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신한국당 - 나무위키

신한국당

최근(最近) 수정(修正) 시각(時刻):
다른 뜻 아이콘  
은(는) 여기로 연결(連結)됩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정당(政黨)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새한국당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 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부분(部分)을
참고(參考)하십시오.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1990.1.22.~1992.10.5.)
(1993.2.25.~1995.12.6.)
신한국당
(1995.12.6.~1997.11.7.)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신한국당 당기
신한국당
영문명(英文名)
New Korea Party (NKP)
한문명(恨文明)
新韓國黨
창당일(創黨日)
당명(黨名) 변경(變更)
해산일(解産日)
이념(理念)

중앙당사(中央黨舍)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영등포구(永登浦區) 의사당(議事堂)대로 18
( 여의도동(汝矣島洞) , 아시아원(院)빌딩)
총재(總裁)
이회창(李會昌) / 초선(初選) (15대(代))
대표위원(代表委員)
이한동(李漢東) / 5선(線) (11-15대(代))
원내총무(院內總務)
목요상 / 3선(選) (11·12·15대(代))
사무총장(事務總長)
김태호(金泰浩) / 3선(選) (12·13·15대(代))
정책위의장(政策委議長)
이해구(李海龜) / 3선(選) (13-15대(代))
대통령(大統領)/명예총재(名譽總裁)
김영삼(金永三) [1] / 제(第)14대(代) (1995.12.6.~1997.11.7.)
의석(議席) 수(數)
152석(席) / 298석(席) ( 한나라당(한나라黨) 창당(創黨) 직전(直前))
당(黨) 색(色)
파란색(파란色) (#003990)
정책(政策) 연구소(硏究所)
국제(國際) 조직(組織)

1 . 개요(槪要) 2 . 상세(詳細) 3 . 강령(綱領)과 정책(政策) 4 . 상징(象徵) 5 . 당가(擔架) 6 . 역대(歷代) 전당대회(全黨大會) 7 . 역대(歷代) 지도부(指導部)
7.1 . 총재(總裁) 7.2 . 대표위원(代表委員) 7.3 . 원내총무(院內總務) 7.4 . 사무총장(事務總長)
8 . 출신(出身) 대통령(大統領) 9 .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9.1 .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9.2 .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10 . 비판(批判) 11 . 관련(關聯) 문서(文書) 12 . 둘러보기

1. 개요(槪要) [편집(編輯)]

김영삼 신한국

1995년(年) 12월(月)부터 1997년(年) 11월(月)까지 존재(存在)했던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정당(保守政黨) . 3당(黨) 합당(合黨) 으로 탄생(誕生)한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이 당명(黨名)을 단순(單純) 변경(變更)한 보수정당(保守政黨)이다. 실질적(實質的)으로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법인(法人)은 1990년(年) 1월(月) 22일(日)부터 1997년(年) 11월(月) 21일(日)까지 7년(年) 10개월간(個月間) 존속(存續)했다.

보수정당(保守政黨) 역사상(歷史上) 손꼽힐 만큼 개혁적(改革的)이었으며, 대구(大邱) / 경북(慶北) 에서 가장 외면(外面)받았던 보수정당(保守政黨)이기도 하다. 그 이유(理由)는 문민정부(文民政府) 가 PK만 편애(偏愛)하고 TK를 홀대(忽待)한다는 불만(不滿)과 [2] [3] 신한국당이 TK 출신(出身)이 대부분(大部分)인 5공(共) , 6공(共) 시절(時節)의 군인(軍人) 출신(出身) 정치인(政治人)들을 숙청(肅淸)한다는 불만(不滿)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餘波)로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서 TK에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무소속(無所屬) 후보(候補)들이 약진(躍進)하는 돌풍(突風)이 일어나기도 했다. [4] 하지만 5공(共), 6공(共) 출신(出身)의 인사(人士)들을 밀어낸 자리에 신세대(新世代) 정치인(政治人)들을 대거(大擧) 공천(公薦)해서 당(黨)의 분위기(雰圍氣)를 바꾸는 데 성공(成功)했고 이때 당선(當選)된 초(初), 재선의원(再選議員)들 중(中) 상당수(相當數)가 중량감(重量感) 있는 정치인(政治人)으로 자라나면서 보수정당(保守政黨)이 정권(政權)을 빼앗아오는 데 성공(成功)하는 중요(重要)한 요인(要因)이 된다.

