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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聯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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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聯合)
DJP 연합 선언
1997년(年) 11월(月) 4일(日) , 공동합의문(共同合意文)을 타결(妥結)한 뒤 악수(握手)하는 김대중(金大中) 새정치국민회의 총재(總裁)와 김종필(金鍾泌)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총재(總裁)
1 . 개요(槪要) 2 . 배경(背景) 3 . 과정(過程)과 진통(陣痛) 4 . 연합(聯合) 성사(成事) 5 . 정권교체(政權交替) 6 . 갈등(葛藤)과 해체(解體) 7 . 관련(關聯) 항목(項目)

1. 개요(槪要) [편집(編輯)]

1997년(年) 제(第)15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당시(當時) 김대중(金大中) 을 필두(筆頭)로 한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金鍾泌) 을 필두(筆頭)로 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이 공동(共同) 여당(與黨)의 목표(目標)를 가지고 결성(結成)한 연합(聯合). 이 연합(聯合)이 성공(成功)하면서 1997년(年) 에 출범(出帆)한 국민(國民)의 정부(政府) 제(第)6공화국(共和國) 최초(最初)이자 현재(現在)까지 유일(唯一)한 연립정부(聯立政府) 로 남아 있다. [1]

대선(大選) 당시(當時) 김대중은 대통령(大統領), 김종필은 책임총리(責任總理)를 맡으며 임기(任期) 2년차(年次)에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을 하여 임기(任期) 후반(後半)은 김종필이 내각제(內閣制) 하의(下衣) 정부수반(政府首班)으로서 국정(國政)을 책임(責任)을 질 것이라고 공약(公約)했지만 현실화(現實化)되지는 않았다. [2]

김대중(金大中) 의 이니셜인(人) 'DJ'와 김종필(金鍾泌) 의 이니셜인(人) 'JP'를 합쳐서 생겨난 용어(用語)로 나중에는 세(世)가 약(弱)하긴 했지만 박태준 까지 이 연합(聯合)에 합류(合流)하면서 호남(湖南) 의 김대중(DJ) + 충청(忠淸) 의 김종필(金鍾泌)(JP) + TK 의 박태준(TJ)을 의미(意味)하는 'DJT연합(聯合)'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구도상(構圖上) DJP연합(聯合)이 정설(定說)이다.

불과(不過) 7년(年) 전(前)에는 김종필(金鍾泌) 공화계(系) 를, 박태준 노태우(盧泰愚) 를 대신(代身)해 민정계(系) 를, 김영삼(金永三) 민주계(系) 를 대표(代表)하여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신민주(新民主)공화당 3당(黨) 합당(合黨) 에 참여(參與)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DJT연합(聯合)은 당시(當時) 민주계(系)가 장악(掌握)한 신한국당 에서 쫓겨난 공화(共和), 민정계(系) 세력(勢力) 일부(一部)가 평민당과 연합(聯合)한 평민(平民) - 공화(共和) - 민정계(系) 연합(聯合)이자 PK 고립(孤立) 작전(作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DJ 측(側)은 PK에도 아예 신경(神經)을 안 쓴 건 아니라 DJT 연합(聯合)의 지역적(地域的) 한계(限界)를 극복(克服)하기 위해 당시(當時) 꼬마민주당 의 'PK 4인방(人坊)' 영입(迎入)에도 나섰다. 이중(二重) 노무현(盧武鉉) , 김정길(金正吉) 은 국민회의에 합류(合流)했고 이철 , 제정구 는 한나라당 창당(創黨)에 참여(參與)했다. 심지어(甚至於) 상도동계(系) 의 거물(巨物)인 최형우 측(側)에 접촉(接觸)한 적도 있었다. [3]

하지만 DJP 연합(聯合) 이후(以後)에도 TK 는 보수정당(保守政黨) 지지(支持)를 크게 버리지 않았고 충청도(忠淸道) 는 그나마 캐스팅보트 지역(地域)이 되었지만 텃밭화(火)까진 실패(失敗)해 [4] 결과적(結果的)으론 3당(黨) 합당(合黨)의 영향(影響)이 상당(相當) 수준(水準) 지속(持續)되었는데 이런 과정(過程)에서 나온 게 노무현(盧武鉉) 부울경(釜蔚慶) 공략(攻掠)과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 로 대표되는 충청도(忠淸道) 민심(民心) 안기였다.

2002년(年)에 있었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單一化) , 2022년(年) 윤석열(尹錫悅)-안철수(安哲秀) 단일화(單一化) 와 함께 성공(成功)한 단일화(單一化) 사례(事例) 중(中) 하나로 꼽힌다. [5]

2. 배경(背景) [편집(編輯)]

김대중(金大中) 1992년(年) 14대(代) 대선(大選) 에서 김영삼(金永三) 에게 패배(敗北)한 후(後) 정계(政界) 은퇴(隱退)를 선언(宣言)하고 영국(英國) 으로 떠났지만 1년(年) 만에 귀국(歸國)해서 아시아태평양(太平洋) 평화재단(平和財團)(아태재단)을 만들면서 정계(政界) 복귀(復歸)에 대(對)한 의지(意志)를 드러냈고 1995년(年) 제(第)1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직후(直後) 정계(政界) 복귀(復歸)를 공식적(公式的)으로 선언(宣言)했다. 그러나 당시(當時) 대통령(大統領) 이었던 김영삼(金永三) 은 물론(勿論) 김대중(金大中) 자신(自身)이 속(屬)했던 민주당(民主黨) 이기택 총재(總裁) 등(等) 14대(代) 대선(大選) 에서 자신(自身)을 지지(支持)했던 인사(人士)들까지 대놓고 김대중의 정계(政界) 복귀(復歸)에 반대(反對)하는 분위기(雰圍氣)가 강(剛)했다.

1991년(年) 평화(平和)민주당 꼬마민주당 의 합당(合黨)으로 창당(創黨)된 민주당(民主黨) 1992년(年) 김대중(金大中) 의 정계(政界) 은퇴(隱退) 선언(宣言) 후(後) 꼬마민주당 출신(出身)의 이기택 이(李) 총재(總裁)로 선출(選出)되어 이끌어 왔으나 밖으로는 거대(巨大) 여당(與黨)에 눌리고 안으로는 당내(黨內) 다수파(多數派)인 동교동계(系) 와 마찰(摩擦)을 빚는 상황(狀況)이었다.

