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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硏究] 政權 後半期 危機管理者 우병우 靑瓦臺 民政首席 - ‘원샷원킬'의 軍旗班長 

‘팩트’를 地上 最高의 價値로 여겨 ‘칼날’ 別名도… 總選 出馬意思 접고 朴槿惠 大統領의 扈衛武士로 再武裝 

이영란 영남일보 서울取材本部 副局長

?大檢 中搜部 搜査企劃官 時節인 2011年 부산저축은행 不當引出 事件 搜査結果를 發表 中인 우병우 靑瓦臺 民政首席. 事情局面이 到來하면서 禹 民政首席의 行步에 視線이 集中된다.
執權 3年次를 始作한 朴槿惠 政府에서 最近 가장 ‘핫’韓 人物은 우병우 靑瓦臺 民政首席祕書官(48·硏修院 19期)이다.
뛰어난 能力에다 人物 좋고, 財産까지 많은 ‘40代 男子’가 大統領 親姻戚을 管理하고 大韓民國 司正機關의 컨트롤타워인 民政首席 자리를 꿰찼다. 類例가 드문 이 ‘스토리텔링’은 時期와 疾視, 그리고 부러움을 同時에 받을 素地가 多分하다. 이런 가운데 바닥으로 떨어진 朴槿惠 大統領이 支持率을 回復할 수 있는 樂觀的인 變數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體感景氣는 冷氣流가 흐르고, 公務員 年金改革 等 各種 改革課題는 첫 단추를 꿰기에도 벅차 보인다. 權力과 政治의 屬性은 冷酷하다. 來年 總選을 앞두고 새누리당 內에서도 支持率이 떨어진 朴 大統領과 距離를 두려는 雰圍氣가 歷歷하다. 朴 大統領 때문에 國會議員 배지를 단 많은 ‘박근혜 키즈’조차도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를 일이다. 民情祕書官 任命 8個月 만에 垂直 昇進한 歷代 最年少級 禹 民政首席에게 視線이 모아지는 理由가 여기 있다.

少年登科(少年登科) 公職者들이 흔히 그래왔듯이 禹 首席도 ‘키 큰 楊貴妃 症候群’의 犧牲者가 될까? 키 큰 楊貴妃 症候群(Tall poppy syndrome)이란 키가 커서 돋보이는 楊貴妃를 싹둑 잘라내는 現象을 일컫는 말로 自己보다 빨리 出世할 境遇 잘되는 꼴을 못 보고 끌어내리려는 世態를 빗댄다. 或은 ‘리틀 金淇春’으로 記憶될 것인가? 아니면 앞서의 民政首席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前人未踏의 리더십을 發揮해 朴槿惠 政府의 忠直한 扈衛武士가 될 것인가?

禹 首席은 自身의 行步와 關聯해 “(이런저런 誤解가 있어도)인터뷰를 안 하는 것이 (祕書의) 本分”이라며 “사람은 行跡으로 말하는 것이다. 조용히 大統領을 모실 것”라고 말했다.

普通 民政首席이라고 하면 ‘司正機關을 總括하고 民心을 正確히 大統領에 傳達하는 일을 한다’고 定義된다. 이 속에는 ‘國政의 모든 部分에서 大統領을 補佐하는 사람’이라는 意味를 품고 있다. 政治·經濟·社會·文化 모든 面에서 民情首席이 聯關되지 않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大統領의 檢察 序列, 期數 文化 흔들기