그러나 1997년(年)을 전후(前後)로 해서 1996년(年) 연말(年末)에 일어난 국회(國會) 노동법(勞動法) 및 안기부법(安企部法) 날치기, 김영삼 대통령(大統領)의 아들인 차남(次男) 김현철 이 비리(非理)에 연루(連累)되어 구속(拘束)되는 사건(事件)이 발생(發生)하고 이 여파(餘波)가 IMF 외환위기(外換危機) 까지 이어지면서 문민정부(文民政府) 와 신한국당의 이미지는 상당히(相當히) 실추(失墜)된다. 결정적(決定的)으로 신한국당과 통합(統合)민주당이 합당(合當)하면서 새롭게 총재직(總裁職)에 취임(就任)한 민선(民選) 초대(初代) 서울시장(市長) 출신(出身) 조순(趙淳) 에 의(依)해 한나라당(한나라黨) 이라는 이름으로 창당(創黨)하였다.

참고(參考)로 김영삼은 1997년(年) 대선(大選) 직전(直前) 신한국당을 탈당(脫黨)했고, 이후(以後) 쭉 무소속(無所屬)으로 지냈다. 후신(後身) 정당인(政黨人) 한나라당(한나라黨) 에는 한 번(番)도 몸 담은 적이 없는데, 이미 정계은퇴(政界隱退)를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또한 대선(大選) 과정(過程)에서 자신(自身)과 크게 갈등(葛藤)을 빚었던 이회창(李會昌) 때문에 입당(入黨)하는 것이 껄끄러운 상황(狀況)이기도 했다.

당시(當時)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kptel.or.kr' [5] , PC통신(通信) (신한국텔) 접속(接續) 명령어(命令語)는 'go nkptel'이었다.

2. 상세(詳細) [편집(編輯)]

가장 짧게 존속(存續)했던 여당(與黨)의 당명(黨名)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例)로는 열린우리당 (3년(年) 9개월(個月)),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 (6개월(個月))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은 사실(事實) 대통령(大統領) 이 입당(入黨)한 적은 없어서 엄밀(嚴密)한 의미(意味)의 여당(與黨)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短命)한 대통령(大統領) 소속당명(所屬黨名)'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金永三) 이(李) 대통령(大統領)으로 당선(當選)되어 문민정부(文民政府) 가 출범(出帆)한 이후(以後)에도 여당(與黨)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의 다수파(多數派)는 여전히(如前히)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출신(出身)의 민정계(系) 였는데 [6] , 김영삼은 김문수(金文洙) , 이재오(李在五) 등(等) 민중당 출신(出身)들을 영입(迎入)하며 민주계(系)의 세(歲)를 강화(强化)하는 한편(한便), 민정계(系)와 공화계(系) 의원(議員)들은 민자당 내(內)에서 서서히(徐徐히) 외곽(外郭)으로 밀려나다가 1995년(年) 초(初) 김종필(金鍾泌)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을 창당(創黨)하며 공화계(系) 의원(議員)들과 일부(一部) 민정계(系) 의원(議員)들은 탈당(脫黨)했다. 1995년(年) 12월(月) 김영삼은 5.18 특별법(特別法) 을 제정(制定)하여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軍事叛亂) 가담자(加擔者)들을 전격(電擊) 구속(拘束)했다. 그리고는 자신(自身)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의 간판(看板)을 내려버리고, 김영삼의 대선(大選)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創造) 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로고 역시(亦是) 교체(交替)했다. 또한 중도(中道) 노선(路線)으로 방향(方向)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當時) 야당(野黨)이던 새정치국민회의 도 취(取)한 태도(態度)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現象)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現象)은 철새 국회의원(國會議員)의 대량(大量) 생산(生産) 원인(原因)이 되었다. [7]

1996년(年) 실시(實施)된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서 수도권(首都圈)에서 선전(善戰)했음에도 [8] [9] 전두환, 노태우 구속(拘束)의 역풍(逆風)을 맞고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 경상북도(慶尙北道) [10] 에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무소속(無所屬) 에게 대거(大擧) 의석(議席)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過半數) 확보(確保)에 일단(一旦) 실패(失敗)했으나, 선거(選擧) 후(後)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無所屬) 의원(議員)들을 끌어와 과반수(過半數)를 확보(確保)하였다. [11]

1996년(年) 12월(月) 크리스마스 노동법(勞動法) 및 안기부법(安企部法) "날치기"( 직권상정(職權上程) ) 파동(波動) [12] 1997년(年) 외환(外換) 위기(危機) 로 지지율(支持率)이 떨어지자, 제(第)15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를 앞두고 1997년(年) 11월(月) 통합(統合)민주당 과 합당(合黨)하여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된다.

