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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 나무위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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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개요(槪要) 2 . 계몽주의(啓蒙主義) 자유주의(自由主義) , 그리고 제(第)1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과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3 . 사상적(思想的) 특징(特徵)
3.1 . 교파별(敎派別)로 보는 시각(視角)
4 . 한국(韓國) 개신교(改新敎)로의 유입(流入)
4.1 . 수용(受容) 논란(論難)으로 인(因)한 장로교(長老敎) 분열(分列) 4.2 .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수용(受容) 및 정치적(政治的) 문제(問題)
5 . 현황(現況) 6 . 현재(現在) 한국(韓國)에서 바라보는 시각(視角) 7 . 상대주의(相對主義) 및 다원주의적(多元主義的) 태도(態度) 8 . 비판(批判)
8.1 . 개신교(改新敎) 측(側)의 비판(批判) 8.2 . 가톨릭 측(側)의 비판(批判)
9 . 관련(關聯) 어록(語錄) 10 .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학자(神學者) 11 .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 교단(敎團) 12 .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 학교(學校) 13 . 같이 보기 14 . 관련(關聯) 문서(文書)

1. 개요(槪要) [편집(編輯)]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 또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神學) ( 독일어(獨逸語) :Dialektische Theologie)으로 부른다. 네덜란드에서는 '중도(中道) 정통주의(正統主義)'(midden-orthodox)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통주의(正統主義) (orthodoxie)의 대(代)를 이으면서도 자유주의(自由主義)(vrijzinnig)의 성향(性向) 또한 지닌 양 성향(性向)을 겸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기존(旣存) 자유주의(自由主義) 의 안티테제로 20세기(世紀) 초반(初盤)에 정립(定立)된 현대적(現代的)인 개신교(改新敎) 신학(神學)의 한 노선(路線)이고, 후기(後記) 자유주의(自由主義)(postliberalism) 신학(神學)과도 관련(關聯)이 있다.

이름대로 정통적(正統的)인 유신론(維新論)만을 펼쳐는 16세기(世紀) 근세(近世)의 정통주의자(正統主義者)들과 인간(人間)의 이성(理性)이 성경(聖經)의 계시(啓示)보다 우위(優位)라는 19세기(世紀)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의 영향(影響)을 받으면서도 이 둘과는 다르게 쇠렌 키르케고르 의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實存主義)를 계승(繼承)하며 기존(旣存)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을 정면(正面)에서 비판(批判)하고 다양한 철학(哲學) 운동(運動)(예(例)를 들어 헤겔주의, 자연주의(自然主義), 낭만주의(浪漫主義), 자유주의(自由主義))들이 불러오는 영향(影響)을 신학(神學)과 연결(連結)지으려는 노력(努力)을 부정(否定)하며 그 대신(代身) 성서(聖書)의 '메세지 '에 주목(注目)하자고 주장(主張)한 칼 바르트를 시작(始作)으로 세워진 현대적(現代的) 신학적(神學的) 분파(分派)가 현재(現在)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이다. 단(單) 상술(詳述)했듯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의 안티테제라지만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을 비판(批判)하는 관점(觀點)이 보수(保守) 개혁주의(改革主義) 자(者)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자유주의(自由主義)에 비관적(悲觀的)인 입장(立場)이라고 보수적(保守的)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들이 신정통주의자(新正統主義者)인건 아니다. 극단적(極端的)인 개혁주의자(改革主義者)는 둘다 '자유주의(自由主義)'로 묶어서 비판(批判)하지만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와 자유주의(自由主義)는 엄연히(儼然히) 다르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신봉자(信奉者)들은 쇠렌 키르케고르 의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實存主義)에서 출발(出發)한 '신(新)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 Coram Deo'를 수용(受容)하며 교파(敎派)에 따라선 뒤이어 나타난 마르틴 하이데거 의 '존재(存在)와 시간(時間)'을 토대(土臺)로 현대신학(現代神學)을 계승(繼承)하고 이어갔는데 [1] , 집단(集團)인 이상(以上) 완전히(完全히) 의견(意見)이 일치(一致)하진 않지만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특징상(特徵上) 거의 일관(一貫)되게 나타나는 의견(意見)은 "신(神)의 존재(存在)는 성서(聖書)에서 표현(表現)된 야훼 의 관념(觀念) 또한 초월(超越)하며 모든 개인(個人)마다 믿음의 행태(行態)는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더이상(以上)의 신(神)에 대(對)한 존재정의(存在正義)는 무의미(無意味)하다. 이제는 인간(人間)과 신(神)의 관계(關係)만이 중요(重要)할 뿐이다." [2] 라고 주장(主張)한다.

따라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학계(學界)에서는 더이상(以上) 통용(通用)되지않는 성서무오설(城西戊午說)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3] 을 전면적(全面的)으로 부정(否定) 하지만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부분(部分)은 긍정(肯定)하고, 성경(聖經)으로써 계시(啓示)를 찾는다는 부분(部分)에선 위의 두 설과 같이 긍정(肯定)하는 입장(立場)이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약학자(新約學者) 루돌프 불트만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자(神學者)들이 송두리째 부정(否定)하는 죄(罪), 심판(審判), 죽음,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에 대(對)한 정통주의적(正統主義的) 교리(敎理) 를 부정(否定)하진 않지만 문제(問題)가 있고, 현대(現代)의 일반인(一般人)들이라도 쉬우면서도 확실(確實)하게 알 수 있도록 의미(意味)를 재설정(再設定)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2. 계몽주의(啓蒙主義) 자유주의(自由主義) , 그리고 제(第)1차(次) 세계(世界) 대전(大戰) 과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편집(編輯)]

초기(初期) 기독교(基督敎) 가 형태(形態)를 갖추는 동안에는 당시(當時)의 신플라톤주의 , 영지주의(靈智主義) , 페르시아 종교(宗敎) 등(等)으로부터 이원론(二元論)의 영향(影響)을 받았다. [4] 이원론(二元論)은 기독교(基督敎)의 세계관(世界觀)과 인간관(人間觀) 모두에게 영향(影響)을 주었다. 이 이원론적(二元論的) 체계(體系) 안에서는 정신적(精神的)인 것과 무질적(質的)인 것, 영(靈)과 육(陸), 성과(成果) 속,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과 자연적(自然的)인 것의 분리(分離)가 일어나고, 이 이원적(二元的)인 분리(分離)의 시각(視角)으로 세상(世上)과 인간(人間)을 본다. 이원론적(二元論的) 분리(分離)의 사고(事故)는 기독교(基督敎) 역사(歷史)에서 계속(繼續) 영향(影響)을 끼치며 중요(重要)한 사고(思考)의 유형(類型)으로 남았다. 기독교(基督敎) 전승(戰勝) 속에서 이 이원적(二元的) 요소(要素)는 서로 대립적(對立的)으로 인식(認識)되었다. 영적(靈的)이고 초월적(超越的)인 것은 높은 가치(價値)를 부여(附與)받고 육적(陸的)이고 물질적(物質的)인 것은 낮게 평가(評價)되었다. 영적(靈的)인 것과 물질적(物質的)인 것을 통전적(通典的)으로 함께 생각하거나 적극적(積極的)인 조화(調和)를 꾀하려는 시도(試圖)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계몽주의(啓蒙主義) 이후(以後) 이성(理性)의 영역(領域)이 확대(擴大)되고 시간(時間)이 지나면서 점차(漸次) 이 세계(世界) 내적(內的)인 것에 가치(價値)가 부여(附與)된다. 인간(人間)의 모든 관심(關心)은 물질적(物質的)인 것에 집중(集中)된다. 이제 인간(人間)의 모든 삶의 관심(關心)과 목적(目的)은 ‘이 세상(世上)’이 되었다. 교회(敎會)는 이러한 시대(時代)의 흐름에 위기감(危機感)을 느끼고 영적(靈的)인 것을 강조(强調)했지만 사실(事實)은 물질적(物質的)인 것에 사로잡히는 결과(結果)를 가져왔다. 교회(敎會)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영적(靈的)인 것, 초월적(超越的)인 것, 저 세상(世上)을 강조(强調)했다. 교회(敎會)가 실제적(實際的)으로 영(靈)과 육(肉)의 통전적(統戰的)인 조화(調和)를 위해 노력(努力)하지 않은 채 공허(空虛)하게 ‘영(英)’에 대(對)한 강조(强調)만 반복(反復)하는 동안 이 세상(世上)에 ‘실재성(實在性)’을 빼앗겨버렸다. 교회(敎會)는 이제 개인(個人)의 영성(靈性)을 돌보는 종교적(宗敎的) 역할(役割)만 남았다.

한편(한便), 계몽시대(啓蒙時代)를 거쳐 19세기(世紀)에 이르면서 유럽은 자신(自身)에 차 있었다. 인간(人間)은 이성(理性)에 의존(依存)해 더 많은 것을 찾아냈고, 과학(科學)에 의(依)해 한 세기(世紀) 전(前)에는 불가능(不可能)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可能)하게 했다. 이제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으로 얼마든지 지상낙원(地上樂園)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期待)를 가졌다. 역사(歷史)는 진보(進步)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연(自然)과 사회(社會)는 모두 인간(人間)의 통제(統制) 아래에 있는 듯했다. 이 시기(時期)에 유럽의 제국주의(帝國主義)는 넓게 세력(勢力)을 확대(擴大)했다. 현재(現在)의 역사(歷史)를 긍정적(肯定的)으로 보았고 역사(歷史)의 진보(進步)에 대(對)한 낙관론(樂觀論)이 팽배(澎湃)했다. 제국주의(帝國主義)의 팽창(膨脹)과 함께 자본(資本)의 축적(蓄積)이 이루어졌고 경제적(經濟的)으로 그 이전(以前) 세대(世代)와 비교(比較)할 수 없을 만큼 부유(富裕)했다.

특히(特히)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 자(者)들은 역사적(歷史的) 예수 연구(硏究),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과 비판적(批判的) 이성(理性)을 통해서 개개인(個個人)의 체험(體驗)과는 다른 본연(本然)의 진리(眞理)를 성서(聖書)에서 파악(把握)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들의 모습에서 부르주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역사(歷史)의 진보(進步), 낙관주의(樂觀主義)가 팽배(澎湃)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자(神學者) 하르낙의 역사(歷史) 인식(認識)은 당시(當時) 유럽이 가졌던 시대정신(時代精神)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19세기(世紀) 말(末), 겉으로 드러난 안정(安定)과 발전(發展), 평화(平和)와 진보(進步)의 모습 아래는 인간(人間)의 오만(傲慢)과 함께 위기(危機)가 감추어져 있었다. 19세기(世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위대(偉大)한 학문적(學問的) 결실(結實)을 거둔 것 같지만, 19세기(世紀)는 진정(鎭靜) 위기(危機)의 시대(時代)였다.