특히(特히) 1995년(年) 6월(月) 제(第)1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를 앞두고 후보(候補) 공천(公薦)과 김대중(金大中) 의 선거(選擧) 지원(支援) 유세(遊說) 문제(問題)를 둘러싸고 양자간(兩者間)의 갈등(葛藤)이 공공연(公公然)하게 불거졌다. 당시(當時) 승부처(勝負處)인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후보(候補)를 둘러싸고 이기택 전(前) 총재(總裁)는 이회창(李會昌) 영입(迎入)을 추진(推進)했지만 거절당했는데 동교동계(系)가 영입(迎入)한 조순(趙淳) 전(前) 부총리(副總理)가 후보(候補)로 나서서 김대중의 지원(支援) 유세(遊說)를 등에 업고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에 당선(當選)되었다.

경기도지사(京畿道知事) 후보(候補) 경선(競選)에선 이기택 전(前) 총재(總裁)가 지원(支援)한 장경우(張慶宇) 전(前) 의원(議員)이 동교동계(系)가 지원(支援)한 이종찬(李鍾贊) 을 경선(競選)에서 물리치고 본선(本選)에 진출(進出)했지만 정작 본선(本選)에선 동교동계(系)의 무시(無視) 속에서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이인제(李仁濟) 후보(候補)에게 참패(慘敗)했다. 후보(候補) 공천(公薦)과 선거(選擧) 운동(運動) 과정(過程)에서 이기택 전(前) 총재(總裁)와 동교동계(系) 사이에 감정적(感情的)인 설전(舌戰)이 오고 갔고 관계(關係)는 사실상(事實上) 파탄(破綻)나는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이기택 은 '김대중이 상왕(上王) 처럼 굴면서 동교동계(系)가 사사건건(事事件件) 총재(總裁)의 지도력(指導力)을 무시(無視)한다'고 불만(不滿)을 표시(表示)했고 동교동계(系) 는 '총재(總裁)가 무능(無能)하니 당(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식(式)으로 맞대응(맞對應)했다. 그리고 이기택 전(前) 총재(總裁)와 일부(一部) 언론(言論)은 이런 동교동계(系)의 강경(强勁)한 자세(姿勢)를 김대중의 정계(政界) 복귀(復歸)를 위한 떡밥이라고 여기기 시작(始作)했다. 여기에 지방선거(地方選擧)가 시작(始作)되자 김대중이 전격적(電擊的)으로 조순(趙淳)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후보(候補) 지원(支援) 유세(遊說)에 나서면서 그야말로 구름 관중(觀衆)을 동원(動員)하였고 이것을 언론(言論)이 대대적(大大的)으로 보도(報道)하면서 이기택 총재(總裁)는 순식간(瞬息間)에 찬밥 신세(身世)가 되어 버렸다. 언론(言論)들도 김대중의 지원(支援) 유세(遊說)를 사실상(事實上)의 정계(政界) 복귀(復歸)라고 인식(認識)하였다.

당시(當時) 친(親)김대중계(界) 인사(人士)들은 정계(政界) 복귀(復歸) 시나리오를 검토(檢討)하면서 민주당 잔류(殘留)와 신당(新黨) 창당(創黨)으로 갈렸다. 잔류파(殘留派)들은 어차피(於此彼) 우리가 숫자상(數字上) 다수(多數)이니 전당대회(全黨大會) 총재(總裁) 경선(競選)에서 승리(勝利)하고 당권(黨權)을 쥐는 게 순리(順理)라고 주장(主張)했다. 하지만 신당파(新黨派)들은 총재(總裁) 경선(競選) 승리(勝利)야 당연(當然)하지만 그 뒤에 이기택을 중심(中心)으로 비주류(非主流)들이 결집(結集)해서 사사건건(事事件件) 딴지를 걸면서 당(黨)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 뻔하니 순간(瞬間)이야 욕(辱)을 먹겠지만 장기적(長期的)으론 신당(神堂)을 차려서 김대중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지도(指導) 체제(體制)를 구축(構築)하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主張)했고 이미 1995년(年) 지방선거(地方選擧) 공천(公薦) 문제(問題)로 이기택에게 감정(感情)이 상(傷)했던 김대중은 신당파(新黨派)의 손을 들어줬다. [6]

결국(結局) 민주당이 약진(躍進)한 지방선거(地方選擧) 직후(直後)인 1995년(年) 7월(月) 김대중(金大中) 은 정계(政界) 복귀(復歸)를 선언(宣言)하고 강력(强力)한 지지(支持) 기반(基盤)이었던 호남(湖南) 유권자(有權者)들을 믿고 민주당을 탈당(脫黨)해서 새정치국민회의 라는 신당(新黨)을 창당(創黨)했는데 그 결과(結果) 90명(名)이 넘던 민주당(民主黨) 의원(議員) 중(中) 65명(名) [7] 정도(程度)가 새정치국민회의 로 대거(大擧) 이동(移動)했고 민주당에는 30여(餘) 명(名) 정도(程度)가 잔류(殘留)했다.

허나 이는 사실상(事實上) 야권(野圈) 지지표(支持票)를 분열시키는 행동(行動)이었고 결국(結局) 1996년(年) 제(第)15대(代) 총선(總選) 에서 야권(野圈) 표심(票心)이 갈라지면서 여당(與黨)인 신한국당 이 과반수(過半數)에는 미달(未達)했지만 139석(席)으로 원내(院內) 제(第)1당(黨) 자리를 지켜냈고 새정치국민회의 는 79석(席)을 얻는 데 그치면서 사실상(事實上) 패배(敗北)했다. [8] [9] 그리고 이 선거(選擧)의 패배(敗北)로 김대중(金大中) 은 대권(大權) 가도(街道)에 적신호(赤信號)가 켜졌는데 당시(當時) 김대중의 정치(政治) 참모(參謀)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硏究院)이 김종필(金鍾泌) 과 손을 잡아야만 차기(次期) 대선(大選)에서 승리(勝利)할 수 있다는 내용(內容)을 담은 일명(一名) 'DJP 연합(聯合)' 초안(草案)을 보고서 형식(形式)으로 김대중에게 조언(助言)하였고 김대중이 이 조언(助言)을 수락(受諾)하면서 김대중은 김종필(金鍾泌) 과 1년(年)이 넘는 협상(協商) 과정(過程)에 돌입(突入)했다.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을 이끌었던 김종필(金鍾泌) 1990년(年) 3당(黨) 합당(合黨) 에 참여(參與)하여 노태우 정부(政府) - 문민정부(文民政府) 의 한 축(軸)을 담당(擔當)했고 김종필(金鍾泌) 김영삼(金永三) 이후(以後) 차기(次期) 대권(大權)을 자신(自身)이 차지하려는 의도(意圖)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 2인자(人者) 로 활동(活動)해 왔던 그에 대(對)해 구원(舊怨)(舊怨)이 있었던 김영삼(金永三) 대통령(大統領) 민주계(系) 는 김종필을 좋게 보지 않았고 당내(黨內) 계파(系派) 투쟁(鬪爭)에서 밀린 김종필은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에서 사실상(事實上) 철저(徹底)한 비주류(非主流)로 몰락(沒落)하는 신세(身世)가 되었다. [10]

그러자 김종필(金鍾泌) 은 자신(自身)을 따르던 공화계(系) 와 마찬가지로 김영삼(金永三) 에게 피를 본 민정계(系) 일부(一部) 세력(勢力)을 이끌고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을 탈당(脫黨)해 1995년(年) 1월(月)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을 창당(創黨)했다.

