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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 나무위키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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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Preußen / Preussen
Suum cuique
각자(各自)에게 각자(各自)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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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이미지 중(中) 진청색(津靑色) 영역(領域)(1866년(年)) [1]
1525년(年) 4월(月) 10일(日) ~ 1947년(年) 2월(月) 25일(日)
위치(位置)
Preußen / Preussen
Preußen / Pruzzen / Prußen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1525 ~ 1701)
베를린 (1701 ~ 1947)
정치체제(政治體制)
군주제(君主制) (1525 ~ 1918)
공화제(共和制) (1918 ~ 1947)
국가원수(國家元首)
면적(面積)
348,779㎢( 1871년(年) )
292,695㎢( 1925년(年) )
인구(人口)
24,689,000명(名)( 1871년(年) )
40,169,219명(名)( 1910년(年) )
38,175,986명(名)( 1925년(年) )
언어(言語)
종교(宗敎)
화폐(貨幣)
국화(國花)

1. 개요(槪要) [편집(編輯)]

언어별(言語別) 명칭(名稱)
Preußen 또는 Preussen [2]
Pr?sa [3]
Borussia ( 보루시아 ) [4]
Prusy
Pr?sija
Пруссия(Prussiya)
Prussia(프러시아)
Prusse(프뤼스)
한자(漢字) 음역(音域)
普魯西(보로서(普魯西)) 또는 普魯斯(보로사(普魯斯)) [5]

프로이센은 과거(過去) 발트해(발트海) 와 인접(隣接)한 유럽 동북부(東北部)와 중앙(中央)유럽 지방(地方) 일대(一帶)를 부르던 지명(地名)이자, 해당(該當) 지역(地域)에 존재(存在)했던 나라의 국호(國號)이기도 하다. [6] 독일(獨逸) 역사상(歷史上) 두 번째(番째) 통일(統一) 국가(國家) [7] 인(人) 독일(獨逸) 제국(帝國) 의 건국(建國)을 주도(主導)한 맹주국이었으며, 이를 기점(起點)으로 오늘날 독일(獨逸) 이라는 국가(國家)의 개념(槪念)이 본격적(本格的)으로 갖추어졌기 때문에 흔히 프로이센을 (북부(北部)) 독일(獨逸) 의 전신(前身) 이라고 평가(評價)한다.

프로이센을 지배(支配)했던 왕가(王家) 에 대(對)한 항목(項目)은 호엔촐레른 가문(家門) 으로 따로 기재(記載)되어 있다.

한국(韓國) 에서는 과거(過去)부터 영어(英語) 식(式) 발음(發音)인 '프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8] 현재(現在)는 원어(原語)인 독일어(獨逸語) 를 기준(基準)으로 프로이센이라 고쳐 부르는 추세(趨勢)이다. 프러시아는 러시아 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실제로(實際로) 관련(關聯)은 없다. 프로이센에서 로이센(Reußen)은 중세(中世) 독일어(獨逸語) 방언(方言)에서 러시아를 뜻하는 단어(單語)였다. 현대(現代) 독일어(獨逸語)로 러시아는 루슬란트(Russland)이다. 연관성(聯關性)을 찾자면, 과거(過去)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영토(領土)였던 오스트프로이센 주(州)의 북부(北部) 지역(地域)은 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의(注意) 영역(領域)이 되었다는 점(點) 정도(程度). 그 전(前)에는 이름이 비슷한 러시아와 별(別) 연관(聯關)이 없었는데 실제로(實際로) 러시아 땅이 되었다. [9]

1618년(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同君聯合) 이 수립(樹立)된 이후(以後)부터 본체(本體)는 프로이센 공국(公國) 이 아니라 베를린 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이었다. 이름과 실제(實際)가 다른 사례(事例) 인데, 1806년(年) 이전(以前)까지는 프로이센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로 더 많이 불렸었다. 프로이센이 대외적(對外的)인 명칭(名稱)으로 굳어진 것은 1806년(年)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해체(解體) 이후(以後)이다.

2. 역사(歷史)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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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튼 기사단 깃발
튜튼 기사단(騎士團)의 깃발(旗발) 겸(兼) 독일(獨逸) 기사(記事)단국의 국기(國紀)
프로이센 원주민(原住民)인 프로이센인(人)(Prussians)(프로이센족(族))은 [10] 언어적(言語的)으로 특수(特殊)한 발트어족(族) 의 한 갈래이며 [11] 13세기(世紀) 에도 기독교(基督敎) 가 아닌 그들 고유(固有)의 신앙(信仰) 로무(勞務)바 를 믿고 있었다. 13세기(世紀) 초(初), 교황(敎皇) 북방(北方) 십자군(十字軍) 을 선포(宣布)한 이래(以來) 폴란드 왕국(王國) 가톨릭 세력(勢力)이 이곳으로 진출(進出)하고자 시도(試圖)하였으나 대부분(大部分) 실패(失敗)하였고, 역(逆)으로 폴란드 변경(邊境) 지역(地域)이 프로이센인(人)의 침입(侵入)으로 위기(危機)에 처(處)한다. 이 변경(變更) 지역(地域)의 영주(領主)인 마(魔)조프셰 공작(工作) 콘라트 1세(歲) 1226년(年) 튜튼 기사단(騎士團) 에 도움을 요청(要請)했다.

튜튼 기사단(騎士團)은 마(魔)조프셰 공작(工作)이 마련한 약간(若干)의 땅을 전초(前哨) 기지(基地) 삼아 프로이센 십자군(十字軍)을 시작(始作)하였다. 해를 거듭하며 이어진 십자군(十字軍)의 침략(侵略)으로 프로이센인(人)은 차례(次例)로 복속(服屬)되었고 튜튼 기사단(騎士團)은 프로이센 전역(全域)에 여러 도시(都市)와 성채(城砦)를 건설(建設)했다. 튜튼 기사단(騎士團)이 정복(征服)한 땅은 십자군(十字軍) 원정(遠征) 개시(開始) 이전(以前)에 기사단(騎士團)이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황제(皇帝) 프리드리히 2세(歲) 와 맺은 '리미니의 금인칙서(金印勅書)( 1230년(年) )' 등(等)의 조약(條約) 을 명분(名分)으로 튜튼 기사단(騎士團)의 영지(領地)가 되었고, 도움을 청(請)했던 마(魔)조프셰 공작(工作)과는 반강제(半强制)로 조약(條約)을 체결(締結), 십자군(十字軍) 전쟁(戰爭)을 통해 정복(征服)한 영토(領土)를 기사단령(記事團領)으로 삼아 독일(獨逸) 기사단국(騎士團國) 을 건국(建國)하였다.

독일(獨逸) 기사단국(騎士團國)은 원주민(原住民)의 반란(叛亂)을 진압(鎭壓)하고 이들을 가톨릭 으로 개종(改宗)시키면서, 독일(獨逸) 본토(本土)에서 독일인(獨逸人) 이주민(移住民)을 유치(誘致)시키기 위해 노력(努力)하였고 [12] 그 결과(結果) 프로이센은 독일화가(獨逸畫家) 진행(進行)되었다. 14세기(世紀) 전성기(全盛期) 에 접어든 독일(獨逸) 기사단국(騎士團國)은 그 영토(領土)가 남쪽(南쪽)으로는 폴란드 북부(北部)( 단치히 가 위치(位置)한 포(砲)메렐리아(我)와 프로이센), 북쪽(北쪽)으로는 고틀란드 섬과 에스토니아 , 동쪽(東쪽)으로는 페이푸스 호(號) 에 이르렀고, 이렇게 광활(廣闊)한 영토(領土)를 보유(保有)한 기사단국(騎士團國)은 동쪽(東쪽)의 숙적(宿敵)인 리투아니아 대공국(大公國) 폴란드 왕국(王國) 을 상대(相對)로 정면(正面) 승부(勝負)를 벌였다.

그러나 폴란드 왕국(王國)-리투아니아 대공국(大公國) 연합군(聯合軍)과의 대결(對決)은 1410년(年) 그룬발트 전투(戰鬪) (1차(次) 탄넨베르크 전투(戰鬪) )라는 대참사(大慘事)를 불러왔고 이후(以後) 기사단국(騎士團國)은 서서히(徐徐히) 쇠퇴(衰退)하다 1453년(年) ~ 1466년(年) 의 '13년(年) 전쟁(戰爭)'으로 완전히(完全히) 몰락(沒落), 수도 마리엔부르크 와 무역(貿易)의 황금(黃金) 알 단치히를 빼앗기고 기사단장(騎士團長)은 폴란드 국왕(國王)의 봉신이 되는 굴욕(屈辱)을 당(當)했다. 이후(以後) 기사단국(騎士團國)은 폴란드의 영향력(影響力)에 벗어나기 위한 시도(試圖)를 계속(繼續)했고 폴란드는 기사(記事)단국을 복속(服屬)시키기 위한 전쟁(戰爭)을 계속(繼續)했다.

