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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人物韓國史

홍경래

政權 打倒와 地域差別 撤廢를 외치다

[ 洪景來 ]

出生 - 死亡 1771 ~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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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는 1811年(純祖 11) 平安道 一帶에서 政權 打倒와 地域差別 撤廢를 내세우며 抵抗의 旗幟를 올렸다. 비록 官軍 等의 鎭壓軍에 依해 制壓되었으나, 그는 죽어서도 變革을 바라는 大衆 속에 스며들어 革命家로 다시 復活했다.

홍경래, 抵抗의 旗幟를 올리다

1811年 12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平安道 가산에서 一群의 무리들에 依해 抵抗의 旗幟가 올려졌다. 그 中心에 평서大元帥라 불리던 洪景來가 있었다. 洪景來의 出身 成分에 對해 아직 定說은 없다. 一部에서는 沒落한 兩班 出身이라고 하기도 하고 一部는 平民 出身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글에 對해서 造詣가 있었고, 아이들도 가르쳤다고 傳해지는 이야기로 봐서는 最小限 平民 以上의 身分 所有者였음은 分明하다.

洪景來는 擧事를 圖謀하기에 앞서 緻密한 準備를 하였다. 먼저 祕密裏에 同志들을 糾合하였다. 加算 地域에서 우군칙과 이희저를, 곽산 地域에서 홍총각과 김창시를, 개川 地域에서 이除草를, 黃州 地域에서 김사용 等을 同志로 糾合하였다. 이렇게 構成된 指導部는 다양한 階層을 包含하였다. 兩班 出身인 進士 김창시가 있었는가 하면, 商業과 鑛業에 從事하였던 우군칙이 있었고, 對象人인 이희저 等이 있었다. 다양한 階層이 包含되었다는 事實에서, 當時 平安道가 안고 있던 政治, 社會的 矛盾에 地域民들이 相當히 共感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00年 동안 疏外되었던 平安道, 새로운 變化를 맞이하다

朝鮮은 全國의 地方을 8度로 나누어 統治하였다. 8度 가운데 朝鮮 支配層의 相當數는 이른바 三南地域이라고 불리던 嶺南·湖南·湖西 地域에서 輩出되었다. 韓半島의 北部 地域에 位置한 咸鏡道와 平安道는 相對的으로 疏外되었다. 單, 咸鏡道의 境遇 朝鮮 建國의 기틀이 되었던 地域으로 王家의 發祥地로 認識되며, 이른바 豐沛志向(豊沛之鄕 ; 敗走 風邑 出身으로 皇帝가 된한나라 高祖의 類似에서 由來)으로 불리며 그 나마 中央 政府의 關心이 쏠리기는 하였으나 平安道는 그렇지 못하였다.

勿論 朝鮮 政府에서 地方民에 對한 懷柔策의 一環으로 平安道 地域 一部 人士를 特採로 採用하기도 하였으나 制限的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이중환 은 [ 擇里志 ]에서 “平安道는 300年 以來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士大夫는 이들과 婚姻하거나 벗하지 않는다.”라고 實情을 吐露한 바 있다.

오랜 期間 疏外되었던 平安道는 朝鮮後期에 들어서며 變化의 기운을 맞이하였다. 變化는 主로 經濟的인 部分에서 始作되었다. 有償(柳商: 平壤商人)이나 萬象(灣商: 義州商人)을 中心으로 大廳貿易이 活潑하게 展開되었다. 더하여 18世紀 後半 以後에는 鑛山 開發이 活潑하게 進行되었는데, 一部 鑛山은 이른바 潛採(潛採)라 하여 不法的인 形態로 採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富가 蓄積되는 狀況에서 이들에 對한 收奪은 漸次 더욱 加重되며 社會的 矛盾이 擴大되어 갔다.

洪景來와 農民軍이 꿈꾸던 世上은

指導部를 構成한 洪景來는 平安道 가산의 다복동을 根據地로 삼아 蜂起를 위한 財源을 마련함과 同時에 鑛山 開發을 名分으로 내걸고 사람들을 募集하였다. 이에 應했던 사람들은 大槪 生活이 어려운 農民層으로, 洪景來는 이들을 蜂起軍으로 組織하고 軍事 訓鍊을 施行하였다. 이렇게 準備가 進行되던 中인 1811年 全國的으로 大凶年이 들었다. 特히 平安道는 가장 被害가 極甚하였다.

洪景來는 이때를 蜂起에 適當한 時期로 判斷하고, 다복동을 中心으로 蜂起의 旗幟를 올렸다. 大元帥 洪景來를 中心으로 副元帥에 김사용, 先鋒將에 홍총각, 後軍將에 이제初를 配置하고 우군칙과 김창시는 模寫(謀士)로 活動하였다. 洪景來 等은 蜂起와 함께 檄文을 恐怖, 自身들의 蜂起에 對한 名分을 對外的으로 闡明하였다. 檄文의 一部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朝廷에서는 西土(西土 : 平安道)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 甚至於 權勢 家門의 奴婢들도 西土의 人事를 보면 반드시 平民놈[平漢]이라 일컫는다. 西土에 있는 者 어찌 抑鬱하고 원통하지 않은 者 있겠는가. 막상 急한 일에 當하여서는 반드시 西土의 힘에 依支하고 또한 過去를 볼 때는 반드시 西土의 文章을 빌었으니 400年 以來 西쪽 사람들이 朝廷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辛未 정주성 공緯度. 官軍이 定住性을 두고 對峙하였던 農民軍을 에워싸고 4個月에 걸쳐 攻防하였던 모습을 보여주는 정주성 공緯度의 一部分. <出處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蜂起 後 抵抗軍은 南北 陣營으로 나누어 行動을 開始하였다. 봉기 初盤 農民軍의 氣勢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一部가 서울로 進擊하면서 家産과 곽산 官衙를 接受하였다. 家産과 곽산 官衙를 接受한 蜂起軍은 곧 倉庫를 열어 貯藏된 穀食으로 貧民들을 救恤하고 武器 等을 빼앗아 戰鬪力을 强化하였다. 初盤 農民軍의 氣勢는 대단하여, 以後 井州·先天·泰川·鐵山·龍泉·博川 等地를 接受하였다. 初盤 乘勝長驅를 거듭하던 蜂起軍은 그러나 博川의 松林 戰鬪에서 敗戰하면서 새로운 轉機를 맞게 되었다.

