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曜示唆=서형숙 記者] 오는 12月 大統領 選擧를 앞두고 與野의 大選 走者들이 熾烈한 大權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相對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熾烈한 레이스에서 最後에 웃게 될 者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關心이 모아지고 있다. <日曜示唆>는 與(박근혜·김문수·정몽준)와 野(文在寅·金斗官·孫鶴圭) 6人과 非政治權 走者로 安哲秀 서울대 融合科學技術大學院腸을 有力 大選走者로 選定해 檢證하기로 했다. 그 세 番째로 大韓民國 男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兵役에 對해 살펴봤다.
兵役은 國民으로서 遂行해야 하는 國家에 對한 軍事的 義務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南北 分斷의 現實에 따라 軍服務가 法으로 定해진 義務事項이다. 때문에 兵役은 大韓民國 男子라면 特別한 理由를 除外하고 누구나 履行해야 한다.
이러한 徵集制를 基盤으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情緖上 軍 服務는 國家安保에 對한 責任뿐 아니라 特히 社會統合과 國民團合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하지만 特權層의 兵役非理가 社會的 痼疾病으로 자리 잡으며 兵役은 敏感한 事案이 되었다.
過去 大選政局에서 莫强한 大勢論의 主役이던 이회창 候補가 아들 兵役疑惑이 불거지며 大統領 選擧에서 落選했다. 兵役忌避 딱紙가 붙으면 演藝人들도 하루아침에 退出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兵役問題는 契機만 提供되면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爆發力이 强한 事案이다. 때문에 高位公職者나 指導者가 되려면 兵役檢證은 必須다. <日曜示唆>의 顯微鏡 檢證時間 그 세 番째로 潛龍들의 兵役過程을 들여다봤다.
#日本將校로 活動한 아버지 前歷에 批判받는
朴槿惠
朴槿惠 前 새누리당 非對委員長은 女子이기 때문에 兵役에 關해 該當事項이 없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朴正熙 前 大統領의 軍 戰力은 恒常 도마 위에 올라 朴 前 委員長의 발목을 붙잡는다.
朴 前 大統領은 敎師로 勤務하다 그만둔 뒤 지난 1940年 滿洲의 初級將校 養成學校인 神經軍官學校를 支援하여 合格하였다. 이때 그는 나이 制限에 걸려 1次에서 落榜하였으나 將校가 되겠다는 自身의 懇曲한 便紙를 보내 合格하게 된다.
以後 朴 前 大統領은 2年間의 軍事敎育을 마치고 優等生으로 選拔되어 日本陸軍士官學校 3學年으로 編入했고, 2年 뒤 第57期로 卒業했다. 朴 前 大統領은 8·15光復 以前까지 主로 關東軍에 配屬되어 日本軍 中尉로 服務했다. 하지만 日本이 敗亡하자 朴 前 大統領은 釜山港으로 歸國했다.
以後 그는 1946年 9月 朝鮮警備士官學校(陸軍士官學校 前身)에 入學하여 3個月間 敎育을 마치고 朝鮮國防警備隊 陸軍 少尉가 되었다. 兄 박상희의 影響을 받았던 그는 軍部 內에서 祕密裏에 組織된 남로당에 加入하여 活動하다 1948年 國軍 內部 남로당願 索出 時 發覺되어 逮捕되었으며 軍法會議에 回附되어 死刑을 宣告받았다.
하지만 滿洲軍 先輩들의 救命運動과 軍部 내 남로당願 存在를 實吐한 代價로 無期懲役을 言渡 받았다. 以後 15年으로 減刑되어 軍에서 罷免되었다. 하지만 韓國戰爭 中에 現役으로 復籍 되었다.
朴 前 大統領은 韓國戰爭 동안 主로 陸軍本部 情報局에서 勤務하다 1953年 將軍이 되었다. 1954年 第2軍團 砲兵司令官, 1955年 第1軍參謀長, 1960年 陸軍軍需基地司令官, 第1管區司令官, 陸軍本部 作戰參謀部長을 거쳐, 1961年 第2軍副司令官으로 在職 中에 軍部쿠데타를 主導하여 政權을 掌握하였다.