15대(代) 대선(大選)에서는 경선(競選) 을 통해 대선(大選) 후보(候補)를 선출(選出)했었다. 이 때 선출(選出)된 후보(候補)가 이회창(李會昌) . 당시(當時) 9명(名)의 후보(候補)가 치열(熾烈)한 각축전(角逐戰)을 벌인다 하여 9룡(龍) 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名士極) 용(龍)의 눈물 이 인기리(人氣裡)에 방영(放映)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萬坪) 중(中) 용(龍)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龍) 풍자(諷刺)도 꽤나 등장(登場)했었다.

3. 강령(綱領)과 정책(政策) [편집(編輯)]

강령
1. 우리는 인간(人間)의 존엄(尊嚴)에 기초하여 국민(國民)의 자유(自由)와 권리(權利)를 보장(保障)하며 정치개혁(政治改革)을 지속적(持續的)으로 유지(維持)하여 맑고 깨끗한 새로운 정치문화(政治文化)를 창출(創出)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정착(定着)?발전시키고 국민(國民)의 삶의 질(質)을 높이는 주민자치생활정치(住民自治生活政治)를 실현(實現)한다.
2. 우리는 자율(自律)과 협동(協同), 창의(創意)와 공정(工程)을 바탕으로 경제정의(經濟正義)를 실현(實現)하고 민생안정(民生安定)을 기(期)하며, 무한경쟁시대(無限競爭時代)에 대응(對應)하여 국가경쟁력(國家競爭力)을 강화(强化)함으로써 ‘튼튼한 국민경제(國民經濟)’를 달성(達成)한다.
3. 우리는 온 국민(國民)의 인간(人間)다운 삶을 보장(保障)하고 성장(成長)과 복지(福祉)의 조화(調和)를 통해 건강(健康)한 복지사회(福祉社會)를 건설(建設)하며 참여(參與)와 협력(協力)의 공동체적(共同體的) 노사관계(勞使關係)를 정착시켜 산업평화(産業平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개혁(敎育改革) 기회균등(機會均等)을 보장(保障)하고 지속적(持續的)인 교육개혁(敎育改革)으로 교육(敎育)의 자율성(自律性)과 창의성(創意性)을 높이며 미래(未來)를 이끌어 갈 도덕적(道德的)이고 유능(有能)한 인재(人材)를 육성(育成)하고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정통성(正統性)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족문화(民族文化)를 창달(暢達)하여 인류문화(人類文化) 발전(發展)에 기여(寄與)한다.
5. 우리는 쾌적(快適)한 환경(環境)을 향유(享有)할 인간(人間)의 기본적(基本的) 생존권(生存權)을 보장(保障)하며 환경친화적(環境親和的)인 자원절약형(資源節約型) 사회(社會)를 지향(志向)하여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이 공존(共存)하는 건강(健康)한 녹색사회(綠色社會)를 실현(實現)한다.
6. 우리는 정치경제사회(政治經濟社會) 등(等) 모든 영역(領域)에서 여성(女性)의 참여(參與)를 확대(擴大)하여 국가발전(國家發展)에 여성(女性)의 잠재능력(潛在能力)을 적극(積極) 활용(活用)하고 남녀(男女)가 평등(平等)하게 대우(待遇)받는 사회(社會)를 이룩한다.
7. 우리는 민족(民族)이 공영(公營)과 공동발전(共同發展)을 적극(積極) 추진(推進)하여 평화적(平和的)인 민족통일(民族統一)을 이룩하며 자유적(自由的) 안보체제(安保體制)를 확립(確立)하고 능동적(能動的)인 외교(外交)를 펼침으로써 세계(世界)의 중심국가(中心國家)로 도약(跳躍)하고 국제적(國際的) 협력(協力)과 노력(努力)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여 세계평화(世界平和)와 인류(人類)의 번영(繁榮)에 기여(寄與)한다.
기본정책(基本政策)

