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事件의 正確한 眞相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에 重要 民主化 運動 飼料로 永久 保管 中에 있는 故人의 막내 동생 當時 中央情報部 監察室 遙遠 最終善이 1973年 10月 25日 저녁, 當時 中情 次長 김치열에 依한 天人共怒할 間諜 및 投身自殺로의 事件 造作 記者 會見이 各種 TV 等 매스컴에 大大的으로 放映되는 그날 저녁, 延世大學校 세브란스 病院 精神病棟에 僞裝 入院하여 生命을 걸고 祕密裏에 記錄한 98 쪽에 達하는 悲壯한 遺言 記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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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하여 直接 읽어보는 것이 가장 正確한 眞實 接近의 길이 될 것이다.
1973年 10月 當時, 솔제니친의 收容所 群島를 읽고 있던 최종선은, 그 內容에서 힌트를 얻어 중정의 監視 範圍 안에 머물며 중정의 監視를 避해 祕密裏에 記錄을 남길 수 있는 最適의 場所로 鐵窓에 依하여 外部와 斷絶되어 있는, 本人의 母校(연세대학교 상경大學 經營學科) 附屬病院 세브란스 病院 精神病棟을 選擇했고, 切親 지훈賞 等 레지던트 親舊들로부터 펜과 연세대 大學노트를 求해 받고 單獨 病室을 配定 받은 가운데 그들의 保護와 助力 속에 남긴 悽絶한 그의 最後의 글, 卽 遺言書이자 良心宣言, 그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1974年 12月 31日 子正 무렵 깊은 밤, 최종선은 當時 응암동 聖堂 主任神父로 계시던 正義具現全國司祭團 함세웅 神父를 祕密裏에 찾아 가 그間 生命을 걸고 감추어 오던 位 手記 原本을 傳達하고, 때가 이르러 싸우게 될 때 그 때가 언제가 되던 新婦가 그 때까지 保管하시도록 請願 드리고, 神父의 눈물 어린 氣道를 뒤로 하고 다시 中庭, '虎狼이를 잡으려면 虎狼이 窟로 들어간다'는 悲壯한 決議대로 中情으로 돌아 가 1980年 5月 光州民主化運動에서 수많은 學生 市民이 犧牲되는 慘狀을 겪게 될 때까지, 언제나 멀리에만 있는 民主主義, 아무리 피를 흘려도 가까이 다가와 주지 않는 民主主義를 더 以上 기다릴 氣力을 喪失한 채 絶望하여 中正을 떠났다.
朴正熙 軍事獨裁의 어두운 時節, 民主化 運動으로 하여 繼續 監獄을 가시곤 하던 함세웅 神父는 다른 同僚 神父들과 修女들, 特히 金아멜리아 修女(最近에 修女의 存在가 알려졌음)에게 위 手記를 保管토록 하시므로 서, 그 後 15年을 天主敎正義具現司祭團 神父들의 司祭館, 修女院 等을 轉轉하며 祕密裏에 숨겨져 오다, 1988年 카톨릭 平和新聞에 當時 編輯局長 김정남 先生의 決斷에 依하여 본 手記가 밝은 世上에 처음 公開되기에 이르렀고, 같은 해 新東亞 11月號에 "서울法大 최종길 敎授 中央情報部가 죽였다" 題下로 公開되기에 이르러, 以後 이 手記는 최종길 敎授 間諜造作 拷問致死 事件 眞相 糾明의 始作이자 끝이라 할, 그래서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에서 永久保管을 決定할만한 民主化 鬪爭의 史料的 資料로의 意味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後 1988年,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김승훈 神父와 최종선 等 遺家族은 최종길 敎授 事件 關聯者들과 拷問 搜査官들에 對한 公訴時效 滿了를 앞두고 大韓民國 檢察에 公式的으로 事件 再調査와 최종길 敎授에 對한 名譽 回復을 鎭靜할 當時, 본 手記 寫本이 强力한 證據資料로 檢察에 提出되었고, 眞相을 隱蔽하려는 檢察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證據 資料가 되었으나, 6共 檢察은 結局 事件 眞相을 또 다시 隱蔽하고 事件 關聯者들에게 免罪符만 주어진 채 事件은 有耶無耶 되고 말았다.