1914년(年) 독일(獨逸) 제국(帝國) 빌헬름 2세(歲) 에 의(依)해 제(第)1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 이 발발(勃發)한다. 그들이 믿고 갈구(渴求)하던 평화(平和)와 사랑과 이상사회(理想社會)의 꿈은 산산이(散散이) 조각났다. 지금(只今)까지 인간(人間)이 발명(發明)한 위대(偉大)한 발명품(發明品)들은 모두 살상(殺傷)을 위한 무기(武器)가 되었다. 19세기(世紀)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이런 잘못된 인간(人間) 사회(社會)와 그들의 정책(政策)을 안정(安定)과 발전(發展)이라는 명목(名目) 하(下)에 스스로를 두둔(斗頓)하고 정당화(正當化)함으로 기독교(基督敎) 본연(本然)의 정신(精神)을 잃었다. 19세기(世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이 믿었던 역사(歷史)의 끝없는 진보(進步), 인간사회(人間社會)의 무궁(無窮)한 발전(發展)과 평화(平和), 기독교(基督敎)라는 종교(宗敎)와 그 윤리관(倫理觀)을 통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만들겠다는 인간(人間)의 이상(以上), 이 모든 것이 능력(能力)으로 가능(可能)하다고 믿었던 꿈의 마지막은 전쟁(戰爭)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當時) 대부분(大部分)의 지성인(知性人)들이 빌헬름 2세(歲)의 전쟁정책(戰爭政策)을 지지(支持)한다. 1914년(年) 8월(月)에 발표(發表)된 "93 지식인(知識人) 성명서(聲明書)"에는 당대(當代)를 대표(代表)하는 신학자(神學者)들이 많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이 전쟁지지(戰爭支持) 성명(聲明)의 초안(草案)은 바로 19세기(世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을 대표(代表)하는 하르낙에 의(依)해 작성(作成)되어 발표(發表)되었다. 당시(當時)를 대표(代表)하던 신학(神學) 교수(敎授)들도 이 성명서(聲明書)를 지지(支持)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인식(認識)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결국(結局) 모더니즘은 1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을 일으키면서 종말(終末)을 고(告)하고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 전통(傳統)을 거부(拒否)하게 만들었다. 19세기(世紀)에 출현(出現)했던 자유주의적(自由主義的) 성경주석(聖經註釋)과 신학(神學)의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접근(接近)은 급진적(急進的)인 정치적(政治的), 과학적(科學的) 도전(挑戰)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世上)에서 구체적(具體的)인 대안(代案)들을 제시(提示)할 수 없음이 입증(立證)되었다. 그 이후(以後) 신학자(神學者)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現象學的) -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접근방법(接近方法)을 하나의 혹실한 새로운 성찰방법(省察方法)으로 여겨 이를 환영(歡迎)했다.

신학(神學)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영향(影響)은 세 가지 측면(側面)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 첫째, 진정(眞正)한 삶에 대(對)한 찬성(贊成) 또는 반대(反對)를 결정(決定)할 수 있는 개인(個人)의 실존적 가능성(可能性)에 대(對)한 그의 철학적(哲學的) 설명(說明)은 루돌프 불트만과 다른 신학자(神學者)들에게 이 실존적 상황(狀況)에 상응(相應)하는 새로운 신학적(神學的) 강령(綱領)들을 발전시키도록 촉구(促求)했다.
  • 둘째, 언어(言語)에 대(對)한 그의 성찰(省察)은 신학(神學)에 있어서 하이데거를 재차(再次) 환영(歡迎)케 했다. "신해석학(學)"이 그것이다.
  • 셋째, 인간존재(人間存在)의 해석학적(解釋學的) 조건(條件)에 대(對)한 하이데거의 총체적(總體的) 통찰(洞察)은 성경해석(聖經解釋)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方法)에 대(對)한 계속적(繼續的)인 신학적(神學的) 성찰(省察)에 영향(影響)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철학(哲學)은 텍스트와 종교적(宗敎的) 문헌(文獻)을 오로지 역사적(歷史的)으로만 다루는 방법(方法)을 초월(超越)한 인간학적(人間學的) 토대(土臺)들에 대(對)한 새로운 관심(關心)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성경(聖經) 메세지와 이 세상(世上)의 재해석(再解釋)된 인간(人間)의 현존재(現存在)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創造的)인 종합(綜合)이 가능(可能)할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의 실존적인 요구(要求)에 대(對)한 해결책(解決策)을 제시(提示)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神學者)들이 같은 열정(熱情)으로 공유(共有)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독일계(獨逸系) 신학자(神學者)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는 자신(自身)의 동료(同僚)들이 하이데거의 해석학(解釋學)을 신학적(神學的)으로 수용(受容)하는 데 반(反)하여 자신(自身)은 그것을 거부(拒否)했다. 그는 신학(神學)과 철학(哲學) 사이의 긴밀(緊密)한 연합(聯合)이 신학(神學)에 심각(深刻)한 위험(危險)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3. 사상적(思想的) 특징(特徵) [편집(編輯)]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대표격(代表格)인 칼 바르트 가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자(神學者)이자 스승인 하르낙과 공개토론(公開討論)한 것을 비교(比較)하여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과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학(神學)의 차이점(差異點)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남신학대학교(學校) 조직신학(組織神學) 김동건 교수(敎授)의 <현대신학(現代神學)의 흐름>(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敍懷), 2008)을 따라 하르낙의 15개(個) 질문(質問)을 4개(個)의 주제(主題)로 나누고, 이에 대(對)한 바르트의 신학(神學)을 분석(分析)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성서(聖書)의 진리(眞理), 계시(啓示)가 성서(聖書)의 내용(內容)과 서로 일치(一致)되지 않는 부분(部分)들이 상당(相當)하기에 역사적(歷史的) 지식(知識)과 비판적(批判的) 숙고(熟考)가 필요(必要)하다고 한다. 성서(聖書)의 오류(誤謬)에 대(對)해서는 성경(聖經)/논란(論難) ,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항목(項目) 참조(參照). 이에 대(對)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성서(聖書)는 오류(誤謬)가 있음에도 초월자(超越者)의 거룩한 계시(啓示)는 손상(損傷)되지 않는다고 한다. 바르트에게 성서(聖書)는 이성(理性)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聖靈)의 능력(能力)과 교회전통(敎會傳統)의 신앙(信仰)으로 이해(理解)된다. 따라서 성서비평학(聖書批評學)의 방법(方法)으로 계시(啓示)를 완전히(完全히) 이해(理解)하는 것은 가능(可能)하지 않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성서무오설(城西戊午說)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은 거부(拒否)하고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의 유산(遺産)인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을 받아들인다. 다만 현대철학(現代哲學)과 문헌(文獻) 해석학(解析學), 언어학(言語學)을 받아들여 성서(聖書)도 인간(人間)이 쓴 책(冊)이기 때문에 해석(解釋)이 필요(必要)하나 결과적(結果的)으로 신(神)이 주도(主導)했으므로 계시는 손실(損失)되지 않는다 고 주장(主張)한다. 성서(聖書)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表現)은 시인(詩人)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나무가 바람에게 인사(人事)한다"고 표현(表現)하듯, 내용(內容)과 서사(敍事)의 문제(問題)가 아니라 언어(言語) 그 너머에 있는 절대자(絶對者) 체험(體驗)이 시적(詩的), 종교적(宗敎的)으로 표현(表現)된 진리(眞理)이고 계시라는 것이다. [5]

둘째,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성서(聖書) 속 인물(人物), 그리고 성서(聖書)를 읽는 인간(人間)의 체험(體驗), 설교자(說敎者)의 관점(觀點)이 각기(各其) 다르기 때문에 혼선(混線)이 빚어지며 따라서 비판적(批判的)으로 객관적(客觀的)인 기준(基準)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들에 의(依)하면 객관적(客觀的)인 이성(理性)으로 설명(說明)할 수 없는 종교적(宗敎的) 체험(體驗)은 무가치(無價値)한 개인(個人)의 환각(幻覺)이자 착각(錯覺)이다.
이에 대(對)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두 가지로 대답(對答)한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신(神)에 대(對)한 인간(人間)의 체험(體驗)은 역사적(歷史的) 판단(判斷), 곧 이성(理性)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神) 인식(認識)이 비판적(批判的) 숙고(熟考)에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意味)이다. 신인식은 인간(人間)의 이성(理性)으로 판단(判斷)될 수 없는 초월(超越)의 경지(境地)이다. 따라서 신(神)이 허락(許諾)한다면 비판적(批判的) 성찰(省察)없이도(度) 신(神)과 인간(人間)의 진선미(陳善美)(眞,善,美)는 결합(結合)될 수 있다. 신(神)은 그 자신(自身)을 드러냈기 때문에 인간(人間)은 신뢰(信賴)를 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人間)에게 위기(危機)이며 이를 넘어서서 진정(眞正)한 인간성(人間性)에 대(對)한 긍정(肯定)이 나타난다. 여기서 바르트의 아(亞)우프헤벤 적(敵) 신학(神學)이 두드러지는데, 간단히(簡單히) 말해서 바르트는 신(神)과 인간(人間) 사이에는 질적(質的)인 차이(差異)가 있음을 강조(强調)한 것이다. 신(新) 인간(人間) 에게 다가와 경험(經驗)을 선물(膳物)하지만 인간(人間)은 질적(質的)으로 전혀(全혀) 다른 존재(存在) 를 이해(理解)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人間)에게 이 경험(經驗)은 오해(誤解), 갈등(葛藤), 배신위기(背信危機) 로 나타나고, 신(神)과 인간(人間)의 단절(斷絶)이 나타난다. 단절(斷絶) 을 신은 넘어섬으로 인간(人間) 에게 다가오고, 비로소 긍정(肯定) 이 다가온다. 정확히(正確히) 정반합(正反合) 의 구조(構造)이다.

