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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畫俳優 강수연

映畫人

映畫俳優 강수연

平生 俳優의 꿈

네 살때 데뷔했으니 人生의 90퍼센트를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셈이다. 兒役 出身으로 40年의 經歷을 가진 映畫俳優 강수연. 하지만 그女가 빛나는 演技者가 될 수 있었던 건 '歲月'德分은 아니다. '강수연'이라는 이름은 韓國映畫가 徐徐히 國際 舞臺에 이름을 알리던 時期를 象徵하며, 그女의 꿈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배우라는 이름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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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때 카메라 앞에 서다

女俳優의 偉大한 系譜가 있다. ‘女傑’이었던 최은희 , 知性과 感性을 兼備했던 문정숙 , 靑春 멜로드라마의 엄앵란 , 韓國的 어머니像을 定立한 황정순 , 官能的이었던 도금봉 , 트로이카를 形成했던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 하지만 異常하게도 이 系譜도는 1970年代에 끝나 버린다. ‘뉴 트로이카’인 정윤희 - 유지인 - 장미희 가 登場했지만 過去의 榮光을 되살리기엔 뭔가 아쉬운 感이 있었고, 호스티스 映畫와 에로티시즘 映畫가 이어지던 時期에 우리의 女俳優들은 카메라 앞에 無防備 狀態로 露出되어 있었다.

이 時期에 강수연은 왔다. 아니, 事實 그女는 이미 와 있었다. 初等學校에 들어가기 前부터 카메라 앞에 섰던 演技者. 인터뷰를 위해 찾아본 資料에는 1971年이 데뷔 年度로 되어 있기에 팩트 確認을 위해 質問을 던졌다. “그 前부터 했어요. 韓國 나이로 네 살 때니까…. 몇 年에 데뷔했는지, 한 番 計算해보세요.(웃음) 데뷔는 映畫로 먼저 했죠. TV 드라마는 初等學校 들어가서 했던 것 같아요. 그때 TBC(동양방송)에서 ‘어린이 드라마’라는 게 생기면서, 主人公을 했죠. 그 前엔 映畫, 演劇만 했어요. 演劇은 兒童劇이 아니었고, 國立劇團에서 했던 演劇이었어요.” 충무로에 ‘兒役 俳優’가 몇 名 없던 時節, 강수연은 수많은 作品에 出演했다. 거의 每日 같이 學校 授業이 끝나자마자 映畫社에서 대기시켜 놓은 車를 타고 現場으로 向했고, “高等學校 卒業할 때까지 日曜日을 便하게 쉬었던 게 딱 두 番”이었다고 回想할 만큼 精神 없는 學窓 時節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강수연에게 ‘演技’는 어떤 自意識에 依한 건 아니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女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 ‘아 좋아’ 이런 意思表現을 하기 始作하면서 演技를 한 거예요. 그때는 내가 演技를 한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아저씨들이 와서 ‘너 이렇게 해봐’ ‘웃어봐’ 그래서, 그대로 하면 ‘아이 예쁘다’ 이런 거죠. 그렇게 幼兒期, 靑少年期를 보냈어요. 워낙 오래 하다 보니까 그 生活이 익숙해지고 現場에 宏壯히 適應을 잘하는 아이였던 거죠.”

다양한 作品들에 出演했지만 올드 팬들에게 남아 있는 ‘兒役 강수연’의 이미지는 < 별 3兄弟 >(1977) < 비둘기의 合唱 >(1978) < 슬픔은 이제 그만 >(1978) < 어딘가에 엄마가 >(1978) < 하늘나라에서 온 便紙 >(1978) 같은, 꿋꿋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感動的인 삶을 다룬 作品들. 그리고 TBC 드라마 <똘똘이의 冒險>(1971)에서 맡았던 캐릭터 ‘이쁜이’는 어린 時節 그女의 別名이 되기도 했다. 하이틴 때는 <깨소금과 옥떨메>(1982) 같은 ‘明朗 映畫’도 만날 수 있었고, TV 드라마 < 風雲 >(1982)에선 어린 明成皇后 役을 맡기도 했다(24년 後 映畫 < 韓半島 >(2006)에서 강수연은 다시 明成皇后 役을 맡는다).