?지난해 末 ‘정윤회 文件 波動’ 等으로 困辱을 치른 靑瓦臺는 祕書室長, 首席祕書官 等 主要 補職에 對한 물갈이 人事를 통해 雰圍氣 刷新을 꾀하고 있다.
現在 民政首席은 民情祕書官, 公職紀綱祕書官, 法務祕書官, 民願祕書官 等 4名의 祕書官을 거느린다. 이들 祕書官 밑에는 檢察·警察은 勿論이고, 監査院·金監院·公正委·기무사·行自部 等 事情 關聯機關의 最精銳 人力이 派遣된다. 勿論 지난해 이른바 ‘정윤회 文件’ 流出事件으로 民政首席室의 體面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고, 組織의 能力에 對해서도 疑懼心을 불러일으킨 것도 事實이다. 그럼에도 그 役割의 重要性이나 ‘파워’에 對해 異議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政府에서 民政首席을 지낸 한 人士는 民政首席이라는 자리를 이렇게 說明했다. “民政首席으로 就任하고 보니, 밖에서 생각할 때보다 훨씬 業務가 重要했다. 大統領을 至近에서 補佐해서 最高의 決定이 나오도록 해야 하기에 法務·檢察뿐 아니라 經濟·外交 等 國政 全般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자면 情報도 알아야 해서 한時도 緊張을 늦출 수 없었고, 渾身의 힘을 다하지 않으면 배겨나질 못한다.” 非理 剔抉에 나서더라도 經濟 等 社會 全般에 미칠 影響 等을 考慮해야 하므로 國政에 미치는 波長을 놓고 苦悶하고 討論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人事는 나아가 “民政首席의 職分에 專念하자면 親庭 ‘檢察’은 싹 지워버려야 한다”면서 “原隊復歸를 꿈꿔서는 될 일도 안 된다”고 强調했다. 特히 그는 “大統領이 首席과 直接 疏通하느냐, 間接 疏通하느냐는 것은 어느 것을 더 效率的으로 보느냐 하는 大統領의 判斷과 스타일의 問題”라고 前提하면서 “나는 祕書室長을 經由하지 않고 大統領에 늘 直接 보고 했다”고 밝혔다. “가끔은 祕書官을 帶同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보다 디테일한 報告가 必要하기도 하고, 또 祕書官들에게 自矜感을 심어주기 위한 配慮 次元이기도 했다.”

이처럼 莫重한 자리에 朴 大統領은 어째서 40代 나이의 우병우 民政祕書官을 곧장 首席으로 승진시켰을까. 與圈 周邊에서는 그의 業務 力量과 性品이 亂脈相을 드러낸 公職紀綱을 다잡는 데 적합하다는 判斷의 産物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民政首席 人事를 앞두고 當初 政治權과 檢察 쪽에서는 “檢察總長과 旗手와 같거나 높은 人士가 拔擢될 것”이라는 展望을 내놓았다. 아울러 ‘民政首席이라면 적어도 檢事長 出身은 돼야 한다’는 暗默的인 가이드라인이 그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檢査場을 거치지 않은 40代 民政首席의 登場이 檢察과 政治權에 던진 衝擊은 豫想보다 훨씬 컸다.

禹 首席이 業務를 協議해 나갈 黃敎安(58) 法務部長官이 司法硏修院 13期, 金鎭台(63) 檢察總長은 硏修院 14기다. 나이는 禹 首席이 두 사람보다 열 살 넘게 어리다. 前任人 김영한 前 首席(58·硏修院 14期)과 以前의 홍경식 前 民政首席(64·硏修院 8期)과 比較해도 禹 首席은 檢察 先輩들에게는 껄끄러운 存在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禹 首席은 檢事長 昇進 門턱에서 苦杯를 마신 뒤 辭表를 내고 辯護士로 開業한 前歷이 있다.

朴 大統領 周邊의 說明에 따르면 禹 首席은 檢査場을 거치지 못했기에 拔擢됐을 수도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가 檢査場을 거치지 않은 게 朴 大統領에게는 何等 問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朴 大統領은 徹底한 序列과 期數 文化로 옥죄인 檢察 組織을 흔들어놓을 必要가 있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했던 것으로 보인다. 現 政府 첫 民政首席인 곽상도 前 首席(56·硏修院 15期)도 蔡東旭 當時 檢察總長(56·硏修院 14期)이나 黃 長官보다 後輩였고, 檢査場을 거치지 못했다는 事實이 이런 推論을 뒷받침한다. 마치 盧武鉉 前 大統領이 서울高等法院 判事를 끝으로 公職을 떠나 辯護士를 하던 萬46歲의 女性, 강금실을 法務長官에 電擊 起用해 ‘판’을 흔들어 놓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民情祕書官으로서 보여준 禹 首席의 力量이 朴 大統領을 洽足하게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해 末부터 國政을 混亂에 빠뜨린 靑瓦臺 文件 流出 事件과 김영한 前 民政首席의 抗命性 辭退 波紋 等으로 民政首席室은 論難의 震源地로 轉落했다. 任期 初盤부터 人事檢證 失敗가 繼續됐다. 하지만 朴 大統領의 先制 發言으로 ‘가이드라인’ 論難을 불러왔던 ‘文件 流出’ 搜査는 靑瓦臺 立場에서 더 以上의 ‘惡材’ 없이 無難히 마무리됐다는 評價를 받았다. 이와 關聯해 當時 靑瓦臺 안팎에서는 “김기춘 祕書室長이 禹 首席의 業務力量을 높게 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의로운 社會를 만들겠다던 唐突한 高校生


