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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만났다, 파리

한 張의 그림 地圖

그들은 만났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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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와 제임스 조이스가 만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19年 11月 19日 美國文學專門書店인 ‘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Shakespeare & company)’가 門을 열었을 때 두 番째 손님으로 門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앙드레 지드 였다. 그의 나이 쉰이었을 때이니, [田園交響曲]을 지은 바로 그 해다. 이곳은 書店으로 門을 열었으나 워낙 高價의 輸入書들을 다루다 보니 初期에는 實質的으로 冊 貸與店 役割을 했다. 앙드레 지드는 이곳에 帳簿를 만들어두고 바지런히 冊을 빌려갔다. 當時 제임스 조이스 는 37歲였다. 1920年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文學의 核心을 自處했다. 1918年부터 連載하던 [ 율리시즈 ]가 ‘풍기상 有害하다’며 온갖 受難을 當하던 渦中에, 그 冊을 出版하겠노라 나선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社長인 실비아 비치 였다. 이곳의 단골이던 수많은 文人들이 [율리시즈]의 出刊에 어떻게 힘을 실었을지 斟酌 可能하다. 앙드레 지드와 제임스 조이스가 서로 깊은 友情을 나누었다는 記錄은 없지만, 서로의 作品을 눈여겨 보았을 것은 自明할 터. 그들이 書店 門間에서 나눴을 對話들이 궁금하다.

安樂한 호텔에서 벌이는 神經戰,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리츠호텔’

호화롭기로 有名한 리츠호텔에는 '헤밍웨이 바'가 있어 그를 記念한다.

男性的이고 豁達한 魅力을 가졌던 헤밍웨이 와 섬세하고 銳敏했던 스콧 피츠제럴드 의 友情과 破局은 有名하다. 主로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에게 讚辭를 퍼부었지만, 헤밍웨이 또한 "그의 才能은 나비의 날개가 만들어 낸 먼지의 무늬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며 그를 認定했다. 그러한 認定이 서로를 오히려 牽制하게 한 것일까? 그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1940年代 리츠호텔의 단골손님이던 헤밍웨이는 "天國에 關한 꿈을 꿀 때면, 그곳은 언제나 리츠호텔입니다"라며 讚辭를 아끼지 않았고, 피츠제럴드 또한 [ 리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 ]라는 短篇을 쓰며 각별한 愛情을 보였다. 헤밍웨이는 두 番째 夫人인 폴린과 같이 플로리다로 떠나면서 두 個의 트렁크를 리츠호텔에 남겨두고 가는데, 이를 호텔 地下에서 샤를 리츠 가 發見하면서 [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年 ]이 世上에 나오게 된다. 이 冊에는 파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가 적혀있는데 그 中에서도 特히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갖고 있던 兩面的인 感情이 눈에 띈다.

죽어서 만난 두 人氣스타, 짐 모리슨과 오스카 와일드가 함께 잠든 ‘페르 라세즈 公園墓地’

時代를 잘못 타고난 이들이 뒤늦은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있다.

페르 라세즈 公園墓地 에 잠든 有名人士들은 많다. 발자크 , 프루스트 , 쇼팽 , 모딜리아니 , 알퐁스 도데 , 이사도라 덩컨 , 마리아 칼라스 , 에디트 피아프 等等.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地圖를 들고 넓은 墓地를 헤맨다. 그 中에서도 가장 熱烈한 好感의 洗禮를 받는 이는 누구일까? 무덤은 停職하니, 무덤 위에 바쳐진 꽃과 膳物, 키스 자국이 그 人氣를 端的으로 보여준다. 1943年에 태어나 1971年 파리의 아파트 浴槽에서 心臟痲痹로 죽은 록밴드 ' 도어즈 '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 의 조촐한 무덤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친 꽃과 膳物들로 뒤덮여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好意로 뒤덮여있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 의 무덤이다. 그의 碑石은 全 世界 女性들의 키스마크로 塗褙되어 있다. 그가 同性愛 때문에 監獄살이를 하고 悲慘한 最後를 마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華麗한 人氣를 謳歌하다가 公演 中 性器를 露出하여 非難을 받고, 結局 藥물過多로 인한 心臟痲痹로 쓸쓸한 最後를 마친 짐 모리슨과 唯美主義의 化身으로 華麗한 注目을 받다가 同性愛로 인해 監獄에 가고 結局 悲慘한 最後를 맞이한 오스카 와일드는 어딘가 닮았다. 時代를 잘못 만난 이들의 安息處에서 뒤늦은 人氣를 누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조차도.

오랜 戀人을 위한 오래된 카페,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카페 르 프로코프’

軟弱한 쇼팽,强靭한 조르주 상드는 들라크르와의 눈을 통해 이렇게 再誕生했다.