21세기(世紀) 새로운 정치(政治) 구현(具現)
1. 깨끗하고 도덕적(道德的)인 정치문화(政治文化) 창출(創出)
2. 경쟁력(競爭力) 있는 생활정치(生活政治) 추구(追求)
3. 행정(行政)의 선진화(先進化)와 사회안정(社會安定) 확립(確立)
4. 세계화(世界化)와 지방화(地方化)를 선도(善導)
5. 대통령중심제(大統領中心制)에 의(依)한 국민통합(國民統合)의 화합정치(和合政治) 지향(志向)
6. 통일(統一)에 대비(對備)한 새로운 정치세대(政治世代) 육성(育成)

활력(活力)있고 정의(正義)로운 선진국민경제(先進國民經濟) 건설(建設)
7. 국가경쟁력(國家競爭力) 강화(强化)
8. 경제정의(經濟正義) 구현(具現)
9. 새로운 세계경제질서(世界經濟秩序)에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응(對應)
10. 중소기업(中小企業)을 중점적(重點的)으로 육성(育成)?발전(發展)
11. 농어민(農漁民)의 삶의 질(質)을 향상(向上)
12. 주민생활(住民生活)의 안정(安定)과 질적(質的) 향상(向上)을 기함(旗艦)
13. 교통난(交通難)을 완화(緩和)
14. 정보화사회(情報化社會) 촉진(促進)
15. 국토(國土)의 균형발전(均衡發展)과 효율적(效率的) 이용(利用)
16. 우주(宇宙)와 해양(海洋) 개척(開拓)

건강(健康)한 복지사회(福祉社會) 실현(實現)
17. 사회보장제도(社會保障制度)를 확대(擴大)?발전(發展)
18. 노인(老人) 및 장애자복지(障礙者福祉) 증진(增進)
19. 저소득층(低所得層)의 최저생활수준(最低生活水準) 보장(保障)
20. 공동체적(共同體的)인 노사관계(勞使關係) 정착(定着)
21. 열심히(熱心히) 일하는 근로자(勤勞者)가 우대(優待)받는 사회(社會) 구현(具現)
22. 국민건강(國民健康) 증진(增進)과 건전(健全)한 여가생활(餘暇生活) 영유(領有)

지속적(持續的)인 교육개혁(敎育改革)과 새로운 민족문화(民族文化) 창달(暢達)
23. 창의적(創意的)인 인간교육(人間敎育) 실천(實踐)
24. 쾌적(快適)한 교육환경(敎育環境) 조성(造成)
25. 민족문화(民族文化) 창달(暢達)로 국민(國民)의 문화생활수준(文化生活水準) 향상(向上)
26. 청소년(靑少年)을 밝고 건강(健康)하게 키움
27. 사회공동체의식(社會共同體意識) 확산(擴散)

건강(健康)하고 쾌적(快適)한 환경조성(環境造成)
28. 신선(新鮮)하고 깨끗한 공기(空氣) 회복(回復)
29. 맑고 안전(安全)한 물 공급(供給)
30. 폐기물(廢棄物) 통합관리체계(統合管理體系) 강화(强化)
31. 환경보존(環境保存)과 경제발전(經濟發展)의 조화(調和) 추구(追求)
32. 지구환경보존(地球環境保存)을 위한 국제협력(國際協力)에 적극적(積極的)으로 참여(參與)

여성참여(女性參與) 확대(擴大)와 남녀평등사회(男女平等社會) 실현(實現)
33. 여성(女性)들의 정치(政治) 및 행정참여(行政參與) 확대(擴大)
34. 성차별적(性差別的) 고용관행(雇傭慣行)을 타파(打破)하여 여성근로자(女性勤勞者)의 권익(權益)과 평등(平等) 보장(保障)
35. 양성평등(兩性平等) 의식(意識)과 문화(文化) 정착(定着)

민족통일(民族統一)과 세계평화(世界平和) 실현(實現)
36. 남북한간(南北韓間)의 상호신뢰(相互信賴) 기반(基盤) 구축(構築)
37. 민족공동체(民族共同體) 구성(構成)과 조국통일(祖國統一) 실현(實現)
38. 적극적(積極的) 외교(外交)로 세계평화(世界平和)와 인류복지(人類福祉) 증진(增進)에 기여(寄與)
39. 강력(强力)한 국가안전보장체제(國家安全保障體制) 확립(確立)
40. 해외동포(海外同胞) 권익보호(權益保護)를 강화(强化)하고 한민족(韓民族) 역량(力量) 결집(結集)

4. 상징(象徵) [편집(編輯)]

신한국당로고발표
▲ 신한국당 로고를 소개(紹介)하는 강삼재 사무총장(事務總長)과 김윤환 대표위원(代表委員)(1995.12.16.)