다른 한편(한便), 바르트는 매우 단순(單純)하게 대답(對答)한다. "그분은 모든 이성(理性)보다 더 높다" [6]

셋째,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신(神)과 인간(人間)의 대립(對立)을 지양(止揚)하고 신(神)의 사랑과 인간(人間)의 이웃 사랑을 결합(結合)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한다. 이렇게 보면 매우 추상적(抽象的)으로 들릴 수 있으나 하르낙의 입장(立場)에서의 요지(要旨)는 세계역사(世界歷史)의 진보(進步)는 신(神)의 뜻이다 는 의미(意味)이다. 간단히(簡單히) 말해 세상학문(世上學問)과 신학(神學) 사이의 상관관계(相關關係)를 옹호(擁護)하는 것이다. 이 옹호(擁護)는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 본연(本然)의 순수(純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가 18세기(世紀)에 당면(當面)했던 시대(時代)는 더이상(以上)의 형이상학(形而上學)과 신론(新論)에 더이상(以上) 기대(期待)를 할 수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基督敎)의 생존(生存)을 위해 근대철학(近代哲學)이 종교(宗敎)에 제시(提示)한 의문(疑問)들을 반박(反駁)하고 그들이 그나마 감싸던 윤리(倫理), 감정(感情)과 미적 토대(土臺)를 양토(壤土)삼아 왼팔엔 경건주의(敬虔主義), 오른팔엔 낭만주의(浪漫主義)를 업고 세상학문(世上學問)이 미처 전달(傳達)하지 못하는 분야(分野)를 종교(宗敎)가 전달(傳達)할 수 있다고 변증(辨證)하였다. 그리고 시대(時代)의 흐름과 요청(要請)에 따라 신학(神學) 강의안(講義案)에 문헌비평(文獻批評), 역사비평(歷史批評)을 넣은 것이다. 칼 바르트도 슐라이어마허를 맹렬히(猛烈히) 비판(批判)했지만 평생(平生)을 연구(硏究)하면서 그가 맞닥뜨렸던 현실(現實)과 그의 대처(對處)를 옹호(擁護)하기도 했다. 하르낙에 의(依)하면 진화론(進化論), 자연과학(自然科學)의 발달(發達), 산업혁명(産業革命), 계몽주의(啓蒙主義)의 풍토(風土)가 식민주의(植民主義)와 제국주의(帝國主義) 사관(史觀)을 형성(形成)하도록 이끌었으며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도(神學徒) 계몽주의(啓蒙主義)의 시각(視角)에 동의(同意)하였음을 여기서 발견(發見)할 수 있다. 바르트는 단언(斷言)한다. 신(神)과 인간(人間)의 사랑은 도저히(到底히) 나란히 놓을 수 없다. 신(神)과 인간(人間)을 나란히 놓으려 는 것이 바로 신(神)과 인간(人間)이 대립관계(對立關係)임을 보여준다 칼 바르트가 지적(指摘)한 것은 신학(神學)을 맹렬히(猛烈히) 공격(攻擊)했던 지성인(知性人)이라고 하는 인간(人間)들, 학문(學問)들이 한참뒤에 도리어 종교전쟁(宗敎戰爭) 보다도 더욱 잔혹(殘酷)하고 과학적(科學的)으로 세계대전(世界大戰)을 저지른 야만적(野蠻的) 행위(行爲)이다. 바르트는 1차(次) 세계대전(世界大戰)에서 유럽의 관념론(觀念論)과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의 철저(徹底)한 붕괴(崩壞)를 보았다. 바르트는 신학(神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榮光)을 말할 것인가, 인간(人間)의 종교적(宗敎的) 도덕적(道德的) 가능성(可能性)에 대(對)하여 말할 것인가의 문제(問題)를 모순적(矛盾的) 양자택일(兩者擇一)로 보았다. 이러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확언(確言)은 이후(以後) 세속학문(世俗學問)들 극단적(極端的)인 변화(變化) 를 통해서 사실(事實)임이 입증(立證)되었다.

넷째,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은 역사적(歷史的) 연구(硏究)가 뒷받침되지 않는 그리스도는 몽상적(夢想的)인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경고(警告)한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歷史的) 예수 세미나, 고대근동지역(古代近洞地域) 발굴(發掘) 등(等)을 통해 실제(實際) 역사(歷史)와 성서신화(聖書神話)를 구분(區分)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바르트는 계시(啓示)에 의(依)한 그리스도 인식(認識) 외(外)에는 그리스도에 도달(到達)할 수 없다고 주장(主張)한다. 이 말은 결코(決코) 육체(肉體)를 입고 이성(理性)으로 사고(思考)하는 인간(人間)은 그리스도를 완전히(完全히) 알 수 없으며 오로지 미래(未來), 계시(啓示), 종말(終末)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신정통주의(神正統主義)의 대표자(代表者)인 칼 바르트는 그래도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주장(主張)하면서,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자(神學者)들이 부정(否定)하던 (구(舊))정통주의(正統主義)의 죄(罪), 심판(審判), 죽음, 십자가(十字架), 속죄(贖罪), 부활(復活) 등등(等等)에 대(對)한 개념(槪念)을 다시 인정(認定)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대(對)해서 (구(舊))정통주의자(正統主義者)들을 교조적(敎條的)으로 답습(踏襲)한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實存主義), 신(新) 죽음의 신학(神學) 등(等)으로 기존(旣存) (구(舊))정통주의(正統主義)에서 찾아내지 못한 또 다른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했다. 즉(卽)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宗敎) 개혁자(改革者)들의 (구(舊))정통주의(正統主義)를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계승(繼承)하고 발전시켜 등장(登場)한, 자유주의(自由主義)에 대(對)한 안티테제 를 자칭(自稱)했다.

3.1. 교파별(敎派別)로 보는 시각(視角) [편집(編輯)]

이들도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처럼 각자(各自) 생각하는 주장(主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독자적(獨自的)인 신학(神學)을 개척(開拓)했다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신(神)의 계시(啓示)를 절대적(絶對的)으로 주장(主張)하는 반면(反面) [7] , 마틴 부버는 그 계시(啓示)도 의심(疑心)해야 한다고 하였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십자가(十字架) 사건(事件) 그것만이 오로지 계시(啓示)일 뿐이다고 하였다. 폴 틸리히는 "인간(人間)이 신(神)을 이해(理解)하기는 절대적(絶對的)으로 불가능(不可能)하나 나사렛의 역사적(歷史的) 예수의 십자가(十字架) 사건(事件), 그리고 신화(神話)로 전(傳)해지는 부활(復活)과 제자(弟子)들의 교회(敎會) 세움을 문맥상(文脈上)으로 이어보았을 때 믿음직 하다"고 하였다. 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안에서 역사(歷史)를 바라보았기에 계시는 성서(城西)뿐 아니라 일반역사(一般歷史)에서도 충분히(充分히) 나타난다고까지 주장(主張)하였다. 이렇듯 개신교(改新敎)는 교파(敎派)마다 믿는 신앙(信仰)이 달랐기에 신학적(神學的) 초점(焦點)도 다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大體로) 서구(西歐)의 개신교(改新敎)는(성공회, 감리교회(監理敎會), 구세군(救世軍), 루터교회(敎會), 장로교회(長老敎會)를 비롯한 개혁교회(改革敎會) [8] , 해방신학(解放神學), 심지어(甚至於)는 가톨릭마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활발(活潑)하게 연구(硏究)하고 있다.) 대부분(大部分)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받아들였다.그러나 신앙고백(信仰告白)이 옅어진 신학(神學) 학풍(學風)을 지닌 주류(酒類) 교단(敎團) [9] 과 타교파(他敎派)와 연합(聯合)된 교단(敎團) [10] 이 그러하며, 주류(主流) 교단(敎團)과 결별(訣別)한 정통주의(正統主義) 교단(敎團)들, 지속교회(持續敎會) [11] 교단(敎團)들은 정통주의(正統主義)에 머무르며,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거부(拒否)한다.

반면(反面) 비서구권(非西歐圈)의 개신교(改新敎)는 오순절주의(五旬節注意) 정통주의(正統主義) 성향(性向)이 매우 강(剛)하다 보니 신정통주의(申正統主義)를 사도(邪道) 취급(取扱)하는 경향(傾向)이 매우 강(强)하다. 애시당초 먹고 살기 바쁜 곳에서는 철학(哲學) 얘기보다 "예수 믿어야 복(福)받고 천국(天國)도 간다"는 식(式)으로 심플하게 설교(說敎)하는 교회(敎會)들이 더 인기(人氣)를 끌 수밖에 없다.

4. 한국(韓國) 개신교(改新敎)로의 유입(流入) [편집(編輯)]

한국(韓國)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장공(張公) 김재준 (1901-1987) 목사(牧師)가 프린스턴 신학교(神學校) [12] 에서 유학(留學)한 후(後) 귀국(歸國)하면서 도입(導入)되었으며,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현(現) 한신대(한신大) )의 교수(敎授)로 오게된 것이 이후(以後)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의 성향(性向)과 발전(發展) 방향(方向)에 지대(至大)한 영향(影響)을 끼치게 된다. 성경(聖經) 비평(批評)을 학문적(學問的)으로 도입(導入)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학(神學)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比較的) 현대적(現代的)인 신학(神學)을 공부(工夫)한 목사(牧師)들이 이 학교(學校)의 교수(敎授)가 되면서 이 학교(學校)의 신학교육(神學敎育)은 (신학적(神學的)으로) 세계(世界)의 신학(神學) 흐름에 맞게 현대적(現代的)으로 되었고, 이에 대(對)해 기존(旣存) 교리(敎理)를 고수(固守)하는 교단(敎團)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反撥)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內紛)은 어차피(於此彼) 일제(日帝)가 아예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일환(一環)으로 조선(朝鮮) 장로교(長老敎)를 다른 종파(宗派)들과 모두 합쳐 일본(日本) 기독교(基督敎)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意圖)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表面化)되지 않았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라는 개념(槪念) 자체(自體)가 개혁주의(改革主義) 베이스이고, 원조(援助) 격(格)인 칼 바르트도 스위스 개혁교회(改革敎會) 목사(牧師)였기 때문에 장로교회(長老敎會) 중심(中心)으로 유입(流入)되었다. 타(他) 종파(宗派)의 경우(境遇) 하드코어 웨슬리안 교단(敎壇)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성(旣成))에서 부분적(部分的)으로 신정통주의적(新正統主義的) 입장(立場)을 수용(受容)하나, 같은 하드코어 웨슬리안이라도 예수교대한성결교회(大寒聖潔敎會)(예성)는 거부(拒否)한다. 그리고 소프트한 웨슬리안 교단(敎團)이면서 한국(韓國) 개신교(改新敎) 교단(敎團) 랭킹 3위(位)인 기독교대한(基督敎大韓) 감리회(監理會) (기감(技監))는 신학(神學) 스펙트럼 자체(自體)가 웨슬리안 베이스 안에서 굉장히(宏壯히) 진보적(進步的)이고 또 폭(幅) 넓기 때문에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도 당연히(當然히) 수용(受容)한다. 감리교(監理敎)의 신학(神學) 노선(路線)은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의 조화(調和) 를 강조(强調)한다는 것인데, 비록 장로교(長老敎) 베이스이긴 하지만 역시(亦是)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의 조화(調和)를 추구(追求)하는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와도 잘 맞는 것이다. 성공회(聖公會) 의 경우(境遇) 신학적(神學的) 스펙트럼이 그 어떤 교단(敎壇)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程度)로 넓기 때문에 [13] 당연히(當然히) 수용(受容)한다. 침례교(浸禮敎) 는 개교회주의적(個敎會主義的) 성격(性格)이 강(剛)하기 때문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침례교(浸禮敎)의 원리(原理)가 성경(聖經)에 신앙(信仰)의 최고(最高) 권위(權威)를 부여(附與)하는 것이기 때문에 침례교(浸禮敎)에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받아들이는 경우(境遇)는 드물다.

