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年),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양부
보통문(普通門)
(서문(序文)) 내(內)의 무열사
[17]
앞마을의 양반집(兩班집)에서
머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不遇)한 어린 시절(時節)을 보냈다.
[18]
홍범도(洪範圖)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出産) 후유증(後遺症)으로 사망(死亡)
했고 머슴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世上)을 떠났다.
1877년(年), 9살이 되던 해 머슴 아버지마저 세상(世上)을 떠났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自己)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兩班집) 머슴으로 보내졌다.
1883년(年), 15살이 되던 해 머슴살이를 청산(淸算)하고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平壤) 감영(監營) 소속(所屬) 부대(部隊)의 나팔수(喇叭手)로 입대(入隊)했다.
1886년(年), 부대(部隊) 내(內) 차별(差別)과 폭행(暴行)이 심(甚)한 분위기(雰圍氣)에 처(處)한 상황(狀況)이었고, 자신(自身)을 괴롭히던 장교(將校)를 살해(殺害)하고 4년(年)만에 군(君)을 탈영(脫營)했다. 이후(以後) 도주(逃走)한 뒤, 군대(軍隊) 동료(同僚)의 말을 떠올려 황해도(黃海道) 수안의 제지공장(製紙工場)에 취직(就職)했다. 하지만 공장주(工場主)는 임금(賃金)을 7달이나 주지 않았고, 받으려면
동학(東學)
을 믿으라고 명령(命令)하고 강요(强要)하자 말다툼 끝에 결국(結局) 공장주(工場主)를 살해(殺害)하고 제지공장(製紙工場)을 떠났다.
1890년(年),
금강산(金剛山)
신계사(神溪寺)에서
승려(僧侶)
지담(地膽)(止潭)을 상좌(上佐)로,
출가(出家)
하여
승려(僧侶)
가 되었다. 평생(平生) 교육(敎育)을 못 받았던 홍범도(洪範圖)는 이때야 글과
한국사(韓國史)
에 대(對)해 배우게 되었다.
[19]
절(節) 내(內)에서
비구니(比丘尼)
였던 이씨(李氏)
[20]
를 만나 정분(情分)을 나누었고 임신(妊娠)을 하자 함께 신계사(神溪寺)를 나왔다(
환속(還屬)
). 오갈데가 없어 이씨(李氏)의 처가(妻家)가 있는 북청(北靑)으로 향(向)했으나 가던 길에 건달패(乾達牌)들을 만나 둘은 생이별(生離別)하게 된다.
홍범도(洪範圖)는 이씨(李氏)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生活)을 하다 강원도(江原道)
회양군(淮陽郡)
먹패장골에 남의 땅을 빌어 농사(農事)를 지으며, 밑천을 다 털어 총(銃)을 구매(購買)해 강원도(江原道) 북부(北部)에서 사냥꾼(포수(砲手)) 생활(生活)을 시작(始作)했다.
포수(捕手)
권익(權益) 단체(團體)('포계(怖悸)(砲契)')의 대장(大將)이 되었다.
[21]
1895년(年),
을미의병(乙未義兵)
직후(直後)
일본(日本) 제국(帝國)
이 '총포기화류(銃抛棄花柳) 일제(一齊) 단속법(團束法)'을 발령(發令)하자, 강원도(江原道)
회양군(淮陽郡)
에서 김수협 등(等) 14명(名)과
의병(義兵)
을 일으켰다. 이들은
철령(鐵嶺)
에서 일본군(日本軍) 12명(名)을 사살(射殺)했다.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의 학포로 이동(移動)해, 북상(北上)하던
유인석
의 의병대(義兵隊)와 연계(連繫)했다. 일본군(日本軍)과 3차례(次例)의 전투(戰鬪)를 했다. 김수협 및 여러 의병(義兵)이 죽고 도주(逃走)하는 등(等) 기세(氣勢)가 사그라들자 의병(義兵)을 해체(解體)했다.
황해도(黃海道) 연풍(軟風)에서 금광노동자(金鑛勞動者)가 되었지만 일본군(日本軍)의 감시(監視)가 끊이지 않자 함경도(咸鏡道)로 향(向)했다. 박(朴)말령(令)에서 일본군(日本軍) 3명(名)을 때려눕히고 총(銃) 3정(梃)을 빼앗고, 함경도(咸鏡道) 덕원읍(德源邑)의 좌수(座首) 전성준을 공격(攻擊)해 금품(金品)을 빼앗고 1897년(年)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죽은줄 알았던 아내 이씨(李氏)와 자식(子息)을 5년(年)만에 재회(再會)했다. 북청군(北靑郡) 안산사(安山社) 노은리에 거주(居住)하며 사냥 및 화전농(火田農)으로 생계(生計)를 이었다. 또 다시
포수(捕手)
권익(權益) 단체(團體)('포연대(抛連帶)(捕捐隊)')의 대장(大將)이 되었다.
1907년(年),
정미의병(病)
직후(直後)
일본(日本) 제국(帝國)
이 '총포(銃砲) 및 화약류(火藥類) 단속법(團束法)'으로 총기(銃器)를 수거(收去)하려 하자, 11월(月) 차도선(車道線) 등(等)과 포수(捕手) 70명(名)과 '산포대(山砲隊)'라는
의병(義兵)
을 일으켰다.
일본(日本) 헌병(憲兵)
및
일본(日本) 육군(陸軍)
과(科) 크고 작은 37회(回) 전투(戰鬪)를 벌였다.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의 후치령(厚峙嶺)에선 적군(赤軍) 2명(名)과 순사(巡査) 1명(名)을 사살(射殺)하고, 미(美)야베(宮部) 대위(大尉)가 지휘(指揮)하는 군경(軍警) 70명(名)과 3시간(時間) 격전(激戰)하여 30여명(餘名)을 살상(殺傷)했다.
500~700명(名)까지 의병(義兵)이 늘어, 강원도(江原道)~함경도(咸鏡道)의 삼수(三水), 갑산(甲山), 혜산(惠山), 풍산 등(等)에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수비대(守備隊)를 격파(擊破)했다. 산(山) 속에서 먼 거리(距離)를 신속히(迅速히) 이동(移動)했기에 '나는(Flying) 홍범도(洪範圖)'라는 별명(別名)이 붙었다.
1908년(年)
4월(月), 아내 이씨(李氏)가 고문(拷問)으로 옥사(獄死)한다. 남편(男便)에게 귀순(歸順)을 권(勸)하는 편지(便紙)를 쓰라는 협박(脅迫)에
"계집이나 사내(社內),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英雄豪傑)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
"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일본(日本) 제국(帝國)
이 장남(長男)
홍양순
을 시켜 "이제 그만 투항(投降)하시는게 어떠냐"고 전(傳)했다. 이에 홍범도(洪範圖)가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銃口)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只今) 왜놈(倭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一喝)했다
. 장남(長男)
홍양순
역시(亦是) 설득(說得)되어 의병(義兵)에 합류(合流)하고, 6월(月) 16일(日)
함경남도(咸鏡南道)
정평(定評)
배기(排氣) 전투(戰鬪)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戰死)했다.
[22]
10월(月), 동지(冬至) 3명(名)과
연해주(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로 근거지(根據地)를 옮기고, 두만강(豆滿江)을 넘나들며 일본군(日本軍)을 공격(攻擊)했다. 차남(次男) 홍용환도(度) 아버지와 연해주(沿海州)로 이주(移住)해 의병(義兵) 활동(活動)을 했으나
결핵(結核)
으로 병사(病死)했다.
…당대(當代)(當隊)가 폭도(暴徒)
[23]
의 풍모(風貌)를 가장(假裝)하고 행동(行動)했더니 촌민(村民)은 이를 매우 환영(歡迎)하고 자진(自進)하여 주식(株式)(酒食)을 향응(響應)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一般)(주민(住民))의 의향(意向)을 측정(測定)하기 어려운 점(點)이 적지 않다.…
1908년(年) 10월(月) 13일(日) 제(第)3순사대(巡査隊) 경부(京釜)(警部) 와타나베 마사카츠(波邊正勝)의 보고서(報告書)
1909년(年) 6월(月), 다시 고국(故國)으로 돌아와, 북청(北靑), 갑산(甲山), 혜산(惠山) 일대(一帶)에서 항일(抗日) 활동(活動)을 전개(展開)했다. 이를 들은 (을미의병(乙未義兵) 시기(時期) 친(親)해진)
유인석
이 '역량(力量)을 키우라'는 격려(激勵)/권고(勸告) 편지(便紙)를 보냈다.
