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했듯 독일(獨逸)은 1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포젠
과
서프로이센
대부분(大部分)
[16]
,
엘자스-로트링겐
및 기타(其他) 일부(一部) 영토(領土)를 빼앗겼고,
2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동프로이센
,
슐레지엔
,
[17]
브란덴부르크
동부(東部)의 1/3과
포메른
의 2/3 등(等)
오데르-나이세 선(線)
이동(移動)의 동방(東方) 영토(領土)를 잃어버렸다.
비록
현대(現代)
에 이르러서 현재(現在) 독일(獨逸)의 수도(首都)인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주(州) 등(等)을 제외(除外)한 옛 프로이센의 대부분(大部分)이
폴란드
나
러시아
에 예속(隸屬)되었다곤 해도,
프로이센이 현대(現代)
독일(獨逸)
에 미치는 직간접적(直間接的)인 영향(影響)은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크다.
30년(年) 전쟁(戰爭)
이후(以後) 수백(數百) 개(個)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지고,
나폴레옹 전쟁(戰爭)
으로 태반(胎盤)이 정리(整理)되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왕국(王國)
만(萬) 4개(個)(
프로이센
,
바이에른
,
뷔르템베르크
,
작센
)가 존재(存在)했던 독일(獨逸)이 지금(只今)의 통일(統一)된 독일(獨逸)로 있게 만든 나라인 데다가 독일(獨逸)에 대(對)한 대외(對外) 이미지 등(等) 프로이센이
현대(現代) 독일(獨逸)
에 미친 영향(影響)은 지대(至大)하다. 심지어(甚至於)는 현대(現代) 독일(獨逸)의
수도
도 프로이센 왕국(王國)의 수도(首都)였던
베를린
인 데다가, 앞서 말한 대로
독일(獨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유니폼 색상(色相)이 흑적금(黑積金) 삼색(三色)이 아닌 흑백(黑白)으로 되어 있는 것도 프로이센의 영향(影響)이 짙다.
독일(獨逸)
네오 나치
및
극우파(極右派)
들의 염원(念願)이 이 과거(過去) 프로이센의 영토(領土) 수복(收復)인데, 현재(現在) 독일(獨逸)의 방침(方針) 자체(自體)가
'상실(喪失)한 영토(領土)의 영유권(領有權)을 영구히(永久히) 포기(抛棄)한다
'라서
가능성(可能性)은 제로.
이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러한 독일(獨逸)의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에 대(對)한 영토포기(領土抛棄)가 온당(穩當)한 결정(決定)이라고 주장(主張)하는데 이는 사실(事實)이다. 과거(過去)
나치 독일(獨逸)
은
폴란드
를 침략(侵略)하여 유대인(유대人) 90%를 포함(包含)한 폴란드 전체(全體) 인구(人口)의 무려(無慮) 25%를 학살(虐殺)했다.
[18]
이 막심(莫甚)한 손해(損害)는 독일(獨逸)이 보상(補償)하지 않으면 폴란드가 보상(報償)받을 방법(方法)이 없다. 소련(蘇聯)에 빼앗긴 영토(領土)를 점유(占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와
벨라루스
에 보상(補償)을 요구(要求)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산(公算) 폴란드
가 들어선 후(後) 독일(獨逸)로 강제(强制) 이주된 이들 중(中)에는 바로 이 나치 독일(獨逸)이
유대인(유대人)
과
폴란드인(人)
들을 학살(虐殺)하고 해당(該當) 도시(都市)에 대거(大擧) 독일인(獨逸人)들을 이민(移民)시킨 것도 있다. 전쟁(戰爭) 기간(期間) 동안 250만(萬)에 이르는 폴란드 시민(市民)들이 독일(獨逸)의 강제(强制) 이주(移住)로 쫓겨났고, 이 자리를 130만(萬)에 이르는 독일(獨逸) 정착민(定着民)들이 차지했다.
