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執權) 2년(年) 이내(以內)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
을 내걸고 시작(始作)했던 DJP연합(聯合)은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 이행(履行) 유무(有無)와
햇볕정책(政策)
에 대(對)한 의견(意見) 차이(差異)로 집권(執權) 2년차(年次)인
1999년(年)
부터 흔들리기 시작(始作)했다.
[23]
의외로(意外로) 무시(無視)되는 측면(側面)은
1999년(年)
초(初)만 해도 양당(兩黨)은 표면적(表面的)인 부인(否認)에도 불구(不拘)하고 지속적(持續的)으로 합당(合黨)을 추구(追求)했다는 점(點)이다.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구도(構圖) 내(內)에서는 합당(合黨) 없이는 선거(選擧)에서 불리(不利)하다는 게 결정적(決定的)인 이유(理由)였다. 지분율(持分率)은 당연히(當然히) 1:1로, 당세(黨勢)를 고려(考慮)하면 자민련에게 절대적(絶對的)으로 유리했다.
#
그 증거(證據)로 국민(國民)회의는 국회(國會) 총(總) 의석(議席)을 273석(席), 특히(特히) 지역구(地域區)를 253석(席)에서 227석(席)으로 줄이기 위(爲)한
한나라당(한나라黨)
과의 지역구(地域區) 협상(協商)에서도 자민련과의 합당(合黨)을 전제(前提)로 협상(協商)에 임(臨)했다.
그러나 7월(月)에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
과
김종필(金鍾泌)
전(前) 총리(總理)가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 유보(留保)에 합의(合意)하자
자민련
내(內)에서 엄청난 반발(反撥)이 터져나왔고 9월(月)로 예정(豫定)되었던
국민회의의 재창당(再創黨)
도 합당(合黨)을 고려(考慮)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結局) 자민련의 일탈(逸脫)은 가속(加速)되었다. 심지어(甚至於) 12월(月)에는 김종필의 최측근(最側近)으로 DJP연합(聯合) 성사(聖事)의 일등공신(一等功臣)
[24]
이었던 김용환 부총재(副總裁)가 고성(高聲)이 오가는 면담(面談) 끝에 탈당(脫黨)하는 상황(狀況)
[25]
까지 벌어졌다.
양당(兩黨) 사이에 감정(感情)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結局)
1999년(年)
말(末) 국민(國民)회의와 자민련의 합당(合黨)은 완전히(完全히) 무산(霧散)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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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국민회의
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재창당(再創黨)에 나서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갈등(葛藤)은 점점(漸漸) 더 커져서
2000년(年)
제(第)16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선
새정치국민회의
의 후신(後身)인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과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의 후보(候補) 연합(聯合) 공천(公薦)이 무산(霧散)되었고 전국(全國) 대부분(大部分)의 지역구(地域區)에 두 정당(政黨)이 동시(同時)에 후보(候補)를 내보내는 사태(事態)가 벌어졌다.
[26]
이 선거(選擧)에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은
수도권(首都圈)
과
호남(湖南)
,
강원도(江原道)
,
제주도(濟州道)
에서 승리(勝利)하고 자민련의 텃밭이었던
충청도(忠淸道)
에서도 어느 정도(程度) 선전(宣傳)하면서 의석(議席)을 늘렸다. 반면(反面)
자민련
은 非
충청도(忠淸道)
지역(地域)에선 보수표(保守票)를 모조리
한나라당(한나라黨)
에 뺏기면서 사실상(事實上) 충남(忠南) 지역(地域) 정당(政黨)으로 전락(轉落)했고 그나마 될 만한
선거구(選擧區)
도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과의 연합(聯合) 공천(公薦) 무산(霧散)으로 인(因)해서
한나라당(한나라黨)
과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에게 빼앗겼다. 심지어(甚至於) 본거지(本據地)였던 충청도(忠淸道)에서도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한나라당과 박빙(薄氷)의 승부(勝負)를 보이면서 기존(旣存) 50석(席)에서 1/3 수준(水準)으로 줄어든 단(單) 17석(席) 확보(確保)에 그쳐
원내교섭단체(院內交涉團體)
구성(構成)에도 실패(失敗)했다. 사실(事實)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
충청남도(忠淸南道)
과 달리
충청북도(忠淸北道)
는 애초(애初)부터 자민련이 큰 힘을 못 쓰던 지역(地域)이었다.