장로회(長老會)의 경우(境遇)는 교단(敎壇)에 따라 다르다. 성경(聖經) 비평(批評)을 받아들이는 한편(한便)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성경(聖經)은 신(神)의 말씀이라 믿고 현재(現在)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歷史)와 시대(時代) 상황(狀況)이라는 실존(實存) 속에서 그 의미(意味)를 발견(發見)하고자 하는 교파(敎派)가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이며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비판적(批判的)으로 수용(受容)하면서 성서(聖書)를 역사적(歷史的)으로도 문학적(文學的)으로도 접근(接近)하려는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통합(統合)) ,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의 연장선상(延長線上)으로 보고 비판(批判)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합동(合同)) 이 그러하다.

4.1. 수용(受容) 논란(論難)으로 인(因)한 장로교(長老敎) 분열(分列) [편집(編輯)]

광복(光復)이 되어 장로교(長老敎) 내(內) 각(各) 파벌(派閥) 간(間) 갈등(葛藤)이 심화(深化)되면서 본격적(本格的)으로 분열(分裂)이 표면화(表面化)되었다. 특히(特히) 조선신학(朝鮮神學)과 신학적(神學的)인 면(面)과 파벌적(派閥的)인 면(面) 모두에서 반대(反對)되던 (후(後))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가 이북(以北)에 위치(位置)하여 [14] 남북분단(南北分斷)의 와중(渦中)에 사라지고 장로교(長老敎) 총회(總會)에서 정식(正式)으로 인가(認可)받은 유일(唯一)한 신학교육기관(神學敎育機關)이라고는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유일(唯一)하게 존재(存在)하게 되면서 [15] 목회자(牧會者) 교육내용(敎育內容)을 둘러싸고 신학적(神學的)(교리적(敎理的))/헤게모니적(的) 갈등(葛藤)이 심화(深化)된 것이다. 심지어(甚至於)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問題)로 갈등(葛藤)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 설립(設立)으로 인(因)해 [16] 광복(光復)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事實上) 분리(分離)된 상태(狀態)였다.

이러한 장로교(長老敎) 내부(內部) 교파(敎派) 간(間) 갈등(葛藤)은 더욱 커져 결국(結局) 1947년(年) (후(後))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출신(出身) 학생(學生) 51명(名)이 대구(大邱)에서 열린 제(第) 33회(回) 총회(總會)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完全)한 장로교(長老敎) 정통신학교(正統神學校)를 세워줄 것을 요구(要求)하는 진정서(陳情書)를 내는 일이 발생(發生)했다.

이에 대(對)해 김재준은 그해 7월(月)에 총회(總會)에서 자신(自身)의 신학관을 명확히(明確히) 밝혔지만 1948년(年)에 총회(總會)의 요청(要請)을 받은 박형룡 목사(牧師)가 이를 검토(檢討)한 결과(結果)에 대(對)해 장로교(長老敎)의 교리(敎理)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否定的)으로 결론(結論)을 내렸다. [17]

박형룡의 의견(意見)을 받아들인 총회(總會)에서는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개조(改造)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年間) 해외(海外)로 유학(遊學)보내고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에 보수주의(保守主義)(근본주의(根本主義)) 교수(敎授)들을 대거(大擧) 수혈(輸血)하는 방안(方案)을 내놓지만 이 방안(方案)에 대(對)해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에서 거세게 반발(反撥)함으로써 사실상(事實上) 이 개조안(改造案)은 무효화(無效化)된다. 때문에 결국(結局) 총회(總會) 산하(傘下) 신학대책위원회(神學對策委員會)에서는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개조(改造)를 포기(抛棄)하는 대신(代身) 그해(1948년(年)) 5월(月)에 보수주의(保守主義) 신학(神學)을 가르치는 신학교(神學校)를 새로이 설립(設立)하기로 결정(決定)한다. 그 결정(決定)에 따라 결국(結局) 그해 6월(月), 박형룡를 임시교장(臨時校長)으로하여 서울 남산(南山)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 가 개교(開校)했고, 이것이 1949년(年) 35회(回) 총회(總會)에서 인가(認可) 받게되면서 장로교(長老敎) 내부(內部) 분열(分裂)이 가시화(可視化)된다.

한편(한便) 이 난리(亂離) 중(中)에도 1947년(年)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正規大學)으로 인가(認可)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財團法人) 한신학원(阪神學院) 인가(認可)와 함께 조선신학대학(朝鮮神學大學)으로 개편(改編)하였다.

이 난리(亂離)를 피우는 도중(途中)에 50년(年)에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勃發)하고, 조선신학대학(朝鮮神學大學)은 부산(釜山)으로 피난(避難)하여 교육(敎育)을 계속(繼續)한다. 1951년(年)에 36회(回) 총회(總會)에서 서로 교육(敎育)하는 신학(神學)의 내용(內容)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두 신학교(神學校)의 양립(兩立)에 의(依)한 구조적(構造的) 모순(矛盾)을 해결(解決)하기 위해 두 신학교(神學校)의 직영(直營)을 전부(全部) 취소(取消)하고 대신(代身) 총회직영(總會直營)의 새로운 신학교(神學校)를 대구(大邱)에 세우자며, 사실상(事實上) 두 학교(學校)를 합친 새로운 학교(學校)를 만들자는 방안(方案)을 내놓고, 그 해 9월(月)에 총신대학교(學校) 가 설립(設立)될 계획(計劃)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名稱)과 교수진(敎授陣)이 남산(南山)에 있던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나 다름이 없는 상황(狀況)이었고, 총회(總會)에서 내놓은 두 학교(學校) 결합(結合)을 위한 소위(所謂) '합동(合同) 7원칙(原則)'에서 요구(要求)한 "신한(新韓) 교육(敎育)을 순복음부의(附議)에 기초해서" 한다던가 중요과목(重要科目)을 7인(人)의 선교사(宣敎師) 교수(敎授)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神學校) 현직(現職)원의 총사퇴(總辭退) 등등(等等)의 안은 조선신학대학(朝鮮神學大學)이 전혀(全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要求)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朝鮮神學大學) 측(側)에서는 당연히(當然히) 불복(不服)했다. [18] 이때 학교(學校) 이름도 현재(現在) 한신대학교라는 명칭(名稱)의 기원(起源)이 되는 한국(韓國)신학대학교(學校) 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 [19]

이 이후(以後)로는 각(各) 대학(大學)은 서로 독립(獨立)된 상태(狀態)였으며, 1953년(年)에 결국(結局) 한신대를 중심(中心)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교단(敎團)이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 에서 분리(分離)되었다.

이후(以後)로 한국(韓國)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기장(機張) 교단(敎團)과 한신대학교를 중심(中心)으로 현재(現在)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기장(機張) 교단(敎團)은 전적(全的)으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수용(受容)하면서 교단(敎壇) 사이즈는 작지만 신학계(神學界)에서 상당(相當)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使)하고 있다. 다른 교단(敎壇)의 경우(境遇) 같은 장로교(長老敎) 계열(系列)인 예장통합(統合)에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일부(一部) 수용(受容)하기는 하나 이 교단(敎壇)은 기장(機張)처럼 하드코어한(韓)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따르지는 않아서 교회별(敎會別)로, 목사별로(牧師別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수용(受容)하는 양상(樣相)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예장백석(藝場白石) 교단(敎團)은 WCC 를 (비판적(批判的)으로) 지지(支持)하고 여성안수(女性按手)를 허용(許容)하는 등(等) 진보적(進步的)인 모습도 보이기는 하나, '개혁주의(改革主義) 생명신학(生命神學)'이라 하여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수용(受容)하지는 않는 상태(狀態)에서 개혁주의(改革主義)를 현대적(現代的)으로 재해석(再解釋)한 신학(神學) 노선(路線)을 따른다. 나머지 교단(敎團)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에 대(對)해 (교단(敎團) 전체적(全體的)으로는) 극도(極度)로 부정적(否定的).

이 문서(文書)에서는 한신대학교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만을 표방(標榜)하는 것처럼기록되어있어 오해(誤解)의 여지(餘地)가 있으므로, 첨언(添言)하자면
한신대학교는 해방신학(解放神學) 의 토착화(土着化) 신학(神學)인 민중신학(民衆神學) 을 창시(創始)하면서 후기(後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 사조(思潮)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勿論)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비판적(批判的)으로 수용(受容)한 것. [20]

그리고 WCC 의 등장(登場)으로 또 한번(番)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는 통합(統合)과 합동(合同)으로 분열(分裂)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 각(各) 교단(敎壇)마다 이런저런 이유(理由)로 지속적(持續的)으로 분리(分離)되어 오늘날 장로회(長老會) 계열(系列) 교단(敎團)만 대충 170여개(餘個)가 넘어간다. 장로회(長老會)에서 분리(分離)한 교단(敎團)들이 대부분(大部分)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라는 명칭(名稱)을 그대로 유지(維持)하고 괄호(括弧) 안에 나름대로의 명칭(名稱)을 적어 구분(區分)하는 반면(反面)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측(側)은 쫓겨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라는 명칭(名稱) 자체(自體)를 사용(使用)하지 못하/않고 아예 별도(別途)의 교단(敎壇)을 따로 설립(設立)한 모양새(模樣새)가 되었다. 당시(當時) 김재준 목사(牧師)는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예수敎長老會)로부터 제명(除名)을 당(當)하기도 했고. [21]

4.2.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수용(受容) 및 정치적(政治的) 문제(問題) [편집(編輯)]

박형룡 박사(博士) [22] 는 칼 바르트를 비판(批判)한 코넬리어스 반(半) 틸에게서 강(强)한 영향(影響)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정통주의(神正統主義)를 몹시 싫어했다. 반(半) 틸은 메이첸이 설립(設立)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神學校)의 창립(創立) 멤버였고 '새로운 현대주의(現代主義)', '기독교(基督敎)와 바르트주의(注意)'등(等)의 저서(著書)에서 바르트를 혹독(酷毒)하게 비판(批判)한다. 반(反)틸에 의(依)하면 바르트는 칸트적(的)인 현상계(現象界)-예지계(叡智界)의 구분(區分)에 학문적(學問的) 출발점(出發點)이 있는 모더니스트다. 바르트는 반(反)틸을 '자신(自身)에 대(對)한 비판자(批判者) 중(中)에서 그나마 자신(自身)을 이해(理解)하고 있는 자(者)'라고 평가(評價)하였다고 한다. 총신(銃身)의 경우(境遇) 신학대학원장(神學大學院長)을 역임(歷任)한 서철원 박사(博士)가 반(反)틸의 직계(直系) 제자(弟子)로서 바르트에 대(對)하여 반(反)틸 이상(以上)으로 혹독(酷毒)한 평가(評價)를 내렸다. 서철원 박사(博士)에 의(依)하면 반(反)틸조차 바르트를 너무 좋게 평가(評價)했다고 한다.

