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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憲宗)(조선(朝鮮)) - 나무위키

헌종(憲宗)(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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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肺)
이방석
(의안대군)
이방(吏房)과
(정종(正宗))
이방원(李芳遠)
(태종(太宗))
폐(肺)
이제
(양녕대군(讓寧大君))
이도
(세종(世宗))
이향(異鄕)
(문종(文宗))
이홍위
(단종(端宗))
이장(里長)
(의경세자(義警世子))
왕세손(王世孫)

이홍위
(단종(端宗))
이황(李滉)
(예종(睿宗))
이융(易融)
(연산군(燕山君))
폐(肺)
이고
이호(二號)
(인종(人種))
이부(二部)
(순회세자)
이혼(離婚)
(광해군(光海君))
폐(肺)
이지
이왕(已往)
(소현세자)
이호(二號)
(효종(孝宗))
이연
(현종(玄宗))
이순(耳順)
(숙종(肅宗))
이운(利運)
(경종(景宗))
왕세손(王世孫)

이연
(현종(玄宗))
왕세제(王世弟)

이금(泥金)
(영조(英祖))
이행(履行)
(효장세자(驍將世子))
이훤
(장헌세자(莊獻世子))
왕세손(王世孫)

이정(李霆)
(의소세손(義疏世孫))
왕세손(王世孫)

이산(離散)
(정조(正祖))
이양(移讓)
(문효세자(世子))
이홍(利弘)
(순조(純祖))
이영
(효명세자(驍名世子))
이척
(순종(純宗))
왕세손(王世孫)

이환
(헌종(憲宗))
이은 (의(醫)민태자)

위패(位牌) 존령(尊靈) · 선원선계(船員仙界) · 국왕(國王) · 대군주(大君主) · 왕태자(王太子)
조선(朝鮮)의 왕자(王子)(목조(木造) ~ 연산군) / (중종(中宗) ~ 고종(高宗))

조선(朝鮮) 제(第)24대(代) 국왕(國王)
헌종(憲宗) | 憲宗
대한제국(大韓帝國) 추존(推尊) 황제(皇帝)
헌종추정어진
헌종(憲宗) 추정(推定) 어진(御眞) [1]
출생(出生)
1827년(年) 9월(月) 8일(日)
(음력(陰曆) 순조(順調) 27년(年) 7월(月) 18일(日))
즉위(卽位)
1834년(年) 12월(月) 18일(日) (7세(歲))
(음력(陰曆) 순조(順調) 34년(年) 11월(月) 18일(日))
사망(死亡)
1849년(年) 7월(月) 25일(日) (향년(享年) 21세(歲)) [2]
(음력(陰曆) 헌종(憲宗) 15년(年) 6월(月) 6일(日))
능묘(陵墓)
재위기간(在位期間)
조선(朝鮮) 왕세손(王世孫)
1830년(年) 10월(月) 31일(日) ~ 1834년(年) 12월(月) 18일(日)
(음력(陰曆) 순조(順調) 30년(年) 9월(月) 15일(日) ~ 순조(純祖) 34년(年) 11월(月) 18일(日))
조선(朝鮮) 제(第)24대(代) 국왕(國王)
1834년(年) 12월(月) 18일(日) ~ 1849년(年) 7월(月) 25일(日)
(음력(陰曆)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1월(月) 18일(日) ~ 헌종(憲宗) 15년(年) 6월(月) 6일(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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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本館)
환(圜)(?)
부모(父母)
형제자매(兄弟姊妹)
외아들 [3]
왕비(王妃)
후궁(後宮)
자녀(子女)
1녀(女) - 옹주(翁主)( 1848, 조졸(漕卒) )
종교(宗敎)
자(者)
문응(文應)
호(號)
원헌(原憲)(元軒)
전호(電弧)
효정전(展) (孝定殿)
묘호(廟號)
존호(尊號)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
시호
조선(朝鮮) :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대한제국(大韓帝國) : 경문위무명인철효(經文位無名人徹曉) 성황제(城隍祭)
(經文緯武明仁哲孝 成皇帝 )

청(靑) : 장숙(莊肅) [4]

1 . 개요(槪要) 2 . 생애(生涯)
2.1 . 효명세자(驍名世子) 아들 2.2 . 왕대비(王大妃)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병오박해(丙午迫害) 2.3 . 짧은 친정(親庭) 2.4 . 요절(腰絶) 2.5 . 능묘(陵墓)
3 . 가계(家計) 4 . 어진(御眞) 5 . 여담(餘談) 6 . 대중매체(大衆媒體) 7 . 관련(關聯) 문서(文書) 8 . 둘러보기

1. 개요(槪要) [편집(編輯)]

조선(朝鮮) 제(第)24대(代) 임금이자(賃金利子) 대한제국(大韓帝國) 추존(推尊) 황제(皇帝) . 묘호(廟號) 는 '헌종(憲宗)(憲宗)', 시호 는 '경문위무(經文慰撫)명인철효성황제(曉星皇帝)(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는 '환(圜)(?)', [5] 자(者) 는 '문응(文應)'.

순조(順調) 의 유일(唯一)한 친손자(親孫子)이자 효명세자(驍名世子) 의 하나뿐인 외아들 [6] 로 아버지인 효명세자(驍名世子)가 20세(歲)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夭折)하고, 할아버지 순조(順調)마저 건강(健康) 악화(惡化)로 일찍 세상(世上)을 떠나자 왕세손(王世孫)(王世孫)의 신분(身分)으로 7세(歲) 어린 나이에 국왕(國王)이 되었는데 조선(朝鮮) 왕(王)으로서는 최연소(最年少)로 10세(歲)에 즉위(卽位)한 단종(斷種) 과 순조(順調)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했다. [7]

같은 경우(境遇)로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충목왕 이 있으며, 충목왕 역시(亦是) 즉위(卽位) 당시(當時) 8살(만 7살)이자 최연소(最年少)였다. 영조(英祖)-정조(貞操)에 이어서 2번째(番째)로 조부(祖父)에서 손자(孫子)로 권좌(權座)가 이어지는 조손(祖孫)(할아버지 → 손자(孫子)) 계승(繼承)의 절차(節次)를 밟았다.

2. 생애(生涯) [편집(編輯)]

세자빈(世子嬪)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대신(大臣)들이 하례(下隷) 하다

세자빈(世子嬪)이 원손(元孫)(元孫)을 낳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오늘 신시(新詩)(申時) [8] 에 세자빈(世子嬪)이 원손(元孫)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行事)는 관례(慣例)대로 거행(擧行)하라."
하고, 시임(時任) 대신(大臣)과 원임(原任) 대신(代身), 대각(大覺)의 신하(臣下), 약(約)원의 세 제조(製造)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용귀(韓用龜) 등(等)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操縱)들께서 묵묵히(默默히) 도우(屠牛)시어 빈궁(貧窮)께서 원손(元孫)을 순산(順産)하셨으니, 이는 실로(實로) 억만(億萬) 년(年)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무궁(無窮)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孫子)를 보시는 경사(驚事)를 맞았으니, 전하(殿下)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神)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禁)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순조실록(純祖實錄) 》 29권(卷), 순조(純祖) 27년(年)( 1827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7년(年)) 7월(月) 18일(日) (신유(辛酉)) 2번째기사(番째記事). [9]

《헌종대왕(憲宗大王) 행장(行長)》에 이르면 태몽(胎夢)이 꽤나 비범(非凡)했다고 하며 출생일(出生日)에 학(鶴)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王妃)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궐(宮闕)에서는 기이(奇異)하다고 했다. 《행장(行長)》에 의(依)하면 준수(俊秀)한 외모(外貌)에 큰 목소리가 금석(金石)같다고 하며 100일(日) 전(前)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10]

왕세손(王世孫) 책봉(冊封)을 불과(不過) 4개월(個月) 앞두고, 아버지 효명세자(驍名世子)가 1830년(年) (순조(純祖) 30년(年)), 세는나이 22세(歲)에 갑작스레 사망(死亡)하면서 헌종(憲宗)은 고작 세는나이 4세(歲)의 매우 어린 나이에 동궁(東宮) (東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順調) 역시(亦是) 1834년(年) (순조(純祖) 34년(年)), 44세(歲)에 죽고 [11] 헌종이 세는나이 8세(歲)에 왕위(王位)를 이어받게 된다. 현재(現在)로 따지면 초등학교(初等學校) 1학년(學年)인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했기 때문에 순조(純祖)의 정비(整備)이자 할머니인 왕대비(王大妃) 순원왕후 김씨(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 을 실시(實施)했다.
임금(賃金)이 숭정문(崇情文)에서 즉위(卽位)하고 왕대비(王大妃) 수렴(收斂) 청정(淸淨)의 예(例)를 행(行)하다

임금(賃金)이 숭정문(崇禎門)(崇政門) 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대비(王大妃)(王大妃)를 받들어 수렴(收斂) 청정(淸淨)(垂簾聽政)의 예(禮)를 흥정당(興政堂) 에서 행(行)하고,
조하(朝賀)(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敎書)를 반포(盤浦)(頒布)하고 대사(臺詞)(大赦) [12] 를 베풀었다.