典型的이지 않은, 矛盾的이면서도 複合的인

<슬픔은 이제 그만>中

언젠가는 만나야 할 苦悶은 다가왔다. 當時 旋風的인 人氣를 끌던 TV 드라마 <高校生 日記>(1983)에 出演할 즈음이었다. “繼續 演技를 할지 말지 根本的인 苦悶에 빠졌어요. 繼續 演技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宏壯히 많은 苦悶을 했고요.” 강수연은 <씨네21> 인터뷰에서 그때를 “觀客의 立場으로 映畫를 너무 좋아하게” 된 때였다고 말한다. “내가 出演한 映畫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出演한 映畫를 보러 가는 것도 너무 좋고, 劇場 앞만 걸어가도 가슴이 막 설레고. 그 나이 또래에 映畫를 좋아하는 靑少年과 똑같은 感情을 느낀 거죠. 내가 하는 이 일을 旣往이면 좀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工夫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眞摯한 苦悶 끝에 “나도 모르게 始作한 演技지만 正말 잘 始作한 것이라는 認識과, 演技者는 미치도록 魅力이 있는 職業이며 平生에 勝負를 걸 職業으로 後悔 없이 죽도록 熱心히 하자는 決心”에 이른 강수연은 ‘映畫’라는 媒體가 自身에겐 더 흥미롭다고 생각으로, 高等學校 3學年 때부터 2001年에 < 女人天下 >에 出演하기까지 거의 20年 동안 오로지 映畫에만 出演한다. 이른바 ‘成人 演技者’로서 강수연의 첫 試圖는 김수형 監督의 <w의 悲劇>(1985). 反應은 좋지 않았지만, 이 映畫의 失敗는 以後 그女가 映畫를 더욱 眞摯하게 생각하는 契機가 된다.

當時 監督들의 評價를 보면, 當時 강수연의 映畫에 對한 熱情을 살짝 엿볼 수 있다. < 고래사냥 2 >(1985)의 배창호 監督은 “아직 어린 배우지만 ‘깡다구’가 있고 무척 熱誠的이다. 本人이 選擇한 作品을 위해서 다른 計劃을 모두 保留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고 演技에 專念하는 眞摯한 姿勢를 높이 사줄 만하다”며 갓 스무 살이 된 女俳優의 潛在力을 이야기했고, <미미와 철수의 靑春 스케치>(1987)의 이규형 監督은 “執念이 强한 演技者이다. 自身이 생각하는 段階에 다다르지 못한 演技를 할 땐, 周圍의 評價와는 關係없이 다시 해야 直星이 풀린다”며 어리지만 프로페셔널의 面貌를 지니고 있었던 강수연을 評價했다. 임권택 監督은 인터뷰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씨받이>(1987)에 강수연을 캐스팅한 理由를 이렇게 말한다. “十八 세 철 없는 애로부터 씨받이로 가서 한 一 年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거를 거기서 一 年 後든 二 年 後든 나이와 關係없이 엄청난 體驗의 世界를 살고 났을 때 煙氣가 저 앞하고 뒤가 全部 커버될 만한 充分한 技倆을 가진” 배우는 강수연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時期 그女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俳優였다. 서너 篇의 映畫를 同時에 撮影했고, 1987年에 開封한 作品만 無慮 6篇이었다. 映畫의 性格은 다양했다. < 미미와 철수의 靑春 스케치 >는 靑春 스타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興行作이었고, < 연산군 >(1987)에선 妖婦 장녹수가 되었다. <감자>(1987)에선 당찬 아낙네 복녀 役을 맡았고, 大鐘賞 女優主演賞을 안겨 준 <우리는 只今 제네바로 간다>(1987)에선 거칠게 살아가는 娼女였다. <됴화>(1987)에선 宿命과 業報의 人生을 살았고, <씨받이>(1987)에선 悲劇的 運命을 살아가는 代理母가 되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俳優가 보여주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幅 넓은 스펙트럼이었고, 役割엔 ‘極端的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 時間 속에서 그女는 ‘강수연的인 것’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小說家 전혜성은 강수연에 對한 俳優論에서 “그女의 입김이 닿는 瞬間, 어떤 惡하고 卑賤하고 暗澹한 現實도 潑剌하고 魅力的이며 또 튀는 물고기처럼 생생하고 樂天的인 宇宙로 變해버린다. 따라서 그女가 만들어낸 ‘强手硯滴 娼女’ ‘强手硯滴 씨받이’ ‘强手硯滴 朝鮮時代 새宅’ ‘强手硯滴 아낙네’ 그 모든 것이 一連의 潑剌한 1980年代的 現代性을 짙게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役割을 徹底히 自己의 것으로 消化할 줄 아는 俳優 강수연이 지닌 魅惑的인 能力의 一部”라고 말한다. 강수연은 過去 先輩 女俳優들이 지녔던 어떤 ‘典型性’에서 벗어나, 一見 矛盾的이면서도 複合的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때 <씨받이>가 베니스映畫祭에서 女優主演賞을 受賞하며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稱號를 안겨준다. 只今으로선 理解할 수 없는 건, 當時 강수연은 韓國映畫의 海外 業務를 管掌하던 映畫振興公社로부터 映畫祭에 參席하겠냐는 말을 全혀 듣지 못했다는 事實. 閉幕式에서 自身의 이름이 불리는 瞬間 그女는 베니스에 있지 않았고, 受賞 結果가 發表된 後에 國內에서 치러진 自祝宴에 參席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 스타라는 이름의 裏面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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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年 前 釜山國際映畫祭에서 강수연과 全度姸 의 ‘오픈 토크’가 있었을 때, 전도연은 <密陽>(2007)으로 칸映畫祭 女優主演賞을 受賞할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韓國에서 저 女俳優는 어떤 作品을 했니? 스타니? 티켓 파워가 있니? 그 사람들 눈에는 ‘쟤 어디서 나타난 애枝?’라는 거였어요. 그런 視線들이 느껴지니까 제가 氣 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堂堂해지더라고요.” 이때 전도연의 말만큼이나 印象的이었던 건, ‘무슨 이야기인지 100퍼센트 理解하겠다’는 듯 首肯의 눈빛을 띠며 곁에서 微笑 짓던 강수연의 表情이었다. 베니스映畫祭 受賞 2年 後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로 모스크바映畫祭에서 다시 女優主演賞을 受賞했지만, 1980年代에 ‘월드 스타’라는 이름은 남 모를 아쉬움과 서러움을 지닌 名譽였다.

