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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국민회의 - 나무위키

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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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1995.12.6.~1997.11.7.)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2000.1.20.~2002.5.6.)
(2003.2.25.~2003.9.29.)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흡수합당(吸收合黨))
국민신당
(흡수합당(吸收合黨))
통합(統合)민주당
(개별(個別) 합류(合流))
무당파(黨派)국민연합
(개별(個別) 합류(合流))
새정치국민회의
한문(漢文) 명칭(名稱)
-政治國民會議
영문(英文) 명칭(名稱)
National Congress for New Politics
등록(登錄) 약칭(略稱)
국민회의
창당일(創黨日)
해산일(解産日)
선행(先行) 조직(組織)
민주당(1991년) 로고타입

( 김대중(金大中) 의 정계복귀(政界復歸)로 신당(新黨) 창당(創黨)을 위해 민주당(民主黨) 내(內) 동교동계(系) 정치인(政治人)들이 탈당(脫黨))
통합(統合)한 정당(正當)
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
( 1998년(年) 9월(月) 28일(日) 흡수합당(吸收合黨)) [2]
주소(住所)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 [3]
이만섭 / 7선(線) (6·7·10-12·14·15대(代))
원내총무(院內總務)
박상천 / 3선(選) (13-15대(代))
사무총장(事務總長)
한화갑 / 재선(再選) (14·15대(代))
정책위의장(政策委議長)
임채정 / 재선(再選) (14·15대(代))
대통령(大統領)/총재(總裁)
김대중(金大中) [4] / 제(第)15대(代) (1998.2.25.~2000.1.20.)
의석(議席) 수(數)
103석(席) / 298석(席)
당(黨) 색(色)
녹색(綠色) (#009A44)
스펙트럼
공식(公式) 사이트
2000년(年) 1월(月) 20일(日) 기준(基準)

1 . 본문(本文) 2 . 역사(歷史)
2.1 . 창당(創黨) 2.2 . 제(第)15대(代) 총선(總選) 부진(不振) 2.3 . DJP연합(聯合) 과 대선(大選) 정국(政局) 2.4 . 재야(在野) 운동가(運動家) 영입(迎入) 2.5 .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대통합(大統合) 2.6 . 김대중 대통령(大統領) 당선(當選) - 여당(與黨) '국민회의'
3 . 성향(性向)
3.1 . 당명(黨名) 3.2 . 심벌 3.3 . 강령
4 .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중시조(中始祖) 5 . 역대(歷代) 지도부(指導部)
5.1 . 총재(總裁) 5.2 . 원내총무(院內總務)
6 . 출신(出身) 대통령(大統領) 7 .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7.1 .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7.2 .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7.3 . 지방선거(地方選擧) 7.4 .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8 . 당가(擔架) 9 . 관련(關聯) 문서(文書) 10 . 둘러보기

1. 본문(本文)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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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年) 9월(月) 5일(日) , 당시(當時) 김대중(金大中) 의 주도(主導) 아래 민주당(民主黨) 에서 분당(分黨)하여 창당(創黨)한 정당(政黨)으로, 약칭(略稱) 국민회의 로 부른다. [5] 당초(當初) 중도우파(中道右派) 정당(政黨)이었으나 1998년(年) 이후(以後)로는 재야운동가(在野運動家)와 노동운동가(勞動運動家)들이 대거(大擧) 영입(迎入)되면서 진보주의(進步主義) 성향(性向)도 함께 띄기 시작(始作)했다.

1987년(年) 11월(月) 12일(日) 창당(創黨)한 평화(平和)민주당 의 구성원(構成員)과 그 해 12월(月)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때 김대중 후보(候補)에 대(對)해 비판적(批判的) 지지(支持)의 입장(立場)을 취(取)했던 진보적(進步的) 재야(在野) 인사(人士)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창당(創黨)하였는데 그 중(中) 이기택 등(等) 통합(統合)민주당의 당권파(黨權派)는 제외(除外)되었다.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의 법적(法的) 전신(前身) 정당(政黨) 중(中)에 가장 최초(最初)로 창당(創黨)된 정당(政黨)이다.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중시조(中始祖) 라고 부를 수 있는 정당(政黨)이다.

' ~당(黨)'으로 끝나지 않고 대통령(大統領) 당선자(當選者)를 배출(排出)한 정당(政黨)이기도 하다. [6] [7]

2. 역사(歷史) [편집(編輯)]

2.1. 창당(創黨) [편집(編輯)]

1992년(年) 12월(月) 제(第)14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의 패배(敗北)를 계기(契機)로 정계은퇴(政界隱退)를 선언(宣言)했던 김대중이 1995년(年) 7월(月) 18일(日) 정계(政界) 복귀(復歸)를 선언(宣言)하고 자신(自身)의 계파(系派)를 중심(中心)으로 민주당(民主黨) 을 탈당(脫黨)한 뒤 창당(創黨)한 정당(政黨)으로서, 창당(創黨)과 동시(同時)에 동교동계(系)('내외문제(內外問題) 연구회(硏究會)(최대(最大) 57석(席))')를 중심(中心)으로 원내(院內) 의석(議席) 53석(席)을 차지해 제(第)1야당(野黨)이 됨으로써, 정계(政界)는 1여(餘) 3야(野)(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 통합(統合)민주당(1995년(年)) )의 구도(構圖)로 재편(再編)되었다.

당시(當時) 민주당은 PK를 기반(基盤)으로 하던 비주류(非主流)( 꼬마민주당 출신(出身))인 이기택 총재(總裁)가 이끌고 있었다. 이기택 총재(總裁)는 김대중 전(前) 총재(總裁)는 2번(番) 떨어졌기에 1997년(年) 대선(大選)은 자신(自身)의 차례(次例)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정계은퇴(政界隱退) 번복도(飜覆度) 마뜩해 하지 않았다. 1992년(年) 대선(大選)에서 3당(黨) 합당(合黨) 에 동참(同參)하지 않고 김대중을 묵묵히(默默히) 도운 입장(立場)에선 당연(當然)했던 심정(心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5년(年) 첫 민선(民選) 지방선거(地方選擧)로 확인(確認) 한 것은 DJ의 귀환(歸還)과 JP의 부활(復活)이었으며, 특히(特히) 김대중이 공천(公薦)한 조순(趙淳) 이 당선(當選)되고 자신(自身)이 공천(公薦)한 장경우(張慶宇) 노무현(盧武鉉) 이 낙선(落選)한 것은 결정적(決定的)이었다. 이미 지선(地選) 공천(公薦) 과정(過程)에서도 이기택 총재(總裁)는 막후(幕後) 실력자(實力者) 격(格)인 김대중과 여러차례(次例) 갈등(葛藤)했다. 김대중(金大中) 입장(立場)에서도 다음해 총선(總選) 공천권(公薦權)을 놓고 '실력행사(實力行使)'는 가능(可能)했겠지만, 이미 경기도(京畿道) 지사(知事) 공천(公薦) 과정(過程)에서도 각목사태(角木事態)가 벌어지는 등(等) 큰 잡음(雜音)이 불가피(不可避)한 상황(狀況)이었다. 신민당(新民黨) 의 역사(歷史)가 있는 마포당사(麻布黨舍)까지 남겨두고 탈당(脫黨)을 불사(不辭)한 것은 그런 이유(理由)였다.

