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年)
6월(月) 22일(日)(음력(陰曆) 5월(月) 17일(日))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김제군(金堤郡) 김제읍 신풍리(現
전북특별자치도(全北特別自治道)
김제시(金堤市)
신풍동
)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學窓時節)에 동네(洞네) 장기(長技)자랑에 참여(參與)해서 이런저런 물품(物品)을 상(賞)으로 받아왔는데 이에 맛들려서 아예 가수(歌手)가 되기로 결심(決心)했다. 중학교(中學校)는 금성여중(金星女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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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高等學校)는 김제여고(金堤女高)를 나왔는데, 중학생(中學生) 시절(時節) 학생(學生)인 걸 속이려고
가발(假髮)
을 쓰고 노래자랑에 나갔다가 선생님(先生님)에게 걸려서 큰일날 뻔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게 본인(本人)에게는 나름 즐거운 추억(追憶)이었는지 김제(金堤) 금성중학교(金星中學校)에는 현숙이 기증(寄贈)한 물품(物品)이 꽤 있다고 한다.
그녀(그女)는 고등학교(高等學校)만 졸업(卒業)하고 졸업(卒業)하자마자 바로 서울로 상경(上京)해서 가수(歌手)가 될 방법(方法)을 모색(摸索)했다. 후(後)에 작곡가(作曲家) 임종수의 눈에 띄어서 가수(歌手)가 되었다.
가수(歌手)가 된 이후(以後)에는 1978년(年) <정답게 둘이서>, 1979년(年) <타국(他國)에 계신 아빠에게>, 1980년(年) <정말로(正말로)>, 1982년(年) <포장마차(布帳馬車)> 등(等) 80년대(年代) 초반(初盤)에 발매(發賣)한 노래들이 연(連)이어 히트를 치면서 1979년(年) TBC 방송가요대상(放送歌謠大賞) 여자신인부문(女子新人部門) 후보(候補)에 들었고, 1980년(年)부터 1982년(年)까지 3연속(連續)으로 10대(代) 가수(歌手)에 들었다.
1980년(年) 발표(發表)되어 현숙(賢淑)을 10대(代) 가수(歌手)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한 <정말로(正말로)>는 그녀(그女)의 매니저인 김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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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사(作詞)해 줬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看過)하는 사실(事實)이지만, 이 당시(當時)만 해도
성인가요(成人歌謠)
와
댄스 음악(音樂)
을 병행(竝行)하는 가수(歌手)였다.
그렇기에 전성기(全盛期)인 80년대(年代) 초반(初盤)에 편중(偏重)되지 않은 인지도(認知度)와 인기(人氣)가 있었고 1982년(年) 발표(發表)한 <포장마차(布帳馬車)>는 당(黨) 해 10월(月) 라디오 방송횟수(放送回數) 단일곡(單一曲) 순위(順位)에서 이용(利用)의 <잊혀진 계절(季節)>을 앞질러 1위(位)를 기록(記錄)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장마차(布帳馬車)> 이후(以後) <사랑은 이다음에>를 메인으로 활동(活動)한 1983년(年)엔 10위권(位圈) 가수(歌手)로 불리며 10대(代) 가수(歌手)에 들것으로 전망(展望)되었고 인기(人氣)도 굉장히(宏壯히) 높았지만 10대(代) 가수(歌手)에 들지 못했다.
이후(以後) 1984년(年) 발표(發表)한 건전가요(健全歌謠) '건곤감리(乾坤監理) 청홍(靑紅)백'까지는 가요(歌謠)톱텐 10위권(位圈)과 가요대상(歌謠大賞) 후보(候補)에 들 정도(程度)의 히트를 친 이후(以後)로는 당대(當代) 정상(頂上)을 노리는 인기(人氣) 가수(歌手)였음에도 인기(人氣)가 꺾였다.
그러다가 1997년(年)에는 <요즘 여자(女子) 요즘 남자(男子)>로 히트를 쳐서 1984년(年) 이후(以後)로 13년(年)만에 KBS 가요대상(歌謠大賞) 후보(候補)로 무대(舞臺)에 섰으며 성인가요(成人歌謠)의 대표(代表) 주자(走者)로 떠올랐다.
2005년(年)까지 KBS 가요대상(歌謠大賞) 올해의 가수상(歌手賞)을 9번(番)이나 수상(受賞)하며 제(第)2의 전성기(全盛期)를 보냈고, 2002년(年)엔 KBS 가요대상(歌謠大賞) PD선정(選定) 가수상(歌手賞)을 수상(受賞)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