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眞짜 出生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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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正 2007.05.06. 午後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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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畫伯 出生地 論難

(大田.洪城=聯合뉴스) 윤석이 記者 = 韓國 近.현대 美術界의 巨匠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1904-1989) 畫伯의 出生地가 어디인 지를 놓고 論難이 再演될 兆朕을 보이고 있다.

論難의 發端은 지난 3日 大田에서 門을 연 `이응노 美術館'側이 開館 記念 特別展을 열면서 그동안 忠南 洪城으로 알려졌던 이 畫伯의 出生地를 忠南 豫算으로 訂正해 表記했기 때문.

이응노 美術館側이 製作해 展示室 앞에 내건 이 畫伯의 年譜(年譜)와 特別展 圖錄 等을 보면 `이 畫伯은 1904年 陰曆 1月12日 忠南 豫算 出生'으로 紹介했다.

고암 美術館 공광식 學藝社는 "美術館 開館에 앞서 올初 忠南 豫算郡廳에서 고암 先生의 出生地가 豫算 德山이라는 出生 證明書(除籍簿)를 보내왔다"며 "公文書에 고암의 出生地가 豫算으로 돼 있는 만큼 앞으로 各種 資料를 訂正해갈 計劃"이라고 말했다.

實際로 이응노 畫伯의 出生을 公式的으로 確認할 수 있는 除籍簿(1938年)를 보면 이 畫伯은 '禮山郡 덕산면 낙상리 24番地'에서 出生한 것으로 記載돼 있다.

禮山郡 文化財界 擔當者는 "고암의 出生地로 알려진 洪城 홍북면 중계리는 禮山郡 덕산면 낙상리와 生活圈이 같은 隣接 地域이어서 豫算 出生인데도 洪城 出生으로 訛傳된 것으로 보인다"며 "除籍簿에 豫算 出生으로 돼있는 만큼 더 明確한 證據는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事實이 알려지자 洪城郡側이 발끈하고 나섰다.

洪城郡은 禮山郡의 除籍簿가 고암이 長成했을 때 作成된 것인데다 고암의 父親(이근상)李 1910年 日本 憲兵隊에 `동생의 遺品을 돌려달라'는 歎願書를 내면서 自身의 居住地를 `洪城郡 홍북면 중리(중계리의 옛 이름)'로 적은 것을 봤을 때 1904年에 태어난 高癌도 父親의 居住地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推定된다는 것이다.

軍은 特히 고암 先生의 生가지로 알려진 홍북면 중계리 一圓에 `이응노 生가지 復元 및 記念館 建立'을 推進하고 있는 狀況에서 出生地 論難이 再演될 境遇 事業推進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念慮하고 있다.

洪城郡 關係者는 "고암의 親姻戚과 중계리 住民들의 證言을 통해서도 고암이 洪城에서 出生한 것으로 確認된다"며 "이응노 美術館側에 關聯 資料들을 보내 年譜 內容 訂正을 公式 要請할 計劃"이라고 말했다.

이 關係者는 이어 "고암 先生의 出生地 論難을 없애기위해 이미 文化財廳에 이응노 生가지에 對한 文化財 指定을 申請한 狀態"라고 덧붙였다.

한便 고암 이응노 畫伯의 出生地는 1989年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生前 마지막 展示會의 圖錄 年譜 等 他界 以前의 記錄에는 `忠南 豫算'으로 記錄돼 있는 反面 死後에는 `洪城 出生'으로 적혀있는 等 資料가 많아 混線과 論難이 끊이지 않고 있다.

seoky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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