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짧게 존속(存續)했던 여당(與黨)의 당명(黨名)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例)로는
열린우리당
(3년(年) 9개월(個月)),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
(6개월(個月))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은 사실(事實)
대통령(大統領)
이 입당(入黨)한 적은 없어서 엄밀(嚴密)한 의미(意味)의 여당(與黨)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短命)한 대통령(大統領) 소속당명(所屬黨名)'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金永三)
이(李) 대통령(大統領)으로 당선(當選)되어
문민정부(文民政府)
가 출범(出帆)한 이후(以後)에도 여당(與黨)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의 다수파(多數派)는 여전히(如前히)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출신(出身)의
민정계(系)
였는데
[6]
, 김영삼은
김문수(金文洙)
,
이재오(李在五)
등(等)
민중당
출신(出身)들을 영입(迎入)하며 민주계(系)의 세(歲)를 강화(强化)하는 한편(한便), 민정계(系)와 공화계(系) 의원(議員)들은 민자당 내(內)에서 서서히(徐徐히) 외곽(外郭)으로 밀려나다가 1995년(年) 초(初)
김종필(金鍾泌)
이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을 창당(創黨)하며 공화계(系) 의원(議員)들과 일부(一部) 민정계(系) 의원(議員)들은 탈당(脫黨)했다. 1995년(年) 12월(月) 김영삼은
5.18 특별법(特別法)
을 제정(制定)하여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軍事叛亂)
가담자(加擔者)들을 전격(電擊) 구속(拘束)했다. 그리고는 자신(自身)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의 간판(看板)을 내려버리고, 김영삼의 대선(大選)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創造)
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로고 역시(亦是) 교체(交替)했다. 또한 중도(中道) 노선(路線)으로 방향(方向)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當時) 야당(野黨)이던
새정치국민회의
도 취(取)한 태도(態度)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現象)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現象)은
철새
국회의원(國會議員)의 대량(大量) 생산(生産) 원인(原因)이 되었다.
[7]
1996년(年)
실시(實施)된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에서 수도권(首都圈)에서 선전(善戰)했음에도
[8]
[9]
전두환, 노태우 구속(拘束)의 역풍(逆風)을 맞고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
경상북도(慶尙北道)
[10]
에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과
무소속(無所屬)
에게 대거(大擧) 의석(議席)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過半數) 확보(確保)에 일단(一旦) 실패(失敗)했으나, 선거(選擧) 후(後)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無所屬)
의원(議員)들을 끌어와 과반수(過半數)를 확보(確保)하였다.
[11]
1996년(年) 12월(月)
크리스마스
노동법(勞動法) 및 안기부법(安企部法) "날치기"(
직권상정(職權上程)
) 파동(波動)
[12]
과
1997년(年) 외환(外換) 위기(危機)
로 지지율(支持率)이 떨어지자,
제(第)15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를 앞두고 1997년(年) 11월(月)
통합(統合)민주당
과 합당(合黨)하여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된다.
15대(代) 대선(大選)에서는
경선(競選)
을 통해 대선(大選) 후보(候補)를 선출(選出)했었다. 이 때 선출(選出)된 후보(候補)가
이회창(李會昌)
. 당시(當時) 9명(名)의 후보(候補)가 치열(熾烈)한 각축전(角逐戰)을 벌인다 하여
9룡(龍)
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名士極)
용(龍)의 눈물
이 인기리(人氣裡)에 방영(放映)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萬坪) 중(中) 용(龍)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龍) 풍자(諷刺)도 꽤나 등장(登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