초꽃이 한참이고, 호박넝쿨이 하루가 다르게 뻗어가고 있다. 호박넝쿨이 손을 내밀어 풀포기를 잡고, 작은 無窮花가지를 잡고 쭉쭉 뻗어간다. 오늘 아침에는 커다란 호박꽃이 노랗게 피어났다. 호박이 달리고 호박 위에 꽃이 핀다. 암꽃이다. 수꽃은 그냥 꽃만 핀다. 살구나무에는 살구들이 노랗게 익어 바람이 없어도 툭툭 떨어진다. 조용한 工夫 時間에 툭 소리가 나서 가 보면 노란 살구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뜰 바로 뒤는 밭이다. 밭에는 只今 고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밭가에는 옥수수 잎이 바람 불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敎室까지 들린다. 그 작은 뜰을 向해 난 길로 나이 든 農夫들이 穀食을 이고지고 이따금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 작은 뜰로 지나간다. 때로 눈이 오는가 싶으면 비가 오고 억새가 피어 있는가 싶으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어났다가 꽃잎이 날린다. 나는 그 뒤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閑寂해지고 차분해진다. 퍼뜩 本來의 나를 찾은 느낌이 든다.

    이 글을 쓰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열어놓은 窓門으로 뒤뜰이 보인다. 매미가 울고, 살구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가끔 바람이 지나가는지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해맑은 햇살 속에 흔들리는 잎들이 반짝거린다. 저 작은 숲에서 일어나는 하루, 한달, 1年, 2年…, 그렇게 그 뜰을 바라 본 지 벌써 30餘 年이 넘었다.

    뒤뜰로 穀食을 이고지고 다니던 젊은 農夫가 只今은 흰 머리에 굽은 等으로 穀食을 가져 나른다. 稀罕한 일은 그 別 볼 일 없는, 사람의 손이 안 간 작은 뜰을 볼 때마다 나는 每番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事實이다. 작은 뜰을 仔細히 들여다보며 나는 꽤 오래 산 셈인데 한番도 그 뜰이 질리지 않았고 무심하지 않았다. 언제 바라보아도 거긴 平安하다. 나를 찾으면 그렇게 世上이 평화로운가 보다.

    아이들과 지내며 아이들이 나를 속상하게 하고, 내가 아이들을 속상하게 했을 때, 때로 글이 안 될 때, 꼬인 삶의 가닥들이 잘 풀리지 않고 나를 괴롭힐 때 나는 琉璃窓에 턱을 괴고, 때론 琉璃窓에 이마를 대고 서서 그 가난한 뒤뜰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고 落葉이 지고 눈이 내리는 모습이 나를 나에게 데려다 놓아 나의 삶을 안심시켜 주었다. 生活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 작은 살구나무 숲은 언제나 나의 삶을 안道路 이끌었던 것이다.

    이 작은 뜰과 뒷山뿐 아니라 내 敎室 앞 江 건너 앞山 또한 내게 늘 感動을 주었다. 마을 뒤에 있는 그 山에 밭이 있고, 그 밭에 젊은 夫婦가 들어서서 農事를 짓더니, 어느 해 아이들이 夫婦와 함께 그 밭에 들더니, 이제 늙은 夫婦 둘이 밭일을 한다. 어느 해 둘 中에 누가 죽어 그 밭머리에 묻히고, 또 그 다음 그 무덤을 따라 무덤이 하나 더 생기리라. 그 밭에 봄, 빈 땅에서 穀食들이 자라고, 가을이 되어 거두고 나면 눈이 하얗게 내려 밭을 덮는다. 그 밭이 있는 山을 나는 只今껏 바라보며 살았다. 學校 뒤에 있는 山과 江 건너 앞山 사이에 江이 있고 그 江 언덕에 내가 平生을 다닌 學校가 있다. 그 學校에서 나는 내 人生을 다 보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莊嚴한 自然과 그 속에 있는 작은 學校에 어린 아이들, 그리고 文學과 藝術을 사랑하는 나, 그 세 가지가 내 삶을 지탱시켜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갑갑하지 않느냐고. 이 가난하고 답답한 山中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이, 江이, 나무와 꽃이, 그리고 變함없이 가난한 農夫들과 철없는 아이들이 질리지도 않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도 그렇다. 正말 單純하고 지루한 삶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한다. 當身은 正말 福을 다 타고난 사람이라고. 自然과 藝術과 그리고 아이들 속에서 平生을 산다는 것은 幸運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도 그렇다. 다 맞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나는 幸福했다라고 아무도 큰소리치지 못한다. 누가 그 어느 누가 自己의 삶에게 큰소리치겠는가. 그게 삶이다.

    다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늘 그때가 좋았다가 아니라, 늘 只今이 좋다고. 只今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버릴 수도, 當場 고칠 수도, 그렇다고 비켜가거나 뛰어넘어갈 수가 없다. 只今을 내 삶으로 ‘사는’ 일이 가장 나를 幸福하게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가 重要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내겐 重要했다. 只今도 그렇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 여기, 只今의 社會現實은, 世界는 참으로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진다. 우리들의 日常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검은 손길에 쫓기는 것처럼 不安하고 焦燥하다. 이 不安한 日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只今 내가, 내가 아니다.

    내가 남처럼 낯설 때가 있다. 只今 내가 하고 있는 일이 正말 내 精神으로 하는 짓인가를 물어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不安한 마음이 검은 구름떼처럼 일어난다. 이 不安하고 緊張된 삶을 우린 謀免하려 한다. 벗어나려 하고, 떼어내려 하고, 外面하려 한다. 나의 하루를 생각해 보면 그래서 늘 瞬間을 謀免하려는 안간힘의 連續으로 보인다.

