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傳統的)으로 극(極) 콘텐츠 중(中) 가장 큰 자본(資本)이 들어가는 분야(分野)가 영화(映畫)인데 투자(投資)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엎어지는 경우(境遇)도 많아 배우(俳優) 입장(立場)에서 안정적(安定的)인 수입원(收入源)은 아니었다. 방송사(放送社) 공채(公採) 시험(試驗)을 통과(通過)해 텔레비전 배우(俳優)로 기반(基盤)을 다진 후(後) 영역(領域) 확대(擴大) 차원(次元)에서 영화판(映畫판)으로 진출(進出)하는 사례(事例)가 흔했다. 배우(俳優)
최진실
은 방송사(放送社) 특채(特採) 배우(俳優) 1년차(年次)에 영화(映畫) 배우(俳優)로도 입문(入門)해 양(兩) 진영(陣營)에서 모두 성공(成功)한 드문 케이스. 물론(勿論) TV 드라마에서 인기(人氣)를 끈 후(後) 충무로로 진출(進出)했다가 흥행(興行)에 실패(失敗)해 하향세(下向勢)를 타거나 조연급(助演級) 배우(俳優)로 강등(降等)되어 대중(大衆)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지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한석규는 '서울의 달'과 '호텔'이라는 TV 드라마로 대중적(大衆的)인 인기(人氣)를 다진 후(後) 1990년대(年代) 후반(後半) 영화계(映畫界)로 진출(進出)해서 첫 영화(映畫) '닥터봉(奉)'이 흥행(興行)에 성공(成功)하자 계속(繼續) 영화판(映畫판)에서 잘 나갔다.
1990년대(年代)는 컬러TV가 일반적(一般的)인 시청(視聽) 수단(手段)이 되면서 '텔레비전 배우(俳優)의 시대(時代)'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던 반면(反面) 영화(映畫)는 1990년대(年代) 후반(後半)까지 '방화(放火)'라고 불리며 외국(外國) 영화(映畫)에 비해 외면(外面)을 받았고 '스크린 쿼터제(制)'가 메인 이슈였다. 텔레비전 배우(俳優)는 안방(안房) 극장(劇場)을 통해 대중(大衆)을 만나니 인지도(認知度) 올리기도 좋고 컬러TV 보급(普及)으로 광고(廣告) 시장(市場)도 비약적(飛躍的)으로 발전(發展)하자 방송사(放送社)는 드라마 제작비(製作費)도 넉넉하게 확보(確保)하게 된다. 그러니 텔레비전 배우(俳優) 입장(立場)에서 영화(映畫) 배우(俳優)에 아쉽지가 않았다. '영화(映畫) 배우(俳優)' 로망, '스크린' 로망으로 할 뿐이지.
예술가연(藝術家然) 하기에는 '영화(映畫) 배우(俳優)'가 때깔이 나는 감성(感性)은 있었다. 한국(韓國) 전쟁(戰爭) 이후(以後) 국가(國家) 재건(再建) 과정(過程)에서 라디오, 텔레비전도 귀(貴)하던 시절(時節) 대중예술(大衆藝術)은 영화(映畫)가 전부(全部)이다시피 했고 그걸 향유(享有)하는 사람도 극소수(極少數)였기 때문에 영화(映畫) 배우(俳優)에 대(對)한 로망이 한국사회(韓國社會) 기저(基底)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판(映畫판)에서만 놀던 배우(俳優)들이 브라운관(브라운管)으로 활동(活動) 영역(領域)을 넓히면 '급(級)' 타령하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俳優)
정선경
은 영화(映畫) 배우(俳優)로 자리잡은 후(後) 텔레비전 배우(俳優)로도 연착륙(軟着陸)한 배우(俳優)에 해당(該當)된다.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視聽率) 보증(保證) 수표(手票)지만 영화판(映畫판)에서는 흥행력(興行力)이 저조(低調)한 배우(俳優)들은 탤런트로만 남는다. 예(例)를 들면
김희선(金希宣)
,
최수종
등(等)이 있다. 영화(映畫)는 잘되는데 TV 드라마에서는 흥행(興行)이 저조(低調)한 배우(俳優)도 있다. 예(例)를 들면
문소리
등(等)이 있다.
안성기
처럼 영화판(映畫판)에서만 연기(演技)하고 TV 드라마에는 진출(進出)하지 않는 배우(俳優)들도 있다. 즉(卽) 텔레비전 배우(俳優), 영화(映畫) 배우(俳優), 연극(演劇) 배우(俳優) 중(中) 어느 하나, 혹은(或은) 두 가지, 혹은(或은) 셋 모두를 섭렵(涉獵)하는 배우(俳優) 등(等) 배우(俳優) 개인(個人)의 상황(狀況)이나 성향(性向)에 따라 재량(裁量)대로 간다. 대표적(代表的)인 예(例)가 배우(俳優)
김혜자
로 김혜자는 연극(演劇) 배우(俳優), 텔레비전 배우(俳優), 영화(映畫) 배우(俳優)로 종횡무진(縱橫無盡) 활동(活動)한 배우(俳優)다.
