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年) AFC 아시안컵
개최(開催)를 위해 효창운동장(曉蒼運動場) 건립(建立) 계획(計劃)이 세워졌는데
위치(位置)가 위치(位置)다 보니
이런저런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特히) 당시(當時) 국회의원(國會議員)이던
김두한
이 격렬히(激烈히) 반대(反對)했다고 전(傳)해져 온다.
아무튼 건축(建築)은 그대로 강행(强行)되었고, 1960 아시안컵 역시(亦是) 무난(無難)하게 개최(開催)해 성공(成功)했다. 당시(當時) 관중석(觀衆席)들도 계속(繼續) 만원(滿員)을 이루어서 관중석(觀衆席) 밑 트랙
[1]
까지 사람들이 들어찼다는 것을 제외(除外)한다면 현재(現在) 효창운동장의 좌석(座席)은 15,000석(席) 남짓인데, 아시안컵 월남전(越南戰)의 경우(境遇)에는 무려(無慮) 3만명(萬名)이 운집(雲集)했다고 하는데, 허나 이건 정식(正式)으로 표(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숫자(數字)였고 실제로(實際로) 경기장(競技場) 주변(周邊)으로 몰린 인원(人員)은 족(足)히
10만여명(萬餘名)
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표(票)를 가지고 있던 3만명(萬名) 조차도 많은 인원(人員)은 경기장(競技場)에 다 들어가지도 못해서, 대(大) 혼란(混亂)이 일어났을 정도(程度)였다고 한다.
[2]
백범김구기념관(白凡金九記念館) 쪽 언덕에 올라가면 경기장(競技場) 전경(全景)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데, 경기장(競技場)에 못 들어가고 여기 언덕에 올라가 관람(觀覽)한 인원(人員)이 바글바글 했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數字)가 몰렸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홈그라운드에서 개최(開催)된
1960년(年) AFC 아시안컵
에서 한국(韓國) 대표(代表)팀은
이스라엘
,
대만(臺灣)
,
남베트남
을 따돌리고 우승컵(優勝컵)을 거머쥐어 2회(回) 연속(連續) 우승(優勝)의 금자탑(金字塔)을 쌓았다.
이후(以後)로도
월드컵
예선(豫選)
[3]
,
올림픽
예선(豫選) 등(等) 굵직한 경기(競技)를 치르다가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
이 국제경기(國際競技)를 치를 수 있도록 리모델링을 마치자 대표(代表)팀 경기(競技) 등(等) 빅매치들을 넘겨주게 되었고 이후(以後) 효창운동장은 국내(國內) 경기(競技)를 주로(主로) 개최(開催)하게 되었다. 1974년(年) 이후(以後)로는 잔디등(等)의 관리부실(管理不實)로 인한 운동장(運動場) 표면(表面)이 흙바닥과 같은 상태(狀態)가 되었고, 비만 왔다하면 수중전(水中戰)(水中戰)이(李) 되는 상황(狀況)이 되어, 거의 버려진 상태(狀態)로 있었고, 1978년(年) 9월(月)29일(日), 1981년(年) 9월(月)30일(日), 서울 시내(市內)의
서라벌중학교(徐羅伐中學校)
,
서라벌고등학교(徐羅伐高等學校)
의 체육대회장(體育大會張)으로 대여(貸與)되기도 했다.
※ 1981년(年) 9월(月)30일(日)의 효창운동장 (서라벌(徐羅伐) 체육대회(體育大會) (
서라벌중학교(徐羅伐中學校)
,
서라벌고등학교(徐羅伐高等學校)
공동(共同) 개최(開催))). 사진(寫眞)에 보이는 전광판(電光板)은 1960년(年)부터 1982년(年)까지 사용(使用)된 것으로, 사진(寫眞) 자체(自體)가 희귀자료(稀貴資料)다.
1983년(年) 4월(月) 1일(日)부터 1983년(年)10월(月) 3일(日)까지는 운동장(運動場) 자체(自體)가 폐쇄(閉鎖)되어, 그 기간(期間) 동안 낡은 시설(施設)을 정비(整備), 보수(保守), 일신(一新)하고, 리모델링하여 1983년(年)10월(月) 3일(日), 재(再) 오픈하였다.
2000년대(年代)까지도 실업축구(實業蹴球), 대학축구(大學蹴球) 등(等)의 경기(競技)는 효창(曉蒼)에서 주로(主로) 개최(開催)되어서 올드 축구(蹴球)팬들에게 효창(曉蒼) 하면 아마축구(蹴球)의 성지(聖地)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효창운동장에서 아마축구(蹴球) 경기(競技)가 개최(開催)되면 중장년(中壯年) 팬들이 고정적(固定的)으로 관중석(觀衆席)을 채우곤 한다.
사진(寫眞)
지금(只今)도
U리그
또는
초중고(初中高) 축구(蹴球)리그
가 열리는 날 효창운동장을 찾아가면 노인(老人) 축구(蹴球)팬들과 함께 경기(競技)를 관전(觀戰)할 수 있다.
1983년(年) 인조(人造)잔디 구장(球場)으로 변모(變貌)했으며 1991년(年),1998년(年), 2008년(年)에 인조(人造)잔디를 교체(交替)했다. 또한 과거(過去)에는 조도(照度)가 너무 낮고 변압기(變壓器)와 전구(電球) 등(等)의 노후화(老朽化)로 폭발(爆發) 위험(危險)이 있어 야간경기(夜間競技)를 하기도 어렵다는 문제(問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問題)는 2017년(年) 10월(月)에 LED 조명(照明)이 설치(設置)되면서 해결(解決)되었다. 이때 전광판(電光板)도 같이 교체(交替)했다.
본부석(本部席)에 작은 지붕이 있고, 전광판(電光板)은 본부석(本部席)의 오른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전광판(電光板)의 뒷편(뒤便)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
기념관(記念館)과
이봉창
의사(醫師)의 동상(銅像)이 보인다.
[4]
위의 사진(寫眞)에서 경기장(競技場) 오른쪽 상편(上篇)에 보이는 흰색(흰色) 대리석(大理石) 건물(建物)이 백범김구(白凡金九) 기념관(記念館)이다.
경기장(競技場) 1층(層)에 설렁탕(설렁湯)집이 있다. 특이(特異)하게도 내부(內部)의 문(門)이 경기장(競技場)과 연결(連結)되어 있다.
인근(隣近)에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가 있다.
조명(照明) 교체(交替)를 했더니 주변(周邊) 주민(住民)들이 밝아서 잠을 못잔다는 민원(民願)이 쏟아져 조도(照度)를 낮췄다고 하며
서울시청(市廳)
서포터즈에게는 소음민원(騷音民願)이 쏟아지니 응원(應援)을 하지말라는
민원(民願)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