카페 르 프로코프 는 1686年 처음 門을 열었다. 그 歲月이라니! 歲月만큼이나, 그곳의 단골들의 目錄은 길다. 몰리에르 , 라신 , 발자크 , 볼테르,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그리고 그곳에 다음과 같은 수줍은 이름도 있다. 쇼팽 과 그의 聯想의 愛人 조르주 상드 . 淺薄한 男便과 아이들을 버리고 파리에 와 男裝을 하고 文人들과 어울리며 小說을 썼던 조르주 상드는 自由奔放한 戀愛로도 有名했는데, 그女의 가장 有名하면서도 애처로운 愛人이 쇼팽이다. 그들은 1836年, 쇼팽이 스물여섯 살 때 만나 1847年, 그가 서른일곱 살 때 헤어진다. 그리고 2年 後 쇼팽은 世上을 뜨게 된다. 一生 동안 肺結核을 앓았던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母性的인 極盡한 보살핌을 받다가 結局 病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쇼팽을 만날 當時 서른둘이었던 상드는 自身에게는 없는 面貌 때문에 쇼팽을 좋아했으나 結局 "그는 極度로 銳敏하고 섬세하며 어린아이다운 純眞함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偏狹하기 짝이 없는 常套的인 틀 안에만 갇혀 있다"라고 認定하게 된다.

華麗함 속의 두 그늘, 고흐와 로트렉의 ‘물랭루즈’

로트렉의 눈에 비친 물랭루즈

물랭루즈 로트렉 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는 물랭루즈의 畫家였다. 처음 파리에서 畫家로 名聲을 얻은 것이 바로 물랭루즈의 포스터 德分이었는데, 파리 全域에 뿌려진 이 포스터를 蒐集家들이 떼어가려고 競爭이 붙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由緖 깊은 집안 貴族家門에서 태어났으나 遺傳病으로 畸形的인 몸매가 된 그는 "다리만 길었어도 畫家는 되지 않았다"고 自嘲했다고. 그러한 콤플렉스와 苦痛스러운 治療過程은 그를 술로 이끌었고, 結局 精神病院을 오가던 그는 알코올 中毒과 發作으로 夭折하고 만다. 그러한 로트렉에게 가장 많은 影響을 준 畫家가 반 고흐였다. 當時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내리며 압생트에 醉해 비틀거리던 고흐 亦是 몽마르트르의 다양한 風景들을 畫幅에 담았다. 로트렉, 고갱 等과 함께 獨自的인 印象派 모임을 만들고 싶어했던 고흐는 結局 失敗하고 끝내 拳銃自殺로 生을 마감한다. 물랭루즈의 華麗한 붉은 風車 밑에는 이렇듯 캄캄한 時間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열린 書齋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드 플로르는 如前히 盛業中

사르트르 보부아르 는 열린 사람들이었다. 서로를 拘束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굳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맺었던 그들의 ‘契約結婚’은 有名하다. 그들은 또한 定해진 作業室度 싫어했다. 카페를 轉轉하며 시끄럽고 煩雜한 渦中에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들은 特히 카페 드 플로르를 좋아했는데, 그곳을 좋아한 것은 이들뿐이 아니었다. 롤랑바르트 , 앙드레 말로 , 프레베르 , 亞폴리네에르 等等. 플로르의 主人인 폴 부발 은 그들에 對해 다음과 같이 寸評한 바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 카페를 찾는 손님 中 最惡의 손님이었습니다. 茶 한盞을 앞에 두고서 몇 時間이고 죽치고 앉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繼續 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 하지만 그는 메뉴板에 "나에게 있어 플로르에 이르는 길은 自由에 이르는 길이었다"라는 사르트르의 글을 적어두는 商術을 發揮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젊은 날 만나 50年 以上 이어졌던 그들의 契約結婚은 한 무덤에 나란히 묻힘으로써 아름다운 結末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와 茶 한盞을 시켜놓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쓰고 있다.

낯선 異國땅에서 만난 異邦人, 理獄과 모리 아리마사의 ‘파리7大學’

理獄 은 연세대학교에서 韓國史를 專攻했다. 專任講師로 있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삶의 자리를 옮겼다. 그는 파리7大學의 韓國學科 敎授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韓國學을 創設하면서 韓國學 硏究所 所長을 맡았다. 그가 죽을 때 그는 파리7大學의 名譽敎授였고, 國民名譽勳章과 敎育功勞勳章 그리고 大韓民國 國民名譽訓長의 受賞者였다. 그는 파리지앵답게 몽파르나스 墓地에 뼈를 묻었다. 碑石에 한글두 글字 새기고. 그가 파리에서 만났던 모리 아리마사 또한 그와 닮았다. 도쿄大 佛文科를 나와 同大學 助敎授를 맡았던 그는 파리로 온 뒤 故鄕에 남아있던 敎職을 버리고, 夫人과 離婚하면서까지 파리에 남았다. 파리에서의 삶은 碌碌하지 않았으나, 그는 아름다운 隨筆을 쓰며 견뎠다. 파이프 오르간 演奏의 國際的 權威者이자 東洋語學校 敎授로. 그들이 만났던 파리는 그들 누구의 故鄕도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의 故鄕이기는 했을 터. 結局은 그들의 故鄕이 되었을 터. 그토록 그들을 魅惑케한 都市, 그 都市에 對한 愛情만으로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冊과 함께 떠나는 都市 旅行

發行日

發行日 : 200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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