    瞬間을 謀免하려는 이 刹那主義는 必然的으로 快樂을 찾아 헤맨다. 快樂은 頹廢를 부르고 犯罪를 부르고, 스스로 破滅한다. 우리의 現實이 그렇다. 只今 내가 하고 있는 짓은 이 世上 사람들에게 이 人類에게 眞情으로 行할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짓은 人間으로서 當然히 해야 할 일인가. 우리들은 只今 어디를 向해 어떻게 가고 있는가. 한番 眞摯하게 물어 볼 때가 되었다. 그때가 바로 只今이다.

    생각해 보면 複雜하고 넌더리가 나는, 못 말리는 우리의 日常에다가 8月은 正말 짜증나는 더위까지 못살게 한다. 다들 避暑를 간다, 海外旅行을 간다. 법석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그 어디로 간들 그대들을 平安함으로 훌륭히 모실 곳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알라. 山으로 가 보아라. 山에는 그대들과 같은 人間들로 법석대고 生亂離를 치고 있다. 바다로 간들, 江으로 간들, 그 어디로 간들 携帶폰은 그대들을 따라다닐 것이고, 잘못하면 當身 같은 사람들로 인해 當身은 全혀 다른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짊어지게 될 것이다.

    問題는 마음이고 생각이다. 마음을 어디에다가 주고, 마음을 어디에다가 빼앗길 것인가가 問題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하려 한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所有하려고 한다. 끝이 없는 이 貪慾이 實은 우리를 不幸하게 한다.

    사람들은 開化된 文明時代를 산다고 하지만 가만히 우리의 日常을 헤집어 들여다보면 그게 뻥이라는 게 今方 드러난다. 어떤 學者가 말했다. 人類가 생긴 以來 가장 짧게 살다가 地球에서 사라질 種은 人間이라는 動物일 거라고. 나도 同意한다. 人間이라는 終末高 都大體 어떤 動物들이 이렇게 自己 欲心을 채우기 위해 自己가 사는 땅을 無慈悲하고도 野蠻的으로 破壞하는가. 人間들은 自己가 살고 있고, 後孫들에게 물려줄 땅을 破壞하면서 同時에 自己들의 마음도 함께 破壞해 왔다.

    부서져버리고 메말라버린 오늘날 우리의 이 沙漠같이 索莫한 精神世界를 보라. 그것은 欲心껏 自己 것을 가지려는 貪慾에서 始作됐다. 가진 것을 늘리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都大體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所有해야 滿足하고 幸福하단 말인가.

    매미가 韻多매미 소리에게 내 마음을 준다

    개망초 꽃이 피었다꽃에게 내 마음을 준다

    살구나무에 바람이 분다바람에게 내 마음을 준다

    날아가는 나비에게가만히 서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週면마음이 便安해 眞다이 世上 처음이었던 내가 보인다.(나의 時 ‘마음’ 專門)



    말 없이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에게 내 마음을 주면 나를 찾는다. 나는 누구일까? 或 내가 저렇게 山길 들길에 핀 꽃 한 송이는 아닐까.

    ◆ 淸算이 바삐 가는 흰 구름을 비웃는다 ◆

    버리고 떠나기
    ‘執着하는 나’는 所有志向的인 冠形格의 모습이다. 내 處所, 내 家族, 내 생각, 내 物件, 내 것 等等…. 내 中心으로 宇宙와 世上을 좁혀버리는 猛毒(猛毒)에 中毒되어 있음을 發見한다.

    ◇ 정찬주 小說家 jchanjoo@kornet.net

    좁은 退마루에 앉아 잠깐 동안 갠 먼 山봉우리를 凝視한다. 山봉우리에는 비구름이 홑이불 자락처럼 걸쳐 있고, 退마루는 아직도 들이친 빗물에 젖어 축축하다. 비바람이 거칠게 다녀간 뒤끝이라 개울물 소리가 激烈하다. 이럴 때 나는 골짜기를 울리는 개울물 소리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맡겨버린다. 船房의 修行者들이 話頭 하나에 自身의 全 存在를 맡기듯.

    中國의 남전禪師는 어느 젊은 修行者가 道(道)를 묻자, ‘平常心이 度다’라고 했다. 平常心이란 한 생각을 일으키기 以前의 淸淨한 本來의 마음일 터이다. 남전의 首弟子 조주선社는 스승의 家風을 이어 ‘車 한 盞 마시기(喫茶去)’라고 했다. 車 한 盞 마시라는 뜻은 공연히 妄想 떨지 말고 車 한 盞 속에 그대의 온몸을 적셔보라는 말이다.

    激烈한 물소리에 나는 瞬間的이나마 좀 前의 나를 버리고 無我(無我) 속으로 빠진다. 마음이 便安해진다. 나라고 執着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에 可能한 일이다. 그러나 無我의 瞬間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暫時 後 나는 또다시 執着하는 무엇에 사로잡히고 만다.

    ‘執着하는 나’는 所有志向的인 冠形格의 모습이다. 내 處所, 내 家族, 내 생각, 내 物件, 내 것 等等…. 내 中心으로 宇宙와 世上을 좁혀버리는 猛毒(猛毒)에 中毒되어 있음을 發見한다. 몇 해 前 서울 生活을 淸算하고 南道 山中으로 내려와 處所를 지은 뒤, 논밭에서 콩을 심고 감자를 캐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生命이 있건 없건 世上의 모든 것과 한 몸이기에 決코 나를 冠形格으로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事實이다.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消滅하므로 이것이 消滅한다는 演技(緣起)와 相生의 道理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執着하는 나’는 ‘本來의 나’를 暫時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달콤한 誘惑과 게으름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放心하면 언제나 때와 場所를 가리지 않고 되살아난다. 그러니 비록 몸은 靑山에 있으나 마음은 저잣거리로 나가 이런저런 欲心에 끌려다니고 만다. 사람들은 내 山中 處所를 찾아와 부러워하지만 實際 내 살림살이는 꼭 그럴 만한 것이 못 된다.