16세기(世紀) 초(初), 튜튼 기사단(騎士團)의 제(第)37대(代) 기사단장(騎士團長)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 은 폴란드를 상대(相對)로 전쟁(戰爭)을 일으켰으나 상황(狀況)이 좋지 않았고, 휴전(休戰) 기간(期間) 동안 전황(戰況) 타개(打開)를 위해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제국의회(帝國議會) 에 참석(參席)했으나 황제(皇帝) 카를 5세(歲) 는 알브레히트와 기사단(騎士團)에 무관심(無關心)했고 이에 알브레히트는 제국(帝國)과 황제(皇帝)가 신봉(信奉)하는 가톨릭에 회의감(懷疑感)을 품었다. 별다른 성과(成果)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던 알브레히트는 귀환(歸還) 도중(途中) 우연히(偶然히) 뉘른베르크 에서 열리던 신교도(新敎徒)들의 회의(會議)에 참석(參席)하게 되는데 회의(會議) 도중(途中) 만난 루터파 신학자(神學者) 안드레아스 오지(奧地)안더(Andreas Osiander) [13] 와의 대화(對話)를 통해 신교(新敎)에 관심(關心)을 가지기 시작(始作)했고 신교(新敎)의 창시자(創始者) 마르틴 루터 가 활동(活動)하던 신교(新敎)의 중심지(中心地) 비텐베르크 로 가서 그 곳에서 루터와 만났다. 루터에게 감명(感銘)을 받은 알브레히트는 신교(新敎)로 개종(改宗), 쾨니히스베르크 로 돌아오자마자 독일(獨逸) 기사(記事)단국의 세속화(世俗化)와 기사단(騎士團)의 해체(解體)를 선언(宣言)했다. 알브레히트는 전쟁(戰爭)을 벌이던 폴란드에게 앞으로도 계속(繼續) 폴란드의 봉신국(國)으로 남을 터이니 신교(新敎)로의 개종(改宗) 및 기사(記事)단국의 세속화(世俗化) 를 승인(承認)해줄 것을 요청(要請)했다. 가톨릭 에 반(反)하는 신교계(新敎系) 공국(公國)의 설립(設立)임에도 기사(記事)단국의 종주국(宗主國)인 폴란드가 이에 찬성(贊成)하면서 [14] 프로이센 공국(公國) 의 건국(建國)이 결정(決定)되었고 1525년(年) 4월(月) 8일(日) 폴란드의 수도(首都) 크라쿠프 에서 체결(締結)된 조약(條約)과 이틀 뒤 폴란드 국왕(國王) 지그문트 1세(世)로부터 프로이센 공작(公爵)의 임명(任命)을 받는 의식(意識)을 통해 알브레히트 자신(自身)은 가톨릭 수도자(修道者)이자 기사단장(騎士團長)이라는 신분(身分)에서 벗어나 신생(新生) 프로이센 공국(公國) 의 초대(招待) 공작(工作)으로 취임(就任)했다. [15] 이로써 프로이센 공국(公國)은 명목상(名目上) 폴란드 왕국(王國) 의 세력권(勢力圈)에 속(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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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프로이센 지역(地域)과 현재(現在)의 독일(獨逸)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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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했듯 독일(獨逸)은 1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포젠 서프로이센 대부분(大部分) [16] , 엘자스-로트링겐 및 기타(其他) 일부(一部) 영토(領土)를 빼앗겼고, 2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동프로이센 , 슐레지엔 , [17] 브란덴부르크 동부(東部)의 1/3과 포메른 의 2/3 등(等) 오데르-나이세 선(線) 이동(移動)의 동방(東方) 영토(領土)를 잃어버렸다.

비록 현대(現代) 에 이르러서 현재(現在) 독일(獨逸)의 수도(首都)인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주(州) 등(等)을 제외(除外)한 옛 프로이센의 대부분(大部分)이 폴란드 러시아 에 예속(隸屬)되었다곤 해도, 프로이센이 현대(現代) 독일(獨逸) 에 미치는 직간접적(直間接的)인 영향(影響)은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크다. 30년(年) 전쟁(戰爭) 이후(以後) 수백(數百) 개(個)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지고, 나폴레옹 전쟁(戰爭) 으로 태반(胎盤)이 정리(整理)되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왕국(王國) 만(萬) 4개(個)( 프로이센 , 바이에른 , 뷔르템베르크 , 작센 )가 존재(存在)했던 독일(獨逸)이 지금(只今)의 통일(統一)된 독일(獨逸)로 있게 만든 나라인 데다가 독일(獨逸)에 대(對)한 대외(對外) 이미지 등(等) 프로이센이 현대(現代) 독일(獨逸) 에 미친 영향(影響)은 지대(至大)하다. 심지어(甚至於)는 현대(現代) 독일(獨逸)의 수도 도 프로이센 왕국(王國)의 수도(首都)였던 베를린 인 데다가, 앞서 말한 대로 독일(獨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유니폼 색상(色相)이 흑적금(黑積金) 삼색(三色)이 아닌 흑백(黑白)으로 되어 있는 것도 프로이센의 영향(影響)이 짙다.

독일(獨逸) 네오 나치 극우파(極右派) 들의 염원(念願)이 이 과거(過去) 프로이센의 영토(領土) 수복(收復)인데, 현재(現在) 독일(獨逸)의 방침(方針) 자체(自體)가 '상실(喪失)한 영토(領土)의 영유권(領有權)을 영구히(永久히) 포기(抛棄)한다 '라서 가능성(可能性)은 제로. 이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러한 독일(獨逸)의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에 대(對)한 영토포기(領土抛棄)가 온당(穩當)한 결정(決定)이라고 주장(主張)하는데 이는 사실(事實)이다. 과거(過去) 나치 독일(獨逸) 폴란드 를 침략(侵略)하여 유대인(유대人) 90%를 포함(包含)한 폴란드 전체(全體) 인구(人口)의 무려(無慮) 25%를 학살(虐殺)했다. [18] 이 막심(莫甚)한 손해(損害)는 독일(獨逸)이 보상(補償)하지 않으면 폴란드가 보상(報償)받을 방법(方法)이 없다. 소련(蘇聯)에 빼앗긴 영토(領土)를 점유(占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 보상(補償)을 요구(要求)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산(公算) 폴란드 가 들어선 후(後) 독일(獨逸)로 강제(强制) 이주된 이들 중(中)에는 바로 이 나치 독일(獨逸)이 유대인(유대人) 폴란드인(人) 들을 학살(虐殺)하고 해당(該當) 도시(都市)에 대거(大擧) 독일인(獨逸人)들을 이민(移民)시킨 것도 있다. 전쟁(戰爭) 기간(期間) 동안 250만(萬)에 이르는 폴란드 시민(市民)들이 독일(獨逸)의 강제(强制) 이주(移住)로 쫓겨났고, 이 자리를 130만(萬)에 이르는 독일(獨逸) 정착민(定着民)들이 차지했다.

예(例)를 들어 폴란드 공업(工業) 도시(都市) 우치(憂恥) (Łod?)의 경우(境遇), 전쟁(戰爭) 전(前)의 시민(市民) 중(中) 독일계(獨逸系)는 9%에 불과(不過)했지만 독일(獨逸)이 점령(占領)한 이후(以後) 25만(萬)에 이르는 유대인(유대人)과 15만(萬)에 이르는 폴란드인(人)들이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大部分)은 학살(虐殺) 당(當)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15만(萬)에 이르는 독일인(獨逸人) 이 차지했다. 단순히(單純히) 우치(憂恥)뿐만 아니라 독일(獨逸)에 병합(倂合)된 폴란드 서북부(西北部) 영토(領土)에서도 이러한 일이 빈번(頻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폴란드인(人)과 유대인(유대人)들의 자리를 차지한 독일인(獨逸人)들 중(中) 일부(一部)는 독일군(獨逸軍) 을 따라 독일(獨逸) 영토(領土)로 도망쳤거나 학살(虐殺) 및 추방당했(追放當下)고, 나머지 독일인(獨逸人)들은 전후(前後) 폴란드 공산(共産) 정권(政權) 에서 독일(獨逸)로 강제(强制) 이주시켰다. 이 경우(境遇)는 단순(單純)한 압제자(壓制者)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單純히) 인구(人口)뿐만이 아니다. 폴란드는 독일(獨逸)의 침공(侵攻)으로 전체(全體) 재산(財産)의 상당수(相當數)를 잃어버렸다. 바르샤바 , 그단스크 , 그디니아 , 포즈난 등(等) 유수(有數)의 폴란드 도시(都市)들이 폐허(廢墟)가 되거나 반파(半破)되었다. [19] 특히(特히) 바르샤바 의 경우(境遇)는 독일(獨逸)에 의(依)해 계획적(計劃的)으로 매우 철저히(徹底히) 파괴(破壞)되었다. 또한 제(第)2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이후(以後) 소련(蘇聯) 이 폴란드 동부(東部) 지역(地域)을 자신(自身)이 가져갔고 그 보상(補償)으로 독일(獨逸) 동부(東部) 지역(地域)을 떼어 폴란드에 주었다. 당시(當時) 소련(蘇聯) 지도자(指導者)가 악명(惡名) 높은 이오시프 스탈린 이었다. 오히려 당시(當時) 런던 폴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 는 전쟁(戰爭) 전(前)의 국경(國境) 을 원(願)했다. 오히려 독일(獨逸)이 차지하던 구(舊) 동방(東方) 영토(領土)들을 폴란드에게 합병(合倂)하게 해준 것은 스탈린이었다. 또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侵攻) 에서 독일(獨逸)과 함께 폴란드를 동서(東西)로 갈라먹은지라 폴란드의 입장(立場)에선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얄미운 철천지 원수(怨讐) 같은 존재(存在)였고, 당시(當時) 스탈린으로서는 제(第)2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 이후(以後)에 친소련(親蘇聯) 위성국가(衛星國家)가 된 폴란드의 적개심(敵愾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西部) 등(等) 폴란드 제(第)2공화국(共和國)이 소(小)폴전쟁(戰爭)을 통해 폴란드로 흡수(吸收)했던 구(舊) 폴란드령(令) 동부(東部) 지역(地域)들을 가져가는 대신(代身) 폴란드가 슐레지엔과 힌터포메른, 동프로이센 남부(南部) 등(等) 독일(獨逸)이 지배(支配)하던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들을 합병(合倂)하도록 하는 조처(措處)를 취(取)한 것이다.