자민련은 1995년(年) 1회(回) 지방선거(地方選擧) 에서 대전(大戰) - 충청남도(忠淸南道) - 충청북도(忠淸北道) - 강원도(江原道) 4곳의 광역자치단체장(廣域自治團體長) 을 배출(排出)하는 기염(氣焰)을 토(吐)한 데 이어 다음해인 1996년(年) 15대(代) 총선(總選) 에서 김종필이 일명(一名) ' 충청도(忠淸道) 핫바지 론'을 내세워 지역(地域) 민심(民心)에 불을 붙여 충청도(忠淸道) 전체(全體) 선거구(選擧區) 28개(個) 중(中) 24개(個)를 석권(席卷)했고 그 외(外)에도 문민정부(文民政府) 심판론(審判論)을 내세워 경기도(京畿道) 에서 5석(席), 경상북도(慶尙北道) 에서 2석(席), 강원도(江原道) 에서 2석(席)을 차지했으며 특히(特히) TK 홀대론(忽待論)으로 반(反)YS, 반(反)신한국 바람이 불던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에서는 13석(席) 중(中) 8석(席)을 차지하는 이변(異變)을 연출(演出)하면서 국회(國會) 전체(全體) 의석(議席) 299석(席) 중(中) 50석(席)을 확보(確保)하는 위엄(威嚴)을 보여주었다. 이는 한국(韓國) 에서 이른바 '제(第)3당(黨)'이라고 불리는 정당(政黨)들이 역대(歷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총선거(總選擧)에서 거둔 성적(成跡) 중(中) 가장 좋은 성적(成跡)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종필(金鍾泌) 은 이와 같은 승리(勝利)에도 불구(不拘)하고 애초(애初)에 자신(自身)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대권(大權)을 잡을 가능성(可能性)은 희박(稀薄)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3당(黨) 합당(合黨) 시절(時節)처럼 누군가와 함께 공동(共同) 정권(政權)을 창출(創出)하는 방안(方案)을 연구(硏究)하기 시작(始作)했고 당시(當時) 야권(野圈)에서 김영삼(金永三) 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김대중(金大中) 은 당연히(當然히) 첫 번째(番째) 협상(協商) 대상(對象)이었다.

참고(參考)로 당시(當時) 자민련 안에는 김종필(金鍾泌) 의 직계(直系) 세력(勢力)인 충청(忠淸) 그룹, TK 를 중심(中心)으로 한 민정계(系) 일부(一部) [11] , 그 외(外) 非김종필(金鍾泌) 세력(勢力), 이렇게 세 개(個)의 계파(系派)가 있었는데 그 중(中) 각(各) 그룹의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충청(忠淸) 그룹 김용환 전(前) 부총재(副總裁), 민정계(系) 박철언 전(前) 의원(議員), 非김종필(金鍾泌) 세력(勢力) 한영수 전(前) 부총재(副總裁)였다.

당초(當初)에 충청(忠淸) 그룹과 非김종필(金鍾泌) 세력(勢力)은 DJP연합(聯合)에 부정적(否定的)이었으나 의외로(意外로) 5공화국(共和國) 내내 김대중(金大中) 과 상극(相剋)이었던 민정계(系) 는 이 연대(連帶)에 매우 적극적(積極的)이었다. 이는 당시(當時) 박철언 의 성향(性向) 덕분(德分)이기도 한데 3당(黨) 합당(合黨) 문서(文書)에도 등장(登場)하지만 원래(元來) 노태우(盧泰愚) 의 심복(心腹) 박철언이 주도(主導)한 3당(黨) 합당(合黨) 김대중(金大中) 평화(平和)민주당 도 포함(包含)하는 4당(黨) 합당(合當) 이 기본(基本) 구상(構想)이었지만 합당(合黨) 제안(提案)을 김대중 총재(總裁)가 거절(拒絶)하면서 3당(黨) 합당(合黨)만 이뤄지게 된 것이니 JP와 마찬가지로 YS에 쫓겨나 권력(權力)과 멀어진 박철언 입장(立場)에선 재기(再起)를 노려 볼 만한 묘수(妙手)였다. 그리고 충청(忠淸) 그룹이 김종필의 결단(決斷)에 따라 찬성(贊成) 쪽으로 기울면서 DJP연합(聯合)은 본격적(本格的)으로 시동(始動)이 걸렸다.

3. 과정(過程)과 진통(陣痛) [편집(編輯)]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 공조(共助)는 1996년(年) 15대(代) 총선(總選) 직후(直後)부터 수면(水面) 위로 떠오르기 시작(始作)했다. 당시(當時) 여당(與黨) 이었던 신한국당 이(李) 원내(院內) 과반(過半) 의석(議席) 확보(確保)를 위해 무소속(無所屬) 통합(統合)민주당 당선인(當選人)들을 영입(迎入)하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국민(國民)의 뜻을 따르라'며 원(院) 구성(構成) 협상(協商)에 불참(不參)했다. 이 여파(餘波)는 상당히(相當히) 커서 그 해 5월(月) 26일(日) 보라매공원(公園) 에서 국민(國民)회의, 자민련을 비롯한 야(野)3당(黨)이 신한국당 규탄대회(糾彈大會)를 열었을 정도(程度)였다. 이때부터 DJP간(間)의 연대(連帶)가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1996년(年)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에서 양당(兩黨)은 연합공천(聯合公薦)을 이루면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소속(所屬)의 김용채 서울 노원구청장(廳長) , 뒤이어 유관진 경기도(京畿道) 오산시장(誤算市長) 이 당선(當選)되었다. DJP가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대세(大勢)가 되었고 연말(年末) 자민련 소속(所屬)이던 최각규 전(前) 강원도지사(江原道知事) 류종수 , 황학수(黃鶴洙) 전(前) 의원(議員)이 신한국당 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두 야당(野黨)의 결속(結束)이 더욱 강화(强化)되었다. 양당(兩黨)은 계속(繼續)해서 1997년(年) 에 치러진 국회의원(國會議員) 재보선(再補選) 에서 후보(候補) 단일화(單一化) 를 통한 연대(連帶)에 돌입(突入)했고 그 결과(結果) 수도권(首都圈) 에서 치러진 3곳의 재보선(再補選) [12] 에서 모두 압승(壓勝)을 기록(記錄)했다.