1980年代 末과 1990年代 初에 게스트로 或은 審査委員으로 外國의 映畫祭를 다니며, 그女는 많은 것을 느꼈다. “저는 1980年代부터 海外 映畫祭를 다녔잖아요. 그때 너무너무 설움을 當한 거예요. 當然히 VIP로 招待를 받았지만 ‘넌 누구니?’ 이러는 거죠. 韓國에서 온 俳優라고 그러면 ‘北韓에서 왔니 南韓에서 왔니’ 그러고. 韓國엔 自國 映畫가 있느냐고 물어볼 程度였어요. 다들 韓國映畫에 對해 無知했고, 韓國映畫界度 海外 市場에 對해 無知했죠.”

그女가 釜山國際映畫祭 에 執行委員으로 參與하고 14年 동안 單 한 番도 빠지지 않고 參與한 것도 그런 理由다. “우린 언제쯤 저런 映畫祭를 치르나 부러워하던 次에 釜山에서 國際映畫祭를 만든다는 거예요. 그때 韓國映畫界가 똘똘 뭉친 理由는, 그런 서러움과 부러움 때문이었다고 봐요. 성공시켜야 한다는 使命感을 가지고 始作을 했고, 團地 내려와서 開幕式에 參與하는 게 重要한 게 아니라, 主人意識을 가진다는 게 重要한 거죠.”

아무튼, 國際 映畫界에서 ‘코리아’라는 브랜드는 微微한 存在였던 時節에 강수연의 首相은 韓國映畫界에 하나의 事件이었고, 그女 自身도 조금씩 變하기 始作한다. 충무로에서 ‘俳優 강수연’의 株價는 急上昇했고 수많은 出演 提議가 있었지만, 그女는 오히려 出演作을 줄이는 戰略을 選擇한다. “어렸을 때부터 바쁘게 겹치기 出演을 했잖아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잘 할 수도 없고, 消化가 안 되는 거예요. 映畫를 平生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를 消耗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1年에 한 便에서 많으면 두 篇으로 줄인 거죠. 일부러 調節을 했어요. 많은 問題가 있었죠. 收入도 줄고…. 그리고 大衆들은 俳優가 많은 作品에서 보이는 걸 좋아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葛藤도 많이 했는데, 後悔하지 않아요. 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只今까지 할 수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映畫라는 꿈, 平生 俳優의 所望