?2009年 當時 민주당 議員들이 이인규 大檢 中搜部長, 우병우 中搜 1課長 等 노무현 前 大統領 搜査 責任者들을 被疑事實 公表罪로 告發하는 告發狀을 서울 南部地檢에 接受하고 있다.
親庭인 檢察의 關係者들은 禹 首席이 明晳한 頭腦에다가 企劃力·搜査力·突破力·推進力 等을 두루 갖춘 人物이라고 評한다. 特히 搜査에 關한 한 能力이 卓越하다는 데 理論이 거의 없다. 性品과 關聯해서는 ‘私心이 介入되지 않는 原則主義者’, ‘剛直한 性格’, ‘妥協이 안 되는 性向’ 等의 評價가 따른다.

그는 로비와 妥協하지 않는 걸로 定評이 나있다. 代表的인 例가 2003~2004年 서울中央地檢 特別搜査2部가 國內 某 大企業 經營權 承繼 疑惑事件을 搜査할 때다. 이 會社는 特需2部 部長檢事부터 平檢事까지 모든 人脈을 動員해 사람을 붙였다고 한다. 唯獨 副部長이던 禹 首席만 搜査 中 이 會社 사람을 絶對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關聯者들의 입에서 입으로 膾炙된다.

또 大邱地方檢察廳(大邱地檢) 特殊部長 時節 大邱 夏季유니버시아드大會 廣告 非理 事件도 마찬가지다. 地域에서 相當한 人脈·學脈을 자랑하던 강신성일 前 議員과 當時 與黨(열린우리당) 所屬의 배기선 議員을 搜査하면서 自身에게 쏟아진 온갖 外壓에도 조금도 흔들리는 氣色을 보이지 않았다고 地域에서는 말한다. 서울中央地檢 金融租稅調査2部長 時節 김평수 前 韓國敎職員共濟會 理事長 拘束 過程은 執拗하다 못해 至毒한 面貌를 보여준다. 拘束令狀이 두 番이나 棄却된 金 前 理事長을 半 年 以上 追加 搜査를 통해 結局 배임수재 嫌疑로 세 番째 令狀에서 拘束시켰다.

慶北 烽火가 故鄕인 禹 首席은 지난 1967年 敎鞭을 잡았던 우영구 氏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榮州에서 敎師로 在職한 아버지를 따라 그도 줄곧 榮州에서 學窓生活을 보냈다. 榮州에서 初等學校, 中學校를 卒業했으며, 영주고에 首席으로 進學했다. 그의 將來希望은 ‘檢査’였다. 禹 首席의 高3 擔任이었던 한병태 前 영주고 校長은 다음과 같은 記憶을 되살렸다. “郵 首席에게 왜 檢査를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그는 ‘정의로운 社會와 不正과 腐敗가 없는 國家를 만들겠다’고 唐突하리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참 獨特한 學生으로 記憶한다.”

차정일 特檢 “禹柄宇는 훌륭한 檢事”


?박근혜 大統領이 1月 26日 靑瓦臺에서 새해 첫 首席祕書官會議에 앞서 우병우 民政首席(왼쪽에서 넷째) 等 새로 任命된 首席, 特報들과 茶를 마시며 人事를 나누고 있다.
高3 時節 그는 模擬 修能試驗에서 늘 全國 100位 안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修能試驗에서 53位를 하여 서울對 法대로 進學했고, 法大 3學年에 在學 中이던 1987年 司法考試 最年少 合格의 榮譽를 누렸다. 이때가 滿 20歲다. 한 前 校長은 當時를 다음과 같이 記憶했다. “우리 班은 7時30分까지 登校를 勸奬하였고, 일찍 오는 順으로 自己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게 했다. 禹 首席은 1年 동안 늘 앞에서 셋째 줄 中央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視力이 떨어져 너무 멀리 앉거나 너무 가까이 앉으면 精神이 集中되지 않는다고 答하더라.”