그러나 정치(政治) 성향(性向)도 영 맞지 않아 보이던 김대중과 김종필이 손을 잡는 일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야합(野合)이라는 비난(非難)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군부(軍部) 정권(政權) 시절(時節)엔 당연히(當然히)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고 노태우 정부(政府) 시기(時期)에 평화(平和)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일시적(一時的)으로 연합(聯合)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때는 정권창출(政權創出)을 위한 목적(目的)보다는 그냥 야당간(野黨間)의 협력(協力) 정도(程度)의 수준(水準)이었다. 실제로(實際로) 국민(國民) 여론(輿論)은 매우 부정적(否定的)이었는데 당시(當時) 모(某) 여론조사(輿論調査) 에선 무려(無慮) 70%가 넘는 국민(國民)들이 'DJP연합(聯合)을 해선 안 된다'고 할 정도(程度)였다. 김대중(金大中) 도 자신(自身)의 지지(支持) 기반(基盤)이었던 수도권(首都圈) 민심(民心)이 날아갈 것을 꽤나 우려(憂慮)해서 독일(獨逸) 의 '신호등(信號燈) 연정(聯政)' [13] 등(等)을 거론(擧論)하면서 DJP연합(聯合)을 합리화(合理化)하려고 노력(努力)했다.

김종필(金鍾泌) 은 연대(連帶) 과정(過程)에서도 끊임없이 갈지자(갈之字)(之字) 행보(行步)를 보이면서 김대중(金大中) 측(側)을 초조(焦燥)하게 했는데 이는 대권(大權)이 걸린 김대중(金大中) 측(側)이 연합(聯合)에 더 사활(死活)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急)할 게 없는 김종필이 몽니를 부리면서 자신(自身)의 몸값을 올리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한편(한便) 1년(年) 반(半)이 넘도록 DJP연합(聯合)이 큰 진척(進陟)이 없던 상황(狀況)에서 김대중(金大中) 은 연합(聯合)을 성사(成事)시키기 위(爲)해 박태준 [14] 영입(迎入)에 공(功)을 들였다. 김대중은 박태준이 합류(合流)한다면 김종필(金鍾泌) 의 마음도 붙들어 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慶尙道) 의 지지(支持)도 일부(一部) 흡수(吸收)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97년(年) 9월(月) 도쿄국립경기장 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豫選戰) 을 관전(觀戰)하기 위해 일본(日本) 을 방문(訪問)한 자리에서 만난 박태준과 연합(聯合)에 대(對)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대중에 대(對)해 여전히(如前히) 불신감(不信感)을 가지고 있었던 박태준(朴泰俊)의 태도(態度)가 이 만남 덕분(德分)에 누그러졌고 결국(結局) 연합(聯合)에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15]

4. 연합(聯合) 성사(成事) [편집(編輯)]

1997년(年) 11월(月) 3일(日) 김대중(金大中) 후보(候補)가 김종필(金鍾泌) 전(前) 의원(議員)의 청구동 자택(自宅)에 직접(直接) 찾아와 사실상(事實上) DJP연합(聯合)을 마무리지었고 다음 날 박태준 전(前) 의원(議員)이 자민련 에 입당(入黨)해 총재(總裁)로 추대(推戴)되면서 연합(聯合) 성사(成事)는 완료(完了)되었다.

연합(聯合) 성사(聖事) 다음날, 연합(聯合) 직전(直前)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다며 갈지자(갈之字) 행보(行步)를 보이던 김종필은 2인자(人者)를 자처(自處)하면서 김대중에게 매우 공손(恭遜)했다고 전(傳)해지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김대중이 나갈 때 김종필이 90도(度) 인사(人事)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상황(狀況)을 지켜보던 당시(當時) DJ 비서실장(祕書室長) 한광옥 은 JP를 진정(眞正)한 정치(政治) 고수(高手)라고 생각했다고 훗날(後날) 회상(回想)하기도 했다. [16]

당시(當時) 연합(聯合)에서 합의(合意)한 사항(事項)은 다음과 같다.

한편(한便) 이 과정(過程)에서 연합(聯合)에 반발(反撥)한 자민련 소속(所屬) 의원(議員)들 [17] 이 탈당(脫黨)해 신한국당 으로 이적(移籍)하는 일도 있었다. 그 중(中) 안택수 전(前) 의원(議員)은 현직(現職)이었던 당(黨) 대변인직(代辯人職)을 버리고 탈당(脫黨)했기 때문에 당시(當時) 자민련에 충격(衝擊)을 주기도 했다. [18]
결론(結論)만 놓고 보면 DJP연합(聯合)은 성공적(成功的)이었다. 1997년(年) 15대(代) 대선(大選) 결과(結果) 김대중(金大中) 후보(候補)는 충청도(忠淸道) 에서만 무려(無慮) 43만여(萬餘) 표(票) 차이(差異)를 벌리면서 대선(大選) 승리(勝利)를 거머쥐었다. [19] 또 김대중을 대놓고 빨갱이 로 여겼던 경상도(慶尙道) 전체(全體)에서도 평균(平均) 13%의 득표율(得票率)을 기록(記錄)하며 꽤 선전(善戰)했고 [20] 이후(以後) 김대중(金大衆)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동진(東進) 정책(政策) [21] 을 펴는 데 자민련 측(側) 인물(人物)들이 선봉장(先鋒將)을 맡기도 했다. 지역주의(地域主義) 가 많이 허물어진 21세기(世紀)에는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이 총선(總選)과 대선(大選), 지선(支線)에서 TK에서는 20% 넘게 꾸준히 확보(確保)하고 PK에서는 당선자(當選者)도 여럿 배출(輩出)하지만 이전(以前)의 동서갈등(東西葛藤)은 서로 통혼(通婚)도 교류(交流)도 거의 못 할 정도(程度)로 강(剛)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김대중 대통령(大統領)의 당선(當選)으로 저 정도(程度)로 경상도(慶尙道)의 지역감정(地域感情)이 완화(緩和)된 것만 해도 놀라운 발전(發展)이었다.