1995년(年) 7월(月) 28일(日) 당(黨) 대변인(代辯人)은 신당(新黨)의 당명(黨名)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決定)했다고 발표(發表)했다. 앞서 김대중은 "당(黨)(黨)이라는 명칭(名稱)을 쓰지 않은 예(例)로 인도(印度)의 국민(國民)회의가 있다"고 말하는 등(等) 국민회의 라는 명칭(名稱)에 애착(愛着)을 보였으며, 유신정권(維新政權) 시기(時期)에는 '민주회복(民主回復)국민회의'를 결성(結成)해 민주화(民主化) 운동(運動)을 전개(展開)한 적이 있다. 언급(言及)된 인도(印度) 국민(國民)회의 는 인도(引渡)의 자와할랄 네루 가 이끌던 중(中)도 민족주의(民族主義) 정당(政黨)이다. 당(黨) 관계자(關係者)는 "국민회의라는 명칭(名稱)은 여러 의견(意見)을 포용(包容)해 국민적(國民的) 합의(合意)를 이끌어낸다는 이미지를 주고, 당(黨)이라는 명칭(名稱)보다 민주적(民主的)이고 국민적(國民的)인 이미지를 주기때문에 선택(選擇)했다"고 설명(說明)했다. 신당(新黨) 명칭(名稱) 「새정치국민회의」로

김영삼의 "신(新)"한국당(韓國黨) , 1992년(年) 대선(大選)에서의 "'한국병(韓國病)'의 치료사(治療師)"라는 이미지와 대비(對比)되는 "새"라는 조어(造語)를 붙인 정당(正當). 일단(一旦) 평화(平和)민주당 의 분위기(雰圍氣)를 빼는데는 성공(成功)했다는 평(坪)이 당시(當時)에 있었다. [8]

국민회의는 대통령(大統領) 중심제(中心制) (= 의원(議員) 내각제(內閣制) 반대(反對))와 중소기업(中小企業) 의 육성(育成), 여성부(女聲部) 신설(新設),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의 민주질서보호법(民主秩序保護法)으로의 대체(大體), 남북연합(南北聯合) 통일(統一) 방안(方案) 등(等)을 강령(綱領)으로 삼고, 중산층(中産層) 과 서민(庶民) 대중(大衆)을 위한 국민정당(國民政黨)을 표방(標榜)하면서, 중산층(中産層)의 비판(批判)을 무마(撫摩)하기 위한 노선(路線)을 채택(採擇)하였다. 동시(同時)에 이는 1990년대(年代) 후반(後半) 대두(擡頭)된 영국(英國) 노동당(勞動黨) 토니 블레어 미국(美國) 민주당(民主黨) 빌 클린턴 의 "신진보주의(新進步注意)(신개혁주의(新改革主義))" 노선(路線)(소위(所謂) 제(第)3의 길 )의 수용(受容)이기도 했다. 대놓고 비례대표(比例代表) 1번(番)을 사학(私學) 재단(財團) 이사장(理事長)으로 했을 정도(程度). 같은 시기(時期) 신한국당 은 개혁(改革)을 앞세우며 혁신공천(革新公薦)을 내세웠다. 사실(事實) 이때는 양당(兩黨)이 모두 중도화(中道火) 되었던 시기(時期). 어찌보면 좋은 현상(現象)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現象)은 철새 국회의원(國會議員)의 대량(大量) 생산(生産) 원인(原因)이 되었으며, 반대(反對) 급부(給付)로 양(兩) 진영(陣營) 모두 비주류(非主流)가 선명(鮮明) 노선(路線)을 주창(主唱)하면서 갈라져나오는 원인(原因)이 되기도 했다. [9]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몇 년(年) 뒤 대선(大選) 국면(局面)에서 상대(相對) 진영(陣營)과 손을 맞잡게 된다. [10]

2.2. 제(第)15대(代) 총선(總選) 부진(不振) [편집(編輯)]

창당(創黨) 다음해 치러진 1996년(年)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총선거(總選擧) 에서 국민(國民)회의는 야권(野圈) 분열(分裂)로 말미암아 그간(그間) 강세지역(强勢地域)으로 손꼽혔던 수도권(首都圈)에서 부진(不振)하며 79석(席)으로 기대치(期待値)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結果)를 얻었다. DJ 개인(個人)은 자신(自身)이 전국구(全國區) 의원(議員)이 되는데 고작 1번(番) 차이(差異)로 실패(失敗)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의석(議席)이 14석(席)이 늘었고, 여당(與黨)은 26석(席)이 줄었다" [11] 라고 위안(慰安)했지만, 사실상(事實上) 100석(席) 이상(異常)을 염두(念頭)에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패(慘敗)가 맞았다. 반면(反面) 여당(與黨)인 신한국당 은 대통령(大統領)의 임기(任期) 후반(後半)임에도 개혁공천(改革公薦)과 야권분열(野圈分裂) 덕분(德分)에 (예상(豫想)인 155+a보다는 저조(低調)했으나) 139명(名)이나 당선(當選)되었으며 [12] , 기어이(期於이) 무소속(無所屬)과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의원(議員) 4명(名)을 모아 157석(席)으로 과반(過半)을 달성(達成)하고 만다. [13]

이런 패배(敗北)에는 민주당계(系) 야권(野圈)의 분열(分裂)이 원인(原因)으로 지적(指摘)되었다. 실제로(實際로)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統合)민주당 의 표분산(票分散)으로 신한국당이 어부지리(漁夫之利)로 당선(當選)된 지역구(地域區)가 30군데가 넘었으며, 특히(特히) 서울 강북(江北)과 경기(京畿) 남부(南部) 등(等) 기존(旣存)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이 강세(强勢)를 보이던 수도권(首都圈)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 [14] [15] 총선(總選) 결과(結果) 민주당계(系) 야권(野圈) 전체(全體) 의석(議席)은 98~95석(席)에서 94석(席)(79+15)으로 오히려 줄었다. 이 모든 게 김대중의 "대통령병(大統領病)" 때문이라며 은퇴(隱退) 번복(飜覆)과 분당에 대(對)한 비판(批判)이 커졌다.

더욱이 이 해 말(末)에는 신한국당의 '제(第)3자(者) 개입(介入)'을 막는 등(等)의 내용(內容)을 추가(追加)한 크리스마스 노동법(勞動法) 날치기 가 일어나면서 아쉬움이 커졌다. 이 상황(狀況)에서도 국민(國民)회의는 강경(强勁)한 장외투쟁(場外鬪爭)을 하지 않음으로써 진보(進步)에겐 불신(不信)을 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표심(票心) 달래기 행보(行步)를 지속(持續)한다.

한편(한便)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은 충청(忠淸), TK, 강원(講院)에서 "녹색(綠色) 바람"으로 2배(倍)로 팽창(膨脹), 25석(席)을 늘려 50석(席)으로 강력(强力)한 제(第)3당(黨)이 되었다. 이런 형국(形局)은 DJ가 자민련의 김종필(金鍾泌) 총재(總裁)와 필연적(必然的)으로 손을 잡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過程)에서 의원(議員)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에 동의(同意)하게 된다. 물론(勿論) 결과(結果)는 아시발(亞始發)꿈

이런 상황(狀況)에서 DJP연합(聯合) 이 기획(企劃)되었는데, DJP연합(聯合)은 3당(黨) 합당(合黨)에 반대(反對)했던 꼬마민주당 출신(出身)들 입장(立場)에서는 제(第)2의 억지 정계개편(政界改編)이었다. 실지(實地)로 1997년(年) 대선(大選)이 끝날 때까지 DJP를 반대(反對)하는 맥락(脈絡)의 '제(第)3후보론(候補論)'은 계속(繼續) 상존(常存)했으며, 극단적(極端的)인 경우(境遇)로는 DJP에 반대(反對)하기 위해 이회창(李會昌) 을 지지(支持)하는 세력(勢力)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김대중이 공천(公薦)과 선거운동(選擧運動)에 힘썼던 조순(趙淳) 서울시장(市長)이었다. 조순(趙淳)은 1997년(年) 9월(月) 9일(日) 대선(大選) 출마(出馬)를 선언(宣言)하고 통합(統合)민주당 대선(大選) 후보(候補)가 되었는데, 이후(以後) 지지율(支持率)이 하락세(下落勢)를 보이자 '3김(金) 정치(政治) 청산(淸算)'을 명분(名分)으로 내세우며 이회창 후보(候補)와 단일화(單一化)를 선언(宣言)하고 사퇴(辭退)했으며, 이어 통합(統合)민주당 잔류파(殘留派)를 이끌고 신한국당 과 합당(合當)해 한나라당(한나라黨) 을 창당(創黨)했다.