-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834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14년(年)) 11월(月) 18일(日) (기묘(己卯)) 1번째기사(番째記事). [13]

한편(한便) 어머니 신정왕후 는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가(勢道家)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權力)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氏) 집안 출신(出身)이다. 첫 왕비(王妃)는 안동(安東) 김씨(金氏)로 김좌근 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金氏) 였으나, 결혼(結婚) 2년(年)만인 헌종(憲宗) 9년(年)인 1843년(年) 에 16세(歲)의 나이로 일찍 사망(死亡)했고 이후(以後) 효정왕후(王后) 홍씨(洪氏) 를 계비(繼妃)로 맞았다. 외가(外家)와 처가(妻家)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憲宗)의 치세(治世)는 실로 풍양 조씨(氏)와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로 조선(朝鮮)이 파탄(破綻) 직전(直前)까지 가고 있던 시절(時節)이었다.
순원왕후 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시기(時期)에는 '척사윤음(斥邪綸音)'(斥邪綸音)이(李) 반포(頒布)되었고 천주교(天主敎)에 대(對)한 대대적(大大的)인 박해(迫害) 가 발생(發生)했다. 1839년(年) (헌종(憲宗) 5년(年)),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프랑스 인(人) 앵베르 범(犯) 라우렌시오 [14] 주교(主敎), 모방(模倣) 나 베드로 신부(神父), 샤스탕 정(情) 야고보 신부(新婦), 조선인(朝鮮人) 평신도(平信徒) 정하상 바오로 등(等)이 순교(殉敎) 했다. 1846년(年) (헌종(憲宗) 12년(年))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한국(韓國) 최초(最初)의 천주교(天主敎) 신부(神父)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新婦)가 순교(殉敎)했다. [15]

더욱 극심(極甚)해진 삼정(三政)의 문란(紊亂) 으로 백성(百姓)들의 민생(民生)은 파탄(破綻)의 직전(直前)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對)한 대책(對策) [16] 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外部)에서는 서양(西洋) 선박(船舶)들이 나타나 통상(通商)을 요구(要求)하는 이양선(異樣船) 출몰(出沒) 사건(事件)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民心)은 동요(動搖)했다.

왕권(王權)도 헌종(憲宗) 초기(初期)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便)이었다. 즉위(卽位) 2년(年)인 1836년(年) (헌종(憲宗) 2년(年)) 남응중이, 1844년(年) (헌종(憲宗) 10년(年))에는 민진용 [17] 과 이원덕 등(等)이 사도세자(思悼世子) 의 서출(庶出)이자 정조(正祖) 의 이복동생(異腹同生)인 은언군 의 손자(孫子) 회평군(回評軍) 을 왕위(王位)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失敗)했다. [18] 이 역모(逆謀)의 특징(特徵)은 정치적(政治的) 기반(基盤)이 전무(全無)한 몰락(沒落)한 양반(兩班)들의 계획(計劃)이었다는 점(點)으로, 이만큼 왕(王)의 위신(威信)이 떨어졌다.
남응중·남경중을 국문(鞠問)하여 사형(死刑)에 처(處)하다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국문(國文)(鞫問)하여 사형(死刑)(死刑)에 처(處)하고, 고변인(高變因)(告變人) 천기영(千璣英)은 상(賞)을 내려 오위(五衛) 장(腸)(五?將)으로 삼았다. 남응중의 족당(族黨)은 모두 좋은 문벌(門閥)(門閥)이었는데, 성품(性品)이 간교(刊校)하여 남의 재물(財物)을 편취(騙取)(騙取)하기 좋아하고 역모(逆謀)(逆謀)를 꾸며 경외(京外)(京外)에 출몰(出沒)하면서 속임수(속임數)만 써왔다. 일이 발각(發覺)되자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동래(東萊)(東萊) 의 왜관(倭館)(倭館)으로 도망(逃亡)해 들어가서 극도(極度)로 흉악(凶惡)하고도 부도(不渡)(不道)한(韓)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倭人)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우리 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국문(鞠問)하니, 남경중과 함께 승복(承服)하였다. 남공언(公言)은 그들의 도당(道黨)이었는데 국정(國政)(鞫庭)에서의 난언(亂言)(亂言)이 더욱 흉악(凶惡)하여 아울러 노륙(孥戮)(?戮)하였다. 남응중의 수급(需給)(首級)은 왜관(倭館)에 매달아 보이도록 명(命)하고, 따로 서계(西界)(書契) [19] 를 지어 관수왜(館守倭)(館守倭)에게 전(傳)하여 약조(約條)(約條)를 중히(重히) 여기고 교호(交互)(交好)를 돈독히(敦篤히) 한 뜻을 보이었다.
---
- 헌종실록(憲宗實錄) 》 3권(卷), 헌종(憲宗) 2년(年)( 1836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16년(年)) 12월(月) 23일(日) (임신(妊娠)) 1번째기사(番째記事). [20]
결안(決案)에 민진용의 죄(罪)가 부대시(不待時) 능지 처사(處事)에 해당(該當)한다고 하다

죄인(罪人) 민진용(閔晋鏞) 의 결안(決案)(結案)에 이르기를,
"그는 미천(微賤)한 무부(巫夫)(武夫)로서 감히(敢히) 불궤(不軌)(不軌)한(韓) 흉계(凶計)를 품고 효경(孝經)(梟?) [21] 의 마음으로 귀신(鬼神)처럼 물여우처럼 역당(逆黨)(逆黨)과 체결(締結)하고 흉언(凶言)을 난만(爛漫)(爛慢) [22] 하게 하였습니다. 강사(講師)(江舍)에서 밤에 모여 세 사람이 주무(主務)(綢繆)한 것이 모두 지극히(至極히) 흉악(凶惡)하고 지극히(至極히) 참혹(慘酷)하였는데, ‘ 이곽(伊霍)(伊?) [23] 두 글자(글字)가 어찌 신하(臣下)로서 감히(敢히)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감히(敢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방자(放恣)하게 입에다 내었습니다. 모반(母斑)(謀反)하고 대역(代役)(大逆)하여 부도(不渡)(不道)한 것이 확실(確實)하다고 지만(遲晩) [24] 하였으니, 죄(罪)가 부대시(不待時) 능지 처사(處事)(不待時凌遲處死) [25] 에 해당(該當)합니다."
하였다.

- 헌종실록(憲宗實錄) 》 11권(卷), 헌종(憲宗) 10년(年)( 1844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24년(年)) 8월(月) 21일(日) (을묘(乙卯)) 1번째기사(番째記事). [26]