이외(以外)에도 폴란드는 전후(戰後) 독일(獨逸)에 보상(補償)을 청구(請求)한 적(敵)이 의외로(意外로) 단(單) 한 번(番)도 없다 . [20] 1945년(年) 당시(當時) 폴란드인(人)들이 이 국경(國境) 을 원(願)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위에도 써놨지만 스탈린 이 친히(親히) 그렇게 명령(命令)했다 . 그리고 폴란드는 독일(獨逸) 동부(東部)를 얻은 대가(代價)로 자국(自國)의 동부(東部) 영토(領土)를 소련(蘇聯)에 빼앗겼다. [21] 즉(卽) 폴란드 입장(立場)에서는 실질적(實質的)으로 보상(補償)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은 것은 독일(獨逸)이 남기고 간 폐허(廢墟)와 독일령(獨逸令) 시절(時節) 여기에서 살던 독일인(獨逸人) 사업가(事業家)와 나치당원(黨員)들이 경영(經營)하던 약간(若干)의 맥주(麥酒) 양조장(釀造場) 및 공장(工場), 조선소(造船所), 탄광(炭鑛) 정도(程度) 밖에 없었다. [22] 그나마 폴란드 인민(人民)으로서 공산주의(共産主義) 사상(思想) 개조(改造)를 시켜서라도 지역(地域) 경제(經濟)를 굴릴 수 있는 독일계(獨逸系) 주민(住民)들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스탈린의 지시(指示)에 의(依)해, 그리고 청년층(靑年層) 인구(人口)가 거의 박살난 독일(獨逸)의 피해(被害) 재건(再建)을 위해 이 일대(一帶)에서 살던 독일계(獨逸系)들은 전부(全部) 다 동독(東獨) 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폴란드인(人)들은 소련(蘇聯)으로부터 신규(新規)로 합병(合倂)해 먹은 이 구(區) 독일령(獨逸令) 지역(地域) 위에서 모든 것을 백지상태(白紙狀態)에서 어렵게 재건(再建)해야 했다. 그런데 물론(勿論) 가능성(可能性)이야 없지만 만약(萬若) 독일(獨逸)이 갑자기 폴란드에 영토(領土)를 내놓으라 한다면, 폴란드 입장(立場)에서는 정말(正말)이지 날강도(强度)도 이런 날강도(날强盜)가 없다. 나치 독일(獨逸)에 의(依)해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被害)를 입은 국가(國家)가 폴란드와 소련(蘇聯)인데, 그 역사적(歷史的) 과정(過程)을 그냥 무시(無視)하고 내놓으란 법(法)이 있는가?

사실(事實) 이러한 주장(主張)은 현실적(現實的)으로도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현대(現代) 폴란드 서부(西部)와 북동부(北東部) 지방(地方) 영토(領土)의 3분(分)의 1 이상(以上)이 옛 프로이센( 독일제국(獨逸帝國) 기준(基準)) 땅이다. 폴란드가 이 영토(領土)를 가지게 된 계기(契機)는 제(第)2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이 끝난 이후(以後) 스탈린 독소(毒素)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 을 맺고 폴란드 침공(侵攻) 에 가담(加擔)하여 집어삼켰던 영토(領土)를 내놓지 않으려고 폴란드에 일련(一連)의 보상(補償)으로서 대규모(大規模) 탄전(炭田) 지대(地帶)이자 공업(工業) 지대(地帶)였던 슐레지엔 , 발트해(발트海) 요충지(要衝地)인 포메른 , 근대(近代) 독일(獨逸)의 발상지(發祥地)인 프로이센 및 브란덴부르크 동부 등(等)의 독일(獨逸) 영토(領土)를 대신(代身) 할양한(割讓限) 것인데, 이 때문에 본래(本來) 폴란드에서 약간(若干) 서쪽(西쪽)에 위치(位置)하던 수도 바르샤바 가 상당히(相當히) 동쪽(東쪽)에 쏠리게 되는 등(等) 국토(國土)가 서쪽(西쪽)으로 많이 밀려나게 되었다.

현대(現代)에도 이 지역(地域)은 폴란드의 알토란인(알土卵人) 데다 폴란드 역시(亦是) 커즌 선 이동(移動)의 고토(故土)를 소련(蘇聯)에 빼앗겼기 때문에 이 상황(狀況)에서의 상실(喪失) 영토(領土) 수복(收復) 발언(發言)이나 운동(運動)은 결국(結局) 폴란드를 집어삼키거나 혹은(或은) 그 정도(程度)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안보적(軍事安保的)으로 자국을 위협(威脅)하겠다는 뜻이 된다.

경제적(經濟的)인 측면(側面)에서 보아도 1990년(年) 독일(獨逸) 통일(統一) 이후(以後) 구동독(舊東獨) 지역(地域)을 구서독(舊西獨) 지역(地域)과 균형(均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독일(獨逸) 경제(經濟)에 크게 무리(無理)를 줬고, 현재(現在)까지 그 부작용(副作用)이 만만찮다. 그것도 모자라 구동독(舊東獨) 지역(地域)보다 경제적(經濟的)으로 비교적(比較的) 낙후(落後)된 구(舊) 프로이센 영토(領土)까지 덜컥 떠맡게 된다면? 1989년(年) 동독(東獨)의 1인당(人當) 명목(名目) GDP 는 $9,679였고, 폴란드 1989년(年) 당시(當時) $4,565에 불과(不過)했는데 , 이 자료(資料)도 공산(共産) 국가(國家) 특유(特有)의 과장(誇張)된 통계(統計)로 실제로(實際로)는 동독(東獨) 3000, 폴란드 1000~1500이었다. 참고(參考)로 1989년(年) 당시(當時) 서독(西獨) 은 $15,300. [23] 거의 슬라브인(人) 으로 구성(構成)된 인구(人口)만 1,000만(萬) 명(名)이 넘는 데다가 서독(西獨) 근처(近處)도 못 오는 경제력(經濟力) [24] 을 자랑했던 이 지역(地域)을 떠맡는다면 훨씬 문제(問題)가 심각(深刻)해졌을 것이다.

거기다가 전쟁(戰爭) 중(中) 있었던 대규모(大規模) 학살(虐殺)이나 전후(前後)의 강제(强制) 이주(移住)로 인해 현재(現在)( 21세기(世紀) )는 슐레지엔 이나 프로이센 지방(地方)에 독일인(獨逸人)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 체코 에 있는 수데티 지방(地方)도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獨逸) 시절(時節)처럼 현지(現地)의 독일인(獨逸人)들의 민족(民族) 심리(心理)를 자극(刺戟)하여 민족(民族) 자결주의(自決主義) 를 운운(云云)하며 영토(領土)를 병합(倂合) 할 가능성(可能性)은 거의 없는 것이다.