2.3. DJP연합(聯合) 과 대선(大選) 정국(政局) [편집(編輯)]

대선(大選) 초기(初期)부터 DJP연합(聯合) 을 바탕으로 줄곳 1위(位)로 앞서가던 DJ였다. 한나라당의 후보(候補)들은 대선(大選) 경선(競選)에서 박찬종(朴燦鍾) , 이인제(李仁濟) 를 필두(筆頭)로 "9룡(龍)"이랄 정도(程度)로 각축(角逐)을 벌였으며, 결국(結局) 허주 김윤환 이회창(李會昌) 옹립(擁立)에 따라 이인제가 패배(敗北)했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兵役) 의혹(疑惑)이 불거지면서 [16] 이회창의 지지율(支持率)이 급락(急落)하자, 이인제(李仁濟) 가 전격적(電擊的)으로 신한국당을 탈당(脫黨)해서 국민신당 을 창당(創黨)하고 독자적(獨自的) 대선출마(大選出馬)를 선언(宣言)한다. 보수(保守) 성향(性向)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出馬)하면서, DJ 측(側)은 더더욱 호재(好材) 를 맞게 되었다. 거기에 1997년(年) 외환(外換) 위기(危機) 가 겹치면서 문민정부(文民政府) 에 대(對)한 지지(支持)는 나락(那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회창의 끈질긴 추격(追擊)은 계속(繼續)되었다. 1997년(年) 10월(月), 총선(總選) 참패(慘敗) 후(後) 살 길을 도모(圖謀)하던 조순(趙淳) 의 통합(統合)민주당(1995년(年))과 합당(合黨)하여 한나라당(한나라黨) 을 창당(創黨)하고, "이인제(李仁濟) 뽑으면 DJ가 된다"는 논리(論理)로 이인제의 지지율(支持率)을 계속(繼續) 빼왔다. 이회창 후보(候補)는 기어이(期於이) 1달 전(前) 이인제 후보(候補)의 지지율(支持率)을 빼앗으며 2위(位)를 탈환(奪還)했지만, 추격전(追擊戰) 양상(樣相)이 너무 늦게 시작(始作)되어 결국(結局) 2위(位)로 낙선(落選)했다.

결국(結局) 김대중은 39만표(萬票)(1.6%) 차(車)로 대선(大選) 4수(手)만에 간신히(艱辛히) 당선(當選)되었다. 이 승리(勝利)는 기존(旣存) 야당(野黨) 고정표(固定票)+DJP연합(聯合)에 따른 충청도(忠淸道) 표(表)와 일부(一部) 중도표(中道票)+이인제 분열(分裂) 효과(效果)+경제위기(經濟危機)에 따른 정권교체(政權交替) 열망(熱望)+ 권영길 ( 국민승리(國民勝利)21 ) 후보(候補)와의 연대(連帶)를 차단(遮斷)함으로서 얻은 중도표(中道票) [17] +권영길에서 이탈(離脫)한 '비판적(批判的) 지지(支持)'의 진보표(進步票)+" 병풍(屛風) "으로 인한 군복무(軍服務) 병사(兵士)들의 지지(支持)를 누룽지 긁듯 싹싹 긁어 모아 얻은 아슬아슬한 승리(勝利)였다는 평(評)이 많다. 거꾸로 말하면, 이 중(中) 단(單) 한 가지라도 빠졌다면 정권(政權) 교체(交替)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大選) 1년(年) 전(前)부터 여론조사(輿論調査)에서 근소(僅少)하게 계속(繼續) 대선후보(大選候補) 1위(位)를 유지(維持)했으며, 1위(位)에 대(對)한 밴드웨건 효과(效果) 등(等)과 조순(趙淳) 등(等) 반(反)DJ 민주계(系)가 모조리 3김정치(金政治)와 정치공학(政治工學)에 반대(反對)한다는 논리(論理)로 여당(與黨)에 참여(參與)하는 등(等)의 사례(事例)도 많았다는 점(點)에서 "김대중이 신승(辛勝)한 게 아니라 이회창이 석패(惜敗)했다"라는 시각(視角)도 있다.

여하간(如何間) 이 선거(選擧)는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男子)", "New 김대중(金大中)"을 내세웠던 1992년(年) 14대(代) 대선(大選) 과 달리, 1996년(年)부터 밀기 시작(始作)했던 "준비(準備)된 대통령(大統領)" 슬로건을 기반(基盤)으로 한 안정(安定) 전략(戰略)의 승리(勝利)였다. 대표적(代表的)인 광고(廣告)가 DJ DOC 의 노래를 패러디한 DJ와 춤을 인데, 지금(只今)도 노무현(盧武鉉) 의 상록수 기타 연주(演奏), 이명박(李明博) 국밥 먹방(먹放) 과 함께 가장 성공적(成功的)인 대선(大選) 광고(廣告) 중(中) 하나로 꼽힌다. 참고(參考)로 DJ의 바로 다음 대통령(大統領)이 되는 노무현이 직접(直接) 등장(登場)하고, [18] 2002 FIFA 월드컵 한국(韓國)·일본(日本) [19] 을 연상(聯想)하는 장면(場面)이 나오기에 "5년(年) 후(後)를 예언(豫言)한 광고(廣告)"라는 드립도(度) 있다.

"행복(幸福)한 가정(家庭), 안정(安定)된 사회(社會), 강력(强力)한 국가(國家)!" 라는 아무리 봐도 보수적(保守的)이고 여당(與黨)스러운 선거(選擧) 구호(口號) [20] 도 제대로 먹혔다. 한술 더 떠 광고(廣告)에서 김대중은 젊은 층(層)들에게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정권교체(政權交替)에 대(對)해서는 일절(一切) 언급(言及)하지 않고, 자신(自身)은 준비(準備)되어 있으니 꼭 한번(番) 기회(機會)를 달라는 식(式)으로 접근(接近)한다. 이른바 '구호(救護)(프레임)의 연성화(軟性化)' 전략(戰略)이었던 것. 또한 DJP 연합(聯合) 강조(强調)를 위해 김종필(金鍾泌) 박태준 등(等) 자민련의 보수(保守) 인사(人士)들도 여러 차례(次例) 등장(登場)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新世代的) 감각(感覺)의 원곡, 당(黨) 소속(所屬) 연예인(演藝人)( 정한용 ) [21] 의 등장(登場) 등(等). 가히(可히) 가장 모범적(模範的)이고 집약적(集約的)인 선거(選擧) 광고(廣告)랄까?

반면(反面) 이회창이 내걸었던 선거(選擧) 구호(口號)는 "깨끗한 정치(政治), 튼튼한 경제(經濟)" "3김(金) 정치(政治) 해소(解消)"였는데, 아무리 봐도 진보(進步) 성향(性向)의 야당(野黨)에게나 어울릴 법한 구호(口號)를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처음 실시(實施)됐던 TV 토론(討論) 역시(亦是) DJ의 지지율(支持率)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2.4. 재야(在野) 운동가(運動家) 영입(迎入) [편집(編輯)]

1996년(年) 김대중(金大中) 총재(總裁)가 젊은 정치인(政治人) 영입(迎入)을 주장(主張)하였고 이에 따라서 새정치국민회의 에 민주화운동가(民主化運動家), 노동운동가(勞動運動家) 등(等) 재야운동가(在野運動家)들이 대거(大擧) 영입(迎入)되었다. [22] 김근태 가 다수(多數)의 재야민주화운동가(在野民主化運動家)들을 이끌고 창당(創黨)에 동참(同參)하였고, 오영식 , 임종석(任鍾晳) , 우상호(禹相虎) , 송영길(宋永吉) [23] , 이인영(李仁榮) 등(等) 386 학생운동권(學生運動圈) 출신(出身)들이 조직적(組織的)으로 참여(參與)하였다. 노동운동가(勞動運動家) 출신(出身)인 심재권 , 신기남(辛基南) 등(等)도 입당(入黨)하였다.

