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事實) 중국계(中國系) 민족(民族)과 한국계(韓國系) 민족(民族)은 처음부터 그렇게 좋은 관계(關係)는 아니었다. 직접적(直接的)으로 영토(領土)가 맞붙어 있던 고조선(古朝鮮)-삼국(三國)-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까지는 한국계(韓國系) 왕조(王朝)와 중국계(中國系) 왕조(王朝)는 국경(國境)을 맞닿고 직접적(直接的)으로 대립(對立)해왔다.
하지만 이런 험악(險惡)한 민족(民族) 감정(感情)은 중세(中世) 이후(以後) 상당(相當)히 사그러들게 되는데, 만주(滿洲)를 상실(喪失)하고 한국계(韓國系) 민족(民族)의 영역(領域)이 한반도(韓半島)로 축소(縮小)되면서 만주(滿洲) 지역(地域)이 한족 대신(代身) 거란족, 여진족(女眞族) 같은
반유목민족(反遊牧民族)
이나
수렵채집민족(狩獵採集民族)
들이 차지하게 되었기에 한반도(韓半島)와 중국(中國)은 서로 국경(國境)을 마주하지 않는 상태(狀態)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세(中世) 이후(以後)부터는 고려(高麗)-조선(朝鮮)이 보다 직접적(直接的)으로 적대(敵對)하는 대상(對象)은 여진족(女眞族)을 비롯한 유목민족(遊牧民族)이 되었다. 한국어(韓國語) 욕설(辱說) 중(中)
제기랄
,
씨발
등등(等等) 욕설(辱說)의 어원(語源)의
여진족(女眞族)
의
근친상간(近親相姦)
을 비꼬는 데
[3]
있었다는 가설(假說)에서 보듯 과거(過去) 한반도(韓半島) 주민(住民)들과 여진족(女眞族)들과의 사이는 상당히(相當히) 좋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以後)
명나라(明나라)
가 멸망(滅亡)하고
청나라(淸나라)
가 들어섰지만, 청나라(淸나라)는 한족 국가(國家)가 아니라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유목민족(遊牧民族)의 국가(國家)였기에 유목민족(遊牧民族)에 대(對)한 적대감정(敵對感情)이 그대로 이월(移越)되었다. 또한
조선(朝鮮)
과 직접(直接) 국경(國境)을 맞대는 상황(狀況)이 되면서, 변발(辮髮)을 한 사람들을 대상(對象)으로 한 비칭(卑稱) "
뙤놈
"(머리카락으로 또아리 튼 놈)은 어느샌가 중국인(中國人) 전체(全體)에 대(對)한 멸칭(蔑稱)이 되었으며,
[4]
청나라(淸나라)가 멸망(滅亡)하고 변발(辮髮)이 철폐(撤廢)된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以後)에 와서도 한국(韓國) 내(內)에서는 중국인(中國人)들을 대상(對象)으로 때놈, 뙤놈이라는 비칭(卑稱)을 사용(使用)하게 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의 속담(俗談)의 유래(由來)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조선(朝鮮)으로 건너오는 화교(華僑)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적대감(敵對感)이 심해졌는데, 여기에는 일본(日本)의 혐중(中) 감정(感情)이 한국인(韓國人)들에게 이식(移植)된 바도 없지 않았다. 대표적(代表的)으로 일본(日本)에서는 외국인(外國人) 특히(特히) 중국인(中國人)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도진(唐人; 당나라(唐나라) 사람)
이라고 부르는 경우(境遇)가 많았는데 오합지졸(烏合之卒)의 대명사(代名詞)로 사용(使用)되는
당나라(唐나라) 군대(軍隊)
라는 말의 어원(語源)이
청일전쟁(淸日戰爭)
당시(當時) 일본제국군(日本製國軍)이 청군(淸軍)을 갖다가 당나라(唐나라) 군대(軍隊)라고 부른 바에서 기원(祈願)했다는 가설(假說)에서 보듯, 한국(韓國)의 혐중(中) 감정(感情)의 기원(起源)은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의 영향(影響)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特히) 일본(日本)에서 만주(滿洲)를 식민화(植民化)하는 과정(過程)에서 한국인(韓國人)은 2등(等) 민족(民族), 중국인(中國人)은 3등(等) 민족(民族)이라고 말하며 만주(滿洲) 내(內) 한국인(韓國人)들과 중국인(中國人)들 사이의 경쟁심(競爭心)을 조장(助長)했던 역사(歷史)도 있다. 급기야(及其也) 1930년(年)을 전후하여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화교배척폭동(華僑排斥暴動)
이라는 중국인(中國人) 및 화교(華僑)에 대(對)한 학살(虐殺)로 이어졌으며, 이때 거의 아무런 조치(措置)도 취(取)하지 않고 방관(傍觀)하기만 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대처(對處)와 함께
1931년(年) 평양화교(平壤華僑) 학살(虐殺)
에서 정점(頂點)을 이루었다.