2.3. 짧은 친정(親庭) [편집(編輯)]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세력(勢力)이 큰 견제(牽制)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時期) 헌종(憲宗)은 할머니 순원왕후 로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둔 뒤로 친정(親政)이 시작(始作)된 이후(以後)에 20세(歲)가 될 무렵부터 척신(戚臣)들을 견제(牽制)하기 시작(始作)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 15세(歲) 때에 끝나고, 첫 왕비(王妃)인 효현왕후 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王后)의 의중(意中)에 따라 남양(南陽) 홍씨(洪氏)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王后) 를 계비(繼妃)로 맞은 것. 이때 주부(主婦)(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後宮) 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세도(勢道)는 풍양 조씨(氏) 의 부상(負傷)과 함께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始作)했다. 다만, 야사(野史)에서는 안동(安東) 김씨(金氏)와 풍양 조씨(氏)의 경쟁(競爭) 시기(時期) 정도(程度)로 비추어진다. 일례(一例)로 한 야사(野史)에서는 조병구가 권세(權勢)를 휘두르자 "외삼촌(外三寸)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김좌근 의 일화(逸話)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出處)는 김택영(金澤榮)의 《한사경(死境)》인데 헌종(憲宗) 앞에서 애체(礙滯)(안경(眼鏡))를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나서 다행(多幸)인게 당대(當代) 예법(禮法)에서 분명(分明)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眼鏡)을 쓸 정도(程度)로 공부(工夫)]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自身)의 학식(學識)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7] 헌종(憲宗)의 이 말에 조병구는 듣고 놀라서 황급히(遑急히) 물러나와 퇴궐(退闕)하다가 가마 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王后) 조씨(氏) 앞이었는데도 헌종(憲宗)의 책망(責望)을 듣자 음독(飮毒) 자살(自殺)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實際로)는 죽기 전(前) 해까지도 한성(漢城) 판윤(判尹), 예조판서(禮曹判書) , 이조판서(吏曹判書) , 공조판서(工曹判書) 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彈劾)에 몰려 쫓겨나 1845년(年) (헌종(憲宗) 11년(年)) 사망(死亡)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편(便)인 대간(臺諫)들의 견제(牽制)에 따른 것으로 사망(死亡) 시기(時期) 자체(自體)가 헌종이 친정(親庭)을 시작(始作)한 시기(時期)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程度)로 권세(權勢)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內容)이 실릴리 없다. [28]

대사간(大司諫) 서상교가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실세(實勢)인 김흥근(金興根)이 탐오(貪汚)하고 왕대비(王大妃) 의 비위(脾胃)를 맞추어(= 궁위(宮衛)를 엿보아) 정치(政治)하는 것을 보고(報告)하며 처벌(處罰)을 주장(主張)해 헌종(憲宗)은 김흥근(金興根)을 탄핵(彈劾)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수장(首長)인 김좌근 등(等)을 유배(流配)를 보내는 등(等) 반(反)(反) 안동(安東) 김씨(金氏) 행보(行步)를 밟았다. 대구(大邱) 서씨(徐氏) 서희순을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총(銃)위대장(大腸)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밉보인 김정희 , 조병헌은 헌종(憲宗) 14년(年)( 1848년(年) )에 유배(流配)에서 풀렸으며 박규수 를 조정(調整)으로 불러 중용(重用)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反面) 영의정(領議政) 정원용(鄭元容)은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아부(阿附)하다가 파직(罷職)당하는데 오군영(五軍營) 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외척(外戚)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兵曹判書) 를 독자적(獨自的)으로 임명한건 대표적(代表的)이었다. 이렇게 군권(軍權)을 장악(掌握)하고 정조(正祖) 장용영(壯勇營) 처럼 친위대(親衛隊)인 총위영(總衛營)( 총융청(摠戎廳) )까지 구성(構成)하는 등(等) 아주 활발(活潑)한 왕권(王權) 강화(强化) 정책(政策)을 펼쳤다. 아편전쟁(阿片戰爭) 의 전말(顚末)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國防力) 강화(强化)와 척신(戚臣) 척결(剔抉)이 중요(重要)한 과제(課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守令)의 장죄(杖罪)(뇌물(賂物)) 문제(問題)를 전면(前面)으로 들고 나와서 법(法) 개정(改正)을 주도(主導)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首領)의 뇌물(賂物)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勢道) 가문(家門)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確實)하지만 비변사(備邊司) 의 비협조(非協調)로 법(法) 개정(改正)은 무산(霧散)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暗行御史) 도 활발(活潑)하게 전국(全國)으로 파견(派遣)했고,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조병헌 사사(四史) 요구(要求)를 매우 강력(强力)하게 거부(拒否)하면서 역(逆)으로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조종(操縱)을 받던 삼사(三四) 를 모조리 파직(罷職)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結局) 귀양을 갔다가 헌종(憲宗) 말(末)에 풀려나지만 철종(哲宗) 초(秒)에 사사(賜死)된다.

재위(在位) 말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증수(增收)를 위해 정조(正祖) · 순조(順調) · 익종(翼宗) 에 대(對)한 《삼조보감(三朝寶鑑)》(三朝寶鑑)을 1848년(年) (헌종(憲宗) 14년(年))에 찬집(撰集)했고, 《열성지장》, 《 동국사략(東國史略)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등(等)이 편찬(編纂)됐으며 각(各) 도(道)의 제방(堤防)과 저수지(貯水池)를 정비(整備)하는 등(等) 치적(治績)을 세우기도 했다.

2.4. 요절(腰絶) [편집(編輯)]

세도(勢道)가 안동(安東) 김씨(金氏)를 견제(牽制)하며 왕권(王權)을 힘겹게 잡아가는 시도(試圖) 중(中)에 1849년(年) (헌종(憲宗) 15년(年)) 7월(月) 25일(日) [29] , 향년(享年) 21세(歲)의 이른 나이로 창덕궁(昌德宮) 중희당 에서 승하(昇遐)했다. 헌종(憲宗)은 어느 순간(瞬間)부터 피를 토(吐)하며 소화불량(消化不良) 증세(症勢)를 자주 보였고 설사(泄瀉)가 심해지며 얼굴에 갈수록 심(甚)한 부종(浮腫) 증상(症狀)이 나타나 의원(議員)을 통해 약(藥)을 조제(調劑)하고 치료(治療)하면서 상태(狀態)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每番) 반복(反復)하다가 사망(死亡)하였다고 전(傳)해진다.
오시(午時)에 창덕궁(昌德宮)의 중희당에서 승하(昇遐)하다

오시(午時) [30] 에 임금(賃金)이 창덕궁(昌德宮)(昌德宮) 중희당(重熙堂) 에서 승하(昇遐)하였다.

- 헌종실록(憲宗實錄) 》 16권(卷), 헌종(憲宗) 15년(年)( 1849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29년(年)) 6월(月) 6일(日) (임신(妊娠)) 9번째기사(番째記事). [31]

이는 현대(現代) 의학적(醫學的) 관점(觀點)으로 보았을 때 평소(平素) 정력(精力)에 좋다는 음식(飮食)을 많이 복용(服用)하였다는 일화(逸話)로 미루어 급성(急性) 간염(肝炎) 이나 간경변(肝硬變) 의 합병증(合倂症)으로 사망(死亡)했을 가능성(可能性)이 높다. 또한 성기능(性機能) 장애(障礙)를 극복(克服)하려고 녹용(鹿茸)과 인삼(人蔘)을 꾸준히 복용(服用)한 것으로 보아 신부전증(腎不全症) 을 앓다가 심장질환(心臟疾患)이 발생(發生)해 심장마비(心臟痲痹)로 사망(死亡)했을 가능성(可能性)도 높다. 죽기 직전(直前) 다급(多急)히 의원(議員)을 불렀으나 결국(結局) 병(病)을 다스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며 세상(世上)을 떠났는데, 생전(生前)에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고 요절(夭折)한 탓에 정조(正祖) 의 마지막 남자(男子) 직계(直系) 후손(後孫) 이기도 하다.

아버지 효명세자(驍名世子) 도 헌종(憲宗)과 비슷한 나이에 각혈(咯血)하며 쓰러졌고, 이후(以後) 요절(夭折)한 것을 보면 아버지와 비슷하게 체질적(體質的)인 문제(問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 능묘(陵墓) [편집(編輯)]

헌종(憲宗)의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구리시(九里市) 동구릉(東九陵) 내(內)의 경릉(景陵) (景陵) . 왕비(王妃)인 효현왕후 , 효정왕후(王后) 와 나란히 묻힌 삼(三)연릉(三連陵) 으로 삼(三)연릉 형식(形式)은 조선(朝鮮) 왕릉(王陵) 중(中) 유일(唯一)하다. '우왕좌비(禹王座非) [32] '의 원칙(原則)에 따라 맨 왼쪽에 헌종(憲宗) 능(陵)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金氏) , 오른쪽에 효정왕후(王后) 홍씨(洪氏) 가 묻혀 있다. [33]

3. 가계(家計) [편집(編輯)]