2.5.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대통합(大統合) [편집(編輯)]

한나라당(한나라黨) 에서 탈당(脫黨)하거나 신한국당 과의 통합(統合)을 반대(反對)하여 통합(統合)민주당 에서 탈당(脫黨)한 인사(人士)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대거(大擧) 합류(合流)했으며, 이인제(李仁濟) 가 주도(主導)한 국민신당 등(等)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合流)하게 되었고 그 결과(結果) 범민주당계(界) 정당(政黨)의 대통합(大統合)이 이뤄지게 되었다.

2.6. 김대중 대통령(大統領) 당선(當選) - 여당(與黨) '국민회의' [편집(編輯)]

그렇게 1997년(年) 12월(月) 18일(日), 제(第)15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서 김대중 후보(候補)가 40.3%의 득표율(得票率)로 당선(當選)되면서 헌정(憲政) 사상(史上) 처음으로 수평적(水平的)이고 평화적(平和的)인 정권교체(政權交替)를 이룩하였고, 1998년(年) 2월(月) 25일(日) 김대중 대통령(大統領)이 공식(公式) 취임(就任)하면서 여당(與黨) 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過程)에서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의 사면(四面)에 동의(同意)함으로서 많은 논란(論難)이 빚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對)해선 김영삼(金永三) 정부(政府) 이회창(李會昌) , 김대중(金大中) , 이인제(李仁濟) 후보(候補) 등(等) 주요(主要) 대선후보(大選候補) 전부(全部) 전노(前盧) 사면(赦免)을 추진(推進)했으며 당시(當時) 여야(與野) 모두 찬성의사(贊成意思)를 밝혔던 것이라 국민회의로서는 전노(前盧) 사면(赦免)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불가피(不可避)한 측면(側面)이 있었다. [24] [25] [26]

김영삼 대통령(大統領) 본인(本人)이 사면(赦免)은 자신(自身)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强調)하기도 했다.

1998년(年) 제(第)2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는 집권(執權) 반년(半年)만에 치러진 선거(選擧)로, 여당(與黨)이 지방선거(地方選擧)에 승리(勝利)한 첫 사례(事例)이자, DJP연합(聯合)의 위력과시(威力誇示)였다. 국민(國民)회의는 서울을 포함(包含)한 수도권(首都圈) 두 곳과 호남(湖南), 제주(濟州)를 비롯한 6곳에서 승리(勝利)하였고, 자민련 역시(亦是) 충청(忠淸)과 인천(仁川) 4곳에서 승리(勝利)하여 16개(個) 광역단체(廣域團體) 중(中) 10개(個)를 압승(壓勝)했다. 한나라당 역시(亦是) 영남(嶺南)과 강원(江原) 6곳에서 승리(勝利)했지만, 내용(內容) 면(面)에서 서쪽(西쪽) 지역(地域) 전역(全域)을 석권(席卷)한 국민(國民)회의가 압승(壓勝)이었다. 이 시기(時期)가 국민(國民)회의의 전성기(全盛期)였다.

1998년(年) 9월(月) 8일(日)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유용태, 박종우(朴宗雨), 김길환, 송훈석 의원(議員) 등(等)을 영입(迎入)하여 의석수(議席數)를 1백(百)1석(席)으로 늘렸다. 이로써 자민련 52석(席)을 합칠 경우(境遇) 공동여당(共同與黨)은 과반(過半)보다 3석(席) 많은 153석(席)을 보유(保有)하게 됐다. 여대야소(與大野小) 구도(構圖)가 실현(實現)된 것이다. #

김대중 정권(政權)은 집권(執權) 이후(以後) 안정적(安定的)인 국정운영(國政運營)이라는 명분(名分)을 내세워 정계개편(政界改編)을 추진(推進)하였다. 한나라당(한나라黨) 출신(出身) 의원(議員)들을 영입(迎入)하고 이인제(李仁濟) , 이만섭 국민신당 과 합당(合當)하는 방식(方式)을 통해 여대야소(與大野小)를 만들었다. 2000년(年) 16대(代) 총선(總選)을 앞두고 '개혁정당(改革政黨)'의 이미지를 부각(浮刻)시키고, 영남권(嶺南圈)(TK, PK)에서도 의석(議席)을 내는 '전국정당(全國政黨)'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次元)에서 2000년(年) 1월(月) 20일(日), 새로 창당(創黨)한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에 합당(合黨)되는 형식(形式)(흡수합당(吸收合黨))을 통해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과반(過半)에 또다시 실패(失敗)한다.

3. 성향(性向) [편집(編輯)]

