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L.com] 英 歷代 베스트 50人... 11位는 앨런 볼

入力
修正 2009.07.08. 午後 2:08
記事原文
本文 要約봇
性別
말하기 速度

移動 通信網을 利用하여 音聲을 再生하면 別途의 데이터 通話料가 賦課될 수 있습니다.

傳統과 歷史를 자랑하는 蹴球宗家 잉글랜드에는 그동안 無數히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었습니다. '世界人의 蹴球 네트워크' GOAL.com은 잉글랜드 歷代 베스트 50人의 蹴球 選手들을 選定해보았습니다.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46位는 인스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41位는 퍼디難드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36位는 合굿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31位는 비어드瑟리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26位는 콜린 벨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21位는 빌리 라이트
GOAL.com 選定 英 歷代 베스트 50人... 16位는 롭슨


15位 앨런 시어러(Alan Sherer) 1970/8/13~

代表팀 經歷 : 63競技 30골
所屬球團 : 사우스햄튼, 블랙번, 뉴캐슬

사우스햄튼 유스로 처음 選手 生活을 始作했던 앨런 시어러는 어린 時節부터 頭角을 나타내며 2年 만인 1988年 4月 9日에 華麗하게 데뷔했다. 아스날과의 競技에서 負傷當한 대니 월리스를 代身해 들어온 그는 競技場을 밟은 지 5分 만에 첫 골을 넣었고 結局 헤트트릭을 성공시키면서 4-2 勝利를 이끌었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華麗할 수 없는 데뷔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90-91 시즌이 되어서야 그는 主戰으로 인정받으며 45競技에 出場했고 14골을 넣으며 1991年 球團의 올해의 選手로 選定되었다. 한便 21歲 以下 代表팀에서는 4競技에서 7골을 넣으며 툴롱 토너먼트에서 優勝했고 大會 最優秀 選手로 選定되었다.

1991-92 시즌 21골을 넣으며 팀內 最高得點者가 된 시어러를 이안 브랜풋 監督이 어떤 式으로든 붙잡으려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맨유와 블랙番移 그에게 剛한 關心을 드러냈고 結局 選手 한 名에 330萬 파운드를 얹어주는 條件으로 블랙番移 그의 迎入에 成功했다.

1992年 2月 시어러는 첫 代表팀 競技를 뛰게 된다. 프랑스와의 競技에서 데뷔한 그는 데뷔골을 넣으며 華麗하게 國際經歷을 始作했다.

1992-93 시즌을 새로 昇格한 블랙번과 함께 始作한 시어러의 첫 시즌은 負傷 때문에 원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세 시즌동안 그는 幻想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1993-94 시즌에는 40競技에서 30골을 넣는 놀라운 活躍으로 블랙번을 리그 2位에 올려놓았다. 다음 시즌에 블랙번은 시어러의 34골과 크리스 서튼의 15골을 묶어 리그 優勝을 達成했고 시어러는 1995年 PFA 選手들이 選定한 올해의 選手賞을 受賞한다.

1995-96 시즌에 시어러는 리그 35競技에서 31골을 넣으며 得點王에 올랐지만 블랙번은 7位에 머물렀다. EURO 1996에서도 印象的인 活躍으로 잉글랜드를 8强까지 이끌면서 유럽의 여러 名門球團들로부터 뜨거운 關心을 받았다. 또한 그는 다시 한 番 맨유의 熱烈한 러브콜을 얻었으나 結局 그는 자신의 偶像인 캐빈 키件 監督이 있는 뉴캐슬을 選擇했다.

뉴캐슬에서 시어러는 케니 달그리시, 루드 굴리트, 바비 롭슨 等과 같은 감독들 밑에서 主張으로서 成功的인 한때를 보냈다. 비록 優勝 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뉴캐슬 팬들에게 있어 시어러의 存在는 傳說로 자리잡게 되었고 ‘빅 알(Big Al)’, 或은 ‘슈퍼 시어러(Super Shearer)’라는 愛稱을 얻게 되었다.