이에 對해 권영길 統合進步黨 議員은 “滿洲에서 光復軍을 討伐한 日本軍 오카모도 미노루 中尉(朴正熙)는 大韓民國 大統領이 되고, 젊음을 祖國 光復에 바쳤던 光復軍 張俊河는 朴正熙 獨裁權力에 죽임을 當했다”며 “獨裁者의 딸이 執權與黨 總帥로 大統領을 노리는 大韓民國의 모습이여”라고 聲討했다.
#財閥家임에도 堂堂하게 ROTC로 兵役 履行限
鄭夢準
鄭夢準 새누리黨 議員은 ROTC 13期로 兵役을 移行하였다. 鄭 議員은 서울大學校 經濟學科 3學年 在學 中에 學群候補生을 自願했다. 鄭 議員은 學生 身分으로 鶴도 軍事 訓鍊을 받고 지난 1975年 卒業과 同時에 陸軍少尉로 任官한 것.
財閥家 아들임에도 不拘하고 當時 大部分이 꺼려하고 힘들어했던 學群候補生을 自願하여 2年間 軍事訓鍊을 받고 卒業과 同時 陸軍將校로 任官한 事實은 鄭 議員이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履歷이기도 하다.
特히 1970年代 初 서울 相對 ROTC 13期 候補生 敎育을 擔當했던 사람이 바로 現 김관진 國防部 長官이다. 때문에 두 사람은 當時에 깊은 因緣을 맺었다. 鄭 議員의 큰아들 亦是 學群 43期로 任官하여 將校 身分으로 兵役의 義務를 履行했다. 鄭 議員은 또 막내아들 亦是 ROTC를 보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國家安保官은 적어도 ROTC 候補生 時節 心得했던 透徹한 軍人精神의 學習效果로부터 根源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게 側近들의 說明이다.
鄭 議員은 지난 3日 “‘核에는 核’이라는 ‘恐怖의 均衡’이 없이는 平和를 얻을 수 없다”며 北核 保有 宣言에 맞서 核保有 맞불論을 폈다.
鄭 議員은 “安保政策에 大海 全面的인 再檢討가 必要한 때이며, 核武器 保有能力을 갖춰서라도 國民의 生命을 지켜야 한다”고 核保有論을 主張했다.
이는 鄭 議員이 金文洙 知事 等 軍 未畢 候補나 女性인 朴 前 委員長보다 分斷된 現實에서 自身이 安保와 保守를 責任질 代案이라는 戰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核에 核으로 맞서면 相互 間에 核武器 開發에 더 置重하게 될 것이고 生物·化學武器 等 軍事費用의 擴大를 招來하고 福祉費用等을 軍事費用으로 代替하게 될 수도 있어 論難이 紛紛한 狀態다.
#中耳炎으로 免除받자 틈만 나면 疑惑 提起된
金文洙
김문수 京畿道知事는 疾病으로 兵役을 免除받았다. 金 知事는 지난 1971年 大學에서 除籍당한 뒤 장티푸스에 걸려 故鄕집으로 내려가 療養을 했다. 그 渦中에 그는 保安司에 끌려가 强制徵集 直前 身體檢査에서 過去 中耳炎 手術 後遺症이 發見됐다. 때문에 重이根治術 後遺症으로 免除 判定을 받은 것.
하지만 金 知事의 兵役免除를 두고 繼續해서 疑惑이 提起돼왔다. 中耳炎은 軍隊를 免除 받을 程度의 疾病은 아니라는 理由에서다. 中耳炎은 귀 가운데 鼓膜이 一時的으로 터져 自然 治癒되거나 病院에서 治療를 받으면 完治되는 것으로, 一般的으로 5~6個月 以後에 재검을 받아 最終的으로 免除與否가 決定되는데 金 知事는 재검을 받지 않고 곧바로 免除를 받았다는 것.
特히 中耳炎으로 軍隊를 免除받을 程度라면 그 後遺症으로 相當한 聽力 障礙를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金 知事는 聽力에 아무런 異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끊임없이 攻擊받아 온 事案이다.
