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韓國史)
에서 가장 오래된 쇠뇌 관련(關聯) 유물(遺物)은
청동기(靑銅器) 시대(時代)
출토(出土)된 단발식(單發式) 쇠뇌의 방아틀 뭉치이다. 이 외(外)에 고분벽화(古墳壁畫)의 그림도 남아 있다.
신라(新羅)
시대(時代)에는
구진천(仇珍川)
이 개발(開發)한, 천(千) 걸음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쇠뇌인(人) 천보(千步)노(千步弩)가 있었다고 한다.
[1]
또한 신라(新羅)는 아예 쇠뇌만 다루는 전문부대(專門部隊)인 노당(弩幢)(弩幢)을 따로 만들 정도(程度)였다. 662년(年)에 평양(平壤)을 포위(包圍)했다가 군량(軍糧)이 끊어진
소정방(蘇定方)
에게 군량(軍糧)을 전(傳)해주고 오던
김유신
이 도중(途中)에 호로하(胡虜下)(임진강(臨津江))에서 고구려군(高句麗軍)의 기습(奇襲)을 받았을 때
수많은 쇠뇌를 한 번(番)에 쏘는
전법(戰法)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을 거꾸로 궤멸(潰滅)시키는 전과(戰果)를 세웠다는 기록(記錄)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남아있다.
신당서(新唐書)
(新唐書)에는 신라(新羅)가 관문(關門)에 항상(恒常) 노사(勞使)(弩士) 수천(數千) 명(名)을 주둔(駐屯)시켜 지킨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당나라(唐나라)는 노(櫓)를 신라(新羅)를 대표(代表)하는 무기(武器)로 봤던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唐나라)
에서는 천(千)보노를 만드는 장인(匠人)
구진천(仇珍川)
을 끌고 갔다는 기록(記錄)도 있다.
[2]
당시(當時)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
멸망(滅亡) 후(後)
나당전쟁(羅唐戰爭)
개전(開戰)을 몰래 준비(準備)하는 중(中)이었기에 당나라(唐나라)를 안심(安心)시키기 위해 순순히(順順히) 따랐다. 다만 구진천(仇珍川)은 일부러 재료(材料)가 중국(中國) 것은 안 좋다느니, 신라(新羅)에서 배에 실어서 갖고 온 재료(材料)가 습기(濕氣)가 차서 못 쓴다느니 핑계를 대면서
당고종(唐高宗)
의 위협(威脅)에도 불구(不拘)하고 끝내 제대로 된 천보노를 만들지 않았다. 처음 만든 것은 30보(報) 남짓, 신라(新羅)에서 목재(木材)를 가져와 만든 것은 60보(報) 남짓 날아갔다고.
[3]
고려시대(高麗時代)
에도 수질(水質)노, 수질구궁노(水質九弓弩), 팔우노 등(等) 다양(多樣)한 쇠뇌들을 제작(製作)해서 사용(使用)했다. 북계(北髻)에 주둔(駐屯)했던 주진군(州鎭軍) 중(中)에는 쇠뇌를 다루는 노병(老兵)이 좌군(左軍)에 편성(編成)되어 주둔(駐屯)했으며
별무반(別武班)
편성(編成) 당시(當時) 쇠뇌를 다루는 정노군이란 부대(部隊)를 신설(新設)하기도 했다. 예종(睿宗)이 정예부대(精銳部隊)인 정노반(正路盤)을 사열(査閱)했다는 기록(記錄)이 있는 등(等) 고려시대(高麗時代)에도 쇠뇌는 널리 사용(使用)되었다. 하지만 원간섭기(干涉期)를 거치면서 쇠뇌 제조법(製造法)이 실전(失傳)되었고,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들어서면서 쇠뇌를 만들 줄 아는 이가 없어 왕궁(王宮)에 있는 도자기(陶瓷器)에 그려진 그림을 참조(參照)해서 쇠뇌를 만드는 지경(地境)까지 갔었다고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52권(卷), 세종(世宗) 13년(年) 5월(月) 17일(日) 경진(競進) 7번째기사(番째記事)/1431년(年) 명(名) 선덕(宣德) 6년(年)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길주(吉州) 사람 주천경(朱天景)이(李) 스스로 노궁(老窮)(弩弓)과
상양포(上洋砲)(相陽砲)
의 법(法)을 자세히(仔細히) 안다고 말하니, 본인(本人)을 군기감(軍器監)(軍器監)에 >보내어 작게 모양(模樣)을 만들어서 시험(試驗)하게 하시기를 청(請)하옵니다."
하였다. 내장(內臟)(內裝)에 마침 제용(齊用) 부정(否定)(濟用副正) 구강(口腔)(具綱)이(李) 바친 자청준(自請準)(磁靑樽)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준(樽)의 배에 그린 그림에는 손빈(孫臏)(孫?) 이 나무를 깎아 흰 곳에 쓰기를, 방연(龐涓) 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고 하였는데, 연이(軟餌) 와서 보자, 1만(萬)의 노궁(老窮)(弩弓)이(李) 함께 발사(發射)하는 모양(模樣)을 그렸다. 군기(軍紀) 제조(製造) 총제(冢弟) 이천(利川)(李?)에게 내어 보이고, 인해 전교(傳敎)하기를, "이 노궁(老窮)의 제도(制度)를 살펴보고 천경의 말을 참작(參酌)하여 만들도록 하라."하였다.
문제(問題)의 실록(實錄) 기사(記事). 노궁(老窮)(쇠뇌)가 그려진 준(樽)이라는 것은 술항아리(缸아리)다.
이때부터는 군(軍)의 주력(主力) 투사무기(透寫武器)가
국궁(鞠躬)
, 조선(朝鮮) 중기(中期) 이후(以後)로는
화승총(火繩銃)
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민간(民間)에서는 쓰였는지, 성종(成宗) 때에는 쇠뇌로 호랑이(虎狼이)
40마리
를 잡았다는 용자가 왕(王)에게 포상(褒賞)을 받기도 했다. 또 왜변(倭變)과 여진족(女眞族)의 침공(侵攻)에서 쇠뇌는 상당히(相當히) 자주 등장(登場)하며 조선(朝鮮) 초기(初期)에도 북방(北方)에 대(對)한 방어(防禦)에 쇠뇌의 가치(價値)를 높게 보는 서술(敍述)이 나타난다. 성종대(成宗代)엔 아예 새로 만들어서 다시 꽤 사용(使用)되었다고.
일반적(一般的)으로, 한국(韓國)에서는 탄력(彈力)을 강화(强化)한
국궁(鞠躬)
에다가 기계틀(機械틀)을 달아서 완성(完成)했다. 보통(普通) 은 활대가 1M를 넘기거나, 합성(合成)으로 강화(强化)한 쇠뇌를 주력(主力)으로 취급(取扱)했다. 활대가 1m가 안되는 작은 쇠뇌는 보통(普通)
연노(涓奴)
로 만들어서 독(毒)을 바르거나 상인(商人)들의 호신용(護身用)으로 사용(使用)하거나 사냥용(用) 덫으로 활용(活用)하거나 했다. 활길이가 2M에 달(達)하면, 강노로 취급(取扱)하여 개인용(個人用)
발리스타
에 가깝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