다만 북부(北部) 오스트프로이센, 즉(卽) 현재(現在)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州)에서는 2001~2004년경(年頃) 러시아계(系) 주민(住民)들의 자발적(自發的)인 독일(獨逸)로의 병합(倂合) 운동(運動) 및 쾨니히스베르크 명칭(名稱) 복귀(復歸) 운동(運動)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 소련(蘇聯) 붕괴(崩壞) 이전(以前) 소련(蘇聯) 영토(領土)였던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등(等) 발트 3국(國)이 유럽연합(聯合) 에 가입(加入)하며 칼리닌그라드 주가(株價) EU 안의 이 되어버렸기 때문. 같은 러시아 영토(領土)인데도 불구(不拘)하고 칼리닌그라드 에서 모스크바 등(等) 러시아 본토(本土)에 육로(陸路)로 이동(移動)하려면 비자 가 필요(必要)한 해괴(駭怪)한 상황(狀況)이 되어버린 것이다. [25] 안 그래도 주변국(周邊國)보다 경제적(經濟的)으로 낙후(落後)되어 있던 차(次)에 차별(差別) 아닌 차별(差別)까지 받게 되자 소외감(疏外感)이 극(極)에 이른 주민(住民)들이 이 참에 아예 칼리닌그라드 주(州)를 독일(獨逸)로 환수(還收)하거나, 적어도 자치권(自治權)을 받기 원(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도 이 지역(地域)은 발트해(발트海) 연안(沿岸)의 요충지(要衝地)로 스칸디나비아 지역(地域)과 중부(中部) 유럽 을 동시(同時)에 견제(牽制)할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 해군(海軍) 발트함대(艦隊) 의 모항(母港)인 이유(理由)가 이 때문이다. 또한 부동항(不凍港) 이라는 것도 중요(重要)한 요소(要素)라서 도저히(到底히) 포기(抛棄)할 수 없는 지역(地域)이다. 우크라이나 일본(日本) 과의 영토(領土) 분쟁(紛爭)에 불리(不利)해질 선례(先例)를 남길 수도 없는 처지(處地)인 데다 [26] 현재(現在) 러시아의 실권자(實權者) 는 다른 사람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 거기에다 독일(獨逸)에서도 종전(從前) 약속(約束)을 지키기 위(爲)해 다시 한번(番) 칼리닌그라드 주는 엄연(儼然)한 러시아 땅이라고 천명(闡明)하며 독일(獨逸) 환수(還收) 운동(運動)의 입을 막았다. 러시아가 나서서 돌려주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以上) 독일(獨逸)로 돌아갈 가능성(可能性)은 없다. 다만 현재(現在)도 칼리닌그라드 에 독일인(獨逸人)들이 문화(文化), 사회(社會), 경제면(經濟面)으로 칼리닌그라드 내 지분(持分)을 착실히(着實히) 늘려가고 있고, 프로이센 시대(時代) 문화유산(文化遺産) 유지(維持) 보수(補修)에 신경(神經)쓰는 것을 보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당장(當場) 무리수(無理數)는 두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적(順理的)으로 병합(倂合)할 걸 노리는 건 아닌가 하는 소리도 간간이(間間이)는 나온다. # 물론(勿論) 현실적(現實的)으로 독일(獨逸)이 통일(統一) 조건(條件)으로 오스트리아와의 통일(統一) 금지(禁止) 및 옛 영토(領土)( 주데텐란트 / 포메른 동프로이센 ) 수복(收復) 금지(禁止)를 내건 만큼 이 역시(亦是)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관측(觀測)이다. 애초(애初) 독일(獨逸)의 국력(國力) 자체(自體)도 러시아에 한참 밀려 러시아가 위협(威脅)을 느끼면 주둔(駐屯) 병력(兵力)을 늘려서 봉쇄(封鎖)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도시(都市)를 2018년(年) 러시아 월드컵 의 주요(主要) 개최(開催) 도시(都市) 중(中) 하나로 지정(指定), 명백(明白)한 러시아 땅으로 못 박아 두는 강수(强手)까지 보였다! 정확히(正確히)는 조별(組別) 리그 3개(個) 경기(景氣)를 칼리닌그라드 에서 치르었고, 당연히(當然히) 독일(獨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은 뺐으며, 스페인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 모로코 축구(蹴球) 국가대표(國家代表)팀 이 격돌(激突)했다.

사실(事實) 이제 유럽 같은 안정(安定)된 사회(社會)에서 영토분쟁(領土紛爭) 을 일으키는 것도 자폭(自爆) 행위(行爲)이거니와, 이미 세계대전(世界大戰) 을 두 번(番)이나 치른 [27] 독일(獨逸)이 다시 영토(領土) 수복(收復) 움직임을 보이는 것 자체(自體)가 주변국(周邊國)들에는 굉장히(宏壯히) 위협적(威脅的)인 일이기 때문에 독일(獨逸)로서는 선택(選擇)의 여지(餘地)가 있는 상황(狀況)도 아니었다. 영국(英國) , 프랑스 폴란드 등(等) 주변국(周邊國)의 독일(獨逸) 영토(領土) 수복(收復)에 대(對)한 경계심(警戒心)은 정말(正말)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한다. 1990년(年) 독일(獨逸)이 통일(統一)될 때에도 영국(英國)의 마거릿 대처(對處) 총리(總理)는 아예 통일(統一) 자체(自體)에 반대(反對)했고, 프랑스와 폴란드는 더 이상(以上)의 영토(領土) 수복(守僕)이 없고 현(現) 국경(國境)에 만족(滿足)할 것을 명시(明示)하라고 수(數) 차례(次例)나 압박(壓迫)하고 맹세(盟誓)를 강요(强要)했다.

참고(參考)로 독일(獨逸) 국가(國家) 인(人) 독일인(獨逸人)의 노래 1절(節)에는 '마스(뫼즈강)에서 메멜 [28] 까지, 에치(아디제 강(江))에서 벨트해(海) [29] 까지'라며 현(現) 독일국(獨逸國)의 영토(領土)를 규정(規定)하는 구절(句節)이 있는데 지금(只今) 이 경계(境界)들은 벨트해(害)를 빼고는 주변국(周邊國) 땅이다. 특히(特히) 네만강(江)은 동프로이센 동쪽(東쪽)으로 흐르는 강(江)으로, ' 메멜 까지'는 현재(現在) 폴란드의 전체(全體) 영토(領土)를 포함(包含)하는 영역(領域)이다. 본래(本來) 비더마이어 시대(時代)(1815-1848)에 지어진 시(詩)로서, 독일(獨逸) 제국(帝國) 때부터 부른 노래이긴 하지만 현재(現在)는 그 1절(節)을 부르는 게 금기시되고 있고 [30] 2절(節)도 그닥 부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31] 3절(節)만 부른다(같은 이유(理由)로 네오 나치들은 1절(節)만 부른다).

1995년(年) 에 한때 브란덴부르크 주(州)와 원래(元來) 브란덴부르크였던 베를린 을 합(合)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로(主로) 만들려는 시도(試圖)가 있었다. 실제로(實際로) 두 주(州)의 정부(政府)가 합의(合意) 하(下)에 합병(合倂) 을 추진(推進)했다. 일부(一部)에선 새로 합병(合倂)된 주(株)를 아예 프로이센 주(週) 로 명명하자는 주장(主張)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합병(合倂)은 이듬해 주민투표(住民投票)에서 부결(否決)되었고 이에 따라 프로이센의 '부활(復活)'도 무산(霧散)되었다. 주민투표(住民投票) 때 구(舊) 서베를린 시민(市民)들은 합병(合倂)에 찬성(贊成)했는데 구(舊) 동베를린 시민(市民)들과 브란덴부르크 주민(住民)들은 반대(反對)했다고 한다.

사족(蛇足)으로 폴란드에서 가톨릭 이 국가적(國家的) 정체성(正體性)과 동일시(同一視)된다는 편견(偏見) 때문에 2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 개신교(改新敎) 교회(敎會)들을 다 갈아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폴란드 루터교단(敎團) 실롱스크 루터교단(敎團) 등(等)으로 소속(所屬)이 바뀌어 잘 남아 있는 교회(敎會)들도 많다. 물론(勿論) 독일인(獨逸人)들이 상당수(相當數) 추방(追放)된 것과 공산정권(共産政權) 시절(時節)의 종교(宗敎) 탄압(彈壓)으로 인해 신자수(信者數)가 과거(過去)보다 현저(顯著)하게 감소(減少)한 것도 사실(事實)이지만 폴란드에서 개신교(改新敎) 를 절대적(絶對的)으로 금기시(禁忌視)했던 것도 아닌 데다 개신교(改新敎) 신자(信者)들이 모두 독일계(獨逸系)이기만 했던 건 아니고, 오히려 폴란드어(語) 나 실롱스크어 등(等)으로 예배(禮拜) 가 진행(進行)되기도 하는 등(等) 생각보다 현지화(現地化) 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3. 역대(歷代) 수반(首班) [편집(編輯)]

프로이센 왕국(王國) 독일(獨逸) 통일(統一) 이후(以後) 독일(獨逸) 제국(帝國) 의 구성국(構成國)이 되고, 프로이센 국왕(國王)은 독일(獨逸) 황제(皇帝)를 겸하게 된다.
순번(順番)
이름
재위기간(在位期間)
01
1688~1701(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프로이센 공작(工作))
1701~1713(프로이센 국왕(國王))
02
1713~1740
03
1740~1786
04
1786~1797
05
1797~1840 [35]
06
1840~1861
07
1861~1888 [36]
08
1888
09
1888~1918
제(第)1대(代)
제(第)2대(代)
제(第)3대(代)
제(第)4대(代)
파울 히르슈
오토 브라운
아담 슈테게어발트
제(第)5대(代)
제(第)6대(代)
제(第)7대(代)
오토 브라운
오토 브라운
제(第)8대(代)
제(第)9대(代)
Ministerprasident는 주지사(州知事) 로도 번역(飜譯)되지만 주총리(朱總理) 가 좀 더 정확(正確)하다. 사실(事實) 왕국(王國) 시대(時代)에도 동일(同一)한 Ministerprasident가 있었는데 이건 국가원수(國家元首) 급(級)이 아닌 정부수반(政府首班) 급(級)이었다. [37]
순번(順番)
이름
재임기간(在任期間)
01
1918
02
파울 히르슈 Paul Hirsch
1918~1920
03
오토 브라운 Otto Braun
1920~1921
04
아담 슈테게어발트 Adam Stegerwald
1921
05
오토 브라운 Otto Braun
1921~1925
06
1925
07
오토 브라운 Otto Braun
1925~1932
-
공석(空席) [38]
1932~1933
08
1933
09
헤르만 괴링 Hermann Goring
1933~1945

참고(參考)로 1933년(年) 나치 독일(獨逸) 은 Ministerprasident와 별도(別途)로 진짜(眞짜) ' 주지사(州知事) '나 총독(總督) 과 유사(類似)한 Reichsstatthalter [40] 란 직책(職責)을 만들었는데 [41] 1933~35년(年)에는 아돌프 히틀러 가 직접(直接) 프로이센의 이 Reichsstatthalter를 맡았지만 1935년(年) 부터 1945년(年) 까지는 헤르만 괴링 이 대행(代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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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DB-PrussiaPr...