예(例)를 들어 폴란드 공업(工業) 도시(都市)
우치(憂恥)
(Łod?)의 경우(境遇), 전쟁(戰爭) 전(前)의 시민(市民) 중(中) 독일계(獨逸系)는 9%에 불과(不過)했지만 독일(獨逸)이 점령(占領)한 이후(以後) 25만(萬)에 이르는 유대인(유대人)과 15만(萬)에 이르는 폴란드인(人)들이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大部分)은
학살(虐殺)
당(當)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15만(萬)에 이르는
독일인(獨逸人)
이 차지했다. 단순히(單純히) 우치(憂恥)뿐만 아니라 독일(獨逸)에 병합(倂合)된 폴란드 서북부(西北部) 영토(領土)에서도 이러한 일이 빈번(頻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폴란드인(人)과 유대인(유대人)들의 자리를 차지한 독일인(獨逸人)들 중(中) 일부(一部)는
독일군(獨逸軍)
을 따라 독일(獨逸) 영토(領土)로 도망쳤거나 학살(虐殺) 및 추방당했(追放當下)고, 나머지 독일인(獨逸人)들은 전후(前後)
폴란드 공산(共産) 정권(政權)
에서
독일(獨逸)로 강제(强制) 이주시켰다.
이 경우(境遇)는 단순(單純)한 압제자(壓制者)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單純히) 인구(人口)뿐만이 아니다. 폴란드는 독일(獨逸)의 침공(侵攻)으로 전체(全體) 재산(財産)의 상당수(相當數)를 잃어버렸다.
바르샤바
,
그단스크
,
그디니아
,
포즈난
등(等) 유수(有數)의 폴란드 도시(都市)들이 폐허(廢墟)가 되거나 반파(半破)되었다.
[19]
특히(特히)
바르샤바
의 경우(境遇)는 독일(獨逸)에 의(依)해 계획적(計劃的)으로 매우 철저히(徹底히) 파괴(破壞)되었다. 또한
제(第)2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이후(以後)
소련(蘇聯)
이 폴란드 동부(東部) 지역(地域)을 자신(自身)이 가져갔고 그 보상(補償)으로 독일(獨逸) 동부(東部) 지역(地域)을 떼어 폴란드에 주었다. 당시(當時) 소련(蘇聯) 지도자(指導者)가 악명(惡名) 높은
이오시프 스탈린
이었다. 오히려 당시(當時)
런던
의
폴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
는 전쟁(戰爭) 전(前)의
국경(國境)
을 원(願)했다. 오히려 독일(獨逸)이 차지하던 구(舊) 동방(東方) 영토(領土)들을 폴란드에게 합병(合倂)하게 해준 것은 스탈린이었다. 또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侵攻)
에서 독일(獨逸)과 함께 폴란드를 동서(東西)로 갈라먹은지라 폴란드의 입장(立場)에선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얄미운 철천지 원수(怨讐) 같은 존재(存在)였고, 당시(當時) 스탈린으로서는 제(第)2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 이후(以後)에 친소련(親蘇聯) 위성국가(衛星國家)가 된 폴란드의 적개심(敵愾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西部) 등(等) 폴란드 제(第)2공화국(共和國)이 소(小)폴전쟁(戰爭)을 통해 폴란드로 흡수(吸收)했던 구(舊) 폴란드령(令) 동부(東部) 지역(地域)들을 가져가는 대신(代身) 폴란드가 슐레지엔과 힌터포메른, 동프로이센 남부(南部) 등(等) 독일(獨逸)이 지배(支配)하던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들을 합병(合倂)하도록 하는 조처(措處)를 취(取)한 것이다.
이외(以外)에도 폴란드는 전후(戰後) 독일(獨逸)에 보상(補償)을 청구(請求)한 적(敵)이
의외로(意外로) 단(單) 한 번(番)도 없다
.