웹상(上)에 돌아다니는 #또다른 로고 이미지 도 있는데, 실제(實際) 사용(使用)된 로고와는 곡선(曲線)이 사뭇 다르다.

5. 당가(擔架) [편집(編輯)]


듣기
후렴구(後斂句)만 바꾸었을 뿐 민자당 시절(時節)과 가사(歌詞)가 동일(同一)하다.
(1절(節)) 새시대(時代) 새역사(歷史)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世界)로 미래(未來)로

개혁(改革)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希望)을
민주(民主) 복지(福祉) 통일(統一)의 선봉(先鋒)에 서서
세계(世界)속의 한국(韓國)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後斂)) 아 세계(世界)로 미래(未來)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신한국당

(2절(節)) 새시대(時代) 새역사(歷史)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希望)의 새 정치(政治)로 더 크고 넓게
자유(自由) 평화(平和) 통일(統一)의 역군(役軍)이 되어
세계(世界)속의 한국(韓國)을 드높여 보자

6. 역대(歷代) 전당대회(全黨大會) [편집(編輯)]

상세 내용 아이콘 ? 자세(仔細)한 내용(內容)은 신한국당/역대(歷代) 전당대회(全黨大會) 문서(文書)
번(番) 문단(文壇)을
부분(部分)을
참고(參考)하십시오.

7. 역대(歷代) 지도부(指導部) [편집(編輯)]

신한국당 로고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총재(總裁) 및 대표위원(代表委員)
[ 펼치기 · 접기 ]

7.1. 총재(總裁) [편집(編輯)]

7.2. 대표위원(代表委員) [15] [편집(編輯)]

7.3. 원내총무(院內總務) [편집(編輯)]

신한국당 로고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원내총무(院內總務)

7.4. 사무총장(事務總長) [편집(編輯)]

8. 출신(出身) 대통령(大統領) [편집(編輯)]

대한민국 대통령 문장
번(番)
이름
대(臺)
임기(任期)
선출(選出) 방식(方式)
정당(正當)
취임일(就任日)
퇴임일(退任日)
7
Kim Young-sam pr...
external/static....
김영삼(金永三)
(1927 ~ 2015)
14
1993년(年) 2월(月) 25일(日)
1998년(年) 2월(月) 24일(日)
1992년(年) 대선(大選)
직선(直線) 42.0%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1993 ~ 95)
신한국당 (1995 ~ 97)
무소속(無所屬) (1997 ~ 98)

9.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편집(編輯)]

9.1.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편집(編輯)]

연도(鳶島)
선거명(選擧名)
지역구(地域區) (비율(比率))
비례대표(比例代表) (득표율(得票率))
총(總) 의석(議席) (비율(比率))
결과(結果)
1996년(年)
121 / 253 (47.8%)
18 / 46 (34.5%)
139 / 299 (46.5%)
원내(院內) 1당(黨)
15대 전국구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전국구(全國區) 선거(選擧) 포스터 (1996)

9.2.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편집(編輯)]

연도(鳶島)
국회의원(國會議員)
광역단체장(廣域團體長)
기초단체장(基礎團體長)
광역의원(廣域議員)
기초의원(基礎議員)
3 / 9
0 / 1
2 / 2
0 / 1
0 / 1
0 / 1
2 / 4
0 / 2
0 / 2
0 / 1
0 / 1
1 / 1
0 / 1
0 / 2
1 / 3
1 / 1
0 / 1
1 / 2
0 / 1

10. 비판(批判) [편집(編輯)]

