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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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레오 錄音의 時間差를 보여주는 그림.

스테레오抛닉 사운드 (stereophonic sound, 文化語 : 立體音 [1] [2] ), 또는 簡單히 줄여서 스테레오 (stereo)는 스피커 對稱 構成을 통해서 둘 以上의 獨立 音響 채널을 使用하는 立體 音響 再生 方式을 말한다. 이와 같은 스테레오 사운드를 再生하는 電子 機器 또한 慣用的으로 "스테레오"라 부르기도 한다.

一般的인 뜻의 스테레오는, 同時에 하나 以上의 스피커에 맞춰 데이터를 使用하는 2 채널 再生 및 錄音을 뜻한다. 스테레오와 相對되는 槪念은 ' 모노 '이다. 많은 이들이 모노와 스테레오의 差異를 音質이라고 알고 있으나 모노와 스테레오는 音質과는 關聯이 없다. 簡單히 말해서 스테레오는 2個의 스피커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냄으로 因해서 物體의 移動 等을 現實的으로 實感나게 들려 줄 수 있다. 그래서 스테레오에서 쓰이는 스피커는 最小 2個이며 各各의 스피커를 聽取者의 左右에 配置하여야 한다. 技術的인 뜻의 스테레오는, 스테레오포니(stereophony) 또는 스테레오는 物體의 相對的인 位置와 錄音 이벤트를 人코딩하기 爲해 平射 圖法 을 使用하는 소리 再生 및 錄音을 뜻한다. 스테레오 시스템은 映畫館 , 텔레비전 서라운드 사운드 5.1~6.1 채널 시스템과 같이 여러 個의 채널을 包含할 수 있다.

歷史 [ 編輯 ]

草創期 [ 編輯 ]

클레망 아데가 國際電氣博覽會에서 선보인 테아트로폰의 프로토타입의 設計圖.

스테레오의 始作은 音盤이 처음 登場하던 時期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81年에 열린 第1回 國際電氣博覽會에서 프랑스의 技術者 클레망 아데 는 電話機나 이어폰으로 오페라와 演劇 公演을 들을 수 있는 테아트로폰(Theatrophone) 을 發表했다. 그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와 코메디 프랑세즈의 舞臺 맨 앞쪽에 마이크를 設置하여 舞臺 實況이 2킬로미터 떨어진 샹젤리제의 博覽會場으로 傳達되게 했다. 마이크는 납으로 감싸고, 다른 雜音이 들어오는 것을 防止하기 위해 고무 밴드 위에 놓아두었다. 이때 마이크 하나는 舞臺의 왼쪽 折半을, 나머지 하나는 오른쪽을 커버했다. 이렇게 傳達된 소리는 聽取用 管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아데는 이 테아트로폰으로 라디오 發展의 土臺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最初로 바이노럴(Binaural), 卽 "두 귀를 위한" 電送에 成功했다. 다만 아데의 方式은 音響의 錄音이나 電送, 再生이 可能하긴 하지만, 再生은 헤드폰을 통해서만 可能하다. 여기는 스피커를 通한 豐盛한 音響 效果는 全혀 期待할 수 없었다. [3]

1925年, 하인리히 퀴헨마이스터 가 90度로 구부러진 소리喇叭 2個가 달린 둥근 模樣의 蓄音機를 선보였다. 이 機器의 이름은 울트라폰 이었다. 톤암度 2個였는데, 이것들은 回轉하는 레코드의 同一한 소릿골에서 1/15秒 程度 時間差를 두고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一種의 "공간 音響"李 生成되기는 했으나, 結局 스테레오의 野流에 不過했다. [3]

1930年代 [ 編輯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벨 硏究所 [ 編輯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電氣 錄音의 先驅者的 役割을 했으며 늘 새로운 技術에 關心을 기울인 指揮者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는 LP뿐만 아니라 스테레오의 發展에도 한몫을 했다. 再生되는 音響의 質이 改善되기를 바라던 그는 뉴저지州 머리힐에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 社 의 子會社 벨 硏究所 에 도움을 請했다. 스토코프스키는 1931年 4月 硏究 責任者 해럴드 D. 아널드에게 便紙를 썼다. "내가 吹入한 音盤이나 라디오 放送을 들으면, 音色의 仄聲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 程度로 우리의 技術이 充分하지 못하다는 事實을 切感하게 됩니다. 우리가 잡아낸 音響은 너무 貧弱하고 쇳소리가 나며 날카롭기만 합니다. 우리가 志向하는 것은 따뜻하고 둥그스름하고 깊고 더 부드러우면서도 分明한 音響이죠." 그러면서 이런 提案을 한다. "나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貴社의 音響 實驗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리허설을 하는 동안 여러분이 實驗을 進行하면 되고, 따로 費用을 支拂할 必要는 없습니다. 이 리허설에 다름 사람들은 參席하지 않으므로, 作業은 非公開로 이루어지고 그 結果는 貴社가 願한다면 祕密에 부칠 수도 있습니다." [4]

