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대학교(學校) 주변(周邊)에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미래(未來)캠퍼스
와
강릉원주대학교(江陵原州大學校)
원주(原州)캠퍼스가 존재(存在)한다.
1994년(年) 재계순위(財界順位) 20위권(位圈) 진입(進入)에 성공(成功)하며, 한창 최고(最高)의 주가(株價)를 자랑하고 있던 前
한라그룹
명예회장(名譽會長)
정인영
(鄭仁永)
[1]
은
한라그룹
의 규모(規模)가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전문(專門) 인력(人力)이 필요(必要)하다고 판단(判斷)하였고 이에 따라 기업(企業)이 필요(必要)한 전문(專門) 공학기술자(工學技術者)들을 직접(直接) 양성(養成)하고자 학교법인(學校法人) 배달학원(配達學院)에서 한라공업전문대학(工業專門大學)으로 설립인가(設立認可)를 받아 1995년(年) 7개(個) 학과(學科)에 신입생(新入生) 720명(名)으로 개교(開校)하였다.
당시(當時)
한라그룹
은 국내(國內) 최대(最大)의 자동차(自動車) 부품회사(部品會社)인
만도
를 기반(基盤)으로 96년(年) 재계순위(財界順位) 16위(位), 97년(年) 98년(年) 재계순위(財界順位) 12위(位) 등(等) 꾸준한 상승세(上昇勢)를 보이며 한국(韓國)을 대표(代表)하는 대기업중(大企業中)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그 한라그룹의 회장(會長)인 정인영 박사(博士)는 평소(平素) 기술(技術) 인력(人力) 양성(養成)에 깊은 관심(關心)을 갖고 있던 인물(人物)로 적극적(積極的)인 지원(支援)을 통(通)해 한라대학(大學)을 명문대학(名門大學)으로 육성(育成)할 생각을 비추고 있었다. 때문에 개교(開校) 당시(當時)에는 많은 이목(耳目)이 집중(集中)되었고 지역주민(地域住民)들도 기대(期待)가 많았다.
[2]
하지만 1997년(年) IMF이후(以後)
한라그룹
의 부도(不渡)와 함께 한라그룹의 밥줄 역할(役割)을 해주던
만도
를 외국계(外國系) 사모(私募)펀드에 빼앗기면서 설립자(設立者) 정인영의 대학(大學)에 대(對)한 당초(當初) 투자계획(投資計劃)은 상당부분(相當部分) 이루어지지 못했고, MIT를 모델삼아 HIT(Halla Institute of Technology)를 만들려 했던 원대(遠大)한 꿈도 후일(後日)을 기약(期約)하며 현재(現在)에 이르게 된다.
2008년(年)
한라그룹
이
만도
를 다시 인수(引受)하며 재계순위(財界順位) 50위권(位圈)에 진입(進入)하였고 2015년(年) 30대(大) 재벌기업(財閥企業)으로 자리를 잡으며 한라그룹이 재건(再建)에 성공(成功)하면서 다시 한라대학교(學校)에 적극적(積極的)인 투자(投資)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期待)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고(高)3 담임선생님(擔任先生님)들이 중위권(中位圈) 학생(學生)들에게 한라그룹의 계열사(系列社)로 취업(就業)이 가능(可能)하다고 하여 추천(推薦)을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3]
[4]
공과대학(工科大學)
을 중심(中心)으로 학교(學校)에서 많은 지원(支援)을 하는 편(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