1815년(年) 빈 회의(會議) 이후(以後) 회복지(回福祉)와 점령지(占領地)를 합치며 체계적(體系的)인 행정구획(行政區劃)으로 재정비(再整備)되었다.
순번(順番)
주(週)(Provinz)
주도(主導)
비고(備考)
01
1824년(年) 베스트 - 오스트프로이센 주(週) 합병(合倂). [42]
現 칼리닌그라드(러)
02
03
現 슈체친(폴) [44]
04
現 브로츠와프(폴) [45]
05
1848년(年) 설치(設置). 포젠 대공국(大公國) 형태변환(形態變換).
現 포즈난(폴) [46]
06
1816년(年) 설치(設置) [48]
07
1868년(年) 설치(設置). [49]
08
헤센나사우
1868년(年) 설치(設置) [50]
09
1815년(年) 설치(設置) [51]
10
1822년(年) 설치(設置)(행정구역(行政區域) 조정(調整)) [52]
11
1868년(年) 설치(設置) [53]
12
지크마링겐
1850년(年) 설치(設置) [54]

(러) = 러시아령(領), (폴) = 폴란드령
Map-DR-Prussia

이른바 "프로이센 12주(週)(Provinz)" [55] 이다. 베를린 과 남부(南部)에 따로 떨어진 호엔촐레른 은 제외(除外)되었다. 2~7번(番)은 동부주(東部週), 8~13은 서부주(西部州)이다.

(폴) = 폴란드령
Map-WR-Prussia
순번(順番)
주(週)(Provinz)
주도(主導)
비고(備考)
01
베를린
베를린
02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03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56]
04
포메른
슈테틴
05
니더슐레지엔
브레슬라우
1938년(年) 오버슐레지엔과 통합(統合).
06
오버슐레지엔
오펠른
1938년(年) 니더슐레지엔과 통합(統合).
現 오폴레(폴)
07
포젠서프로이센 [57]
슈나이더뮐
1922~1938 존속(存續). 現 피와(폴)
08
작센
마그데부르크
09
하노버
하노버
10
헤센나사우
카셀
11
베스트팔렌
뮌스터
12
라인란트
코블렌츠
13
슐레스비히홀슈타인
14
호엔촐레른
지크마링겐
이후(以後) 뷔르템베르크에 흡수(吸收)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구성원(構成員).

(폴) = 폴란드령
(미(米)), (영(英)), (불), (소)는 각(各) 지역(地域)을 점령(占領)한 국가(國家)를 말한다.( 미국(美國) , 영국(英國) , 프랑스 , 구(區) 소련(蘇聯) )
순번(順番)
주(州) 이름
주도(主導)
비고 및 종전(終戰) 후(後) 처분(處分)
01
베를린
4개(個) 연합국(聯合國)이 분할점령(分割占領). [58]
02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소). 이후(以後) 분할(分割) 됨. [59]
03
단치히서프로이센
단치히
(소). 폴란드에 할양(割讓).
04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60]
(소). 동부는 폴란드에 할양(割讓). [61]
05
포메른
슈테틴
(소). 중부(中部) 및 동부(東部)는 폴란드에 할양(割讓) [62]
06
니더슐레지엔
브레슬라우
1941년(年) 슐레지엔에서 재분리(再分離).
(소). 폴란드에 할양(割讓). [63]
07
오버슐레지엔
카토비츠
1941년(年) 슐레지엔에서 재분리(再分離).
(소). 폴란드에 할양(割讓). 現 카토비체 (폴)
08
바르텔란트 [64]
포젠
(소). 폴란드에 할양(割讓).
09
마그데부르크안할트
데사우
(소). 작센 북부(北部)+안할트. [65]
10
할레메르제부르크
할레
(소). 작센 남부(南部). [66]
11
쥐트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
하노버
하노버 남부(南部)+브라운슈바이크.
(영(英)). 서독(西獨) 니더작센 주(週)로 통합(統合). [67]
12
오스트하노버
뤼네부르크
하노버 북동부(北東部).
(영(英)). 서독(西獨) 니더작센주로 통합(統合).
13
베저엠스
올덴부르크
하노버 북서부(北西部)+브레멘+올덴부르크.
(미(米)) + (영(英)). [68]
14
쿠어헤센
카셀
헤센나사우 북부(北部).
(미(米)). 서독(西獨) 헤센 주(週)로 통합(統合).
15
헤센나사우
헤센나사우 남부(南部).
(미(米)). 서독(西獨) 헤센주로 통합(統合).
16
베스트팔렌노르트
뮌스터
베스트팔렌 북부(北部).
(영(英)). 서독(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週)로 통합(統合).
17
베스트팔렌쥐트
보훔
베스트팔렌 남부(南部).
(영(英)). 서독(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로 통합(統合).
18
에센
라인란트 극북부(極北部).
(영(英)). 서독(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로 통합(統合).
19
뒤셀도르프
라인란트 북부(北部).
(영(英)). 서독(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로 통합(統合).
20
쾰른아헨
라인란트 북중부(北中部).
(영(英)). 서독(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로 통합(統合).
21
모(某)젤란트
코블렌츠
라인란트 중남부(中南部)+ 룩셈부르크 . (불). [69]
22
베스트마르크
자르브뤼켄
라인란트 극남부(極南部)+바이에른령(令) 팔츠
+프랑스령(領) 로트링겐 / (불). [70]
23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영(英)). 서독(西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主로) 잔류(殘留).
(24)
(호엔촐레른)
(지크마링겐)
프로이센 발원지(發源地)를 포함(包含)한 영토(領土) 상당(相當) 부분(部分)을 현재(現在) 러시아 ,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에 내어준 상태(狀態)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현재(現在) 독일연방공화국(獨逸聯邦共和國) 에서도 구(舊) 프로이센의 통치(統治) 지역(地域)과 연관(聯關)이 없는 곳은 바이에른 , 브레멘 의 두 개(個) 주(駐)뿐이다. 그나마도 브레멘 함부르크 는 프로이센의 입김이 강(剛)하고 그저 주권(主權)만 독자적(獨自的)으로 유지(維持)한 자유(自由) 시(時) 였던 것을 보면, 또한 러시아와 폴란드에 넘어간 땅의 실향민(失鄕民)들이(물론 전부(全部) 프로이센계(界)) 주로(主로) 정착(定着)한 곳이 브레멘 , 함부르크 , 니더작센 [72]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73]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인 것을 보면 현재(現在)의 독일(獨逸)에서도 프로이센과 연관(聯關) 없는 곳은 바이에른뿐이라고 봐도 될 정도(程度). [74] 괜히 독일연방공화국(獨逸聯邦共和國)과 바이에른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양차(兩次) 대전(大戰)을 거치며 상실(喪失)한 지역(地域)은 오로지 프로이센의 지역(地域)만 으로, 바이에른과 작센 [75] 을 비롯한 기타(其他) 지역(地域)은 현재(現在)의 독일(獨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차(次) 대전(大戰) 이후(以後) 연합국(聯合國)이 무리(無理)할 만큼 프로이센 본령(本領)을 할양(割讓)시켜버리고 흔적(痕跡)을 지워버리려 한 것도 독일(獨逸)의 정체성(正體性)을 희석(稀釋)시키려 한 것과 관련(關聯)이 있다. [76]

○ : 순수(純粹)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 (5개주(個州))
□ :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에서 다른 독일계(獨逸系) 지역(地域) 흡수(吸收) (4개주(個州))
△ : 다른 독일계(獨逸系) 지역(地域)에서 구(舊) 프로이센 지역(地域) 흡수(吸收) (5개주(個州))
× : 프로이센 통치(統治) 지역(地域) 불포함(不包含) (2개주(個州))
순번(順番)
주(州) 이름
상관(相關) 관계(關係)
과거(過去) 지역(地域)
01
뷔르템베르크+바덴+호엔촐레른주(週). [77]
02
×
03
04
05
브레멘
×
06
함부르크
구(區) 함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州) 남부(南部) 일부(一部) [78]
07
헤센나사우 주(週)+헤센 주(州).
08
09
메클렌부르크+포메른주(週) 서부(西部).
10
라인란트주(週) 북부(北部)+베스트팔렌주.
11
라인란트주(週) 남부(南部)+바이에른령(令) 팔츠.
12
라인란트주(週) 남서부(南西部).
13
작센+슐레지엔주(週) 극서부(極西部).
14
작센주(작센州)+안할트.
15
16
튀링엔 군소(群小) 공국(公國) 지역군(地域軍)+작센주(작센州) 역외(域外) 지역(地域). [80]