강경(强勁) 보수(保守) 개혁주의(改革主義) 신학자(神學者)인 존 그레셤 메이천(千)(John Gresham Machen, 1881-1937) [23] 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가 변증법(辨證法)의 영향(影響)을 받은것과 기존(旣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의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을 물려받은 것에 대(對)해 못마땅하게 보고 이를 비판(批判)했으며 박형룡도(度) 이에 동감(同感)하여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정통주의(正統主義)가 아닌 자유주의(自由主義)의 아류(亞流)라고 보았다.

해방(解放) 이후(以後) 군사정권(軍事政權) 당시(當時)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은 대체로(大體로) 반정부(反政府) 성향(性向)을 보였는데, 이는 보수주의(保守主義) 진영(陣營)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기 딱 좋은 구실(口實)이 되었다.

5. 현황(現況) [편집(編輯)]

한국(韓國) 교회(敎會)에서 NCCK , 즉(卽) 에큐메니컬 진영(陣營)의 주축(主軸)을 이루는데 큰 기여(寄與)를 하였다. 다만 NCCK의 회원(會員) 교단(敎團)들이 모두 진보적(進步的)인 건 아니다.

학문적(學問的)으로는 실존주의(實存主義)를 차용(借用)하였기에 태생적(胎生的)으로 미국(美國)과 영국(英國)의 행동주의(行動主義), 유물론(唯物論), 진화론(進化論)과는 아직까지 대치(對峙)하고 있는 상태(狀態)이다. 끊임없이 대화(對話)를 하고는 있지만, 인간(人間)을 특별한 존재(存在)로 보는지(영적) 혹은(或은) 동물(動物)과 다름없는 존재(存在)로 보는지(육체적)에 대(對)한 시각차이(視角差異)로 인(因)해 관념론(觀念論)과 유물론(唯物論)과의 대화(對話) 같은 끝없는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긍정적(肯定的)인 것은 자연과학(自然科學)을 기본(基本) 전제(前提)로 하면서 철학적(哲學的)으로 인간(人間)을 이해(理解)하고자 하는 독일(獨逸)의 철학적(哲學的) 인간학(人間學)에서 규정(規定)한 인간론(人間論), 곧 "인간(人間)은 더이상(以上) 본능(本能)이나 주위세계(周圍世界)에 예속(隸屬)되어 있지 않고, 주위세계(周圍世界)에 대(對)하여 자유(自由)로운(umweltfrei) 존재(存在)" 이론(理論)이 과거(過去) 근대신학자(近代神學子) 헤르더가 주장(主張)했던 신(神)의 모상(模相)으로서의 인간(人間) 이해(理解)와 심도(深度)있게 다루어질 수 있으며 상호관련(相互關聯)될 수 있다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연구(硏究)에 의(依)해 과학(科學)과 신학(神學)이 여전히(如前히) 대화(對話)가 가능(可能)하다는 의결(議決)로 나아가게 된다. 이 의결(議決)은 신학(神學)과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이 서로의 자리를 인정(認定)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20세기(世紀)의 과학발전(科學發展)이 객관적(客觀的), 이성적(理性的), 논리적(論理的) 결과(結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대중(大衆)들의 평가(評價)와는 다르게 인문적(人文的)이고 창의적(創意的), 심지어(甚至於) 자연(自然)에 대(對)한 경외감(敬畏感)에서부터 이루어졌음을 과학자(科學者)들 스스로 인정(認定)한 결과(結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世紀) 후반기(後半期) 이후(以後) 신학(神學)은 이 시대(時代)에 대(對)한 광범위(廣範圍)한 비판적(批判的) 성찰(省察)의 결과(結果)로서 다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神學)(신학계(神學界)에서는 후기(後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이라 불리운다)과 생산적(生産的)인 관계(關係)를 맺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제기(提起)한 질문(質問)이나 문제(問題)들이 그간(그間)의 신학(神學),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神學), (구(舊))정통주의(正統主義), 복음주의(福音主義) 신학(神學)들을 통해 심도(深度)있게 다루어지거나 대답(對答)된 것이 아니라 단지(但只) 억압(抑壓)되거나 왜곡(歪曲)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24]

6. 현재(現在) 한국(韓國)에서 바라보는 시각(視角) [편집(編輯)]

현재(現在)는 전통주(傳統酒)의 교회(敎會)들도 적극적(積極的) 사회(社會) 참여(參與)에 나서는 경우(境遇)가 있지만, 1970년대(年代) 유신독재(維新獨裁)와 1980년대(年代) 5공독재(共獨裁)에 맞서 싸운 기독교(基督敎) 목사(牧師)와 교인(敎人)들은 거의 대부분(大部分)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어떠한 형태(形態)로든 수용(受容)하였다. 현재(現在)도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교회(敎會)들은 사회(社會) 이슈에 대(對)해서 적극적(積極的)인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KNCC뿐만 아니라 다양(多樣)한 교계(敎界) 단체(團體)와 기구(機構)를 통해 적극적(積極的)으로 사회(社會) 참여(參與)를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사회(社會) 이슈에 대(對)해 사회적(社會的) 약자(弱者)의 편(便)에 서서 진보적(進步的)인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基督敎) 목사(牧師)나 교회(敎會), 선교(宣敎) 단체(團體)나 기구(機構)들은 신학(神學) 노선상(路線上)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혹은(或은) 리버럴일(日) 가능성(可能性)이 높다. [25]

한국(韓國) 장로교회(長老敎會), 그중(그中)에서도 가장 진보적(進步的)인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와 중도적(中道的)인 예장통합 소속(所屬) 장로회신학대학교(學校) 의 주요(主要) 신학노선(神學路線) [26] 이다. 단(單), 기장(機長)의 한신대학교 는 위의 김재준 목사(牧師)를 이어 수많은 교수(敎授)들과 목사(牧師)들이 신정통주의자(新正統主義者)들을 전공(專攻)으로 수학(受學)하였다. 예장통합(統合)의 대표신학교(代表神學校)인 장로회신학대학교(學校) 는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창시자격(創始者格)되는 칼 바르트 전공자(專攻者)인 김명용 박사(博士) [27] 가 총장(總長)을 지내기도 했다. [28] 참고(參考)로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장로회(長老會)'교회(敎會)의 교파(敎派)를 구분(區分)하는 방법(方法)이 있는데,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는 파란색(파란色)과 보라색(보라色) 원에 "기(基)"모양(模樣)의 화살표(화살標) 형태(形態)의 흰색(흰色) 선(線)을 사용(使用)하고, 예장통합 은 초록색(草綠色) 바탕에 붉은 십자가(十字架) 로고를 사용(使用)하고, 예장합동(合同) 은 파란색(파란色)+초록색(草綠色) 바탕에 흰색(흰色) 십자가(十字架) 로고를 사용(使用)한다. 교회(敎會)에 붙어있는 이 십자가(十字架) 로고만(萬)봐도 같은 장로교(長老敎) 교회(敎會)인데도 이 문서(文書)에서 보았듯 판이(判異)하게 다른 교단중(敎團中) 어떤소속(所屬)인지, 교회(敎會)의 신학노선(神學路線)이 어떠할지 대략(大略) 짐작(斟酌)할수 있다.

한신대학교 의 입장(立場)에서 신정통주의(神正統主義)는 애증(愛憎)의 관계(關係)이다. 80년대(年代) 독재(獨裁)에 항거(抗拒)하고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에 헌신(獻身)한 기장교단(機張敎團)은 지금(只今)에 와서 색(色)이 바랬지만 학계(學界)에서는 꾸준히 민중신학(民衆神學)과 함께 주류(酒類) 신학(神學)으로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수용(受容)하였다. 이러한 역사(歷史) 덕분(德分)인지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기장(機長))는 한국(韓國)의 장로교(長老敎) 중(中)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을 가장 적극적(積極的)으로 수용(受容)하고 성서해석학(聖書解釋學) 적(敵) 관점(觀點)에서 성서(聖書)를 바라보는 시도(試圖)를 많이 하는 교단(敎團)이다.

7. 상대주의(相對主義) 및 다원주의적(多元主義的) 태도(態度) [편집(編輯)]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유일구원(唯一救援)설 자체(自體)를 부정(否定)하지는 않으나 타(他) 종교(宗敎)에 대(對)해 굉장히(宏壯히) 우호적(友好的)인 편(便)이다.

각종(各種) 사회(社會) 이슈에 대(對)해 목소리를 내면서 불교(佛敎)나 원불교(圓佛敎), 심지어(甚至於) 가톨릭과 손을 잡기도 하는 것은 기본(基本)이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불교계(佛敎界)를 향(向)하여 축하(祝賀)를 해주기까지 한다.(그리고 거꾸로 크리스마스에는 불교계(佛敎界)에서 기독교계(基督敎界)를 향(向)해 축하(祝賀)를 해주기도 한다.)

간단히(簡單히) 말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의 조화(調和) 를 중요시(重要視)하며, 타(他) 종교(宗敎)에 대(對)한 적대적(敵對的) 태도(態度)나 사회적(社會的) 문제(問題)에 대(對)한 무관심(無關心) 내지(乃至)는 외면(外面)과 같은 자세(姿勢)를 거부(拒否)하고 적극적(積極的)인 사회(社會) 참여(參與)를 통한 현실(現實) 변혁(變革) 타(他) 종교(宗敎)에 대(對)한 포용적(包容的)인 태도(態度) 를 가진 기독교(基督敎) 신학(神學)의 한 노선(路線)이라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 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의 바톤을 넘겨받은 위르겐 몰트만 은 아예 그의 저서(著書) '희망(希望)의 신학(神學)'에서 만유구원설(萬有救援說)을 제창(提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저쪽진영(陣營) 에서 마르고 닳도록 까대는 종교(宗敎) 다원주의(多元主義) 적인(敵人) 기원(起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만 주어지는 구원(救援)의 유일성(唯一性) 을 전제(前提)하되, 하나님은 선(善)하시기 때문에 안타까워서라도 결국(結局)에는 모두를 구원(救援)하려고 애쓰시지 않을까? 라는 모든 인류(人類)의 구원(救援)을 바라는 희망(希望) 을 담은 표현(表現)이다. 그리고 현재(現在) 이것은 그 제자(弟子)인 미로(迷路)슬라브 볼프 에 의(依)해 예일 대학교(大學校) 로 이어져 맥(脈)을 이어가고 있다.