  • 신한국당은 1996년(年) 노동법(勞動法) 날치기 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노동환경(勞動環境)을 헬조선(朝鮮) 으로 전락시켰다. 이들이 도입(導入)한 파견근로제도(派遣勤勞制度)의 정착(定着)으로 비정규직(非正規職) 문제(問題)가 본격적(本格的)으로 양산(量産)되기 시작(始作)했으며, 과시간(科時間) 근로(勤勞)를 조장(助長)할 수 있는 탄력적(彈力的) 근로시간제(勤勞時間制) 또한 이들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이다. 당시(當時) 직권상정(職權上程) 했던 시기(時期)는 시장(市場)에 고용(雇傭)의 탄력성(彈力性)이라는 효과(效果)를 통해 부실기업(不實企業)들의 도산(倒産)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으나 야당(野黨)의 보이콧 [17] 과 유력(有力) 인사(人士)들이 정치적(政治的)으로 악용(惡用)하면서 결국(結局) 원점(原點)으로 돌아간다. 이후(以後) 야당(野黨)과의 영수회담(領袖會談)을 통해 사실상(事實上) 달라진 게 없는 합의안(合意案)이 국회(國會)에 통과(通過)되고 외국(外國) 투자자(投資者)들은 이 기간(期間) 동안 한국정부(韓國政府)의 리스크 관리(管理) 능력(能力)에 의문(疑問)을 품으며 투자금(投資金)을 빠르게 회수(回收)하기 시작(始作)했다.

11. 관련(關聯) 문서(文書) [편집(編輯)]

12. 둘러보기 [편집(編輯)]

[ 펼치기 · 접기 ]
민주당(民主黨) (1960.8.~1961.5.)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1993.2.~1995.12.) 신한국당 (1995.12.~1997.11.)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2003.2.~2003.9.)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한나라黨) (2008.2.~2012.2.) 새누리당(새누리黨) (2012.2.~2013.2.)
[ 펼치기 · 접기 ]
구성(構成)
여당(與黨)
정책(政策) 및 방향(方向)
평가(評價)
타임라인
1993년(年)
1994년(年)
1995년(年)
WTO 가입(加入) · 도농복합시(都農複合視) 제도(制度) 실시(實施) · 쓰레기 종량제(從量制) 실시(實施) · KEDO 설립(設立) · 영광(靈光) 원전(原電) 3, 4호기(號基) 가동(稼動) · 정보통신윤리위원회(情報通信倫理委員會) 출범(出帆) · 대구(大邱) 지하철(地下鐵) 공사장(工事場) 가스 폭발(爆發) 사고(事故) · 1995년(年) 한국통신(韓國通信) 파업(罷業) 사태(事態) · 제(第)1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 삼풍백화점 붕괴(崩壞) 사고(事故) ·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 전면(全面) 실시(實施) · 부동산(不動産) 실명제(實名制) 실시(實施) · 씨(氏) 프린스호(號) 좌초사고(坐礁事故) · 무궁화(無窮花) 1호(號) 위성(衛星) 발사(發射) ·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철거(撤去) · 경기여자기술학원(京畿女子技術學院) 화재(火災) · 중앙고속도로 일부(一部) 개통(開通) · 광주(光州)비엔날레 개최(開催) · 노태우 비자금(祕資金) 사건(事件) · 앙골라 평화유지군(平和維持軍) 파병(派兵) · 부여(扶餘) 무장공비(武裝共匪) 침투사건(浸透事件) · 민주노총(民主勞總) 출범(出帆) · 도로명주소(道路名住所) 시범사업(示範事業) · 금산분리(金産分離) 도입(導入) · 전두환·노태우 전(前) 대통령(大統領) 구속(拘束) 사건(事件) · 5.18 특별법(特別法) 국회(國會) 통과(通過)
1996년(年)
1997년(年)
1998년(年)
별도(別途) 문서(文書)가 없는 평가(評價) 및 논란(論難)은 해당(該當) 주제(主題) 관련(關聯) 문서(文書)를 참고(參考)
김영삼 개인(個人)과 관련(關聯)된 문서(文書)는 틀:김영삼(金永三) 참고(參考)
국회휘장(9대-19대)1px 투명제(第)15대(代) 국회(國會)
원내(院內) 구성(構成)
1996.5.30. ~ 2000.5.29.
[ 임기(任期) 개시(開始) ]
신한국당 로고
142석(席)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
79석(席)
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 축약
48석(席)
민주당(1991년) 흰색 로고
8석(席)
재적(在籍)
299석(席)
[ 후반기(後半期) 개시(開始) ]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
87석(席)
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 축약
49석(席)
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
152석(席)
국민신당 로고 흰색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

8석(席)
재적(在籍)
299석(席)
[ 임기(任期) 종료(終了) ]