3.1. 당명(黨名) [편집(編輯)]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명(黨命)에는 3가지 의미(意味)가 포함(包含)되어 있습니다.
첫째, 국내적(國內的)으로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등(文化等) 모든 분(分)애에 온 국민(國民)이 참여(參與)하는 정치(政治)를 표방(標榜)하며
둘째, 통일(統一)에 주도적(主導的) 역할(役割)을 하는 민족통일(民族統一)의 주도권(主導權)을 가지며
세째, 21세기(世紀)를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처(對處)하고 새시대(時代)를 지향(志向)하는 정당(政黨)이라는 의미(意味)을 지닙니다. 또한 국민(國民)회의는 국민(國民)이 추종(追從)하고 따라가는 정당(政黨)이 아니라 온국민(國民)이 참여(參與)하는 정당(政黨)으로 국민(國民)의 실체(實體)는 중산층(中産層)과 서민(庶民)입니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바로 중산층(中産層)과 서민(庶民)을 위한 중도(中道) 정당(政黨)임을 당명(黨名)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심벌은 새싹, 비둘기가 하나의 나무 형태(形態)로 결합(結合)된 디자인으로 새싹이 나무로 자라나고 나무가 모여 큰 숲을 이루듯이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등(文化等) 모든 분야(分野)의 발전(發展)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비상(飛上)은 우리민족(民族)의 통일(統一)과 번영(繁榮)을 약속(約束)하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지(意志)를 상징(象徵)합니다.
푸른색(푸른色)(새싹)은 국민(國民)에게 희망(希望)을, 녹색(綠色)(비둘기)의 맑고 깨끗한 우리의 환경(環境)을 상징(象徵)함으로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지향(志向)하는 미래사회(未來社會)에 대(對)한 기대(期待)를 표현(表現)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조국광복운동(祖國光復運動)의 정통성(正統性)을 계승(繼承)하고 민주화(民主化)와 통일운동(統一運動)을 선도(先導)해 온 이 나라의 정통민족(正統民族), 민주세력(民主勢力)이 모인 정당(政黨)이다.
우리당은 21세기(世紀) 역사적(歷史的) 대전환기(大轉換期)를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새로운 도약(跳躍)과 번영(繁榮)을 위해서 참여민주주의(參與民主主義)와 공정한 시장경제(市場經濟)를 바탕으로 중도적(中道的) 국민정당(國民政黨)으로 새롭게 출발(出發)한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낡은 정치(政治)를 버리고 새정치(政治)를 추구(追求)한다. 새정치는 참여(參與)의 정치(政治), 통일주도(統一主導)의 정치(政治), 21세기(世紀)의 격변(激變)에 대비(對備)한 정치(政治)이다.
우리당(黨) 이러한 새정치(政治)를 추구(追求)함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參與民主主義)와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를 발전(發展)시키고 안정(安定)속에 개혁(改革)을 실현(實現)한다. 우리당은 국민(國民)의 참여(參與)속에 언제나 국민(國民)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行動)한다. 우리당은 중산층(中産層)에게 안정(安定)을, 서민(庶民)에게 희망(希望)을, 여성(女性)에게 기회(機會)를, 젊은이에게 꿈을 주는 정치(政治)를 실현(實現)할 것이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21세기(世紀)를 앞두고 새정치(政治)를 성취(成就)하고자 하는 온 국민(國民)의 열망(熱望)을 겸허히(謙虛히) 받들어 지혜(智慧)와 역량(力量)을 모아 수평적(水平的) 정권교체(政權交替)를 이룩할 것을 엄숙히 천명(闡明)하면서 1995년(年) 9월(月) 5일(日) 전국대의원대회(全國代議員大會)에서 다음과 같이 강령(綱領)을 채택(採擇)한다.
1. 정(鄭) 치 : 참여(參與)의 정치(政治)
2. 경(經) 제(第) : 중소기업(中小企業) 중심(中心)의 경제(經濟)
3. 사(四) 회(回) : 안정(安定)과 꿈과 희망(希望)의 건강사회(健康社會)
4. 문(門) 화(火) : 문화선진국(文化先進國)의 지향(志向)
5. 교(校) 육(陸) : 지식혁명(知識革命)의 주도(主導)와 전인교육(全人敎育)
6. 환(圜) 경(警) : 자연(自然)과 공존공영(共存共榮)
7. 과학기술(科學技術) : 과학기술전쟁(科學技術戰爭)에서의 승리(勝利)
8. 여(餘) 성(性) : 평등(平等)과 참여(參與)의 보장(保障)
9. 청(靑) 년(年) : 사회(社會)의 공동참여자(共同參與者)
10. 외교안보(外交安保) : 자주협력(協力)의 외교(外交), 안보체제(安保體制)
11. 통 일 : 점진적(漸進的)이고 평화적(平和的)인 민족통일(民族統一)
12. 21세기(世紀) : 도덕적(道德的) 선진국가(先進國家)
*** 중산층(中産層)과 서민(庶民)을 위한 새정치(政治)5대(代) 목표(目標) ***
1. 국민참여(國民參與)의 정치(政治)
2. 중소기업(中小企業) 중심(中心)의 경제(經濟)
3. 안정(安定)과 신명의 사회(社會)
4. 화해(和解)와 협력(協力)속의 통일(統一)
5. 도덕적(道德的) 선진국가(先進國家)
현(現)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의 직계(直系) 정당(政黨)을 논(論)할 때, 사람에 따라서 견해(見解)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大體로) 새정치국민회의부터 직계(直系) 조상(祖上) 내지(乃至) 중시조(中始祖) 라 보는 견해(見解)가 강(剛)하다. 물론(勿論) 1945년(年) 창당(創黨)된 한국민주당 혹은(或은) 1955년(年) 창당(創黨)된 민주당(民主黨) [27] 혹은(或은) 1967년(年) 창당(創黨)된 신민당(新民黨) 혹은(或은) 1987년(年) 창당(創黨)된 평화(平和)민주당 으로 거슬러 가야한다는 주장(主張)도 만만찮지만, 현(現)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대표주자(代表走者)인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스스로가 정당(政黨) 연혁(沿革) 직계(直系)로 새정치국민회의를 표시(表示)하고 있다.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의 성향(性向)이나 구성원(構成員)들의 성향(性向)도 이때부터 확립(確立)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정확히(正確히) 말하면 이때 형성(形成)된 성향(性向)(정치적(政治的) 정체성(正體性))이(李) 이후(以後) 민주당계(系) 정당(政黨)들로 이어지면서 이에 맞는 사람은 들어오고 안 맞는 사람은 나가는 형태(形態)로 인정(認定) 구성원(構成員)의 성향(性向)도 정리(整理)되었다는 이야기. 분명한 것은, 현재(現在)까지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에서 항상(恒常) 등장(登場)하는 "중산층(中産層)과 서민(庶民)"을 지지기반(支持基盤)으로 내세운 강령(綱領)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사실상(事實上) 시초(始初)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8] [29]

무엇보다 정당(政黨) 법인(法人)의 계승(繼承)을 기준(基準)으로 따질 때 새정치국민회의가 가장 오래된 직계(直系) 조상(祖上)이다. 만약(萬若) 새정치국민회의 당원(黨員)이 중간(中間)에 한 번(番)도 탈당(脫黨)하지 않고 당원(黨員) 자격(資格)을 유지(維持)했다면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 민주당(民主黨)(2005년(年)) - 중도통합민주당(中道統合民主黨) - 민주당(民主黨)(2007년(年)) - 통합(統合)민주당(2008년(年)) - 민주당(民主黨)(2008년(年)) - 민주통합당(民主統合黨) - 민주당(民主黨)(2013년(年)) - 새정치민주연합(새政治民主聯合) -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의 계보(系譜)에 따라 2022년(年) 현재(現在)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당원(黨員)에 이르게 된다. [30] 반대(反對)로 평화(平和)민주당 의 당원(黨員)이 중간(中間)에 탈당(脫黨)하지 않고 지금(只今)까지 당적(黨籍)을 유지(維持)했다면 현재(現在) 국민의힘(國民의힘) 당원(黨員) 이다. [31] 평화(平和)민주당 의 후신(後身)인 통합(統合)민주당 신한국당 과 신설합당(新設合黨)되어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되었고 , 이 법인(法人)이 새누리당(새누리黨) 을 거쳐 자유한국당(自由韓國黨) 까지 이어져오다 새로운보수당(保守黨) , 미래(未來)를향한전진4.0 과 신설합당(新設合黨)하여 미래통합당(未來統合黨) 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정치국민회의 는 법적(法的)으로는 통합(統合)민주당 에서 갈라져 나온 분당세력(盆唐勢力) 으로 간주(看做)된다. 계보적(系譜的)으로는 평화(平和)민주당 - 신민주연합당(新民主聯合黨) - 민주당(民主黨)(1991년(年)) -( 동교동계(系) 의 집단(集團) 탈당(脫黨))- 통합(統合)민주당(1995년(年)) -(노무현(盧武鉉) 등(等) 국민통합추진회의(國民統合推進會議)(통추(統推))계열(系列) 탈당(脫黨))- 한나라당(한나라黨) 으로 신설합당(新設合黨). 즉(卽) 정당(政黨) 법인(法人)을 기준(基準)으로 보면 새정치국민회의는 분당(盆唐)/탈당인사(脫黨人士)들이 만든 신규(新規) 정당(政黨)이지만 그 분당(盆唐)/탈당(脫黨) 인사(人士)들이 오히려 주류(主流)/다수파(多數派)이고, 잔류(殘留) 인사(人士)들이 소수파(少數派)인 사례(事例)에 해당(該當)한다. [32] [33]

따라서 민주당계(系) 정당(正當)(대표적(代表的)인 예(例)로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의 계보(系譜)를 평화(平和)민주당까지 소급(溯及)하는 것은 ' 정신적(精神的)인 계승자(繼承者) '라는 식(式)으로 나름의 합리성(合理性)이 있기는 하나, 이론(理論)의 여지(餘地) 없이 직계(直系) 조상(祖上)에 해당(該當)하는 것은 새정치국민회의부터이다. 평화(平和)민주당의 법인적(法人的) 후신(後身)이 한나라당을 따라간 것은 운명(運命)의 장난이라기보다는, 민주화(民主化) 직후(直後) 1990년대(年代)의 한국(韓國) 정치(政治)는 인맥(人脈) 중심(中心)의 계파(系派)에서 이념(理念) 기준(基準)의 정당(政黨)으로 격렬(激烈)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겪었고, 그 결과(結果)가 결국(結局) 범민자당계(汎民自黨界)/범민주당계(系)의 두 정당(政黨)으로 수렴(收斂)되었기에 당(黨)이 쪼개지고 갈라져 다른 정파(政派)로 들어가는 상황(狀況)이 발생(發生)하는 것은 피(避)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김대중+동교동계(系)+이후(以後) 민주당 주류(主流)의 입장(立場)에서는 불운(不運)하게 당권(黨權)이 상대편(相對便)에 있을 때 정파(政派) 재집결(再集結)이 일어났기에 당(黨) 법인(法人)을 두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 뿐.