이후(以後) 계속(繼續)된 일본군(日本軍)의 토벌전(討伐戰) 및
만주(滿洲)
군벌(軍閥)
과의 충돌(衝突)로 인해 홍범도(洪範圖)를 포함(包含)한 독립군(獨立軍) 세력(勢力)은 소비에트 러시아 영내(領內)로 탈출(脫出)했다. 그 과정(過程)에서
제국주의(帝國主義)
에 탄압(彈壓)받던 소수민족(少數民族)과 연대(連帶)하던 소련(蘇聯)의 방침(方針)은 매력적(魅力的)인 선택지(選擇地)였으며, 곧 홍범도(洪範圖)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獨對)해 마우저 권총(拳銃)을 선물(膳物)받을 정도(程度)로 소련(蘇聯) 한국계(韓國系)의 거물(巨物)로 성장(成長)하게 된다.
|
홍범도(洪範圖)의 소비에트 러시아 입국신고서(入國申告書).
'직업(職業)' 항목(項目)에
의병(義兵)
, '목적(目的)과 희망(希望)' 항목(項目)에
고려독립(考慮獨立)
이라고 쓴 것이 인상적(印象的)이다.
|
내용(內容) 해석(解釋)
- [ 펼치기 · 접기 ]
調査表
高麗部
Ⅰ
姓名
과
生年
.
月
.
日
.: 1868
八
월(月)
二十七日
홍범도(洪範圖)
Ⅱ
敎育
: 국문(國文)
Ⅲ
職業
:
의병(義兵)
二十八年
Ⅳ
社會上
地位
(
士族
,
平民
,
紳士
等 別
)
: 농사(農事)
Ⅴ
如何
한
委任狀
을 가지고 오(誤)셧소?: 의병(義兵)듸
Ⅵ 언(言)으
政?
或
은
團?
에
屬
하(河)엿소: 업소(業所)
Ⅶ 언(言)으
勞?組合
에
屬
하(河)엿소: 업소(業所)
Ⅷ
何月何日
에 어대셔 로시아
國境
을 넘어오셧소: 18/Ⅰ 1921 이만
Ⅸ
目的
과
希望
:
고려독립(考慮獨立)
Ⅹ 언(言)으
外國
말을 알으시요: 업소(業所)
?
以前
에 로시아에셔 오래동안 머무러섯난지요: 1905에 와셔 1921년(年)ㅺㆍ지 잇섯소
?
備考
:
署名
: 홍범도(洪範圖)
현대어(現代語) 해석(解釋)
- [ 펼치기 · 접기 ]
조사표(調査表)
고려부
1. 성명(聲明)과 생년월일(生年月日): 1868년(年) 8월(月) 27일(日) 홍범도(洪範圖)
2. 교육(敎育): 국문(國文)
3. 직업(職業): 의병(義兵) 28년(年)(차(車))
4.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
(
사족(士族)
, 평민(平民), 신사(紳士) 등(等) 별(別)
: 농사(農事)
5. 어떤 위임장(委任狀)을 가지고 오셨소?: 의병대(義兵隊)
6. 어느 정당(政黨) 혹은(或은) 단체(團體)에 속(屬)하였소?: 없소
7. 어느 노동조합(勞動組合)에 속(屬)하였소?: 없소
8. 몇 월(月) 며칠에 어디에서 러시아 국경(國境)을 넘어오셨소?: 1921년(年) 1월(月) 18일(日)
이만
9. 목적(目的)과 희망(希望):
고려(高麗) 독립(獨立)
10. 어느 외국어(外國語)를 아시오?: 없소
11. 이전(以前)에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머무르셨는지요?: 1905년(年)에 와서 1921년(年)까지 있었소
12. 비고:
서명(署名): 홍범도(洪範圖)
1921년(年) 3월(月), 자유시(自由詩)에 도착(到着)한 홍범도(洪範圖)는 당시(當時) 주도권(主導權)을 쥔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중심(中心)의 독립군(獨立軍) 통합(統合)에 찬성(贊成)했다가 이후(以後) 주도권(主導權)이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넘어가자 1921년(年) 5월(月) 기존(旣存) 태도(態度)를 바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중심(中心)의 통합(統合)에 힘을 실어주었다. 홍범도(洪範圖)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統合)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에 본격적(本格的)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歷史學界)의 해석(解釋)이다. 당시(當時) 홍범도(洪範圖)에게는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없었다고 한다.
#
1922년(年)
2월(月), 홍범도(洪範圖)는
모스크바
에서
코민테른
의 주최(主催)로 열린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 혹은(或은) 원동약소민족대회(遠東弱小民族大會))에 참석(參席)하기 위해
모스크바
에 갔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
이
트로츠키
를 통해 홍범도(洪範圖)를 따로 불러 단독(單獨) 면담(面談)을 한 다음 금화(金貨)와 홍범도(洪範圖)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銀製)
마우저 C96
을 선물(膳物)해 주었다. 독립군(獨立軍) 중(中)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單獨) 면담(面談)을 한 것은 홍범도(洪範圖)가 유일(唯一)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拳銃)
은 현존(現存)하지 않지만 권총집(拳銃집)은 지금(只今)도 남아 있다.
권총집(拳銃집)
이후(以後)
1922년(年)
일본(日本)의 연해주(沿海州) 간섭군(干涉軍) 철수(撤收)를 조건(條件)으로 일본(日本)이 요구(要求)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단체(團體)의 해산(解散)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結局) 홍범도(洪範圖) 이하(以下) 공산당(共産黨) 측(側) 독립군(獨立軍)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同僚)들은
상하이
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로 가거나 다른 지방(地方)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家族)도 없던 홍범도(洪範圖)는 결국(結局) 소련(蘇聯)에 잔류(殘留)해 소련(蘇聯) 시민(市民)으로서의 삶을 시작(始作)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番째) 부인(夫人) 이인복과 재혼(再婚)했다.
1923년(年) 8월(月)
하바롭스크
에서 러시아 극동(極東)과 일본(日本)에서 악명(惡名)이 자자(藉藉)했던
사할린 부대(部隊)
에 소속(所屬)됐던 김창수(金昌洙)와 김오남이 홍범도(洪範圖)의 암살(暗殺)을 시도(試圖)하며 불시(不時)에 공격(攻擊)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負傷)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洪範圖)는
블라디미르 레닌
에게서 받은 권총(拳銃)으로 이들을 사살(射殺)하고 감옥(監獄)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證明書) 덕(德)에 석방(釋放)됐다고 한다. 해당(該當) 사건(事件)의 현실(現實)에 대(對)한 설명(說明)은 아래 독립군(獨立軍) 학살(虐殺) 누명(陋名) 문단(文段)이 자세(仔細)하다.
홍범도(洪範圖)는 그간(그間)의 무훈(武勳)으로 얻은 인망(人望)에 힘입어
1923년(年)
연해주(沿海州)
남부(南部)에서 한인(韓人)
콜호즈
를 비롯한 지역(地域) 사회(社會)의 지도자(指導者)가 되었고
1927년(年)
소련(蘇聯) 공산당(共産黨)
에 정식(正式)으로 입당(入黨)했다.
[27]
이후(以後) 연해주(沿海州)의
고려인(高麗人)
지도자(指導者) 중(中) 1명(名)으로서 지속적(持續的)으로 활동(活動)했으나
1937년(年)
이오시프 스탈린
에 의(依)해 이뤄진 고려인(高麗人) 강제(强制) 이주(移住)로 인해 당시(當時)
소련(蘇聯)
영토(領土)였던
카자흐 SSR
로 이주되었다.
이후(以後)
크즐오르다
에 위치(位置)한 고려극장(考慮劇場)에서 고려인(高麗人) 희곡(戱曲) 작가(作家) 태장춘(長春)의 배려(配慮)로 수위장(守衛長)을 맡았고 연금(年金)을 받으며 생활(生活)하였는데 홍범도(洪範圖)는 매월(每月) 80루블의 연금(年金)과 50루블의 보수(報酬)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生活)할 수 있었다. 1936년(年) 기준(基準), 소련(蘇聯) 노동자(勞動者)들의 평균(平均) 임금(賃金)은 150 ~ 200 루블, 연금(年金)은 25 ~ 50 루블이었다. 1달 수입(輸入)이 130 루블이면 당시(當時)의 평균(平均) 임금(賃金)보다 꽤 낮은 편(便)이지만 부양가족(扶養家族)이 없었고 수위(守衛) 자리도 홍범도(洪範圖)에게 생활비(生活費) 챙겨 주려고 일부러 마련한 자리라 편(便)했기에 생활(生活)에 큰 문제(問題)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1936년(年) 기준(基準) 소련(蘇聯) 1루블은 약(約) 0.8달러에 해당(該當)하였고, 이는 당시(當時) 미국(美國)의 비숙련(非熟鍊) 중졸(中卒) 노동자(勞動者)가 200시간(時間)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金額)에 해당(該當)한다.