    어떤 날은 그런 自身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서울을 떠난 것이 空然한 客氣를 부린 듯하고 서울에 떨어진 家族에게 未安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그래서 防壁에 초의스님의 詩 가운데서 마음에 와 닿은 이런 句節을 적어 놓았다. 靑山應笑白雲忙. 좀 거칠게 풀자면 ‘靑山이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이다. 나도 默默한 淸算을 닮아보고 싶어서다.

    서울을 떠나고 나서부터 나는 깊은 山中의 禪房을 찾아다니기 始作했다. 五臺山의 상원사 淸凉船員에서부터 濟州島 西歸浦의 남국선원까지 내려갔다. 虛像의 나를 버리기 위한 나만의 떠나기였다. 좀더 말을 보태어 告白하자면 善防이라는 禁足(禁足)의 空間에 對한 好奇心보다는 그곳에서 自身의 全 人生을 걸어놓고 遂行하는 船客을 만나 對話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等을 明白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最近 2, 3年 사이에 돌아가신 노선승을 뵙는 征服(淨福)을 누리기도 했다. 海印寺 해인叢林의 혜암 方丈스님, 鳳巖寺 太古船員의 서암 祖室스님, 백장암 청화 祖室스님, 白羊寺 古佛叢林의 서옹 方丈스님 같은 분들이다.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분들의 말씀을 直接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幸運이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혜암 老스님은 “적게 먹고 工夫하다 죽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뭘 하기로 盟誓했다면 全 人生을 걸어보라는 懇切한 말씀이었다. 서암 老스님은 헛된 꿈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只今 이 瞬間을 살아라(現前一念)”고 하셨고, 청화 老스님은 눈물이 날 것 같은 感動을 주었다. 三拜를 하려고 엎드리자 微笑 지으며 손을 잡아 끄셨다. 스님께서는 眞理(부처님)를 미칠 程度로 思慕하였고, 그것에 感謝하여 눈물이 끝없이 나므로 壁에 手巾을 두 張이나 걸어놓고 사신다고 했다. 서옹 老스님은 “죽어도 산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며 ‘只今 여기’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一喝하셨다.

    이와 같이 큰 善知識(善知識)을 만나면 헝클어진 내가 바로 서고 바른 길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老스님의 微笑가 傳染되어 欲心과 헛된 꿈들의 業場(業障)李 暫時 녹아 내렸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出嫁를 勸誘하는 老스님度 있었지만 나는 ‘용케’ 裁可(在家)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미 入寂하신 高僧들말고도 나는 몇 分의 善防 船員長 스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聖哲 큰스님의 俗家 딸인 不必 老스님의 線에 對한 斷乎한 意志와 따뜻한 配慮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多勝(茶僧)의 法力으로 車 한 盞 속으로 나를 빠뜨리곤 했던 극락암 護國船員에 계신 명정스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蠻行(萬行)도 決코 잊을 수가 없고.

    20餘 年 前에 처음 나와 因緣 맺었던 鳳巖寺 太古船員의 線院長 정광스님의 예나 只今이나 한결같은 말씀도 그분의 炯炯한 눈빛처럼 늘 번득인다.

    “話頭 이 뭣고(是甚摩)를 드는 데는 出家, 裁可者의 區別이 없지요. 話頭를 들려고 따로 時間을 定할 必要도 없어요.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날 때 드십시오. 이 뭣고를 드는 瞬間 앞뒤의 時間이 잘리므로 過去와 未來가 사라집니다. 過去와 未來를 連結하는 ‘나’라는 것마저 끊어버리면 一體가 頓絶(絶)되고 큰 虛空처럼 텅 비워집니다. 그리하면 本來 마음으로 돌아가 自己 本來 모습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話頭를 들게 되면 거친 現實을 克服하는 데 남모르게 利益이 있을 겁니다. 갑자기 닥친 不幸이나 挫折도 話頭를 챙김으로써 마음을 어떻게 쓸까 하는 對應能力이 생겨 自身도 놀라게 됩니다. 不生 不滅하는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話頭의 힘이 있기에 可能합니다. 어떤 問題를 몰록 잊고 自己 自身이 完全히 客觀化될 때, 바로 거기에서 非常한 解決策이 나오지요.”

    이런 이야기를 20餘年 前부터 하신 記憶이 난다. 只今도 스님은 說明을 달리할 뿐 變함이 없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나를 감동시킨 또 한 분의 禪僧이 있다. 모든 이를 救援하겠다고 自身의 손가락을 海印寺 藏經閣 앞에서 불 태워버린 濟州道 남국선원의 船員長 慧局스님이다.

    “林悌스님은 깨닫고 나서 大聲痛哭했지요. 깨닫고 보니 虛空이 바로 내 안에 있거든요. 그래서 스승을 向해 ‘황벽의 不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한 겁니다. 깨닫고 보니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라고 하는 壁이 있어서 내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法堂에 房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뜯어내면 이 房, 저 房은 사라집니다. 壁 때문에 房이 있는 겁니다. 壁을 다 허물어버리면 虛空이 되어 버립니다. 林悌스님이 痛哭한 까닭도 내 안에서 虛空의 性品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라고 하는 壁이 바로 ‘執着하는 나’가 아닐 것인가. 慧局스님의 말씀은 낡은 집과 같은 오래된 虛像의 나를 壁에 比喩하여 徹底하게 허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 人生에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비가 完全히 갠 것은 아닌 듯하다. 보슬비가 다시 내리려 하고 있다. 비 설거지라는 말을 山中에 살면서 처음 들어보았다. 비 온 뒤에 패인 길이나 쓰러진 作物을 손보는 일을 비 설거지라고 한다. 蓮못가에 쓰러진 이팝나무와 畫壇의 나무百日紅度 바로 일으켜 세워야겠고, 아래채 아궁이에 불을 넣어 濕氣 찬 産房(山房)을 말려야겠다.