代表팀에서는 1996年이 最高峯이었고 그 後로도 줄곧 월드컵과 EURO 大會에 나섰지만 좋은 成跡과는 距離가 있었다. 結局 그는 EURO 2000을 마지막으로 代表팀에서 隱退하고 所屬팀에 專念하며 2001年부터 2006年까지 80골을 넘게 記錄했고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260골로 最高의 골잡이에 올랐다.

2004年부터 2006年까지 시어러는 두 番이나 隱退를 飜覆하다가 結局 셀틱과의 競技를 마지막으로 蹴球靴를 벗었다.

優勝과 受賞經歷

블랙번
프리미어 리그 優勝 1994-95

잉글랜드
르 투노이 優勝 1997

유로 1996 得點王 (5골)
프리미어 리그 最多得點 選手 (260골)
PFA 選手들이 選定한 올해의 選手 1995, 1997


14位 폴 개스코인(Paul Gascoigne) 1967/5/27~

代表팀 經歷 : 57競技 10골
所屬球團 : 뉴캐슬, 토튼햄, 라치오, 레인져스, 미들스브로, 에버튼, 藩籬, 간수 티按摩, 보스톤

폴 개스코인의 人生은 그야말로 한 篇의 드라마이다. 그는 唯一無二한 ‘유머感覺’을 가진 選手였으며 랩퍼였고 많은 비디오 게임의 素材가 되었다. 알코올 中毒者였고 躁鬱症, 暴食症, 肺炎, 강박증, 胃潰瘍 等 수많은 病에 시달렸다. 스스로 自殺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밝혔고 아내와 아이들을 暴行했다고 認定했으며 深刻한 財政的인 問題를 겪었으며 코카인에 連累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그라운드에서만큼은 獨步的인 天才였다.

勞動者의 아들로 태어난 개스코인의 어린 時節은 決코 幸福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 동생이 車에 치여 죽는 것을 目擊했고 아버지는 腦出血로 젊은 나이에 病院身世를 졌다.

13살이 되던 1980年 뉴캐슬이 그를 迎入하였으며 거기서 개스코인은 107競技에 出場해 25골을 넣었다. 1988年 올해의 有望株로 選定된 그에 對한 關心은 뜨거웠다. 그가 가장 願한 곳은 리버풀이었으나 퍼거슨 監督의 誘惑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結局 개스코인은 家族들의 집을 마련해주기로 約束한 토튼햄으로 갔는데, 퍼거슨 監督은 後에 자서전에서 개스코인을 놓친 건 自身이 저지른 가장 큰 失手 中 하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테리 베나블스 監督 밑에서 개스코인은 가장 華麗한 選手 生活을 보냈다. 토튼햄에서 그는 蹴球에 集中하면서 守備陣을 籠絡했고 勝利를 만들어냈다. 뛰어난 技術과 넓은 視野로 豫測할 수 없는 패스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直接 골을 넣기도 했다. 개스코인의 플레이는 잉글랜드 內에서뿐 아니라 루카 모드리치나 안드레이 아르샤빈과 같은 外國 選手들의 龜鑑이 되기도 했다.

토튼햄에서 그는 리그 6位와 3位를 만들어냈으며 그 다음 시즌에는 6골을 넣으며 팀을 FA컵 決勝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승부욕은 結局 거친 태클을 濫發하다가 오히려 自身의 選手 生命마저 威脅하는 負傷으로 돌아왔고 무릎靭帶가 끊어지는 負傷을 입었다.

