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期 生涯
編輯
1842年(憲宗 8年) 或은 1841年(憲宗 7)
8月 1日
흥선大院君
의 消失이었던 계성月의 아들로 흥선군의 私邸인
漢城府
안국방
雲峴宮
에서 出生하였다. 흥선군의 첫 아들이었지만 그는 庶子였다. 그밖에 같은 庶出인 누이 李氏는 우봉이氏 이호준의 아들
이윤용
과 結婚하였다. 黃玄에 依하면 庶出 누이는 그와 冬服이라 한다.
[1]
아버지
흥선大院君
의 正室 夫人이었던
여흥부大夫人 閔氏
에게서는 敵제인
이재면
과
이명복
(뒷날의
高宗
)이 태어났다. 한때 그의 正確한 出生年代가 알려지지 않아, 一角에서는 그가
1847年
警쯤 出生한 것으로 보고,
이재면
보다 늦게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幼年時節이나 初期의 行跡은 未詳이다. 그의
科擧 及第
記錄은 나타나지 않으나, 王室의 族譜를 記錄한
璿源譜略
中 1908年(順從 2)에 發刊한 璿源譜略에 依하면 그는
武科
(武科)에 及第했다 한다.
[2]
判官
을 지낸 신석완의 딸이었던 평산 申氏 婦人과 婚姻하였다. 몇 名의 子女가 있었는데 신형균에게 出嫁한 딸과, 그의 女同生 1名 外에는 張, 次男의 이름과 行跡이 記錄에서 確認되지 않고 있다. 그의 死後, 夫人 申氏가 이관용을 養子로 入養하기도 했다.
그는
안국동
雲峴宮
이나
가회동
에서 가까운
漢城
재동(齋洞, 잿골)에 집을 마련하였다.
官僚 生活
編輯
1863年
(哲宗 14)
12月
趙大妃
의 名으로 別軍職(別軍職)에 任命되고,
12月 15日
兵曹
의 推薦으로 特別히 部長(部將)에 任命되었다.
1864年
(高宗 1)
4月 12日
王室 宗親을 對象으로 한 特別
過去 試驗
에 3等으로 及第하였다.
1864年
(高宗 1)
5月 12日
訓鍊院
主婦
에 任命되었으며,
6月 21日
訓鍊院
添丁
이 되었다.
12月
南陽
監牧官(南陽監牧官)이 되었다.
1865年
(高宗 2) 僉知
中樞府
紗를 거쳐
五衛將
,
1866年
別軍職을 歷任했다. 그해
3月 22日
嘉禮都監에 參與한 官員들을 褒賞할 때 그는 別軍職으로
上玄宮
(上弦弓) 1梃을 下賜받았다.
1870年
3月 4日
南陽
府使
로 赴任했다가
4月 2日
근심으로 因한 痰癖症(痰癖症)을
李朝
에 報告하여
4月 3日
免職되었다.
1872年
僉知
中樞府
四가 되었다. 연령군파보, 은신군 派譜(1900年),韓國學中央硏究所 所長)에 따르면, 그는
訓鍊院
主婦
,
南陽
監牧官
,
訓鍊院
添丁
等 여러 官職을 지냈으며, 品階는 種2品
參判
에 이르렀다.
1873年
3月 27日
宗正卿
(宗正卿)에 任命되었다.
1874年
여름
原子
척
이 갑자기
水痘
症에 걸렸다가 快差하자 그해
6月 22日
內醫院
都提調 以下 官員을 施賞할 때 上玄宮 1張을 下賜받았다.
[3]
1873年
(高宗 10)
11月
攝政으로 있던 아버지
흥선大院君
은 高宗의 親庭 宣言 以後 權座에서 逐出되었다. 그러나 그는 大院君 逐出과 相關없이,
無關
職(武官職)에 繼續 任命되었다.
1874年
(高宗 11)
11月
別軍職
을 지냈다가
副護軍
을 거쳐 그해
12月 28日
京畿道
洋酒
牧師
로 赴任하였으나,
1875年
1月
身柄으로 業務를 보기 힘들다는
李朝
의 彈劾을 받고 削黜되었다. 그해 2月 15日 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2月 20日
別軍職으로 轉任되었다.