4.6. 주요(主要) 도시(都市) [편집(編輯)]

1939년(年) 기준(基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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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餘談) [편집(編輯)]


[1] 이 색(色)이 바로 물감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프러시안 블루 (Prussian blue)로, 당시(當時) 프로이센의 수도(首都)였던 베를린 에서 처음으로 개발(開發)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2] 실제(實際) 발음(發音)은 '프로이슨'과 '프호(好)이슨'의 중간(中間) 정도(程度) 된다. 독일어(獨逸語)(특히(特히) 프로이센 중심(中心)의 북부(北部))에서 r 발음(發音)은 (그렇지 않은 경우(境遇)도 있지만) '르'와 '흐'가 동시(同時)에 발음되는, 이른바 '가래 끓는 소리'처럼 발음(發音)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다. 단어(單語) 끝의 -en은 '은'에 가깝게 발음된다. 에스체(體)트 (ß)는 2005년(年)부터 ss로 대체(代替) 표기(表記)하고 있다. [3] 이 지역(地域) 일대(一帶)에 원래(元來) 살던 프로이센인(人)들이 쓰던 언어(言語)로, 서(鉏)발트어군(群) 계통(系統)의 언어(言語)이다. 현재(現在)는 사멸(死滅)한 상태(狀態). [4] 독일(獨逸)의 축구단(蹴球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의 명칭(名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차이(差異)가 있디면 묀헨글라트바흐의 보루시아는 이 문서(文書)에서 말하는 프로이센(보루시아)를 의미하는 것이 맞지만, 도르트문트의 보루시아는 초기(初期) 구단(球團) 설립(設立) 당시(當時) 도르트문트 에 존재(存在)하던 한 양조장(釀造場)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양조장(釀造場) 이름 역시(亦是) 이 문서(文書)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同一)한 의미(意味)겠지만. [5] 전자(前者)는 한국(韓國) 일본(日本) , 후자(後者)는 중국(中國) 을 비롯한 중화권(中華圈) 에서 쓰는 표현(表現)으로 ' 보불 전쟁(戰爭) ' 등(等)의 용어(用語)에 나오는 '보(報)(普)'가 '보로서(普魯西)'의 약자(略字)다. [6] 프로이센 공국(公國) ~ 프로이센 왕국(王國) [7] 일명(一名) 제(第)2제국(帝國) 이라 부른다. 참고(參考)로 제1제국은 선대(先代)의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이고, 제(第)3제국(帝國) 은 후대(後代)의 나치 독일(獨逸) . [8] 그래서 역사(歷史)를 잘 모르거나 '프로이센'이라는 이름만 알고있는 사람은 프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아예 다른 나라인 줄 알던 경우(境遇)도 있었다. [9] 간혹(間或) 이렇게 별(別) 상관(相關) 없는 지역(地域)·국가(國家) 간(間) 명칭(名稱)이 유사(類似)한 경우(境遇)가 있는데, 일례(一例)로 독일(獨逸)의 도시(都市) 뮌헨 (Munchen)의 이탈리아어(語) 명칭(名稱)은 모나코 (Monaco)다. 하지만 뜬금없지는 않다. 수도사(修道士)(monks)를 의미하는 단어(單語)에서 출발(出發)해서 각각(各各)의 국가(國家)에 해당(該當)하는 단어(單語)로 바뀌었을 뿐. 뮌헨이라는 도시명(都市名)의 유래(由來)는 옛 고지(故地) 독일어(獨逸語) 로 '수도승(修道僧)들의 공간(空間)'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由來)하였다.?프러시아로 번역(飜譯)되는 프로이센도(度) 비슷한 사례(事例). 동아시아(東아시아) 에서 비슷하거나 같은 지명(指名) 혹은(或은) 국명(國名)이 겹치는 것과도 같은 사례(事例)이다. [10] 프로이센인이라는 이름이 훗날(後날) 이 지역(地域)에 사는 독일인(獨逸人) 들을 뜻하는 이름으로 굳어지면서 원주민(原住民)들은 구(舊) 프로이센인(人)(Pruzzen)으로 구별(區別)해서 부르게 된다. 한국(韓國)에서는 프루스인이라는 명칭(名稱)을 사용(使用)하기도 한다. [11] 혈통적(血統的)으로 리투아니아 , 라트비아 와 가까웠다. [12] 중세(中世) 시대(時代)의 평민(平民)들은 많은 제약(制約)과 차별(差別)을 받으며 살았는데, 독일(獨逸) 본토(本土)를 떠나 동쪽(東쪽)의 새로운 정착지(定着地)로 향(向)하면 여러 혜택(惠澤)과 지원(支援)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수(數)의 농노(農奴) , 도시민(都市民) 등(等)의 독일인(獨逸人)들이 동쪽(東쪽)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이를 동방식민운동(東方植民運動) 이라 부른다. 동쪽(東쪽)의 새로운 정착지(定着地)를 다스리는 지배자(支配者)들은 이주민(移住民)을 유치(誘致)하기 위해 여러 혜택(惠澤)과 지원(支援)을 제공(提供)할 것을 열심히(熱心히) 광고(廣告)하였다. [13] 코페르니쿠스 의 저서(著書) 《천체(天體)의 회전(回轉)에 관(關)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의 출간(出刊)에 관여(關與)하기도 했다. [14] 당시(當時) 폴란드 국왕(國王)인 지그문트 1세(歲) 는 알브레히트의 외숙부(外叔父)였다. [15] 기사단장(騎士團長)이 이단(異端)으로 개종(改宗)하는 걸로 모자라 기사단(騎士團)의 영지(領地)를 자기(自己) 걸로 만들자 당연히(當然히) 기사단(騎士團) 내부(內部)는 난리(亂離)가 났고 격분(激忿)한 카를 5세(世)는 알브레히트를 당장(當場) 제국(帝國) 재판소(裁判所)에 회부(回附)하지만 이미 세속화(世俗化) 를 시전한(時前韓) 알브레히트는 좆까. 하지만 알브레히트는 제국(帝國)의 동맹(同盟)인 폴란드가 뒤를 봐주고 있었고 거기다 제국(帝國) 내 농민(農民)들의 대규모(大規模) 봉기(蜂起)에 오스만 제국(帝國) 과의 전쟁(戰爭) 크리까지 터지면서 제국(帝國)은 알브레히트를 손볼 기회(機會)를 상실(喪失)하고 만다. 한편(한便) 알브레히트의 세속화(世俗化) 결정(決定)을 반대(反對)한 일부(一部) 기사(記事)들은 새로 기사단장(騎士團長)을 추대(推戴)한 뒤 프로이센을 떠나 일부(一部) 영지(領地)가 남아 있는 독일(獨逸) 본토(本土)로 향(向)했고 이들은 튜튼 기사단(騎士團) 이란 이름 그대로 1809년(年) 까지 독일(獨逸) 내(內)의 영지(領地)를 다스리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 의(依)해 해체당했다. 이후(以後) 오스트리아 제국(帝國) 황제(皇帝) 프란츠 1세(歲) 가 구호(救護) 단체(團體)로 기사단(騎士團)을 부활시켜 현재(現在) 기사단(騎士團)은 구호(救護) 단체(團體)로 존속(存續)하고 있다. [16]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일부(一部) 영토(領土)가 2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 시기(時期) 이전(以前)까지 독일(獨逸) 영토(領土)로 존속(存續)하였다. [17] 아주아주 조금 남아서 작센 주(週)에 흡수(吸收)되긴 했다. [18] 다만 인구(人口)의 25%가 줄어든건 소련(蘇聯) 점령(占領) 영역(領域)에서의 피해(被害)도 합친 결과(結果)이다. [19]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首都), 그단스크와 그디니아는 폴란드의 무역(貿易)의 77% 를 담당(擔當)하던 지역(地域)이었다. [20] 독일(獨逸)의 전후(戰後) 보상(補償) 자체(自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兩) 독일(獨逸)을 재무장(再武裝)시켜야 했기 때문에 서로 합의(合意)를 봐서 전후(戰後) 청산(淸算)을 철저(徹底)하게 하고 영토(領土) 분할(分轄)에 대(對)해 입을 닫는 대신(代身) 국가(國家) 차원(次元)의 공식적(公式的)인 전쟁(戰爭) 배상금(賠償金)을 요구(要求)하지 않거나, 소련(蘇聯)처럼 형식적(形式的)으로만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전후보상(戰後補償)을 청구(請求)하기라도 했던 반면(反面) 폴란드는 아예 청구(請求) 자체(自體)를 하지 않았다. [21] 사실상(事實上) 소련(蘇聯)이 폴란드 영토(領土)를 뺏어간거에 대(對)한 보상(補償) 겸(兼) 입막음으로 구(舊) 독일령(獨逸令) 지역(地域)들을 넘겨준거에 가깝다. [22] 물론(勿論) 현재(現在) 폴란드의 입장(立場)에서 저때 당시(當時) 구(舊) 소련(蘇聯)으로부터 대신(代身) 받은 구(區) 독일(獨逸) 영토(領土)의 잠재적(潛在的)인 경제적(經濟的) 가치(價値)가 더 높긴 했지만 합병(合倂) 초기(初期) 당시(當時)로써는 맨땅에서 재시작(再始作)해야 하는 입장(立場)이었다. [23] 더 기(氣)가 막히는 사실(事實)은 동독(東獨)은 공산(共産) 국가(國家) 중(中)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가장 잘 사는데도 서독(西獨) 에 밀린 것. 