이미 라치오와 移籍契約을 맺어놓고 있었지만 負傷으로 인해 그의 데뷔는 한참 늦어지게 되었고 돌아온 後에도 토튼햄에서의 活躍相을 보여주지 못했다. 개스코인은 오히려 競技場 밖에서 더 많은 問題를 일으키며 有名해졌다. 寫眞記者를 暴行하고 마이크에 대고 트림을 하는가 하면 訓鍊 中에 다리 骨折을 當했다. 休息期인 여름 동안 살이 쪄서 오는가 하면 寢臺에서 일어나다가 허벅지 負傷을 當했고 1994年에는 當時 女子親舊이던 셰릴을 때렸다고 告白하기도 했다.

結局 레인져스로 移籍하면서 英國으로 돌아온 개스코인은 어느 程度 名譽回復을 한다. 그는 좋은 活躍으로 레인져스를 頂上에 올려놓았는데 1998年에는 셀틱 팬들 앞에서 플룻을 부는 흉내를 내면서 IRA로부터 殺害脅迫을 받기도 한다.

개스코인의 代表팀 經歷 亦是 興味津津하다. 1988年 덴마크와의 데뷔戰을 始作으로 그는 57競技에서 10골을 넣었는데 競技의 흐름을 바꾸는 어시스트로 有名해졌다. EURO 1996에서 그는 個人能力으로 最高의 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1998年 글랜 號들 代表팀 監督은 負傷과 私生活, 그리고 不良한 態度 等의 理由로 그를 代表팀에서 果敢히 除外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부름을 받지 못했다.

優勝과 受賞經歷

토튼햄
FA컵 優勝 1991

레인져스
스코틀랜드 1部 리그 優勝 1996, 1997
스코틀랜드 컵 優勝 1996
스코틀랜드 리그컵 優勝 1997

PFA 올해의 有望株 1988
BBC 올해의 스포츠 選手 1990
월드컵 올스타 팀 1990
스코틀랜드 選手들이 選定한 올해의 選手 1996
스코틀랜드 記者들이 選定한 올해의 選手 1996


13位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 1975/5/2~

代表팀 經歷 : 110競技 17골
所屬球團 : 맨유, 레알 마드리드, LA갤럭시, AC밀란

蹴球뿐 아니라 그 外的인 要素까지 합칠 境遇 데이비드 베컴은 蹴球 歷史上 가장 有名한 人物이라 稱해도 無理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競技場 內에서 이룬 業績들을 살펴보면 베컴이 얼마나 대단한 選手인지 깨닫게 된다.

만만치 않은 競爭者들 사이에서 그만의 獨特한 스타일로 그는 成功했다. 발이 빠르지 않은 윙으로서 베컴은 언제 어느 거리에서든 송곳 같은 패스를 넣어주는 能力을 極大化시켰고 윙이 플레이메이커 役割을 하는 것을 본 相對는 混亂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蹴球를 接하기 始作했을 때부터 맨유의 팬이었던 베컴은 맨유 유스팀에서 始作하여 게리 네빌, 라이언 긱스, 그리고 폴 스콜스와 함께 ‘무서운 퍼기의 아이들’ 時代를 만들어냈다. 10年 동안 베컴은 6番의 프리미어 리그 優勝과 2番의 FA컵을 비롯해 수많은 優勝컵을 안았고 맨유의 傳說的인 1999年 트레블의 主役이기도 했다. 챔피언스 리그 決勝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相對로 두 番의 코너킥으로 두 골을 어시스트한 것이 白眉였다.

트레블을 達成한 後에도 베컴은 如前히 喚醒的인 活躍으로 優勝을 이어나갔지만 負傷을 當하면서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밀리게 되자 퍼거슨 監督과 베컴 사이에 緊張感이 흐르기 始作했다. 이러한 緊張은 結局 그 有名한 ‘蹴球靴 事件’을 契機로 暴發하게 되고 結局 베컴은 맨유를 떠나게 된다.

베컴은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나우두와 함께 레알에서 갈락티코 時代를 裝飾했다. 하지만 2003-04 시즌에 무너지면서 어이없게 優勝을 노치게 되자 갈락티코 時代도 幕을 내리게 외었다.