[20]
1945년(年)
당시(當時) 폴란드인(人)들이 이
국경(國境)
을 원(願)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위에도 써놨지만
스탈린
이 친히(親히) 그렇게 명령(命令)했다
. 그리고 폴란드는 독일(獨逸) 동부(東部)를 얻은 대가(代價)로 자국(自國)의 동부(東部) 영토(領土)를 소련(蘇聯)에 빼앗겼다.
[21]
즉(卽) 폴란드 입장(立場)에서는 실질적(實質的)으로 보상(補償)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은 것은 독일(獨逸)이 남기고 간 폐허(廢墟)와 독일령(獨逸令) 시절(時節) 여기에서 살던 독일인(獨逸人) 사업가(事業家)와 나치당원(黨員)들이 경영(經營)하던 약간(若干)의 맥주(麥酒) 양조장(釀造場) 및 공장(工場), 조선소(造船所), 탄광(炭鑛) 정도(程度) 밖에 없었다.
[22]
그나마 폴란드 인민(人民)으로서 공산주의(共産主義) 사상(思想) 개조(改造)를 시켜서라도 지역(地域) 경제(經濟)를 굴릴 수 있는 독일계(獨逸系) 주민(住民)들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스탈린의 지시(指示)에 의(依)해, 그리고 청년층(靑年層) 인구(人口)가 거의 박살난 독일(獨逸)의 피해(被害) 재건(再建)을 위해 이 일대(一帶)에서 살던 독일계(獨逸系)들은 전부(全部) 다
동독(東獨)
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폴란드인(人)들은 소련(蘇聯)으로부터 신규(新規)로 합병(合倂)해 먹은 이 구(區) 독일령(獨逸令) 지역(地域) 위에서 모든 것을 백지상태(白紙狀態)에서 어렵게 재건(再建)해야 했다. 그런데 물론(勿論) 가능성(可能性)이야 없지만 만약(萬若) 독일(獨逸)이 갑자기 폴란드에 영토(領土)를 내놓으라 한다면, 폴란드 입장(立場)에서는 정말(正말)이지 날강도(强度)도 이런 날강도(날强盜)가 없다. 나치 독일(獨逸)에 의(依)해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被害)를 입은 국가(國家)가 폴란드와 소련(蘇聯)인데, 그 역사적(歷史的) 과정(過程)을 그냥 무시(無視)하고 내놓으란 법(法)이 있는가?
사실(事實) 이러한 주장(主張)은 현실적(現實的)으로도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현대(現代) 폴란드 서부(西部)와 북동부(北東部) 지방(地方) 영토(領土)의 3분(分)의 1 이상(以上)이 옛 프로이센(
독일제국(獨逸帝國)
기준(基準)) 땅이다.
폴란드가 이 영토(領土)를 가지게 된 계기(契機)는
제(第)2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이 끝난 이후(以後)
스탈린
이
독소(毒素)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
을 맺고
폴란드 침공(侵攻)
에 가담(加擔)하여 집어삼켰던 영토(領土)를 내놓지 않으려고 폴란드에 일련(一連)의 보상(補償)으로서 대규모(大規模) 탄전(炭田) 지대(地帶)이자 공업(工業) 지대(地帶)였던
슐레지엔
,
발트해(발트海)
요충지(要衝地)인
포메른
, 근대(近代) 독일(獨逸)의 발상지(發祥地)인 프로이센 및
브란덴부르크
동부 등(等)의 독일(獨逸) 영토(領土)를 대신(代身) 할양한(割讓限) 것인데, 이 때문에 본래(本來) 폴란드에서 약간(若干) 서쪽(西쪽)에 위치(位置)하던 수도
바르샤바
가 상당히(相當히) 동쪽(東쪽)에 쏠리게 되는 등(等) 국토(國土)가 서쪽(西쪽)으로 많이 밀려나게 되었다.