2001年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에 최종길 敎授 事件에 對한 眞相 糾明을 再眞正한 최종선은 그間의 過程을 記錄한 "산자여 말하라"를 出刊하여, "이 글은 國民 여러분께 드리는 報告書입니다. 이 글은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에 提出하는 陳情書, 建議書, 答辯書입니다. 이글은 제 第 2의 良心宣言이며 告解聖事입니다" 라고 序言에 闡明한바 그대로, 이 冊은 單純한 冊이 아니라 최종길 敎授 事件 眞相糾明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事件眞相糾明의 指針書 白書로 서, 疑問詞 調査 結果報告는 結局은 이미 1973年 10月 26日에 쓰여진 최종선의 手記와 "산자여 말하라" 冊이 提示하는 主張과 guideline을 따라 追跡하여 事實을 確認하고 證據로서 具體化 한 記錄에 不過할 뿐으로서, 2017年 2月 26日 오늘 現在 드라마틱하고 波瀾萬丈한 최종선의 삶을 主題로 한 映畫가 J 映畫社에 依하여 具體的으로 企劃·進行되고 있을 程度의 意味를 갖게 하는 手記이고 記錄임은 公知의 事實임에도, 최종길 敎授 事件에 對한 眞相糾明을 自身의 代表的 人權 運動 事例인 양 宣傳하고 있는 K 某 辯護士라든가 최종길 敎授의 一部 家族은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에 民主化 運動 記念 飼料로 永久 保存되고 있는 위 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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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在라든가 최종선의 "산자여 말하라" 피 맺힌 冊의 存在를 애 써 外面하고 있다는 點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各種 인터넷上의 최종선에 對한 歪曲된 誤解와 惡意에 찬 各種 試圖를 이 以上 放置해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決心에 따라, 오늘 이 글을 올려 眞實을 바로 세우고자 한다. 아마 最終善이 곧 出刊 할 假稱 "산자여 말하라 II"에서 우리는 이 事件의 참 眞相과 hidden history, 그에 依해 밝혀지는 새로운 歷史的 事件의 놀라운 實相을 곧 接하게 될 것이다.
當時 朴正熙 軍事獨裁政權의 親衛隊 中央情報部 內에서의 最終選의 드라마틱한 삶과 行跡에 關心이 더 있다면,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에 따로 保管되어 있는 그에 關한 다른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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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閱覽하도록 또한 勸奬한다.
以下 최종선과 直接 나눈 對話 內容의 一部를 본 紙面을 통하여 公開한다.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의 公式 調査報告書에는, “최종길(當時 서울對 法大 敎授)은 1973年 10月 16日 午後 2時頃에 親同生인 崔○禪(當時 中央情報部 職員)과 함께 調査를 받기 위해 中央情報部(以下 中庭) 南山 分廳舍에 自進 出頭하였다.”고 明白히 ‘自進出頭’ 하였다고 해 놓고서는,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의 重要幹部로서, 그와 같은 自進出頭 結論의 公式調査結果 作成에 主導的으로 參與하였던 K 某 辯護士는 그 直後 최종길 敎授 遺家族의 國家相對 訴訟을 自身의 法務法人 D로 授任하여 所屬 辯護士 두 名을 눈가림으로 前面에 내세웠으나 事實上 그가 主導하였다.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에서 自身이 主導的으로 主管하였던 事件의 잉크도 채 마르기 前에 곧바로 이어서 同一 事件의 國家相對 損害賠償訴訟을 授任하여 代理한다는 그 自體가 法曹人으로서의 品位와 精神을 度外視한 品位 損傷行爲 아닌가?)
國家의 責任을 더 過重하게 물어 더 많은 補償額을 쉽게 받아 내고자 하는 辯護士들의 訴訟 技術上 trick 인지는 모르겠으나, 疑問詞위 調査結果確定에 이어 곧바로 서울地法에 提出한 2002街 合3367 損害賠償(氣)의 請求趣旨 "나. 中央情報部에서 最終길을 調査하게 된 經緯"에서, 當然히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調査結果 그대로 “自進出頭”라고 表現하여야 마땅할 것을, “當時 中央情報部 監察室 職員으로 勤務하고 있던 동생인 原稿 최종선을 통하여 最終길로 하여금 中央情報部 南山 分廳舍에 出席하도록 하였다”라고 模糊하고 야릇하게 表現하는가 하면, 아예 더 나가 最終길이 중정에 强制 連行된 것으로 記者들에게 公公然히 旣定事實化하여 公表하곤 하므로 서, 동생 최종선이 마치 自身의 兄 최종길을 중정에 連行해 간 양 歪曲하므로 서, 최종선의 名譽는 땅에 떨어졌고, 한 個人의 名譽나 事件의 眞實이야 여하하던 全혀 介意치 않고 國家를 相對로 報償을 받아 낼 그 目的 하나만 보고 달려드는 혐오스러운 모습에 嘔逆질 난 최종선은 그 後 美國에 살며 韓國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살아왔다 한다. (國家相對 損害賠償 請求 當時 최종선은 美國에 居住하고 있었으며, 辯護人 選任界에 sign 만 해서 보내줬으므로, 裁判 請求 趣旨에 自身이 그와 같이 歪曲되게 表現되어 있다는 事實을 全혀 알지 못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나 할까!?)