서독(西獨)이 당시(當時) 자유(自由) 국가(國家) 중(中)에서 3위(位)로 잘 사는 국가(國家)였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더라도 문제(問題)다. [24] 현재(現在)도 독일(獨逸)의 30% 수준(水準). 2013년(年) 당시(當時) 독일(獨逸) GDP 는 $46,251, 폴란드는 $13,654. # # PPP 로 따지면 현재(現在)는 독일(獨逸)의 50~60% 수준(水準)이다. [25] 칼리닌그라드주(州)의 특수(特殊) 상황(狀況)을 감안(勘案)해달라는 러시아와 난색(難色)을 보이는 EU의 협상(協商) 끝에 현재(現在)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本土)로 육로(陸路) 이동(移動)할 때는 간(肝)이 통행증(通行證) 을 발급(發給)받는 것으로 합의(合意)되었다. [26]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半島) 돈바스 를, 일본(日本)과는 쿠릴 열도(列島) 4개(個) 도서(島嶼)(하보마이, 쿠나시르, 이투루프, 시코탄)를 놓고 영토(領土) 분쟁(紛爭) 중(中)이다. 또한 현재(現在) 정부(政府) 차원(次元)의 직접적(的)인 영토(領土) 분쟁(紛爭)은 없지만 핀란드 , 폴란드 , 중국(中國) 등(等)과도 분쟁(紛爭)의 씨앗이 존재(存在)한다. [27] 특히(特히)나 전간기(癲癎機) 에 독일(獨逸)에 대(對)해 소극적(消極的)인 자세(姿勢)를 취(取)해( 라인란트 재무장(再武裝) , 오스트리아 병합(倂合) , 뮌헨 협정(協定) 등(等)) 2차(次) 대전(大戰) 이 일어난 면(面)도 있는 만큼 독일(獨逸)이 야심(野心)을 드러낸다면 전쟁(戰爭) 으로 가기 전(前)에 초장(初場)부터 압박(壓迫)할 수도 있다. 그것도 서유럽(西유럽) 동유럽(東유럽) 모두 다 [28] 현(現)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남부(南部) 및 타우라게 주(州) 남서부(南西部) [29] 발트(Balt)해가 아닌 벨트(Belt), 즉(卽) 덴마크 에 있는 소 벨트 해협(海峽)(Little Belt)이다. [30] 단(單)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처럼 완전(完全) 금지(禁止)는 아니다. 어쨌건 이 지역(地域)들이 한때 독일(獨逸) 땅이었다는 건 부정(否定)하기 어려운 사실(事實)이고, 프로이센 시절(時節) 영토(領土)라고 우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31] 독일(獨逸)의 여자(女子), 신(神)의, 와인 , 노래 를 지키자는 내용(內容)이다. 여자(女子) 남성(男性) 의 소유물(所有物)로 봤던 인식(認識)이 녹아 있다는 비판(批判)으로 인(因)해 부르지 않는다. [32] 독일(獨逸) 기사단국(騎士團國) 군주(君主) 인(人) 튜튼 기사단(騎士團) 의 기사단장(騎士團長)으로서는 1510년(年) 부터 재위(在位)했다. 호엔촐레른 가문(家門) 의 3대(代)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인(人) 알브레히트 3세(歲) 아힐레스 의 손자(孫子). [33] 호엔촐레른 가문(家門)의 직계(直系)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요아힘 프리드리히 의 맏아들이며,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共)의 맏사위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로는 1608년(年) 에 이미 즉위(卽位). [34] 7년(年) 전쟁(戰爭) 과 제(第)1차(次) 폴란드 분할(分割) 이후(以後) 프로이센 국왕(國王)(Konig von Preußen)으로 완전히(完全히) 인정(認定)받았다. [35] 1806년(年)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해체(解體)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작위(爵位) 상실(喪失). [36] 독일(獨逸) 황제(皇帝)로서는 1871~1888. [37] 오토 폰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왕국(王國) 의 Ministerprasident였다. [38] 국가(國家) 총리(總理) 프란츠 폰 파펜 이 중앙정부(中央政府) 직속(直屬)으로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總理)를 겸임(兼任)했다. 후임(後任) 총리(總理) 쿠르트 폰 슐라이허 도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겸(總理兼) 프로이센 자유주 경찰청장(警察廳長)까지 겸임(兼任)함. [39] 히틀러 내각(內閣) 때 부총리(副總理) 겸(兼)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總理)를 지내다가 곧 해임(解任)된다. [40] 영어(英語)로 "Reich Lieutenant" 또는 "Reich Governor" 등(等)으로 번역(飜譯)된다. [41] 본래(本來) 이 직위명(職位名) 자체(自體)는 독일(獨逸) 제국(帝國) 시절(時節)에 있었다가 바이마르 공화국(共和國) 때 없어졌다. 그러다 나치 시기(時期)에 부활(復活)시킨 것. [42] 1224년(年) 건국(建國)된 튜튼 기사(記事)단국이 전신(前身)이다. 프로이센의 발원지(發源地)이며 베스트프로이센 지역(地域)의 마리엔부르크 를 수도(首都)로 삼고 한때 에스토니아 까지 세력(勢力)을 뻗쳤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와의 전쟁(戰爭)에 패(敗)하면서 베스트프로이센을 비롯한 대부분(大部分)의 영토(領土)를 상실(喪失)하고 오스트프로이센 만으로 영토(領土)가 축소(縮小)된다( 1466년(年) 2차(次) 토(土)른 평화조약(平和條約)). 이 와중(渦中)에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로 옮기고 숨죽여 지내다 1525년(年) 기사단장(騎士團長) 알브레히트의 개신교(改新敎) 전향(轉向) 및 공국(公國) 선언(宣言)과 함께 오스트프로이센 지역(地域)은 프로이센 공국(公國) 으로 거듭나게 된다. 1466년(年) 2차(次) 토(土)른 평화조약(平和條約)으로 상실(喪失)했던 베스트프로이센은 1772년(年) 1차(次) 폴란드 분할(分割) 로 수복(收復)했다. [43] 프로이센 본가(本家)의 대(代)가 끊기자 프로이센과 혼인(婚姻)으로 프로이센을 사실상(事實上) 흡수(吸收)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1157년(年) 건국(建國))이(李) 전신(前身)이다. 주도권(主導權)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쥐고 있었고 사실(事實) 통합(統合) 명칭(名稱)도 브란덴부르크가 되는 것이 순리(順理)였으나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 에 소속(所屬)되어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와 영외(營外) 지역(地域)이었던 프로이센의 특성상(特性上),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의 간섭(干涉)에서 벗어나기 위해 폴란드 의 봉신국(國)이었던 프로이센의 폴란드에 대(對)한 의무(義務)까지 감수(甘受)하며(!) 오히려 프로이센을 대외(對外) 명칭(名稱)으로 채택(採擇)한다. 다만 브란덴부르크도(度) 프로이센도(度) 전부(全部) 호엔촐레른 가문(家門)이었고 상기(想起)한 정치적(政治的) 문제(問題)도 겹쳐 프로이센은 단순(單純)한 세력확장(勢力擴張) 발판(발板)이 아닌 국가(國家) 핵심지역(核心地域)의 위상(位相)을 유지(維持)할 수 있게 된다. [44] 30년전쟁(年戰爭) 후(後) 1648년(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平和條約) 1653년(年) 슈테틴 조약(條約)에 의(依)해 대(代)가 끊긴 포메른 공국(公國)을 서부(西部)는 스웨덴 , 동부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각각(各各) 분리(分離) 점령(占領)한다. 이후(以後) 스웨덴과의 전쟁(戰爭)을 거치며 1722년(年) 스웨덴령(令) 서부(西部) 포메른을 일부(一部) 점령(占領)하고, 1815년(年) 빈 회의(會議) 에서 남아 있던 부분(部分)까지 양도(讓渡)받게 된다. 하지만 정작 현재(現在) 독일(獨逸)에 남아 있는 포메른 은 이 1815년(年) 에 얻은 서부(西部)뿐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45] 1742년(年) 프리드리히 2세(歲) 오스트리아 왕위(王位) 계승(繼承) 전쟁(戰爭) 을 통해 점령(占領), 이후(以後) 1756?1763년(年) 7년(年) 전쟁(戰爭) 에서 프로이센이 슐레지엔 을 사수(死守)하며 프로이센 영토(領土)로 확정(確定). [46] 1793년(年) 2차(次) 폴란드 분할(分割) 에서 프로이센이 획득(獲得)했던 쥐드프로이센을 나폴레옹 전쟁(戰爭) 에서 상실(喪失)했다 종전(終戰) 후(後) 1815년(年) 빈 회의(會議) 에서 회복(回復). 