  • 외고조부(外高祖父) : 병조판서(兵曹判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문익공(門匿空)(兵曹判書 慶尙道觀察使 文益公) 조엄(趙曮) (趙?)
  • 외증조부(外曾祖父)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숭록대부(崇祿大夫) 효문공(知中樞府事 崇祿大夫 孝文公) 조진관(趙鎭寬)
  • 외조부(外祖父) :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증(增)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풍은부원군(府院君)(領敦寧府事 贈 議政府領議政 豊恩府院君) 조만영 (趙萬永)
  • 외조모(外祖母) : 덕안부부(夫婦)인 송씨(宋氏) (德安府夫人 宋氏)
    • 외삼촌(外三寸)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서장관(書狀官)(成均館大司成 書狀官) 조병구(趙秉龜)
    • 외삼촌(外三寸) :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참판(吏曹參判) 효(孝)헌공(兵曹判書 吏曹參判 孝獻公) 조병기(趙秉夔)
    • 첫째이모(姨母) : 부인(夫人) 조씨(氏) (夫人 趙氏)
      • 첫째이모부(姨母夫) :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대사헌(大司憲)(議政府左參贊 大司憲) 이인설(李寅卨)
    • 둘째이모(姨母) : 부인(夫人) 조씨(氏) (夫人 趙氏)
      • 둘째이모부(姨母夫) : 공조판서(工曹判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효간공(孝肝共)(工曹判書 慶尙道觀察使 孝簡公) 유치선 (兪致善)
    • 막내이모(姨母) : 부인(夫人) 조씨(氏) (夫人 趙氏)
      • 막내이모부(姨母夫) : 김석현(金奭鉉)
  • 장인증조부(丈人曾祖父) : 좌의정(左議政)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익헌공(益獻供)(左議政 司憲府大司憲 翼憲公) 김이소(金履素)
  • 장인조부(丈人祖父) : 충주목사(忠州牧師)(忠州牧使) 김지순(金芝淳)
  • 장인(丈人) :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증(增)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영흥부원군(援軍)(領敦寧府事 贈 議政府領議政 永興府院君) 김조근 (金祖根)
  • 장모(某) : 한성부부인(漢城府否認) 이씨(李氏) (漢城府夫人 李氏)
    • 처남(妻男) : 이조참의(吏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吏曹參議 成均館大司成) 김병집(金炳潗)
      • 처남댁(妻男宅) : 이름 미상(未詳)
        • 양외(孃外)조카 :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서사관(書寫官)(宮內府特進官 書寫官) 김갑규(金甲圭)
    • 처형(處刑) :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 (貞敬夫人 金氏)
      • 동서(東西) :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 문정공(吏曹判書 大提學 文貞公) 남병철 (南秉哲)
  • 장인조부(丈人祖父)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헌간공(肝共)(判義禁府事 工曹判書 獻簡公) 홍기섭(洪耆燮)
  • 장인(丈人) :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증(增)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익풍부원군(府院君)(敦寧府領事 贈 議政府領議政 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 장모(某) : 연창부부(연窓夫婦)인 안씨(安氏) (延昌府夫人 安氏)
    • 첫째처남(妻男) : 예조판서(禮曹判書) 효정공(禮曹判書 孝貞公) 홍종석(洪鍾奭)
    • 처제(妻弟) : 이름 미상(未詳)
    • 둘째처남(妻男) : 홍종선(洪鍾善)

3.4. 배우자(配偶者) / 자녀(子女) [편집(編輯)]


슬하(膝下)에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宮女) 출신(出身) 숙의(熟議) 김씨(金氏) 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夭折)했다. 헌종이 후사(後嗣) 없이 23세(歲)란 젊은 나이에 사망(死亡)함에 따라 결국(結局) 정조(正祖) 로부터 이어진 정조계(正祖界) 왕통(王統) [40] 은 단절(斷絶)되었다. 이는 결국(結局) 대왕대비(大王大妃) 인(人) 순원왕후 와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勢道)가 그나마 제일(第一) 가까운 왕실(王室) 종친(宗親) 중(中)에 강화도(江華島) 를 뒤져 사도세자(思悼世子) 의 서자(庶子) 은언군 의 서손자(鉏孫子)인 강화(江華)도령 이원범 을 순조(純祖)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하여 옹립(擁立)한 요인(要因)이 되었다.

4. 어진(御眞) [편집(編輯)]

헌종추정어진
R6NuURZ
위키백과(百科)가 추정(推定)한 헌종(憲宗) 어진(御眞)
《선원보감(船員寶鑑)》에 실린 헌종(憲宗) 초상화(肖像畫)
헌종(憲宗)의 정식(正式) 어진(御眞) 1954년(年) 12월(月) 26일(日)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용두산 에 발생(發生)한 화재(火災) 로 완전히(完全히) 소실(消失)되었다. 다만, 조선(朝鮮) 국왕(國王)들의 간략화(簡略化)된 어진(御眞)을 실어놓은 《선원보감(船員寶鑑)》에서 헌종(憲宗)의 초상화(肖像畫)를 찾을 수 있다. [41] 별개(別個)로 위키백과(百科)에서는 신원(身元) 미상(未詳)의 어진(御眞) 을 헌종(憲宗)의 어진(御眞)으로 소개(紹介)했는데, 익선관(翼善冠) 이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긴 모양(模樣)인 것과 흥선대원군(大院君) 의 복식(複式) 간소화(簡素化) 이전(以前)의 복식(服飾), 어린 외모(外貌)로 묘사(描寫)한 것을 보면 꽤 그럴 듯 해보이지만 정확히(正確히) 헌종(憲宗)의 어진(御眞)인지는 확실히(確實히) 알 수 없다. # 다만 추정(推定) 어진(御眞) 속에 남은 귀 윗부분(윗部分)의 크기나 눈매가 선원보감(船員寶鑑)과 비슷한 것을 보면 헌종(憲宗)의 초상화(肖像畫)일 가능성(可能性)이 유력(有力)하다.

5. 여담(餘談) [편집(編輯)]

  • 야사(野史)에 따르면 헌종(憲宗)은 계비(繼妃) 삼간택(三揀擇)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金氏) 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自身)의 의사(意思)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 와 어머니 신정왕후(王后) 조씨(氏) 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王后) 홍씨(洪氏) 를 계비(繼妃)로 간택하자(揀擇瑕疵) 3년(年) 뒤에 경빈 김씨(金氏)를 후궁(後宮)으로 간택(揀擇)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實際로)는 경빈 김씨(金氏)가 계비(繼妃) 삼간택(三揀擇)에 참여(參與)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헌종(憲宗)은 경빈 김씨(金氏)를 위해 친히(親히) 낙선재(樂善齋) 를 지었을 정도(程度)라고 한다.
  • 17세(歲)에 천연두(天然痘)를 앓은 기록(記錄)이 전(傳)해진다.
  •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에서 '외모(外貌)가 준수(俊秀)하고 명랑(明朗)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헌종(憲宗) 대왕(大王) 행장(行長)(行狀)

왕(王)은 용청(聳聽)(龍睛)에 서각(犀角)(犀角)이고 외모(外貌)가 준수(俊秀)하고 명랑(明朗)하며 ,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百日)이 되기 전(前)에 능히 일어서셨다.