禹 首席은 2008年에 作故한 以上달 器興컨트리클럽 및 정강중機·政綱建設 會長의 둘째 딸과 結婚해 두 아들을 뒀다. 相續財産에 힘입어 지난해 420億원이 넘는 財産을 登錄, 公職者倫理法에 따라 財産이 公開되는 高位公職者中 財産이 가장 많은 人物로 꼽혔다.

學校生活과 마찬가지로 檢事 時節에도 톡톡 튀는 行步를 보였다. 서울中央地檢에서 檢査生活을 始作한 禹 首席은 서울중앙지검 刑事4部와 刑事6部를 거쳐 大邱地檢 慶州支廳, 昌原地檢 密陽支廳, 濟州地檢 等에서 勤務했다(1990∼1998). 平檢事 時節 아파트 監理와 關聯해 非理를 저지른 慶州市 建築課長 等을 拘束했다.

비슷한 時期 서울 市內 廢水·騷音·振動을 輩出한 環境汚染 業體 55곳에 이어 細菌廢水를 放出한 을지병원·白病院·車病院·중대附屬病院을 摘發했다. 特히 김영삼 政府 時節에는 경주대 設立者인 김일윤 前 민자당 議員을 學校公金 53億원 橫領 嫌疑로 拘束해 注目받았다(1993).

禹 首席은 法務部 國際法務과(1999)를 거쳐 2001年 서울 東部支廳 刑事6部에 配置됐다. 이때 映畫配給을 代價로 金品을 收受한 直配映畫社의 前·現職 代表를 拘束했다. 2001年 12月부터 송해운·윤대진 檢事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特檢’(차정일 特檢) 特別搜査官 3人坊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노무현 政府 時節 ‘對北送金 特檢’과 함께 가장 成功한 特檢으로 評價받는 이용호 게이트 特檢은 當時 신승남 檢察總長의 동생인 승환 氏를 拘束함으로써 申 總長의 早期退陣을 불렀다. 차정일 特檢이 禹 首席을 두고 “매우 훌륭한 檢事”라고 評價한 記錄이 있다.

禹 首席은 2002年 서울 東部支廳 副部長 檢事로 昇進한 뒤 春川地檢 寧越支廳長, 大邱地檢 特殊部長, 法務部 法曹人力政策課長, 서울중앙지검 金融租稅 調査2部長(2002- 2008)으로 일하며 ‘特殊通 檢事’의 길을 걷기 始作했다. 이때 ▷카드깡을 通한 강원랜드 賭博資金 提供 ▷강원랜드 메인 카지노 進入道路 補强工事 非理 ▷詐欺賭博 게임 ▷三星 商用車 技術資料 海外流出 試圖 ▷이정일 民主黨 議員 相對 候補 盜聽機 設置 疑惑 ▷大邱U大會 屋外廣告物 事業者 選定 非理 ▷蠶室 野球場 廣告物 隨意契約 賂物收受 事件 等을 搜査했다.

그는 삼성그룹의 ‘에버랜드 轉換社債 歇값 發行事件 搜査’에 參與해 頭角을 나타냈다. ‘신상규(서울중앙지검 3次長)-蔡東旭(特殊2部長)-우병우·박용주’로 이어지는 搜査陣은 같은 해 12月 業務上 背任의 公訴時效(7年)를 하루 앞두고 허태학·박노빈 前·現職 에버랜드 社長을 電擊 起訴했다. 이러한 分離起訴는 나중에 ‘1審보다 더 무거운’ 抗訴審 有罪 判決을 이끌어냈다(2007년). 當時 公訴時效가 끝나기 前에 轉換社債 歇값 發行에 直接 關與한 一部 人士를 標本으로 起訴해 公訴時效를 停止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가 禹 首席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우병우 檢事가 搜査의 구슬을 뀄다”라는 評價가 나왔다.

禹 首席은 서울中央地檢 金融租稅調査2部長 時節이던 2008年 7月 李明博 大統領의 妻四寸 김옥희 氏의 公薦 請託 金品收受 事件을 搜査했다. 이명박 政權이 公式 出帆한 지 5個月 만에 일어난 親姻戚 事件이었다. 그는 한나라당 比例代表 公薦을 미끼로 30億餘 원을 받은 嫌疑(特定經濟犯罪加重處罰法上 詐欺)로 같은 해 8月 김옥희 氏를 拘束했다.