과거(過去) TV 드라마판(版)과 영화판(映畫판)의 촬영(撮影) 시스템이 너무 달라서 적응(適應)을 못하고 탤런트로만 남는 배우(俳優), 영화(映畫) 배우(俳優)로만 남는 배우(俳優)가 갈렸다. TV 드라마에선 거의 실시간(實時間)에 가까운 스피디한 촬영(撮影)이 이뤄지고 쪽대본(臺本)이 성행(盛行)했던 반면(反面) 영화(映畫)는 감독(監督)의 의지(意志)에 따라 촬영(撮影) 기간(期間)에 융통성(融通性)이 있고 재촬영(再撮影)이 들어가기도 하는 등(等) 연기(演技) 흐름이나 환경(環境)에 차이(差異)가 있다. 인터넷이 발달(發達)하고 촬영(撮影) 시스템이 유사(類似)해지면서 이 둘의 간극(間隙)도 좁혀져 갔다. 그리고 사전(事前) 제작(製作) 시스템이 도입(導入)이 되고 2020년대(年代) OTT 시장(市場)에서 영화(映畫) 감독(監督) 중(中)에 TV 드라마 연출(演出)을 하는 경우(境遇)도 생겨 더욱 경계(境界) 자체(自體)가 사라져 간다. 게다가 코로나19 이래(以來) 극장(劇場) 개봉(開封)은 맛보기로 하고 냉큼 넷플릭스 등(等) OTT에 올려서 수익(收益) 증대(增大)를 꾀하는 영화(映畫)들도 많아졌다.
1992년(年) 중국(中國)과 수교(修交)가 이뤄지면서 1993년(年) MBC 드라마 <질투(嫉妬)>(1992년(年))가 처음으로 중국(中國) 시장(市場)에 진출(進出)한 후(後)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가 중화권(中華圈)에서 빅히트를 치는 등(等) 한국(韓國) 드라마의 세계적(世界的) 위상(位相)이 높아져 갔고 2000년대(年代)에 들어서자 그 흐름이 한 단계(段階) 더 업그레이드돼 TV 드라마가 해외(海外) 시장(市場)에서 날개를 달게 되고 텔레비전 배우(俳優)들의 인기(人氣)도 고공행진(高空行進)했다. 2000년대(年代) 초반(初盤) '욘사마' 열풍(烈風)
배용준(裵勇浚)
이(李) 대표적(代表的)인 예(例)다. 배우(俳優)들은 '탤런트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탔다.
1990년(年) 후반(後半) 영화계(映畫界)에 '100만(萬) 관객(觀客) 시대(時代)'의 서막(序幕)이 오르고 2000년대(年代)에 들어서면서 '100만(萬) 관객(觀客) 시대(時代)'가 안정적(安定的)으로 구축(構築)되자 영화(映畫) 배우(俳優)도 안정적(安定的) 수입원(收入源)이 된다. 블록버스터가 대거(大擧) 제작(製作)되면서 영화(映畫) 배우(俳優)의 위상(位相)도 전(前)과 달라지고 한국(韓國) 영화(映畫) 위상(位相)도 외국(外國) 영화(映畫)를 능가(凌駕)한다.
2010년대(年代)부터는 영화(映畫) 활동(活動) 없이 TV 드라마만으로 한류 스타로 자리잡는 경우(境遇)가 더욱 많아졌다.
이민호
가 그 예(例)다. 2010년대(年代)에는 영화계(映畫界)에도 '500만(萬) 관객(觀客) 시대(時代)'가 열리고 '영화(映畫) 배우(俳優) -> 탤런트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境遇)도 생겼다. '기생충(寄生蟲)', '미나리'를 거치면서 2020년대(年代) 영화계(映畫界)는 '1000만(萬) 관객(觀客) 시대(時代)'를 열었고 세계적(世界的)으로 한국영화(韓國映畫) 배우(俳優)의 위상(位相)도 한국(韓國) 텔레비전 배우(俳優)의 위상(位相)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영화(映畫) 배우(俳優)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境遇)도 가능(可能)해 졌다.
전(全) 세계적(世界的)인
한류(韓流)
열풍(烈風) 속에 TV 드라마 시장(市場), 영화(映畫) 시장(市場) 모두 급성장(急成長)하자 영화(映畫) 배우(俳優)와 텔레비전 배우(俳優)로 소위(所謂) 말하는 '급(級)'을 나누는 분위기(雰圍氣)도 거의 사라졌고 그 경계(境界)도 사라져 이제는 배우(俳優)가 영화(映畫)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고루 나오는 경향(傾向)이 대세(大勢)가 되었다.
[5]
'탤런트'라는 단어(單語)가 사어화(死語化)의 계단(階段)을 밟고 있는 2010년대(年代) 들어서 이러한 경향(傾向)은 더욱 강(剛)해졌다. 영화판(映畫판)에서 잘 나가는
전도연(全度姸)
,
이병헌
,
김혜수(金憓秀)
,
전지현
등(等)이 TV 드라마 출연(出演)도 병행(竝行)한다는 게 그 증거(證據)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