-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 헌종대왕(憲宗大王) 행장(行長) 中 [42]
  • 4세(歲)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驍名世子)를 여의고 항상(恒常) 효명세자(驍名世子)를 그리워하였다. 효명세자(驍名世子)의 외모(外貌)를 기억(記憶)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신하(臣下)들에게 효명세자(驍名世子)의 외모(外貌)에 대(對)해서 질문(質問)하니 "진전(進展)에 모신 수용(受容)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殿下)의 용안(龍顔)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하였다. 자신(自身)의 외모(外貌)가 효명세자(驍名世子)와 비슷하다는 대답(對答)을 들은 헌종(憲宗)은 거울에 비친 자신(自身)의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였다.
  • 또한 아버지인 효명세자(驍名世子)가 태어날 때 정조(正祖) 외모(外貌)와 판박이(版박이)였다고 전(傳)해지므로 헌종(憲宗)이 아버지인 효명세자(驍名世子) 외모(外貌)를 닮은 것을 보면 정조(正朝)와도 비슷한 용모(容貌)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헌종이 즉위(卽位)할 때 신하(臣下)들이 절실(切實)하고 시급(時急)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場面)이 나오는데, 그 중(中) 궁위(宮衛)를 엄(嚴)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內容)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普通)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誘惑)하니 심지(心지)를 고혹(蠱惑)시켜 성공(成功)에 누(累)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묘(鮮妙) (先廟)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셨으나 환시(幻視)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嚴)해 항상(恒常)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殿下)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言及)된다. [43] 헌종이 미남(美男)이라 젊은 궁녀(宮女)들이 승은(承恩)을 입기 위해 유혹(誘惑)했다는 설(說)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실록(實錄)에 언급(言及)된 내용(內容)을 '미남(美男)이라 궁인(宮人)들이 유혹(誘惑)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好事家)들에 의(依)해 널리 왜곡(歪曲)되어 알려진 것 같다. 헌종실록(憲宗實錄)을 보면 알다시피 '헌종이 미남(美男)이라 궁인(宮人)들이 유혹(誘惑)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卽位)해 궁녀(宮女) 환관(宦官) 등(等) 이들이 쉽게 유혹(誘惑)을 해서 누(累)를 끼친다' 이런 식(式)으로 실제로(實際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왕(王)은 외모(外貌)와 무관(無關)하게 궁녀(宮女)들의 관심사(關心事)인데 승은(承恩)을 입기가 수월한 이유(理由)가 크기 때문이다. 궁녀(宮女)들과 지나치게 성관계(性關係)를 가졌다는 설화(說話)가 있는데 헌종이 궁녀(宮女)들을 가까이 한 건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후손(後孫)을 낳지 않고 후궁(後宮)으로 대(代)를 잇겠다는 의지(意志)라고 보는 해석(解釋)도 존재(存在)한다. 참고(參考)로 다른 야사(野史)에서도 헌종(憲宗) 외모(外貌)에 반했다는 것과 궁인(宮人)들이 유혹(誘惑)했다는 기록(記錄)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 좋은 외모(外貌)에 영민(英敏)한 편(便)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努力)을 해보기도 전(前)에 20대(代) 초반(初盤)에 요절(夭折)하는 등(等) 여러모로 아버지 효명세자(驍名世子) 를 닮은 왕(王)이다. 실제로(實際로) 효명세자(驍名世子)와 헌종(憲宗) 부자(富者)는 외모(外貌)가 판박이(版박이)였다고 하며 승하 당시(當時) 나이도 효명세자(驍名世子)보다 불과(不過)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다. 흥미(興味)롭게도 승하(昇遐) 당시(當時) 장소(場所)는 신분(身分)과 정반대(正反對)인데, 효명세자(驍名世子)는 세자(世子) 신분(身分)에 편전(便殿)인 희정당(熙政堂) 에서 훙서(薨逝)하였고, 헌종(憲宗)은 국왕(國王) 신분(身分)에 동궁(東宮)인 중희당 에서 승하(昇遐)하였다.
  • 서예(書藝)에 능(能)했으며 특히(特히) 예서 에 능(能)했다고 한다.
  • 세간(世間)의 평가(評價)와 달리 왕권(王權) 강화(强化)를 위해 안동(安東) 김씨(金氏)로 대표되는 세도(勢道) 가문(家門)을 견제(牽制)해 이들을 제어(制御)하는 노력(努力)을 하였고 각종(各種) 서책(書冊) 간행(刊行)을 하였다. 동시(同時)에 수령(守令)의 뇌물(賂物) 문제(問題)를 건드려 민생(民生)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死亡)하여 제대로 된 시도(試圖)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結果) 기울어가는 조선(朝鮮)을 끝내 바로잡을 수 없었다.
  • 실제로(實際로) 안동(安東) 김씨(金氏)에서 헌종(憲宗)을 부정적(否定的)으로 평가(評價)한 증거(證據)는 많은데, 할머니 순원왕후 는 헌종(憲宗)을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疑心)이 많으며 시기심(猜忌心)이 강(强)하다"라는 평(評)을 내렸다. 특히(特히) 안동(安東) 김씨(金氏) 출신(出身)의 왕비(王妃)이자 헌종(憲宗)의 친할머니(親할머니)였던 순원왕후(王后)의 어필 봉서(奉書) [44] 을 보면 헌종(憲宗)과 김씨(金氏)였던 순원왕후(王后)가 의외로(意外로) 상당(相當)한 갈등(葛藤)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斟酌)하게 한다. [45] [46]
  • 앞서 소개(紹介)되었듯이 헌종(憲宗)은 후사(後嗣)가 없어 정조(正祖) 생물학적(生物學的) 직계(直系) 혈통(血統)은 완전히(完全히) 단절(斷絶)되어 버렸다. 헌종(憲宗)이 승하(昇遐)한 이후(以後) 조선(朝鮮)의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은 정말(正말) 복잡(複雜)해졌다. 시간(時間)을 거슬러 올라가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임오화변(壬午花邊) 으로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유일(唯一)한 생물학적(生物學的) 적자(赤字)인 정조(正祖)는 폐서인(廢庶人)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자격(資格)으로는 세손(世孫)의 신분(身分)을 유지(維持)할 수 없었다. [47] 그렇기 때문에 영조(英祖) 는 손자(孫子)를 오래전(오래前)에 조졸(早卒)한 자신(自身)의 큰아들 효장세자(驍將世子) 의 양자(養子)로 보내 세손(世孫)의 신분(身分)을 유지(維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勿論) 왕위(王位) 계승(繼承)과 전혀(全혀) 관계(關係) 없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庶子)인 정조(正祖)의 이복동생(異腹同生)들( 은언군 · 은신군 · 은전군 )은 그대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가계(家計)에 남겼다.

    정조(正祖)의 바로 아래동생인(人) 은언군은 자신(自身)의 아들인 상계군 이 역적(逆賊)으로 몰리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버렸으며,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막내아들인 전계군 의 큰아들인 회평군(回評軍) 마저도 역모(逆謀)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전계군(電界軍)의 남은 자식(子息)인 이욱(李煜) 이원범 은 강화도(江華島)에서 평민(平民)으로 살고 있었다. 헌종(憲宗) 승하 후(後) 헌종(憲宗)의 할머니로서 당시(當時) 왕실(王室)의 제일(第一) 큰어른이었던 순원왕후 는 이원범을 양자(養子)로 들여 차기(次期) 국왕(國王)으로 공식(公式) 지명(指名)하였으며, 이원범이 바로 조선(朝鮮)의 제(第)25대(代) 임금(賃金) 철종(哲宗)이다. 철종(哲宗)은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론 [48] 제(第)24대(代) 임금인 헌종(憲宗)과 7촌(寸)(재종숙(再從叔)) 관계(關係)이고, 족보상(族譜上)으론 [49] 9촌(寸) 관계(關係)로 먼 친척(親戚)이었다. 철종(哲宗) 사후(事後) 왕위(王位) 계승(繼承)은 이보다 더 복잡(複雜)하다. 이는 조선(朝鮮) 후기(後期)로 갈수록 왕실(王室)의 손이 귀(貴)해졌다는 것을 방증(傍證)하는 사례(事例) 이기도 하다.

6. 대중매체(大衆媒體) [편집(編輯)]