이에 對해 金 知事 側은 “장티푸스에 걸려 死境을 헤매다 國軍保安臺 要員에 끌려 强制徵集된 뒤 國軍 統合病院에서 中3 때 걸렸던 中耳炎이 惡化돼 徵集免除 判定을 받았다”고 說明했다.
이어 “다른 사람들은 背景이 좋아 兵役을 免除받았는지 몰라도 金 知事는 너무 基本이 없어 免除받았다”며 “服務에 必要한 最小限의 健康마저도 없었다”고 解明했다.
#强制徵集으로 特戰司 갔다 最優秀 表彰까지 받은
文在寅
文在寅 民主統合黨 議員은 앞서 特殊戰司令部(特戰司) 空輸部隊 軍服을 입은 服務時節 寫眞이 인터넷上에 널리 流布되면서 有名稅를 타기도 했다. 文 議員은 1975年 8月 陸軍에 入隊해 1978年 2月 陸軍兵長으로 滿期 除隊했다.
當時 文 議員이 軍隊 內에서도 生疏한 空輸部隊에 差出된 것은 朴正熙 政權의 ‘强制徵集’ 때문이라는 說明이다. 文 議員은 自身의 著書 <運命>에서 “過去에는 데모하다 끌려온 學生들을 保安司 같은 곳에 配置해 活用했는데 요즘은 苦生시키는 쪽으로 方針이 바뀌었다”고 알렸다.
朴正熙 政權은 强制徵集을 통해 自身의 反對 勢力을 힘든 곳 卽 學生運動者들을 前方部隊로 보내거나 特戰司와 같이 힘든 곳으로 보내 아예 學生運動을 根絶시키는 方法을 使用했다는 얘기다.
文 議員은 實際로 慶熙大 在學時節 維新反對 示威를 主導한 前歷이 있다. 當時 ‘緊急措置 9號’가 宣布되며 文 議員 亦是 示威를 벌이다 拘束됐고 同時에 學校에서도 除籍됐다. 文 議員은 著書에서 “釋放된 지 얼마 안 돼 入營令狀이 나왔다. 身體檢査도 안 받은 狀態였다. 身體檢査 通知書와 入營通知書가 함께 날아왔다. 入營 前날 身體檢査를 받고 다음 날 入營하는 强制徵集이었다”고 回顧했다.
當時 强制徵集으로 목숨을 잃었던 수많은 젊은이들도 있었다. 文 議員은 아이러니하게도 特戰司에서 가장 힘든 訓鍊 中의 하나였던 空輸訓鍊을 비롯한 爆破, 浸透 等 各種 訓鍊에서 頭角을 보였다. 이에 전두환 前 大統領(當時 旅團長)에 化生放 最優秀 表彰을 받기도 했다.
한便 文 議員의 長男 亦是 2001年 12月 陸軍에 入隊해 2004年 1月 陸軍兵長으로 滿期 除隊했다.
#軍隊 入隊 以前과 以後 삶이 180度 變한
金斗官
김두관 慶南道知事는 지난 1982年 陸軍에 入隊해 1985年 兵長 滿期 除隊했다. 金 知事의 아들 亦是 陸軍兵長으로 滿期 除隊한 狀態다.
特히 金 知事에게 軍隊는 價値觀의 變化가 오던 時期로 要約할 수 있다. 金 知事 스스로도 軍隊에서 겪은 經驗과 運動圈이던 親同生의 影響으로 運動圈으로 進入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大學을 늦게 들어갔던 나는 4學年 때 軍隊를 가게 되었다”면서 “逆說的으로 民主主義에 對한 信念은 이때 더 분명해졌다”고 回顧했다. 金 知事는 軍隊가 가장 非民主的인 組織으로 不合理와 肥效率의 天國이라고 바라봤다.
아무 잘못도 없이 集合과 그 뒤를 이어 얼차례를 받았고, 內務班 안과 밖에서 數많은 獨裁者들이 거닐고 있었다는 說明이다. 때문에 한 社會의 運營原理로써 民主主義의 制度化만큼은 分明히 認識하는 契機가 되었다는 것이 金 知事의 생각이다.