    서암 老스님께서는 只今 이 瞬間을 살라 했고, 혜암 老스님께서는 무엇을 하되 죽을 覺悟로 덤비라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살림살이가 바로 船房에서 닦는 선(禪)이 아닐까 깨달아진다. 나도 나에게 주어진 삶이 고마워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청화 老스님처럼 눈물 닦을 手巾을 壁에 걸어놓고 싶다. 그것이 바로 서옹 老스님께서 말씀하신 죽어도 산 사람이 되는 참사람(無位眞人)의 길이 아닐까 하고 깨달아진다.

    그리 살 수만 있다면 내 山中 處所야말로 ‘執着하는 나’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나만의 善防日 터이다. 船房이 꼭 절을 찾아가야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내 山中 處所가 나의 善防이듯 主人公(隨處作主)李 되어 온몸으로 뒹굴며 살고 싶다.

    버리고 떠나기
    偶然히 거기서 어린 時節 내 希望과 만났다. 生活記錄簿에는 將來希望을 적는 칸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내 追憶 속의 希望이었던 것이다. 참 絶妙하게도 내 希望은 ‘先生님’이었다.

    ◇ 김풍기 강원대 敎授·國語敎育 pung10@kangwm.ac.kr

    별똥별처럼 스치면서 내 記憶 속에 明滅하는 追憶들이 있다. 特히 어린 時節 故鄕에서의 記憶들은, 그 脈絡과는 全혀 關係없이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하다. 學校가 끝나면 소 몰고 뒷山으로 올라가 또래 親舊들과 쏘다니던 일도, 여름밤이면 아버지 손잡고 시냇가로 나가 돗자리 깔고 별을 보면서 雜音 甚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傳說의 故鄕’을 듣던 일도, 메뚜기 잡으러 논두렁을 돌아다니던 일도, 비닐로 된 肥料 包袋 하나 들고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가 눈썰매를 타던 일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즐거운 記憶인가.

    幸福하고 설레임 가득하던 어린 時節의 追憶은 只今의 나를 있게 한 힘이다. 바쁜 時間 속에서도 그러한 追憶의 조각들이 이따금씩 浮遊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現實을 推動하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故鄕 마을을 들르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名節이 되어도 쉽게 발걸음이 그쪽을 向하지 않는다. 歲月이 흐르는 것보다 더 빠른 速度로 故鄕은 變한다. 이제 내게 故鄕은 地理的 空間이라기보다 心理的 空間으로 남아 있다.

    몇 年 前, 初等學校부터 高等學校 때까지의 學生生活記錄簿를 發給받을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文書가 ‘對外祕’로 分類되어 애初에 봉해진 狀態로 提出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身分을 確認하는 瞬間 書類를 뒤져서 이리저리 찾더니 卽時 複寫를 해준다.

    귀퉁이에 조그맣고 稀微한 黑白寫眞으로 남아 있는 내가 보였다.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얼굴이다. 뒷장을 넘겨본다. 작고 깨알 같은 글씨로 內 어린 時節이 記錄되어 있다. 數字나 ‘수우미양가’로 환산된 내 學校生活은, 無數한 科目들 사이에서 수줍은 듯 눈짓人事를 보내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이어서 記憶에도 가물가물한 擔任先生님의 姓銜과 글씨體도 반가웠다(그런 點에서 요즘처럼 컴퓨터로 入力해서 만드는 生活記錄簿는 얼마나 非人間的이고 反(反)追憶的인가!).

    偶然히 거기서 나는 어린 時節 내 希望과 만났다. 生活記錄簿에는 將來希望을 적는 칸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내 ‘追憶 속의 希望’이었던 것이다. 참 絶妙하게도 내 希望은 ‘先生님’이었다. 初等學校 5學年부터 高等學校 3學年이 되도록 내 希望은 오직 先生님이 되는 것이었다. 電氣도 들어오지 않는 村洞네에서 先生님은 最高의 知識人이자 羨望의 對象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서도 내가 焉敢生心 先生님이 되겠노라고 希望했던 것은, 오래도록 冊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期待 때문이었다. 어린 時節의 希望대로 나는 學生들과 함께 지내는 ‘先生님’이 되었다.

    이제 내 希望은 무엇인가. 이 風塵 世上에 나는 眞正 希望을 간직하고 있는가. 눈앞의 利益에 매달려서 아둥바둥 살아온 歲月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언제나 冊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이라는 點에서라면 나는 어린 時節의 꿈을 이룬 셈이다. 적어도 只今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내 意志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如前히 世上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겁먹은 或은 의뭉스러운 눈길로 내 周邊을 살피는 限 如前히 내 삶은 不安하기 그지없다.

    生活人이 되어갈수록 過去의 내 所重한 꿈이 虛妄한 꿈으로 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근심스럽기도 하다. 唐나라 詩人인 나은(羅隱)의 詩 가운데 ‘自牽(自遣)’이라는 作品이 있다.

    得卽高歌失卽休 뜻 얻으면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잃으면 쉬니多愁多恨亦悠悠 근심스럽든 한스럽든 모두 느긋해今朝有酒今朝醉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醉하고明朝愁來明朝愁 來日 아침 근심 오면 來日 아침 근심하리니

    사람살이가 어찌 즐거움만으로 이어지겠는가. 喜怒哀樂 모든 것이 苦痛이라는 佛敎의 가르침을 몸으로 實踐하기는 어렵지만, 내 앞에 닥친 것을 살피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다. 나은의 詩처럼 살아가는 態度는 때때로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보인다. 達官(達觀)과 諦念(諦念) 사이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듯한 느낌이다.

    複雜한 生活을 하는 사람일수록 現實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일 中毒症 사이의 緊張이 剛한 法이다. 이런 事情은 朝鮮時代 官僚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쁜 官職生活을 그만두고 故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陶淵明(陶淵明)의 ‘歸去來辭(歸去來辭)’에 比喩하여 表現했다. 그런데 ‘歸去來’를 많이 읊조리는 사람일수록 現實政治에 對한 剛한 執念을 보여주는 境遇가 많다.