현대(現代)에도 이 지역(地域)은 폴란드의 알토란인(알土卵人) 데다 폴란드 역시(亦是)
커즌 선
이동(移動)의 고토(故土)를 소련(蘇聯)에 빼앗겼기 때문에 이 상황(狀況)에서의 상실(喪失) 영토(領土) 수복(收復) 발언(發言)이나 운동(運動)은 결국(結局) 폴란드를 집어삼키거나 혹은(或은) 그 정도(程度)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안보적(軍事安保的)으로 자국을 위협(威脅)하겠다는 뜻이 된다.
경제적(經濟的)인 측면(側面)에서 보아도
1990년(年)
독일(獨逸) 통일(統一)
이후(以後) 구동독(舊東獨) 지역(地域)을 구서독(舊西獨) 지역(地域)과 균형(均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독일(獨逸) 경제(經濟)에 크게 무리(無理)를 줬고, 현재(現在)까지 그 부작용(副作用)이 만만찮다. 그것도 모자라 구동독(舊東獨) 지역(地域)보다 경제적(經濟的)으로 비교적(比較的) 낙후(落後)된 구(舊) 프로이센 영토(領土)까지 덜컥 떠맡게 된다면?
1989년(年)
동독(東獨)의 1인당(人當) 명목(名目)
GDP
는 $9,679였고,
폴란드
는
1989년(年)
당시(當時)
$4,565에 불과(不過)했는데
, 이 자료(資料)도 공산(共産) 국가(國家) 특유(特有)의 과장(誇張)된 통계(統計)로 실제로(實際로)는 동독(東獨) 3000, 폴란드 1000~1500이었다. 참고(參考)로
1989년(年)
당시(當時)
서독(西獨)
은 $15,300.
[23]
거의
슬라브인(人)
으로 구성(構成)된 인구(人口)만 1,000만(萬) 명(名)이 넘는 데다가 서독(西獨) 근처(近處)도 못 오는 경제력(經濟力)
[24]
을 자랑했던 이 지역(地域)을 떠맡는다면 훨씬 문제(問題)가 심각(深刻)해졌을 것이다.
거기다가 전쟁(戰爭) 중(中) 있었던 대규모(大規模) 학살(虐殺)이나 전후(前後)의 강제(强制) 이주(移住)로 인해 현재(現在)(
21세기(世紀)
)는
슐레지엔
이나 프로이센 지방(地方)에 독일인(獨逸人)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
체코
에 있는
수데티
지방(地方)도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獨逸) 시절(時節)처럼 현지(現地)의 독일인(獨逸人)들의 민족(民族) 심리(心理)를 자극(刺戟)하여
민족(民族) 자결주의(自決主義)
를 운운(云云)하며 영토(領土)를
병합(倂合)
할 가능성(可能性)은 거의 없는 것이다.
다만 북부(北部) 오스트프로이센, 즉(卽) 현재(現在)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州)에서는 2001~2004년경(年頃)
러시아계(系) 주민(住民)들의 자발적(自發的)인
독일(獨逸)로의 병합(倂合) 운동(運動) 및
쾨니히스베르크
명칭(名稱) 복귀(復歸) 운동(運動)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
소련(蘇聯) 붕괴(崩壞)
이전(以前) 소련(蘇聯) 영토(領土)였던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등(等) 발트 3국(國)이
유럽연합(聯合)
에 가입(加入)하며
칼리닌그라드
주가(株價) EU 안의
섬
이 되어버렸기 때문. 같은 러시아 영토(領土)인데도 불구(不拘)하고
칼리닌그라드
에서
모스크바
등(等) 러시아 본토(本土)에 육로(陸路)로 이동(移動)하려면
비자
가 필요(必要)한 해괴(駭怪)한 상황(狀況)이 되어버린 것이다.