한便 國際 舞臺에서는 2006年 獨逸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에게 敗한 後 눈물과 함께 主張職을 返納했고 結局 스티브 脈클라렌 監督은 베컴을 더 以上 選拔하지 않았다. 레알에서도 새로 赴任한 파비오 카펠로 監督의 눈밖에 나면서 候補로 밀렸고 結局 레알과의 再契約을 拒否하며 LA갤럭시와 契約을 맺었다. 이러한 行動에 憤怒한 카펠로 監督은 베컴을 남은 시즌 동안 起用하지 않겠다고 宣言하기도 했다.

自身을 起用하지 않겠다던 監督의 處事에 反撥해 ‘豫備隱退’ 手順을 밟았던 베컴은 그러나 結局은 實力으로 自身의 能力을 立證해내며 카펠로 監督과의 旗싸움에서 勝利를 거두었다. 그는 全盛期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레알이 2006-07 시즌에 프리메라 理가 優勝을 차지하도록 돕고 英雄의 뒷모습을 남긴 채 레알을 떠났다.

LA갤럭시에서의 生活은 順坦치 않았다. 그는 負傷에 시달리며 貧弱한 팀에 挫折해야 했다. 그 狀況에서 베컴은 代表팀에 삶의 目標를 두게 되었고 複雜한 攻防 끝에 AC밀란으로 賃貸를 떠나 그 곳에서 自身의 眞價를 證明하면서 새 잉글랜드 監督인 파비오 카펠로로부터 合格點을 받았다. 베컴은 現在 피터 쉴튼이 세웠던 代表팀 125競技 出場 記錄에서 16競技가 모자라다.

데이비드 베컴에 對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많지만 많은 汚點과 華麗함 속에서도 그는 프로 選手다운 面貌를 꿋꿋하게 維持하고 있으며 如前히 世界的인 水準의 選手이다.

優勝과 受賞經歷

맨유
프리미어 리그 優勝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0-01, 2002-03
FA컵 優勝 1996, 1999
UEFA 챔피언스 리그 優勝 1998-99
인터콘티넨탈 컵 優勝 1999
커뮤티니 쉴드 優勝 1993, 1994, 1996, 1997
FA 유스컵 優勝 1992

레알 마드리드
라 理가 優勝 2006-07
슈퍼컵 2003

PFA올해의 有望株 1996-97
맷 버스비 警 올해의 選手 1996-97
1998 월드컵 大會 베스트 11
BBC 올해의 스포츠 選手 2001


12位 딕시 딘(Bill ‘Dixie’ Dean) 1907/1/22~1980/3/1

代表팀 經歷 : 16競技 18골
所屬球團 : 트란메어, 에버튼, 노츠 카운티, 실고 로버스, 허스트

딕시 딘은 그 어떤 漫畫 속의 슈퍼 히어로보다도 뛰어난 現實의 人物이었다. 그의 가장 有名한 逸話 中 하나는 1927-28 시즌이다. 當時 에버튼 所屬이던 그는 1年 前 조지 캠셀이 2部 리그에서 세웠던 리그 最多得點 59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남은 3競技에서 9골을 넣어야만 했다. 不可能한 것처럼 보였지만 딕시 딘은 아스톤 빌라와의 競技에서 두 골, 그리고 藩籬에게서 네 골을 얻어냈다. 負傷 때문에 交替되어 마지막 競技를 準備하던 그에게는 에버튼의 리그 優勝 確定 消息도 妨害物일 뿐이었다. 시즌 마지막 競技에서 아스날을 相對로 딕시 딘은 헤딩과 페널티킥으로 조지 캠셀과 同率을 이룬 다음 競技終了 8分을 남겨놓고 헤트트릭을 完成하면서 60番째 리그 골을 만들어냈다.