벨 側에는 더없이 좋은 機會였다. 몇 달 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常住하는 音樂 아카데미 地下層에 새로운 裝備들이 設置되었다. 技術者들은 錄音用 커팅 機器를 作動시켜보고, 1萬 헤르츠 以上까지도 受容할 수 있는 마이크로폰으로 錄音을 했으며, 各 樂器들의 소리크기와 周波數 範圍를 硏究했다. 硏究者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러면서 바이노럴 方式이 다시금 登場했다. 1933年 4月, 벨 硏究所는 電話線을 통해 워싱턴의 憲法會館으로 長距離 電送을 實施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카데미의 大型 홀에서 스토코프스키의 副指揮者 알렉산더 스말렌스가 오케스트라를 指揮하고, 스토프스키는 그보다 3層 아래에서 全體 演奏를 들으면서 音響을 調節했다. 스토코프스키는 이 長距離 音響 電送이 안겨준 느낌을 이렇게 記述했다. "空間的 感覺과 方向性을 느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리는 훨씬 더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어느 面으로 보나 모노럴 方式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요. 모노럴 音響으로 들으면, 音樂이 뭉쳐서 들리는 데다 숨이 막히며 찌부러진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反面에 바이노럴 音響은 자유로움과 空間을 느끼게 해주고, 숨 막힐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죠. 完全히 자유롭게 呼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느덧 스토코프스키는 專門社들과 다양한 技術的 問題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程度로 이 分野에 깊게 沒頭했다. 그는 홀 어딘가가 아닌, 오케스트라 가까이에 마이크들을 設置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提案했다. 以後 細密한 實驗들을 通해 이 方式이 옳다는 것이 立證죄었다. 同僚 指揮者인 프리츠 라이너는 스토코프스키가 "하이파이를 發見한 사람"이라며 感歎을 禁치 못했다. [5]

벨 硏究所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의 1931/32시즌 全體 公演을 錄音했다. 여기에서 드러난 큰 問題點은 音盤 表面의 雜音이 생각보다 甚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垂直으로 커팅된 아세테이트 레코드를 開發해냈다. 레커漆을 한 이 아세테이트 레코드는 分當 回轉數가 33⅓이고, 그 위에 올려놓는 톤암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하지만 톤암이 아무리 가볍다 해도 再生하게 되면 덧漆한 래커가 벗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以後에는 얇게 金을 입힌 구리층을 덧씌운 레코드를 實驗했다. 이 當時 벨 硏究所가 製作한 圓盤 125張이 只今까지 남아있다. 1979年에는 스토코프스키의 人事말과 몇 作品의 리허설을 담은 2張짜리 LP가 發賣되었고, 유감스럽게도 CD로 發賣된 적은 한 番도 없었지만 바이노럴 方式으로 錄音된 이 音源들은 스테레오 技術을 志向한 最初의 클래식 音樂으로 評價된다. [6] 1932年 4月 8日에 스토코프스키가 쇤베르크의 自大한 구레의 노래의 美國 初演을 指揮했을 때, 빅處 社가 이를 이틀 동안 錄音하여 14張짜리 12인치 레코드 세트로 發賣했다. 이와 同時에 33⅓回戰 LP로도 선보였다. 1935年에는 獨逸의 텔레風켄度 스테레오 錄音을 實驗했다. 그리고 1951年 美國의 技術者 에모리 쿡이 2個의 바늘, 2個의 톤암이 同時에 作動하고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는 바이노럴 레코드를 製作했다. 勿論 이 音盤은 별다른 商業的 成果를 안겨주지 못했다. [7]

스토코프스티는 以後로도 繼續해서 錄音 技術의 發展을 圖謀한다. 그는 월트 디즈니 社 와 손잡고 《 환타지아 》의 製作에 突入했다. 1939年 4月 여기서 採擇된 錄音 方式은 一般的인 바이노럴 시스템이 아니라 RCA가 開發한 멀티 트랙 시스템이었다. 《타임》誌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記述했다. [8] "디즈니의 뛰어난 音響 技術者 ... 빌 개리티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構成하는 各 樂器群의 소리를 捕捉할 수 있는 完全히 새로운 시스템을 開發해냈다. 이 소리들을 適切히 엮고 짜 맞춰 4個의 마스터 트랙을 形成함으로써, 마지막 파곳 朱子의 極度로 弱한 소리까지 統制할 수 있었다. ... 이 方式으로 製作한 映畫가 할리우드에서 上映되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技術者들은 개리티가 開發한 方式으로 錄音된 音響이 스크린 위의 캐릭터들을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리가 때로는 머리 위에서 搖亂하게 울렸다가 갑자기 뒤에서 속삭거리기도 했다 RCA와 디즈니의 技術者들은 8萬 5000달러를 들여 開發한 이 音響 시스템을 "판타사운드"라고 명명하고, 테크니컬러의 發明 以後로 映畫 製作을 이토록 變革한 技術은 또 없으리라고 自負했다." 이 사운드를 제대로 具現하기 위해서는 映畫가 上映되는 홀 全體에 스피커를 無慮 96代나 追加 設置해야 했다. 批評家는 이 技術이 지닌 强占에 注目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空間化된 音響이 特定 部分에서는 지나치게 强해지기 때문에 귀에 疲勞를 안겨줄 수 있다."고 指摘했다. 그 後 1950年에는 시네마스코프 方式의 映畫에 4個의 마그네틱 사운드 트랙이 使用되었고, 1957年의 토드 에이五 方式에는 6個의 트랙이 쓰였다. [9]