[25]
안 그래도 주변국(周邊國)보다 경제적(經濟的)으로 낙후(落後)되어 있던 차(次)에 차별(差別) 아닌 차별(差別)까지 받게 되자 소외감(疏外感)이 극(極)에 이른 주민(住民)들이 이 참에 아예 칼리닌그라드 주(州)를 독일(獨逸)로 환수(還收)하거나, 적어도 자치권(自治權)을 받기 원(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도 이 지역(地域)은
발트해(발트海)
연안(沿岸)의 요충지(要衝地)로
스칸디나비아
지역(地域)과
중부(中部) 유럽
을 동시(同時)에 견제(牽制)할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 해군(海軍)
의
발트함대(艦隊)
의 모항(母港)인 이유(理由)가 이 때문이다. 또한
부동항(不凍港)
이라는 것도 중요(重要)한 요소(要素)라서 도저히(到底히) 포기(抛棄)할 수 없는 지역(地域)이다.
우크라이나
나
일본(日本)
과의 영토(領土) 분쟁(紛爭)에 불리(不利)해질 선례(先例)를 남길 수도 없는 처지(處地)인 데다
[26]
현재(現在) 러시아의
실권자(實權者)
는 다른 사람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 거기에다 독일(獨逸)에서도 종전(從前) 약속(約束)을 지키기 위(爲)해 다시 한번(番)
칼리닌그라드
주는 엄연(儼然)한 러시아 땅이라고 천명(闡明)하며 독일(獨逸) 환수(還收) 운동(運動)의 입을 막았다. 러시아가 나서서 돌려주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以上) 독일(獨逸)로 돌아갈 가능성(可能性)은 없다. 다만 현재(現在)도
칼리닌그라드
에 독일인(獨逸人)들이 문화(文化), 사회(社會), 경제면(經濟面)으로
칼리닌그라드
내 지분(持分)을 착실히(着實히) 늘려가고 있고, 프로이센 시대(時代)
문화유산(文化遺産)
유지(維持) 보수(補修)에 신경(神經)쓰는 것을 보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당장(當場) 무리수(無理數)는 두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적(順理的)으로 병합(倂合)할 걸 노리는 건 아닌가 하는 소리도 간간이(間間이)는 나온다.
#
물론(勿論) 현실적(現實的)으로 독일(獨逸)이
통일(統一)
조건(條件)으로
오스트리아와의 통일(統一)
금지(禁止) 및 옛 영토(領土)(
주데텐란트
/
포메른
및
동프로이센
) 수복(收復) 금지(禁止)를 내건 만큼 이 역시(亦是)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관측(觀測)이다. 애초(애初) 독일(獨逸)의
국력(國力)
자체(自體)도 러시아에 한참 밀려 러시아가 위협(威脅)을 느끼면 주둔(駐屯) 병력(兵力)을 늘려서 봉쇄(封鎖)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도시(都市)를
2018년(年)
러시아 월드컵
의 주요(主要) 개최(開催) 도시(都市) 중(中) 하나로 지정(指定), 명백(明白)한 러시아 땅으로 못 박아 두는 강수(强手)까지 보였다! 정확히(正確히)는 조별(組別) 리그 3개(個) 경기(景氣)를
칼리닌그라드
에서 치르었고, 당연히(當然히)
독일(獨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은 뺐으며,
스페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
모로코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이 격돌(激突)했다.
사실(事實) 이제 유럽 같은 안정(安定)된 사회(社會)에서
영토분쟁(領土紛爭)
을 일으키는 것도 자폭(自爆) 행위(行爲)이거니와, 이미
세계대전(世界大戰)
을 두 번(番)이나 치른
[27]
독일(獨逸)이 다시 영토(領土) 수복(收復) 움직임을 보이는 것 자체(自體)가 주변국(周邊國)들에는 굉장히(宏壯히) 위협적(威脅的)인 일이기 때문에 독일(獨逸)로서는 선택(選擇)의 여지(餘地)가 있는 상황(狀況)도 아니었다.
영국(英國)
,
프랑스
나
폴란드
등(等) 주변국(周邊國)의 독일(獨逸) 영토(領土) 수복(收復)에 대(對)한 경계심(警戒心)은 정말(正말)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한다.