1879年
12月 21日
副護軍으로 在職 中
嘉善大夫
로 昇進하고, 같은 날 同知中樞府事로 任命되었다.
李在善 推戴 未遂 事件
編輯
1881年
(高宗 18)
9月 3日
別軍職으로 轉職되었다.
1881年
흥선大院君
의 側近
안기영
(安驥永),
권정호
(權鼎鎬) 等이 高宗을 廢位시키고 이재선을 王으로 推戴하려다 未遂에 그친 '
李在善 逆謀 事件
'이 發生하였다. 1881年의 어느 時點 或은 그 以前부터
흥선大院君
退陣에 不滿을 품은 興宣大院君의 側近 안기영, 권정호 等은 軍事 政變을 準備했고,
9月 13日
사람을 모아 擧事를 準備할 計劃을 세웠다. 이들은 擧事 目的을
토왜
(討倭)로 定하였다.
[4]
이들은 嶺南의 儒林인 강달선(姜達善) 等과도 連絡, 接線했고 開花, 開放에 反對하는 衛正斥邪 運動家들과도 交流하였다.
地方의 祕境棄權
老論
儒林들度 個項에 反對하여 叛亂에 參與하였다. 그러나
漢城
地域의
老論
은 거의 協助하지 않았는데,
黃玹
에 依하면 老論으로 參與한 사람은 北村의 庶孼 壽命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9月 3日
擧事에 參與하기로 한 光州山性(廣州山城)의 將校 이풍래(李?來
[5]
)가
捕盜廳
에 謀議를 告變하였고, 光州山城 將校들이 大部分 義禁府에 自首했다.
9月 6日
關聯者들이 逮捕되었다. 逮捕된 人物은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와 그外 30餘名의 關聯者들이었다.
[6]
그밖에도
光州
의 下級 署理들이
義禁府
에 自首하였다.
이재선의 逆謀 事件을 告變한 이들 中에는 그의 親妹夫
이윤용
도 있었다 한다. 이윤용은 '雲峴宮이 안기영·권정호의 謀議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大權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賤하고 어리석은 내 子息을 죽게 만드는데 不過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模糊하게 子息을 死地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人倫을 저버리고 道理에 어긋난 行爲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雲峴宮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量田(高宗, 閔妃)에 告해 바쳤다.
[1]
9月 3日
그는 自首 形式으로
義禁府
에 出頭하였다.
推戴 未遂 事件과 最後
編輯
또한 다른 高邊子를 통해 누군가 大院君의 庶子 이재선을 推戴하려 한다는 情報가
명성황후
의 귀에도 들어갔다.
[7]
逮捕된 안기영, 권정호 外 30餘名은 國文당하거나 처형당했다.
[6]
그를 推戴하기로 한 事件에 그가 直接 介入했는가, 或은 積極的으로 參與했는가 與否는 確實하지 않다. 이 일로 이재선은
1881年
9月 3日
逮捕되어
義禁府
에 投獄되었으며,
9月 12日
까지 名唱錄(明昌祿),
안기영
等과 對質審問을 받았다. 이철구 等은 끝까지 否認했지만 一部는 그를 推戴하려 했다고 發說하였다. 한便 이때 逮捕를 避해 달아난
허욱
等은 나중에
흥선大院君
이 高宗을 廢하고
이준용
을 擁立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加擔한다.
다만, 擧事를 일으키는데 加擔했던 人物 中 유도석은 그의 祖父가 高宗이 登極하던 當初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하여 死刑을 減해 섬으로 流配를 갔다.
[1]
李在善 推戴 關聯 獄舍는 그해 겨울까지도 繼續되었다.
[8]
9月 3日
以後 兩司와
弘文館
等으로부터 繼續 彈劾을 받았으며, 그의 伯父
흥인군
이최응 亦是 그를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다. 그는 곧
濟州道
濟州목
에 流配되었다.