딕시 딘의 蹴球 經歷은 놀라움 그 自體이다. 에버튼에서 37個의 헤트트릭을 包含해 433競技에서383골을 넣었고 代表팀에서는 16競技에서 18골을 넣었다. 經歷 全體로 보면 492競技에서 431골을 넣었으며 리그에서는 438競技에서 379골을 넣었다. 딘보다 더 많은 리그 골을 넣은 것은 619競技에서 434골을 넣은 아서 라울里 뿐이지만 競技當 骨 比率은 딕시 딘이 오히려 앞선다.

딕시 딘은 그야말로 슈퍼맨에 가까운 사나이였다. 事實 大記錄을 세웠던 1927-28 시즌에 그는 뛰지 못했어야 했다. 1926年 여름 딘은 모터사이클 事故를 當하면서 頭蓋骨 骨折과 턱 骨折을 當했고 蹴球는 勿論 生命마저 危險했었다. 하지만 不過 15週 만에 그는 競技場으로 돌아와 무섭게 골을 넣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이番이 처음이 아니었다. 選手 經歷 初期인 1924-25 시즌에 로크데일의 中央 守備手는 트란메어에서 뛰던 17살의 딕시 딘에게 또다시 골을 넣으면 끝장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介意치 않고 골을 넣었고 이에 憤怒한 그 守備手는 딘의 사타구니에 强力한 태클을 날렸다. 卽時 病院으로 실려간 딘은 結局 한쪽 睾丸을 잃었으나 곧 競技場으로 돌아와 27競技에서 27골을 넣었고 그 해 에버튼으로 移籍했다.

딕시의 强點은 拳鬪 選手를 聯想시키는 탄탄한 몸에 빠른 발과 드리블 實力, 그리고 强力한 슈팅이었다. 게다가 그의 헤딩은 普通 選手들이 발로 차는 것보다도 强力할 程度였는데 그가 記錄한 골의 1/3이 헤딩골이라는 點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27年 代表팀에 데뷔한 그는 그 해 5競技에서 無慮 12골을 넣기도 했다.

딘의 뛰어난 能力에 相對팀들은 恒常 專擔 마크맨을 붙이며 그를 牽制했고 結局 그는 負傷이 끊일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單 한番도 警告를 받거나 退場을 當한 적이 없는 眞正한 스포츠맨이었다. 딘은 또한 選手들에게 처음으로 등番號를 附與한 1933年 FA컵 決勝에서 最初로 등番號 9番을 달게 된 選手이기도 했다.

수많은 負傷에도 不拘하고 1936年까지 競技當 1골 內外의 골을 넣어주던 딕시 딘은 1937年 에버튼이 迎入한 10代 有望株 토미 러튼에게 主戰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當時 딘은 토미 러튼에게 ‘너가 내 자리를 代身하기 위해 온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힘껏 도와주겠다.’라고 말했다고 傳해진다. 하지만 結局 딕시 딘은 에버튼을 떠나 몇몇 팀을 돌아다니다가 結局 허스트에서 隱退했다.

1976年 한쪽 다리를 切斷한 딕시 딘은 1980年 3月 1日 머지사이드 더비를 보고 난 後 구디슨 파크에서 心臟痲痹로 世上을 떠났다. 2001年 에버튼 球場 밖에 그의 銅像이 세워졌고 그 아래에는 ‘蹴球 選手이자 神社, 그리고 에버튼人(Footballer, Gentleman, Evertonian)’이라는 文句가 새겨졌다.

優勝과 受賞經歷

1部 리그 優勝 1928, 1932
2部 리區 優勝 1931
FA컵 優勝 1933
채리티 쉴드 優勝 1928, 1932


11位 앨런 볼(Alan Ball) 1945/5/12~2007/4/25

代表팀 經歷 : 72競技 8골
所屬球團 : 블랙풀, 에버튼, 아스날, 사우스햄튼, 필라델피아, 벤코버, 블랙풀, 사우스햄튼, 이스턴 AA, 브리스톨 로버스

앨런 볼은 1966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優勝할 當時 가장 어린 選手였지만 웸블리에서 열린 決勝戰에서 勝利에 一助했다.