8. 비판(批判) [편집(編輯)]

8.1. 개신교(改新敎) 측(側)의 비판(批判) [편집(編輯)]

장신대 김중은 총장(總長)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비판(批判)

위에서 설명(說明)했듯이, 후기(後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과 함께 성서비평학(聖書批評學)을 가지고 성경(聖經)의 권위(權威)를 떨어뜨린다는 점(點)과 타(他) 종교(宗敎)에 관용적(慣用的)인 제스처를 취(取)한다는 점(點)이 가장 큰 비판점(批判點)으로 꼽힌다. 외형적(外形的), 예전적(的)인 면(面)에서도 개신교(改新敎)적 정체성(正體性)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비판(批判)을 받고 있다. 실제로(實際로)도 대다수(大多數)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교단(敎團) 소속(所屬) 교회(敎會)들은 '예전회복운동(回復運動)'이란 이름 하(下)에 촛불의식(儀式)을 하거나 성상(聖像), 성화(成火)를 걸어놓은 경우(境遇)를 숱하게 볼 수 있다.

정치(政治)의 직(直), 간접적(間接的) 개입(介入)에 있어서도 정통주의(正統主義) 교단(敎團)들이 우편향(郵便香)으로 문제(問題)가 많다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교단(敎團)들은 좌편향(左偏向)으로 문제(問題)가 많으며, 정치적(政治的) 올바름 이나 언더도그마 에 파묻혀서 자기(自己)들과 반대(反對)되는 복음주의(福音主義) 및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자유방임체제(自由放任體制)(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나 갑질(甲질) 등(等) 사회적(社會的) 부조리(不條理)를 무조건(無條件) 옹호(擁護)할 것이란 착각(錯覺)에 빠져 있는 경우(境遇)도 잦다. 게다가 보수(保守) 교단(敎團)들이 특정(特定) 정치인(政治人) 및 정당(政黨)을 옹호(擁護)하면 헌법(憲法)을 무시(無視)하는 '신정(神政) 국가화(國家化)'라고 비판(批判)하지만 정작 자신(自身)들도 반대(反對) 측(側)에서 특정(特定) 정치인(政治人) 및 정당(政黨)을 반대(反對)한다. 애시당초 칼 바르트 본인(本人)부터가 스위스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 그리고 독일(獨逸) 사회(社會)민주당 양쪽(兩쪽)에 가입(加入)하여 정치활동(政治活動)을 했으며, 동유럽(東유럽) 등(等) 공산(共産) 진영(陣營)에서 일어난 종교(宗敎) 탄압(彈壓)에 비판(批判)하지 않고 침묵(沈默)한 이력(履歷)이 있다. 나치즘에 대(對)해서는 적극적(積極的)으로 비판(批判)했으나, 스탈린주의가 저지른 종교(宗敎) 탄압(彈壓)에 대(對)해선 침묵(沈默)하고 눈감았다는 오점(汚點)은 루터교 신학자(神學者)인 마르틴 니묄러 의 행보(行步)와도 묘(妙)하게 겹친다. [29] [30]

8.2. 가톨릭 측(側)의 비판(批判) [편집(編輯)]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31] 를 필두(筆頭)로 많은 가톨릭 신학자(神學者)들이 신정통주의(神正統主義)를 연구(硏究)하고 장점(長點)과 단점(短點)을 면밀히(綿密히) 분석(分析)하였다. 그들의 공통(共通)된 의견(意見)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역사적(歷史的) 상황(狀況)에 대(對)한 냉철(冷徹)한 예언자적(豫言者的) 정신(精神)으로 당시(當時) 독재정부(獨裁政府)와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지향(志向)하던 교회(敎會)를 향(向)한 비판(批判)이었음을 인정(認定)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본디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에 대(對)한 안티테제로 등장(登場)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自由主義)의 유산(遺産)을 들고 나왔으며, 이들의 등장(登場)은 이후(以後) 근본주의(根本主義)와 복음주의(福音主義)로 불리어지는 신흥종교(新興宗敎) 집단(集團)을 낳았다는 점(點)에서 비판(批判)을 받고 있다. 물론(勿論) 그들이 이를 의도(意圖)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니 역사(歷史)의 결과(結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當時) 세계대전(世界大戰)이 한창이던 유럽에 강렬(强烈)한 정통(正統)으로의 회귀(回歸)를 요청(要請)했다는 점(點)에서 상당(相當)한 성과(成果)를 빚은건 사실(事實)이다.

또한 칼 바르트와 같이 키르케고르의 신앙주의 노선(路線)을 추구(追求)한 신학자(神學者)들은 가톨릭 대화주의(對話主義)의 입장(立場)과 달리 하느님의 전적(全的)인 주권(主權), 전적(全的) 타자설(打者說)을 강조(强調)하였고, 그렇기에 부차적(副次的)으로 창조(創造)된 존재(存在)로서 세상(世上)에 있는 인간실존(人間實存)을 무가치(無價値) 한것으로 경도(傾倒)되게 한 데 공헌(貢獻)했다. 물론(勿論) 바르트는 <교회(敎會) 교의학(敎義學)>에서 이를 변호(辯護)하면서 신앙(信仰)의 유추(類推) 안에 존재(存在)의 유추(類推)를 포함(包含)시킴으로 가능(可能)하다는 전제(前提)를 했지만 이는 상당히(相當히) 신범론(新汎論)(Theopanism)에 가까운 해석(解釋)이다. 신학(神學)에서는 항상(恒常) 이것이 문제(問題)였는데, 신(神)의 영역(領域)을 강조(强調)하면 인간(人間)이 도저히(到底히) 신(神)에게 다가갈 여지(餘地)가 없어지며, 인간(人間)의 자유(自由)를 강조(强調)하면 신(神)이 인간(人間)과 같은 언어(言語)와 사고(思考)를 하는 듯한 문제(問題)를 야기(惹起)한다. 바르트는 전자(電子)를 좇았기 때문에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9. 관련(關聯) 어록(語錄) [편집(編輯)]

'바르트주의(注意)' 라는 평범(平凡)한(그리고 별로(別로) 유용(有用)하지 않은) 말 외(外)에 두 개(個)의 용어(用語)가 바르트의 이론(理論)을 가리키는 데 사용(使用)되어 왔다. 첫째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神學)'(dialectical theology)이라는 말로, 이것은 1919년(年) 바르트가 <로마서(로마書) 강(强)해>에서 사용(使用)한 '시간(時間)과 영원(永遠)의 변증법(辨證法)'이나 '하나님과 인간(人間)의 변증법(辨證法)'이라는 표현(表現)에서 온 말이다. 이 용어(用語)는 하나님과 인간(人間) 사이에는 연속성(連續性)이 없으며 모순(矛盾)이나 변증법적(辨證法的) 관계(關係)가 있다고 본 바르트 특유(特有)의 주장(主張)에 주목(注目)한 것이다. 두 번째(番째)는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로, 이 용어(用語)는 특히(特히) 17세기(世紀) 개혁적(改革的) 정통주의(正統主義) 시대(時代)의 사상(思想)과 바르트 사이의 연속성(連續性)에 착안(着眼)한 것이다. 여러 가지 면(面)에서 바르트는 17세기(世紀) 주요(主要)한 개혁주의(改革主義) 사상가(思想家)들에게서 영향(影響)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理論)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特徵)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神學)'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논의(論議)를 따르면, 신학(神學)이란 성서(聖書)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터전으로 삼고 그 위에 기독교(基督敎) 교회(敎會)의 선포(宣布)를 견고히 다지고자 애쓰는 학문(學問)이다. 신학(神學)은 인간(人間)의 상황(狀況)이나 인간(人間)의 문제(問題)에 대(對)한 응답(應答) 이 아니다. 신학(神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對)한 응답(應答)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본성상(本性上) 응답(應答)을 요구(要求)한다.
1930년대(年代)에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라인홀트 니부어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神學者)들의 저술(著述)을 통해 북미(北美) 신학(神學)에서 주도적(主導的)인 위치(位置)를 차지했으며, 자유주의(自由主義) 개신교(改新敎)가 그 당시(當時)에 펼치던 사회사상(社會思想)의 낙관적(樂觀的) 가정(假定)들을 비판(批判)하였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학(神學)이란 무엇인가> 中 -
"93명(名)의 독일(獨逸) 지성인(知性人)들이 전(全) 세계(世界) 앞에서 독일(獨逸) 황제(皇帝) 빌헬름 2세(歲) 와 수상(受賞) 베트만-홀베크 (Bethmann-Hollweg)의 전쟁(戰爭) 결정(決定)에 찬성(贊成)하는, 그야말로 처참(悽慘)한 성명서(聲明書)를 발표(發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명서(聲明書)에 서명(署名)한 지성인(知性人)들의 명단(名單)에 나의 독일인(獨逸人) 스승들의 이름이 거의 다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驚愕)을 금(禁)치 못했다."
하(下)르낙(樂), 헤르만, 라데, 오이켄 등(等) [32] 이 새로운 상황(狀況)에 어떻게 반응(反應)하는지를 보았을 때", 어떻게 종교(宗敎)와 학문(學問)이 "모조리 지성(知性)의 42cm 대포(大砲)"로 둔갑(遁甲)하는지 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른바 신(神)들의 황혼(黃昏) (Gotterdammerung) [33] 을 경험(經驗)했다."
"이제 나는 독일(獨逸)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偉大)한 신학자(神學者)들의 가르침에 의심(疑心)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전쟁(戰爭)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失敗)했다고 느꼈으며, 그 실패(失敗)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구제불능(救濟不能)의 나락(那落)에 떨어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윤리적(倫理的) 실패(失敗)"는 "그들의 성서(聖書) 주석학(柱石學)과 교의학(敎義學)의 전제(前提)도 올바른 상태(狀態)가 아닐 수 있다" 는 것을 암시(暗示)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徹底)하게 신뢰(信賴)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世界), 곧 성서(聖書) 주석(主席), 윤리(倫理), 교의학(敎義學), 설교(說敎)의 세계(世界) 전체(全體)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始作)했으며, 당시(當時) 독일(獨逸)의 다른 신학자(神學者)들이 주장(主張)하던 내용(內容)의 진실성(眞實性)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그 성명서(聲明書)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以後)에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正體)가 드러난 그 신학(神學)의 기초(基礎)를 세우고, 그 신학(神學)에 결정적(決定的)인 영향(影響)을 끼친 사람이 바로 다!"
“만일(萬一) 하나님이 자기(自己)를 계시(啓示)하지 않는다면 인간(人間)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關)하여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인간(人間)이 하나님을 전혀(全혀) 경험(經驗)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人間)이 하나님에 관(關)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意味)에서 계시(啓示)와 경험(經驗)은 서로 모순(矛盾)되지 않는다.”
- 카를 바르트, 글의 순서(順序)대로 "W. Spoedlim 에게 쓰는 편지(便紙). 1915년(年) 1월(月) 4일(日)", "뮌스터 대학교(大學校) 개신교(改新敎) 신학(神學)과 기념(記念)앨범 자서전적(自敍傳的) 텍스트(Autobiographische Texte). 1927", "알베르트 셰델린 기념(記念) 문집(文集) 회고(回顧)<Das Wort sie sollen lassen stehn ABT(Autobiographische Texte)>. 1950", "에드워드 트루나이젠과의 서신교환(書信交換). 1921-1930년(年). 1974년(年) 발견(發見)" 中 에서 추출(抽出)해낸 그의 개인적(個人的) 심경(心境)들 -