    事實 나은의 詩를 읽으면 그 속에 담긴 意味가 達觀인지 諦念인지 正確히 가르기가 어렵다. 同意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種類의 詩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解釋이 달라진다. 每事를 심드렁하게 對하는 사람이라면 나은의 詩를 諦念의 方式으로 읽을 것이고, 싯귀 속에서 뭔가 번뜩이는 智慧의 片鱗을 發見한 사람이라면 當然히 達觀의 方式으로 읽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諦念의 對蹠點에 達觀이 있는 것은 아니다. 世上의 紛紛한 論議를 完全히 뛰어넘은 全혀 다른 第3의 자리에 達觀이 位置한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거렁뱅이가 無所有를 實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과 같은 理致다. 내가 所有하고 싶은데 所有하지 못하는 現實 속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비록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 하더라도 無限한 欲望의 굴레 속에서 苦痛받는 사람이다. 내가 充分히 所有할 수 있지만 그것을 斷乎하게 拒否하는 삶이야말로 無所有의 實踐이다.

    達觀도 마찬가지다.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마시지 않는 行動의 表面만 가지고는 達觀과 諦念의 區分이 模糊할 수밖에 없는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現實의 欲望을 實現할 수 있지만 그것의 虛妄함을 充分히 깨닫고 스스로의 意志로 斷乎히 拒否하는 삶이 바로 達觀의 자리다. 더욱이 그 삶이 肯定의 몸짓으로 表現되어야 達觀이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깨달음의 境地다. 眞理가 무엇인지 過去의 經驗이나 學習을 떠올린다거나, 나중에 이 말을 가지고 무엇을 생각해 보려 한다면, 모두 妄想이다. 그 瞬間 어떤 欲望과 妄想의 介入 없이 무심하게 車를 한 盞 마시는 것이 眞正한 깨달음이다. 그래야 술을 보면 마시고 근심이 오면 근심을 하는 達觀의 境地를 살아간다.

    追憶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未來에 對한 希望이 아무리 당차다고 한들, 모두가 執着이요 妄想이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부여잡고 돌아보며 머뭇거리는 것은 고단한 한때를 慰勞할 수는 있다. 薔薇빛 未來의 靑寫眞을 내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 亦是 힘든 現實에 暫時나마 慰安이 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根本的인 解決策은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려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딛고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것에 執着하여 헤어날 줄 모른다. 그 執着은 只今, 여기의 나를 옥죈다.

    執着을 버리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過程을 同伴한다. 한여름 밤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별을 바라보던 追憶을, 親舊들과 눈밭을 뒹굴면서 肥料負袋를 찢어 만든 눈썰매를 타던 所重한 記憶을 執着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老後를 準備하고 커나가는 아이들의 將來를 생각하는 마음을 執着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 追憶과 希望을 執着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眞正한 執着과 대면하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큰 勇氣가 必要하다. 내가 當面한 現實을 正確한 눈으로 보고 살아갈 수 있는 勇氣라야 한다.



    現實에 對한 欲望과 執着도 우리의 現在를 힘차게 만들어 나가는 힘이다. 그걸 否認하자는 것은 아니다. 過去의 希望이 現在의 나로 나타나고, 現在의 내 所望이 未來의 어떤 結果로 나타난다는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重要한 點은 그 關係性을 正確한 눈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눈을 가지는 瞬間 追憶과 希望은 全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나를 옥죄는 追憶과 希望이 내 周邊으로 無限히 뻗어나가면서 내 삶의 가장자리를 만들 때, 그리고 내가 그 속에서 자유롭게 游泳할 수 있을 때 비로소 欲望과 執着을 벗어던진 眞正한 人間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의 追憶과 希望을 다시 살펴야 한다.

    버리고 떠나기
    사람들은 兩손에 활과 칼을 들고 相對方이 먼저 武器를 내려놓기를 要求한다. 하지만 내가 武器를 들고 있는 限, 相對方도 決코 武器를 내려놓지 않는다.

    ◇ 이용범 小說家 banya02@dreamwiz.com

    요즘 인터넷에서 ‘廢人’이라는 말이 流行하고 있다. 인터넷 게임이나 特定 사이트에 中毒되어 日常生活을 제대로 維持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廢人에는 두 種類가 있다. 쓸모없이 허물어져버린 사람(廢人)과 남의 脾胃를 잘 맞추는 阿諂꾼(嬖人)이 그것이다. 中毒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내 周圍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

    그가 廢人이 되어 버린 理由는 簡單하다. 于先 그는 인터넷 媒體의 屬性을 充分히 把握하지 못했다. 인터넷의 長點은 내가 누군가를 向해 메시지를 傳達할 수 있다는 것이다. 特히 그 意思疏通이 一方的인 것이 아니라 雙方으로 이루어진다는 點에서 더욱 魅力的이다. 그러나 匿名의 假面 뒤에 숨어 있는 主張은 거칠고 暴力的이며, 때로는 冒瀆에 가까운 言語가 使用되기도 한다.

    自身이 올린 글에 다른 사람들의 댓글이 올라오기 始作하자 그는 漸漸 火가 났다. 人格 冒瀆에 가까운 비아냥거림과 辱說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비아냥거리는 相對方을 向해 解明도 하고 自制해줄 것을 付託하기도 했지만, 相對方은 莫無可奈였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는 댓글에 對해 그가 너무나 眞摯하게 反應하는 것에 相對는 더 재미있어했다.

    結局 그는 相對方을 攻擊하기 始作했고, 相對方 亦是 그를 따라다니며 惡意的인 댓글을 달았다. 그러나 問題가 解消되기는커녕 더욱 憤怒만 쌓여갔다. 그는 다른 네티즌들이 自身을 支持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大部分 傍觀者들이었다. 인터넷에서의 勝敗는 結局 數字에 依해 判明된다. 그리하여 그는 네티즌들을 自己便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스스로의 論理를 버리고 多數가 願하는 論理로 글을 쓰기 始作했다.