어린 時節 울버햄튼과 볼튼에 入團을 거절당한 볼은 블랙풀에서 1962年 18歲의 나이로 데뷔했다. 그의 技術과 旺盛한 活動量은 알프 램지 代表팀 監督의 關心을 끌었고 結局 1965年 유고 슬라비아를 相對로 代表팀에 데뷔했다. 곧이어 알프 램지 監督의 ‘윙이 없는’ 戰術에서 볼은 核心的인 選手로 자리잡게 된다.

월드컵에서의 活躍에 깊은 印象을 받은 에버튼은 11萬 2,000파운드의 記錄的인 移籍料로 그를 迎入한다 그 後 에버튼은 1966年, 1971年, 1976年에 FA컵 優勝을 차지했지만 工巧롭게도 볼은 負傷 等을 理由로 세番 모두 決勝戰에 出戰할 수 없었다. 볼이 決勝에 나선 唯一한 競技인 1968年 웨스트브롬과의 決勝戰에서는 아쉽게도 敗하면서 準優勝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지만 볼은 에버튼에서 첫 두 시즌동안 팀의 最多 得點者가 되었으며 1970年  1部 리그 優勝을 차지하게 된다. 그는 하워드 켄달, 콜린 하비와 더불어 ‘三位一體’라는 別名의 미드필더陣을 構成했는데 이는 에버튼 歷史上 最高의 構成으로 꼽힌다.

1970 월드컵에서 西獨에게 敗하며 準優勝에 머물자 볼은 自身의 메달을 호텔 窓門밖으로 던져버리고 만다. 다음 시즌 에버튼은 볼을 아스날에게 22萬 파운드라는 記錄的인 移籍料로 내준다. 하지만 아스날은 리그 優勝에 失敗하고 FA컵에서도 리즈에게 敗하며 準優勝에 머물렀다.

아스날이 漸漸 下降曲線을 그리면서 볼 亦是 墜落했다. 그는 1974年 다리가 骨折되었고 結局 사우스햄튼으로 쫓겨나듯이 移籍하고 만다. 國際舞臺에서도 월드컵 豫選에서 相對의 사타구니에 니킥을 날리면서 退場당했고 結局 잉글랜드는 豫選에서 탈락했다.

사우스햄튼을 1部 리그에 올려놓기는 했으나 그의 全盛期는 이미 끝을 보이고 있었고 볼은 곧 北아메리카로 건너갔다. 그 後 北美와 잉글랜드, 홍콩 等에서 1984年까지 選手 生活을 하다가 隱退하였다. 2007年 4月에 그는 心臟痲痹로 世上을 떠났다.

優勝과 受賞經歷

잉글랜드
월드컵 優勝 1966

에버튼
1部 리그 優勝 1970

[GOAL.com 人氣뉴스]

[웹툰] 밀란의 첫番째 選擇 '誤녜우'
첼시, 맨시티 제치고 테베즈 迎入?
바르셀로나, 亞르샤빈 迎入에 關心
히딩크 "지르코프는 왼쪽의 支配者"
드錄바 "챔스 優勝, 期必코 이룰것"
오베르탕, 맨유에서 成功할수 있나?

GOAL.com Editorial Team / 김응래

-全 世界 選手들의 移籍 狀況이 한 눈에! ( http://goal.com/kr/scores/transfer-zone )-
-ⓒ前 世界 蹴球 네트워크 骨닷컴 ( http://www.goal.com/kr ), 無斷 轉載 및 再配布 禁止-

이 記事는 言論社에서 섹션分類를 하지 않았습니다.
記事 섹션 分類 안내

技士의 섹션 情報는 該當 言論社의 分類를 따르고 있습니다. 言論社는 個別 記事를 2個 以上 섹션으로 重複 分類할 수 있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