[1] 당(黨) 총재직(總裁職)도 겸임(兼任)했는데 후신(後身)인 한나라당(한나라黨) 시절(時節)인 2002년(年) 대선(大選) 앞두고 당총재직(黨總裁職)이 폐지(廢止)되기 전(前)에는 특히(特히) 여당(與黨) 총재직(總裁職)이 현직(現職) 대통령(大統領)이 당연직(當然職)으로 겸임(兼任)했다. 참고(參考)로 명예총재직(名譽總裁職)은 1997년(年) 9월(月) 30일(日)부터 탈당(脫黨) 당일(當日)이었던 1997년(年) 11월(月) 7일(日)까지 역임(歷任)했다. [2] TK의 반(反) YS 정서(情緖)는 이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시절(時節)부터 김영삼(金永三) 이 당(黨)을 장악(掌握)하고 치른 제(第)14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서 통일국민당 과 무소속(無所屬) 후보(候補)가 약진(躍進)하며 드러나기 시작(始作)하여 문민정부(文民政府) 출범(出帆) 이후(以後) 그 현상(現象)이 두드러져 대구(大邱) 에서는 한 번(番)도 민자당이 지선(支線)과 재보선(再補選)에서 승리(勝利)하지 못했으며 경주시(慶州市) 에서는 1994년(年)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에서 민주당(民主黨) 이상두(李相斗) 후보(候補)가 당선(當選)되기도 했다. [3] 대구(大邱) 지하철(地下鐵) 공사장(工事場) 가스 폭발(爆發) 사고(事故) 당시(當時) YS의 망언(妄言)도 한 몫 했다. 이로 인(因)해 참사(慘事) 직후(直後) 치러진 1회(回) 지선(地選) 에서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대구광역시장(大邱廣域市腸) 후보(候補) 조해녕 4위(位) 로 참패(慘敗)했다. [4] 특히(特히)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에서는 전체(全體) 13석(席) 중(中) 8석(席)에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후보(候補)가 당선(當選)됐다. 다만 자민련이 1당(黨)을 차지한 대구(大邱)와 달리 경상북도(慶尙北道) 는 신한국당이 1당(黨)을 차지했다. [5] 당연히(當然히) 현재(現在)는 접속(接續)이 불가능(不可能)하다. [6] 다만 14대(代) 대선(大選) 경선(競選)에서 김영삼(金永三) 을 지지(支持)한 이른바 신(新) 민주계(系)로 분류(分類)되는 민정계(系) 인사(人士)들도 있었다. [7] 양당(兩黨)이 서로 중도화(中道化)하면서 성향(性向) 차이(差異)가 거의 없어지다보니 소속(所屬) 정치인(政治人)들 또한 당적(黨籍) 변경(變更)에 거리낌없어지는 분위기(雰圍氣)가 형성(形成)되었다. [8] 모래시계(時計) 검사(檢事)로 떴던 홍준표(洪準杓) , 민중당 출신(出身)의 이재오(李在五) , 김문수(金文洙) 등(等) 정치(政治) 신인(新人)들을 대거(大擧) 공천(公薦)하고 야권(野圈)이 새정치국민회의 통합(統合)민주당 으로 분열(分裂)한 영향(影響)이 컸다. 대략(大略) 수도권(首都圈)에서 30여개(餘個)의 선거구(選擧區)가 야권(野圈) 분열(分裂)로 승패(勝敗)가 뒤집혔으며, 심지어(甚至於) 야권(野圈) 단일화(單一化)를 가정(假定)한 최상(最上)의 시나리오에서는 야당(野黨)에게 1당(黨)을 내줄 수도 있었다. [9] 이렇게 개혁(改革) 공천(公薦)으로 영입(迎入)되어 당선(當選)된 인사(人士)들을 YS키즈라고도 칭(稱)한다. 이때 당선(當選)된 초선의원(初選議員)들이 정치적(政治的)으로 성장(成長)하며 신한국당의 후신(後身)인 한나라당(한나라黨) 은 야당(野黨) 시절(時節)에도 정국(政局)을 주도(主導)했고 제(第)17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서 정권(政權)을 탈환(奪還)한다. [10] 다만 경상북도(慶尙北道)는 신한국당이 1당(黨)을 차지했다. [11] 이 때문에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總裁)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代表)를 증오(憎惡)하게 되었으며 훗날(後날) 김대중(金大中)과의 관계(關係)가 틀어졌음에도 이회창에 대(對)한 적개심(敵愾心)을 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과(不過) 2년(年) 만에 김대중 정권(政權)이 거꾸로 한나라당(한나라黨) (신한국당의 후신(後身)) 의원(議員) 영입(迎入)을 통해 정계개편(政界改編)을 인위적(人爲的)으로 감행(敢行)할 때는 이에 반발(反撥)하던 하순봉 한나라당 원내총무(院內總務)를 향(向)해 구천서 자민련 원내총무(院內總務)가 "우리는 원금(元金)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 라고 일갈(一喝)하는 굴욕적(屈辱的)인 상황(狀況)도 있었다. 