주철환 敎授는 著書 <스타의 香氣>에서 강수연에 對해 이렇게 말한다. “30年 演技를 했다고 다 강수연처럼 되는 건 아니다. ‘끼’도 있고, ‘깡’도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이 ‘끼’이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목숨 걸고 안 하는 것이 ‘깡’인데, 그女야말로 이 둘을 고루 지닌 사람이다.” 이 ‘끼’와 ‘깡’을 바탕으로, 강수연은 1980~90年代에 柔軟하게 自身의 領域을 擴張하고 變해간다. 1980年代부터 꿈틀거리던 ‘코리안 뉴시네마’ 監督인 박광수 , 장선우 , 이현승 等과 <베를린 리포트>(1991) <競馬場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等에서 만났고, <그 女子, 그 男子>(1993)에선 當代의 트렌드였던 로맨틱 코미디와 遭遇했다. 곽지균 , 장길수 監督과 <그後로도 오랫동안>(1989) <墜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웨스턴 애비뉴>(1993) <깊은 슬픔>(1997) 等에서 꾸준히 作業하며 ‘멜로 히로인’이 되었고, 이명세 監督의 <至毒한 사랑>(1996)에선 그女의 멜로 演技에 頂點을 찍었다. 1991年엔 臺灣 映畫 < 駱山風 >에 出演했는데, 只今은 수많은 韓國 俳優들이 海外 映畫에 出演하지만 當時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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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그女의 行步에서 注目할 部分은 이른바 ‘페미니즘’ 系列로 分類되는 映畫들이다. 1990年代에 강수연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女性 캐릭터’였다. ‘일과 사랑’이라는 話頭를 다루며 韓國映畫에 本格的인 페미니즘 論爭을 불러온 < 그대 안의 블루 >, 공지영의 原作을 映畫化한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995), 女性들의 欲望을 率直하게 드러낸 <處女들의 저녁食事>(1998)엔 모두 강수연이 있었다. 當時의 다채로우면서도 適切했던 選擇에 對해 강수연은 이렇게 말한다. “俳優 個人의 趣向보다는, 社會的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빨리 把握하는 게 더 重要한 것 같아요. 映畫는 個人의 日記帳이 아니니까요. 觀客이 무엇을 願하고, 文化的 흐름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에 便乘을 해야죠. 事實 제 趣向이야 너무 심플하죠. 난 그렇게 複雜한 이야기를 別로 안 좋아해요.(웃음)”

긴 歲月에 걸쳐 수많은 映畫에 出演했어도 ‘記憶에 남는 作品’ 몇 篇은 分明히 있을 거라 생각해 質問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對答은 “正말 없어요”였다. 事實 그女는 過去 인터뷰에서도 ‘代表作’이나 ‘印象的이었던 作品’을 물어올 때마다 같은 對答을 했고, 어떨 때는 “모든 作品으로부터 背信 當한 느낌”이라는 表現을 쓰기도 했다.

撮影에 들어가면 配役에 빠져 그 煙氣가 最善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開封 後에 그 映畫를 보면 自身에 對한 背信感마저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女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찍으면서 正말로 서른 살쯤엔 出嫁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映畫가 끝나자 언제 그런 생각을 했나 싶을 程度로 부끄러웠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안 믿는데, 正말 잊어 버려요. 그게 내 腦 構造인 것 같아요. 只今 이걸 하고 있으면 이게 다라고 생각하는데, 끝나고 나면 싹 잊어요. 어떨 땐 前作에서 맡았던 役割 이름도 몰라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眞짜로요. 아마도 兒役 時節에 잊기 위한 努力과 訓鍊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맡았던 役割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렸을 땐 作品이 끝나면 그걸 잊기 위한 트레이닝을 하곤 했는데, 이젠 트레이닝이 必要 없을 程度로 ‘自動的으로’ 잊어버려요.”

하지만 그女의 腦裏에 恒常 박혀 있는 생각은 ‘平生 俳優’에 對한 꿈이다. 아직 具體的으로 밝힐 段階는 아니지만, 올해 12月엔 새 映畫의 크랭크인 現場에 그女는 서 있을 것이다. 偶然으로 始作했지만 愛情과 因緣을 넘어 이젠 運命이 되어 버린 ‘俳優’라는 職業. 2年 前 釜山國際映畫祭 ‘오픈 토크’에서 강수연은 이렇게 말했다. “映畫는 저에게 꿈인 것 같아요. 좋은 꿈일 수도 있고 나쁜 꿈일 수도 있고, 映畫는 꿈속에서 헤어나지 않는 나의 人生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수많은 觀客들 앞에서 自身의 未來에 對해 素朴하지만 確固한 信念을 傳하며 이야기를 닫았다. “只今까지 어떤 俳優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온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俳優가 될 것인지에 對해서는 꿈이 있어요. 내가 正말 70살 이렇게 되었을 때, 例를 들면 <집으로…> 같은 映畫에서 觀客들에게 사랑 받고 演技도 잘하는, 그런 할머니 俳優가 되는 게 제 꿈이죠.” 早晩間 밝혀질 그女의 次期作 小食과, 來年 즈음엔 스크린에서 直接 確認할 수 있을 그 모습에서, 좀 더 영글어지고 다시 한 番 새로워진 ‘俳優 강수연’을 만날 수 있기를 期待한다.


發行日

發行日 : 2009. 10. 28.

出處

提供處 情報

  • 김형석

    고려대 西洋史學科와 東國大 映畫科 大學院을 마쳤다. 시네마테크 文化學校서울 <현 서울시네마테크="">에서 映畫 일을 始作했으며 2000年 <스크린>에 入社한 後 부터 映畫 저널리스트로서 살고 있다.

  • 寫眞 김덕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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