10.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학자(神學者) [편집(編輯)]

  • 카를 바르트 - 이성중심(理性中心)의 신학(神學)에서 계시(啓示) 중심(中心)의 신학(神學)으로 전환(轉換).
  •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 에밀 브루너 - 자연신학(自然神學), 신학(神學)의 상황화(狀況化)에 관(關)한 연구(硏究).
  • 레지날드 풀러
  • 에드워드 트루나이젠
  • 디트리히 본회퍼 - 급진적(急進的)인 제자도(弟子道)를 제시(提示).
  • 빌헬름 부쉬
  • 마틴 니묄러
  • 미로(迷路)슬라브 볼프-위르겐 몰트만의 제자(弟子). 현재(現在) 예일 대학교(大學校) 내(內) 신학교(神學校)의 조직신학(組織神學) 교수(敎授)로 재직중(在職中)이다. 얼마전(前) IVP에서 출판(出版)한 <<알라>>로 인해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급격히(急激히) 화제(話題)의 인물(人物)이 되었다.
  • 파울 틸리히 - 문화신학(文化神學), 경계선(境界線)의 신학(神學),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神學).
  • 에버하르트 융엘 - 불트만학파(學派)이면서 칼 바르트의 해석학적(解釋學的) 입장(立場)을 계승(繼承)한 독특(獨特)한 조직신학자(組織神學者)
  • 루돌프 불트만 - 성서(聖書)의 비신화화(非神話化). 신약성서(新約聖書) 전승사(戰勝史) 연구(硏究).
  • 루돌프 보렌
  • 에른스트 케제만 - 자신(自身)의 스승이었던 불트만의 비신화화(非神話化) 방법론(方法論)을 비판(批判)하며, 후기(後記) 불트만주의(注意)를 연 신학자(神學者).
  • 한나 아렌트 -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弟子)였다. 정치이론학자(政治理論學者)이지만 신학(神學)과도 연결성(連結性)이 짙다.
  • 라인홀드 니부어 - 기독교(基督敎) 현실주의(現實主義), 책임윤리(責任倫理)를 제시(提示).
  • 헬무트 리처드 니버 - 기독교(基督敎)와 문화(文化)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관(關)한 연구(硏究).
  • 헬무트 쾨스터 - 불트만의 제자(弟子). 고대(古代) 기독교(基督敎) 연구(硏究), 배경사(背景社) 연구(硏究)에 공헌(貢獻).
  • 한스 프라이 - 내러티브 신학(神學).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 구속사(救贖史) 신학(神學)에서 보편사(普遍社) 신학(神學)으로의 전환(轉換). 아래로부터의 기독론(基督論)과 부활중심(復活中心)의 종말론(終末論) 제시(提示).
  • 위르겐 몰트만 - 종말론(終末論) 중심(中心)의 희망(希望)의 신학(神學). 십자가(十字架) 신학(神學)과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재해석(再解釋).
    • 김균진 - 몰트만의 제자(弟子)이자 사위. 전(前)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신학(神學)과 교수(敎授).
    • 김명용 - 몰트만의 제자(弟子). 장로회신학대학교(學校) 전(前) 총장(總長)이자 은퇴교수(隱退敎授)이다.
    • 박종화 - 몰트만의 제자(弟子).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경동교회의 원로목사(元老牧師).
    • 이신건 - 몰트만의 제자(弟子). 서울신대 은퇴교수(隱退敎授) #
  • 하리 카이터트 - 前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自由大學校) 윤리학(倫理學) 교수(敎授). 1960년대(年代)까지 극도(極度)로 보수적(保守的)이던 네덜란드 개혁교단(改革敎壇)에 성서비평학(城西批評學) 을 본격적(本格的)으로 소개(紹介)하여 교단(敎團) 전체(全體)의 노선(路線)이 바뀌도록 만들었다.
  • 코르널리스 헤이코 미스코터
  • 에리히 프지(地)와라
  • 김재준 - 한신대학교(學校)의 공동(共同) 설립자(設立者)이면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전공자(專攻者)이다. 자세(仔細)한 사항(事項)과 이력(履歷)은 한신대학교 참조(參照).
  • 문익환 - 한신대학교(學校)의 교수(敎授)로 재직(在職)했으며 민중신학자(民衆神學者)이다.

그 외(外) 독일(獨逸) 고백교회(告白敎會), 바르멘 신학선언(神學宣言)에 참가(參加)한 목회자(牧會者)들,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에 영향(影響)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神學者)들, 한국(韓國)의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연구(硏究)한 학자(學者)들이 있다.

11.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 교단(敎團) [편집(編輯)]

12.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 학교(學校) [편집(編輯)]

13. 같이 보기 [편집(編輯)]

14. 관련(關聯) 문서(文書) [편집(編輯)]