조선(朝鮮) 역대(歷代) 국왕(國王)들 중(中)에서 사극(史劇)과 가장 인연(因緣)이 늦은 왕(王). 첫 등장(登場)이 2018년(年) 인데 그 전(前)까지는 하다 못해 죽는 장면(場面)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었다. 조선(朝鮮) 왕(王)들 중(中)에서 인지도(認知度)가 낮은 왕(王)들은 여럿 있지만 예종(睿宗) 남이 의 옥사(獄事), 인종(人種) 문정왕후(文定王后) 의 치세(治世)라는 극적(劇的) 사건(事件)이 있어 사극(史劇)에 여러 번(番) 얼굴을 비추기라도 했고, 이렇다 할만한 화제성(話題性) [50] 도 없는 현종(顯宗) 조차도 첫 사극(史劇) 출연(出演)이 2002년(年) 으로 헌종(憲宗)보다 16년(年) 더 빨랐다. 심지어(甚至於) 아내 효정왕후(王后) 2001년(年) KBS 드라마 《 명성황후 》에서 출연(出演)했으니 마누라보다도 더 등장(登場)이 늦은 경우(境遇)이다. 이때 효정왕후(王后)를 연기(延期)한 사람은 배우(俳優) 김정하 [51] 이다.
  • 2018년(年) 9월(月), 개봉(開封)한 영화(映畫) 《 명당(名當) 》에서는 모델 출신(出身) 배우(俳優) 이원근 이 연기(延期)했다. 시사회(試寫會)와 제작보고회(製作報告會)를 통해 "슬프고 유약(柔弱)한 왕(王)," "울분(鬱憤)에 찬 젊은 왕(王)"이라고 소개(紹介)되었고, 작중(作中)에서 흥선군 과 함께 장동(章動) 김씨(金氏) 세도정치(勢道政治) 에 맞서 왕권(王權)을 회복(回復)하려고 그전(그前)에 있었던 아버지 효명세자(驍名世子) 의 무덤을 파헤치고 잘못된 터로 자리잡았다고 발악(發惡) 아닌 발악(發惡)(?)을 하지만 이미 군부(軍部)까지 장악(掌握)해 둔 김좌근 에게 밀려서 반말(半말)로 까불면 세자(世子)와 함께 죽이겠다는 협박(脅迫)을 듣고 김좌근(金左根)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求乞)하는 처지(處地)가 되어 사실상(事實上) 퇴장(退場)한다. 영화(映畫) 막바지에 장동(章動) 김씨(金氏)들의 음모(陰謀)로 아버지 효명세자(驍名世子) 처럼 독살(毒殺)당하는데 명백히(明白히) 고증오류(考證誤謬) 다. 헌종(憲宗)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오히려 이때 신나게 장동(章動) 김씨(金氏) 세력(勢力)들을 조지고 있었다.
    명당헌종
    명당(名當) 》의 헌종(憲宗)
  • 2020년(年) , tvN 드라마 철인왕후 》에서는 배우(俳優) 윤신이 연기(延期)했다. 극중(劇中)에서는 친정(親庭)을 시작(始作)한 후(後) 세도(勢道) 가문(家門)을 견제(牽制)하여 왕권(王權) 강화(强化)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努力)하였고, 세도(勢道) 가문(家門) 세력(勢力)이 크게 약화(弱化)되자 위기감(危機感)을 느낀 세도(勢道) 가문(家門) 세력(勢力)에 의(依)해 죽임을 당(當)한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에서 개발(開發)한 < 빅토리아 2 >의 첫 번째(番째) 시나리오인 '위대(偉大)한 출정(出征)(Grand Campaign)'의 배경(背景)이 빅토리아 여왕(女王) 의 즉위(卽位) 1년(年) 전(前)인 1836년(年)인데 이 시기(時期)가 헌종이 즉위(卽位)한 지 2년(年)이 되는 해이다. [53] 즉(卽) 빅토리아 2 시나리오 1편(篇)에 등장(登場)하는 조선(朝鮮)의 군주(君主)는 바로 헌종인(憲宗人) 것이다. [54]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에서 개발(開發)한 < 빅토리아 3 >는 헌종이 즉위(卽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時點)부터 시작(始作)되기 때문에 조선(朝鮮)의 왕(王)으로 등장(登場)한다. 유저(유저)가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분야(分野)에 개입(介入)하기 때문에 유저의 플레이 방향성(方向性)에 따라 어린 나이에 세도가(勢道家)를 박살내고 동아시아(東아시아) 주변(周邊) 정세(情勢)를 정리(整理)하여 조선(朝鮮)을 강력(强力)한 근대(近代) 산업(産業) 국가(國家)로 성장(成長)시킨 터무니없는 희대(稀代)의 성군(聖君) 루아녹스 이 되거나 # 공화주의(共和主義) 에 휩쓸려 쓸쓸히 퇴위(退位)할 수도 있다. 상투나 단명(短命)한 것이 고증(考證)되어 있지 않다. 내성적(內省的), 외교관(外交官)의 특징(特徵)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게임적(的) 허용(許容)으로 인(因)해 나이가 어려서 굉장히(宏壯히) 오래 산다. 1936년(年) 게임이 끝나기 직전(直前)까지 살아남는 경우(境遇)도 있다. 보통(普通) 렉으로 인해 이까지 가는 경우(境遇)는 드물기에 게임 끝날때까지 헌종이 국가(國家) 지도자(指導者)인 경우(境遇)가 대부분(大部分)이다.
    빅토3 헌종 1.2.4. 버전
    〈빅토리아 3〉의 헌종(憲宗)
  • 패러독스 사의(辭意) Hearts of Iron IV 의 대형(大型) 대체역사(代替歷史) 모드 중(中) 하나인 마지막 제국(帝國) 에서는 임자사화(荏子士禍)를 통(通)해 세도가문(勢道家門)을 축출(逐出)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初代) 황제(皇帝)인 고조(高調) 태황제(太皇帝) 가 된다. 연호는 영락(零落).
  • 효명세자(驍名世子)와 함께하는 조선(朝鮮) 생활(生活) 에선 효명세자(驍名世子)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하고 황제(皇帝)로 즉위(卽位)하며 황태자(皇太子)가 되었고 외전(外傳) 시점(時點)에서 효명세자(驍名世子)가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며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이재황(李在晃)(원(怨) 역사(歷史)의 고종(高宗))이(李) 콩고주민(住民)을 학대하자(虐待瑕疵) 조일준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처벌(處罰)하기로 하는데 이재황(李在晃)이 상어에게 잡아먹히자 그를 황실호적(皇室戶籍)에서 파버린다.

