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

우리가 只今껏 알지 못했던 基督敎 歷史

유재덕 | 브니엘 | 392쪽 | 15,800원

해마다 10月 마지막 週쯤 되면 ‘韓國敎會를 위한 95個組 提言’, ‘敎會 改革을 위한 95個組 反駁文’ 따위의 글이 發表되거나 神學校 揭示板에 내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宗敎改革의 旗手’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1517年 10月 31日 비텐베르크 城郭敎會 正門에 ‘免罪符’를 非難하는 ‘95個組 反駁文’을 써붙이면서 宗敎改革이 觸發된 것에서 由來된 ‘年例行事’이다.

하지만 現代에 와서 ‘修正主義 解釋’이 提起됐고, ‘事件’의 實體가 疑心받기 始作했다. 一部 學者들은 “루터가 敎會 正門에 論題를 못박았다고 紹介하는 것은 歷史的 事實과 距離가 멀다”고 批判하면서, “作家들이 나름대로 歷史的 想像力을 動員해 劇的으로 描寫했다”는 主張이 나오기 始作했다. 무엇보다 歷史的 資料가 不足하다는 것.

이를 證明할 當代 記錄은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것이 唯一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글에는 라틴語 ‘메 테스테(me teste)’, 卽 ‘내가 證言할 수 있는대로’라는 表現이 있어 直接 目擊한 情報가 담긴 값진 飼料로 評價돼 왔다. 그러나 한스 폴츠(Hans Foltz)라는 루터學者가 1961年 슈나이더의 肉筆 原稿를 確認한 後, “原本에는 그런 表現이 存在하지 않는다”는 論文을 學界에 發表했다. 알고 보니, 該當 라틴語는 ‘메 테스테’가 아니라 ‘某데스테(modeste)’, 곧 ‘操心스러운 形態로’였다는 것이다.

‘某데스테’로 다시 슈나이더의 글을 읽어 보면 이러하다. “1517年 루터는 엘베 江邊 비텐베르크에서 大學의 오랜 慣習에 따라 某種의 命題를 論爭用으로 提出했으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形態라서(modeste) 누군가를 誹謗·中傷할 意圖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루터의 行動을 直接 目擊한 글도 아니었고, 以外에도 슈나이더의 글 어디에서도 루터가 直接 망치를 갖고 敎會 正門에 論題를 못 박았다는 內容은 確認할 수 없다고 한다. 事實 이 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急進的 宗敎改革을 꿈꾸지 않았고, 루터 自身도 敎會 正門에 ‘95個組 反駁文’을 못 박았다고 直接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못을 박고 안 朴高架 무엇이 重要하랴. 루터가 免罪符에 不滿을 가졌고, 이에 依해 宗敎改革이 觸發된 것은 明白한 事實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브니엘)="">는 이렇듯 歷史를 ‘關心과 즐거움을 좇는 讀者의 立場’에서 바라본다. 過去 일들을 오늘의 現實에 비추어보거나(1부 ‘오늘날과 비슷한 基督敎 歷史’) 基督敎의 크고 작은 歷史的 誤謬들을 檢討하고(2부 ‘危險한 基督敎 歷史’), 우리가 가진 歷史的 常識을 뒤집어 보거나(3부 ‘거꾸로 보는 基督敎 歷史’) 平素에 알고 싶었던 問題들(4部 ‘궁금한 基督敎 歷史’)을 集中的으로 살피고 있다.

著者인 유재덕 敎授(서울신대)는 “基督敎의 지나간 歷史를 어느 程度 알게 되면 只今 우리 周邊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게 되고, 앞으로의 일들도 어느 程度 斟酌이 可能해진다”며 “그런 智慧로운 歷史的 眼目을 갖추는 데 이 冊이 도움이 될 뿐 아니라, 現在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앞서 살다간 이들 德分이었음을 깨닫는 데 一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副題는 ‘재미에 知識을 더하는 흥미로운 基督敎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