    只今도 그는 隨時로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每日 自身의 主張을 담은 글을 쓰고, 照會 數와 推薦 數를 確認하고, 댓글에 對한 反駁 論理를 開發하고, 自身의 主張에 反對하는 사람과 支持하는 사람들을 가려낸다. 이제 그는 自身의 生體 리듬을 잃어버렸다는 點에서 廢人(廢人)이고, 네티즌의 사랑을 渴求한다는 點에서 廢人(嬖人)이 되었다.

    人間의 모든 欲望은 執着으로부터 비롯된다. 執着이란 어떤 것에 對한 끊임없는 渴愛(渴愛)를 意味한다. 따라서 執着은 모든 欲望의 바탕인 셈이고, 永遠히 채워지지 않을 그 欲望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原因이 된다.

    執着은 所有에 對한 渴望으로 表出된다. 그러나 所有의 欲望이란 그가 갖고 싶은 것이 그만한 값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評價해 주기 때문에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人間의 根本的인 欲望은 所有가 아니라 그것을 所有함으로써 얻게 되는 評判, 卽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欲望인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廢人의 괴로움도 結局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欲望에 起因한다.

    執着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決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버리는 同時에, 내 存在를 完全히 벗어 던지는 行爲이기 때문이다. 나를 完全히 벗어 던질 수 있을 때, 所有의 欲望도 사라진다. 高麗의 僧侶 慧心(慧諶)李 엮은 ‘先聞念誦(禪門拈頌)’에 이런 逸話가 실려 있다.

    한 婆羅門이 두 손에 아름다운 꽃을 들고 붓다를 찾아와 供養을 올렸다. 그때 붓다가 婆羅門을 向해 소리쳤다.“버리거라.”그러자 婆羅門은 왼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婆羅門을 向해 소리쳤다.“버리거라.”바라문은 다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한番 婆羅門을 向해 소리쳤다.“버리거라!”바라문이 고개를 조아리며 붓다에게 물었다.“저는 두 손에 든 것을 모두 버렸는데,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십니까?”붓다는 婆羅門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나는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네 몸 속의 티끌과 貪慾과 煩惱의 뿌리를 버리라고 한 것이다.”

    붓다의 逸話에서 보듯이 손에 쥐고 있는 所有物을 버린다고 해서 모든 欲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法具비유경(法句譬喩經)’ 多聞品에는 이런 逸話가 담겨 있다.

    어떤 마을에 젊은 夫婦가 살고 있었다. 夫婦는 本來 性品이 인색하여 남을 돕거나 善行을 베풀지 않았다. 붓다가 그 所聞을 듣고는 허름한 修行者로 變裝한 채 夫婦를 찾아갔다. 때마침 男便은 집을 비운 터라 그의 아내가 붓다를 맞았다.

    “먹을 것을 求하러 왔습니다.”

    붓다가 求乞을 請하자 女人은 火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먹을 것이 없는데 財數 없게 웬 땡추野!”

    두 番이나 拒絶을 當하자 붓다는 神通力을 發揮하여 自身의 몸을 屍體로 바꾸었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코와 입에서는 벌레가 기어 나오기 始作했다. 또 배가 터져 창자가 문드러지더니 이내 더러운 津물이 흘러 나왔다. 女人은 그 모습을 보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 때 밖에 나갔던 男便이 돌아와 아내가 氣絶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都大體 무슨 일이오?”

    “方今 어떤 땡추가 나를 욕보였습니다.”

    “그 놈은 어디 갔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男便은 卽時 활과 칼을 들고 붓다의 뒤를 쫓았다. 그때 붓다는 자그마한 草幕에 들어가 暫時 쉬고 있었다. 暫時 後 男便이 활과 칼을 들고 草幕 앞에 이르러 소리쳤다.

    “어서 나오너라, 이 놈의 땡추野!”

    男便은 온몸을 던져 門을 열려 했지만 門은 굳게 닫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붓다가 男便에게 말했다.

    “먼저 그 활과 칼을 버리면 門을 열겠소.”

    男便은 于先 門을 열게 하는 것이 急先務라 생각하고 손에 쥐고 있던 칼과 활을 버리며 말했다.

    “자, 칼과 활을 버렸다. 그러니 어서 門을 열거라!”

    男便은 온힘을 다하여 門을 밀었다. 하지만 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활과 칼을 버렸는데 왜 門을 열지 않는가?”

    붓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對答했다.

    “나는 그대 마음속에 있는 憤怒의 칼을 버리라고 한 것이지, 그대 손에 있는 칼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오.”

    事實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눠주기 爲한 것이 아니라, 제 것을 지키기 위한 武器로 活用될 때가 많다. 無形의 財産인 知識조차도 相對方을 攻擊하기 위한 手段이 되거나 便가르기의 道具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兩손에 활과 칼을 듣고, 相對方이 먼저 武器를 내려놓기를 要求한다. 하지만 내가 武器를 들고 있는 限, 相對方도 決코 武器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和解는 내가 먼저 武器를 내려놓을 때에만 可能한 것이다.

    내 것을 버린다는 것은 곧 寬容(寬容)을 意味한다. 내 것을 버렸을 때 비로소 相對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볼테르는 ‘관용론’에서 宗敎的 偏見과 執着이 얼마나 끔찍한 結果를 招來하는지 보여준 바 있다. 宗敎的 信念조차도 人間의 執着으로 變質되면, 新(神)의 자리는 사라지고 敵對的 暴力만 남게 되는 것이다.

    只今 우리 社會는 漸漸 便가르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特히 인터넷을 통한 政治的, 宗敎的, 思想的 葛藤은 이미 그 度를 넘어섰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人間의 幸福은 스스로의 欲望을 다스리는 데 달려 있다. 便을 가르고 무리를 形成하는 것 亦是 自身의 欲望을 풀어낼 空間을 얻으려는 試圖에 지나지 않는다.