[28]
당시(當時)의 크슬오르다는 수많은 고려인(高麗人)들이 정착(定着)을 한 지역(地域)으로 고려인(高麗人) 신문사(新聞社), 원동조선사범대학(遠東朝鮮師範大學),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放送局), 하바롭쓰크출판사 조선부(朝鮮賦) 등(等)의 고려인(高麗人)들이 세운 문화기관(文化機關)들이 즐비(櫛比)한 곳이었다. 홍범도(洪範圖)와 자주 교류(交流)했던 소설가(小說家) 김기철에 의(依)하면 이러한 크슬오르다의 생활환경(生活環境)이 홍범도(洪範圖)의 말년(末年) 생활(生活)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태장춘(長春)의 아내 리(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로서의 활약상(活躍相)을 구술(口述)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洪範圖) 일지(日誌)>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洪範圖) 일지(日誌)를 토대(土臺)로 한
연극(演劇)
<홍범도(洪範圖)>가 고려극장(考慮劇場)에서 상영(上映)되는데, 이를 관람(觀覽)한 홍범도(洪範圖)는 자신(自身)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
홍범도(洪範圖)가 맡은 직책(職責)인 수위장도(守衛長度) 고려극장(考慮劇場)의 배려(配慮)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洪範圖)는 고려극장(考慮劇場)의 제일(第一) 뒷편(뒤便)에 앉아 당시(當時) 인기리(人氣裡)에 상영(上映) 중(中)이던 연극인(演劇人) <춘향전(春香傳)>, <
심청전(沈淸傳)
> 등(等)을 관람(觀覽)하고 주연(主演) 배우(俳優)들과 담소(談笑)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年)
6월(月)
독소전쟁(戰爭)
이 발발(勃發)한 이후(以後)에는 '물자(物資)를 아껴 전선(戰線)의 병사(兵士)들을 돕자'는 선전활동(宣傳活動)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旗幟)>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戰線) 소식(消息)을 전(傳)하거나 직접(直接) 글을 투고(投稿)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參戰)을 독려(督勵)하기도 하였다.
#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蘇聯韓人極端)>에 의(依)하면 홍범도(洪範圖)는 2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일어나자 73세(歲)의 나이로 소련(蘇聯) 정규군(正規軍)에 지원(支援)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당시(當時) 상황(狀況)을 목격(目擊)한 한인예술가(韓人藝術家) 전창화에 의(依)하면 자원입대(自願入隊)를 거절당(拒絶當)한 홍범도(洪範圖)는 자신(自身)의 실력(實力)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證明)하기 위해 사격장(射擊場)에 사람을 불러모은 뒤 25미터 떨어진 거리(距離)에서 작은 동전(銅錢)을 총(銃)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실력(射擊實力)을 과시(誇示)하기도 하였다.
1942년(年)
4월(月) 홍범도(洪範圖)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考慮劇場)이 카자흐 SSR 동부(東部) 우슈토베(?шт?бе / U?tobe)로 옮겨간 이후(以後)에는 정미소(精米所) 노동자(勞動者)로 일하다가
1943년(年)
10월(月) 25일(日)
노환(老患)으로 사망(死亡)했다. 독립군(獨立軍)들은 교전(交戰) 중(中) 사살당하거나 투옥(投獄) 중(中) 고문(拷問) 후유증(後遺症)으로 젊었을 때 사망(死亡)한 경우(境遇)가 많다. 홍범도(洪範圖)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투신(投身)했고 소련(蘇聯)에 의(依)해 중앙아시아(中央아시아)로 강제이주(强制移住)된 고려인(高麗人)의 한 명(名)인
김경천
은 홍범도(洪範圖)가 죽기 1년(年) 전(前)인 1942년(年) 1월(月) 2일(日)에 사망(死亡)했다고
알려졌다
. 알려졌다고 쓴 이유(理由)는
김경천
항목(項目) 참조(參照).
좌우(左右)를 막론(莫論)하고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들 대다수(大多數)가 일본군(日本軍)에 의(依)해 사살당하거나
여운형
,
김립(金笠)
,
김구(金九)
[29]
등(等)
백색(白色)테러
에 희생(犧牲)당하거나 좌우(左右) 갈등(葛藤)에 희생(犧牲)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亡命) 국가(國家)에서 암살당하는 등(等)의 고생(苦生)을 겪으면서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 해 죽고 말았는데 홍범도(洪範圖)는 보기 드물게 노환(老患)으로 죽은 케이스다. 하지만 고국(故國)을 떠나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쓴 입국신고서(入國申告書)에서 소원(所願)을 묻는 질문(質問)에 "
고려(高麗) 독립(獨立)
"이라고 쓸 정도(程度)로 죽는 순간(瞬間)까지 조국(祖國) 독립(獨立)을 염원(念願)했던 그가 결국(結局) 전쟁(戰爭)의 종식(終熄)과 광복(光復)을 보지 못했으니 어떤 심경(心境)으로 눈을 감았을지는 본인(本人)만이 알 것이다.
1962년(年) 10월(月) 25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로부터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服裝)'이 추서(追敍)되었는데 현재(現在)의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통령장(大統領章)이다. 당시(當時)의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은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의장(議長).
1991년(年)
카자흐스탄
이 구(區)
소련(蘇聯)
에서
독립(獨立)
한 이후(以後)
김영삼(金永三)
대통령(大統領)이 유해(遺骸) 송환(送還)을 추진(推進)하기도 하였으나 당시(當時) 남북한(南北韓)
대사관(大使館)
간(間)에
외교(外交)
전(前)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범도(洪範圖)의 유해(遺骸) 송환(送還)을 추진(推進)한 것은 남한(南韓)보다도 북한(北韓)이 앞서서, 이미 1993년(年)부터 1994년(年)까지
북한(北韓)
은 카자흐스탄 정부(政府)에 대(對)해 홍범도(洪範圖)의 유해(遺骸)를 북한(北韓)으로 송환(送還)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高麗人) 사회(社會)에서 나서서 이를 거부(拒否)했다.
전(前) 주영북한(駐英北韓) 공사(公使)인
태영호(太永浩)
국민의힘(國民의힘) 의원(議員)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獨立)한 뒤 북한(北韓)은 카자흐스탄에 학교(學校)도 세우고 교사(敎師)들도 파견(派遣)하며 고려인(高麗人) 예술단(藝術團)도
평양(平壤)
에 초청(招請)하였으나 전반적(全般的)인 고려인(高麗人) 사회(社會)의 반응(反應)은 냉랭(冷冷)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高麗人) 가운데는
광복(光復)
이후(以後) 소련군(蘇聯軍)이 주둔(駐屯)한 북한(北韓) 지역(地域)으로 귀환(歸還)했고
6.25 전쟁(戰爭)
에도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
으로 참전(參戰)했다가 이후(以後)
김일성의 독재(獨裁) 권력(權力) 구축(構築) 과정(過程)에서 숙청(肅淸)
되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소련파(蘇聯派)
항목(項目) 참조(參照)).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國家)
라고 해서 마냥 북한(北韓)에 우호적(友好的)인 게 아니라는 것.
[30]
거기에 소련(蘇聯)이나 친소(親蘇) 성향(性向)
위성국(衛星局)
들은
중국(中國)-소련(蘇聯) 국경분쟁(國境紛爭)
당시(當時) 중립(中立)을 지향(志向)한 것 때문에 북한(北韓)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우(境遇)가 많았다. 이후(以後) 북한(北韓)이
핵실험(核實驗)
을 진행(進行)하면서 고려인(高麗人)들의 북한(北韓)에 대(對)한 인식(認識)은 바닥을 쳤는데 북한(北韓)이 2015년(年) 말(末) 카자흐스탄
수도
에 대사관(大使館)을 개설(開設)하겠다고 했으나 2016년(年) 4차(次) 핵실험(核實驗)으로 불허(不許)당하고 2017년(年) 북한(北韓)의 연(連)이은 핵실험(核實驗)과 대륙간탄도미사일(大陸間彈道미사일)(
ICBM
) 발사(發射)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高麗人)들이 규탄(糾彈)하면서 카자흐스탄은 북한(北韓)과의 거의 모든 관계(關係)를 동결(凍結)시켰다.