1審에서 敗訴한 최종길 敎授 遺家族과 法務法人 D는, 辯護人을 法務法人 J 로 바꿨으나, 擔當辯護士 C 모는 法務法人 D 出身으로 如前히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에 關與 하였던 K 某 辯護士의 影響力 下에서 裁判이 進行되게 되었음은 法曹界 周知의 事實인 데, 이 또한 法曹人으로서의 品位 따위는 如前히 아랑곳 하지 않는 눈 가리고 아옹 하는 低級하고 水準 낮은 品位損傷의 連續이었다. 그 以後 最終善이 美國에서 接한 이 事件關聯 新聞記事 中 最終길이 중정에 “任意同行”되었다고 한 內容을 發見하고, 最終善이 法務法人 J의 擔當辯護士 C 某에게 電話를 걸어 “任意同行이면, 搜査 機關이 被疑者나 參考人 等을 調査하기 위하여 그 當事者의 承諾을 얻어서 檢察廳이나 警察署 따위로 데리고 가는 일”이라고 되어 있던데, 그럼 내가 兄님을 任意同行 했다는 얘기로 法院書類가 되어 있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돈만 받아내면 됐지 까짓 게 무슨 대숩니까? 그렇게 안 하면 돈 한 푼 못 받습니다. 돈 못 받아도 좋습니까?” 하며 言聲을 높이며 발끈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열 받은 最終善이 “난 그깟 돈 必要 없다”면서 電話를 끊고 當時 親交가 있던 鳶ㅇ뉴스 朴ㅇ黃 記者(現在 社長)에게 電話를 걸어 憤痛을 터뜨리며 鬱憤을 吐露 한 일도 있었다는데, 그 後 最終船은 曺國과 絶緣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최종선은 最近 16年 만에 暫時 歸國하여 故 최종길 敎授의 막내딸 최희정을 만났더니, “엄마께서 살아 生前에 三寸이 補償金 自己 몫이 작다고 C某 辯護士에게 電話를 걸어 막 火를 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게 事實이냐“고 묻더라면서 ”兄嫂에게 나를 그렇게 中間에서 謀略한 나쁜 사람들“이라고 慨歎하였다.
이와 같은 辯護士들의 品位 損傷 行爲는 아래 報道 內容으로 더욱 明白한 事實로 밝혀졌다.
KBS News 入力 2016.02.18 (01:06) "過去事 不法 受任 疑惑 (後略)“: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234119&ref=A
한겨레 登錄 :2016-02-17 15:31 “過去事 受任 金ㅇㅇ 辯護士 (後略)”: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30776.html
等 新聞 · TV 報道에 따르면,
“辯護士法 第31條 3項은 公務員·調停委員 等을 歷任했던 辯護士는 職務上 取扱한 事件을 受任할 수 없도록 規定하고 있다. 이를 어길 境遇엔 懲役 1年 以下, 罰金 1000萬원 以下 處罰을 받게 된다.”라고 하면서,
位 K 某 辯護士가,
“(前略) 疑問詞 眞相糾明委員會 常任委員으로 在職하면서 '인혁당 再建위 事件' 等을 取扱한 뒤, 關聯 訴訟 5件을 授任해 5億 4千餘 萬 원을 받은 嫌疑로 起訴됐습니다 (後略)” 또는,
“(前略) 2000~2002年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常任委員으로 인혁당 再建위 事件과 關聯된 疑問詞 事件에 對해 調査 開始를 決定한 뒤 인혁당 再建위 事件 損害賠償 訴訟을 맡아 受任料로 5億4000餘萬원을 받은 嫌疑를 받았다 (後略)”라고 報道된 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