합의(合意)한 대로 국민(國民)의 정부(政府) 경제(經濟) 관료(官僚)들도 김종필(金鍾泌) 이 지명(指名)하였는데 이들은 IMF 사태(事態) 를 극복(克服)하는 데 보탬이 되기도 했다. 그 이전(以前)까지만 해도 고위관료(高位官僚)들이나 엘리트라면 보수정당(保守政黨)에 입당(入黨)하는 경우(境遇)가 다수(多數)였기 때문에 DJ계(界) 야당(野黨)의 인재(人材)풀은 상당히(相當히) 취약(脆弱)했던 상황(狀況)이었는데 이를 성공적(成功的)으로 보충(補充)했던것이었다. 또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김대중을 괴롭혔던 색깔론(色깔論) 에서도 [22] 김종필과 자민련이 어느 정도(程度) 방파제(防波堤) 가 되어 주어 국민(國民)의 정부(政府)가 햇볕정책(政策) 을 추진(推進)하는 데 있어 부담(負擔)을 덜게 해 주었다.

집권(執權) 직후(直後) 치러진 1998년(年) 제(第)2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도 국민(國民)회의와 자민련은 전국적(全國的)인 후보(候補) 단일화(單一化)를 통(通)해서 광역자치단체장(廣域自治團體長) 16곳 중(中) 10곳을 석권(席卷)하는 승리(勝利)를 거뒀는데 이에 따라 15대(代) 국회(國會) 에 당선(當選)된 주로(主로) 야당(野黨) 의원(議員)들이 당시(當時) 여당(與黨)에 입당(入黨)하려는 이른바 철새 의 시대(時代)가 한동안 유지(維持)되기도 했다.

대체로(大體로) 민주당(民主黨) 지지자(支持者)들 사이에서는 김대중이 독재(獨裁) 정권(政權)의 2인자(人者)였던 김종필과 연합(聯合)했던 것에 대(對)해 비판(批判)하면서도 DJP연합(聯合)이 없었다면 김대중이 대통령(大統領)에 당선(當選)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意見)은 인정(認定)하는 편(便)이다.

6. 갈등(葛藤)과 해체(解體) [편집(編輯)]

집권(執權) 2년(年) 이내(以內)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 을 내걸고 시작(始作)했던 DJP연합(聯合)은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 이행(履行) 유무(有無)와 햇볕정책(政策) 에 대(對)한 의견(意見) 차이(差異)로 집권(執權) 2년차(年次)인 1999년(年) 부터 흔들리기 시작(始作)했다. [23]

의외로(意外로) 무시(無視)되는 측면(側面)은 1999년(年) 초(初)만 해도 양당(兩黨)은 표면적(表面的)인 부인(否認)에도 불구(不拘)하고 지속적(持續的)으로 합당(合黨)을 추구(追求)했다는 점(點)이다.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구도(構圖) 내(內)에서는 합당(合黨) 없이는 선거(選擧)에서 불리(不利)하다는 게 결정적(決定的)인 이유(理由)였다. 지분율(持分率)은 당연히(當然히) 1:1로, 당세(黨勢)를 고려(考慮)하면 자민련에게 절대적(絶對的)으로 유리했다. # 그 증거(證據)로 국민(國民)회의는 국회(國會) 총(總) 의석(議席)을 273석(席), 특히(特히) 지역구(地域區)를 253석(席)에서 227석(席)으로 줄이기 위(爲)한 한나라당(한나라黨) 과의 지역구(地域區) 협상(協商)에서도 자민련과의 합당(合黨)을 전제(前提)로 협상(協商)에 임(臨)했다.

그러나 7월(月)에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 김종필(金鍾泌) 전(前) 총리(總理)가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 유보(留保)에 합의(合意)하자 자민련 내(內)에서 엄청난 반발(反撥)이 터져나왔고 9월(月)로 예정(豫定)되었던 국민회의의 재창당(再創黨) 도 합당(合黨)을 고려(考慮)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結局) 자민련의 일탈(逸脫)은 가속(加速)되었다. 심지어(甚至於) 12월(月)에는 김종필의 최측근(最側近)으로 DJP연합(聯合) 성사(聖事)의 일등공신(一等功臣) [24] 이었던 김용환 부총재(副總裁)가 고성(高聲)이 오가는 면담(面談) 끝에 탈당(脫黨)하는 상황(狀況) [25] 까지 벌어졌다.

양당(兩黨) 사이에 감정(感情)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結局) 1999년(年) 말(末) 국민(國民)회의와 자민련의 합당(合黨)은 완전히(完全히) 무산(霧散)되었고 # 새정치국민회의 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재창당(再創黨)에 나서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갈등(葛藤)은 점점(漸漸) 더 커져서 2000년(年) 제(第)16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선 새정치국민회의 의 후신(後身)인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의 후보(候補) 연합(聯合) 공천(公薦)이 무산(霧散)되었고 전국(全國) 대부분(大部分)의 지역구(地域區)에 두 정당(政黨)이 동시(同時)에 후보(候補)를 내보내는 사태(事態)가 벌어졌다. [26]

이 선거(選擧)에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수도권(首都圈) 호남(湖南) , 강원도(江原道) , 제주도(濟州道) 에서 승리(勝利)하고 자민련의 텃밭이었던 충청도(忠淸道) 에서도 어느 정도(程度) 선전(宣傳)하면서 의석(議席)을 늘렸다. 반면(反面) 자민련 은 非 충청도(忠淸道) 지역(地域)에선 보수표(保守票)를 모조리 한나라당(한나라黨) 에 뺏기면서 사실상(事實上) 충남(忠南) 지역(地域) 정당(政黨)으로 전락(轉落)했고 그나마 될 만한 선거구(選擧區) 도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과의 연합(聯合) 공천(公薦) 무산(霧散)으로 인(因)해서 한나라당(한나라黨)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에게 빼앗겼다. 심지어(甚至於) 본거지(本據地)였던 충청도(忠淸道)에서도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한나라당과 박빙(薄氷)의 승부(勝負)를 보이면서 기존(旣存) 50석(席)에서 1/3 수준(水準)으로 줄어든 단(單) 17석(席) 확보(確保)에 그쳐 원내교섭단체(院內交涉團體) 구성(構成)에도 실패(失敗)했다. 사실(事實)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 충청남도(忠淸南道) 과 달리 충청북도(忠淸北道) 는 애초(애初)부터 자민련이 큰 힘을 못 쓰던 지역(地域)이었다.