당시(當時) MBC 뉴스데스크 보도(報道) [12] 그냥 "날치기"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비정규직(非正規職)(변형근로제(變形勤勞制)) 및 파견근로제(派遣勤勞制)를 골자(骨子)로 한 새 노동관계법(勞動關係法), 그리고 불고지죄(不告知罪) 및 찬양고무죄(讚揚鼓舞罪) 수사(搜査) 부활(復活)을 골자(骨子)로 한 새 안기부법(安企部法) 이 이 때 통과(通過)되었다. 당시(當時) 안기부장(安企部長)은 하나회 를 분쇄(粉碎)해버린 권영해 . 대신(代身) 복수노조(複數勞組) 허용(許容)이란 순기능(順機能)이 있었다. [13] 1995.12.6.~1997.9.29. 제(第)14대(代) 대통령(大統領) 겸임(兼任), 1997.9.30.~1997.11.7. 명예총재(名譽總裁). [14] 1997.9.30.~11.21. 제(第)15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신한국당 후보(候補). [15] 집단지도체제(集團指導體制)의 대표최고위원(代表最高委員)이 아니라 총재(總裁) 단일지도체제(單一指導體制) 아래 속(屬)한 '대표위원(代表委員)'이다. [16] 1회(回) 지선(地選) 에서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에 출마(出馬)하며 의원직(議員職)을 사퇴(辭退)한 상태(狀態)였다. [17] IMF의 요구(要求)이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當時) 이를 비판(批判)했던 야권(野圈) 인사(人士)들 또한 본인(本人)들이 집권(執權)하여 기득권층(旣得權層)이 되자 이런 막장스런 노동제도(勞動制度)들을 그대로 유지(維持)한 채 정권(政權)을 이어갔다. IMF는 진즉에 끝났지만 제도(制度)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2019년(年)에 이르기까지 이런 기조(基調)는 계속(繼續) 이어지고 있다. [18] 참고(參考)로 이 사고(事故)로 인해 새정치국민회의 신기하 의원(議員)이 사망(死亡)하였다. [19] 직접적(直接的)인 원인(原因)은 그 유명(有名)한 IMF 사태(事態) 다. [20] 전노(前盧) 사면(四面)에 대(對)한 청와대(靑瓦臺) 정치권(政治權) 반응(反應) 1997.12.21 동아일보(東亞日報)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著作物)은 CC BY-NC-SA 2.0 KR 에 따라 이용(利用)할 수 있습니다. (단(但), 라이선스가 명시(明示)된 일부(一部) 문서(文書) 및 삽화(揷畵) 제외(除外))
기여(寄與)하신 문서(文書)의 저작권(著作權)은 각(各) 기여자(寄與者)에게 있으며, 각(各) 기여자(寄與者)는 기여(寄與)하신 부분(部分)의 저작권(著作權)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百科事典)이 아니며 검증(檢證)되지 않았거나, 편향적(偏向的)이거나, 잘못된 서술(敍述)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直接) 문서(文書)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을 원(願)할 경우(境遇) 직접(直接) 토론(討論)을 발제(發題)할 수 있습니다.

  1.  
  2.  
  3.  
  4.  
  5.  
  6.  
  7.  
  8.  
  9.  
  10.  
  •  
  •  
  •  
  •  
  •  
  •  
  •  
  •  
  •  
  •  
  •  
  •  
  •  
  •  
  •  
더 보기
  • Operado por umanle S.R.L.
  • Hecho con ?? en Asuncion, Republica del Paraguay
  • Su zona horaria es GMT
  • Impulsado por the seed engine

This site is protected by reCAPTCHA and the Google Privacy Policy and Terms of Service apply. This site is protected by hCaptcha and its Privacy Policy and Terms of Service ap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