해방(解放) 후(後)에는 중국(中國)을 지배(支配)하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6.25 전쟁(戰爭)
에서 적국(敵國)으로 참전(參戰)한 것을 계기(契機)로 한국(韓國) 내(內) 반중(反中) 감정(感情)이 없지 않아 강(剛)해졌다. 이 6.25 전쟁(戰爭)은 전쟁(戰爭) 발발(勃發)로부터 수십여(數十餘) 명(名)이 지난 이후(以後)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과 조선족(朝鮮族)들 사이에서 서로 상당(相當)한 이질감(異質感)을 느끼게 하는 주요(主要) 요인(要因)으로 작용(作用)하였다. 한중수교(韓中修交) 이후(以後) 넘어온 조선족(朝鮮族)들 중(中)에서 6.25 전쟁(戰爭) 및 남북관계(南北關係) 관련(關聯) 견해(見解)가 너무 이질적(異質的)이거나 혹은(或은) 자신(自身)의 조국(祖國)을 한국(韓國)이 아니라 중국(中國)으로 여기는 가치관(價値觀)은 한국(韓國) 사회(社會)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공교(工巧)롭게도 조선족(朝鮮族)들이 주범(主犯)이 된 각종(各種)
보이스 피싱
관련(關聯) 논란(論難) 그리고
우위(優位)안춘
사건(事件)으로 조선족(朝鮮族) 혐오(嫌惡)가 사회(社會) 전반(全般)에 퍼졌고 이는 혐중(中) 감정(感情)으로 연결(連結)되기 시작(始作)한다.
현대(現代) 들어서는
조선(朝鮮) 왕조(王朝)에 대(對)한 대중(大衆)의 부정적(否定的)인 인식(認識)
역시(亦是) (조선(朝鮮) 왕조(王朝)가 사대외교한(事大外交韓) 대상(對象)이었던 중국(中國)까지 구질구질한 이미지로 보는) 혐중(中) 감정(感情)에 적잖은 영향(影響)을 주게 되었다. 학계(學界) 최근(最近) 트렌드가 조선(朝鮮) 왕조(王朝)의 재평가(再評價)인 것과는 별개(別個)로 대한민국(大韓民國) 대중(大衆) 사이에서는
헬조선(朝鮮)
혹은(或은) 북한(北韓)의 별명(別名)
김씨조선(金氏朝鮮)
, 조선족(朝鮮族)에 대(對)한 혐칭(稱) X선족(跣足) 혹은(或은) 선족(跣足)부터 시작(始作)해서 아예 북조선(北朝鮮), 조선족(朝鮮族)이라는 어휘(語彙) 자체(自體)가 혐오(嫌惡) 표현(表現)으로도 쓰이는 상황(狀況)이다. 일본(日本)에서 제일(第一) 한국인(韓國人)들을 차별(差別)할 때 “조선인(朝鮮人)”이라고 부르는 거야 워낙 악명(惡名)높고, 자국을 비하(卑下)할 때 사용(使用)하는 어휘(語彙)가
동조선(桐朝鮮)
이라는 사실(事實)도 제법 알려져있다. 중국(中國)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자국(自國)을 자조(自嘲)할 때
서조선(鉏朝鮮)
드립을 치는데,
[5]
이만큼 조선왕조(朝鮮王朝) 이미지가 안 좋다. 조선(朝鮮)에 대(對)한 재평가(再評價)가 이루어지는 2010년대(年代) 와서도 한국(韓國)을 배경(背景)으로 한
대체역사물(代替役事物)
들은 한국(韓國)이 대양(大洋) 넘어 혹은(或은)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세계(世界) 각국(各國)과 다투는 모습이 나와야지 결코(決코) 중국(中國) 외(外)에는 문(門)을 틀어막는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데, 이런 상황(狀況)에서 조선(朝鮮)이 사대(事大)했던 중국(中國)의 이미지까지 동반하락(同伴下落)하는 것도 필연적(必然的)이라 볼 수 있다.
환경면(環境面)에서는 중국(中國)에서 불어오는
황사(黃沙)
로 피해(被害)를 받고
[6]
정치면(政治面)에서는
중국(中國) 공산당(共産黨)
을 싫어하여
중국(中國)
에 반대(反對)하는
반중(反中)
성향(性向)과
일본(日本)
을 적대시(敵對視)하고
미국(美國)
에 덜 의존(依存)하기 위해 중국(中國)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친중(親中)
성향(性向)으로 나뉘어 있었다.
[7]
과거(過去) 냉전(冷戰) 시대(時代)의 반중(反中) 감정(鑑定)은
북한(北韓)
배후(背後)에 있는 나라라 반공(反共) 성격(性格)(+그리고 반(半)
소련(蘇聯)
)이라 직접적(直接的)으로 와 닿는 느낌이 덜하기도 했고, 공산당(共産黨) 일당(一黨) 독재(獨裁) 체제(體制)인 중국(中國) 공산당(共産黨) 정부(政府)만이 타겟이 되었을 뿐이라 '
중국인(中國人)
' 자체(自體)에 대(對)한 이미지는 그렇게까지 나쁜 편(便)이 아니었다. 2011년(年)만 해도
조선족(朝鮮族)
백청강(聽講)
이 한국(韓國) 오디션에서 우승(優勝)할 정도(程度)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