그러나 DJP연합(聯合)의 복원(復元)과 유지(維持)를 희망(希望)했던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 은 2000년(年) 5월(月) 22일(日) 직전(直前) 연말(年末) 한나라당(한나라黨) 을 탈당(脫黨)해 자민련에 입당(入黨)한 이한동(李漢東) 총재(總裁)를 국무총리(國務總理) 로 지명(指名)하며 연정(聯政)의 가능성(可能性)을 재타진했고, 그해 12월(月) 30일(日)에는 민주당(民主黨) 의원(議員)들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이른바 의원(議員) 꿔주기 까지 하면서 자민련이 다시 원내교섭단체(院內交涉團體) 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7] 이에 자민련도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名譽總裁)가 2001년(年) 1월(月) 8일(日) 청와대(靑瓦臺) 단독만찬(單獨晩餐)에 참여(參與)하면서 공식적(公式的)으로 연정(聯政)에 복귀(復歸)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을 합(合)쳐도 원내(院內) 과반수(過半數)를 충족(充足)하지 못했던 터라 2석(席)을 차지한 민주국민당 에까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處地)였고 민국당 한승수 의원(議員)을 외교부장관(外交部長官) 으로 임명하면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 민주국민당 3당(黨) 연합(聯合)과 무소속(無所屬) 정몽준(鄭夢準) 전(前) 의원(議員)으로 138석(席)을 확보(確保)하여 간신(艱辛)히 원내(院內) 과반수(過半數)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과반수(過半數)만 채웠을 뿐 제1야당인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133석(席)을 차지하면서 개헌저지선(改憲沮止線) 을 딱 차지하고 버틴 탓에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의 숙원(宿願)이었던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 개헌(改憲)은 끝내 무산(霧散)되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과 자민련이 햇볕정책(政策) 으로 대변(代辯)되는 대북(對北) 유화책(宥和策)과 관련(關聯)해 시각차(視角差)를 보이기 시작(始作)하면서 결국(結局) 자민련이 2001년(年) 9월(月) 3일(日) 임동원 전(前) 통일부장관(統一部長官) 해임안(解任案)에 가담(加擔)해 DJP연합(聯合)은 최종적(最終的)으로 무너졌다. 막 입당(入黨)해 잠깐 자민련의 바지총재(總裁)로 있었던 이한동은 아예 자민련에서 제명당하고 [28] 무소속(無所屬)으로 남은 총리(總理) 임기(任期)를 채웠다.

그리고 김대중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뜻에 따라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의원(議員)들은 DJP연합(聯合)이 끝나자 자민련을 탈당(脫黨)해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復歸)하면서 자민련은 다시 원내(院內) 비교섭단체(非交涉團體)로 내려앉았다. 이 후(後) 제(第)16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시즌이 다가왔을 때, 한나라당(한나라黨) 은 JP를 포섭(包攝)하기 위해 애썼지만 과거(過去) 국무총리(國務總理) 시절(時節) 인준안(認准案) 거부(拒否)와 의원(議員) 빼가기로 한나라당에 큰 반감(反感)을 가졌던 JP는 끝내 중립(中立)을 선언(宣言)하며 이회창을 외면(外面)하였다. [29]

자민련은 2004년(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 탄핵소추(彈劾訴追) 및 심판(審判) 에 가담(加擔)했다가 17대(代) 총선(總選) 에서 4석(席)으로 폭망(폭亡) 했고, 그나마 남은 의원(議員)들도 새로 창당(創黨)한 국민중심당(國民中心當) 으로 옮기면서 대표(代表)였던 김학원 만(萬) 남았으며, 이후(以後) 해산(解散)을 선언(宣言)하면서 남은 사람들은 한나라당(한나라黨) 에 흡수(吸收)되었다. 자민련이 몰락(沒落)하면서 지역정당(地域政黨) 이 사라진 충청도(忠淸道) 는 이후(以後) 본격적(本格的)인 캐스팅보트 지역(地域)이 되었고 전라도(全羅道)는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현역(現役)이었던 시절(時節)보다는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에 대(對)한 지지세(支持勢)가 약(弱)해졌다. [30]

7. 관련(關聯) 항목(項目) [편집(編輯)]