1990년(年)
독일(獨逸)이 통일(統一)될
때에도 영국(英國)의
마거릿 대처(對處)
총리(總理)는 아예 통일(統一) 자체(自體)에 반대(反對)했고, 프랑스와 폴란드는 더 이상(以上)의 영토(領土) 수복(守僕)이 없고 현(現) 국경(國境)에 만족(滿足)할 것을 명시(明示)하라고 수(數) 차례(次例)나 압박(壓迫)하고 맹세(盟誓)를 강요(强要)했다.
참고(參考)로 독일(獨逸)
국가(國家)
인(人)
독일인(獨逸人)의 노래
1절(節)에는 '마스(뫼즈강)에서 메멜
[28]
까지, 에치(아디제 강(江))에서 벨트해(海)
[29]
까지'라며 현(現) 독일국(獨逸國)의 영토(領土)를 규정(規定)하는 구절(句節)이 있는데 지금(只今) 이 경계(境界)들은 벨트해(害)를 빼고는
주변국(周邊國) 땅이다.
특히(特히) 네만강(江)은
동프로이센
동쪽(東쪽)으로 흐르는 강(江)으로, '
메멜
까지'는 현재(現在) 폴란드의 전체(全體) 영토(領土)를 포함(包含)하는 영역(領域)이다. 본래(本來) 비더마이어 시대(時代)(1815-1848)에 지어진 시(詩)로서,
독일(獨逸) 제국(帝國)
때부터 부른 노래이긴 하지만 현재(現在)는 그 1절(節)을 부르는 게 금기시되고 있고
[30]
2절(節)도 그닥 부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31]
3절(節)만 부른다(같은 이유(理由)로 네오 나치들은 1절(節)만 부른다).
1995년(年)
에 한때
브란덴부르크
주(州)와 원래(元來) 브란덴부르크였던
베를린
을 합(合)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로(主로) 만들려는 시도(試圖)가 있었다. 실제로(實際로) 두 주(州)의 정부(政府)가 합의(合意) 하(下)에
합병(合倂)
을 추진(推進)했다. 일부(一部)에선 새로 합병(合倂)된 주(株)를 아예
프로이센 주(週)
로 명명하자는 주장(主張)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합병(合倂)은 이듬해 주민투표(住民投票)에서 부결(否決)되었고 이에 따라 프로이센의 '부활(復活)'도 무산(霧散)되었다. 주민투표(住民投票) 때 구(舊) 서베를린 시민(市民)들은 합병(合倂)에 찬성(贊成)했는데 구(舊) 동베를린 시민(市民)들과 브란덴부르크 주민(住民)들은 반대(反對)했다고 한다.
사족(蛇足)으로 폴란드에서
가톨릭
이 국가적(國家的) 정체성(正體性)과 동일시(同一視)된다는 편견(偏見) 때문에 2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개신교(改新敎)
교회(敎會)들을 다 갈아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폴란드 루터교단(敎團)
과
실롱스크 루터교단(敎團)
등(等)으로 소속(所屬)이 바뀌어 잘 남아 있는 교회(敎會)들도 많다. 물론(勿論) 독일인(獨逸人)들이 상당수(相當數) 추방(追放)된 것과
공산정권(共産政權)
시절(時節)의 종교(宗敎) 탄압(彈壓)으로 인해 신자수(信者數)가 과거(過去)보다 현저(顯著)하게 감소(減少)한 것도 사실(事實)이지만 폴란드에서
개신교(改新敎)
를 절대적(絶對的)으로 금기시(禁忌視)했던 것도 아닌 데다 개신교(改新敎) 신자(信者)들이 모두 독일계(獨逸系)이기만 했던 건 아니고, 오히려
폴란드어(語)
나 실롱스크어 등(等)으로
예배(禮拜)
가 진행(進行)되기도 하는 등(等) 생각보다
현지화(現地化)
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