#
1995년(年) 광복(光復) 50주년(周年)을 맞아 남한(南韓)도 카자흐스탄에 정부(政府) 조사단(調査團)을 보내 묘소(墓所) 조사(調査)와 함께 유해(遺骸) 송환(送還)을 협의(協議)했는데 북한(北韓)은 1995년(年) 8월(月) 28일(日) 평양(平壤)
방송(放送)
을 통해 "홍(洪) 장군(將軍) 유해(遺骸) 봉환(奉還)은 (남측(南側)의) 사기(詐欺) 협작극(協作劇)이며 홍범도(洪範圖) 열사(烈士)의
고향(故鄕)
이 평양(平壤)이고
후손(後孫)
들도 평양(平壤)에 있기 때문에 평양(平壤)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이후(以後) 봉환(奉還) 계획(計劃)은 쑥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97년(年) 5월(月) 한국(韓國)
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
와 기업(企業)은 홍(洪) 장군(將軍) 묘역(墓域) 정비(整備) 사업(事業) 지원(支援)에 1만(萬)
달러
를 투입(投入)해 홍(洪) 장군(將軍) 흉상(胸像) 주변(周邊)에 3개(個) 기념비(記念碑)를 건립(建立)하고 공원(公園) 묘역(墓域)을 단장(丹粧)했다.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
태생(胎生)에 아들
김두한
, 손녀(孫女)
김을동(金乙東)
등(等)
가족(家族)
이 남한(南韓)에 있었던
김좌진
과는 달리 홍범도(洪範圖)는 태생(胎生)이 평양(平壤) 출생(出生)이었던지라
대한민국(大韓民國)
입장(立場)에서도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데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高麗人)들이 크즐오르다 묘역(墓域)을 존치(存置)시키자고 해서 유지(維持)되었다.
#
홍범도(洪範圖)의 묘지(墓地)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共同墓地)에 있었고
스탈린
사후(事後)
소수민족(少數民族)
탄압(彈壓)이 중지(中止)되면서 업적(業績)을 인정(認定)받고 복권(復權)되어
크즐오르다
에 홍범도(洪範圖) 거리(距離)도 생겼다. 카자흐스탄 고려인(高麗人)들의 정신적(精神的) 지주(地主)나 다름없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高麗人)들이 묘소(墓所)를 매우 정성(精誠)껏 관리(管理)했다고 하는데 실제로(實際로) 묘지(墓地) 관리(管理) 상태(狀態)가 매우 우수(優秀)했다.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에서도 고려인(高麗人)의 입장(立場)을 들어 유해(遺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에 봉환(奉還)하지 말고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존치(存置)시키자는 주장(主張)도 있었다. 유해(遺骸)를 봉환(奉還)하면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高麗人)들을 위(爲)해서 카자흐스탄에 위치(位置)한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묘역(墓域)에 정부(政府)가 추모(追慕) 공원(公園)을 만들기로 했다.
#
| |
현장(現場) 영상(映像)
| 해설(解說) 영상(映像)
|
광복(光復) 전(前)까지 소련(蘇聯)에서 여생(餘生)을 보냈고 출생지도(出生地度) 평양(平壤)인지라 북한(北韓)이 유해(遺骸)를 평양(平壤)으로 옮기자면 얼마든지 가능(可能)했고 이것만 본다면 명분(名分)은 북한측(北韓側)이 더 컸다. 하지만 당시(當時)
김일성(金日成)
은 이승만(李承晩)이 그랬던 것처럼
[31]
자신(自身)의 항일(抗日) 업적(業績)만 내세우고 자신(自身)을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의 중심(中心)으로 내세우기 위해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봉오동 전투(戰鬪)와 같은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은 인정(認定)하지 않았다. 심지어(甚至於) 김일성(金日成)이 "홍범도(洪範圖)는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는 아니다"라고까지 하면서 배척(排斥)했었다는 소문(所聞)이 있었고 당연히(當然히) 이는
김정일(金正日)
집권기(執權期)까지 이어졌다.
그러던게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가 유해(遺骸) 봉환(奉還)을 추진(推進)하자 갑자기 고향(故鄕)인 평양(平壤)에 안치(安置)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
#
2021년(年) 8월(月) 12일(日)
청와대(靑瓦臺)
는 카자흐스탄 대통령(大統領) 토(土)카예프의 방한(訪韓)과 연계(連繫)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安葬)되어 있는 홍범도(洪範圖)의 유해(遺骸)를 봉환(奉還)할 예정(豫定)이라고 밝혔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大統領)은 유해(遺骸) 봉환(奉還)을 위해 8월(月) 14일(日)
국가보훈처장(國家報勳處長)
황기철
을 특사(特赦)로 하는 특사단(特使團)을 카자흐스탄에 파견(派遣)하였다.
#
이 특사단(特使團)에는 배우(俳優)
조진웅
도 동행(同行)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기념사업회(記念事業會)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洪範圖將軍記念事業會)
홍보(弘報)
대사(臺詞)로도 활동(活動) 중(中)인데 그동안 영화(映畫) <
암살(暗殺)
>과 영화(映畫) <
대장(大將) 김창수(金昌洙)
> 등(等)에 출연(出演)하면서 독립투사(獨立鬪士)들에 대(對)한 숭고(崇高)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유해(遺骸)를 송환(送還)하는 특사단(特使團)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洪範圖將軍記念事業會) 회장(會長)이자 특사단(特使團)의 일원(一員)인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우원식(禹元植)
의원(議員)의 제안(提案)에 따른 것인데 우원식 의원(議員)이 그를 추천(推薦)한 뒤 소감(所感)을 묻는 질문(質問)에 "두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제가 세상(世上) 모든 일은 뒤로 미뤄놓더라도 이 일은 해야죠. 그리고 너무나 기뻤고 감사(感謝)했습니다"라고 대답(對答)했다고 한다.
#
조국(祖國)의 독립(獨立)을 위해 평생(平生)을 헌신(獻身)하신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님의 귀환(歸還)을 모시게 되어 영광(榮光)입니다.
지금(只今)부터 대한민국(大韓民國) 공군(空軍)이 안전(安全)하게 호위(護衛)하겠습니다. 필승(必勝)!
홍범도(洪範圖)의 유해(遺骸)를 실은(實은) 군(軍) 수송기(輸送機)가 서해방공식별구역(西海防空識別區域)에 진입(進入)했을 때 봉환용(奉還龍) 기체(氣體)로
KC-330 시그너스
1호기(號基)가 투입(投入)되었다.
기사(記事)
.
호위기(護衛機)
로는
F-15K
,
F-4E
,
F-35A
,
F-5F
,
KF-16D
,
FA-50
등(等)
대한민국(大韓民國) 공군(空軍)
이 운용(運用)하는 모든 종류(種類)의
전투기(戰鬪機)
가 출격하여 최고(最高)의 예우(禮遇)를 했다. 기체(機體) 좌측(左側) KF-16D, F-35A, F-15K. 기체(機體) 우측(右側) F-4E, F-5F, FA-50 순서(順序)로 위치(位置)했다. 사진(寫眞) 촬영(撮影)을 위해 대열(隊列) 바깥쪽에 F-15K 1기(期)가 더 동원(動員)되었다. 사진(寫眞) 촬영(撮影)을 위한 F-15K 외(外)에도 봉환(奉還) 영상(映像)이 공군(空軍)
유튜브
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영상(映像) 촬영(撮影)을 위한 KF-16 또는 FA-50 1기(期)가 추가(追加) 동원(動員)되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이제까지 유해(遺骸) 봉환(奉還)과는 다르게 호위(護衛) 기체(氣體)와 봉환(奉還) 기체(氣體)가 영공(領空)에 진입(進入)해 플레어로 예포(禮砲)까지 쏘면서 극진히(極盡히) 예우(禮遇)했다.