松林에서 敗戰 以後 蜂起軍은 다시 戰列을 整備하였다. 그 過程에서 官軍의 反擊이 이루어지며 蜂起軍이 掌握했던 地域은 徐徐히 官軍의 手中으로 다시 넘어갔다. 여기 저기 戰鬪에서 敗한 蜂起軍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集結하였다. 以後 3個月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蜂起軍의 抵抗은 悽絶하였다. 繼續되는 鎭壓軍의 攻擊에도 屈하지 않고 積極的이면서 組織的으로 對應하였다. 정주성 밖에서는 官權에서 離脫된 民心이 城에서 籠城하는 蜂起軍을 도왔다. 洪景來 等 指導部는 鎭壓軍과의 戰鬪를 督勵하는 한便 支援軍이 到着할 것이라고 하여 民心을 懷柔하기도 하였다.

對峙가 繼續되면서 鎭壓軍側에서는 정주성의 陷落이 如意치 않을 것으로 判斷, 1812年(純祖 12) 3月부터는 性 自體를 폭파시키기 위한 作業을 進行하였다. 마침내 4月 18日 爆發物 埋設을 위한 掘鑿이 마무리되고, 다음 날 火藥을 埋設하여 城을 폭발시킨 뒤 官軍이 城內로 進入, 蜂起軍을 鎭壓하였다. 이 過程에서 洪景來는 戰死하고, 大部分의 指導部가 檢擧되었으며, 約 2,938名의 蜂起軍이 逮捕되었다. 한便 官軍의 鎭壓過程에서 이들과는 달리 이른바 義兵이 組織되어 農民軍의 鎭壓에 參與하였다.

洪景來와 農民軍이 蜂起하면서 꿈꾸었던 世上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洪景來와 農民軍은 一旦 地域 差別이 없는 社會를 꿈꾸었다. 그리고 더하여 腐敗한 政權의 打倒를 꿈꾸었다. 腐敗한 政權 打倒 뒤에는 새로운 救世主인 眞人(眞人)이 나타나 世上을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眞人出現說로, 支配勢力의 不正을 넘어 ‘李氏王朝’의 打倒까지 꿈꾸게 하는 理念이 되었다. 그러나 限界도 있었다. 身分制 廢止나 土地 改革, 그리고 當時 社會的 矛盾이 集約된 삼정(三政: 剪定·軍政·還政)에 對한 改革 措置 等이 없었다는 點 等이다.

죽어서도 ‘革命家’로 다시 復活한 홍경래

洪景來는 정주성에서 죽었으나, 當時 逼迫받던 農民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洪景來는 假짜 홍경래이다. 眞짜 洪景來는 살아 있다.”는 所聞을 퍼뜨리며, 곳곳에서 抵抗하였다. 1826年 淸州 掛書事件의 罪人으로 國文을 받던 김치규는 洪景來를 비롯한 여러 人物들이 죽지 않았다고 陳述하기도 하였다. 農民이나 變革을 바라는 大衆들에게 洪景來의 實際 生死與否는 重要하지 않았다. 그들은 洪景來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自身들의 變革意志를 키워갔다.

한便 洪景來는 以後 革命家로 또는 風雲兒로 다시 誕生하였다. 日帝時代 이돈화 는 백두산인이라는 筆名으로 天道敎 機關誌인 [ 開闢 ]에 寄稿한 글에서 洪景來를 將軍이라 呼稱하며, 市勢(時勢)가 英雄을 만들고, 英雄이 다시 時勢를 만드는 것이 理致인데 洪景來와 같은 人物은 한 몸으로써 時勢를 만든 자라 일컬었다. 또 이윤재 는 1931年 [ 동광 ]에 寄稿한 글에서 洪景來와 蜂起軍을 革命軍이라 명명하면서 그들의 最後를 記述한 뒤 後世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고 하며 失敗를 아쉬워하였다. 日帝時代 洪景來에 對한 이런 關心은 暗鬱한 現實에 對한 突破口의 次元에서였던 것으로 判斷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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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정부군과 홍경래군

정주성에서 攻防戰을 벌이고 있는 政府軍과 洪景來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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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處: 醬콩 先生님과 함께 묻고 答하는 韓國史카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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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日

發行日 : 2011.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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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供處 情報

  • 이근호 명지대 人文科學硏究所 硏究敎授

    글쓴이 이근호는 朝鮮後期 政治史와 정치사상사 關聯 硏究를 進行하고 있다. 또한 大衆과 疏通하려는 次元에서 [이야기 朝鮮王朝史], [靑少年을 위한 韓國史事前] 等을 出刊하였는데 이러한 努力은 繼續될 것이다. 國民大 韓國學硏究所 硏究敎授를 歷任하였다.

  • 그림 장선환 畫家,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慶熙大學校 美術敎育學科와 同大學院 繪畫科를 卒業했다. 畫家와 그림冊 作家로 活動을 하고 있으며, 現在 경희대에서 講義를 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fartz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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