    問題는 欲望과 執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다. 모든 聖者들이 이 問題에 解答을 提示했다. 그것은 外部의 事物에 對한 關心을 거두어들이고, 오직 自身의 內面을 凝視하라는 것이다. 視線을 內面으로 向한 사람은 괴로움의 原因을 끊어 버릴 수 있다.



    마음의 平靜을 維持하기 위한 方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스쳐 가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것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不安感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方法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은 그냥 거기에 있도록 하면 된다.

    놓아버려라. 애初부터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버리고 떠나기
    어린 時節 便所에서 뒷張이 찢겨져 나간 冊을 훔쳐오던 그 瞬間부터 나는 사라진 冊을 찾아야만 하는 課題를 떠맡게 된 셈이다.

    ◇ 金延壽 小說家 larvatus@hanafos.com

    在來式 便所에 休紙 代身에 낱張씩 뜯어서 使用하라고 冊을 갖다 놓았던 時節이니 아마도 내가 대여섯 살 程度 됐을 때다. 다른 집에 놀러갔다가 便所에 가서 앉았더니 大略 3度 印刷된 漫畫冊이 앞에 놓여 있었다. 內容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볼일은 보지 않고 그 漫畫冊에 푹 빠졌다가는 그만 그 冊을 몰래 감춰서 집에까지 들고 왔다.

    奇想天外의 化粧紙 도둑이었으니까 멋모르고 볼일을 보러 갔던 그 집 어른들이 어떻게 뒷일을 處理하고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冊을 누가 훔쳐 갔느냐로 洞네가 좀 소란스러워졌고 便所를 다녀온 내가 疑心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不問可知였다. 어쨌든 나는 버텼다. 나는 絶對로 化粧紙 따위를 훔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冊을 훔쳤으니까.

    나이가 어렸는데도 冊을 化粧紙로 使用한다는 것에 憤怒했다기보다는 그 冊이 너무 재미있어서 훔쳤다. 뒷쪽 몇 什長이 이미 성스럽지 못한 用途로 使用돼 사라졌으나 그 內容을 斟酌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內容이 正말 그런지 아닌지는 只今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以上(李箱) 같은 大作家의 作品도 그렇게 사라진 바가 있다. 以上에게는 只今 우리에게 傳하는 유고말高度 손수레 한 個 分量의 原稿가 있었다고 傳해진다. 그 原稿 中 하나가 古物商을 거쳐 어느 집 化粧室에 놓여 있다가 이를 殊常히 여긴 高等學生에 依해 世上에 公開된 적이 있었다. 그건 正말 寶物덩어리였다. 以上 作品의 元來 모습을 보여주는 노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 많은 原稿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졌다.

    뒷部分이 뜯겨져 나간 冊, 或은 流失된 原告 彫刻 等을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魅力的일 수가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努力해도 우리가 알아낼 수 없는 部分이 存在한다는 事實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人間이 할 수 있는 事故의 여러 能力 中 斟酌만큼 創意的이고 獨創的인 思考 能力이 없다. 모든 斟酌에는 一種의 署名 같은 게 찍히게 마련이다. 斟酌하려면 그間 自身이 겪어온 모든 經驗과 배워온 모든 知識을 動員해야만 하기 때문에 斟酌하다가 보면 내가 어떤 種類의 人間인지 깨닫게 된다. 大學에 다닐 때, 正答 없는 論述 問題를 치른 적이 몇 番 있다. 答案을 쓰는 그 瞬間에 採點이 이뤄지는 種類의 試驗이었다. 答案에는 내가 어느 程度 知識의 人間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點에서 나는 實相寺나 修德寺 같은 節義 解憂所에 서서 오줌을 눌 때, 두 발 사이의 깊은 수렁이랄까, 어둠이랄까 그 구멍에 對해 冥想하는 일이 잦다. 그건 歷史의 忘却과 닮아 있다. 그 깊은 구멍 속으로 人間의 排泄物과 함께 몇 張의 종이가 떨어졌다. 이제 그 종이에 어떤 글句가 씌어져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글句를 想像하기 위해서는 自身의 모든 人生을 걸어야만 한다. 自身의 經驗, 自身의 感覺, 自身의 知識, 自身의 想像을 죄다 動員해야만 한다. 그런 點에서 어린 時節, 便所에서 뒷張이 찢겨져 나간 冊을 훔쳐오던 그 瞬間부터 나는 사라진 冊을 찾아야만 하는 課題를 떠맡게 된 셈이다.

    作家로서 내게는 내가 쓴 作品을 發表하지 않으려는 欲望이 있다. 小說을 쓰는 일은 全的으로 나의 일이다. 讀者와도, 出版社와도, 批評家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스티븐 킹은 自身이 쓴 未發表 原稿를 銀行 金庫에 保管해 놓는다고 들었는데, 이게 바로 小說家들이 하는 일이다. 小說家들의 財産은 돈이 아니라 自身이 써놓은 原稿다. 이 原稿를 最大限 늦게 發表하고 싶은 欲望, 더 나아가 發表하지 않으려는 欲望은 그러니까 當然한 일이다. 異常은 祕密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以上이라면 自身의 未發表 유고가 便所의 그 검은 구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眞心으로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作家이자 同時에 讀者인 나는 그 때문에 목이 마르다. 내가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 關心을 두는 者들은 모두 뭔가를 조금씩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뭔가를 조금씩 감추는 者들이 있기 때문에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作家이자 同時에 讀者인 나는 내 쪽에서는 뭔가를 繼續 감추면서 내가 關心을 둔 것들에는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두 番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한 番도 國民倫理나 社會道德 같은 領域에 屬하는 것들에 魅了된 적이 없었다. 그건 모든 게 明明白白한 世界였기 때문이다. 그런 世界에는 도무지 마음을 두고 싶어도 그럴 만한 部分이 없다.