5. 역대(歷代) 지도부(指導部) [편집(編輯)]

5.1. 총재(總裁) [편집(編輯)]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가로 로고 총재(總裁) 및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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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總裁)
초대(招待)·제(第)2대(代) 총재(總裁)
김대중(金大中)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
초대(招待)·제(第)2대(代)
조세형
제(第)3대(代)
김영배(金永培)
제(第)4대(代)
이만섭

5.2. 원내총무(院內總務) [편집(編輯)]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가로 로고 원내총무(院內總務)

6. 출신(出身) 대통령(大統領) [편집(編輯)]

대한민국 대통령 문장
번(番)
이름
대(臺)
임기(任期)
선출(選出) 방식(方式)
정당(正當)
취임일(就任日)
퇴임일(退任日)
8
Kim Dae-jung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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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1924 ~ 2009)
15
1998년(年) 2월(月) 25일(日)
2003년(年) 2월(月) 24일(日)
1997년(年) 대선(大選)
직선(直線) 40.3%
새정치국민회의 (1998 ~ 00)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2000 ~ 02)
무소속(無所屬) (2002 ~ 03)

7.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편집(編輯)]

7.1.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편집(編輯)]

연도(鳶島)
선거명(選擧名)
후보자(候補者)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결과(結果)
1997년(年)
10,326,275 (40.3%)
당선(當選) [34]

7.2.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편집(編輯)]

연도(鳶島)
선거명(選擧名)
지역구(地域區) (비율(比率))
비례대표(比例代表) (득표율(得票率))
총(總) 의석(議席) (비율(比率))
결과(結果)
1996년(年)
66 / 253 (26.1%)
13 / 46 (25.3%)
79 / 299 (26.4%)
원내(院內) 2당(黨)
15대 전국구 국민회의
제(第)15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국민회의 전국구(全國區) 선거(選擧)포스터 (1996)

7.3. 지방선거(地方選擧) [편집(編輯)]

연도(鳶島)
선거명(選擧名)
광역단체장(廣域團體長) (비율(比率))
기초단체장(基礎團體長) (비율(比率))
광역의원(廣域議員) (비율(比率))
1998년(年)
6 / 16 (37.5%)
84 / 232 (36.2%)
271 / 616 (44.0%)

7.4.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편집(編輯)]

8. 당가(擔架) [편집(編輯)]


당가(擔架)는 1절(節)과 2절(節)로 나눠졌다.
듣기
<1절(節)>
정성(精誠)으로 키운 나무 울창(鬱蒼)한 숲이되듯
겨레의 뜻 한데 모아 민족번영(民族繁榮) 꽃피우고
고난(苦難)의 밤 지새워도 새아침은 밝아오듯
국민(國民)의 슬기모아 일류국가(一流國家) 이룩하세(下世)
우리의 이상(以上) 내일(來日)의 희망(希望) 새 각오(覺悟) 새 물결로
새정치(政治) 새시대(時代) 위한 새정치국민회의
온누리 밝히는 횃불 영원히(永遠히) 타오(打誤)르리(理)

<2절(節)>
너와 나 손맞잡고 하나되어 달려온 길
겨레의 뜻 한데 모아 조국통일(祖國統一) 앞장서세(逝世)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땅에 우뚝서서
자유평등(自由平等) 물결속에 인류평화(人類平和) 이룩하세(下世)
우리의 이상(以上) 내일(來日)의 희망(希望) 새각오(覺悟) 새 물결로
새정치(政治) 새시대(時代) 위한 새정치국민회의
온누리 밝히는 횃불 영원히(永遠히) 타오(打誤)르리(理)
온누리 밝히는 횃불 새정치국민회의

9. 관련(關聯) 문서(文書)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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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民主黨) (1960.8.~1961.5.)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1993.2.~1995.12.) 신한국당 (1995.12.~1997.11.)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2003.2.~2003.9.)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한나라黨) (2008.2.~2012.2.) 새누리당(새누리黨) (2012.2.~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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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構成)
여당(與黨)
연립여당(聯立與黨)
정책(政策) 및 방향(方向)
타임라인
1998년(年)
1999년(年)
전교조(全敎組) 합법화(合法化) · 국가정보원(國家情報院) 출범(出帆) · 한일어업협정(韓日漁業協定) 발효(發效) · 1999 강원(講院) 동계(冬季) 아시안 게임 · 삼례(三禮) 나라슈퍼 강도치사(强盜致死) 사건(事件) · 신지식인(新知識人) · 경북(慶北) 고교생(高校生) 총기탈취(銃器奪取) 난사사건(亂射事件) · 바이코리아 펀드 출시(出市) · 대한항공(大韓航空) 1533편(篇) 활주로(滑走路) 이탈(離脫) 사고(事故) · 국민연금(國民年金) 가입(加入) 의무화(義務化) · 제(第)1연평해전(延坪海戰) · 1999년(年)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 국민연금(國民年金) 의무(義務) 가입(加入) 실시(實施) · BK21 · 대한항공 6316편(篇) 추락(墜落) 사고(事故) · 엘리자베스 2세(歲) 영국(英國) 여왕(女王) 방한(訪韓) · CIH 바이러스 대란(大亂) · MBC 습격(襲擊) 사건(事件) · 대구(大邱) 어린이 황산(黃酸) 테러 사건(事件) · 문화재청(文化財廳) 개청(開廳) · 옷로비 사건(事件) · 제(第)1연평해전(延坪海戰) · 씨랜드 청소년수련원(靑少年修鍊院) 화재사고(火災事故) · 탈옥수(脫獄囚) 신창원 검거(檢擧) · 민주민족혁명당(民主民族革命黨) 사건(事件) · 동티모르 평화유지군(平和維持軍) 파병(派兵) · 인천(仁川) 도시철도(都市鐵道) 1호선(號線) 개통(開通) · 국민(國民)PC 보급(普及) 시작(始作) · 인천(仁川) 인현동 호프집 화재(火災) 참사(慘事) · 대한항공 8509편(篇) 추락(墜落) 사고(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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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휘장(9대-19대)1px 투명제(第)15대(代) 국회(國會)
원내(院內) 구성(構成)
1996.5.30. ~ 2000.5.29.
[ 임기(任期) 개시(開始) ]
신한국당 로고
142석(席)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
79석(席)
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 축약
48석(席)
민주당(1991년) 흰색 로고
8석(席)
재적(在籍)
299석(席)
[ 후반기(後半期) 개시(開始) ]
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
87석(席)
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 축약
49석(席)
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
152석(席)
국민신당 로고 흰색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

8석(席)
재적(在籍)
299석(席)
[ 임기(任期) 종료(終了) ]