9月 12日
에는 時任, 原任 大臣들이 그를 處罰할 것을 奏請하였다. 곧
圍籬安置
되었으며 以後
義禁府
, 삼사에서 繼續 그를 處刑할 것을 請하는 上疏가 올라왔다.
10月 26日
부터는
承政院
에서도 그를 處刑할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다.
1881年
(高宗 18)
陰曆 10月 28日
死藥
을 받고 賜死된다.
濟州道
濟州목
이 아닌
漢城
으로 押送되어
西大門
밖의 民家에서 四史 되었다는 說도 있다.
[1]
一說에는 高宗의 配慮로 私私되지 않고 身分을 바꾼 채 生存했다고도 傳해진다.
墓는 처음에
京畿道
楊州郡
에 安葬되었지만 첫 무덤자리 位置는 失傳되었다.
1907年
當時 연령군派 族譜에 依하면 그의 墓所는 洋酒에 있다고만 記錄되었으나 正確한 位置는 漏落되었으며, 뒤에 여러 番 移葬되었다. 나중에 後孫들에 依해 京畿道 화도읍의 흥원墓域에 安置되었다.
1899年
(光武 2)
9月 1日
그의 高祖父
思悼世子
가 王으로 追尊되어 章宗(莊宗)李 되고 法典에 따라 4代 後孫에게
9月 1日
부터
9月 29日
사이에 軍의 爵位를 내렸지만, 이재선은 이때 아무 爵位를 받지 못했다. 後에
1907年
(光武 10)
7月 4日
一進會
腸
이용구
(李容九)와
一進會
에서 李在善, 이연응, 안기영 等의 身元을 請하는 公函(公函)을 內閣에 올렸고
[9]
, 이는 高宗에게 傳達되었다.
1907年
(光武 10)
7月 15日
高宗에 依해 特別 赦免되어 罪案을 削除, 罪名을 取消하고 事件은 不文律에 부치라는 命을 내렸으며, 그에게는 任命狀을 돌려주었다.
[10]
[11]
理由를 알 수 없으나 한동안 그의 墓所는 그의 조카
의친왕
이강이 省墓하고 돌보았다.
純宗 卽位 後
1907年
(隆熙 1)
8月 17日
완銀群(完恩君)에 追封되었다.
[12]
이재선의 완銀群 追封 記事는
皇城新聞
과
帝國新聞
技士에 짤막하게 言及되기도 하였다. 그의 夫人 申氏는
韓日 合邦
以後에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재선의 寫眞이라고 傳해진 寫眞 두 張이 있는데, 한 張은 官服 차림으로 卓子에 한 팔을 기대고 앉은 寫眞이고, 다른 寫眞 한張은 그의 두 아들로 推定되는 少年이 함께 찍힌 寫眞이며 한 少年은 李在善이 直接 안고 있고, 다른 少年은 서 있다. 그러나 親王(親王)으로 追封되지는 못하였다.
그의 墓所는
서울
東大門
밖
往十里
에 移葬되었다가 墓地 管理가 되지 않아
1909年
(隆熙 3)
12月 7日
다시
興親王
과
이준용
에 依해
京畿道
시흥군
동면 시흥리로 移葬되었다.
[13]
이를 두고
皇城新聞
은 어찌 風水倍(風水地理를 보는 사람)의 말에 眩惑되었느냐는 評을 내리기도 했다.
[13]
그의 墓所가
시흥군
동면 시흥리(現.
서울特別市
衿川區
始興洞
)로 弛張되면서 夫人 평산申氏度
시흥군
동면
시흥리 2通 3號 近處로 移住하였다. 몇 次例 墓所가 移轉되었다가 後孫들에 依해 京畿道 화도읍 흥원墓域으로 安置되었다.
郡夫人 평산申氏는
1922年
무렵까지도 生存하고 있었다.
朝鮮總督府
李王職 資料와 순종실록 附錄에 依하면 郡夫人 평산申氏의 八旬을 記念하여 一金 150원을 하사했다는 內容이 나타난다. 郡夫人 평산申氏는 宗親인 이관용을 養子로 入寂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