다만 포젠 대공국(大公國)이라는 괴뢰국(傀儡國) 형태(形態)로 운영(運營)하다 1848년(年) 에 정식(正式) 주(週)로 변경(變更)한다. [47] 작센 왕국(王國) 과는 별개(別個)인 프로이센의 작센 주(週) [48] 1815년(年) 나폴레옹 전쟁(戰爭) 승리(勝利) 및 빈 회의(會議) 협상(協商)으로 마그데부르크 공국(公國),알트마르크 지역(地域), 마인츠 대주교령(大主敎令),작센 왕국령(王國令) 점령지(占領地) 흡수합병(吸收合倂). [49] 1866년(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戰爭) 승리(勝利)로 오스트리아 를 지지(支持)했던 하노버 왕국(王國) 점령(占領) 및 흡수(吸收). [50] 1866년(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戰爭) 승리(勝利)로 오스트리아 를 지지(支持)했던 헤센-카셀 영주국(領主國), 나사우 공국(公國), 프랑크푸르트 자유시(自由詩)를 점령(占領) 및 흡수합병(吸收合倂). [51] 프랑스 혁명(革命) 이전(以前)부터 프로이센이 소유(所有)하던 서부(西部) 지역(地域) 영토(領土). 나폴레옹 에게 빼앗겼다 빈 회의(會議) 이후(以後) 회복(回復). [52] 프랑스 혁명(革命) 이전(以前)부터 프로이센이 소유(所有)하던 서부(西部) 지역(地域) 영토(領土). 나폴레옹 에게 빼앗겼다 빈 회의(會議) 이후(以後) 회복(回復). 이때 비텔스바흐 가문(家門) 의 윌리히 주(州)가 윌리히, 베르크로 분리(分離)되었다. 그 당시(當時) (1815) 3개주(個州)로 통합(統合) 설치(設置)했던 윌리히클레베베르크(Julich-Kleve-Berg) 주(週), 괴뢰국(傀儡國) 니더라인 대공국(大公國)을 합병(合倂)하며 라인란트 주(主)가 된다. [53] 1864년(年) 제(第)2차(次) 슐레스비히 전쟁(戰爭) 으로 슐레스비히 공국(公國), 홀슈타인 공국(公國)에서의 덴마크 의 지배권(支配權)을 빼앗은 후(後) 1866년(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戰爭) 으로 오스트리아 까지 도태(淘汰)시키며 프로이센 영토(領土)로 확정(確定). [54]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백국(白菊), 호엔촐레른헤힝겐 백국(白菊) 흡수합병(吸收合倂). 프로이센 왕실(王室)인 호엔촐레른 가문(家門) 의 본향(本鄕)으로 이미 프로이센과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였다. [55] 여기서는 편의상(便宜上) Provinz를 '주(株)'라고 번역(飜譯)하긴 했으나, 이는 제(第)1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이후(以後) 프로이센 왕국(王國) 을 대체(代替)한 프로이센 자유(自由)'주(週)'(Freistaat Preußen, 영어(英語) Free State of Prussia)를 번역(飜譯)할 때 문제(問題)가 된다. 프로이센 자유주(Freistaat) 안에 계속(繼續) Provinz가 존속(存續)했기 때문. 참고(參考)로 중국어(中國語) 에서는 프로이센 자유주 같은 staat는 방(房)(邦)으로, 산하(傘下)의 Provinz들은 성(性)(省) 으로 번역(飜譯)해서 혼동(混同)을 회피(回避)하고 있다. [56] 베를린 내(內) 샤를로텐부르크 [57] 1938년(年)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슐레지엔으로 분리흡수(分離吸收). [58] 이후(以後) 미영(美英)불 3개국(個國) 점령지(占領地)를 합친 서독령(西獨令) 서베를린과 구소련(舊蘇聯) 점령지(占領地)인 동독(東獨) 수도 동베를린으로 분할(分割)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통합(統合). [59] 북동부(北東部)는 리투아니아에, 북부(北部)는 러시아에, 남부(南部)는 폴란드에 각각(各各) 할양(割讓). [60] 베를린 내(內) 샤를로텐부르크을 말한다. [61] 서부(西部) 및 중부(中部)는 동독(東獨) 체제(體制)에서 해체(解體)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브란덴부르크주로 부활(復活). [62] 서부(西部)는 동독(東獨) 체제(體制)에서 해체(解體)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메클렌부르크 지역(地域)과 합쳐지며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로(主로) 부활(復活). [63] 극서부(極西部)만 동독(東獨) 체제(體制)에서 해체(解體)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작센주(작센州)에 흡수(吸收). [64] 초기(初期)에 포젠이었다 개명(改名). [65] 동독(東獨) 체제(體制)에서 해체(解體)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작센-안할트주로 부활(復活). [66] 동독(東獨) 체제(體制)에서 해체(解體)되었다 독일(獨逸) 재통일(再統一)과 함께 작센안할트 주로(主로) 부활(復活). [67] 단(單), 블랑켄부르크 지역(地域)은 동독(東獨)으로 넘어가 통일(統一) 이후(以後) 작센안할트주(州)로 편입(編入). [68] 미국(美國) 점령(占領) 지역(地域)인 브레멘은 재분리(再分離)시키고 나머지 영국(英國) 점령(占領) 지역(地域)은 서독(西獨) 니더작센주로 통합(統合). [69] 룩셈부르크 재분리독립(再分離獨立) 후(後) 서독(西獨) 라인란트팔츠주(州)로 통합(統合). [70] 로트링겐은 알자스-로렌으로 프랑스에 재복속(再服屬), 팔츠는 라인란트-팔츠주로 통합(統合), 라인란트 극남부(極南部)는 프랑스 보호지구(保護地區) 형태(形態)로 분리(分離)되었다 1956년(年) 서독(西獨)으로 복귀(復歸)하며 자를란트주(州) 구성(構成). [71] (불). 뷔르템베르크에 흡수(吸收)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구성원(構成員)으로 존재(存在)하다 종전(終戰) 후(後) 이름만 같은 프랑스의 점령지(占領地)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에 소속(所屬). 이후(以後) 1952년(年) 미국(美國)의 점령지(占領地) 뷔르템베르크-바덴과 합(合)쳐 바덴뷔르템베르크 주(週)에 소속(所屬)되며 명(名)의 상실(喪失). [72] 뤼네부르크에 오스트프로이센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이 있다.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은 자연히(自然히) 해당(該當) 지역(地域) 유민(流民)이 많이 이주(移住)해 있거나, 연관(聯關)이 있는 곳에 세워졌다. [73] 뮌스터 에 베스트프로이센, 뒤셀도르프 인접(隣接) 라팅엔에 오버슐레지엔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이 있다. 여담(餘談)으로 포메른과 니더슐레지엔의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은 독일(獨逸)이 재통일(再統一)되며 쪼가리라도 남아 있는 지역(地域)-각각(各各)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注意) 그라이프스발트 (구(句) 포메른 ), 작센 주의(注意) 괴를리츠 (구(舊) 니더슐레지엔)-에 있다. [74] 더 정확히(正確히)는 바이에른의 오버바이에른 니더바이에른 과 같은 순수(純粹) 바이에른 지역(地域). 현대 바이에른 주(州) 북부(北部)의 프랑켄 지역(地域)은 프로이센 왕국(王國)을 통치(統治)한 호엔촐레른 가문(家門)의 2차(次) 고향(故鄕)과도 같은 곳이다. 프로이센 공국(公國)을 세운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뉘른베르크 근처(近處) 안스바흐를 통치(統治)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분가(分家) 출신(出身)이었다. [75] 다만, 동쪽(東쪽) 극히(極히) 일부분(一部分)은 폴란드로 넘어갔다. [76] 프로이센 땅이 독일(獨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의 원천(源泉)이므로 이것을 완전히(完全히) 없애버리려는 의도(意圖)이다. [77] 2차(次) 대전(大戰) 직후(直後)에도 호엔촐레른뷔르템베르크 식(式)으로 명의(名義)는 남아 있었으나 이후(以後) 바덴과도 합쳐지며 사라짐. [78] 함부르크 시(市)가 대확장(大擴張)을 거치며 인근(隣近)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地域)을 대거(大擧) 흡수(吸收)했다. [79] 그냥 하노버주(週)가 이름만 바꾸며 중간중간(中間中間)에 있던 지역(地域)까지 흡수(吸收)했다고 봐도 될 정도(程度). [80] 현재(現在) 주도(主導)인 에어푸르트는 구(舊) 작센주(작센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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