#
#
#
#
#
봉환(奉還) 후(後)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前賢充員)
현충관에 유해(遺骸)를 임시(臨時) 안치(安置)했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현충원(顯忠園) 안장(鞍裝)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흙과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묘역(墓域)에 있던 카자흐스탄의 흙과 함(函)게 허토(허土)됐다.또한
국민(國民)
분향소(焚香所)를 열어 16일(日)과 17일(日) 양일간(兩日間) 국민(國民) 추모(追慕) 기간(期間)을 보냈다.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는 출범(出帆) 이후(以後) 애용(愛用)하던
신영복
의 글씨체(글씨體)(신영복체(體))를 활용(活用)하여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묘비(墓碑)에 글을 새겼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안장식(安葬式)에는 국빈방문(國賓訪問)한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大統領)도 함께했다. 2021년(年) 8월(月) 17일(日) 문재인(文在寅) 대통령(大統領)은 홍범도(洪範圖)에게 건국훈장(建國訓長) 최고(最高) 등급(等級)인 대한민국장을 추서(追敍)하였는데
여운형
에 이어 2번째(番째) 대한민국장, 대통령장(大統領章) 중복(重複) 수훈자(受勳者)가 되었으며 훈장(勳章)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洪範圖將軍記念事業會) 우원식(禹元植) 이사장(理事長)이 대신(代身) 받았다. 추서식(秋棲息)에는 방한(訪韓) 중(中)인 카자흐스탄 대통령(大統領)도 참석(參席)했으며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사망(死亡)
진단서(診斷書)와 말년(末年)에 수위(守衛)로 일했던 '고려극장(考慮劇場)'의 사임서(辭任書) 등(等) 2건(件)의 사료(飼料)를 전달(傳達)했다. 2021년(年) 8월(月) 18일(日)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前賢充員)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3묘역(墓域)에 안장(安葬)되었다.
#
청와대(靑瓦臺) 트위터
청와대(靑瓦臺)는 이번(이番) 유해(遺骸) 봉환(奉還)이 남북(南北) 체제경쟁(體制競爭)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승리(勝利)라고 평가(評價)했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유해(遺骸) 봉환(奉還)을 저지(沮止)하려는 북한(北韓)과의 오랜 경쟁(競爭)에서 승리(勝利)했다는 것이다.
#
[32]
홍범도(洪範圖)의 봉환(奉還) 이후(以後) 한
네티즌
이 홍범도(洪範圖) 유해(遺骸) 봉환(奉還)을 기념(記念)하여 "1911 - 2021"이라는 제목(題目)의
그림
을 올렸다. 1911년(年)에
독립운동(獨立運動)
을 위해
연해주(沿海州)
로
망명(亡命)
한 이후(以後) 2021년(年)에야 고국(故國)에 묻혀 영면(永眠)을 취(取)할 수 있게 되었음을 표현(表現)한 듯. 답(答)글을 살펴보면 '
고국(故國)
에는 돌아오셨는데
고향(故鄕)
에 모시지 못해 너무 죄송(罪悚)합니다'라며 안타까워하는 반응(反應)도 있다. 그림에서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은
비행기(飛行機)
창문(窓門)을 통해 조국(祖國)의 찬란(燦爛)한 야경(夜景)을 바라보며 감회(感懷)에 젖은 모습으로 묘사(描寫)되었다.
다른 네티즌은 서울공항(空港)에 도착(到着)한 후(後)
대한민국(大韓民國) 국군(國軍)
의장대(儀仗隊)를 사열(査閱)하는
그림
을 남겼다.
복잡(複雜)하게 얽힌 당시(當時)의 정황(情況)을 자세히(仔細히) 살펴보지 않은 왜곡(歪曲)된 주장(主張)(이념(理念) 대립(對立))으로 국민(國民)을 오도(誤導)해서는 안 된다.
반병률 교수(敎授)
홍(洪) 장군(將軍)의 부대(部隊)가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 가담(加擔)했다는 기록(記錄)은 전혀(全혀) 없고, 오히려 참변(慘變) 당시(當時) 홍(洪) 장군(將軍)이 휘하(麾下) 장교(將校)들과 인근(隣近)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痛哭)했다는 증언(證言)만 있다.
윤상원 교수(敎授)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논란(論難)은 소련(蘇聯) 측(側)의 무장해제(武裝解除) 요구(要求)를 수용(受容)하자는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방침(方針)을 반대(反對)한 사람들의 비난(非難)한 결과(結果). 당시(當時) 러시아 홍군(紅軍) 측(側)은
우리 독립군(獨立軍)에게 ‘남의 나라에서 무기(武器)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
고 말했고 무기(武器)를 반납(返納)하고 허락(許諾)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했다”면서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도 처음엔 거부(拒否)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비극적(悲劇的)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따르자는 쪽으로 의견(意見)이 바뀌었다
특히(特히) 최근(最近) 일부(一部) 언론(言論)이나 인사(人士)들이 제기(提起)한 홍범도(洪範圖)의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1921년(年) 6월(月) 28일(日))’ 가담설(加擔說)이나 ‘자유시(自由詩) 학살(虐殺)’ 개입설(介入說),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대학살(大虐殺)’, ‘독립군(獨立軍) 학살(虐殺) 공모(公募)’ 등(等)은
전혀(全혀) 사실(事實)이 아니다.
장세윤, "‘독립전쟁(獨立戰爭)의 영웅(英雄)’ 홍범도(洪範圖)의 귀환(歸還), 그 시사점(示唆點)과 과제(課題)", 역사(歷史)와 현실(現實) 121, 2021, 15쪽.
#
1921년(年)
연해주(沿海州)
및
시베리아
로 후퇴(後退)한 독립군(獨立軍)은 결국(結局) 소련(蘇聯)의 지원(支援)을 받기 위해
자유시(自由詩)
로 이동(移動)했다. 하지만 곧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측(側) 독립군(獨立軍) 일부(一部)가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범도(洪範圖) 측(側) 부대(部隊)는 안무(按舞),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等) 다른 대부분(大部分)의 간도독립군(間島獨立軍)과 함께 이미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의 현장(現場)인 수라젭카에 없었다.
[35]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史學科)
교수(敎授)에 따르면 홍범도(洪範圖)는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의 소식(消息)을 전(傳)해듣고
장교(將校)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痛哭)
했다고 한다.
[36]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의 사상자(死傷者)는 수십(數十) 명(名)이라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견해(見解)
[37]
이다.
권희영
교수(敎授)도 발표(發表) 논문(論文)에서 최소(最小) 사망자(死亡者)의 수(數)를 36명(名)으로 기재(記載)했다.
사망(死亡) 36명(名) 포(砲)로 964명(名) 병자(病者)로 불참한자(不參漢字)가 19명(名) 박(朴)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逃亡漢字) 34명(名) 기외(旣外) 59명(名) 행방불명(行方不明)이었다. 무장해제(武裝解除)를 집행(執行)한 군대(軍隊)는 사자1명 29연대(聯隊) 사자(獅子) 1명(名)이었다.
권희영
, 자유시(自由詩) 사변(事變) 연구(硏究), 한인(韓人)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연구(運動硏究),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독립군(獨立軍)이 몰살당했다고 표현(表現)하기에도 어렵다.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은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당시(當時) 사건(事件)이 일어난 수라세프카에 없었으며 홍범도(洪範圖)의 부대(部隊)는 이미
자유시(自由詩)
에서 다른 독립군(獨立軍) 부대(部隊)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甚至於) 해당(該當) 사건(事件)으로 희생(犧牲)당한 부대(部隊)는 김좌진(金佐鎭)이 아닌 허재욱이 이끌던 의군부(義軍府) 부대(部隊)였다. 사건(事件) 이후(以後) 김좌진(金佐鎭)에게 합류(合流)하려던 부대(部隊)가 무장(武裝) 해제(解除)를 당(當)한 일도 있었으나 이는 훨씬 후(後)의 일이며, 그것도
중화민국(中華民國)
군대(軍隊)에 의(依)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한便)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이후(以後) 포로(捕虜)로 잡힌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독립군(獨立軍)에 대(對)한 군사재판(軍事裁判)에서 홍범도(洪範圖)는 고려혁명군사법원(高麗革命軍事法院) 재판관(裁判官)의 위원(委員)으로 참석(參席)하게 된다. 극우(極右) 일각(一角)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 책임(責任)이 있다고 주장(主張)하는 이유(理由)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은 항일의병장(抗日義兵將)으로서 명성(名聲)이 높은 홍범도(洪範圖)를 위원(委員)으로 선임(選任)해 재판(裁判)이 정당(正當)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재판(裁判)은 정작 흐지부지되었으며 실형(實刑)이 선고(宣告)된 사람도 손에 꼽는다.
추가(追加)로,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를 무장해제(武裝解除)시켰다'는
프레임
도 사실(事實)이 아니다.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 당시(當時) 가해자(加害者)인 이르쿠츠크파야말로 급진적(急進的)인 한국해방작전(韓國解放作戰)은 추진(推進)했던 세력(勢力)이었다.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極東事務局長)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훈련(訓鍊)하고,
만주(滿洲)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韓國)으로 향(向)하는 전승(戰勝) 행군(行軍)을 조직(組織)하는 모험적(冒險的)인 계획(計劃)을 완성(完成)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指揮) 하(下)에 조선혁명운동(朝鮮革命運動)의 거점(據點)을 이르쿠츠크에 구축(構築)하는데 착수(着手)했다.