앨런 블룸라인 [ 編輯 ]

웨스턴 일렉트릭 社는 特許權을 내세워 다른 會社들이 바이老널 技術에 接近하는 것을 遮斷했고, 이렇게 되자 EMI는 自社의 技術者인 앨런 다워 블룸라인에게 獨自的인 技術을 開發하게 한다. 블룸라인은 2個의 채널을 使用하기 위해, 소릿골을 새기는 두 가지 方式, 水平 및 垂直運動을 組合했다. 에디슨式 垂直運動(왼쪽 채널)과 벨를리너식 水平運動(오른쪽 채널)을 結合한 것이다. 當然히 여기서는 모노 사파이어 바늘을 使用할 수 없었다. 블룸라인은 40마이크로미터 너비의 소릿골에서 두 個別 信號가 합쳐지도록 소릿골의 兩 側名을 깎는 方式을 開發했다. 이때 두 채널이 兩 側面에 各各 25度 角度로 새겨지면서 서로 直角을 이룬다 해서 이 方式을 45/45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소릿골의 안쪽 側面에는 왼쪽 마이크로 捕捉된 音響이, 바깥쪽 側面에는 오른쪽 音響이 記錄된다. 1931年 12月 14日, 블룸라인이 開發한 스테레오 技術은 番號 394,325로 英國 特許權을 取得했다. 하지만 그 뒤에 EMI는 이 實驗을 中斷했고, 블룸라인은 새로운 硏究 課題에 沒頭했다. 1942年 6月 그는 레이다 實驗을 위해 重爆擊機 핼리팩스에 搭乘했다가 事故로 목숨을 잃고 만다. [10]

1950年代 [ 編輯 ]

音盤 業界에 EMI의 스테레오 技術 開發 消息이 알려지자 빅터, 데카, 캐피틀 等의 美國 音盤社들은 웨스턴 일렉트릭 社와 손잡고 只今까지의 硏究를 共有하고 EMI에 匹敵할 만한 技術을 開發하기로 한다. 1957年 8月, 그들은 45/45 시스템을 開發하는데 成功한다. 하지만 過去의 "速度 戰爭"과 같은 "스테레오 戰爭"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美國 音盤 産業 協罍는 웨스턴 일렉트릭 社의 스테레오 技術을 標準 再生 方式으로 定하자고 提案했고, 그 結果 다른 競爭社들도 이 方式을 따르게 되었다. EMI의 프로듀서 月처 레고는 이 新技術을 남들만큼 빨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가 처음으로 스테레오 錄音을 試圖한 것은 1955年의 일이다.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프로코피예프의 7番 交響曲을 錄音했는데, 指揮는 니콜라이 말코가, 演奏는 필하모이나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그리고 指揮者 맬컴 私邸트와의 綠陰이 뒤따랐다. 特히 릴 테이프로 스테레오 錄音을 試圖했고, 그 結果 3年 뒤에는 훌륭한 立體 音響을 지는 錄音 60種을 선보이게 되었으며 이를 위한 別途의 믹싱 콘솔과 錄音 機器가 開發되기도 했다. [11]

各州 [ 編輯 ]

  1. 北TV 모든 映像 16:9 比率 HD級으로 受信돼 . 聯合뉴스 지성림 記者. 2017-12-04
  2. KCTV gets a widescreen, stereo upgrade . 노스코리아테크 마틴 윌리엄스. 2017-12-05
  3. 헤르베르트 2016 , 166쪽.
  4. 헤르베르트 2016 , 166-167쪽.
  5. 헤르베르트 2016 , 167-168쪽.
  6. 헤르베르트 2016 , 168-169쪽.
  7. 헤르베르트 2016 , 169쪽.
  8. 헤르베르트 2016 , 170쪽.
  9. 헤르베르트 2016 , 171-172쪽.
  10. 헤르베르트 2016 , 169-170쪽.
  11. 헤르베르트 2016 , 173-174쪽.

參考 文獻 [ 編輯 ]

  • 헤르베르트, 하프너 (2016). 《His Master's Voice: Die Geschichte der Schallplatte》 [音盤의 歷史 : 실린더 레코드부터 디지털 音源까지]. 경당. ISBN   978-89-86377-52-1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