7. 관련(關聯) 문서(文書)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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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2대(代)
정종(定宗)
제(第)3대(代)
태종(太宗)
제(第)4대(代)
세종(世宗)
제(第)5대(代)
문종(文宗)
제(第)7대(代)
세조(世祖)
제(第)6대(代)
단종(斷種)
제(第)8대(代)
예종(睿宗)
제(第)9대(代)
성종(成宗)
제(第)10대(代)
연산군
제(第)11대(代)
중종(中宗)
제(第)12대(代)
인종(人種)
제(第)13대(代)
명종(明宗)
제(第)14대(代)
선조(宣祖)
제(第)15대(代)
광해군
제(第)16대(代)
인조(人組)
제(第)17대(代)
효종(孝宗)
제(第)18대(代)
현종(顯宗)
제(第)19대(代)
숙종(肅宗)
제(第)20대(代)
경종(警鐘)
제(第)21대(代)
영조(英祖)
이진익
이병원
[범례(凡例)] 실제(實際) 혈통(血統) 기준(基準) · 세로선(세로線)(│): 부자(父子) 관계(關係) · 가로선(線)(─): 형제(兄弟) 관계(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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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實際) 혈통(血統)이 아닌 족보(族譜)를 기준(基準)으로 작성(作成)되었으며 왕족(王族) / 황족(皇族)으로서 정식(正式) 봉호(封號)가 있는 사람만 기재(記載)
※ 은신군은 영조(英祖)의 동생 연령군(年齡群)의 후사(後嗣)를 이었으나 당시(當時)에는 장조(莊祖) 의황제(醫皇帝)의 아들로 간주(看做)하여 그 후손(後孫)들에게 황족(皇族) 작호(綽號)를 수여(授與)함
※ 첨자(添字) † 사후(事後) 추증(追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제외(除外)하면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樹立) 이전(以前) 사망(死亡)한 왕족(王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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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4년(年) 부산(釜山) 용두산 대화재(大火災) 로 훼손(毁損)되어 정확(正確)한 용모(容貌)를 알 수 없으나 헌종일(憲宗日) 가능성(可能性)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 순조(順調) 의 황태자(皇太子) 시절(時節) 예진(豫診)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2] 단종(斷種) , 예종(睿宗) 다음으로 요절(腰絶) 한 왕(王)이다. [3] 사후(事後) 모후(母后) 신정왕후(王后)가 고종(高宗) 을 양자(養子)로 들여 장자(長者)가 된다. [4] 1908년(年) (융희(隆熙) 2년(年)), 황제(皇帝) 추존(追尊)과 동시(同時)에 폐지(廢止). [5] 명종(明宗) 도 휘가 '환(圜) '이지만, 명종(明宗)은 '큰 산 환(圜)( ? )'이고 헌종(憲宗)은 '불꽃 환(圜)( ? )'이다. 장조(莊祖) 의 현손(玄孫) 항렬(行列) 대(代)에서는 이름에 '어진(御眞)사람 인(人)(?)'이 들어간 글자(글字)를 공유(共有)한다. 정조(正祖) 의 증손(曾孫)인 헌종(憲宗) 은 '환(圜)( ? )'으로 안에 포함(包含)되어있다. 그리고 고종(高宗) 은 '형(兄)( ? )'으로 좌우(左右)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初名) '재황(再黃)(載 )'에는 '황(黃)(晃)'의 밑에 발의 형태(形態)로 들어가있다. 은언군 의 증손(曾孫)인 덕안군(群) 은 '재덕(才德)(載 )', 청안군 은 '재순(再巡)(載 )'으로 파자(破字)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形態)이다. 은신군 은전군 의 증손(曾孫)으로 완림군(軍) 은 '재원(財源)(載 )', 완순군(婉順軍) 은 '재완(才腕)(載 )', 완영군(完營群) 은 '재긍(再肯)(載 )', 흥친왕(興親王) 은 '재면(載 )', 완은군(銀群) 은 '재선(再選)(載 )', 인양군(引揚群) 은 '재근(在勤)(載 )', 의양군(醫兩軍) 은 '재각(齋閣)(載 )', 예양정 은 '재(再)규(載 )'로, 고종(高宗)의 초명(初名)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形態)로 온전히(穩全히) 들어가있다. 완평군(完平群) 의 둘째 아들 '재현(再現)(載 )'은 본가(本家)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황실(皇室) 종친(宗親) 자격(資格)을 잃었지만 이름자(이름字)에 '?'은 그대로 있다. 유일(唯一)하게 경은군(警銀群) '재성(載星)'이 규칙(規則)을 적용(適用)받지 않았는데, 서자(庶子) 인데다 작호(綽號)를 받은 게 굉장히(宏壯히) 늦은 시기(時期)다. 재미있는 사실(事實)은 저 중(中) 헌종(憲宗)을 제외(除外)하고 장조(長調)의 실제(實際) 혈통(血統)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唯一)하게 저 규칙(規則)을 사용(使用)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全部) 입양(入養)을 통해 족보상(族譜上) 후손(後孫)이 된 경우(境遇)이다.) [6] 효명세자도(驍名世子度) 사실상(事實上) 순조(純祖)의 외아들이었고(둘째 아들은 봉군(封君)되기도 전(前)에 요절(腰絶) ), 순조(純祖)도 문효세자(世子) 가 어려서 죽은 후(後) 정조(正祖) 의 유일(唯一)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헌종(憲宗)은 드물게도 왕(王)인데 3대(代) 독자(讀者) 포지션. [7] 이와 대조(對照)되게 가장 최고령(最高齡)으로 즉위(卽位)한 군주(君主)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로 즉위(卽位) 당시(當時) 나이가 58세(歲)였다. 물론(勿論) 이쪽은 개국(個國) 군주지(君主地) 세습(世襲) 군주(君主)가 아니므로 입장(立場)이 다르다. 오히려 20대(臺)가 개국(個國) 군주(君主)인게 더 이상(異常)하다. 개국(個國) 군주(君主)로 유명(有名)한 한고조(漢高祖) 유방(乳房)도 나이 40대(對) 혹은(或은) 50대(代)(사료상(飼料上) 나이 기록(記錄)에 논란(論難)이 있지만 아무리 젊게 봐도 40대(代) 중반(中盤)이다.)에 통일왕조(統一王朝)의 황제(皇帝)가 되었다. [8] 오후(午後) 3시(時)~5시(時). [9] # . [10] 물론(勿論) 한 나라의 얼굴이자 지도자(指導者)인 왕(王)을 띄워주려는 의도(意圖)가 포함(包含)되어 있었을 것이다. [11] 조선(朝鮮) 왕(王)의 평균(平均) 재위(在位) 기간(期間)은 19년(年), 평균(平均) 수명(壽命)은 46세(世)여서 순조(順調)가 빨리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재위(在位) 기간(期間)이 30년(年)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고. 그러나 상술(詳述)했듯 4년(年) 전(前) 순조(純祖)의 유일(唯一)한 아들이자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효명세자(驍名世子)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탓에 결국(結局) 8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不拘)하고 헌종이 왕위(王位)에 올라야만 했다. [12] 일반(一般) 죄(罪)에 대(對)한 왕(王)의 사면(赦免)을 이름. [13] # . [14] 천주교(天主敎) 서울대교구(大敎區) 제(第)2대(代) 교구장(敎區長) [15] 이들은 훗날(後날) 가톨릭 교황(敎皇)의 공인(公認)을 받은 진짜(眞짜) 가톨릭 성인(成人)이 된다. 특히(特히)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成人)의 경우(境遇)는 지금(只今)도 세계(世界) 가톨릭 신학자(神學者)들이 연구(硏究)를 하고, 정하상(丁夏祥)의 이름을 본(本)딴 가톨릭 교회(敎會)가 미국(美國)이나 남미(南美) 등(等) 해외(海外)에 여럿 있을만큼 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중요(重要)한 가톨릭 성인(成人)이다. 그가 생명(生命)을 걸고 청나라(淸나라) 천주교회(天主敎會)로 수없이(數없이) 건너갔던 일이나, 마카오를 통해 바티칸 교황(敎皇)에게 편지(便紙)를 보낸 사건(事件)이 가톨릭 학계(學界)에서 현재(現在)뿐만 아니라 19세기(世紀) 당시(當時)에도 매우 유명(有名)했으며, 당시(當時) 교황(敎皇) 그레고리오 16세(歲) 가 동양(東洋)에 있다는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의 신자(信者)가 사제(司祭) 한명(名)을 구(救)하기 위해 자기(自己) 생명(生命)을 걸고 편지(便紙)를 보냈다는 사실(事實)에 기뻐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證言) 기록(記錄)도 남아있으며, 지금(只今)도 교황청(敎皇廳)에는 19세기(世紀) 성인(成人) 정하상(丁夏祥)의 편지(便紙)가 보관(保管)되어 있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聖人)의 삼촌(三寸)이 다산(茶山) 정약용 이며, 부친(父親)은 정약용(丁若鏞)의 형(兄)인 가톨릭 복자(福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다. [16] 1834년(年)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1월(月) 20일(日) 1번째(番째) 기사(記事) ' 기호(記號) 지방(地方)에 제수(祭需)의 복정을 특별히(特別히) 늦추게 하다'와 동년(同年) 11월(月) 28일(日) 1번째기사(番째記事)에는 ' 한성부(漢城府) 의 하속(下屬)들이 주구하고 징색(徵色)하는 폐단(弊端)을 범(犯)하지 않도록 신칙(申飭)하다'라는 기사(記事)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實際로)는 별(別) 영향(影響)을 미치지는 않았다.