그러나 DJP연합(聯合)의 복원(復元)과 유지(維持)를 희망(希望)했던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
은 2000년(年) 5월(月) 22일(日) 직전(直前) 연말(年末)
한나라당(한나라黨)
을 탈당(脫黨)해 자민련에 입당(入黨)한
이한동(李漢東)
총재(總裁)를
국무총리(國務總理)
로 지명(指名)하며 연정(聯政)의 가능성(可能性)을 재타진했고, 그해 12월(月) 30일(日)에는
민주당(民主黨)
의원(議員)들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이른바
의원(議員) 꿔주기
까지 하면서 자민련이 다시
원내교섭단체(院內交涉團體)
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7]
이에 자민련도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名譽總裁)가 2001년(年) 1월(月) 8일(日) 청와대(靑瓦臺) 단독만찬(單獨晩餐)에 참여(參與)하면서 공식적(公式的)으로 연정(聯政)에 복귀(復歸)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을 합(合)쳐도 원내(院內) 과반수(過半數)를 충족(充足)하지 못했던 터라 2석(席)을 차지한
민주국민당
에까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處地)였고 민국당
한승수
의원(議員)을
외교부장관(外交部長官)
으로 임명하면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
민주국민당
3당(黨) 연합(聯合)과
무소속(無所屬)
정몽준(鄭夢準)
전(前) 의원(議員)으로 138석(席)을 확보(確保)하여 간신(艱辛)히 원내(院內) 과반수(過半數)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과반수(過半數)만 채웠을 뿐 제1야당인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133석(席)을 차지하면서
개헌저지선(改憲沮止線)
을 딱 차지하고 버틴 탓에
김종필(金鍾泌)
과
자민련
의 숙원(宿願)이었던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은 끝내 무산(霧散)되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과 자민련이
햇볕정책(政策)
으로 대변(代辯)되는 대북(對北) 유화책(宥和策)과 관련(關聯)해 시각차(視角差)를 보이기 시작(始作)하면서 결국(結局) 자민련이
2001년(年)
9월(月) 3일(日)
임동원
전(前)
통일부장관(統一部長官)
해임안(解任案)에 가담(加擔)해 DJP연합(聯合)은 최종적(最終的)으로 무너졌다. 막 입당(入黨)해 잠깐 자민련의 바지총재(總裁)로 있었던 이한동은 아예 자민련에서 제명당하고
[28]
무소속(無所屬)으로 남은 총리(總理) 임기(任期)를 채웠다.
그리고 김대중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뜻에 따라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의원(議員)들은 DJP연합(聯合)이 끝나자 자민련을 탈당(脫黨)해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復歸)하면서 자민련은 다시 원내(院內) 비교섭단체(非交涉團體)로 내려앉았다. 이 후(後)
제(第)16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시즌이 다가왔을 때,
한나라당(한나라黨)
은 JP를 포섭(包攝)하기 위해 애썼지만 과거(過去) 국무총리(國務總理) 시절(時節) 인준안(認准案) 거부(拒否)와 의원(議員) 빼가기로 한나라당에 큰 반감(反感)을 가졌던 JP는 끝내 중립(中立)을 선언(宣言)하며 이회창을 외면(外面)하였다.
[29]
자민련은
2004년(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 탄핵소추(彈劾訴追) 및 심판(審判)
에 가담(加擔)했다가
17대(代) 총선(總選)
에서 4석(席)으로
폭망(폭亡)
했고, 그나마 남은 의원(議員)들도 새로 창당(創黨)한
국민중심당(國民中心當)
으로 옮기면서 대표(代表)였던
김학원
만(萬) 남았으며, 이후(以後) 해산(解散)을 선언(宣言)하면서 남은 사람들은
한나라당(한나라黨)
에 흡수(吸收)되었다. 자민련이 몰락(沒落)하면서
지역정당(地域政黨)
이 사라진
충청도(忠淸道)
는 이후(以後) 본격적(本格的)인
캐스팅보트
지역(地域)이 되었고 전라도(全羅道)는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현역(現役)이었던 시절(時節)보다는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에 대(對)한 지지세(支持勢)가 약(弱)해졌다.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