[1] 녹색(綠色)은 비둘기, 파랑색(色)은 새싹이며 이를 하나로 합쳐보면 단풍잎(丹楓잎)처럼 보이는 로고이다. 비둘기는 1987년(年) 평화(平和)민주당 창당(創黨) 때도 쓰던 로고였다. 또한 이 정당(政黨)을 끝으로 2012년(年) 민주통합당(民主統合黨) 시절(時節)까지 민주계(系) 파란색(파란色) 계통(系統)은 끊어졌다가 2013년(年) 다시 민주당(民主黨) 으로 당명(黨名)을 변경(變更)하면서 부활(復活)한다. [2] 정확히(正確히)는 해체(解體) 후(後) 일괄(一括) 합류(合流). [3] 당시(當時)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 직함(職銜)은 당대표급(黨代表級) 이었다. [4] 당(黨) 총재직(總裁職)도 겸임(兼任)했는데, 2001년(年)에 당(黨) 총재직(總裁職)이 폐지(廢止)되기 전(前)에는 여당(與黨) 총재(總裁) 직책(職責)은 현직(現職) 대통령(大統領)이 당연직(當然職)으로 겸임(兼任)했었다. [5] 본래(本來)는 임시(臨時)로 새정치회의(政治會議) 라는 약칭(略稱)을 썼었다(예: 당시(當時) 보도(報道)1 / 당시(當時) 보도(報道)2 ). 그랬다가 이후(以後) 약칭(略稱)을 국민회의로 확정(確定)했다. 훗날(後날) 천정배(千正培) 가 이 국민회의 라는 이름으로 신당(新黨)을 창당(創黨)했다가 나중에 안철수(安哲秀) 국민의당(國民의黨) 과 합쳤다. [6] 심지어(甚至於) 연립여당(聯立與黨)인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역시(亦是) 명칭(名稱)이 ~당(糖)으로 끝나지 않았다. [7] 그 외(外) 사례(事例)로 제(第)1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이승만(李承晩)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제(第)20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윤석열(尹錫悅) 국민의힘(國民의힘) 이 있다. [8] 평화(平和)민주당은 서울과 호남(湖南)에 너무 치우친 까닭에 지역(地域) 정당(政黨)이라는 이미지가 짙었다. [9] 보수계(保守系)는 공화계(系)와 민정계(系)가 김종필을 중심(中心)으로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을 창당(創黨)하였고, 민주계(系)는 잔류파(殘留派)가 통합(統合)민주당 으로 남았다. 이들은 각각(各各) 원조보수론(援助保守論)과 선명야당론(鮮明野黨論)을 내세워서 지지(支持)를 얻으려 했다. [10] 통합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한나라黨) 을 창당(創黨)했고, 자민련은 DJP연합(聯合) 으로 연립정부(聯立政府)의 일원(一員)이 된다. [11] 혹은(或은) "예상(豫想) 의석(議席)에서 26석(席)이 늘었다." [12] 임기(任期) 후반(後半)이어도 대통령(大統領)의 지지율(支持率)이 낮은 편(便)은 아니었기 때문에 과반(過半)은 무리(無理)더라도 이 정도(程度) 의석(議席)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勿論) 몇 석(席) 씩은 차이(差異)가 나겠지만.. [13] 이 당시(當時) 국민회의에선 서울 송파구(松坡區) 을 지역구(地域區)에 소설가(小說家) 김진명 을 공천(公薦)한 바 있다. 결과(結果)는 신한국당 맹형규 후보(候補)에게 밀려서 낙선(落選). 해당(該當) 문서(文書) 참조(參照). [14] 자민련도 수도권(首都圈) 여러 곳에 후보(候補)를 내보냈지만, 애초(애初)에 지역기반(地域基盤)이 별로(別로) 없던 지역(地域)이라 득표율(得票率)이 저조(低調)한 관계(關係)로 신한국당이 손해(損害)를 보지는 않았다. [15] 이명박(李明博) 역시(亦是) 신한국당 후보(候補)로 종로구(鍾路區) 에 출마(出馬)했는데,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과 국민(國民)회의 이종찬(李鍾贊) 후보(候補) 간(間) 야권(野圈) 표(票)가 분열(分裂)되는 바람에 손쉽게 당선(當選)된다. 심지어(甚至於) 자민련 후보(候補)로는 김을동(金乙東) 이 출마(出馬)했지만 김을동(金乙東)의 득표율(得票率)은 겨우 6.72%에 불과(不過)해 이쪽이 깎아먹은 표(表)의 수(數)는 적었다. 다만 이명박(李明博)은 선거법(選擧法) 문제(問題)로 연루(連累)되어 1998년(年) 초(初) 형(刑)이 확정(確定)되기 전(前) 의원직(議員職)을 자진사퇴(自進辭退)했다. 김영삼 정권(政權)의 공정선거(公正選擧) 정책(政策)의 시범(示範)타라는 말도 있다. [16] 이는 결국(結局) 16대(代) 대선(大選)이 끝나고 결백(潔白)했음이 하(下)밝혀지게 된다. [17] 97년(年) 당시(當時)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진보정당(進步政黨)이 외면(外面)받고 멸시(蔑視)받는 풍습(風習)이 남아 있었다. 지금(只今)은 NL의 막장짓 만(萬) 빼면... [18] 노무현은 당시(當時) 국민회의 부총재(副總裁)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6"'초(秒)에 등장(登場)한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광고(廣告) 중간(中間)에 나오는 지구본(地球본)은 1999년(年) 지구멸망설(地球滅亡說)을 부정(否定)한 것이라고 한다(...). [19] 선거(選擧) 직전(直前) 해였던 1996년(年)에 공동(共同) 개최(開催)가 결정(決定)된 상태(狀態)였다. [20] 이는 이후(以後) 민주당 대선(大選) 후보(候補)들의 캠페인에서도 충실히(忠實히) 계승(繼承)되는데, 2017년(年)엔 문재인(文在寅) 후보(候補)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大統領)"을, 2022년(年)엔 (낙선(落選)했지만) 이재명(李在明) 후보(候補)가 "위기(危機)에 강(剛)한, 유능(有能)한 경제대통령(經濟大統領)"을 선거(選擧) 구호(口號)로 내건다. 두 사람 모두 선거(選擧) 당시(當時) 자신(自身)의 중앙정치(中央政治), 지방정치(地方政治) 경력(經歷)이 축적(蓄積)됐음을 슬로건을 통해서도 강조(强調)했다는 공통점(共通點)이 있다. 이런 정치언어(政治言語), 프레임에 대(對)한 연구(硏究)는 조지 레이코프 등(等) 언어(言語) 학자(學者)들에 의(依)해 진행(進行) 중(中)이며 한국(韓國)에서도 연구(硏究) 결과(結果)가 논의(論議)되고 있다. [21] 정한용과 함께 등장(登場)하는 인물(人物)은 추미애(秋美愛) 의원(議員)이다. 손숙 이나 김수미 등(等)은 별도(別途) CF에 등장(登場)해 각자(各自)의 역할(役割)을 했다. [22] 사실(事實) 김대중은 평화(平和)민주당 시절(時節)부터 재야인사(在野人士)들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영입(迎入)했다. 그러나, 재야인사(在野人士)들이 어려운 말을 쓰고, 장황(張皇)하게 하면 바로 끊어버리고 "나 같으면 그 걸 10초(秒) 만에 얘기하겠소. 국민(國民)을 대표(代表)하겠단 사람들이 뭐 그리 어려운 말을 쓰시오?"라고 반문(反問)했다고 한다. [23] 전(前)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대표(代表). [24] 전노(前盧) 사면(四面)에 대(對)한 청와대(靑瓦臺) 정치권(政治權) 반응(反應) 1997.12.21 동아일보(東亞日報) [25]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代辯人),국민(國民)들도 이해(理解)·용서(容恕)할 것 [26] 동아일보(東亞日報) 1997.12.23 [27]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이 명시적(明示的)으로 언급(言及)하고 있는 당(黨)의 역사적(歷史的) 시작점(始作點)이 1955년(年) 신익희 가 창당(創黨)한 민주당이다. [28] "확연(確然)하게 두터워진 중산층(中産層)을 잡아야 한다", "중도(中道)까지 지지층(支持層)을 넒혀야 선거(選擧)에서 이긴다"는 정치공학적(政治工學的) 판단(判斷)으로 선거(選擧)의 촛점(焦點)을 중산층(中産層)에 두기 시작(始作)한게 이때부터이다. 