特히 金 知事의 部隊는 서울에서 가까운 議政府에 位置했다. 德分에 金 知事는 外出機會가 생기면 고려대에 在學 中인 동생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當時 그는 大學캠퍼스에서 벌어지는 激烈한 反政府 示威와 集會를 目擊했고 學生運動의 指導部였던 동생으로 인해 學生들의 鬪爭의 大義나 計劃을 서로 討論할 機會를 가지기도 했던 것으로 傳해진다.
이때부터 金 知事는 大學과 軍隊에서 느꼈던 非民主的인 狀況을 변화시키는 社會運動에 積極 同參하기로 決心을 굳히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金 知事에게 軍 入隊는 180度 다른 價値觀을 심은 契機가 된 셈이다.
#軍隊서 낮은 사람에게 承服하는 法을 배운
孫鶴圭
孫鶴圭 民主統合黨 常任顧問 亦是 지난 1969年 陸軍에 入隊해 1972年에 兵長 滿期 除隊했다. 손 顧問은 서울대학교 在學時節 學生運動을 한 탓에 懲戒를 받아 卒業이 안 됐다. 때문에 그 亦是도 어쩔 수 없이 半强制的으로 軍隊에 끌려간 셈이다.
그는 한 冊을 통해 軍 生活에 對한 所懷를 밝힌 바 있다. 特히 손 拷問은 그의 軍 生活 3年間의 經驗이 現在 삶의 밑바탕이 됐다고 할 만큼 所重한 經驗으로 看做하는 樣相이다. 그는 軍隊를 통해 平素 自身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고 마음으로 承服하는 걸 배웠다고 回顧했다.
손 顧問은 “그들에게 고개 숙이고 바짝 엎드려야 했다. 그것은 軍隊生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經驗했을 現實이었다”고 밝혔다.
손 顧問은 華麗한 스펙의 所有者로 有名하다. 그는 서강대 敎授와 3選議員·長官·道知事 等 華麗한 經歷에 頂點을 찍는 水準이다. 때문에 손 拷問이 貴族的日 것이라고 偏見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大部分의 사람들이 나의 庶民的인 態度에 놀란 적이 있는데 이러한 나의 모습은 軍隊生活을 통해 體得한 것이다”고 傳했다.
特히 그는 “젊은 時節 그 어려웠던 軍隊生活을 통해 익혔던 이웃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앞으로도 變함없이 維持할 것이다”며 “그것이 바로 그 時節 神이 내게 준 膳物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백신 開發하다 家族에게 軍隊 간다는 말 못한
安哲秀
安哲秀 서울대 融合科學技術大學院腸은 軍醫官으로 兵役義務를 履行했다. 安 院長은 백신바이러스로 이름을 떨치기 前 醫大를 나와 醫師의 길을 걷고 있었다.
軍醫官은 바로 醫大에 進學하여 6年을 修了한 醫大生 및 醫大卒業生 等이 服務하게 되는 職責이다. 때문에 安 院長은 軍隊 내 患者의 治療를 擔當했던 셈이다.
特히 그는 지난 2009年 <무릎팍道士>에 出現해 “軍隊에 갈 무렵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極盛을 부렸는데, 이에 對한 백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3個月 동안 被害가 擴散될 것을 憂慮했다”면서 “軍醫官(大尉)으로 軍隊 가는 날 1991年 2月6日에 만들어서 PC通信으로 電送하고, 入隊를 했다”는 逸話를 밝혀 世間의 注目을 받았다.
그는 또 “內務班에서 다른 사람들이 入隊 前날 家族들과 헤어진 얘기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家族들한테 軍隊 간다는 말을 안하고 나왔다”고 밝혀 더욱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에 對해 安 院長의 아내 김미경 敎授는 한 言論과의 인터뷰를 통해 “軍隊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地下鐵 타고 서울驛으로 달려가더라. 汽車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無智 섭섭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