《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834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14년(年)) 11월(月) 20일(日) (신사(紳士)) 1번째기사(番째記事) # , 《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834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14년(年)) 11월(月) 28일(日) (기축(己丑)) 1번째기사(番째記事) # . [17] 집안은 몰락(沒落)한 노론(老論) 이어서 신분(身分)은 중(中)인 이었다고 한다. [18] 이 역모(逆謀)로 인(因)해 회평군(回評軍)은 사약(死藥)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이복동생(異腹同生)들인(人) 철종(哲宗) 영평군 강화도(江華島) 로 유배(流配)된다. [19] 서계(書契)는 주로(主로) 일본(日本)과의 교린(交隣) 관계(關係)(交隣關係)에 대(對)한 문서(文書)를 말하는데, 일본(日本) 사행(蛇行)(使行)의 임무(任務) 내용(內容), 사절(謝絶)(使節)과 상왜(商倭)(商倭)의 구별(區別), 왜구(倭寇)(倭寇) 여부(與否)의 식별(識別) 등(等) 다양한 역할(役割)을 했다. 이의(異議) 발신인(發信人)은 조선(朝鮮)의 경우(境遇) 국왕(國王)을 비롯하여 예조(禮曹)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와 동래(東來) 부사(府使) 등(等)이 막부장군(幕府將軍)(幕府將軍)·대마(大麻) 도주(逃走)·거추(巨酋) 등(等)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별(大別)되고, 일본(日本) 의 경우(境遇)는 막부장군(幕府將軍) 등(等) 국가(國家)에서 보내 오는 공신(功臣)(公信)으로의 서계(書契)와 거추 등(等)이 보내 오는 사신(使臣)(私信)으로서의 서계(西階)로 대별(大別)된다. [20] # . [21] 악인(惡人)(惡人)의 비유(比喩)한다. 효(孝)(梟)는 어미새를 잡아먹는 올빼미, 경(警)(?)은 아비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을 비유(比喩)해 말한다. [22] 차서 넘치는 모양(模樣)을 말함. [23] 은(殷)나라의 현상(現象)(賢相) 이윤(利潤)(伊尹)과 전(傳)한(前漢)의 명신(名臣) 곽광(霍光)(?光). 이윤(利潤)은 처음에 농부(農夫)(農夫)였는데, 탕왕(湯王)(湯王)이 세 번(番)이나 초빙(招聘)(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出仕)하였음. 탕왕(湯王)을 도와 하(下)(夏)의 걸왕(桀王)을 정복(征服)하고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 탕왕(湯王)이 죽은 뒤에 그 손자(孫子) 태갑(胎甲)(太甲)이(李) 무도(無挑)(無道)하게 행동(行動)하므로 이를 3년(年) 동안 동궁(東宮)(桐宮)에 추방(追放)하였다가, 태갑(甲)이 다시 회개(悔改)하자 맞아들였다. 곽광은 무제(無題)(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淫亂)하므로 그를 폐위(廢位)시키고 선제(先制)(宣帝)를 세웠다. 전후(戰後) 20년(年) 동안 나라의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그의 딸은 선제(先制)의 황후(皇后)가 되어 온 집안이 부귀(富貴)를 누렸으나, 이로써 그의 사후(死後)(死後)에 선제(先制)는 곽씨(郭氏)(?氏)의 병권(秉權)(兵權)을 거두고, 모반(母斑)(謀反)하려 하였다고 해서 친족(親族)(親族)을 멸(滅)하였음을 의미한다. [24] 죄인(罪人)이 스스로 자백(自白)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未安)하다’는 뜻으로 자기(自己)의 잘못을 고백(告白)하던 말을 의미(意味)한다. [25] 사형(死刑)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原則)이나, 십악(十惡) 대죄(大罪)(十惡大罪) 등(等) 중죄(重罪)(重罪)를 범(犯)한 죄인(罪人)은 이에 구애(拘礙)되지 않고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는데, 이를 부대시(不待時)라고 함(函). 능지 처사(處事)(凌遲處死)는 가장 참혹(慘酷)한 형벌(刑罰)(刑罰)의 하나로, 먼저 팔·다리의 사지(四肢)(四肢)를 절단(切斷)하고 그 다음에 머리를 베는 것. 수(隋)·당(黨)(唐) 이래(以來)로 없어졌으나 원(元)나라 때 다시 부활(復活)되었고, 조선(朝鮮) 에서는 거열(車裂)(車裂)로써 이를 대신(代身)하였다. [26] # . [27] 훗날(後날) 서재필 고종(高宗) 앞에서 안경(眼鏡)을 썼다가 욕(辱)을 먹기도 했고, 순종(純宗) 도 지독(至毒)한 근시(近視)였지만 아버지 고종(高宗) 앞에서는 예(例)를 지키기 위해 안경(眼鏡)을 안 썼다고 한다. [28] 조병구의 《졸기》에는 '숙성(夙成)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刻薄)한게 흠(欠)이었다'고 되어 있다. [29] 음력(陰曆) 6월(月) 6일(日). [30] 오전(午前) 11시(時)~오후(午後) 1시(時). [31] # . [32] 오른쪽에 왕(王)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王妃)를 장사(葬事)함. [3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의 작가(作家) 박시백 은 이 능(陵)에 대(對)해 " 안동(安東) 김씨(金氏) 인(人) 효현왕후 를 헌종(憲宗)과 효정왕후(王后) 가 모시는 듯한 인상(印象)을 준다"고 촌평(寸評)하기도 했다. [34] 친증조모(親曾祖母)는 정조(正祖) 의 간택후궁(揀擇後宮)인 현목수비(玄木守備) 박씨(朴氏) 이다. [35] 생몰기간(生沒期間) : 1828년(年) 4월(月) 27일(日) ~ 1843년(年) 10월(月) 18일(日) . 혼인(婚姻)을 불과(不過) 10살 때인 1837년(年)에 하였다. 1살 많은 남편(男便) 헌종(憲宗)은 11살. [36] 생몰기간(生沒期間) : 1831년(年) 3월(月) 6일(日) ~ 1904년(年) 1월(月) 2일(日) . [37] 생몰기간(生沒期間) : 1832년(年) 9월(月) 21일(日) ~ 1907년(年) 6월(月) 1일(日) . [38] 생몰기간(生沒期間) : 1814년(年) ~ 1895년(年) 11월(月) 12일(日) . [39] 헌종(憲宗)의 유일(唯一)한 혈육(血肉)이자 자녀(子女)였다. 1848년(年) (헌종(憲宗) 14년(年))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당일(當日)에 사망(死亡) (조졸(漕卒))했다. [40] 정조(正祖) - 순조(順調) - 익종(翼宗) - 헌종(憲宗) 순(順). [41] 신뢰(信賴)하기 어려운 것이 23살에 요절(夭折)한 헌종(憲宗)의 초상화(肖像畫)라고 보기에는 참고(參考)만 하도록 하자. 비슷한 나이대(帶)인 연잉군 의 초상화(肖像畫)와 비교(比較)해도 상당히(相當히) 노안(老眼)이다. [42] # . [43] 헌종실록(憲宗實錄) 》 1권(卷),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 1834년(年) , 청(靑) 도광(道光)(道光) 14년(年)) 12월(月) 16일(日) (병오(丙午)) 1번째기사(番째記事). # . [44] (헌종이 죽기 며칠 전(前)) '왕(王)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內) 집의 패악(悖惡)한 자식(子息)', (헌종(憲宗) 사후(事後)) '나도 거리길 거시(巨視) 업서 싀훤해(海)' 등(等) [45] 변원림(林)의 해석(解釋)(<순원왕후 독재(獨裁)와 19세기(世紀) 한국(韓國) 사회(社會)의 동요(童謠)>, 2012년(年)) 참조(參照). 다만, <순원왕후(王后)의 한글 편지(便紙)>를 편집(編輯)한 이승희(李承姬) 교수(敎授)는 이를 '안동(安東) 김씨(金氏) 일가(一家)의 패악(悖惡)한 이'로 해석(解釋)한다. 《대비(對比), 왕(王) 위의 여자(女子)》의 김수지 의 종합(綜合)에 따르면 순원왕후(王后)는 대체로(大體로) 친정(親庭) 김씨(金氏) 가문(家門)을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王家)를 '내(內)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王后)는 '내(內) 집'을 거론(擧論)했으므로 '내(內) 집의 패악(悖惡)한 자식(子息)'이라고 언급(言及)할 만큼 손자(孫子) 헌종(憲宗)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 [46] 안동(安東) 김씨(金氏) 김흥근 이 유배(流配)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王后)에게 질타(叱咤)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便紙)에서 "김흥근(金興根)이 떳떳하다면 (유배(流配)는) 금방(今方) 지나갈 액운(厄運)이며, 우리 가문(家門) 이 흥(興)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警戒)이니라. 더욱 조심(操心)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哲宗)의 왕비(王妃)를 간택(揀擇)할 때 안동(安東) 김씨(金氏) 문중(門中)을 배제(排除)하도록 조언(助言)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要職)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等) 가문(家門)과 일정거리(一定距離)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47] '逆敵之子 不爲君王(역적(逆賊)지자 불위군왕(君王)). 역적(逆賊)의 아들은 왕(王)이 될 수 없다.'는 기지(機智)로 정조(貞操)에게는 끊임없이 불안정(不安定)한 왕위(王位) 계승(繼承)에 대(對)한 의심(疑心)과 눈초리로 내내 꼬리표(꼬리票)를 달았고, 이 때문에 암살(暗殺) 위협(威脅)도 수차례(數次例) 받았었다. [48] 정조(貞操)를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長調))의 아들로 볼 경우(境遇). [49] 정조(貞操)를 효장세자(驍將世子) (진종(眞宗))의 양자(養子)로 볼 경우(境遇). [50] 예송논쟁(禮訟論爭) 이 있기는 하나 사극(史劇)으로 만들기에는 썩 좋은 소재(素材)가 아니다. [51] 막돼먹은 영애씨(氏) 에서 주인공(主人公) 영애씨(氏)의 엄마로 오랜기간(期間) 연기(演技)한 배우(俳優)가 이 사람이다. [52] 이름은 효명세자(驍名世子) 와 같은 '이영' 그대로인데 한자(漢字)를 바꾸어 음(音)만 같은 동명이인(同名異人) 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들 효명세자(驍名世子)로 잘못 알려져 동구릉(東九陵) 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단다. [53] 헌종(憲宗)의 즉위(卽位)는 1834년(年)으로 빅토리아 여왕(女王)보다 2년(年) 앞섰다. [54] 물론(勿論) 헌종(憲宗)은 6년(年) 간(間) 명경대왕대비(明鏡大王大妃) 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았으니 서양인(西洋人)들의 시각(視角)에선 순원왕후(王后)를 실질적(實質的)인 군주(君主)로 간주(看做)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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