智力, 財力에 탄탄한 經歷까지 갖춘 禹 首席도 발목을 잡히는 때가 있었다. 부러움의 對象이자 口舌을 부른 ‘아내의 돈’, 그리고 一線 檢事로서의 絶頂期에 맞닥뜨린 盧武鉉 前 大統領 搜査였다.

엄청난 財産과 盧武鉉 搜査로 挫折 겪기도

禹 首席이 盧 前 大統領을 만난 때는 2009年. 그는 當時 大檢 中搜部 搜査1課長이었다. 盧 前 大統領은 그의 夫人과 조카사위 等이 박연차 태광實業 會長으로부터 總 600萬 달러를 받았다는 嫌疑를 받고 같은 해 4月 30日 大檢 中央搜査部(이인규 部長)에 召喚돼 늦은 밤까지 調査를 받았다. 當時 大檢 廳舍 11層에 마련된 特別調査室에서 前職 大統領을 直接 調査한 檢事가 그였다. 그는 미리 準備한 200餘 個의 質問을 가지고 訊問했다. 그런데 召喚 調査한 지 20餘 日 뒤인 5月 23日 盧 前 大統領이 故鄕의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生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 뒤 禹 首席은 자리를 옮겨 大檢 犯罪情報企劃官과 搜査企劃官을 지내면서 2011年 부산저축은행 事件 搜査를 指揮했다. 以後 仁川地檢 富川支廳長과 法務硏修院 硏究委員을 거친 뒤 지난 2013年 5月 스스로 檢察을 떠났다. 지난 2012年과 2013年 두 해에 걸쳐 檢事長 昇進에 失敗하면서 내린 決定이었다.

‘쿨’하게 辭職書를 던졌지만 檢事長(次官級 檢事)에는 오르지 못한 喪失感은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檢察 內部通信網人 ’李-프로스‘에 짧은 글을 올렸다. “23年間 檢事로 살아오면서 한 番도 다른 길을 걸어본 적도, 돌아본 적도 없다. 檢事로서 보람을 느낀 적도 많고 實體的 眞實을 파헤쳐 法과 原則을 處理해야 한다는 義務感에 힘겨운 적도 많았다. 이제 보람은 가슴에 품고 짐은 내려놓고자 한다.”

巷間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의 檢事長 脫落에는 ‘盧武鉉 前 大統領 搜査檢事’였다는 點 보다는 ‘너무 많은 財産’이 더 큰 惡材로 作用했다는 見解도 있다. 法務部의 前職 高位級 人士는 “權力機關인 檢事가 財産까지 그렇게 많다면 우리 社會에서는 疾視의 對象이 될 수밖에 없다”며 財産이 걸림돌이 됐을 可能性에 注目했다. 또 一角에서는 盧 前 大統領에 對한 檢察搜査에 對해서도 새로운 解釋을 내놓는다. 檢察을 오래 出入한 한 記者는 이렇게 말했다. “當時 禹 首席은 實務者라고 보면 되는데, 搜査라인을 綿綿히 살펴보면 김경한 法務長官, 임채진 檢察總長, 문성우 大檢次長, 이인규 中搜部長에 이르기까지 모두 '選民意識’李 强한 企劃通이다. 特히 이인규 部長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剛하게 搜査를 몰아친다는 評價를 받는 사람이다. 禹 首席도 數詞를 毒하게 하는 便이고. 같은 類型의 檢事들로 팀을 꾸리면 외눈박이가 된다. 盧 前 大統領의 搜査가 그렇게 된 것에는 여러 原因이 있었겠지만, 强性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런 結果가 나왔다고 본다. 搜査라인에 搜査通度 있고 企劃通 參與해서 相互 補完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辯護士로 말을 갈아탄 禹 首席은 母校가 있는 영주의 在京 鄕友會에 얼굴을 내미는 等 次期 總選을 念頭에 둔 듯한 行步도 보였다고 한다. 實際로 얼마 前까지만 해도 榮州 地域이나 法曹界에서는 “우병우 辯護士가 民情祕書官에서 물러나면 總選에 出馬한다”는 얘기가 公公然하게 나돌았다. 그가 民政首席에 오르면서 次期 總選은 접는 雰圍氣로 간다. 다만, 靑瓦臺를 떠나는 等의 變數가 發生하면 그의 出馬說은 또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두 次例나 檢事長 昇進에서 挫折했던 禹 首席이 朴槿惠 政府에서 華麗하게 復活하자 이런저런 口舌數가 따랐다.