(중략(中略))
그러나
극동(極東) 공화국(共和國) 정부(政府)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政府)에 호소(呼訴)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冒險)을 제지(制止)할 수 있었다
. 극동(極東) 공화국(共和國)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大統領)은
극동(極東) 공화국(共和國)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라핀 총사령관(總司令官)의 의견(意見)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限), 한국(韓國) 조차도 동족(同族)이 외부(外部)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準備)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韓國)으로 향(向)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韓人) 공산당(共産黨) 사절단(使節團)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詩)빌리 세력(勢力)이 한국(韓國) 국경(國境)에 성공적(成功的)으로 도달(到達)할 지에 대(對)해서는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軍事文書保管所). F.221. Op.1. D.376. L.86,89) )
일본(日本)의 도발(挑發)을 두려워 하며, 1921년(年) 6월(月)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計劃)된 모험(冒險)에 항의(抗議)
하는 전보(電報)를 보냈다: “….
한인(韓人)들에 대(對)한 슈마츠키의 계획(計劃), 일본(日本)의 도발(挑發)을 유도(誘導)하게 될 계획(計劃)에 절대적(絶對的)으로 반대(反對)한다
. 특히(特히) 그는 한국(韓國)으로 진군(進軍)하면서 한인(韓人)들을 지휘(指揮)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雜音)을 일으키며 극동(極東) 공화국(共和國) 전역(全域)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意識)이 흐릿한 동방(東方) 전역(全域)에서 유명(有名)한 유격대원인(遊擊隊員人)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首長)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事實)은, 1)
4,000 명(名)이 한인(韓人)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日本人)들 앞에 집결(集結)해 약탈(掠奪), 강간(强姦) 등(等) 끔찍한 만행(蠻行)을 자행(恣行)하고 있으며, 자기(自己) 측(側)에서 선출(選出)된 지휘부(指揮部)에만 복종(服從)하고 있다….. 노인네(老人네)(칼란다리시(詩)빌리)가 2 천(千)노리의 한국(韓國) 진군(進軍)을 위해 한인(韓人)들과 중국(中國) 영토(領土)로 이동(移動)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詩人)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三國協約)의 눈앞에서 완전히(完全히) 정당화(正當化)된 일본(日本)의 공격(攻擊)을 유발(誘發)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外交人民委員會)는 이에 대(對)한 답변(答辯)으로 이 '모험(冒險)을 가능(可能)한 한(限) 조속히(早速히) 중단(中斷)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韓人)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詩)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肖像畫): 형사범(刑事犯)이자 모험가(冒險家),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번역(飜譯) 재인용(再引用)
홍범도(洪範圖)가 누명(陋名)을 쓴 이유(理由)는 당시(當時)에 사살당한 집단(集團)이 어떤 단체(團體)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원인(原因)인데 당시(當時) 진압(鎭壓)당한 군사(軍事) 단체(團體)는
러시아
민간인(民間人)에 대(對)해 능동적(能動的)으로 학살(虐殺), 폭행(暴行), 약탈(掠奪)을 일삼은
범죄(犯罪)
단체(團體)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事件)
문서(文書) 참고(參考). 홍범도(洪範圖)가 그들과
손절(損切)
한 건
도덕(道德)
적(敵)으로 비난(非難)받을 선택(選擇)이 아니었다. 지금(只今)도
전쟁(戰爭)
중(中) 약탈(掠奪) 행위(行爲)는
군형법(軍刑法)
에 의(依)한 처벌(處罰) 대상(對象)이다. 군(軍) 내부(內部)뿐만 아니라 전시(展示) 지역(地域) 전체(全體)의 질서(秩序)를 파괴(破壞)할 수 있기 때문에 처벌(處罰)이 엄(嚴)하며 약탈(掠奪),
강간(强姦)
행위(行爲)는 전시국제법(戰時國際法) 위반(違反)이기도 하다.
니콜라옙스크 사건(事件)
에서도 상세히(詳細히) 설명(說明)되지만 상해파(上海派) 군대(軍隊)를 지휘(指揮)한
사할린 부대(部隊)
야말로
소비에트
와
볼셰비키
의 편(便)에서서 민간인(民間人)에 대(對)한 학살(虐殺)과 약탈(掠奪)에 적극적(積極的)으로 가담(加擔)한 극좌(極左) 부대(部隊)였다. 하지만
뉴라이트
세력(勢力)들과
국방부(國防部)
는 이상(異常)하게도 이런 극좌(極左)
소비에트
세력(勢力)에 대(對)해 침묵(沈默)으로 일관(一貫)하며, 이런 전쟁범죄(戰爭犯罪) 군대(軍隊)와 반대편(反對便)에서 섰을 뿐인 홍범도(洪範圖)만을 가지고 물고 늘어진다. 우경화(右傾化)가 두드러지는 네이버 댓글에도 이런 인간(人間)들이 많다.
참고(參考)로 이미 수십(數十) 년(年) 전(前)인
1962년(年)
3.1절(節)
, 홍범도(洪範圖)에게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훈장(建國訓長)
[38]
이 수여(授與)되기도 했다. 한편(한便) 이때가
5.16 군사정변(軍事政變)
이후이기(以後利器)에
박정희(朴正熙)
가 대통령(大統領)인 시절(時節)에 수여(授與)한 걸로 알려져 왔지만, 정확(正確)하게는 아직
윤보선
이(李) 대통령직(大統領職)을 유지(維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 상훈기록(賞勳記錄) 데이터베이스
당시(當時) 기사(記事).
그러나 이때는 이미 5.16 군사정변(軍事政變)이 일어난 후(後)이고, 행정(行政)?입법(立法)?사법(司法) 3권(卷)이라는 초월적(超越的) 권한(權限)을 가진 최고통치기관(最高統治機關)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가 내각(內閣)을 인선(人選)하던
군정(軍政) 내각(內閣)
시기(時期)였으며, 이 최고회의(最高會議)의 의장(議長)이
박정희(朴正熙)
였다는 걸 감안(勘案)하면 훈장(勳章) 수여(授與) 시기(時期)가 박정희(朴正熙)와 무관(無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以後)에도
노태우 정부(政府)
시절(時節)부터 유해(遺骸) 송환(送還)을 추진(推進)하여
문민정부(文民政府)
시기(時期)에 유해(遺骸) 송환(送還)을 시도(試圖)한 적이 있었으며,
박근혜(朴槿惠) 정부(政府)
당시(當時)에도
손원일
급(級)
잠수함(潛水艦)
7번(番)함을 홍범도(洪範圖)함으로 명명하는 등(等)의 사례(事例)가 있었다.
또한 보수(保守) 진영(陣營) 일부(一部)를 중심(中心)으로 홍범도(洪範圖)의 친
소련(蘇聯)
활동(活動)을 지적(指摘)하며 '유해(遺骸)를 북한(北韓)으로 보내라'는 등(等)의 부정적(否定的)인 반응(反應)도 나오기도 한다.
[39]
그러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당시(當時)
소련(蘇聯)
은 소수민족(少數民族)의 독립(獨立)을 지원(支援)했다. 기반(基盤)으로 삼을 나라도 잃은 채
일본(日本) 제국(帝國)
의 식민지배(植民支配)를 벗어나야 했던 당대(當代)의 시대상(時代相)을 고려(考慮)해 보면 '적(敵)의 적(敵)'에 해당(該當)하는
소련(蘇聯)
을 일시적(一時的)인 견제자(牽制者)로 끌어들인 것을 무조건(無條件) 비판(批判)만 할 수도 없다. 우파(右派) 진영(陣營)의 대표적(代表的)인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김구(金九)
나
이승만(李承晩)
의 활동(活動) 기반(基盤)도 타국인(他國人)
중화민국(中華民國)
과
미국(美國)
에 있었다.
[40]
비슷하지만 다른 예(例)로
대영제국(大英帝國)
의 식민지배(植民支配)를 받던
찬드라 보스
는
일본(日本) 제국(帝國)
과 손잡았고
소비에트 연방(聯邦)
이 주적(主敵)이었던
발트 3국(國)
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은
나치 독일(獨逸)
과 손잡았다. 심지어(甚至於)
대영제국(大英帝國)
의 수상(首相)인
윈스턴 처칠
도 "만약(萬若) 히틀러가
지옥(地獄)
을 침공(侵攻)한다면 나는 하원(下院)에서
악마(惡魔)
에 대(對)한 지지(支持) 연설(演說)이라도 할 수 있다."고 언급(言及)한 적이 있다. 전쟁(戰爭)이 끝난 후(後)에는 '
철(鐵)의 장막(帳幕)
' 연설(演說)을 하는 등(等) 스탈린과 소련(蘇聯)에 적대적(敵對的)인 입장(立場)으로 바뀌었지만 적어도 히틀러가 더 큰 위협(威脅)이었을때는 소련(蘇聯)과 일시적(一時的)으로나마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美國)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大統領) 역시(亦是)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을 통하여 2차(次) 대전(大戰) 전선(戰線)에서 나치와 싸우는 소련(蘇聯)에 무기(武器)와 보급품(補給品)을 공급(供給)하는 등(等) 소련(蘇聯)을 동맹(同盟)으로 여겼다.