당장(當場) 선거(選擧)를 앞두고 과거(過去)라면 기득권층(旣得權層)이라면서 외면(外面)했을 관료(官僚), 군인(軍人), 기업인(企業人), (친기업성향(親企業性向)) 변호사(辯護士) 등(等)을 대거(大擧) 영입(迎入)하면서 인적(人的) 구성(構成)이 바뀌기 시작(始作)했다. 그 이전(以前) 평화(平和)민주당 - 통합(統合)민주당 시절(時節)에는 강령(綱領)도 훨씬 진보적(進步的)이었고, 실제(實際) 노동계(勞動界)나 사회단체(社會團體)와의 연대활동(連帶活動)도 많았다. 젊은 피 수혈(輸血)의 대상(對象)도 학생운동권(學生運動圈), 노동운동가(勞動運動家), 인권변호사(人權辯護士) 일색(一色)이었다. [29] 정확히(正確히) 말하면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구심점(求心點) 역할(役割)을 한 김대중(金大中) 동교동계(系) 의 정치적(政治的) 정체성(正體性) 자체(自體)는 그다지 진보적(進步的)이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자신(自身)은 이념적인 정치인(政治人)이라기보다는 민주화(民主化) 운동(運動) 과정(過程)에서 탄생(誕生)한 '명망가(名望家)' 였고, 김대중의 계파(系派)인 동교동계(系) 역시(亦是) 이 명망가(名望家)를 중심(中心)으로 뭉친 인적(人的) 집단(集團)이지 특별히(特別히) 뚜렷한 이념적 지향점(指向點)을 가진 집단(集團)이었던 것은 아니다. (명망가(名望家) 중심(中心) 정파(政派)답게 이념적 기반(基盤)보다는 인맥(人脈) 기반(基盤)과 지역적(地域的) 기반(基盤)(호남(湖南))이 더 강(强)했다고 볼 수 있다. 영남(嶺南) 출신(出身)의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인사(人士)들이 김영삼의 추천(推薦)을 받아 상도동계(系)로 정치(政治)에 입문(入門)하고, 호남(湖南) 출신(出身)의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인사(人士)들은 김대중의 추천(推薦)을 받아 동교동계(系)로 정치(政治)에 입문(入門)한 것.) 다만 일단(一旦) 김영삼에 비(比)하면 김대중쪽이 상대적(相對的)으로 좀 더 진보적(進步的)인 성향(性向)을 가진 편(便)이었고, 3당(黨) 합당(合黨) 이후(以後) 유일(唯一) 야당(野黨) 포지션으로 고립(孤立)된 평화(平和)민주당 이 거대(巨大) 여당(與黨)에 맞서 세(貰)를 불리기 위해 재야인사(在野人士)들을 영입(迎入)하기 시작(始作)하자 평화(平和)민주당의 '선명(鮮明) 야당(野黨)' 정체성(正體性)에 반응(反應)한 학생운동(學生運動), 노동운동(勞動運動) 및 시민사회운동(市民社會運動) 출신(出身)의 재야인사(在野人士)들이 이에 호응(呼應)함으로써 정당(政黨)의 정체성(正體性)이 진보적(進步的) 영역(領域)으로 확장(擴張)된 것이다. 하지만 6공(共) 초기(初期) 이 정체성(正體性)으로 몇 차례(次例)의 선거(選擧)에 임(臨)했지만 영 재미를 못 보는 일이 거듭 일어나자 이번(이番)에는 반대(反對)로 "중산층(中産層)을 잡고 중도(中道)까지 지지영역(支持領域)을 넓혀야 한다"는 새로운 노선(路線)에 따라 중도(中道) 영역(領域)을 향(向)한 정체성(正體性) 확장(擴張)이 시작(始作)된 것이다. 즉(卽), 김대중계(界) 정치인(政治人)들의 인맥(人脈)에 기반(基盤)한 정치세력(政治勢力)이던 평화(平和)민주당이 여러 차례(次例)의 정체성(正體性) 확장(擴張) 과정(過程)을 거쳐 <온건(穩健) 진보(進步)(중도좌파(中道左派))~중도(中道)(또는 중도우파(中道右派))를 포괄(包括)하는 빅텐트 정당(政黨)>으로 거듭나는 과정(過程)이 대강(大綱) 완성(完成)된 것이 새정치국민회의 시점(時點)이었고, 이때 확립(確立)된 정체성(正體性)이 대강(大江) 2020년(年) 현재(現在)에 이르는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이어진다는 것. [30] 성장현 전(前) 용산구청장(龍山區廳長) 이 이쪽에 해당(該當)되는 대표적(代表的) 케이스. [31] 실제로(實際로) 이중재 의 경우(境遇) 평화(平和)민주당 창당(創黨) 이후(以後) 계속(繼續) 당적(黨籍)을 유지(維持)하였고 한나라당 소속(所屬)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이종구(李鍾九) 도 한나라당에서 3선(選) 의원(議員)을 지냈다. [32] 특히(特히)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이 배출(輩出)한 대통령(大統領) 2명(名)(당시(當時) 정당정치(政黨政治) 경력(經歷)을 시작(始作)하지 않은 문재인(文在寅)은 논외(論外))이(李) 모두 국민(國民)회의의 후신(後身)인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소속(所屬)이라 결과적(結果的)으로는 완벽(完璧)한 주류(主流)일 수 밖에 없다. [33] 유사(類似) 사례(事例)인 열린우리당 은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열린우리당 분당(盆唐) 시기(時期)에는 비슷한 구도(構圖)가 나타났지만, 결국(結局) 2008년(年) 통합(統合)민주당 에서 새천년민주당의 후계(後繼) 정당(政黨)과 열린우리당의 후계(後繼) 정당(政黨)이 다시 합체(合體)하였으므로 이리가건(件) 저리가건 결과적(結果的)으로 새정치국민회의의 정당(政黨) 법인(法人) 승계(承繼)는 2021년(年) 현재(現在)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까지 이어진 것. 노무현(盧武鉉) 탄핵(彈劾) 사태(事態)로 당세(黨勢)가 폭락(暴落)한 민주당(民主黨)(2005년(年)) 이 한나라당(한나라黨)(또는 그 후신(後身) 정당(政黨))으로 합류(合流)하기라도 했으면 결과(結果)까지 비슷한 진짜(眞짜) 유사(類似) 사례(事例)가 되었겠지만, 결국(結局) 민주당계(系) 정당(政黨) 내(內)에서의 이합집산(離合集散)끝에 재통합(再統合)하였으므로 초기(初期) 구도(構圖)의 유사성(類似性)에도 불구(不拘)하고 결과(結果)는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역(逆)으로 보면, 새정치국민회의 이후(以後) '민주당계(系) 정당(正當)'의 정체성(正體性)이 그만큼 명확(明確)해졌기에 심각(深刻)한 내부갈등(內部葛藤)에도 불구(不拘)하고 정당(政黨) 법인(法人)이 민주당계(系) 정당(政黨)의 범위(範圍) 바깥까지 나가는 일은 발생(發生)하지 않게 되었따고 볼 수도 있는 것. [34]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김종필(金鍾泌) 과 선거(選擧) 연대(連帶), 이른바 DJP연합(聯合) . [35] 대표적(代表的)인 DJP 연정(聯政) 의 위력(威力) 과시(誇示) 사례(事例)로 꼽히는데 부산(釜山), 울산(蔚山), 경남(慶南), 대구(大邱), 경북(慶北) , 강원(江原) 등(等) 6개(個) 지역(地域)을 제외(除外)하고는 모두 범여권(汎與圈) 세력(勢力)이었던 국민(國民)회의 + 자민련 ( 대전(大戰) , 충남(忠南) , 충북(忠北) , 인천(仁川) 등(等) 4곳)이(李) 광역자치단체장(廣域自治團體長)에서 승리(勝利)했다. 인구(人口)가 적은 강원(講院)만 승리(勝利)했다면 그야말로 영남(嶺南)을 제외(除外)한 전국(全國)을 석권(席卷)할 뻔 했다. 이 당시(當時) 이루지 못했던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의 지방선거(地方選擧) 석권(席卷)은 2회(回) 지방선거(地方選擧) 이후(以後) 20년(年)이 지난 2018년(年) 제(第)7회(回) 전국동시지방선거(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 이 14곳 승리(勝利)라는 대기록(大記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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