[1] 여당(與黨)의 위성정당(衛星政黨)이 출현(出現)한 21대(代), 22대(代) 총선(總選)에서도 연립정부(聯立政府)가 등장(登場)했다는 주장(主張)이 있으나, 독일(獨逸) CDU/CSU와 같은 사례(事例)로 취급(取扱)된다. 한편(한便)으로 동거정부(同居政府) 의 형태(形態)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2] 그래도 김대중이 김종필(金鍾泌)에 어느 정도(程度) 실권(實權)을 주어 자율적(自律的)으로 인사권(人事權)을 행사(行使)한 적도 있었다. [3] '이젠 PK와 접속(接續)' DJP 여세몰이(餘勢몰이). 경향신문(京鄕新聞). 1997.10.30 . [4] 애초(애初)에 충북(忠北)은 이전(以前)부터도 캐스팅보트 지역(地域)이어서 충청지역정당(忠淸地域政黨)은 주로(主로) 충남(忠南)에서만 세(貰)를 보이는 경우(境遇)가 많았다. [5] 다만 노(盧)-정(政) 단일화(單一化)는 대선(大選) 전날(前날) 정몽준이 갑작스럽게 지지(支持)를 철회(撤回)하면서 흐지부지됐다. 물론(勿論) 단일화(單一化)를 통한 지지율(支持率) 흡수(吸收) 효과(效果)는 나타났지만 말이다. [6] 동교동계(系) 내(內)에서는 지지자(支持者)들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당사(黨史)가 아깝지 않냐는 여론(輿論)도 있었으나 끝내 당사(黨舍)까지 버려 가면서 분당(分黨)했다. 그 정도(程度)로 양자(兩者) 간(間)의 사이가 나빴다. 문제(問題)의 당사(當社)는 이후(以後) 통합(統合)민주당 - 신한국당 합당(合黨) 과정(過程)에서 한나라당 소유(所有)가 되어 버렸고(...) 불법(不法) 정치자금(政治資金)에 대(對)한 추징금(追徵金)을 마련하는 과정(過程)에서 매각(賣却)되었다. [7] 이 중(中) 13명(名)은 전국구(全國區) ( 비례대표(比例代表) ) 의원(議員)으로, 민주당을 탈당(脫黨)하면 국회의원(國會議員) 직(職)을 상실(喪失)하기 때문에 당적(黨籍)은 민주당이지만 사실상(事實上) 새정치국민회의를 위하여 활동(活動)했다. 훗날(後날) 바른미래당(바른未來黨) 민주평화당(民主平和黨)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現象)이 일어났다. 박주현(朴珠賢) , 장정숙(張貞淑) 전(前) 의원(議員)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 둘은 공식적(公式的)으로는 바른미래당(바른未來黨) 소속(所屬) 비례대표(比例代表) 의원(議員)이었지만 사실상(事實上) 민주평화당(民主平和黨) 소속(所屬) 의원(議員)들이었다. [8] 당시(當時)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후보(候補)가 3000표(票) 이내(以內)의 박빙승부(薄氷勝負)를 보인 지역구(地域區)가 전국적(全國的)으로 58개(個)에 달(達)했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면 야권표(野圈票) 분산(分散)이 패배(敗北)의 가장 중요(重要)한 요인(要因)이었던 것은 사실(事實)이다. [9] 민주당(民主黨) 은 아예 15석(席)에 그쳐 원내(院內) 교섭단체(交涉團體) 구성(構成)에도 실패(失敗)해 몰락(沒落)했는데 이들은 훗날(後날) 신한국당 과 합당(合當)해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됐다. [10] 김영삼(金永三) 과 민주계(系)가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 시절(時節) 당(當)한 초산(初産) 테러 나 야당(野黨) 의원(議員) 고문(拷問) 등(等)을 생각해 보면 미워할 법(法)도 했다. 다만 김종필(金鍾泌) 도 억울(抑鬱)한 부분(部分)은 있는데 종신(終身) 집권(執權)을 꿈꾸던 박정희(朴正熙) 에게 김종필(金鍾泌) 은 언제 자기(自己)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눈엣가시였고 덕분(德分)에 조카 사위 임에도 세 차례(次例)나 가택(家宅) 수사(搜査)를 당(當)하는 등(等) 엄청난 견제(牽制)를 받고 사실상(事實上) 정계(政界)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종필은 박근혜(朴槿惠) 와도 소원(所願)했다. 사실(事實) 5공(共) 시절(時節) 양김(兩金)이 각종(各種) 탄압(彈壓)을 받으면서 반독재(反獨裁) 민주화(民主化) 투쟁(鬪爭)을 지속(持續)했을 때 김영삼이 김종필(金鍾泌)에 사람을 보내서 같이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 과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6월(月) 항쟁(抗爭) 이후(以後) 민주화(民主化) 국면(局面)이 도래(到來)했을 때 김종필이 전격(電擊) 귀국(歸國)해서 정계(政界) 복귀(復歸)와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창당(創黨)을 선언(宣言)하자 "남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무임승차(無賃乘車) 하느냐"는 비판(批判)도 상당(相當)했다. [11] 하나회 의 핵심(核心) 멤버였던 김복동 , 박준병 도 있었다. [12] 인천(仁川) 서구(西區) (국민회의 조한천 ), 수원시(水原市) 장안구(長安區) (자민련 이태섭(李台燮) ), 안양시(安養市) 만안구(萬安區) (자민련 김일주 ). [13] 독일(獨逸)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 ( 중도좌파(中道左派) ), 녹색당(綠色黨) ( 환경주의(環境主義) ),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 자유주의(自由主義) 우파(右派))의 연정(聯政) 을 말하는 것으로, 각(各) 정당(政黨)의 테마색(色)이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은 빨간색(빨간色) , 녹색당은 녹색(綠色) , 자유(自由)민주당은 노랑색(色) 이라서 신호등(信號燈) 연정(聯政)이라고 부른다. 90년대(年代) 이후(以後) 독일(獨逸) 녹색당 이 급성장(急成長)하면서 좌파(左派) 진영(陣營)의 안정적(安定的) 집권(執權)을 위해 자주 거론(擧論)되는 이야기이지만 자유(自由)민주당은 신호등(信號燈) 연정(聯政)보다는 기독교민주연합(基督敎民主聯合) (보수(保守) 우파(右派))과의 연정(聯政)을 선호(選好)하기 때문에 보통(普通) 적녹(敵綠) 연정(聯政)으로 끝났으나 2021년(年) 총선(總選) 에서 실현(實現)되었다. [14] 1997년(年) 7월(月) 포항시(浦項市) 북구(北區) 선거구(選擧區) 에서 치러진 국회의원(國會議員) 재보선(再補選)에서 이기택 을 꺾었다. [15] 한겨레신문(新聞) 김대중(金大中) 집권비사(執權祕事) 월드컵정치(政治) [16] 다만 김종필(金鍾泌) 문서(文書)나 14대(代) 대선(大選) 문서(文書) 등(等)에서도 설명(說明)된 것처럼 당시(當時) 김종필과 자민련은 독자적(獨自的)으로 대권(大權)에 도전(挑戰)할 만한 입장(立場)은 아니었고 캐스팅보터 역할(役割)을 하려 해도 김대중 및 새정치국민회의와 손잡는 것 외(外)에 다른 방법(方法)은 없는 처지(處地)였다. 즉(卽) 자신(自身)들의 대권(大權)이 걸린 문제(問題)라 절박(切迫)한 것이 김대중측(側)의 상황(狀況)이었다면 어차피(於此彼) 자기(自己)들 손에 대권(大權)은 쥐지 못할 것이지만 반짝 뜨고 만 비 수권정당(受權政黨)의 처지(處地)로 남느냐, 수권세력(受權勢力)의 한 축(軸)으로 자리잡을 기회(機會)를 얻느냐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김종필측(金鍾泌側)의 상황(狀況)이었다. 