1923년(年) 8월(月)엔 러시아 극동(極東)과 일본(日本)에서 악명(惡名)이 자자(藉藉)했던
사할린 부대(部隊)
원(員)들의 홍범도(洪範圖) 암살(暗殺) 시도(試圖) 사건(事件)이 있었다.
사할린 부대(部隊)
소속(所屬)의 김창수(金昌洙)와 김오남은 "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詩)빌리
와 싸우지 않았냐"는 이유(理由)로 홍범도(洪範圖)를 습격(襲擊)해 죽이려하자 레닌에게 받은 권총(拳銃)을 두명(名)을
정당방위(正當防衛)
를 사살(射殺)했다. 홍범도(洪範圖)는 이 사살(射殺)로 감옥(監獄)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證明書) 덕(德)에 석방(釋放)됐다고 한다.
이 사건(事件)의 유일(唯一)한 출처(出處)는 '홍범도(洪範圖)일지' 또는 '홍범도일기(洪範圖日記)'라 명명(命名)되는 구술자료(口述資料)로서 원출처(出處)에는 아래와 같이 증언(證言)하고 있다.
1922년(年) 정월(正月) 초(初) 6일(日) 떠나 21일(日) 만에 이르쿠츠크 나와 유(留)하다가 1923년(年) 4월(月) 3일(日)에 치타 나와서 사·오 삭 유(留)하다가 8월(月) 초(初) 일일(一日) 블라고베셴스크 나와 수일(數日) 유(留)하다가 배에 앉아 하바로프스크 나와 내린 즉(卽) 14일(日)에 삭클니
[41]
아른닷때에 있던 김창수(金昌洙)·김오남 이놈들이 합동(合同) 군대(軍隊) 까란다시 군대(軍隊)와 쌈할 때에 나를 쌈하지 않았다고 나를 죽이자고 불시(不時)로 피짱으로 나를 치니까 두대 부러지므로 레닌이 체급(體級) 준 싸창으로 그 두 놈을 죽이고 칠일(七日) 주르만[тюрьма]
[42]
에 갓기웠다가 레닌께서 회의(會議) 나온 일이 있소.
“홍범도(洪範圖)의 일지(日誌)”, ≪독립운동가자료(獨立運動家資料)이인섭수기류(數氣流) 1-007057-000≫ (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
소장(所長))
#
해당(該當) 사건(事件)을 근거(根據)로 일각(一角)에선 아래와 같은 허위(虛僞) 사실(事實)을 유포(流布)한다.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서 우리 독립군(獨立軍) 무장(武裝) 독립군(獨立軍)의 명맥(命脈)이 끊길 정도(程度)로 많은 분들이 학살(虐殺)을 당(當)했는데
그때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독립군(獨立軍) 중(中)에 두 분인 김오남
과 제가 한 분 정확(正確)하게 성함(姓銜)이 기억(記憶)이 안 납니다.
김창수(金昌洙)
님이셨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 두 분이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을 나중에 적대(敵對)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홍(洪) 장군(將軍)이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 대(對)해서 우리 무장독립군(武裝獨立軍) 해체(解體)에 대(對)해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歷史的) 책임(責任)의 무게도 결코(決코) 가볍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一旦)
김오남과 김창수가 '참변(慘變)의 생존자(生存者)'란 증거(證據)가 없다.
또한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虐殺)당했다 주장(主張)했지만 이미 선술됐듯 자유시(自由詩) 참변(慘變)의 사망자(死亡者)는 36명(名) 밖에 되지 않으며 일부(一部)는 도망가다 익사(溺死)했고, 대부분(大部分)의 군인(軍人)들은 체포(逮捕)된 것으로 종결(終結)된 사건(事件)이었다. 홍범도(洪範圖)를 암살(暗殺) 시도(試圖)한 두 명(名)은 참변(慘變) 당시(當時) 그 자리에 있었는지, 도망(逃亡)간건지 체포(逮捕)된 인물(人物)인지도 불분명(不分明)하다.
또한 김오남, 김창수가 속(屬)한
사할린 부대(部隊)
는 학살(虐殺)과 약탈(掠奪)로 러시아 극동(極東) 및 일본(日本)에서 악명(惡名)이 자자(藉藉)했던 집단(集團)이었고, 폭력(暴力)을 습관(習慣)처럼 저지른 부대(部隊)였다.
소비에트
정부(政府)의 범죄(犯罪)를 연구(硏究)하는 역사학자(歷史學者)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博士)
[43]
는 논문(論文)에서 이들의 실체(實體)를 적나라(赤裸裸)하게 까발리고 있다. 테플랴코프 교수(敎授)가 게재(揭載)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詩)빌리
의 범죄(犯罪) 행위(行爲)에 대(對)한 논문(論文)
[44]
에서 상해파(上海派) 부대(部隊)를 행적(行跡)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詩)빌리는 특히(特히) 심(甚)했던 국제(國際) 갈등(葛藤)의 중심(中心)에 서게 되었다. 1920년(年) 가을, 일본(日本)의 식민지개척자(植民地開拓者)들과 전투(戰鬪)를 벌였던 4 천여명(千餘名)의 한인(韓人) 유격대원(遊擊隊員)들이 북만주(北滿洲)에서 아무르주(州)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極東事務局長)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훈련(訓鍊)하고, 만주(滿洲)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韓國)으로 향(向)하는 전승(戰勝) 행군(行軍)을 조직(組織)하는 모험적(冒險的)인 계획(計劃)을 완성(完成)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指揮) 하(下)에 조선혁명운동(朝鮮革命運動)의 거점(據點)을 이르쿠츠크에 구축(構築)하는데 착수(着手)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暴動)의 한인(韓人) 상당수(相當數)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上海) 혁명파(革命派)
로 방향(方向)을 잡았다. 반면(反面),
사할린 유격부대(遊擊部隊)의 다른 경향(傾向)을 갖는 '상해파(上海派)' 유격대(遊擊隊) 지도자(指導者)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君)의 핵심(核心) 돌격대(突擊隊)가 되어, 1919-1920 년(年)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民間人) 학살(虐殺)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했다. 1920년(年) 여름 일본군(日本軍)의 맹공격(猛攻擊)으로 아무르강(江) 하류(下流)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隣近)에 정착(定着)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武器)를 이용(利用)해 공급(供給) 문제(問題)와 사적(私的)인 갈등(葛藤)을 해결(解決)했다. 1920 년(年) 7 월(月) 말(末),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에이헤 총사령관(總司令官)과 그의 정치조력자(政治助力者) 비샤린은 병사(兵士)와 군간부(軍幹部)들 중(中)에 '직무상(職務上) 범죄자(犯罪者)나 정치사범(政治事犯)이 많은' 한중연대(韓中連帶)를 정리(整理)할 것을 명(命)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軍事文書保管所).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措置)는 효과(效果)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軍隊)와 정당(政黨)이 교류(交流)한 서신(書信)에 따르면, 한인(韓人)들을 통제(統制)하려는 시도(試圖)는 실패(失敗)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總司令官)은 1921년(年) 1월(月) 러시아공산당(共産黨)(볼셰비키)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 극동국(極東國) 한인부 부대원(部隊員)이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아무르지역위원회(地域委員會) 위원장(委員長)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朝鮮) 유격대(遊擊隊)의 군사문제(軍事問題)를 해결(解決)하고자 2 월(月)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遊擊隊) 회의(會議)를 소집(召集)하라는 명령(命令)을 내리고, '위(位)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는데 방해(妨害)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拘束)하고', 부대(部隊) 사령관(司令官)들을 해임(解任)할 수 있는 권한(權限)을 부여(附與)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當時) 극동국(極東國)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部隊員)들과
사할린 부대(部隊)
사령관(司令官)인 김(金) 인노켄티와 박(朴) 일리아는 '당내(黨內) 활동(活動)에서 규율(規律)을 준수(遵守)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執行委員會) 극동사무국(極東事務局) 결정(決定)에 따라 권한(權限)을 박탈당했으며, 김(金)과 박(朴)은 국가안보국(國家安保局) 아무르지역지부(地域支部)의 조사(調査)를 받았다.(박은 '모험가(冒險家)인 트랴피씬'의 열성적(熱誠的) 옹호자(擁護者)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防諜活動) 첩보원(諜報員)이라는 혐의(嫌疑)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軍隊) 준위(準位)였던 김(金)은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복무(服務)를 회피(回避)한 혐의(嫌疑)로 1920 년(年) 이르쿠츠크에서 제(第) 5 군대(軍隊) 특별부(特別部)에 체포(逮捕)된 후(後) 보석금(保釋金)을 내고 석방(釋放)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軍事文書保管所).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議長)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江東遊擊隊長) 등(等)이 참여(參與)한 가운데 1921년(年) 3월(月) 11일(日) 치타에서 개최(開催)된 조선군사비상회의(朝鮮軍士非常會議)는 특별(特別)사할린유격부대(遊擊部隊) 김(金) 사령관(司令官)과 박(朴) 군사인민위원(軍事人民委員)을 파면(罷免)하고, '연대(連帶) 해산(解散)'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電池臨時軍事法院)에 넘겨주기로 결정(決定)했다. 그들은 분리주의(分離主義)를 니콜라옙스크 중대(中臺)에 도입(導入)하고, 일반병사(一般兵士)들과 연대(連帶) 지휘권(指揮權) 논쟁(論爭)을 야기(惹起)했다는 혐의(嫌疑)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派) 유격대원(遊擊隊員)들이 행(行)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韓人部隊) 박(朴) 바실리 전(前) 사령관(司令官)의 사형(死刑)을 저지(沮止)하지 않았다’.