    예컨대 延邊에 와서 生活하다 보니 마을마다 烈士碑라는 게 세워져 있다. 大略 내가 나서 자란 故鄕의 忠魂塔과 비슷한 形態의 흉물스런 시멘트 構造物이다. 그건 옷을 벌거벗고 서서는 나를 봐달라고 말하는 女人의 모습과 비슷하다. 아무리 먼 곳에서 봤다 하더라도 나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單숨에 그게 무엇인지 다 알아버렸는데, 내가 왜 굳이 그 흉물스런 構造物을 더 봐야 할 必要性을 느끼겠는가?

    내가 政治人이나 新聞의 論說面이나 通史로 씌어진 歷史冊에 아무런 關心을 두지 않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正말 世上이 그렇게 明明白白한 것이라고 믿어 疑心치 않는 것일까? 집에 돌아가서 그들은 自身들이 하는 말을 되뇌면서 便安하게 잠드는 것일까?

    延邊 地域에서는 韓國戰爭을 ‘抗美援朝 戰爭’이라고 부른다. 그건 正말이지 東北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지긋지긋한 戰爭이었다. 생각해보라. 淸日戰爭에서부터 始作해 近 60年에 걸쳐서 戰爭을 벌였으니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番이고 愛國의 한길로 나가려고 해도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在中 朝鮮 靑年들 中에 抗美援朝 戰爭에 나가기 싫어 손가락을 자른 者들이 있었다는 말을 當然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世上이 바뀌어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中에 烈士의 아내에 關한 이야기가 있다.

    烈士의 아내라면 他의 模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韓國이나 延邊이나 或은 北韓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結婚하자마자 男便을 戰爭에 잃어버린 그 아내 亦是 마을의 先鋒 일꾼이 됐다. 그러나 問題는 未亡人이 된 그女에게 關心을 보이는 男子가 하나도 없었다는 點. 結婚했든 結婚하지 않았든 다른 女子들에게는 酬酌도 걸고 戀愛도 하는 男子들이 烈士의 아내에게는 無氣力했다. 國家에서 烈士碑를 우뚝 세워줬으니 男子들이 그女 앞에서 無氣力한 것은 當然하다. 烈士碑라는 건, 그러니까 아무도 關心을 보이지 않는 젊은 女子의 몸 같은 것인 셈이다. 그 아내가 改革開放 後 熱査證을 없애버리고 할머니의 몸으로 再婚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제야 나는 그 아내에게 깊은 關心을 가지게 됐다. 나로서는 到底히 斟酌할 수 없는 일들이 그 女子의 몸에서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世上에는 無數히 많은, 斟酌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敎科書를 통째로 외워서라도 學校만 卒業하고 나가면 온통 그런 일들뿐이다. 내가 魅了되는 世界는 바로 그런 世界다. 新聞이나 歷史冊이나 速報를 傳하는 TV뉴스는 그런 世界를 絶對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現代의 言論이라는 것은 斟酌 따위는 絶對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殘忍한 道具다. 곳곳에 烈士碑 같은 것을 세워놓고는 그걸 사랑하라고 말한다. 始終一貫 그 뻣뻣한 것만을 사랑하라고 말할 뿐, 實際 사람의 몸, 瞬間瞬間 變해가는 사람의 몸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제 執着에 對해 말해야만 하겠다. 내게 執着이란 魅了된다는 뜻이다. 이건 未來形에 가깝다. 財産에 對해 執着하는 사람은 使用하지 않은 그 돈에 執着하는 것이며 女子에 執着하는 사람은 그 女子와 가질 수 없게 된 未來에 執着하는 것이다. 거기에 마음이 쏠려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狀態를 뜻한다. 온몸으로, 아무리 斟酌해도 그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뭔가에 執着하게 된다. 돈이 많거나 아름다운 女子와 함께 사는 그 狀態가 한瞬間에 없어져버릴까봐 드는 不安感은 執着이 아니라 欲心이다. 나는 欲心이 아니라 執着에 對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明明白白한 世界는 執着에 對해 이렇게 얘기한다. 손을 놓으면 平和가 올 것이라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幸福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내게 ‘理想의 잊혀진 有故 따위는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일과 똑같다. 들끓는 肉體를 잊고 限平生 烈士碑만 바라보며 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의 新陳代謝는 絶對로 平和를 願하지 않는다. 왜 記憶이라는 게 存在하겠는가? 人間은 잊지 못하는 일들은 決코 잊을 수 없는 存在다. 나는 明明白白한 그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 그것들은 내가 關心 둘 만한 것은 여기에 하나도 없다고, 내가 끝까지 매달릴 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點에서 나는 끊임없이 執着한다. 모든 게 明明白白해질 때까지 執着한다. 勿論 모든 게 明明白白해진다면 나는 더 以上 執着하지 않을 것이다. 便所에서 發見한 冊의 뒷張이 뜯겨져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 冊을 그렇게 몇 番이고 읽지 않았을 것이다. 大略 10年쯤 前에 나는 偶然히 서로를 죽이는 遊擊隊에 對한 짤막한 文章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건 누구도 說明해 주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일을 小說로 쓰고 싶다는 欲望을 느꼈다. 그리고 只今 나를 사로잡는 일은 壬辰倭亂 當時 日本으로 끌려가 司祭가 된 어느 少年이다. 歷史冊은 그렇게 關心 둘 만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神을 믿게 됐고 朝鮮에 天主敎를 傳播하려다 殉敎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나는 뜯겨져 나간 冊을 거듭 읽는 것처럼 그 少年을 想像하고 있다.

    내게는 執着이 힘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때로는 내가 느낀 感情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나는 사람들이 그게 財力이든 地位든 權力이든 더 많이 執着하기를 바란다. 執着은 한 人間이 어떤 種類의 人間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돈에 미쳤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權力에 醉했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음 段階에서는 그게 自身이라는 것을 認定해야만 한다. 眞心으로 그걸 認定할 수 있다면 그는 人生에서 한 가지 事實, 卽 自身이 누구인지는 깨닫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執着을 다 버렸다고 말하는 者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하자면 複製品의 얼굴인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自身이 누구인지 絶對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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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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