말하자면 협상(協商) 과정(過程)에서는 '그쪽 판돈이 더 크니 엎어지면 아쉬운 것은 그쪽 아니냐'고 배짱을 튕기면서 몸값과 지분(持分)을 올렸지만 협상(協商)이 타결(妥結)된 이후(以後)에는 관계(關係)를 주도(主導)할 수 없는 자기측(自己側)의 입장(立場)을 명확히(明確히) 파악(把握)하고 그에 따라 처신(處身)했다는 점(點)에서 노련(老鍊)한 정치인(政治人)답다는 감탄(感歎)이라고 해석(解釋)할 수 있겠다. [17] 이의익(李義翊) , 안택수 , 박종근 . [18] 재미있는 것은 안택수 전(前) 의원(議員)은 당(黨) 대변인(代辯人)이었다 보니 당시(當時) 신한국당 대선(大選) 후보(候補)였던 이회창(李會昌) 전(前) 총재(總裁) 아들의 병역비리(兵役非理) 의혹(疑惑) 을 선두(先頭)에 나서서 까던 사람이었는데 신한국당에 입당(入黨)한 후(後)에는 이회창 후보(候補)를 신뢰(信賴)할 수 있는 지도자(指導者)라며 극찬(極讚)한 것이다. 또 이의익(李義翊) 전(前) 의원(議員)은 이듬해 대구광역시장(大邱廣域市腸) 후보(候補) 선출(選出) 과정(過程)에서 현직(現職)이었던 문희갑 전(前) 시장(市長)에게 밀려나자 자민련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지만 이후(以後) 선거(選擧)에서 낙선(落選)했다. [19] 당시(當時) 이회창(李會昌) 후보(候補)와의 총(總) 득표차(得票車)는 39만여(萬餘) 표(票) 차(次)였다. 즉(卽) 충청도(忠淸道)에서 못 이겼다면 김대중의 당선(當選)은 어려웠을 것이다. [20] 대구(大邱): 12.53% / 경북(慶北): 13.66% / 경남(慶南): 11.04% / 부산(釜山): 15.28% / 울산(蔚山): 15.41%의 득표(得票)를 기록(記錄)했는데 DJP연합(聯合)의 효과(效果)도 있겠지만 당시(當時) 경남(慶南)보다 대구경북(大邱慶北)이 김대중의 득표율(得票率)이 더 높았던 이유(理由)는 김영삼 정권(政權)과 신한국당 에 꽤 반감(反感)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참고(參考)로 직전(直前) 대선인(對先人) 1992년(年) 14대(代) 대선(大選) 에서 김대중 후보(候補)는 대구(大邱)에선 7.82%, 경북(慶北)에선 9.62%의 득표율(得票率)을 기록(記錄)했다. 김대중과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던 박정희(朴正熙)의 아들인 박지만 과 큰딸 박재옥 , 그리고 조카들이 김대중지지(支持)를 선언(宣言)한 게 매우 컸고 당시(當時) 민정당 민자당출신(出身) TK인사(人士)인 엄삼탁 , 박철언 , 김중권 을 김대중캠프에 영입(迎入)한 것이 TK의 김대중득표율(金大中得票率)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當時) 박근혜와 박근령 자매(姊妹)만 이회창을 지지(支持)했다. [21] 경상도(慶尙道) 민심(民心)을 공략(攻掠)하는 정책(政策). [22] 당시(當時) 고령층(高齡層) 보수진영(保守陣營) 지지자(支持者)들에게 김대중은 민주주의(民主主義)만 실현(實現)할 수 있다면 북한(北韓)과도 손을 잡을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강(剛)하게 박혀 있었다. 이것 때문에 김대중은 젊었을 적 민주화(民主化) 운동(運動)을 할 때에도 빨갱이몰이에 시달려서 많은 고초(苦楚)를 겪었다. 같이 민주화(民主化)를 위해 투쟁(鬪爭)했으면서도 철저히(徹底히) 반공(反共) 노선(路線)을 어필해 상대적(相對的)으로 자유롭게 행동(行動)했던 김영삼(金永三)과는 대비(對比)되는 부분(部分). [23] 이전(以前)에도 제(第)2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기초자치단체장(基礎自治團體長) 후보(候補) 및 광역의회의원(廣域議會議員) 후보(候補)의 연합(聯合) 공천(公薦) 여부(與否)로 인한 신경전(神經戰), 각료(閣僚) 배분(配分) 신경전(神經戰) 등(等)은 있었으나 DJP연합(聯合)의 갈등(葛藤)이 수면(水面) 위로 떠오르게 된 건 1999년(年)부터였다. [24] 애초(애初)에 DJP연합(聯合)은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을 전제(前提)로 성사(成事)된 연합(聯合)이었다. [25] 이때 김용환은 탈당(脫黨)하여 희망의(希望醫)한국신당 이라는 독자적(獨自的)인 정당(政黨)을 창당(創黨)하였고 총선(總選)에서 당선(當選)된 후(後)에는 한나라당(한나라黨) 에 합류(合流)한다. [26] 하물며 DJP연합(聯合)이 화기애애(和氣靄靄)했던 정권(政權) 초기(初期)의 제(第)2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도 기초자치단체장(基礎自治團體長) 및 광역의원(廣域議員) 선거(選擧)에서 일부(一部) 지역(地域)의 연합(聯合) 공천(公薦)을 둘러싸고 신경전(神經戰)이 있었지만 광역자치단체장(廣域自治團體長) 선거(選擧)에서 전부(全部) 연합(聯合) 공천(公薦)을 했기 때문에 갈등(葛藤)이 표면(表面)에 드러나진 않았다. 그때의 상처(傷處)가 곪아서 터진 격(格)인 셈이었다. [27] 다만 그 과정(過程) 속에서 강창희(姜昌熙) 전(前) 부총재(副總裁)가 제명(除名)되었다. [28] 이후(以後) 이한동은 하나로국민연합 을 창당(創黨)하여 제(第)16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 츨마했으나 낙선(落選)하였고, 이후(以後) 자민련으로 복귀(復歸)했다. [29] 여기에는 DJP 단일화(單一化) 당시(當時) 단일화(單一化) 협상(協商)을 맡았던 한광옥 의 설득(說得)이 있었다고 한다. 대선(大選) 일주일(一週日) 전(前) 한광옥이 직접(直接) JP를 찾아가 공동정권(共同政權)이었으니 민주당이 정권(政權)을 재창출(再創出)하는 것이 순리(順理)라고 설득(說得)했고, JP는 이를 받아들여 대선(大選) 중립(中立)을 발표(發表)하고 당(黨) 내(內)에서 이회창(李會昌) 을 지지(支持)하는 개별의원(個別議員)들의 행동(行動)을 만류(挽留)했다. 이 중립(中立)에는 사실상(事實上) JP가 노무현을 지지(支持)하는 의미(意味)가 담겨있었다고 한다. [30]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있었을 때는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95% : 5% 보수(保守) 정당(政黨) 비율(比率)이었으나 2007년(年) 제(第)17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이명박(李明博)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당선(當選)된 시점(時點)엔 80% : 9%로 약화(弱化)되더니 2022년(年) 제(第)20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를 기준(基準)으로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85% : 15% 보수(保守) 정당(政黨) 비율(比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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