부대(部隊)를 이끌고 자유시(自由詩)(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移動)하면서 김(金)과 박(朴)은 ‘사격수(射擊手)들이 평화(平和)로운 러시아 농민(農民)들에게 약탈(掠奪)과 폭력(暴力)을 저지르도록 허용(許容)했다’. 분노(憤怒)한 농민(農民)들은 한인(韓人) 유격대(遊擊隊)의 무장해제(武裝解除)와 한인(韓人)들에 대항(對抗)할 수 있도록 농민(農民)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要求)했다. 또한 김(金)과 박(朴)은 ‘니콜라예프파(波)로 구성(構成)된 무책임(無責任)한 테러리스트 단체(團體)를 만들어 병사(兵士)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朝鮮獨立步兵連帶) 지휘부(指揮部)에 패닉을 야기(惹起)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無政府) 상태(狀態)는 결국(結局) 트랴피씬의 독재(獨裁) 하(下)에 민간인(民間人) 약탈(掠奪)과 학살(虐殺)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規律)을 무너뜨렸다. 1921 년(年) 4 월(月) 23 일(日)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電報)를 통해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총사령관(總司令官)은
사할린 부대(部隊)
가 식량(食糧) 부족(不足)과 ‘부대장(部隊長)의 부재(不在)’로 지역(地域) 주민(住民)들의 반감(反感)을 사 “농민(農民)들과 한인(韓人)들 간(間)에 공개적(公開的)인 충돌(衝突)을 야기(惹起)할 것”이라고 전(傳)했다. 부대(部隊)는 인접(隣接) 지역(地域) 중(中)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計劃)이었다. 에이헤는 ‘상황(狀況)을 해결(解決)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出發)을 서두를 것을 요구(要求)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出發)할 수 있었다. 한편(한便), 1921 년(年) 5 월(月) 8 일(日)
사할린 부대(部隊)
군간부(軍幹部)는 한인부대(韓人部隊) 사령관(司令官)으로 임명(任命)된 오하(梧下)묵이 한때 대대사령관(大隊司令官)으로 ‘인민군(人民軍)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총사령관(總司令官)에게 전(傳)했다. 요청서(要請書)에 서명(署名)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部隊長)(전(前) 장교(將校), 무소속(無所屬)), 김(金) 부대장(部隊長) 보조(補助), 박(朴) 군사위원(軍事委員)(전(前) 니콜라옙스크 부대장(部隊長)), 최(崔) 참모총장(參謀總長)(제(第) 2 비행대(飛行隊) 전(前) 참모총장(參謀總長)), 림 제(第) 1 대대장(大隊長), 아무 제(第) 2 대대장(大隊長), 헤자욱 제(第) 3 대대장(大隊長) 및 많은 사령관(司令官)들은 오하(梧下)묵에 불복(不服)할 것을 선언(宣言)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詩)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肖像畫): 형사범(刑事犯)이자 모험가(冒險家),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45]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예전부터 사적(私的) 갈등(葛藤)을 무기(武器)로 해결(解決)하던 집단(集團)이었는데, 이런 범죄집단(犯罪集團)이 홍범도(洪範圖)를 공격(攻擊)한 것을 근거(根據)로 삼아 홍범도(洪範圖)에게 책임(責任)을 뒤집어 씌우는 건 궤변(詭辯)이다.
2021년(年) 8월(月) 16일(日),
박노자
는
페이스북
으로 "홍범도(洪範圖)의 유해(遺骸)를 국내(國內)로 봉환(奉還)하기로 한 것은
카자흐스탄
국가(國家) 권력자(權力者)와의 합의(合意)인가, 아니면 현지(現地) 고려인(高麗人) 사회(社會) 전체(全體)와의 합의(合意)인가?", "현지(現地) 고려인(高麗人)들에게 홍범도(洪範圖)는 절대적(絶對的)인 존재(存在)이고
고려인(高麗人)
전체(全體)의 상징(象徵)과도 같은 존재(存在)인데 유해(遺骸) 봉환(奉還) 과정(過程)에서 고려인(高麗人) 사회(社會) 전체(全體)의
여론(輿論)
은 반영(反映)하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民主主義)냐?", "소수자(少數者)는 무시(無視)하고 행정(行政) 편의주의적(便宜主義的)으로 행동(行動)하는 것이 이 정부(政府) 들어서도 변(變)한게 없다. 그렇게 홍범도(洪範圖)를 존경(尊敬)하고 기리고 싶다면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부대원(部隊員)의
후손(後孫)
이 포함(包含)된 재한(災旱) 고려인(高麗人)에게 간(肝)이
귀화(歸化)
의 가능성(可能性)이라도 열어 주든지 그들에 대(對)한 처우(處遇) 개선(改善)이나 좀 걱정하는 게 어떠냐" 등(等)을 말했다.
#
2021년(年) 8월(月) 17일(日), 이에 대(對)해
우원식(禹元植)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의원(議員) 겸(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洪範圖將軍記念事業會) 이사장(理事長)은
페이스북
에 "박노자 교수(敎授)님께서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가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님을 모셔오면서 고려인(高麗人) 사회(社會)의 의견(意見)을 듣지 않았다고 한 말씀 하셨는데 그 고언(苦言)을 잊지 않고 고려인(高麗人)
영주권(永住權)
문제(問題) 등(等) 고려인(高麗人)과 동질감(同質感)을 회복(回復)하는 제도적(制度的) 개선책(改善策)도 끊임없이 모색(摸索)할 것이며 홍범도기념사업회(洪範圖記念事業會)부터 더욱 앞장서겠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의 유해(遺骸) 봉환(奉還)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의 의무(義務)다.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解放)되면 꼭 고국(故國)에 데려가라'고 유언(遺言)을 남기셨다. 해방(解放)된 조국(祖國)이 남(南)과 북(北)으로 갈라지고 이념적 대립(對立) 속에 그 유언(遺言)을 한 세기(世紀)가 다 지나서야 지킬 수 있게 됐다", "고려인(高麗人)의 의견(意見)을 듣지 않았다는 것도 오해(誤解)",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유해(遺骸) 봉환(奉還)은 이미 2년전(年前) 카자흐스탄 국빈(國賓) 방문(訪問) 때 그곳 고려인(高麗人)들에게 정성껏(精誠껏) 설명(說明)을 드린 바 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大統領)께서는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이 계셨던
카자흐스탄
알마티
를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상(正常)으로 최초(最初)로 방문(訪問)하셨다", "순방(巡訪)을 통(通)해 계봉우, 황운정 지사(知事) 내외분(內外분) 봉환(奉還)과 함께 홍범도(洪範圖) 장군(將軍) 유해(遺骸) 봉환(奉還) 결정(決定)에 대(對)해서도 계봉우, 황운정 지사(知事) 후손(後孫)들을 포함(包含)한 많은 동포(同胞) 여러분들께서도 기꺼이 축하(祝賀)해주셨다" 등(等)을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