[1] 이 부분(部分)에 있어서는 신정통주의(神正統主義) 내(內)에서도 의견(意見)이 나뉘는데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등(等)은 하이데거의 주장(主張)을 완전히(完全히) 받아들인 반면(反面), 칼 바르트와 본회퍼 등(等)은 역(逆)으로 하이데거를 비판(批判)하는 입장(立場)이었다. [2] 이해(理解)하기 쉽게 설명(說明)하면 기독교(基督敎)의 신인(新人) 야훼는 성서(聖書)라는 매개체(媒介體)를 통하여 신(神)의 초월(超越)함 등(等)을 알리지만 인간(人間)들은 각자(各自)의 가치관(價値觀)이나 상황(狀況)에 따라서 같은 구절(句節)이라도 해석(解釋)하면서 받아들이는 뜻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해석(解釋)의 과정(過程)을 최대한(最大限) 올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존재(存在)가 성부(聖父), 예수 그리스도, 성령(聖靈)의 경륜(經綸) 등(等)이며 신(神)은 우리를 구원(救援)하기로 하셨고 실제로(實際로) 그러기 위한 실천(實踐)도 했으니 그러고도 인간(人間)이 뭔 해석(解釋)을 하던지 어떻게 받아들이던지 신(新) 본인(本人)이 이에 대(對)해 간섭(干涉)할 영역(領域)이 아니므로 해석(解釋)을 최대한(最大限) '올바르게' 하는 부분(部分)까지는 돕기로 했지만 인간(人間)이 성경(聖經)의 뜻을 스스로에게 받아들이는 영역(領域)에서부터는 신은 방관(傍觀)하는 입장(立場)이다. [3] 이 두 설(說)은 이해(理解)하는 관점(觀點)이 다르지만 공통적(共通的)으로 '성경(聖經)의 모든 내용(內容)은 흠 하나 없이 완벽(完璧)한 서적(書籍)이다.'는 내용(內容)이다. [4] 어떤 신학이론(神學理論)이나 세계관(世界觀)의 영향(影響)이라기보다는 기독교(基督敎)를 믿었던 로마인들이 다음의 종교(宗敎)들에 융화(融和), 심취(心醉)해있었기 때문이다. [5] 예(例)를 들어, 정통주의자(正統主義者)들은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혼자 1장(章)부터 66장(張)까지 다 썼고, 모세 오경(五經)은 신명기(申命記) 마지막 두 장(張) 빼면 전부(全部) 모세가 썼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은 성경(聖經) 본문(本文)을 칼같이 분석(分析)하여, 이사야서는 셋이서 1-39, 40-55, 56-66장(張)을 나눠서 서로 다른 시대(時代)에 쓴 것이고, (이사야 혼자서로 다른 세 시대(時代)에 나누어 썼다는 주장(主張)도 있다) 창세기(創世記)는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바빌론 포로기(捕虜期)에 기록(記錄)된 E문서(文書)와 유대 왕국(王國) 시기(時期)에 기록(記錄)된 J문서(文書)를 비롯한 서로 다른 네 개(個)의 문서(文書)를 짜깁기한 것이므로, 성경(聖經)은 그다지 믿을 만한 책(冊)이 아니며, 그냥 좀 훌륭한 도덕(道德) 교과서(敎科書)일 뿐 이라고 믿으면서 인간(人間) 이성(理性)을 성경(聖經)보다 우선시(優先視)했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新正統主義者)들은 이사야서는 셋이서 나눠 쓴 것이고 창세기도(創世記度) 네 개(個)의 문서(文書)를 짜깁기한 것은 맞지만, 그런 속에서도 성경(聖經)을 통해서 신(神)의 계시(啓示)를 얻을 수 있으므로, 결과적(結果的)으로 성경(聖經)은 신(神)의 계시(啓示)라고 주장(主張)한다. 간단히(簡單히) 말해, 정통주의(正統主義)가 '정(情)'이고, 자유주의(自由主義)가 '반(半)'이라면,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합(合)'이다. [6]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利害)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平和)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빌립보서 4:7절(節) [7]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며 이 말씀은 세 가지 형태(形態)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기록(記錄)된 말씀인 성경(聖經), 성육신(成肉身)한 말씀인 예수, 그리고 선포(宣布)되는 말씀인 설교(說敎). [8] 장로교(長老敎)는 개혁교회(改革敎會)의 하위(下位) 개념(槪念)이다. 프랑스에서 시작(始作)된 칼뱅의 개혁주의(改革主義)가 칼뱅의 직계(直系) 제자(弟子)인 녹스를 통하여 스코틀랜드에 들어가서 스코틀랜드 특유(特有)의 클랜(Clan) 문화(文化) 속에서 장로정치(長老政治)를 받아들여 현재(現在)의 장로교회(長老敎會)가 완성(完成)되었다.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헝가리 등등(等等) 유럽 대륙(大陸)의 칼뱅주의 교회(敎會)는 개혁교회(改革敎會)라고는 하지만 장로교회(長老敎會)라 하지는 않는다. [9] 미국(美國)의 메인라인 교단(敎團)들과 유럽의 주요(主要) 개신교단(改新敎團)들 [10] 캐나다 연합교회(聯合敎會), 독일(獨逸) 연합교회(聯合敎會), 호주(濠洲) 연합교회(聯合敎會) 등(等) [11] 타교파(他校派)와의 연합(聯合)을 거부(拒否)하고 교단(敎團) 정체성(正體性)을 지키는 교회(敎會)들을 의미(意味)한다. [12] 미국인(美國人)들을 포함(包含)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誤解)하는데 프린스턴 대학교(大學校) 가 아니다. 프린스턴 대학교(大學校)(Princeton University)와 프린스턴 신학교(神學校)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는 법적(法的)으로 서로 다른 학교(學校)이다. 다만 거의 하나의 캠퍼스라고 보아도 될 정도(程度)로 캠퍼스가 딱 붙어있고 Princeton Univ a... 도서관(圖書館) 이용(利用) 등(等) 많은 면(面)에서 밀접(密接)하게 관계(關係)를 맺고 있다. [13] 성공회(聖公會) 신학(神學) 자체(自體)가 굉장히(宏壯히) 다양한 입장(立場)을 폭(幅) 넓게 받아들인다. [14] 평안도(平安道) , 황해도(黃海道) 등(等) 서북(西北) 세력(勢力)과 경기도(京畿道) , 충청도(忠淸道) 등(等) 기호(記號) 지역(地域)+ 함경도(咸鏡道) 출신(出身) 간(間)의 지역(地域), 파벌문제(派閥問題)가 낳은 병(病)크다. 평안도(平安道)의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경쟁(競爭)의 의미(意味)로 경기(競技)의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설립(設立)되면서 본격화(本格化)되었다. [15] 1946년(年) 6월(月) 12일(日) 남한지역(南韓地域) 장로교회(長老敎會) 노회(老獪)들이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 남부총회(南部總會)로 모여 제(第) 27회(回) 총회(總會)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결의(決意)를 취소(取消)하고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 직영(直營)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얼마間) 장로교(長老敎)의 인정(認定)을 받은 정식(正式) 목회자(牧會者) 양성기관(養成機關)은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뿐이었다. [16]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長老敎) 총회(總會)에서 인정(認定)받지 못해 신학교(神學校)가 정식(正式)으로 인가(認可)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長老敎) 주류(主流)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葛藤)은 더욱 심각(深刻)해졌다. [17] 심지어(甚至於) 박형룡은 보고서(報告書)에서 김재준의 주장(主張)이 교회(敎會)를 능욕(凌辱)하는 내용(內容)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長老敎) 총회(總會)가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에 부정적(否定的)인 입장(立場)을 갖게 만들었다. [18] 명분(名分)은 총회(總會) 진행방식(進行方式) 및 새로운 신학교(神學校) 설립(設立)의 불법성(不法性) [19] 1951년(年) 4월(月) 28일(日)에 일어난 일이다.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가 세워진 후(後)인 1952년(年)에 교명(校名)을 바꿨다고 설명(說明)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學校) 사이트에서 제공(提供)하는 연혁(沿革)에는 1951년(年)의 일이라고 명시(明示)하고 있다. [20] 잘 모르는 이들이 있는데, 본인(本人)이 해방신학(解放神學), 여성신학(女性神學), 흑인신학(黑人神學), 생태신학(生態神學), 사신신학(使臣神學), 세속신학(世俗神學)을 선호(選好)한다면 후기(後記)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을 수용(受容)하는 것임을 인지(認知)할 필요(必要)가 있다. [21] 제명(除名) 결의(決意)는 당사자(當事者) 교단(敎團)이었던 예장통합(統合)이 2016년(年)에 철회(撤回)했다. [22] 장로회신학대학교(學校) 총장(總長)을 역임(歷任)했고, 총신대학교(學校) 설립(設立)에 엄청난 기여(寄與)를 하였다. 같은 프린스턴신학대학교(學校)에서 3명(名)의 한국인(韓國人) 신학박사(神學博士)가 배출(輩出)되었는데, 한신(韓信)의 김재준, 통합(統合)의 한경직 , 합동(合同)의 박형룡이 그들이다. [23] 보수주의(保守主義) 장로교(長老敎) 교단(敎壇)인 정통장로교회(正統長老敎會)(OPC)를 만든 사람. [24] 심광섭 - 공감(共感)과 대화(對話)의 신학(神學) 58.p [25] 물론(勿論)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00년대(年代) 이후(以後)로 전통주(傳統酒)의 교회(敎會) 내부(內部)에서 몇몇 계파(系派)가 적극적(積極的) 사회(社會) 참여(參與)를 주장(主張)하면서 각종(各種) 그룹과 선교(宣敎) 단체(團體)들을 만들고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계열(系列)과 마찬가지로 적극적(積極的)인 사회(社會) 참여(參與)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過程)에서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와 복음주의(福音主義)가 연대(連帶)하는 경우(境遇)도 많다. [26] 단(但), 전체(全體)가 신정통주의자(新正統主義者)인 것은 아니다. 예장합동(合同) 과 분열(分裂) 이후(以後) 장로회신학대학(長老會神學大學) 총장(總長)으로 초빙(招聘)된 이종성(李鍾成) 박사(博士)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이식(移植)하겠다고 통합총회(統合總會)에 공식(公式) 답변(答辯)한 후(後) 유입(流入)되었다. 단(單), 이종성(李鍾成) 박사(博士) 본인(本人)은 통전적(通典的) 신학(神學)을 주장(主張)하며 정통주의(正統主義) 신학(神學)과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신학(神學)의 장점(長點)을 아우르는 방향(方向)을 제시(提示)했다. [27] 김명용 교수(敎授)도 바르트주의(主義)가 아닌 온신학(神學)이라 하여 주요(主要) 신학(神學)의 장점(長點)을 모으는 신학(神學)을 추구(追求)한다. [28] 하지만 현재(現在) 그렇다는 얘기지, 이쪽은 원래(元來) 논란(論難)의 인물(人物)인 박형룡 목사(牧師)도 총장(總長)으로 있었을 만큼 보수적(保守的)인 필드였고, 기독교장로회(基督敎長老會)와 같은 전적(全的)인 신정통주의자(新正統主義者)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29] 카를 바르트가 스위스 사민당에 가입(加入)한 것이 1915년경(年頃), 독일(獨逸) 사민당에 가입(加入)한 건 1931년(年) 5월(月)의 일로, 이는 바르트 자신(自身)의 개인적(個人的) 경험(經驗)(그가 목회(牧會)했던 지역(地域)에서 노동자(勞動者)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직접(直接) 목격(目擊)함)도 있고, 독일(獨逸)쪽의 경우(境遇)는 극우(極右) 군국주의(軍國主義) 경향(傾向)을 띄던 국가인민당(國家人民黨)이나 나치당, 대놓고 국가(國家) 무신론(無神論)을 주창(主唱)한 독일(獨逸) 공산당(共産黨)보다는 '그나마' 적당히(適當히)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이면서도 기독교(基督敎) 문화(文化)에 반감(反感)이 덜해보였던 사민당을 선택(選擇)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0] 이런 비판(批判)에 대(對)하여 니묄러는 해당(該當) 항목(項目)에도 나오듯이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래도 인간(人間)에게 얼마간(얼마間)의 자유(自由)를 보장(保障)하지만, 자본주의(資本主義)는 인간(人間)을 완전히(完全히) 소유(所有)(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 표현(表現)으로는 '착취(搾取)')하려고 한다'고 대응(對應)했다. 사실(事實) 정통주의(正統主義) 진영(陣營)에서 반정부(反政府), 빨갱이 몰이를 할 때 현재(現在)도 돌아오는 대답(對答)이기도 하다. [31] #1 #2 , #3 추기경(樞機卿). 가톨릭에서 20세기(世紀)의 위대(偉大)한 신학자(神學者) 중(中) 한 명(名)으로 꼽힌다. 본래(本來) 예수회 출신(出身)이었으나 재속(在俗) 수도회(修道會)인 ‘요한 공동체(共同體) (Johannesgemeinschaft) ’를 돌보기 위해 탈퇴(脫退)했다. 학창시절(學窓時節) 스위스에서 중년(中年)의 칼 바르트를 만나 깊은 대화(對話)를 통해 영향(影響)을 받았고 최초(最初)로 칼 바르트에 대(對)한 연구서(硏究書)를 쓴 인물(人物)이다. 이후(以後)에 초대교회(初代敎會)의 교부(敎父)들의 사상(思想)을 연구(硏究)하여 초대(初代) 기독교(基督敎)에서부터 간직해왔던 신앙(信仰)의 미적(美的) 감각(感覺)과 체험(體驗) 전통(傳統)을 부활시켜 《하느님의 영광(榮光)》이라는 대작(大作)을 서술(敍述)하였다. 제(第) 2차(次) 바티칸 공의회(公議會)를 이끈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間)과는 친구(親舊)사이이다. 그는 개신교(改新敎)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神學)에서 존재(存在)의 유비(劉備)를 거부(拒否)한 것과 가톨릭의 신(新)스콜라주의(注意)를 모두 비판(批判)하고 오리게네스 의 영적감각론(靈的感覺論)을 재해석(再解釋)하여 독자적(獨自的)인 영역(領域)을 개척(開拓)한 인물(人物)이다. 그리고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를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군 폭탄(爆彈)"이라 묘사(描寫)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여담(餘談)으로 발타사르는 사적(私的)으로는 칼 바르트와 매우 친(親)했고, 요제프 라칭거 ( 베네딕토 16세(歲) )는 바르트에 대(對)한 존경심(尊敬心)을 표한 바 있다.("저는 비록 바르트 교수(敎授)님을 비판(批判)하기도 했지만, 쇤겐 신부(神父)님에 의(依)해서 이미 그분의 팬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성장(成長)하게 한 신학(神學)의 스승 가운데 한 명(名)입니다.") 바르트 역시(亦是)도 학생(學生)들에게 라칭거의 책(冊)을 추천(推薦)했으며, 이 셋은 여행(旅行)도 함께 다닌 사이다. 자세(仔細)한건 베네딕토 16세(歲) 문서(文書) 참조(參照). [32] 당시(當時) 독일(獨逸)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神學) 3인방(人坊)으로 통하던 아돌프 폰 하(下)르낙(樂), 빌헬름 헤르만, 마르틴 라데와 철학자(哲學者)인 루돌프 오이켄을 말한다. 바르트는 이들이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차원(次元)에서 이성(理性)으로, 대화(對話)로 풀자며 전쟁(戰爭) 서명(署名)을 반대(反對)할 것이라 예상(豫想)했었다. [33] 여기서 신(神)들의 황혼(黃昏) 이란, 북유럽(北유럽) 신화(神話) 의 신(神)들이 몰락(沒落)하는 라그나로크 를 의미한다. 개신교(改新敎) 신학자(神學者)였던 칼 바르트가 기독교(基督敎) 성경(聖經)의 요한계시록 도 아닌 라그나(羅)로크를 인용(引用)했다는 점(點)에서 그의 정신적(精神的) 충격(衝擊)이 얼머나 컸을지 상상(想像)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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