優先은 ‘直報’ 論難이다. 물러난 金淇春 祕書室長이 上官인 김영한 前 民政首席을 제치고 當時 禹 民情祕書官으로부터 ‘直報’를 받으며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이는 김영한 前 民政首席이 私席에서 “在任 7個月 동안 제대로 朴 大統領에게 對面報告를 하지 못했다”라고 言及한 事實과 함께 風波를 불러왔다. 이와 關聯해 朴 大統領이 首席祕書官으로부터 直接 對面報告를 받지 않고 祕書室長으로 하여금 聚合, 報告토록 하는 現行 시스템의 問題라는 批判이 따랐다.

또 다른 論難은 最近 檢察 人事에서 特定 地域과 特定 人脈이 要職을 獨食했으며, 우병우 라인이 前進 配置됐다는 批判이다. 檢事들이 ‘嶺南 메이저리그’와 ‘비(非)嶺南 마이너리그’로 나뉘며, 大邱·慶北 出身이 아니면 現 檢察에서 ‘出世’가 어렵다는 뉘앙스의 칼럼도 있었다. ‘TK 要職 獨食’ 批判은 김수남 大檢察廳 次長과 박성재 서울중앙지검長이 TK 出身이라는 點에서 비롯됐다. 檢察 指揮部의 核心 要職에 TK 出身을 앉혀 靑瓦臺가 檢察 掌握을 祈禱한다는 것이다.

‘우병우 師團’의 大躍進

靑瓦臺와 法務部, 檢察 指揮部는 相當히 부풀려진 診斷이라는 反應을 보였다. 박성재 地檢長 起用과 김수남 次長이 서울中央地檢長에서 大檢 次長으로 移動한 것은 PK(釜山·慶南) 出身인 金鎭台 檢察總長의 意中이 反映된 것으로 알려졌다. TK 獨食論은 朴槿惠 政府 2年間 在職한 民政首席 4名 中 3名이 모두 TK 出身이라는 點, 直前 民情首席室 所屬 祕書官 4名이 모두 TK로 채워지면서 더욱 增幅됐다. 禹 首席이 斷行한 이番 靑瓦臺 人事에선 TK 出身이 오히려 줄었다.

이番 檢察 人事 때 檢事長 昇進者 9名 中에서도 TK 出身은 노승권 大邱高檢 次長 1名뿐이다. 反面 서울과 湖南 出身이 各 3名이고, 江原·慶南 出身이 各 1名이다. ‘우병우 민정首席 라인’李 躍進했다는 批判은 최윤수 大檢 反腐敗部 選任硏究官이 特別搜査를 指揮하는 서울중앙지검 3次長으로, 조상준 大檢 搜査指揮 誇張(옛 中搜部 課長)이 서울中央地檢 特別搜査2部長으로 移動한 것을 두고 나온 얘기다. 崔 次長과 禹 首席이 서울大 法大 84學番 同期, 禹 首席이 大邱地檢 特殊部長 때 조 部長이 部下 檢事였다는 게 主要 根據다.

하지만 檢察의 人事 業務를 잘 아는 前職 한 檢事는 “大部分이 옆으로 한 칸씩 移動한 人事일 뿐, 누가 人事를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狀況”이란 觀戰評을 내놓았다. 서울중앙지검 3次長 자리를 놓고 崔 次長과 막판까지 競合했던 권익환 城南支廳長은 過去 大邱地檢 特殊部에서 禹 首席과 함께 勤務한 적이 因緣이 있지만 落點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番 人事에서 ‘特殊통’ 人士들이 搜査라인에 前進 配置되면서 大大的인 事情이 進行될 것이란 展望이 적지 않았다. 最近 이완구 總理 對國民談話와 포스코建設 非理 搜査 等이 맞물리면서 이런 展望은 더욱 心證을 굳혀간다. 李 總理는 “不淨腐敗 剔抉은 國家 命運이 걸린 課業”이라며 高强度 事情을 豫告했다. 여기엔 朴 大統領의 뜻이 담겨 있다고 政府와 與圈 關係者들은 말한다.

朴 大統領은 執權 初부터 이름은 달리했지만 ‘腐敗와의 戰爭에 銃대를 直接 메 왔다. 政權 出帆 첫해 ‘原電 非理와 철도-문화재 非理 剔抉’에 나서면서 ‘非正常의 正常化’를 强度 높게 注文했고, 전두환 前 大統領 追徵金 還收, 大企業 祕資金 剔抉 等이 뒤따랐다. 執權 3年次를 맞아 李秉岐 祕書室長-우병우 민정首席 라인업이 갖춰지면서 大大的인 國家紀綱 確立에 나선 것이라는 分析이다. 政治權 한 關係者는 “세월호 事件과 文件 波動 等 여러 가지 難題로 政局이 어수선했는데 本格的으로 勝負手를 띄워 雰圍氣를 反轉하겠다는 意志로 보인다”고 말했다.

禹 民政首席의 存在는 司正局面의 緊張感을 增幅시키는 要因이기도 하다. 檢事 時節의 搜査 스타일을 때문이다. 禹 首席은 事件을 맡으면 事實을 밝히는데 汨沒하고, 左顧右眄하지 않고 앞으로 쭉 나가는 便이다. ‘팩트’를 地上 最高의 價値로 여긴다. 그래서 特殊搜査의 達人이라는 評價를 받았고, ‘칼날’이라는 別名도 얻었다. 그런데 銅錢의 兩面처럼 그가 일을 잘한다는 點에는 누구도 異議를 달지 않지만, 같은 支店에서 憂慮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方向이 잡히면 過度하게 물불 안 가리는 搜査를 한다”거나 “너무 直線的인 性格으로 配慮心이 없다” 또는 “너무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바른 性情, 뛰어난 能力, 차가운 視線


?박근혜 大統領이 3月 16日 靑瓦臺에서 우병우 民政首席에게 任命狀을 授與하고 있다.
巷間에서는 禹 首席을 ‘리틀 金淇春’이라고도 부른다. 金淇春 前 祕書室長은 檢察寵章으로 在任 時 ‘先嚴嗅官(先嚴後寬:嚴格함과 寬大함을 結合해 大事를 이룬다)’을 强調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嚴格하다는 點에서 닮았다. 그런데 法曹界 人士들은 弄半眞半으로 “두 사람이 ‘先嚴’했던 것은 分明한데, ‘嗅官’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꼬집는다.

國民들이 생각하는 좋은 檢事는 眞實을 밝히려는 意志와 能力은 基本이고, 嚴格한 가운데 부드러움을 發揮하는 사람이다. 弱者에게 眞情으로 따뜻한 ‘웃음’을 보낼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人間과 社會에 對한 깊은 理解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이 部分에 對해 不足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바른 性情에 뛰어난 能力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과 社會를 向한 視角이 너무 차갑다는 것이다.

歷代 政府에서 일 잘한 民政首席으로 꼽히는 한 人士는 “여러 곳에서 派遣 나온 대단히 優秀한 職員들이 모인 民政首席室은 어느 部署보다 팀워크를 이루기가 어려운 곳”이라며 “嚴格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自律과 責任이라는 틀 아래 풀어나가는 柔軟性도 發揮할 必要가 있다”고 傳했다. 特히 이 人事는 “民政首席은 檢察 等 司正機關과 疏通을 많이 해야 한다”며 “檢察을 掌握하려는 생각은 禁物”이라고 助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前職 民政首席은 禹 首席에게 <명장의 코드="">라는 冊의 一讀을 勸했다. 지난 2012年 發刊된 이 冊은 그랜트, 마셜, 아이젠하워, 맥아더 等 名將들의 成功的인 리더십을 分析했다. 要諦는 ▷私心 없는 마음가짐 ▷決定을 내리면서 責任을 받아들이는 姿勢 ▷直感과 六感을 기르고 發揮하기 ▷올바른 批判과 反對 意見을 받아들이기 ▷끊임없는 讀書와 硏究 ▷部下에 對한 配慮 ▷委任할 줄 아는 能力 等이다. 著者가 가장 强調하는 德目은 ‘人品’이다.
- 이영란 영남일보 서울取材本部 副局長

201504號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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